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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而不淫,哀而不傷(낙이불음,애이불상) [樂:즐길낙,락, 而:말이을이, 不:아닐불, 淫:음란할음, 哀:슬플애, 而:말이을이, 不:아닐불, 傷:상처상]
즐거워하나 무절제(無節制)하게 빠지지 않고
슬퍼하나 마음을 상(傷)하게 하지 않음을 뜻한다. 공자가 말하였다. "관저라는 시는, 즐거워하나 방탕하지 않고, 슬퍼하나 상심하지는 않는다[關雎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는 시경(詩經)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편인 '관저'라는 시를 읽고, 이 시에 묘사된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감정에 대하여 모두 도를 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감정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완곡하게 경계하고 있다. * 관저(關雎) : [관(關)]은 새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이고, [저(雎)]는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사는 물새의 한 종류이다. |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우륵의 말이 아니라
제자들이 우륵의 12곡 음악을 처음 듣고 비평했던 말인 '번차음(繁且淫)'이란 용어이다.
번차음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번거롭기만 하고 아정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쓸데없는 가락을 많이 늘어놓았을 뿐, 알맹이는 빈약하다는 말일 것이다. 외화내빈의 요설을 떠올리면 족할 것이다.
우륵의 제자들이 얘기했던 '번차음'하다는 말은
우리네 음악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매서운 일침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가슴'이 아닌 '기교'로 작품을 써 가는 세상이 됐다 치더라도, 우리의 주변에는 내용 없이 허황된 음들의 수식만으로 홍수를 이루고 잇는 음악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도도한 음악의 범람 속에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정서적 아이러니를 모래알 씹듯 반추해야 할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일찍부터 우리에게는 모름지기
'훌륭한 음악이란 간단한 것이고 훌륭한 예절이란 간결한 것(大樂必易 大禮必簡)'이라는 선인들의 기막힌 명언이 있음에도 말이다.
굳이 산전수전 다 겪은 인생의 경륜에서 우러난 말이라서가 아니라
실로 대악필이라는 말은 명언 중의 명언이요,
음악 예술의 요체를 한마디로 압축한 결론 중의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훌륭한 음악의 대명사라고 할 대악필이의 정신에 합당한 음악을 우리 전통 음악에서 찾아본다면 과연 어떤 음악이 제격일까.
모르긴 해도 밑도드리라는 음악을 거론하면 많은 사람들이
'아하 참 그 것이 있었구나'하고 공감을 할 것이다.
그만큼 '밑도드리'라는 음악은 '아름다움과 선함을 다한'고인가 하면 '낙이불음'하고 '애이불상'한 음악이자, 숱한 세월의 풍상에 마모된 간결한 곡선의 바윗돌처럼 육중하면서도 너그럽고, 심오하면서도 부드러운 군자풍의 음악이다. 대악필이라는 말은 이 같은 음악을 두고 한 말이다.
밑도드리는 또한 미환입, 혹은 수연장지곡이라고도 한다.
보허자라는 음악에서 파생된 곡으로서 연주 시간이 7분 정도 걸리는 아정한 음악이다.
쓸데없는 잔가락은 모두 덜어 버리고 요점만 간결하게 짚어 가기 때문에 번차음하지도 않고,
한배 또한 의젓하고도 정중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추호의 경망함이나 흐트러짐이 없다.
여러 가지 요소를 어우르는 균형도 있고 여러 가지 성격을 포용하는 중용지도가 풍긴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예로부터 정악을 익히려면 으레 이 곡을 필수적으로 거치는 것이 통례였다.
말하자면 정악으로 입문하기 위한 기본적인 연습곡이었다.
이 곡을 필수적인 연습곡으로 삼았던 것은 비단 연주상의 테크닉을 위한 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주 기법도 중요하지만 바로 이 밑도드리가 함축한 정악의 분위기,
다시 말해 정악에서 터득해야 할 음악 정신을 체득하기 위한 현명한 배려였음이 분명하다.
밑도드리에 얽힌 이런 일화가 있다.
조선조 말 현종 때 정약대(鄭若大)라는 유명한 대금 연주가가 있었다.
이 당대의 명인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인왕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쉬지 않고 젓대를 불었다.
밑도드리만을 골백번 반복해서 분 것이다.
한 번 불 때마다 모래 한 알을, 신고 온 나막신에 넣었다. 이렇게 해서 나막신에 모래알이 가득해져야 비로소 하산하곤 했다.
신기에 가까운 명인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밑도드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명곡임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그윽한 거문고 소리와 유순한 젓대 음색이 빚어내는 이중주의 밑도드리는 더욱 일품이다.
일찍이 '시경'을 일컬어 한마디로 '사무사(思無邪)'라고 했는데 밑도드리 음악이 펼쳐 내는
단아한 분위기야말로 모든 허세와 속기를 말끔히 씻어주는 진정한 사무사의 경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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