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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4,7-12
형제 여러분,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10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5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8 또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9 그러다가 그것을 찾으면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1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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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믿음이 약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께 속한 사람을 다른 사람이 심판할 수는 없다.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과 산 이들 모두의 주님이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도 심판하지 않으셨다.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 한 마리를 애써 찾듯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보다 죄인 한 사람의 회개를 더 기뻐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형제들을 심판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심판은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이 한 일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일뿐입니다.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님께 가까이 모여 들었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모습을 보며 투덜댑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세리들과 죄인들은 하느님의 일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형제들을 심판하는 자의 모습입니다.사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떠난 이들을 단죄하시면서도, 잃어버린 양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 목장으로 데려오시는 착한 목자에 비유됩니다(예레 23,1-4; 에제 34,11-16 참조). 이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세리와 죄인들은 그 양 떼에 결코 포함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데려온다 해도 이미 그들의 구원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예수님께 투덜거립니다.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야말로 아흔아홉 마리 양 떼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시라는 사실을 되새겨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하시기에 죄인 하나라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께 이끌고자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다고 말씀하십니다.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은전을 되찾은 부인의 비유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회개를 바라고 계시니, 우리 역시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라는 여인의 말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말씀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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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강아지 또는 잃어버린 만 원권 지폐를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도 상당하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 말씀이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된다면, 아마도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이 달라도 너무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보다 의인 아흔아홉 명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생각과 계산법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순전히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공정하신 분이라면 처음부터 의인이었던 이들에게 더 큰 상을 주셔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죄인을 포기할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그를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상하시고 한결같으신 분이십니다.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에 대한 말씀 다음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비유에서 아버지는 착실한 큰아들보다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작은아들 때문에 더 기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큰아들임을 자처하며 하느님의 처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분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마음대로 형제를 평가하고 심판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혀 줍니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는 그 사람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바리사이 출신으로서 그들의 논리와 사고방식에 익숙하던 바오로가, 죄인과 이방인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바꾸는 것이 쉬웠을 리가 없었겠지만, 그는 과감하게 자기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당신 죽음과 부활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그가 인격적으로 뜨겁게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각도 그렇게 바뀌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켜 주고 성장시켜 주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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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에 나오는 은전 한 닢은 통상적으로 당시 근로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또한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수입이 없을 때에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모아 두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부인은 은전 한 닢이라도 무척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가난한 처지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부인이 등불을 켜고 집 안 곳곳을 빗자루로 쓸면서, 은전이 바닥에 부딪쳐 딸그락하는 소리를 내며 나타나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대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은전 아홉 닢이 남아 있으니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한 닢이 그녀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마음은 가난한 부인의 애절한 마음과도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당신께 돌아올 때마다 얼마나 기뻐하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돈을 잃어버린 부인이 등불을 켜고 집 안 곳곳을 빗자루로 쓸면서 은전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를 고대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하늘 위에만 머무르지 않으시고 우리를 애타게 찾아 헤매시며 회개의 통곡을 기다리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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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 15장은 너무나 잘 알려진 세 가지 비유로 짜여 있습니다. ‘되찾은 양, 되찾은 은전, 되찾은 아들’이라는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기뻐한다는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하느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얼마나 간절히 찾고 기다리시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오 늘 복음에서는 첫 번째 비유인 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와 함께 15장 전체의 도입 부분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 도입 부분에 머물러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진심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지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해 예수님을 갈망하는 이들의 자세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오만함은 철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스스로를 의로운 자로 여깁니다. 그들의 교만은 죄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주님과 ‘식탁 공동체’에 함께하지 못할뿐더러 그분과의 메워질 수 없는 간격을 스스로 만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자신들 또한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야 할 나약한 사람임을 깨닫지 못하는 더 큰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모르는 완고한 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하시는 모습에 분노를 느낀 이유는, ‘잃은 양’을 도로 찾거나 영혼의 ‘환자’가 치유되는 것을 보시며 느끼시는 하느님의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가 주님의 자비를 느끼고, 또한 이웃이 그분의 자비를 입은 것을 보며 참된 기쁨을 느끼는 이만이 진정 주님과 한 공동체를 이룹니다.
인자하신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그려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시작하시며 진정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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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부님이 교도소의 교정 사목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 교정 사목을 ‘수인’(囚人) 사목이라 불렀습니다. 어느 날 신부님은 여러 신부님들 앞에서 요즘 교정 사목의 어려움을 하소연합니다. 수인들 수는 갈수록 늘어만 가는데, 그들에 대한 관심도 예전 같지 않고, 교정 사목에 기탁하던 후원금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의 하소연을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죄책감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감옥에 갇혀 지내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가끔씩 기도는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는 그런 죄책감 말입니다.
오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주님께 트집을 잡고 시비를 겁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그러자 주님께서는 ‘되찾은 양’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짐짓 의인인 체, 경건한 체하는 자들에 대한 강한 질책의 말씀입니다.
참목자이신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기쁘게 집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은 주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잘못된 길로 빠져서 엉뚱한 길로 가는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랑과 자비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회개는 주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신 주님께 온몸을 돌려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고 보여 주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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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습 가운데 가장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요? 좀 더 잘 살아 보고 싶고, 좀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은데 늘 자신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요? 사실 아무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빈틈없고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고치기 어려운 결점을 안고 삽니다. 부부의 경우 누구보다 가깝기에 배우자의 결점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배우자가 제발 이것만 고쳤으면 참 좋을 텐데 하는 것이 한둘은 꼭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싸움을 해도 끝까지 고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안고 사는 한두 가지 결점은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나 ‘잃어버린 은전 한 닢’에 대한 비유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잃어버렸다’는 것은 내면의 ‘불완전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안고 사는 내면의 결핍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하신 것처럼 더욱더 완전한 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완전한 나를 찾을 수 있는지요? 그것은 결점을 고치고 결핍을 채워서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한계를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자를 사랑할 때는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아름답게 보다가도, 미운 마음이 들 때는 그 약점 때문에 상대방이 온통 새까맣게 보이는 경우와 똑같습니다. 상대방의 약점도 사랑하는 연습으로 고쳐집니다. 사실은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고쳐지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완전한 숫자인 100을 이루고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인생 여정도, 바로 온전한 사랑을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때 자신도, 상대방도 완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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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양’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목자는 남아 있는 양들에게 변고가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개의치 않습니다. 찾은 뒤에는 꾸중도 하지 않고, 잘못을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목자는 자기 양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입니다.
이렇듯 복음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그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받아들이며 사랑해야’ 주님을 닮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용서하셨는데, 자신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건만, 또 고해성사를 봅니다. 때로는 총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용서받은 죄를 다시 들추어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는지요? 주님께서는 용서하셨는데, 자신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칫 영적 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죄와 연관시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라도 ‘사랑과 연관된 주님’을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밝은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로 끝이 아닙니다. 회개의 활동이 뒤따라야 완결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삶입니다. 그러면 은총이 끌어 줍니다. 뉘우침만 있고 ‘사랑의 활동’이 없었기에,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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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처음으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시작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언제나 은총입니다. 첫 마음만큼 선하고 바른 마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회개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죄를 짓기 이전의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만이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조건입니다. 일상의 삶을 사는 이에겐 ‘처음으로 돌아감’이 가끔은 요구됩니다. 결혼한 부부는 신혼의 느낌을 되살리는 것이고, 직장인은 처음 발령 때의 열정을 되찾는 연습입니다. 오래된 교우라면 세례 때의 그 순수함을 되찾는 노력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계기가 주어집니다. 나무는 봄이 되면 다시 시작합니다. 가을에 나뭇잎을 모두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서운한 일’을 만날 때면 다시 출발하는 계기로 삼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이야기하십니다. 엉뚱한 길로 가는 양은 어떻게 하든 데려오실 것이란 암시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처음 다짐했던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은총을 주십사고. 오늘은 이 기도만을 바쳐야겠습니다.(신은근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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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냥꾼이 사슴을 키웠는데, 사람이 먹는 밥을 먹이고 방에서 재우기도 했습니다. 집 안 그 어디를 뛰어다녀도 사냥꾼은 눈감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슴은 점점 더 우쭐거렸습니다. 나중에는 사냥개에게 발길질도 했습니다. 그래도 개들은 주인 눈치를 슬슬 보며 맞는 시늉을 했습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사고로 죽고, 방 안에서 뒹굴던 사슴은 쫓겨납니다. 사슴은 마침 지나가는 사냥개에게 발길질을 하다 단번에 물려 죽습니다. 사슴은 죽으면서도 왜 자기가 물려 죽는지를 모릅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의 그늘이 짙은 아이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사슴과 비슷합니다. 부모의 지위가 높거나 재물이 많을 경우에 더욱 그러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행에 돈이 있으니까, 전문 기술을 지녔으니까, 미리 마련해 둔 부동산이 많으니까 인생을 쉽게 생각합니다. 삶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참고 희생하며 나누는 것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땅 넓은 줄 모르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은 계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역경도 만나고. 생각지도 않은 파국에 부딪히기도 합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님을 느낍니다. 삶의 진정한 모습에 눈뜨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늘어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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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아니 일제 해방 전만 해도 노인의 위치는 탁월했습니다. 단순히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농업이 주축을 이루던 농경시대에 노인은 씨뿌리는 시기, 비가 오는 방식, 잡풀과 해충을 이겨내는 방법 등,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노인의 위치는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제 시대가 지났습니다. 농경사회가 아닌 것도 있지만, 노인이 이제는 높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지식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선생님도 그다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인터넷 접속만 하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찾을 수가 있으며, 그 안에서 질문을 하면 수많은 답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을 단순히 나이 많은 사람으로 생각할 뿐, 지혜로운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말이 바로 ‘꼰대’이지요. 권위적인 사고를 하는 어른이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입니다. 무슨 말만 해도 ‘꼰대질’을 한다면서 눈을 흘깁니다. 지식만을 추구하다 보니, 어른이나 선생님의 지혜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혜란 시대가 변했어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지혜를 볼 수 있다면 어떨까요? 또한 어른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에만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더 큰 지혜를 간직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지식이 아닌 참 지혜를 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가지고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힘있게 울려 퍼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지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지혜를 전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포기하지 않는 목자처럼, 은전 한 닢을 찾는 어떤 부인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중 누구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하며 당신 곁으로 오는 사람을 그 누구보다도 기쁘게 맞이하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 지혜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벽을 높이 쌓아서 이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명언: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행복을 만들어내고, 어떤 이들은 그들이 떠날 때마다 행복을 만들어낸다(오스카 와일드).
푸른 풀밭으로 돌아간 양(프루텐티우스, ‘매일찬가’ 중에서)
병든 양 한 마리 무리에서 벗어나 우거진 수풀 속에서 헤매며
찔레 가시에 흰 털가죽 찢기고 가시나무 덤불에 여린 몸 찔리는데,
지칠 줄 모르는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
이리 떼 쫓으며 든든한 어깨에 되찾은 양 둘러메고
우리로 데려와 상처를 치료하고 더러워진 몸을 닦아줍니다.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로 데려다주니
그곳에는 날카로운 가시도 찔레 덤불도 없고
가시 돋친 줄기 휘두르는 털북숭이 엉겅퀴도 없지요.
그곳은 드넓은 술 종려나무들 자라고
우거진 풀들은 푸른 잎 숙이고
거울처럼 잔잔한 개울에 제 모습 비치는 월계수
끝도 없이 꽃을 피웁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편에 서 있습니다. 당시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릴 수 없었을 뿐더러, 함께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칙은 ‘죄인들과는 아무것도 같이 해서는 안된다’였습니다. 죄인들과 율법을 거스른 자들은 격리되고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과의 친교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가까이 하시는 것을 넘어 세리와 친구가 되시고, 당신 제자단에까지 포함시키는 모습은, 백번 생각해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 스캔들로 여겼기에 뒤에서 투덜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복음 15장 2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당시 통용되던 관례나 율법마저 어기시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에로의 초대장을 보내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크게 차별화되는 삶의 태도, 자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란 새로움 앞에 활짝 열린 개방성, 긍정적 수용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예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말씀을 자신들의 두 귀로 들었습니다.
들음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믿음은 회개와 용서의 시작입니다. 들음은 믿음 안에 있는 순명과 순명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완성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듣기 위한 적극성, 믿기 위한 겸손과 단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당대 첫째 가는 신앙인, 선별되고 선택받은 부류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새로운 질서이신 예수님에 대한 열린 마음이 부족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물론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등돌린 죄인을 찾아나서시는 예수님, 상처투성이의 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는 예수님, 죄인의 회개를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는 예수님, 이런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설레고 행복한 일인지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이 회개하기 전에는 결코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죄인이 악습을 끊고, 보속을 이행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죄인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지니고 계심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죄인을 찾아나서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래 전부터 두 팔 활짝 펼치시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살 수 없다면 회개한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 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나무를 찾아 피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나무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숫가에 떠있었던 낡은 배 한척이 그들을 향해서 떠내려 오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구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입니다.
[출처: ‘도우시는 주님’, 믿음의 문학, 다음 카페]
오늘 복음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나 잃어버린 은전과 같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주인이 찾으러오지 않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잃어버린 은전도 마찬가지로 주인이 찾아주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게 됩니다.
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주인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 집에 모시고는 싶어 하지만 오시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그대로 둡니다. 광야에 둔다는 말씀은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목자가 양들을 포기하면 그 양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은 은전 아홉 닢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포기하십니다. 그들이 결국 그분을 바라지 않아 그러기를 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셔서 그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아버지 집으로 향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은 나를 당신 어깨에 메고 대신 살아주십니다. 그러니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기도를 하고 사는 사람과 기도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과의 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정원씨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기 위해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가 아니면 용서를 할 수 없고 용서를 할 수 없다면 지옥행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이 회개한 사람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신앙생활하면 실제로 나의 삶에서 예수님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정책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미국 국민은 선거를 통해서 정당을 선택했습니다. 하나의 정당만 있으면 좋은 점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미국이 두 개의 정당이 서로 경쟁하는 제도를 유지하는 건, 더 좋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방, 외교, 복지, 이민, 경제, 난민, 종교에 대한 정책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정책의 최종 목표와 목적은 미국 국민을 위한 것입니다. 국민이 정당을 선택하고, 정권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도 여당과 야당이 있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아 정권을 위임받은 당은 여당으로 부릅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여당을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국민의 선택을 받도록 노력하는 당은 야당으로 부릅니다. 야당이 없는 여당은 편할 것 같습니다. 반대하는 의견도 없고, 견제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당이 없는 여당은 자칫 독선과 독재로 흐를 수 있습니다. 여당은 야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선명한 정책으로, 국민을 위한 국정을 수행해야 합니다. 야당은 비판과 견제는 하면서도, 더 나은 정책과 비전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정당이 있는 국가는 부정과 부패가 적을 겁니다. 이런 정당은 깨어 있는 국민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당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건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책을 가질 때입니다. 깨어 있는 국민이 정당의 독주와 독선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다양한 문화와 사상과 제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소통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파, 아폴로파, 바오로파로 나뉘기도 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고,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생각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불러온 점도 있겠지만,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장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교회, 제도, 신학, 교리, 전통, 역사’는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걸 아우르는 것은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는 목자의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굶주린 이를 먼저 선택하려는 연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함께 하는 고마운 믿음의 벗님들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자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하나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양들이 있습니다.
제 자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이.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섭니다.
백분의 일이 아닌 온전히 하나인 양을.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제자리에 있기에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냐 한 마리냐,
숫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 둘 셋 넷 … 마지막 백 마리까지
하나하나 모두가 똑같이 소중합니다.
모두가 제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고
어떤 이유가 되었던 제자리를 떠나
헤매는 양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을 찾은
목자는 기쁨에 넘칩니다.
이 기쁨에는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양들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습니다.
이 고마움
흔히 잊히곤 합니다.
양들이 제자리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결코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흔 아홉 마리 양들이 제자리에 없다면
혹시 잠시 시선을 돌리면
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 걱정이 된다면
어찌 이 양들을 놔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설 수 있겠습니까?
고마워해야할 양들이 있는
목자는 행복합니다.
아흔 아홉 마리가 길을 잃고 헤맨다 해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마리의 양이 있는
목자는 행복합니다.
그 한 마리의 양이 있기에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단 몇 마리의 양이라도
찾아 나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 안에서
과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믿음의 벗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믿음의 벗들은
과연 얼마만큼 될까요?
길 잃고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믿음의 벗들은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믿음의 벗들은
과연 얼마만큼 될까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벗들보다
그렇지 않은 벗들이 훨씬 많지 않은지요.
안타깝게도 말입니다.
예수님 닮은 착한 목자가 되고 싶기에
오늘도 끊임없이 길 잃은 벗들을 찾아 나섭니다.
몸은 온전히 따라가지 못해도
마음만은, 시선만은 언제나
길 잃고 헤매는 믿음의 벗들을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믿음의 벗들을 향합니다.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벗들이 있기에
걱정 없이, 두려움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향기 내면서
세상의 빛과 누룩이 되신 믿음의 벗님들이여!
묵묵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믿음의 벗님들이여!
길 잃은 벗을 다시 찾을 때의 기쁨은
바로 벗님들의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묵묵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벗님들이여!
많은 순간 고마워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했으니까요.
그만큼 벗님들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했다는 뜻으로
너그럽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합시다.
지금도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는
하나하나 소중한 믿음의 벗들을 찾아 나섭시다.
자신이 길을 잃은 지도 모르는 벗들에게
참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길을 보여줍시다.
함께 하는 고마운 믿음의 벗님들이여!
그대들이 있기에
결코 외롭지 않고
결코 절망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에서도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이 있기에
언제 어디에서도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사제입니다.
하느님가족 되면 지구평화 옵니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자격지심에 서민들을 외면 괄시했습니다.
예수님께로 죄인들과 세리들이 몰려든다며 질투와 시기심 일어났지요.
죄인이나 세리들외 서민들을 업신여기며 자기들만은 선택자라 했지요.
예수님을 죄인 반란 먹보 심지어 사기꾼으로 몰려는 조작에 몰두했죠.
잘났다는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말만이 옳다며 권력조직 유지욕심이고.
오류나 잘못 진리로 둔갑시켜 대중을 오류에 물들여 자기미화 하지요.
나쁜 지도자가 혹시 진리 따라 하느님가족 되면 하늘과 세상 기쁘죠!
인생 깨친 몇 명이라도 하느님가족 되면 지구평화 그만큼 넓혀지겠죠
착한목자
곽승룡 비오 신부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 백성의 유일한 참 목자로 소개된다.(요한 10장) 에제키엘 34장은 이스라엘의 목자, 좋은 목자, 목자(심판자), 미래의 왕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목동들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목동들은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첫 증인들이다. 공생활에서 예수께서는 백성을 향해 자비의 설교자로서 활동을 시작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이기 때문이다.(마태 9, 36)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린 양들로서 교회의 이미지인데, 착한목자 예수께서는 늑대로부터 그의 양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을 알고 계신다.(마태 10, 16)
결국 세기의 종말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최후의 심판 때 양과 염소로 갈라질 것이다.(마태25, 3)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양과 목자 사이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통해 예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어린양이지만, 그 어린양이 바로 목자가 될 것이다.(묵시 7, 17)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것에 대해 투덜거리자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잃었던 양의 비유와 잃엏던 은전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자신의 양들 구십 구마리를 놔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자본주의적인 수개념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행여나 한마리 양을 찾으려다 다른 양들마저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한마리의 양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의 하염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착한 목자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 혹시나 잃어버린 양 한마리와도 같은 사람은 없는지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착한 목자가 한마리 양도 제외됨 없이 사랑하듯이 그러한 사랑으로 모든이에게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의식의 전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격유형은 타고 난다. 변하지 않는다. 이는 기후와도 같아서 비교적 일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행동방식이 수시로 달라질 수 있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성격유형이 잘못 태어난 것이 아니라 윗자리에 있다보니 살아오면서 습득된 행동방식이 남을 얕보는 부정적 사고로 고정되고 고착되어 버렸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15,1) 구원을 향한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그 모습을 바라다 본다는 것 자체가 구역질이 났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루카15,2).
율사와 바리사이들이 본래 투덜거릴 사람들이 아닌데 높은 자리에서 살아오다 보니 낮은 사람들에 관한 행동방식이 부정적이 습득 되어버렸다. 그들 일상이 이랬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고 비난하고 설교하는데 선수가 된 것이다. 그렇게 습득된 행동방식은 생각부터가 삐딱했다. 수준이하의 사람들을 본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구원에 관해서는 자기들만 고고한 척 나머지 사람들의 구원은 그들 생각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어떤 행동을 꺼내겠는가?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수준이하 사람들을 털끝만큼도 존중해줄 의사가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양 백마리, 그중에 잃어버린 양 한마리, 그들에게 한마리 정도는 의미없다고 단정한다. 잃은 양을 찾고 기뻐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 마음에 전혀 없다. 나는 혹시 그 부류의 부정적 행동방식으로 고착된 사람은 아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모두가 예수님의 기뻐하시는 행동방식을 닮았으면 한다.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영혼은 수하의 사람을 끊임없이 사랑한다.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투덜거린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비우고 우리처럼 되시어 인간의 남루함을 입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에게 비유들을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크나큰 인내를 보이고 있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목자의 인내이다.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 마리쯤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분의 양 어깨는 십자가의 두 팔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얹어 놓았다.
길 잃고 헤매지 않는 이들을 남겨 두고, 착한 목자는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돌아오면 그분은 등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우리를 자기 어깨에 태우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안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 그 은전은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그 은전은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것이기에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입은 존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타락하여 길을 잃은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그분의 모습을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전이다. 그러니 그 값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녀들이다. 그러니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부인은 등불을 밝혔다. 길 잃은 자들이 그 불빛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다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기뻐하겠는가? 그 때 사람들은 방랑과 타락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이시다. 우리는 그의 재산 중 백분의 일이다. 그분에게는 산에 남겨둔 양 떼, 곧 대천사들과 권세들, 권력들, 주권들(콜로 1,16)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했다. 우리의 회개가 하늘의 천사들을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정직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회개와 돌아옴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 7)
(There will be so much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repenting, than over the ninety-nine just, who do not need to repent.)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루카 15, 1~10)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 7)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께 와서 말씀을 듣는 광경을 보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루카 15, 2)하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길 잃은 양 한 마리" 비유를 드신 것이죠.
어떤 사람이 양 100마리를 갖고 있을 때, 양 한마리를 잃었다면 아흔아홉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지 않겠느냐? 그래서 그 잃었던 양을 찾으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루카 15, 4~6)
그리고 또 다른 비유는 어떤 여자가 은전 열 닢을 갖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어버렸다면, 그 잃어버린 은 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은전을 찾으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루카 15, 8~9)
이와 같이 하늘나라에서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한다면, 그렇게 기뻐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들보다도,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큰 기쁨이 될 것이며, 잃어버리지 않은 은전들보다 잃어버렸던 은전 한 닢을 찾는 것이 더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야 할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회개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사회적으로 큰 기쁨이지만 특별히 가정에서도 그러합니다. 가령 형제들이 여럿이 있을 때, 방황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던 형제가 회개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면 얼마나 그 기쁨이 크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인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평상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축복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죄짓고 방황하고 사람 구실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피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이 회개해서 올바른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을 보는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들은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회개는 모든 인류에게 적용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올바른 길로 돌아온다면 하느님께 기쁨이 되고 또 우리 사회에도 큰 기쁨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속한 가정에는 말할 것도 없지요.
이같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느님의 길로 돌아서 결국은 의인들과 함께 살게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처럼 그들과는 상종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죄인시하면서 돌보아주지는 않는 그런 태도보다는 예수님처럼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이 좋은 길로 가도록 일깨워주고 기도해주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보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나의 형제들 중에 그릇된 길에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형제가 있다면 나의 기쁨은 어떠합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원기소'(루카 15장 1~10)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때문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어린시절 원기소라는 영양제는 달달하고 고소해서 한알 두알 또 먹고 싶었죠.
엄마는 자식들 손이 닿지 않게 선반위에 올려놓고 한번씩 꺼내 주셨는데 엄마가 나간사이 의자를 놓고 올라가 까치발을 들고 내리다 원기소가 다 쏟아졌습니다.
방바닥에 흩어진 원기소를 주워 담으며 심장이 쿵쾅!
하나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찾고 또 찾아 통에 넣고 몇알은 주워 먹었는데 맛이 없고 썼던 생각이 납니다.
죄는 내 몸 전체를 좀 먹고 감추는 습성을 지니고 있어 아무도 보지 않았다고 여기지만 자신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죄를 씻는 회개는 덮었던 포장을 찟어버리고 묶인 끈을 풀며 본 모습을 찾게 합니다.
예수님이 자녀가 죄때문에 불안하게 사는것을 원치 않으시고 당당하게 웃으며 사는것을 원하십니다.
'솔직히 고백하니 맘이 편합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형제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로마인들을 나무랍니다.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형제를 죄인이라고 하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바오로 사도는 죄인을 형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형제를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죄인을 형제라고 하는 사람인가?
몇 년 전 저는 저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심각하게 반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형제를 죄인으로 만들어놓고는 용서하려고 애를 썼고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는 사랑하려고 애를 썼구나!
오늘도 같은 반성을 하며 결심을 합니다.
형제를 죄인으로 만들고 용서하려는 괜한 애를 쓰지 말자!
형제에게 욕심을 부려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그대로 사랑을 하자!
가난 중의 가난은 형제에 대한 가난입니다.
형제를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욕심을 버리는 가난 말입니다.
그가 최선이기를 바라지 말고, 최선이 아닌 그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십시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1-7)”
1)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것은, ‘모든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양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든지 의인이든지 간에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그들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자들이었고, 이웃에 대한 사랑은 실천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생활입니다(1코린 13,1-3).
그래서 사랑 없이 율법만 잘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 실천을 제대로 하려면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2)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것은 사람들의 과거는 보지 않으시고 현재의 회개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현재는 보지 않고 과거만 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 때에 ‘회개한 사람의 과거’는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지워져서 보이지 않는 과거를 심판할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태도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 때에 과거의 모든 일이 다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일들까지, 아주 작은 일들까지.
3)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잃은 양’은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죄인들’은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찾아오셨고,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것은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도 죄인들이고, ‘잃은 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죄입니다. (강론을 하는 이들이 ‘되찾은 양의 비유’에 대해서 강론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을 사랑으로 받아 주어야 한다.” 같은 말을 하면서 ‘잃은 양’을 ‘그들’이라고 표현하고, 그러면서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강론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나온 강론입니다. 여기서 ‘우리’와 구분되는 ‘그들’은 없습니다. 그냥 다 ‘우리’입니다.)
4)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은 없습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의인’은 ‘이미 회개한 죄인’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회개한 죄인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 나오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이라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 이미 회개해서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의인들. 그런 경우라면 광야에 놓아둔 채 목자가 떠나 있어도 잃은 양이 되지는 않습니다.
(2) 자기 마음대로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칭 의인들. 그런 경우라면 그냥 ‘잃은 양들’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같은 ‘자칭 의인들’도 ‘잃은 양’이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칭 의인들’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5) ‘잃은 양’이 모두 ‘되찾은 양’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양’을 찾으시는 분이지만, 그러나 자기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들, 목자에게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양들, 또는 목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양들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양들은 ‘되찾은 양’이 되지 못합니다. (냉담자들 가운데에는 자기가 냉담 중이라는 것이 무슨 특권인 것처럼 교회가, 또는 사목자가 자기를 찾아와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태도는 교만이고, 교만한 상태로는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말하는 ‘잃은 양’은 목자를 애타게 찾는 양이고, 목자에게로 돌아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양입니다.
그런데 ‘잃은 양’을 발견한 다음에 목자가 그 양을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양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따라갑니다. 그냥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크게 기뻐하면서 따라갑니다.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에 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잃었던 기쁨을 되찾는 일이 회개입니다. 만일에 고해성사를 보아도 기쁨이 회복되지 않고, 생활에 변화도 없고, 고해성사 보기 전과 후에 다른 점이 없다면, 그것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고 형식적으로 고해성사를 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의 ‘큰 기쁨’을 강조하신 것은 양을 잃었을 때의 ‘큰 슬픔’을 강조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 기쁨과 슬픔은 양 자신의 기쁨과 슬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만일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목자이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표시이고, 그런 때에는 예수님에게로 더욱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저절로 기쁨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기쁨, -회개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지난 주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중 한 구절에 공감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길이 회개에로 이끈다(The merciful gaze of Jesus leads to conversion).” 눈빛은, 눈길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백마디 말보다 사랑이 가득 담긴 그윽하고 깊은 눈길이 말없이 죄인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끕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의 삶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도 회개 하나뿐입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자조적인 말도 있습니다만, 회개는 이와 완전히 다릅니다. 끊임없는 참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의 존엄한 품위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힘든 평생 일이 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평생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면서 사람이 되는 것이니 평생공부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회개 없이는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폐인이, 광인이, 괴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존엄한 품위의 성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 과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예수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이며 이는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다윗같은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솔로몬 같은 부패한 성인은 없다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효소酵素와도 같은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썩어가는 부패인생을 향기로운 발효인생으로 바꿔줍니다.
사실 하느님 없이는 회개도 겸손도 없고 참 나를 알 길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 바로 회개의 여정이자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하여 ‘하느님을 찾는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유독히 강조하는 우리 수도승의 삶입니다.
무지보다 치명적 마음의 병도 없습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도 모르는 무지에서 파생되는 탐욕, 교만, 어리석음, 무시, 분노등 모든 악덕들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에 대한 결정적 답은 회개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회개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평생 끊임없이 회개해야 하는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찾는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찾는 회개의 삶이요,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을 찾는 하느님’이십니다. 누구보다 죄인들을 찾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관심사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입니다. 사실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가 참 은혜롭습니다. 양 백 마리가, 은전 열 닢이 공동체를 상정하고 있으며 잃은 양, 잃은 은전 하나를 끝까지 집요하게 찾아나선 이는 바로 공동체의 중심이신 하느님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바로 다음 말씀은 그대로 잃었던 형제를 찾았을 때 그 기쁨에 동참해달라는 하느님의, 예수님의 환호처럼 들립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누구나의 가능성이 잃은 양이요, 잃은 은전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을 향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이들은 주님과 함께 잃은 형제들을 찾아 나설 것이며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가 아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잃은 양처럼 하느님을, 자기를 잃고 잊고 무지의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지요! 다음 예수님의 복음 말씀 역시 그대로 회개하는 죄인으로 인한 하느님의 기뻐하는 마음을 반영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바오로의 로마서 제1독서 말씀에서처럼,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의 교만한 사람들이 형제를 무시하시거나 업신 여길뿐,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한 사람은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참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것입니다. 진정 회개한 이들은 바오로 사도의 제1독서 로마서의 고백에서 처럼 모두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공동운명체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이뤄지는 주님을 위한 삶, 주님과 일치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온유와 겸손, 지혜와 자비의 덕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아이를 잃어버려서 전단지를 돌리며 아이의 행방을 찾으려는 부모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으셨습니까? 아이들은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없어진다고들 합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도 마음이겠거니와 나중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홀로 장성한 아이들의 마음도 정말 안쓰럽습니다. 부모와 함께 놀이터에서 놀다가, 기차 타고 가다가 장난삼아 발을 내딛다가, 잠시 잠깐 부모의 손을 놓은 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로 접어들은 뒤 가시밭길 같은 인생사를 살아온 이들의 아픔을 듣곤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실종된 어린이들과 그 부모와 가족들의 아픔을 덜어주십사고 주님께 청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카 15,7.10)
잃어버린 아이들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도 잠시 잠깐 한눈을 팔며 주님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잠깐이 아니라 한 번 멀어져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이들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죄도 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십니다!”라고 하신 바 있습니다. 어떤 때 우리 마음을 엄밀하게 되돌아보면, 고해성사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저지른 죄에서 오는 순간의 기쁨과 이익을 포기하기 싫어서 성당에 못 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회개의 기쁨을 알기는 하지만 회개하여 새롭게 살기보다는 지금 이대로 적당히 죄짓고 살면서 누리게 되는 현재에 대한 미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백 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지 않느냐?”(4절)하시며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은전 열 닢 중에 한 닢을 잃어버리고 나서 “등불을 켜고 집 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8절)하시며 우리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시며 여러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자극하시는 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우리를 찾고 우리를 품어 안으시며 기뻐하시는 주 하느님과 함께 평화의 기쁨을 얻도록 합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15,7)
'하느님의 기쁨!'
김성민
하느님의 기쁨은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모두가 함께 구원으로 초대되어지는 것입니다.
모두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이유이며, 땀을 흘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입니다.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시면서 음식을 드신 이유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사제의 손을 통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인 아흔아홉 때문에도 기뻐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의 구원을 위해 애쓰시는 하느님!
그렇다면 교회와 수도회는 얼마나 모두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얼마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의인,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회개하는 죄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이다."(로마14,12)
모두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죄!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
회개하는 죄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은 죄!
하느님 행세를 하면서 너를 심판하고 업신여긴 죄!
조금 후에 내가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야 할 죄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처럼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고, 자비로우신 주님께로 돌아가려고 노력하는 죄인 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강론 준비'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최신 뉴스를 전하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 예배, 형제애와 봉사의 노력 등을 촉구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좀 더 힘차게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어떤 사실이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있습니다. 사람들이 직접 물어보지는 않더라도, 강론에서 현실에 대한 해설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155항)
하나가 없으면 완성되지 않은 다.<루카,15/1-10.>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물이 99도 까지 열을 가해도 1도가 없어 100도가 되지 읺으면 물이 끓지 못합니다. 100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1원이 없으면 할수 없습니다.
한 마리 잃은 양을찾으려 99마리를 버려두고 하셨지만 그 한 마리 양을 잃으면 전체가 무너져 버리니 한 마리양은 전체를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양입니다.
은전 한 닢을 잃은 부인이 등불을 커셔 온 방을 찾아 얻게 된다는 말씀도 혹시 99마리 양이 있는데 또는 은전 9개가 남았는데 하고 잃은 것을 찾지 않으면 남은 것도 하나하나 소흘이 다르면 전부를 잃어버립니다.
아무리 큰 에두벌룸도 바눌구멍 하나면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긴 다리를 이어주는 것도 한날의 줄 하나가 없으면 연결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완성되려면 하나가 중요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너 같은 것 하나없어도 일당백이라고 하면 똑똑한 사람들만 있으면 다 된다하고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을 소홀리 대하고 있으나 없으나 괸계 없다고 무시하거나 거절하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9명 있어도 바로 그 부족하게 느끼는 한 사람으로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우리 한 무리를 형성하려할 때 나와 같은 생각 이상 일만 주장한다면 다양성 안에 일치의 아름다움을 형성하지 못합니다.
한 가정에 남아선호사상으로 아들만 좋아하고 딸을 무시하면 성가정을 이루지 못합니다.
교회나 수도 공동체가 박사 똑똑한 사람만 선호하면 서로 자기 잘란 척만 하고 갈등만 있고 진장한 화합은 없습니다. 우리집에 나 같은 공부 못한 사람도 있고 늙은 사람도 있어 다른 이 모양 큰일은 뭇해도 한쪽에서 큰뚝의 작은 구멍을 막고 있으므로 공동체가 안전할 수 있습니다. 저수지를 지나던 어린 학생이 저수지에서 작은 구멍에서 물이 흐르는 거을 보고 밤새도록 막아 큰 변을 면했다는 이여기도 있습니다.
병석에 누어있는 환자도 있어야 합니다. 병에 대한 조심성 병지를 돌보며 애덕을 실천하고 가난한자를 돌보는 행위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9가지 덕을 가지고 있어도 한 가지 덕이 없으면 완덕의 길을 간다고 할 수없습니다. 가장 필요한 한 가지 덕은 사랑입니다. 믿음 희망의 덕이 있어도 사랑의 덕이 없으면 하느님과 일치가 불가능 합니다. 믿기만 해도 안되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또한 잃은 것을 찾는 것도 주요하지만 버려야 할 것 하나를 잡고 있으면 완전하지 못하고 순간을 사는 우리는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다 좋은데 미움 원망 상처를 하나를 버리지 않으면 온몸이 아프고 우울하고 찌끄리고 온전한 인격자로 살지 못하고 열등 의식 자기 비하 절망 중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모잘 것 없는 것 하나 버려진 것 하나 잃어버린 하나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한 삶을 하나를 체우므로 완전한 자로 살고 참 행복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어떤 사업을 운영하기 위해 투자한 금액에 비해 더 많은 수익을 얻었을 때 우리는 ‘흑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적자일까요? 아니면 흑자일까요? 김국환이 부른 <타타타>라는 가요 가사에 그 힌트가 숨어있습니다. “산다는건 좋은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이 세상에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생명’을 거저 받고 세상에 태어났지요. 또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던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추하고 허름해도 내가 생활하는 집이 있고, 비싼 명품은 아니더라도 날씨와 기온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이 있으며, 산해진미는 아니더라도 배고픔을 달래주는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또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이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가르쳐준 선생님들이 있으며, 슬프고 괴로울 때 옆에서 힘을 주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그저 ‘흑자’인 정도가 아니라 ‘대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각자가 받고 누린 수많은 것들을 생각하면 세상엔 감사할 일 뿐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여행을 온 것 뿐입니다. 우리는 보통 여행지에 가면 멋진 경치를 구경하고 좋은 추억을 남기고 오는데에만 집중하지,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내 소유로 만들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또한 여행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손해’를 봤다고 아까워하지도 않습니다. 머물러 있는 동안 충분히 누리다가, 시간이 되면 주저없이 털어버리고 내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행지에서는 그렇게도 ‘쿨’하던 우리가, 각자의 삶의 자리로만 돌아오면 ‘돈’에 과할 정도로 많은 신경을 쓰고, 이익과 손해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스스로를 괴롭힙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또 슬픈 모습입니다.
혹자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드신 비유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대체 모르겠다고 합니다. 당신 곁에 머무르며 착실히 살아가는 아흔 아홉이 있는데도, 굳이 제 고집에 따라 가고 싶은데로 가버린 하나를 찾겠다고 동분서주하시는 모습이 ‘비효율적’이라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신이 그 ‘하나’를 찾는데에 집중하시는 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던 것도 서러운데, 우리보다 그 ‘하나’ 때문에 더 기뻐하신다고 하니, 그 녀석만 차별대우 하시는 ‘비경제적’인 모습이 속상하고 화가난다고 합니다. 그런 하느님과 나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도저히 같이 못있겠다며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흔 아홉’을 갖고 있다면 죽을 때까지 그것으로 만족하며 더 가지려고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지요. 어떻게든 ‘하나’를 더 얻어 ‘백’을 채운다면 참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을 가지고 싶어질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과 우리는 ‘방향성’에 있어서 서로 다릅니다. 즉, 우리는 내 것을 채울 때에 ‘더 많이’를 추구하는 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심에 있어서 ‘더 많이’를 추구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의 은총을 받기를 바라시고, 더 많은 사람이 당신 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이타적 방향성’ 덕에 우리는 그분 곁에 있을 때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이 기뻐하실 때 나도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만,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이 나에게서 기쁨을 뺏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기쁨을 더하는 일이 되어야만, 그분과 함께 지내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내 찾아내시는 분
김현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신부님
예수님은 지금 ‘투덜거리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계십니다. 이 장면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 곁에도 따라다니는 듯 그들은 항상 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도 그들에게 둘러싸여 계셨었지.’ 하고 떠올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방식을 선택합시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자주 죄인과 세리들과 섞여 존재하시니 그게 영 못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어째서 당신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는지를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투덜거리느라 바빠서 말씀을 잘 듣고 새겼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투덜거릴 일이 아닙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목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끝내 찾아내고야 마는 사람입니다. 어두운 곳에 웅크린 영혼을 찾으러 나서는 사람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같이 찾아봅시다. 투덜거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살펴보십니다. 자유를 주기 위해 찾으시니 어두운 면도 보실 수 있게 해드립시다. 그리고 오랜만에 화해의 성사 앞으로 나아갑시다. 고해소를 나서면서 ‘본래의 내 모습을 찾았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하고 하늘나라 천사들에게 손 흔들며 꼭 인사 나누시고요.
신경에 대해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5, De fide et symbolo, 12-13: PG 33,519-523)
여러분이 배워 고백하는 신앙은 다만 지금 교회가 넘겨주는 신앙뿐이어야 합니다. 성서의 모든 권위가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읽을 줄 몰라서 그러하고 또 어떤 이들은 너무 분주해서 그러합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한 무지로 인해 멸망하는 영혼이 없도록 우리는 신경의 짧은 말씀에서 신앙의 모든 교리를 집약하여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이 신앙을 전 생애를 통해 나그네 양식처럼 가지고 다니기를 명하는 바입니다. 이 신앙 외에는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도 생각이 바뀌어 지금 가르치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가르친다 해도 더 나아가 악의 천사가 빛의 천사로 둔갑하여 여러분을 오류에 빠지도록 한다 해도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방금 들으신 신경의 말씀을 기억에 새기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적당한 때에 성서와 비교하여 조목 하나하나의 기본적인 뜻을 깨닫도록 하십시오. 이 신앙의 요체는 인간의 기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서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취하여 구성한 것으로서 신앙의 유일한 가르침을 이룹니다. 겨자씨가 그 조그마한 한 알 속에 많은 가지들을 담고 있는 것처럼, 이 신경도 그 짧은 말 속에 구약과 신약 성서에 담겨 있는 모든 계시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지금 전해 받은 이 성전을 간직하도록 하고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다 새겨 두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한가한 상태에 있을 때 원수가 그것을 빼앗는 일이 없고 또 이단자들이 여러분이 전해 받은 진리를 왜곡시키게 하는 일이 없도록 그것을 충실히 보존하십시오. 우리가 여러분에게 신앙을 주는 것은 마치 여러분에게 돈을 투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대출하신 이 투자액에 대한 결산서를 여러분에게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와 본티오 빌라도에게 당당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명령하니, 여러분은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넘겨주는 이 신앙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은 불멸의 보화를 전해 받았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그분은 여러분에게 그 결산서를 요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정하신 때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복되신 주권자이시며 왕 중의 왕이시고 군주 중의 군주이십니다. 그분은 홀로 불멸하시고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며 사람이 일찍이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께 영광과 영예와 권세가 영원히.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에서는 "기쁨"이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 차원의 기쁨이 아닙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루카 15,1).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인이라 무시하고 손가락질하는 이들이 지금 예수님을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로 말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길 원합니다. 사랑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서 말씀이신 주님을 만나 들으려 하는 몸짓에는 그분과의 일치를 갈망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 행위, 지향, 방향성 자체가 그들을 정화한다는 사실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놓치고 있지요.
세리와 죄인들을 맞아들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투덜대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중 두 개의 비유가 등장하지요.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한 마리를 잃으면"(루카 15,4).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루카 15,8).
무언가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 사람이면 이들의 심정을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그 잃은 존재가,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나머지 한 비유, 즉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과 절박함은 말이 필요 없겠지요.
무언가(누군가)를 잃어버리면, 사실 잃어버린 사람이 가장 놀라고 당황하고 낭패스럽습니다. 간수를 제대로 못한 스스로가 죄인처럼 느껴져 자책도 터져 나오지요. 비유 안에서 그 목자는 스스로를 '양을 잃어버린 죄인'이라, 그 부인은 '은전을 잃은 죄인'이라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심정 또한 그러했을 것이고요.
당신 사랑의 품을 떠난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심정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처럼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율법준수, 바른생활'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에게는 떠난 이가 괘씸하고 배은망덕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어 본 사람, 떠나보낸 사람은 압니다. 백 번 천 번 후회하고 되짚어 보며 자책을 일삼다가,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되돌리고 싶은 마음 뿐이지요. 떨어져 나간 이에 대한 상실감과 고통이 마음 안에서 들끓어서 참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의 두 비유에는 양 한 마리와 은전 한 닢이었지만 그것이 사람이라면, 셋째 비유처럼 사랑하는 아들이라면 어떨까요. 세 비유의 일관적 주제를 보건데 목자나 부인이 단순히 자기들 재산을 만회하기 위해, 완벽한 수량을 채우기 위해 수고를 감수한 것은 아닐 겁니다. 자신의 품을 떠나간 존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미지의 위험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 얼마나 애가 타고 간이 졸아들고 심장이 타들어 가겠습니까? 잃어버린 이의 근심과 염려, 조바심은 그를 가만히 있게 놔두지 않습니다. 떠난 존재를 찾을 때까지 뒤쫒게 만들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게 만들고, 동구 밖을 응시하며 기다리게 만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 죽음과 부활의 목적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9).
그러니 비유 속 목자의 원형이신 예수님은 산 이들뿐만 아니라 죽은 이들까지도 되찾으려 죽음에까지 달려 들어가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마지막 한 사람까지 되찾으시고자 생명이신 분이 죽음 안에까지 뒤쫓아 들어가신 것이지요. 자의로 떠나갔건 길을 잃었건 그 존재가 그분께 참으로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
그렇게 얻은, 되찾은 존재는 주인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전염이 됩니다. 주인이 부른 "친구들과 이웃들"은 마땅히 주인과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친구와 이웃이라면 주인이 겪었을 상실감과 고통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나누어 받았을 것이니까요. 또 함께 기뻐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주인의 기대이고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로마 14,10)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는 모습과, 또 그들이 예수님께 받아들여지는 흐뭇한 모습을 보았을 때, 하느님의 측근임을 자부하는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은 함께 기뻐해야 옳았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호통은 바리사이, 율법 학자들뿐만 아니라 마치 그들의 후예인양, 자기도 길 잃은 양 처지이면서 제 모습을 못 본 채, 세상 누군가를 향해 손가락 화살을 들썩이는 우리 모두를 향한 일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반복되는 "기쁨"은 혹독한 상실의 고통을 거쳐 회복한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저 감정적으로 스쳐가는 찰나의 즐거움과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목자의 기쁨, 한 부인의 기쁨, 하늘의 기쁨, 하느님의 천사들의 기쁨, 그 기쁨에 초대된 친구들과 이웃들의 기쁨... 그리고 겉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세리와 죄인들의 기쁨까지 관상한다면,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바로 예수님의 기쁨, 하느님의 기쁨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쁨 속에 있나요? 아버지의 되찾은 기쁨, 되찾아진 죄인의 기쁨 속에서 행복한 오늘 되시길 바랍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라 형제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오늘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로마인들을 나무랍니다.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형제를 죄인이라고 하고,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바오로 사도는 죄인을 형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형제를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죄인을 형제라고 하는 사람인가?
몇 년 전 저는 저의 인생을 돌아보며 이렇게 심각하게 반성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형제를 죄인으로 만들어놓고는 용서하려고 애를 썼고 좋은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놓고는 사랑하려고 애를 썼구나!
오늘도 같은 반성을 하며 결심을 합니다. 형제를 죄인으로 만들고 용서하려는 괜한 애를 쓰지 말자! 형제에게 욕심을 부려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고 그대로 사랑을 하자!
가난 중의 가난은 형제에 대한 가난입니다. 형제를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기를 바라는 욕심을 버리는 가난 말입니다.
그가 최선이기를 바라지 말고, 최선이 아닌 그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 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쁜 소식의
첫 전달은 언제나
기쁜 회개였습니다.
회개로
되찾게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회개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찾아나서시는
주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주님의
참된 사랑으로
소중한 우리자신을
찾게됩니다.
기쁨의 방향은
언제나 회개의
방향입니다.
회개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되는
신선한 기쁨입니다.
생명의 맛은
회개의 맛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모두를 기쁨으로
웃게 하시는
회개의 기쁨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이사랑을
만나는 은총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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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뉴스를 보는데 앵커가 이렇게 말하면서 한 뉴스를 보도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뉴스가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뉴스가 없으면 이러한 멘트를 날릴까 싶더군요. 사실 저 역시도 언제부터인지 뉴스를 보고 있으면 화도 나고 또 우울해지면서 기분이 나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도가 되고 있는 거의 모든 뉴스가 안 좋은 일, 슬프게 하는 일, 힘들게 하는 일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뉴스를 시청하는 습관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전에처럼 뉴스를 방송하는 시간에 처음부터 쭉 보는 것이 아닌, 인터넷을 통해서 관심 있는 기사만 선별해서 읽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인터넷을 보는 것 역시 기분이 좋아지지 않습니다. 좋은 정보를 얻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의가 가득한 글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판단하고 또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져야 할 사람처럼 말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정말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이런 모습이 보기 싫다고 사람들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각종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를 아예 끊어버리는 사람들도 많지요. 소통이 아니라 오히려 불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주님께서는 과연 좋아하실까요? 정의를 위해서 힘쓴다고 격려해 주실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세리들과 죄인들은 절대로 구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구원의 길에서 그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과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때문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 찾고 있는 사람을 그리고 은전 한 닢 찾기 위해 온 집 안을 뒤지면서 고생하는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나머지 양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며, 온 집 안을 뒤지면서 고생하는 정성을 쏟느니 그냥 한 닢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생산성에서도 맞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따르고 있었을까요?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과연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죄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단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판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주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몫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동참하면서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결정된다(애니 딜러드).
목표를 잘 보세요.
지난번 여행에서 함께 했던 분으로부터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남은 안식년 동안에 심심할 때 맞춰보라면서 2000피스 퍼즐을 선물 받았지요. 퍼즐 상자를 뜯고서는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그런데 하나씩 맞추는 재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그리고 요령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지요.
먼저 모서리와 테두리를 나눕니다. 그리고 겉표지에 완성된 그림을 한참 쳐다보면서 색깔을 구분해서 분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맞추다보면 좀처럼 엄두가 안 나던 그림이 윤각을 드러내게 되고 속도도 붙습니다.
퍼즐을 맞추면서 시작에 앞서 완성된 그림을 오랫동안 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삶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내가 생각하는 목표를 떠올리지 않고서 무작정 행동하는 것은 어떤 그림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학교 안에서, 그리고 내 이웃들 간의 만남 안에서 내가 떠올리고 있는 목표는 무엇인가요? 무엇보다도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내 삶이 제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그림도 내 삶 안에서 완성될 수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 달 전쯤에 신부님들과의 모임 약속이 정해졌습니다. 강촌에서 1박2일 모이는 일정이었습니다. 저는 위령의 날 미사를 마치고 부지런히 강촌으로 달려갔습니다. 다른 신부님들도 오셨으리라고 생각하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전화를 받으신 신부님께서는 다들 바쁘시기 때문에 일정을 바꾸셨다고 하셨습니다. 1박2일을 취소하고, 하루 일정으로 모이기로 했다고 합니다. 밴드에 올려놓았는데 못 보셨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일정을 미리 챙기는 편이라서 당연히 1박2일 모임이 있을 줄 알았고, 밴드를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서울로 갔다가, 다음날 아침에 오는 것도 번거롭고, 이왕 왔으니 하루 머물면서 기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나름대로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혼자서 하루 지내니 방값을 내야 했습니다. 한 번 더 확인을 했으면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저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혼자서 긴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 계산을 하니, 이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모처럼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슈퍼에서 장을 봐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니, 예전에 캐나다에서 자취하던 생각도 났습니다. ‘계란, 김치, 편육, 김치찌개,라면, 맥주’를 사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아침 일찍 안개 자욱한 길을 오시느라 힘들었다고 합니다. 저는 느긋하게 일어나서, 아침도 먹고 신부님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계산법과 신앙의 계산법은 다른 것 같습니다. 세상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계산을 하기 때문에 이익과 손해가 분명하고,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계산은 그 기준이 이윤의 창출이며 소득의 증대입니다. 그래서 항상 비교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앙은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생각하기 때문에 이익과 손해라는 기준을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앙의 계산은 그 기준이 나눔과 사랑입니다. 그래서 굳이 타인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하느님과의 관계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예비자 교리 때, 봉사자께서 숫자와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2 + 2 = 4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이해하면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비자들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교회에는 많은 봉사단체들이 있습니다. 각 단체들은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봉사하기위해서 설립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단체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고, 좋은 점은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것입니다. 다른 단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늘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발이 없어도 아주 빨리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심판하고 단죄하는 그 사람까지도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심판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고, 또 이해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언제나 복원시켜주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깜빡하고 거금 오만 원짜리 두 장을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 세탁기를 돌린 적이 있습니다. 뒤늦게 아차! 하고 세탁실로 뛰어올라갔더니 이미 '탈수' 중이었습니다. 큰 일 났다, 생각하며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비록 물기를 잔뜩 머금고 꼬깃꼬깃해졌지만 형체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천만다행이다 싶어 조심조심 지폐를 쫙 편 다음 다리미로 살살 다리니 엄청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거의 원상복귀 되었습니다. 물론 아무 어려움 없이 그 고액권을 잘 사용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서 똑같은 방식이 적용되리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한번 큰 실수를 하거나 엄청난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걸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깊은 타락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하면서 우리를 내치시겠습니까? 우리가 한번 구치소나 교도소를 다녀왔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비록 가지 말아야 할 길로 빠져 들어버렸고, 때로 우리의 무지와 교만으로 인생이 크게 훼손되었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내치시거나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세탁기로 돌린 오 만원권 지폐를 고이고이 다림질해 재활용했듯이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우리 안에 심어진 고귀한 품성, 높은 가치를 기억하시며 다시 한 번 우리를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원래의 그 순수했던 상태로 되돌려주실 뿐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관건은 죄인인 우리 각자의 태도요 사고방식입니다. "나는 이제 글렀어. 나는 구제불능이야."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의식을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가장 기뻐하신다는 진리를 굳게 믿는 일입니다.
산산조각 난 유리병 같던 '죄 많은 여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인해 죽음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손 내밀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다들 '저건 인간 말종이다!'외쳤던 세리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저 인간이야말로 100% 지옥이다!'고 여겼던 우도에게 천국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순결했던 태초의 상태, 가장 아름다웠던 청춘의 모습으로 복원시켜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에게도 당신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틈만 나면 당신 사랑과 자비의 손길을 우리에게 펼치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회개를 향한 강렬한 의지입니다. 주님 안에 다시 한 번 새 출발하겠다는 원의입니다. 다시 한 번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강한 열정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은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했던 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루카 복음 전체의 중심이 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되찾은 아들의 비유중 오늘 복음은 앞의 두부분만 다룹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만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을 찾고 기뻐 외치는 어떤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을 만납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 마음,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역시 잃었던 은전을 되찾고 환희에 가득 차 외치는 어떤 부인에게서도 예수님의 기쁨, 하느님의 기쁨을 만납니다. 앞의 비유의 주인공이 남자였다면 뒤의 비유에서 주인공은 여자입니다. 남녀 모두의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머니에겐 모두가 소중한 자식이듯이, 하느님 역시 모두가 소중한 당신의 자녀들입니다. 잃지 않은 양 99보다 잃은 양, 하나에 마음을 쓰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아마 아이를 잃었다가 찾았을 때의 기쁨을 체험한 부모들이라면 하느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릴 것입니다. 어찌 사람뿐이겠습니까? 누구나 나름대로 잃었던 사람을 찾았을 때, 잃었던 물건을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의 추억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는 자신을 비방하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비유를 통해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당신 기쁨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십니다. 이런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때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기쁨이 되고 이런 기쁨만이 영원합니다. 이어 결론과도 같은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결국 회개가 초점입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냉담으로 하느님을 떠나 하느님을 잊고 떠도는 잃은 양들이 차고 넘치는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잃은 양들을 찾기에 동분서주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주님께 돌아오라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주님과 함께 잃은 양을 찾아나서자는 주님의 호소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찾는 주님께 응답하여 우리도 끊임없는 회개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여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새 영세자의 확보도 중요하지만 냉담으로 교회를 떠난 길잃은 양들을 찾는 선교도 화급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을 만남으로 잃었던 나를 찾는 시간입니다. 날마다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와 미사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시간입니다. 하여 때때로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어, 성체가 성체를 모시네. 아, 신자분들 하나하나가 성체구나!”
미사중 주님의 몸인 성체만이 아니라, 누구나 똑같이 주님의 성체를 모시니, 각자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살아있는 성체가 된다는 깨달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존엄성의 근거입니다. 누구나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과 하나됨으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가 되고 주님의 형제자매가 되고, 주님의 성체가 되었는데 누구를 판단하고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깨달음이 이웃 형제자매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며, 형제들을 심판하거나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마음을 없애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깨달음이 참 고맙습니다. 사를 통한 우리의 깨달음과 동일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또한 회개하여 주님의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을, 관대한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에서 샘솟는 사랑이요 평화요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 한 복판에서 잃은 양들로 살다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 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27,13-14).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주님의 집이자 성전입니다. 아멘.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인 나의 회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15,2)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잃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19,10)임을 밝히면서,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은 율법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회개하여 자비로우신 아버지 안에 머무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던 중 세리들과 죄인들이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15,1). 그러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습니다(15,2). 예수님께서는 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를 들어 자신들을 하느님 앞에서 의인으로 생각하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과 교만한 마음에 일침을 가하십니다.
복음서들에는 바리사이들이 위선자들, 회칠한 무덤, 독사의 자식들, 탐욕적이고 돈을 좋아하며, 백성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교만한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의 이러한 시각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과장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였고, 존경받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하느님의 법을 가르치는 당대의 신학자들이었고 후대 랍비들의 기원이 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생활 전반에 엄격히 적용하고 자신들도 지켜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종말 신앙을 지녔으며, 메시아의 오심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길은 율법을 정확히 지키고 실천함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어기는 사람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가로막는 악인으로 보았기에,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그들이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지나쳐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규범적으로 해석하여 실천하도록 강요한 것은 분명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 시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들과 달리 처신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러 찾아온 세리들과 죄인들보다도 바리사이를 회개해야 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릇된 세계관을 바로 잡아주려고 노력하셨고, 자신의 행동이 율법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새로운 법을 받아들인 사람은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어린이들과 고통 받는 병자와 과부들이었습니다.
나 또한 바리사이처럼 다른 이들보다 잘났고, 내 생각이 더 옳으며, 나의 체험이 더 깊고, 내가 알고 있는 성경 지식과 기도 체험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갖고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내가 바로 하느님께서 찾고 계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아닐까요? 또 하느님의 법을 내세워 오히려 자유와 기쁨을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발전이라는 경제논리의 그늘에서 소외되어 희생과 핍박을 받는 힘없는 노동자, 농어민들, 가난한 이들과 도시개발이란 명목 아래 살자리를 잃어버린 강제 철거민들,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인권 피해자들 또한 우리가 더불어 찾아나서야할 잃어버린 양들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로마 14,10)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 인간은 하느님 앞에 누구나 보잘것 없는 죄인입니다.
그 어떤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들끼리 죄인이니 아니니 해봤자 모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가끔 발밑에 개미들의 무리들을 봅니다.
그들이 아무리 잘 났니 못 났니 해도 내가 볼 때는 다 그놈이 그놈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그런 미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단죄하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심판자이십니다.
아니 하느님마저도 우리에 대한 심판을 세상 끝날까지 유보하십니다.
언제라도 지 꼬라지를 알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시면서 말입니다.
예수님도 단죄하시지 않은 세리와 죄인들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거침없이 심판하고 단죄하였지요?
만약 내가 열심한 신앙인으로 자처하면서 남을 업신여기고 심판하고 있다면 나는 분명 바리사이에 가깝습니다.
오늘 혹 내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거나 단지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지 잘 살피는 날 되시길 기도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한 예수님
신희준 신부님
내가 양치기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놔둔 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뒤쫓아 갈 수 있을까요?
이것이 과연 합리적일까요?
그 한 마리 때문에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세상은 가르치지 않나요?
그래서 대부분 그 한 마리를 포기하지 않을까요? 아니라고요? 글쎄요.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지난 수십 년간 농어촌의 희생과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런 희생이 헛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 엄청난 경제발전을 일구어 온 것이 사실이니까요.
문제는 그런 희생이 여전히 강요되는 현실입니다.
언제 나도 그 양 한 마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 우리는 아흔아홉 마리의 무리 속에 끼어 있으면서 낙오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안심하면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합리적이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소수를 희생시키는 데에 가담하지 말고 그 소수를 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시리아 이민자를 유럽의 모든 교구가 한 가족씩 받아들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호소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가 지켜야 할 기본 강령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광야를 헤매고 있는
길 잃은 양 한마리가
바로 우리자신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모두는
하느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죄인들입니다.
하느님 사랑 앞에서는
우리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시작은
길을 잃은 양처럼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아는 것에서
회개의 은총은
시작됩니다.
죄를 통해
길을 잃은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분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회개를 통해
진실된 사랑의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들을 찾았습니다."
회개의 여정이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을 이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용서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을
통해서 입니다.
죄많은 우리자신을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죄의 상처는
회개의 선물이 됩니다.
회개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합니다.
생명의 기쁨은
회개를 통해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던 우리가
애타게 우리 죄인을 찾으시는
주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위령성월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모든 것의 주체는
사랑과 용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버려할 때와
되찾을 때를 아는
자연의 순리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참다운 기쁨은
회개의 기쁨에 있습니다.
창조의 기쁨또한
회개에 있습니다.
생명은 새롭게
성숙되어야 하듯
회개는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진정한 치유는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선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회개의 선물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소소한 일상을 넘치는 감사로
바꾸어놓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비를 통해서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회개는 분명히 알게 해줍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서
잃어버린 은전 한 닢에서
뜨겁게 만납니다.
우리의 회개는
애타게 기다리시고
찾으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의 기쁨이며
하늘나라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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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오늘은 긴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지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지요. 6~70만 명의 수험생들과 그 부모님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비롯해서 연관된 사람들이 얼마나 긴장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긴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오늘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그동안 배운 것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학 진학을 원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기에 아무쪼록 모든 학생들이 최상의 컨디션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를 기도합니다.
어제는 돌아가신 성소후원회 회원들을 위한 위령미사가 있었습니다. 정확히 일주일 전, 비가 엄청나게 내리는 가운데에서 미사를 봉헌했다는 이야기를 이곳 새벽 묵상 글에서 이야기했었는데, 지난주와 똑같은 상황이 아니 어쩌면 더 극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지요.
사실 일기예보에 비소식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은 비가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거든요. 5미리 이하의 비 소식이라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미사가 시작하는 오후 2시까지는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2시 미사가 시작하자 굵은 비가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미사 하는 내내 비가 계속해서 내리는 것입니다. 많은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니 우산을 써야하고, 또 세찬 바람에 다가오는 추위 역시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야속하게도 미사가 끝나자마자 비도 그치더군요.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 정성이 들어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편하고 모든 것이 만족한 상태에서는 무엇인가를 하기가 쉽지요.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에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어제 함께 미사를 봉헌했던 사람들도 두고두고 어제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미사였기 때문에 그렇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어렵고 힘들어서 그 순간 불평불만을 터뜨릴 수도 있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어 내면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중요한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피해야 할 순간은 없습니다. 그 순간조차 나에게 있어 중요한 기억이 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이 오늘 복음에서도 나오지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둔 채 찾는다고 말입니다. 또한 잃었던 은전 하나를 찾고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주시는 주님께서 절대로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왜 이렇게 잘 포기하는지요? ‘될 대로 돼라, 난 안 돼.’라며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심지어 주님께서 주신 생명까지도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자신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내 삶의 중요한 기억을 만드니까요.
두 가지에서 영향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책이다(찰스 존스).
포기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길.
한 피아니스트가 전쟁 통에 적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 번 갇히면 7년 동안 나올 수 없는 감방에 갇혔지요. 이 감방은 한 사람이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이런 감방에 갇혀 있다 보니 그의 몸은 점점 쇠약해 질 수밖에 없었지요. 실제로 그의 주위 동료들도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 둘씩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 이 피아니스트는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돌아온 뒤 곧바로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연주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7년 동안 감방에 갇혀 있었기에 전혀 연주할 수 없었을 텐데, 그의 연주 실력은 조금도 줄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로로 잡히기 전보다도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는 감방에 갇혀 있으면서 공포를 극복하고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매일 머릿속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상상 속에서 연주한 것이 실제로도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주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 피아니스트의 모습.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모습이 아닐까요? 이러한 모습이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빛나는 보석으로 재탄생하기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먼지로 가득한 지붕 밑 창고를 정리하다가 녹슨 제구들을 발견했습니다. 아마도 돌아가신 선배 신부님의 유품인 듯 했습니다. 마침 공동체에 제구가 필요했었는데, 보아하니 구식이었지만 재활용이 가능해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녹이 너무 많이 슬어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표면이 녹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침 철물점에 문의해보니 요즘 아주 좋은 녹제거제가 나왔다며 신제품을 제게 건넸습니다. 신이 나서 수도원으로 돌아온 저는 곧바로 녹 제거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녹제거제를 표면에 가득 바른 후 조금 시간이 흐른 후 마른 수건으로 힘껏 녹을 닦아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빡빡 있는 힘을 다해 녹을 닦아내던 제 입에서 어느 순간 감탄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렇게 우중충한 제구들이었는데 녹이 제거되면서 원래 지니고 있었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품위 있는 모습, 반짝 반짝 찬란히 빛나는 모습, ‘이게 웬 횡재냐!’는 감탄사가 제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죄와 그로 인한 어둠의 세월로 인해 여기 저기 잔뜩 녹슨 우리들의 영혼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힘과 격려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덕지덕지 낀 우리 영혼의 녹을 제거하기 위해, 그래서 우리에게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아주기 위해, 더 빛나는 보석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우리 얼굴을 반짝반짝 빛내주기 위해, 우리를 보다 당당하고 충만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모두를 회개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너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할 중요한 관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일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반드시 획득해야할 티켓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자신이 강하다고, 스스로 홀로 설수 있다고, 자신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한 회개는 요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렇습니다.
반대로 나는 죄인이라고, 나는 구제불능이라고, 나는 하느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사람이라고 뉘우치는 사람들에게 회개는 가깝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든 세리와 죄인들이 그렇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오늘 자신들이 서있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살아온 지나온 세월을 가슴 아파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이요 도움은 하느님의 자비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리와 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반대로 자신들만이 선택된 하느님의 사람이자 의로운 사람이며 구원이 보장된 사람이라고 여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든 것, 하느님께서도 자신들이 편이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기에 하느님의 도움과 은총조차 필요치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문을 굳게 닫아버리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입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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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리는 아흔아홉의 의인 안에 들 수 없었음을 고백합니다.
억겁이라는 시간 속에 우리의 역사가 만든 흔적을 뒤돌아봅니다.
나눔보다는 빼앗음이었습니다
연민보다는 냉혹이었습니다.
평화보다는 전쟁이었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이었습니다.
결국,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역사였습니다.
남을 밟고 일어서야 성공이라 믿었던 어리석은 욕망들은 바로 우리의 얼굴이었습니다.
때로는 보이게, 때로는 은밀히 만들어낸 살해된 주검의 벌판이 우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당신께서도 희생을 피하실 수가 없었지요.
주님!
위대한 인류를 외치고 있지만, 잔인한 인류였음을 고백합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했던 세상.
이기심과 폭력으로 만든 세상 속에서 적자생존을 외쳤던 세상.
늘 희생은 약자의 몫이고, 그 약자는 강자가 되려고 발버둥쳤던 가련한 세상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약자의 모습을 스스로 택하신 하느님의 아들.
그 아들도 여지 없이 우리는 죽이고 말았지요.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2.하느님,
이 오욕의 역사 속에서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지 감히 헤아려봅니다.
당신께서는 늘 바보처럼 우리가 털고 일어나 제자리 찾기만을 기다려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 세상 속에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는 한 사람 때문에 행복해 하실 것이고 말입니다.
끝까지 저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마음에 희망을 가져봅니다.
어차피 우리는 길을 찾고 있는 헤매는 양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 양을 직접 찾아 나서시는 그 마음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슬러 봅니다.
주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 무리에 속해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입니다.
어리석음에서 구하소서.
뉘우치고 다시 일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보속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잘 죽을 수 있기 위해 잘 살게 하소서.
주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남을 바꿀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개그맨 이성미씨 간증을 조금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 어머니를 여의고 그 뒤 세 명의 새엄마를 거쳐야 했고 연예인이 되어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우울증이 걸려 수면제 70알을 먹고 자살기도도 했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자신도 어떻게 가족을 사랑해야하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특히 아들에게는 더욱 엄한 어머니였는데 17년 동안 욕만 하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한국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심경으로 캐나다로 이민 갔는데 그 곳에서 아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아들은 학교가 9시 30분에 시작하는데 10시에 일어나는 공부엔 담 쌓고 사는 아이였습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또 전화가 와서 10시에 아들을 깨워 아침을 먹으라고 해 놓고 아침 먹는 아이 뒤통수에다 “나가 죽어라. 이 ... 쓰레기...” 등의 욕을 하는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정말 네가 말하는 대로 만들어주랴?’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내가 말하는 대로 되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구나’라며 크게 뉘우쳤고 17년 동안 입에 달고 살았던 욕을 그날 바로 끊었다고 합니다. 며칠 뒤 딸이 오빠 방에 들어갔다 나오며 엄마에게 이렇게 소리치더랍니다.
“큰일 났어. 엄마, 오빠가 공부해...”
자신이 바뀌니 아이가 바뀌어간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이번엔 아이가 학교에서 커다란 사고를 치게 되었습니다. 캐나다 아이와 몸싸움을 하다 스케이트보드 위에 있던 캐나다 아이가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치며 넘어진 것입니다. 아이는 뇌진탕 증세로 혀가 말려들어갔고 그것을 손으로 끄집어내야 했습니다. 아이는 앰뷸런스에 실려 갔고 아들은 경찰에 의해 교장실에 감금당했고 이 이야기가 이성미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이성미씨에게 교사들은 이제 아들은 감옥에 가게 될 것이고 너희는 추방당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장실에 하얗게 질려있는 아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내가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기도를 많이 한 탓인지 깨어난 그 아이가 전화를 하여 이성미씨 아들이 처벌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주위에서 본 친구들도 때린 것이 아니라 밀치는 과정에서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 진술하여 형사 처분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4일간의 정학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위해 가장 좋은 밥상을 차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이제 집에서 먹는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하며 2주 동안 지낼 집을 알아보았습니다. 평소 어머니 성격으로는 쫓겨날 것이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밥을 다 먹게 한 다음 이성미씨는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엄마를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해주지 못한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아이는 펑펑 울면서, 엄마는 평생 자신에게 칭찬 한 마디 안 해 주었고, 못하는 것만 골라서 욕을 먹었고, 엄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느냐며 흐느꼈습니다.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바뀌었고 대학에 진학하여 목사님이 되기 위해 신학대에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큰 불평을 터뜨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정작 내가 변해야 하는 그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남만 회개하면 된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남이 변하기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퇴근 시간 즈음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쏟아졌습니다. 나는 갑작스런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 건물의 좁은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곳에는 이미 나와 같은 처지의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시작하자, 할아버지 한 분이 가세하셨고 그런 다음 중년 아저씨 한 분, 마지막으로 아주머니 한 분이 비좁은 틈으로 끼어들었습니다. 출근시간의 만원버스처럼 작은 처마 밑은 낯선 사람들로 금세 꽉 찼습니다. 사람들은 이 비좁은 틈에 서서 멀뚱멀뚱 빗줄기만 쳐다보고 있었지만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뚱뚱한 아줌마 한 분이 이쪽으로 뛰어왔습니다. 아주머니가 그 큼직한 엉덩이로 우리 대열에 끼어들자 그 바람에 맨 먼저 와있던 청년이 얼떨결에 튕겨나갔습니다.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쭉 훑어보았지요. 모두들 딴 곳을 바라보며 모른 척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셨습니다.
“젊은이 세상이란게 다 그런 거라네...”
그 청년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길 저쪽으로 뛰어갔습니다. 한 사오 분 지났을까? 아까 그 청년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비닐우산 다섯 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세상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청년은 다시 비를 맞으며 저쪽으로 사라졌고,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청년이 쥐어준 우산을 들고 총총히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그런 거라던 할아버지는 차마 우산을 들고 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청년보다 나은 건 나이밖에 없네그랴...’
그리고 우산을 바닥에 놓고 장대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마지막 우산은 청년의 것이기에....
토마스 아담스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바뀌지 않고 남을 바꿀 수 없다. 다른 사람을 바꾸려면 스스로 먼저 바뀌어야 한다. 이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한 가지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려고만 할 뿐 자신은 변화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회개가 또 다른 회개를 이끕니다. 남들이나 세상 탓하지 말고 나부터 회개하여 하늘을 기쁘게 해야겠습니다.
냉담자들이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그동안 내가 냉담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 거 같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멀어져 가는 분들을 그냥 내버려 둔 거 같습니다. 그분들 앞에 서면 ‘안 되는구나..’ 하는 막막함과 벽이 느껴져서 그런가 봅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듣는 소리가 ‘조금만 더 있다 나갈게요... 나가야죠..’ 하는 건데요.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제 좀 지겹습니다. 그러다가 나온 분이.. 한 분 떠오르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말의 반복인 거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어느 순간 보면 ‘저분은 안 나오실 거야..’ 하고, 해야 할 고민과 실천을 멈추어버릴 때가 있는데요. 오늘과 같이 ‘잃은 양을 찾으라..’는 복음을 읽게 되면, 반성하고 다시 방법을 고민해 보게 되는 거 같습니다.
오늘 떠오르는 분들은 3~4분 정도 되는데요. 그분들의 모습과 말들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모습... 그분들의 말.. 왜 안 나오는 걸까.. 하고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게 없어요...’ 그 중에 한 분이 한 이야기인데 네 분에게 모두 적용이 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성당에 오나 안 오나 똑같다는 건데요.
그런 분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신앙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어렵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분들과 연결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많지 않아서 그런가봅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생각과 이야기들이 떠오르고 지나갔습니다.
첫 번째는 평화방송 라디오에서 들은 대화입니다. 공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평화방송 라디오를 틀었는데, 어떤 수녀님이 전화를 걸어 온 분들과 상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를 건 분은 냉담하는 형제님이셨는데요. 수녀님과 대화를 하다가 그 주에 성당에 나가겠다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분이 성당에 나가기로 결심한 것도 신기했지만, 더 신기했던 거는 냉담하는 분들도 평화 방송을 보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보다가 좋은 영향을 받게 되면 ‘다시 신앙생활을 해야겠다..’ 하고 결심하게 되는 건데요. 그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평화방송에서 일하는 여러분들의 수고와 헌신, 그리고 성실함이 필요한 거겠죠.
또 하나는 인터넷 까페나 블로그를 통해 신앙적인 글을 나누는 일입니다. 종종 인터넷에서 활동하시는 다른 신부님들의 까페나 블로그에 가 볼 때가 있는데요. 어떤 신부님의 글에 어떤 자매님이 이런 덧글을 남기셨더라고요. 정확한 것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신부님, 여전히 성실히 글을 남기고 계시네요. 10년 만에 다시 신부님 까페에 들어와 글을 보게 된 거 같습니다. 저는 그 동안 많이 방황하고 냉담하며 흐트러졌는데... 한결같은 신부님의 모습에 반성이 됩니다. 저도 다시 열심히 해 보려고 합니다.’ 하는 내용인데요. 신부님이 몇 년 하다 말았으면 아마도 그런 덧글과 자매님의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신앙적인 음반을 제작하는 건데요. 예전에 그런 일을 하시는 신부님이 이런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와서 너무 감사하다.. 는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죽으려고 했는데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성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라는 성가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요. 만약 그 신부님이 열악한 분야의 일을 포기하고 멈춰버렸다면, 아마도 그 자살하려던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들의 모습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콜베 신부님이나 다미아노 신부님과 같은 분들의 모습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하느님을 따랐던 그분들의 삶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분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 모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한 삶이 냉담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하루, 신앙 안에서 내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해 봅시다. 언젠가 그 일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누군가를 다시 돌아오게 할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배를 갖고 있는 형제님이 도시 본당 사목회 분들과 함께 낚시를 나갔는데, 자기가 보기엔 별로 고기가 없었던 거 같은데 사목회 분들은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더란다.
“와~ 오늘 고기 반 물 반인데~”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삶을 일깨워주는
놀라운 스승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잃어버린 참된 사랑을
되찾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다른 것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도로 찾는 것입니다.
회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처럼
간절한 생명을 끌어안는 참사랑입니다.
은전 한 닢을 향한 정성처럼
우리 마음 속 사랑이
우리의 일상을 다시 보게 되고
다시 기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기쁨처럼
우리에게 소중한 것을 다시 찾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은
언제나 더 많은 기대감이 아니라
참다운 회개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회개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회개하며 살라고
십자가를 주시고
생명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회개는 가장 아름다운 기쁨입니다.
오늘의 우리를 행복케 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은 전 한 닢을
양 한마리를 찾는 것은
또 다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기쁨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시간이
더 큰 기쁨과 사랑의 나눔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회개는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나눔의 시작입니다.
잃어버린 우리의 마음을 다시 찾는 일이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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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6남매 중의 막내로, 제 위로 형 셋과 누나 둘이 있습니다. 형님과 누님들 모두 학창시절에 공부를 아주 잘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통적으로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운동이었습니다. 달리기도 못하고 공도 잘 못 차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형 누나들이 운동을 잘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직접 보았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원래 운동을 잘 못하는 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 친척들이나 이웃들 역시 ‘너희 형제들이 공부는 잘 하지만 운동은 잘 못하지.’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저 역시 체육 시간이 제일 싫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것이 자신 없었고, 각종 구기 종목에 있어서도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거든요. 이러한 저를 향해 ‘우리 집안은 원래 운동을 못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체육시간을 피했고, 운동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 이어달리기 대표로 뛰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달리기를 잘해서 뽑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운동회 직전에 우리 반 학생 대부분이 서울로 야구 응원을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결국 달릴 선수가 없어서 그래도 멀쩡한 제가 인원 채우기 위해 이어달리기 대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각 반에서 제일 빠르다는 아이들이 뛰는 이어달리기입니다. 그런데 꼴찌로 달리고 있던 우리 반이었는데, 제가 두 명을 제치고 전체 이등을 한 것입니다.
운동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저한테도 운동을 잘 하는 에너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거의 모든 운동을 잘 하는 학생이 되었지요.
저는 운동을 못한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꼬리표가 철옹성처럼 계속 제 뒤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꼬리표는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충분히 떼어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꼬리표를 달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성당에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 나 같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쫀쫀한 분이 아니십니다. 나의 기준에 주님을 맞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대범하신 분, 그래서 우리의 작은 회개 하나로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크게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스스로 꼬리표를 달지 마십시오. 꼬리표는 주님께서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과 인내가 강요와 분노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룬다(라퐁텐).
가장 값진 것을 나누며 살아라.
미국 의학자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었던 조너스 솔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0년대 당시 가장 무서운 질병이라는 소아마비의 백신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요. 그리고 200번 실패했을 때, 어떤 기자가 “박사님 백신 개발에 벌써 200번이나 실패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솔크 박사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백신이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200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이렇게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박사가 오랜 고생 끝에 백신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백신을 팔면 당연히 엄청난 부를 얻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는 이 백신 제조법을 무료로 공개했다고 합니다. 물론 특허로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백신 개발을 특허로 등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태양을 특허로 신청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것을 남에게 나누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요즘, 솔크 박사의 나눔에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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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짜를 보니 11월 3일입니다. 무슨 날일까요? ‘학생의 날’입니다. 사실 제가 신학생 때에는 매우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1929년 11월 3일의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자율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는 날로 지정된 오늘이지요. 신학생 때에는 이 날에 각종 행사를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학생회 일을 할 때에는, 이 날의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가 된 후, 즉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학생의 날 행사로 인해 걱정하고 많은 노력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저와 상관이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고 있지도 않고 또 학생의 신분도 아닌 지금은 더 이상 이번 학생의 날에 무슨 행사를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까요. 만약 제가 지금도 ‘학생의 날에 무엇을 할까?’라고 고민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고민과 걱정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혀 일어나지 않을 고민과 걱정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로 현재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현재보다는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윈스턴 처칠이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하지요.
“내가 무수한 걱정거리를 안고 고민하던 중에, 문득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이 남자는 한평생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았지만, 자신이 우려했던 대부분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죽음의 침상에서야 깨닫게 되었지요.”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진리를 깨닫는다면 얼마나 억울할까요? 그런데 걱정과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 역시 죽음의 침상에서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민과 걱정을 안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도 지금이라는 순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에 억눌려 지내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욱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고 말이지요.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우리를 지켜주시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오늘 제1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이 순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나의 모든 걱정과 고민은 말끔히 사라질 것입니다.
인생이 주는 최고의 상은 가치 있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루스벨트).
함부로 판단 금지
제가 본당에 있을 때, 성당에 자주 오셔서 야외에 있는 성모상과 십자가를 깨끗이 닦는 자매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약간 정신 이상을 보이는 분이셨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혹시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시지 않을까 싶어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저 역시 불안한 마음에 그러지 마시라고 이야기를 해도, 이 자매님은 더 깨끗이 닦고 때로는 꽃까지 가져와서 성모상 앞에 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뒤 이분의 빈자리가 꽤 컸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상과 십자가에 먼지가 많이 끼는 것이 보였고, 성모상 주위에 자주 있었던 꽃이 없으니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발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분이 오히려 큰일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내가 비판하고 단죄하는 그분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지금은 무조건 예수님께 나아갈 순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결점이나 약점, 반복되는 악습들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없애버리고 싶지만, 그게 생각처럼 그리 쉽지 않습니다.
최근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한 가지 체험했습니다. 열심한 후배들의 모임 때였습니다. 강의 시간에 제가 공공연하게 한 가지 결심을 선언했습니다.
“살레시안들의 대희년인 돈보스코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며, 각자가 뭔가 한 가지씩 봉헌한다든지, 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는 거창하거나 두리뭉실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돌아보니 ‘과속’이라는 아주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날아오는 딱지도 만만치 않을뿐더러 쓸데없는 연료 소모도 엄청날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도로 표지판이 지시하는 규정 속도를 정확하게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이 대희년을 준비하는 제 개인적 결심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새벽부터 꽤 장거리를 뛰어야 했습니다. 운전대 앞에 앉으면서 어제 공개적으로 한 말도 생각나서 규정 속도를 지키면서 천천히 운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좋더군요. 마음의 여유도 생기고...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너무나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습관을 바꿔서 그런지 마치 기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도착지는 생각보다 너무나 멀었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찍힌 도착 예정시간을 보니 밟지 않으면 불가능했습니다. 이러다 미사시간 늦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제의 ‘대단한’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예전의 공격적, 저돌적인 저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악습이란 것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당대 질 나쁜 사람들의 대표 주자였던 세리와 여러 부류의 뒷골목 인생들이 몰려왔으니 분위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의 지난 삶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들어선 이 길, 한번 벗어나보려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지 않고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나름 수도 없이 결심도 하고, 때로 죽기 살기로 몸부림도 쳐 봤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 이런 나쁜 습관은 내일부터 버린다며 혈서까지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뿐 몸이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몸에 밴 악습을 단칼에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행동이 뒷받침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어제로 돌아가서 악습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악습의 순환 고리를 끊지 못하고 한 평생 괴로워하며 살았던 세리와 죄인들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전의 지도자들이 그토록 회개를 부르짖었지만 미동도 하지 않던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감미롭던지, 또 얼마나 따뜻하던지, 그리고 얼마나 큰 위로를 주던지, 그들은 그들의 폐부 깊숙이 박혀버렸습니다. 그들이 정수리와 골수를 관통하면서 그들을 순식간에 딴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구제불능으로 낙인찍힌 세리와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는 예수님을 향해, 그리고 몰려든 세리와 죄인들을 향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며 투덜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이런 그들의 빈정거림에 예수님께서는 제대로 한방 날리십니다. 그 한방의 말씀은 위선자들에게는 마치도 쌍날칼처럼 날카롭지만 세리와 죄인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살다보면 우리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이 생깁니다. 때로 사방이 높이 둘러싸인 벽으로 가로막혀 탈출구가 안보입니다.
그 순간은 바로 예수님께로 나아갈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들처럼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송구스럽고 죄송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무조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의 마음
노우진 신부님
우리는 자주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온유함, 관대함, 자비로움 등의 말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닮은 사람들을 만날 때면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 좋은 사람” 등으로 표현하며 반가워하고,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단지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 나의 실수를 눈감아 주는 사람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온유함은 이런 안이함이나 우유부단함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온유함, 관대함, 자비로움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 그분의 나라를 널리 전하고 싶은 열정과 그 나라에 들어오고자 하는 이들을 자비로이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현실적 계산에 어두워 아흔아홉 마리를 놔둔 채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우매한 목자의 마음이 아닌 한 마리라도 더 당신의 나라에 머물게 하고 싶은 열정, 온유, 관대, 자비로운 목자의 마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려 노력해야겠습니다.
네가 내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정태연 수녀님
화장대 위에 은전 열 닢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하나가 다른 세상을 보고 싶어 있는 힘을 다해 폴짝 뛰어내려 데굴데굴 굴러갔습니다. “야호, 이제는 자유야!” 신나게 굴러가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통 깜깜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어둠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자 자신의 몸이 장롱과 벽 사이에 꼭 끼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이 따끔거렸습니다. 작은 개미들이 몸 위로 올라와서 막 깨물고 있었지요. 비키라고 고함을 질러도 개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무섭고 괴로워서 “주인님,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개미들이 가고 나니 이번엔 시커먼 바퀴벌레가 은전 위에 올라서서 짓눌렀습니다. 그놈의 냄새는 그곳의 퀴퀴한 냄새와 함께 은전을 질식시켜 죽일 것만 같았습니다. 그제야 은전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곳에서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지요.
며칠이 지나 아니 하루가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도 모릅니다. 삐거덕거리며 옷장이 옮겨지더니 눈부신 빛 속에서 큰 손이 은전을 집어 올렸습니다. “여기 있었구나, 얼마나 찾았는데….” 두려워 움츠리고 있는 은전 위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은전이 없어져서 걱정했다.’고 그리고 ‘찾아서 기쁘다.’는 주인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은전의 두려움과 죄송함과 부끄러움을 씻어주는 약이 분명했습니다. 은전은 다시 당당하게 화장대 위에서 지내게 되었으니까요.
주인님은 친구들과 함께 기분 좋게 차 한잔하고 계시는 군요. 그리고 부끄럽게도 은전을 향해 살짝 윙크를 하십니다. 아, 오늘따라 커피 냄새가 참 향기롭습니다.
자기 양을 잃을 정도의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괜히 주님의 말씀에 시비를 한 번 걸어볼까요?
“도대체 하느님씩이나 되는 분이 얼마나 칠칠맞고 부주의하면 그래 당신의 양을 잃기나 하고 그럽니까?”
“사랑이 그 정도밖에 안 됩니까?”
이렇게 제가 시비를 걸면 주님께서는 억울하실 겁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잃은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너무 커서 잃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한다는 이유로 당신 양을 묶어놓지 않으십니다.
자유의지를 주십니다.
자유의지로 당신을 싫다고 할 수 있게 하시고 당신을 떠날 수도 있게 하십니다.
당신을 도저히 떠날 수 없게 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당신을 떠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를 주셨고, 자유를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노예처럼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으로 당신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위대하고도 위대한 하느님 사랑에 어울리려면 이렇게 자유로운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우리의 아름다운 혼인서약은 이렇게 묻지요.
“신랑 누구와 신부 누구는 아무의 강박도 없이 완전한 자유의사로 서로 혼인하려고 결정하였습니까?”
막장 드라마를 보면 돈과 권력으로 여인을 겁박하여 연적에게로 향하는 사랑으로 자신에게로 돌리라고 강제합니다.
그래도 여인이 사랑을 거부하면 몸뚱이라도 소유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압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절대적인 조건은 자유입니다.
자유로이 떠날 수도 있고, 그래서 자유로이 올 수 있어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양은 주님의 완전한 사랑 때문에 떠난 양입니다.
그렇다면 잃은 양을 찾아오는 주님의 방식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찾아가서 머리끄댕이를 잡고 오는 것이겠습니까?
절대, 절대 아니지요.
그것은 마음이 스스로 그리고 저절로 움직여 찾아오도록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강요하지 않고 잠잠히, 기다리고, 바라보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유인하는 것은 사랑뿐이고 참 사랑만이 자유로운 사랑을 불러일으키니 우리의 사랑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그 사랑의 유혹을 오늘 즐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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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5년 동안 운전필기시험을 950번이나 본 어떤 할머니의 기사였습니다. 글쎄 자그마치 949번 떨어졌고, 어제 950번째 보는 시험에서 드디어 합격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말이 950번이지, 여기에 들어간 인지세나 교통비만 해도 1,000만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5년 동안 받은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요.
“운전필기시험은 전날 공부해도 다 붙어.”
이렇게들 쉽게 말하는데, 949번씩이나 떨어졌으니 그 과정 안에서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겠습니까? 이런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저 같았으면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고, 5년 만에 드디어 필기시험에 합격해서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가능성에 아주 가까워지셨습니다.
사실 제가 아는 분은 혹시 이 필기시험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시험 준비를 아예 하지 않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운전면허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걱정은 운전면허를 절대로 취득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에 반해서 앞서 포기하지 않는 그 할머니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았기에 운전면허를 곧 취득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포기하지 않는 마음,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는 이 세상의 원칙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도 필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고 식사도 함께 하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말합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그러면서 이어지는 비유말씀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입니다. 사랑하는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주인이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요? 하지만 길 잃은 양 또한 자신이 주인의 보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인의 보호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을 것이고, 이러한 노력으로 주인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자기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리는 것을 말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데 있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인을 찾기 위해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완전히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도 기뻐하십니다.
이 세상에 하느님을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머무를 것이다.(톨스토이)
행운의 달(김은희, ‘좋은생각’ 중에서)
지난 5월, 초등학교 1학년인 우리 아들은 에버랜드 갈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했지.
“엄마, 5월은 행운이 많은 달이야. 엄마가 라디오 방송에 사연 보내서 에버랜드 상품권 받았고, 네 잎 클로버도 두 개나 찾았고, 형아는 우등상 받고, 나는 오늘 받아쓰기 100점 맞았어. 그리고 아침에 실내화 주머니 잃어버렸는데 다시 찾았어!”
행복해하는 너와 달리 엄마는 “최악의 5월이야!”라며 울었단다. 운동회 때 네가 갖고 싶다는 2천 원짜리 물총도 사 줄 수 없었지. 어버이날에는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화로만 안부를 전했고, 형편이 어려워 우울해하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그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지. 기적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모든 게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
민규야. 엄마는 세상의 모든 불행이 내 것인 양 우울해했어. 글도 못 깨치고 입학한 네가 알림장을 척척 써오고, 학원 안 다니는 형도 우등상을 타 와 고마운데 말이야.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지만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는 우리의 밤 시간은 또 얼마나 행복하니. 어젯밤 ‘운동화 한 켤레’를 읽다가 함께 울었지. “선생님은 훈이의 구멍 난 운동화 속에서 파란 하늘을 보았을 것입니다.”라는 글을 읽고 말이야.
그래, 이 가난이 훗날 네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데 밑거름일 될 수 있겠지. 네가 지금처럼 모든 일이 기적이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길 기도하마. 그리고 엄마에게 희망을 줘서 고마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자매님으로부터 슬프지만 기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큰 아들이 사형수로 복역하고 있었는데 그 곳에 찾아오시는 신부님과 수녀님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과 다른 가족들도 큰 아들 덕분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형수 아들이 온 가정에 신앙을 심어주게 된 것입니다.
그 자매님께서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실 때는 아드님의 사형 집행이 있고 난 후 며칠 안 돼서 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었어도 어머니는 크게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말썽꾸러기 아들이 죽어서가 아니라 좋은 곳에 갔다는 확신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갈 때 웃으며 들어갔어요.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형수들은 안 끌려가려고 울며불며 발버둥을 쳤지만 내 아들은 당당하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습니다. 그 때 울던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보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제 아들은 ‘신부님, 술 담배 건강에 안 좋으니 끊으세요. 수녀님, 우시지 마세요. 저 좋은데 가잖아요.’라고 하며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로했어요.”
이 분은 청부살인으로 사형을 구형받았고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집행된 마지막 사형집행 때 돌아가셨습니다. 물론 그 분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신 분들은 그 분이 신앙을 가져 구원을 받게 되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정말로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여 기뻐하기 때문에 나도 기쁜 것이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슬플 때 함께 슬퍼해주는 것보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주는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회개하는 죄인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죄인은 누구일까요?
예전에 한 청년이 고시원에 불을 내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칼로 살해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상이 자신을 무시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이 뉴스를 읽으면서 밑에 있는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다 ‘그런 인간은 사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그런 말 하는 사람들 중에 신자가 없기를 바랐습니다.
잘못해서 다 죽어야 한다면 구원받을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을 미워해 본 적이 없습니까?
구약의 요나 예언자가 그런 과정을 겪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앗시리아 니느웨로 보내어 40일 안에 그 도시가 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게 합니다. 앗시리아는 당시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에게도 큰 위협이 되던 적국이었고 니느웨는 그 수도였습니다.
요나는 적국 수도에 가서 그런 예언을 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게 되는 것은 더 싫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님의 뜻으로부터 도망을 치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물고기 뱃속에 가두어 그 곳까지 데려다 놓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요나는 예언을 하는 둥 마는 둥 합니다. 안타깝게도 그 예언을 들은 니느웨 백성은 모두 거친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며 회개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에 하느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요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적국의 수도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거기까지 보낸 하느님이 원망스러워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던 중 햇볕이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는데 하느님은 그의 옆에서 나무가 자라게 하여 그 빛을 가려줍니다. 그래서 조금 살만 했는데 이번에는 바로 벌레들을 보내시어 그 나무를 갉아먹게 하십니다.
요나는 미쳐버릴 지경입니다. 하나 있던 위로마저 없어지니 불평밖에 남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네가 노력도 하지 않은 그 나무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면 나에게 저 많은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소중하겠느냐?”하시며 당신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요나는 결국 회개해야 할 사람은 니느웨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보다 더 몰인정했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 고레띠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마리아 고레띠는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자신의 어머니가 일해 주는 가족의 아들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고레띠는 자신을 성폭행 하려 했던 그 아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손바닥을 올립니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청년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칼로 자신에게 내민 손바닥부터 시작하여 온 몸을 수십 차례 찌릅니다. 그러나 마리아 고레띠는 아직 숨이 붙어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 상처가 많고 깊어서 살아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거의 하루를 꼬박 죽음의 고통 속에서 지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신부님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저를 찌른 그 사람과 함께 천국에 있고 싶어요.”
그러나 청년은 감옥에 갇혀서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그에게 마리아 고레띠가 꽃을 들고 나타납니다. 이것을 경험한 청년은 완전히 회개하고 감옥살이를 마치고는 곧바로 고레띠의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합니다. 고레띠의 어머니도 딸이 용서를 했으니 당신도 용서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 정원사 일을 하며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바티칸 광장에서 있었던 마리아 고레띠의 시성식에도 참석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은 두 사람이 천국에 함께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잘 되면 정말 배가 아픕니다. 그러나 잘못 되면 은근슬쩍 슬픈 척을 해 줍니다. 정말 함께 기뻐해 주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라도 죄인들의 회개를 기뻐합시다. 아니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을 바치고 기도합시다. 이것이 예수님의 뜻이고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신창원씨도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근래의 편지에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얼마나 큰 사랑이 필요했을까요? 그 사랑이 한 사람을 구원하였고 그 모습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시골 아저씨 같은 사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약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물질에 신경을 쓰지 않고 겸손한 사제, 겸손하여 언행에 예의를 갖춘 사제, 성사집전을 경건하게 하고 강론을 경건하게 하는 사제, 편견과 편애를 멀리 하고 후배 양성에 마음을 쓰며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위 글은 신학교 산책길 모퉁이에 언제부터인지,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조그마한 나무 푯말에 적힌 글인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평신도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제상입니다(조정래, 일요한담, 가톨릭 신문 참조).
"먼저 자신이 피안으로 건너가 다른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며, 먼저 자신이 해탈하고 나서 다른 사람도 해탈케 해주며, 먼저 자신이 수양하고 나서 다른 사람도 수양케 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밝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밝게 해주며, 먼저 자신의 먼지를 털고 나서 다른 사람의 먼지도 털어 주며, 먼저 자신이 즐거워 한 후에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해준다."
위 글은 최인호씨의 구도소설 "길 없는 길"을 읽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고 따르는 구도자들은 자기 한 몸 구제하는 데 정신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바 세계를 헤매는 숱한 중생들과 일심동체가 되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 모습대로 솔직하게 살되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제, 많은 일보다는 꼭 해야할 일을 정성껏 하는 사제, 명령하기보다는 귀가 큰 사제, 너무 유식하고 고상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사제가 아니라 때로 실수도 하지만 담담하게 웃을 수 있는 사제, 그래서 누구나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골 아저씨 같은 사제를 원합니다."
위 글은 본당에서 사목하고 계시는 한 수녀님이 그려보는 바람직한 사제상입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려운 생활이 목자로서의 삶, 사제로서의 삶인 듯 합니다. 세상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치는 높은 반면, 사제 역시 인간인지라 실제 생활은 그러한 기대에 결코 부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로서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강론대 앞에 서는 것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곁들여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해보는 낭만적인 삶이 결코 아닙니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풀밭 위에서 여유 있게 책을 본다든지 피리를 부는 그런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늘 양떼의 머릿수를 세야하고, 뒤쳐지는 양들을 끊임없이 몰고 가야하며, 때로 황량한 들판에서 노숙을 하는 거친 생활입니다. 때로 퍼붓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아야 하며, 수시로 다가오는 위험과 돌변의 사태를 대비해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착한 목자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사제들이 착한 목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숱한 부족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충실한 사제,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제, 갈 곳 없는 사람들,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의지처가 되는 사제들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위해 살거나 죽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우리 몸을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값으로 사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1고린 6,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산 이와 죽은 이의 주님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며,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사실대로 아뢰고 심판을 받을 것이므로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를 삼가하고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인간의 문제는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되었다. 이기심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르게 되고, 죄를 짓는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욕심으로 도배된 죄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중심에 ‘나’가 있다.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 살고 행하며 죽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이미 우리의 몸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주님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1고린 6,19).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표준이 되시며 그러므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1고린 10,31).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0,39)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를 위하지 말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거나 심판하고 멸시할 수 없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인하여 믿음이 강한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또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심판관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사실대로 아뢰며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인간이 일으키는 모든 문제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이기심에 빠지고 욕심을 부리는 것도,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해치는 것도,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것도,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나’가 있다. ‘나’로 인하여 죄를 짓고, 다른 이들과 갈등을 일으키며, 교만이나 오만에 빠지고, 괴로워하거나 고통에 신음하곤 한다. 그런데 그 ‘나’라는 것도 결국 죽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렇게 끌어안고 놓지 못하는 ‘나’까지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란 오직 하느님만이 남으며, 하느님이 모든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져 있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늘, 진정 주님만이 모든 것임을 깨닫는 하루가 되자.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관이심을 깨닫고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않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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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하와는 정말로 예뻐요. 왜 그렇게 예쁘게 만드셨어요?”
“그래야 네가 하와를 좋아할 것 아니냐?”
그러자 다시 아담이 물었습니다.
“그런데요, 하와는 조금 멍청한 것 같아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다고 하네요.
“바보야. 그래야 하와가 널 좋아할 것 아니냐?”
우스갯소리이지만, 우리가 조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은 내가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바로 하느님의 배려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또한 대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주 착각에 빠집니다. 나의 능력과 재주로 그런 것이라고, 또한 내가 잘 나서 그런 것이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하느님의 사랑가득하신 배려에서 나오는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투덜거립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이들은 자기들은 의인으로, 세리와 그 밖의 사람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나눔의 기준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심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며, 또 그 판단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만 행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섣부른 판단과 단죄를 행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특히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시는 사랑 가득하신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는 판단, 누구는 의인이고 누구는 죄인이라는 판단 등은 이제 그만해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회개하여 주님 앞으로 겸손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겸손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쉽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서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찾아나서는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 넘치는 주님께 의지할 때만이 주님의 그 보살핌 안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행복은 주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를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지 맙시다.
마음을 들여다보자(안귀옥)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자식의 죽음을 보는 것이요, 그 다음은 이혼이라고 한다. 평생을 함께할 것 같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그만큼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 특히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거나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헤어지는 경우는 더욱 심하다.
그러나 살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부부 갈등을 겪게 되고, 갈등이 심해지면 이혼을 문제 회피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갈등이라면 그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더 큰 사랑을 배워 이혼의 위기를 이겨 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부부 갈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상대방의 의도와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배우자가 불만을 이야기할 때 그 내면을 살펴보면 무언가를 갈구하는데, 그것이 제대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불평하는 상대방의 마음 밑바닥에는 위로와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큰 경우가 많다.
최근 극심한 부부 갈등을 겪다 재결합한 맞벌이 부부가 있다. 그 부부는 각자 직장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대인관계도 원만했다. 그런데 부부 사이에는 불화가 잦았다. 이 부부는 밖에서 늘 긴장하고 살다 보니 집에서는 배우자에게 위로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서로가 상대방을 위로해 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역량을 인정하지 않고 배려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면 섭섭함은 치유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결국 부부는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이혼 과정에서 부부 갈등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지만 이러한 기대를 알려 주지 않은 채 상대방이 알아서 해 주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배우자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아가 작아지면서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들은 이혼 과정에서 서로에게 베풀지 못하고 바라기만 했던 각박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큰 사랑을 찾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갈등의 해결은 내 마음속에 미운 감정이 왜 생기는가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 상대방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에게도 나와 같이 사랑과 위로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테니.
회개
이재성 수사님
어린 시절에 잘못을 저질렀다가 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나서,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잘못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벌까지도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없애주셨음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 복음선포이자 신약 성경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아가고, 믿지 않으면 과거의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믿음을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안에서는 쉽게 회개할 수 있고 다시 죄의 어두움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은총입니다. 방금 목욕하고 나서 다시 진흙탕에 몸을 던지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믿음이 필요합니다.
쇼파 밑의 할머니
김은배 수녀님
저희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양로원에는 스물두 명의 할머니와 수녀 두 명, 주방 자매님 한 명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봉사자들이 오셔서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풀어 나갔습니다. 할머니들은 성격도 다르고 삶의 여정도 달라 다투기도 하고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중 한 할머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를 좋아하고 무슨 일이건 참견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아침에 잠깐 뵙고 어디에 계신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가출한 것은 아닌지 불안하고 난감했습니다. 면사무소에 연락해서 방송을 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기도 하고 할머니께서 잘 다니시던 곳을 가 보았지만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평소 제가 섭섭하게 해드린 것은 없는지 살펴보게 되었고 왠지 저 때문에 어디로 사라지신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방송을 했지만 소식이 없었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다가 다시 한 번 구석구석 찾아보기로 하고 거실과 소파 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소파 밑에 사람 같기도 하고 물체 같기도 한 것이 있어 손전등을 비추어 보니 할머니께서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꼭 끌어안으며 “할머니, 제가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르시는구나!” 하면서 한참 안아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특유의 말씀으로 “왜 그려슈.” 하며 빙그레 웃으시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왜 그러슈.” 한마디로 우리의 어수선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다시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잃었던 할머니를 찾은 안도감에 한바탕 웃으며 모두 모여 파티를 했습니다.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 드릴 때 우리에게 오는 기쁨은 배로 늘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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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 사제관에 여러 명의 손님이 오셔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타를 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게 되었지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어떤 형제님께서 아주 멋진 기타 연주를 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했지요. 그런데 다른 형제님 한 분이 “신부님, 저도 기타 잘 칩니다.”하면서 기타를 좀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부르면서 기타를 치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기타를 치기는 치는데 기타 줄을 손가락으로 치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기타의 뒤판을 치면서 노래 부르기 때문이었지요. 하긴 이 역시 기타를 치는 것이겠지요.
기타는 변하는 것이 아니지요. 똑같은 기타이지만, 어떤 이가 치느냐에 따라서 멋진 음악이 연주되던지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이 나는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코 시끄러운 소음이 나온다고 해서 기타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삶을 내가 어떻게 끌어가느냐에 따라서 멋진 삶이 될 수도 있고, 형편없는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탓을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탓을 외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으로 이어질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사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복음을 통해서 이 점을 더욱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즉,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위해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광야에 놓아둔 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는 분이라고 하시지요. 또한 잃어버린 은전 하나를 찾고서 기뻐하는 어떤 부인의 모습이 바로 주님 자신이라고도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고 당신의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주님께서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자신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회개’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의 탓과 주님 탓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 앞으로 나아올 때 주님께서는 쉽게 잃어버린 우리들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잘잘못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으십니다. 혹시 내가 잘못 하나 했다고 곧바로 주님께서 벌을 주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큰 잘못으로 인해서 주님과 멀리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 앞으로 나왔을 때 기쁘게 맞아들으시면서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고 힘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실수로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을 때, 주님의 부르심에 다시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마음에 새깁시다.
영원히 들어도 좋은 말(‘좋은 글’ 중에서)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힘을 내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도록 하세요.
그러면 당신도 힘을 얻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들려 주세요.
그러면 당신도 걱정이 줄어들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용기를 잃지 마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용기가 생겨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속삭이세요.
그러면 당신도 용기를 얻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조건없이
용서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감격하거든요.
그러면 당신도 용서를 받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푸근해 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또렷하게 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도 감사를 받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아름다워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환해 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소근거리세요.
그러면 당신도 아름다워지게 될 테니까요
살면서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랑해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사랑이 깊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하셔야 해요.
그러면 당신도 사랑을 받게 될 테니까요
완고함
서현승 신부님
몇 년 전 수도회 연피정 중에 강사 수녀님으로부터 ‘성경은 마음의 완고함과의 기나긴 투쟁의 역사’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의 깊은 묵상과 삶의 체험으로부터 나왔을 그 통찰은 예수님께서 대립각을 세우셨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 대면하는 복음의 장면에서 잘 이해가 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세리들이나 흔히 ‘죄인’이라 손가락질받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보기에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혹은 받아야 할 죄인들이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들이 회개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하느님이 훨씬 더 기뻐하신다며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알고 있던 기존의 가치를 전면 부정합니다.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판단, 단죄보다 먼저 우리의 시선을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만 있다면, 잃었던 양 한 마리나 은전 한 닢을 찾는 그 기쁨과 같은 우리 삶의 소중한 그 무엇을 우리는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선 세리이기 때문에 혹은 몹쓸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분류하지 않을 것이며 또 신분이 바리사이이기 때문에 혹은 율법학자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분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완고한 마음, 그것이 진짜 죄입니다.
더 필요한 곳을 찾아
김광태 신부님
요즘에는 자연보호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20여 년 전 군대에서는 가능했던 일이다. 민통선 안쪽에서 군복무를 하던 시절, 초소에서 50미터쯤 떨어져 있는 개울에 오리 떼가 몰려왔다. 점심 메뉴로 맛있는 오리탕을 기대하며 오리 떼 한가운데로 총을 쏘았다. 오리들이 푸드덕거리며 일제히 날아올랐는데 총 맞은 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떤 녀석이든 맞으리라 기대하고 대충 쏘았더니 한 마리도 맞지 않은 것이다.
강론할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신자들의 연령이나 교육 정도, 직업과 생활 수준이 다르다 보니 누구에게 초점을 맞출까 고민하다가 모두에게 해당될 만한 것을 주제로 삼게 된다. 다들 좋은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누구한테도 진정으로 힘이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되찾은 양의 비유를 볼 때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미사에 오시는 분들을 위해 정성스레 강론을 준비하지만 어찌 보면 이분들은 내가 아니어도 계속 열심할 분들이다. 어쩌다 봉성체를 가면 내 손을 꼭 잡고 놓을 줄 모르는 할머니들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 달라는 할아버지들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성당 밖에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위해서는 언제나 시간이 없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 속의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놓아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으러 떠난다. 아흔아홉을 돌보느라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도 아흔여덟 마리가 남아도 그렇게 할 것이고 한 마리가 더 없어져도 그럴 것이다. 결국 ‘다수’를 중시하는 사람은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지키게 된다. 반대로 아흔아홉을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있는 목자는 다른 양을 잃어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필요한 순간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이 목자는 무리를 온전히 지켜낼 것이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하나를 돌볼 때 모두를 가장 효과적으로 돌볼 수 있다.
김종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있는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어째서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는가?”하고 투덜거림에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백 마리 양 중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양 주인, 그리고 은전 열 닢 중에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서 집 구석구석을 살피는 한 부인.... 비유에 나오는 양 주인과 부인은 바로 우리가 유혹과 죄로 방황하고, 힘겨움과 고통으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언제나 함께 하고자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시고 찾으시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이심을 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정말 소중한 우리 하나하나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마다하지 않고 하실 우리 아버지 하느님.... 그렇기에 하느님이 이와같은 큰 자비와 사랑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소중한 존재들임을 다시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한편 때론 우리는 길잃은 양, 잃은 은전 한 닢이 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단체 생활을 하면 꼭 누군가는 단체에 피해를 주는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저 사람은 쓸데없이 우리들한테 피해를 주는 지 몰라.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어.”
“나도 잘 하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저 사람처럼 하지는 않아”
내 자신의 잘못에는 늘 자비로운 아버지 떠올리며 고개 숙이지만, 다른 이들의 잘못에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엄격한 판단자의 입장에서 고개를 바로 들곤 합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정말 힘겨워하고 외롭고 고통 당할 때 외면하지 않고 자비로, 사랑으로 함께 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 그리고 다른 고마운 이들처럼, 나 아닌 다른 이들이 그러할 때 나 자신이 수고를 마다 않고 사랑을 나눠준다면 그 기쁨은 이 세상에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도 함께 기뻐해주실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과 은전을 찾은 주인은 말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았습니다.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잘못된 모습을 보고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나아가서 그의 변화에 진정으로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그를 위해 진정으로 박수를 쳐주는 것, 그 옛날 예수님께서 행하신 방법이고 나아가서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행해야 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진정 내 자신이 함께 기뻐하고 박수를 쳐주어야 할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기꺼이 여러분의 두 손으로 그를 잡아 주고 박수를 쳐주십시오.
“그때에 그와 여러분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노래 할 것입니다.”아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배성수 신부님
여러분은 최근에 눈물을 흘려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얼마 전 인터넷에서 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내용인 즉,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수록 오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어떤 이는 눈물의 세 종류에 대해서 말합니다. 신뢰의 눈물, 회개의 눈물, 그리고 연민의 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의 넉넉한 마음 안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흘리는 눈물이라면, 그것이 자신을 정화해주며,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두 개의 비유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하나는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이며, 다른 하나는 잃은 은전을 되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들을 말씀하신 동기는 예수께서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음식까지 나눈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비난에 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자비에서 제외된 죄인이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버리지 않고 기어이 찾아와서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자기의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의 마음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이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서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벌립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은 사실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목자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마음이며, 그 마음을 예수님은 그대로 실천하십니다. 동시에 은전 한 닢을 잃고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고 샅샅이 뒤져서 기어이 찾아내어 기뻐하는 여인의 비유도 있습니다.
이 여인의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목자의 마음과 여인의 마음은 바로 우리들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올바르다고 하는 이들의 어떤 비난과 저항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아버지의 따스한 마음을 실천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판단으로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설령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해도 그 사랑과 자비는 제한될 수 없음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길에서 종종 벗어낫다가 되돌아서는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의 크신 마음을 전해줍니다.
실상 우리는 바울로 사도, 아우구스티노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위대한 죄인들의 회개에서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을 얻습니까?
여러분!
지나온 시간들 속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그때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는 책의 내용 중에 ‘자비’에 대한 다음의 설명이 있습니다. “자(慈)는 남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마음이요, 비(悲)는 남의 슬픔을 함께 하는 슬픔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오늘 하루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도 아버지이시며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이 넘쳐흐르도록 기도드립니다.
곧 끊임없는 회개를 요구하실 뿐이다.
오창일 신부님
병원이 문을 열자 첫번째 환자가 들어왔다. 의사는 그 환자를 진찰했지만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의사는 차마 그 환자에게 모르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여러 의학 서적을 뒤져보았지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의사는 매우 초조해졌다. 환자가 침대에 누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의사는 진땀까지 났다. 바로 그때 묘책이 떠올랐고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다. “전에도 이런 병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까?” 환자가 대답했다. “예, 5년 전에 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요, 틀림없군요. 그 병이 다시 재발한 것입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중한 병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잣대로 하느님의 뜻을 판단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죄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볼 때 가장 먼저 고백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악을 행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시키려 한다. 자신은 아니고 다른 사람들만 그러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안에는 미움과 증오와 분노, 시기심과 질투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목자가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고, 여인이 은전을 찾듯이 하느님은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들을 찾아 나서신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스스로 죄가 없고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시작을 결심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죄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인간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완전함을 위해 노력하는 자세, 곧 끊임없는 회개를 요구하실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그 요구에 응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인 완덕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회개하는 성인
백광현 신부님
어느 날 로마의 한 윤리신학자에게 고해성사를 청하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짜고짜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해신부는 “잘했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고백하자 신부는 또다시 “정말 잘했습니다”라고 대답할 뿐 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고해자는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화가 나서 “내가 사람을 죽였대도요! 그런데 잘했다고요!”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고해신부는 “당신이 죄를 회개하는 그 마음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에 잘했다고 한 것입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참된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회개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가끔 고해성사 안에서 회개한 성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사제가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됩니다. 성사 안에서 가장 큰 아름다움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목소리를 통해서도 느낌과 감동으로 전해집니다. 한 사람의 회개가 하느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상상만으로도 짐작이 됩니다.
진짜 자격 있는 사람 나와 봐
이성원 신부님
예전에 있던 본당에서 노숙자와 행려자들을 위해 ‘우리 물터’라는 빨래와 목욕 시설을 자그맣게 운영했습니다. 5월에 문을 열었는데 첫날 할아버지 노숙자 한 분이 방문을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봄날인데도 열여섯 가지 옷을 벗으시더군요. 더 기가 막혔던 일은 바로 그 한 분이 목욕한 물로 하수구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씻을 곳이 없었길래’ 하는 마음에 이런 시설을 만들기를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물터를 운영하면서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한 젊은 친구는 노숙자로 생활하다가 간신히 신문보급소에 들어가 밤에는 보급소 한구석에서 잠을 자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이면 너무나 외로워서 차라리 길거리 무료급식을 먹으며 옆의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겠다 싶어 다시 노숙생활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노숙자나 행려자들을 보고 ‘왜 저 사람들을 도와주는가? 도우려면 차라리 성실하고 장래가 유망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낫지 않은가?’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도움받을 자격도 없으니 싹 쓸어다 도시 바깥으로 내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함께 살 자격이 있다 없다를 쓸모가 있는가 없는가로 따지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 노인들과 약자들은 함께 살 자격이 없는 게 되는 셈인지?
사랑은 기억하는 것이고 사랑은 잊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받은 것은 기억하고, 남에게 베푼 것은 잊는 것이 조건 없는 사랑이고 진짜 사랑이겠지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당신네 스승은 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느냐고 못마땅해합니다. 가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 깔끔하고 정결하고 학식있고 제도나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 가운데 ‘저 사람은 왜 죄인들과 어울리느냐?’고 못마땅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환영하시고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셨다는 사실을 기억시켜 주고 싶습니다.
민경덕 신부님
찬미예수님, 어느 시골학교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너무나도 소란스러워서 선생님께서는 떠드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기억했다가 한꺼번에 교실에서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들을 복도로 내보내놓고 보니 교실에 남은 친구는 단 한명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남아있던 친구는 뒷 자리에서 깊이 잠들어 있어서 다른친구들과 떠들지 못했고, 선생님께서 아이들을 내보냈던 사실조차 몰랐던 것이였습니다.
아이들을 다시 교실로 불러들이자니, 선생님 자신이 민망하고, 그 잠든 학생을 깨워서 수업을 하자니, 잠든 그 학생이 괘씸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잠시동안 그 잠든 학생의 표정을 뚫어지게 보다가 아이의 옆 자리에 가서 책상에 엎드려서 잠을 잤습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신이 잠든 그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벌써 어두워졌고, 선생님이 잠든 자리 앞에 자그마한 편지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저는 새벽에 일찍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를 따라 밭 일을 도와드립니다. 그런데 그만 햇살이 너무 따뜻하고, 교실이 너무 편하게 느껴져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선생님께서 제 옆에 잠들어 계신 모습을 보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선생님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깨워 혼내시지 않고,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부터는 졸지 않고 잠들지 않고, 수업 열심히 잘 듣겠습니다”라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말씀 신자 여러분, 우리는 작은 잘못을 저지르는 아이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될 때, 그들의 표정을 보신적이 있으시죠? 정말 어쩔줄 몰라하지만, 그래도 빤히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용서를 청하는 아이들의 눈망울.
그러한 눈망울을 지닌 아이를 부모는 탓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야, 조금은 주의하렴” 혹은, “괜찮아, 다치지 않고, 마음 상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하나 배웠다고 생각하면 된단다”하며, 아이를 품어주거나, 엉덩이를 토닥여 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의 잘못을 보고, 엄하게 바라보시다가도 우리들의 여린 마음이 행여라도 상할까 싶어, 금새 당신은 환한 미소를 지어주십니다.
그런데 그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를 닮아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 평안히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오늘 이 사람의 집에도 구원이 내렸다”, “아버지 이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는 그렇습니다.
어린시절 잘못을 저지르면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하나 깨달을 때까지 대화로 설명해주시는 아버님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이기에, 부족하기에 그렇답니다.
하지만, 잘못을 저지르고도 끝까지 하지 않았다고, 끝까지 잘못한 것 없다고 하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결국 매를 드시고 맙니다. 그러나 그 매로 아이를 치는 어머님의 마음이 더 아프듯, 회개할 줄 모르고, 더욱더 악한 일을 하는 이들을 보며 하느님께서는 매를 드시며, 그 매로 인하여 가슴이 찢어지십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말씀신자 여러분, 진실로 우리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만큼 슬프고 힘겨운 것은 없습니다. 선생님의 마음처럼, 조금은 너그럽게, 아이의 마음처럼, 조금은 더 진솔되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이길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행여, 네 어미가 너를 잊을지언정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
아멘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 누가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로 향한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홍성만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예수님 가까이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올기종기 모여듭니다. 모여드는 이들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은 무척이나 흐뭇하셨을 것이라고 묵상합니다.
되찾은 양과 은전의 비유에서 들려주신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바로 인간의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파견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생전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죄이느이 회개에로 모아집니다.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가슴에 담고,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과제이시며 동시에 아드님의 사명이십니다.
이는 망나니 자식이 뉘우치며 부모님의 품 속에 다시 안기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심정보다 더하십니다.
우리 모두 잊지 맙시다.
한 사람의 회개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나의 회개는 무엇일까?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그 누가 마음을 돌려 하느님께로 향한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오늘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강영구 신부님
사람을 한자말로 인간(人間)이라고 합니다.
인간(人間)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 사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있어야 비로소 사람답게 됩니다.
사람의 행복은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있을 때 참 행복을 찾을 수 있고 누리게 됩니다.
‘너’와 ‘나’와 관계 속에서 ‘나’를 파악하고, 내가 할 바를 다 할 때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너’가 있어 ‘나’를 알고 너를 사랑함으로서 나를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너’를 알고 ‘너’를 사랑하고 ‘너’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다듬어갈 때 가능해집니다.
비록 가난하다 하더라도, 무식하다하더라도, 병들어 몸이 아프다 하더라도 곁에 함께 머무는 사람이 있고 기댈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합니다.
그러나 산더미 같이 많은 돈과 재산을 쌓아놓고,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산해진미(山海珍味)를 먹으며 하늘에 닿을 지식(知識)을 가졌다하더라도 곁에 아무도 없는 외톨이라면 그는 불행합니다.
불가(佛家)에서는 가장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가르칩니다.
관계(關係)를 단절한 사람이 빠지는 지옥(地獄)이지요.
탐욕, 아집, 고집, 망상, 오만, 독선 따위로 높은 장벽을 쌓거나 건널 수 없는 골짜기를 만들어 너와 나의 관계를 단절하는 사람이 무간지옥(無間地獄) 속에 머물게 됩니다.
스승 예수님은 장벽을 허물고 골짜기를 메워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빠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자, 같이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목>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언젠가 가톨릭 대학교에서 있었던 민영소년교도소 건립 추진을 위한 심포지움(서울 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주최)이 생각났습니다. 당시 저는 간단한 강연 하나를 맡았었는데 이런 요지의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참고로 개신교에서는 이미 성인 민영교도소를 설립하여 교정사목에 새로운 일대 전환기를 마련하여 보다 효과적인 교정사목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에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저 사람들, 반사회적인 대형 사고를 쳤는데, 당연히 고생해야지요. 교정사목, 그런 일 오히려 의존심만 키워주고, 역효과만 냅니다. 저 사람들에게 투자하는 것,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걸요.”
물론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정사목은 다른 사목보다 스트레스가 많은 사목임이 분명합니다. 교도소나 구치소, 소년원의 그 높은 담장을 내 집 드나들 듯이 왕래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런 일입니다.
또한 그 안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출소해서 ‘잘 지내고 있겠지?’ 하고 안심하고 있으면, 어느새 또 들어와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화가 치미는 일입니다. 시간 투자, 돈 투자도 만만치 않고,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도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정사목에 한번 투신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이 사목에 대한 묘한 매력 때문에 교도소나 구치소, 소년원으로부터 쉽게 발길을 끊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교도소나 구치소, 소년원 방문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권고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소자들의 삶 안에는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의 흔적이, 예수님의 얼굴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고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고, 거지들에게 옷과 음식을 주고, 또한 갇힌 사람들을 방문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교정사목의 배경에는 죄인들이라고 해서 내치지 않으시고 자신과 똑같은 한 형제로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재소자들, 출소자들, 소년수들을 구제불능의 존재로 여긴다거나 포기하지 말고 변화 가능성으로 충만한 내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마음이 교정사목의 기반입니다.
‘그래 저 어린 것이, 그간 이 모진 세상을 혼자 헤쳐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피붙이 하나 없이, 관심 가져주는 사람 하나 없이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저런 길로 빠졌겠지?’ ‘이제 내가 저 아이에게 다가가서 그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줘야지’하는 착한 목자의 마음에서 성공적인 청소년 교정사목은 시작될 것이고, 계획하고 있는 소년교도소 건립도 이런 마음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민영소년 교도소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려면 막대한 투자가 요구됩니다. 기본적인 대지 확보가 필요하고, 그에 따르는 건립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의 재원조달도 필수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인성교육이나 기술교육을 위한 첨단 시스템이나 각종 설비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착한 목자의 마음을 지닌 인적자원입니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돌아다니는 그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 같은 아이들에게서 무한한 성장의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을 눈여겨볼 줄 아는 운영자들, 선생님들, 자원봉사자들, 후원자들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손 하나에 상처가 났을 때, 상처부위가 커지면서 안으로부터 곪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퉁퉁 부어서 보기 흉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처신합니까?
손을 보기 싫다고, 또는 열이 나고 아프다고, 아니면 거추장스럽다고 잘라내시겠습니까?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문제없는 다른 한쪽 손보다 더 신경을 쓸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수술부위를 정성껏 소독하고, 더 이상 곪지 않도록 항생제도 복용할 것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그 어떤 다른 신체부위보다 몇 배의 정성과 사랑을 상처가 난 손에 쏟아 부을 것입니다.
문제성이 있는 청소년들, 방황하고, 이미 맛이 좀 간 아이들, 소년원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우리 교정사목대상청소년들, 어찌 보면 상처 난 손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길 잃고 헤매는 한 마리 어린 양입니다.
거추장스럽게 여기고 잘라버릴 존재들,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추방시킬 제거대상자들이 아니라 더 깊은 관심과 더 열렬한 사랑과 인내로 감싸 안아 주어야할 우리의 아들들입니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 전례력상 대림시기, 성탄시기, 연중시기(1), 사순시기, 부활시기, 연중시기(2)를 통틀어 평일미사의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이다. 그 중에서 연중시기를 살펴보면, 연중 제1주간 월요일부터 제9주간 토요일까지는 마르코복음(1,14-12,44)을,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교회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34주간 토요일까지 루가복음(4,16-21,36)을 매일미사의 복음으로 듣게된다.
우리는 지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계속해서 루가복음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봉독하고 묵상하여 왔다. 그 중에서 연중 26주간 월요일까지의 복음(4,16-9,50)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에 관한 보도였고, 그 후부터는(9,5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도중의 활동에 관한 보도였다. 후자의 보도에서 우리가 받은 느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당부분 대단히 무겁다는 것이었다.(9,51-14,35) 갈릴래아 주변도시들에 대한 불행선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선언, 반대자들의 모함, 바리사이들의 누룩에 대한 경고, 어리석은 부자의 예화, 재물에 대한 경고, 준비와 기다림, 회개와 속죄,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와 불행선언, 엄한 예수추종의 조건 등이 바로 그랬다.
오늘부터 봉독되는 루가복음 15장은 새로운 주제들로 전개된다. 루가복음사가의 고유한 하느님 자비와 사랑에 관한 것이다. 우선 예수님 말씀의 청자(聽者)로 세리와 죄인들이 거론된다.(1절)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 있어서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 대한 비난의 빌미가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가 그것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잔칫상이 꽉 차기를 바라신다.(14,23)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아있다. 100마리의 양 중에 99마리가 왔다 해도, 은전 10개 중에 1개가 모자란다 해도, 그 잃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찾을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통해 예수님 자신의 행동을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실 뿐 아니라, 이참에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그릇된 하느님 상을 고치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 스스로가 잃은 양 한 마리이며, 잃은 은전 하나에 속한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그렇게 잃은 것에 속한다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향하여 다가오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외면하지 않고 회개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100 중에 1개인 나 자신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바로 나 하나 때문에 세상 끝까지 찾아 나서시고, 찾을 때까지 하늘 나라의 잔치를 미루고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하는 나 하나의 회개를 하느님과 하늘의 천사들이 그렇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나 하나가 곧 전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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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에는 수원교구 교구장님이신 이용훈(마티아) 주교님과 좋은 만남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인천교구 보좌 주교님이신 정신철(요한 세레자) 주교님께서 신학교 은사님을 찾아뵙자고 제안을 하셔서 교구청에 있는 제자 신부들과 함께 했던 자리였지요. 저의 석사 논문 심사를 해주셨고 신학교에서도 많은 영적 가르침을 받았기에 늘 찾아뵙고는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교님을 감히 찾아뵙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방문을 하니, 주교님께서 얼마나 저희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는지 모릅니다. 맛있는 저녁식사와 좋은 술도 사주시고, 사제로서 큰 힘이 될 수 있는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진작 올 걸…….’
주교님이시기에 어렵다고 자주 인사도 못 올렸던 저의 모습을 많이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첫걸음을 해보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으며, 이렇게 큰 환대를 받는데 말입니다. 문득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막연하게 주님을 어려워하고 내게 멀리 있는 분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가까이 가기 보다는 세상에 더 깊이 속해 있으려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주 우연히 주님께 나아가게 되고, 주님을 체험하게 되지요. 바로 그때 이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주님께 다가오는 죄인인 우리들을 주님께서는 늘 기쁘게 맞이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하긴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죄인인 우리들이 회개하고 당신 앞에 나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그 동안 내가 소중하고 이롭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에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주님 앞에 용기 있게 나아갈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벌주시는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를 용서하시고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 세상을 더욱 더 힘차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의 대가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감소다(E.클리버).
이런 사람이 좋다(헨리 나우웬)
그리우면 그립다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불가능 속에서도 한줄기 빛을 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좋다.
다른 사람을 위해 호탕하게 웃길 줄 아는 사람이 좋고
화려한 옷차림이 아니더라도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떠한 형편에서든 자기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노래를 잘하지 못해도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린아이와 어른들에게 좋은 말벗이 되어줄 사람이 좋다.
책을 가까이 하여 이해의 폭이 넓은 사람이 좋고
음식을 먹음직스럽게 잘 먹는 사람이 좋다.
철따라 자연을 벗 삼아 여행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손수 커피 한잔을 탈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하루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하루 일을 마치고 뒤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줄 줄 아는 사람이 좋다.
때에 맞는 적절한 말 한마디로 마음을 녹일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외모보다는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 좋다.
친구의 잘못을 충고할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고
새벽 공기를 좋아해 일찍 눈을 뜨는 사람이 좋다.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남을 칭찬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좋다.
항상 겸손하여 인사성이 바른 사람이 좋고
춥다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 좋고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좋다.
신관神觀의 차이
정희완 신부님
여러분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학문적으로 말해, 여러분의 신관은 무엇입니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은 자신의 신관, 즉 자기 자신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관점에 따라서 삶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역사를 보면, 하느님을 자기 규정에 맞추어 생각하는, 즉 자기 식대로 하느님을 정의하는 사람들이 늘 있어 왔습니다. 사실, 많은 경우 이들은 자기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인 양 포장하고 자기의 행동이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올바른 것처럼 여기는 교만과 위선에 떨어질 위험이 많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들은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 간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들을 통해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처럼,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는 부인처럼, 죄인을 더 감싸 안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임을 선포하십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그것만으로도, 자비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끌어안으실 것이라는 것, 그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황영준 신부님
어느 주일, 미사 후 사제관으로 들어서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다급한 자매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신부님, 미사 끝나고 집에 가다가 아이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저 어떻게 해요.” 얼마 전 남편을 사고로 잃고 아들 둘을 혼자 열심히 키우는 자매님이었습니다. 저는 자매님이 계신 곳을 묻고 곧바로 뛰쳐나갔습니다. 자매님의 얼굴은 눈물과 걱정으로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단 경찰에 신고를 부탁하고 차를 타고 이 길 저 길 찾아 나섰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어 신호등을 무시하고 불법 유턴도 하며 운전을 했습니다. ‘혹시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나??’ 오만가지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경찰서에서 아이들을 찾았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매님이 계신 곳에 와보니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엄마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또 아이들은 엄마에게 혼나지 않을까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하느님 고맙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한두 번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자녀를 잃어버렸을 때의 그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라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걱정이 되어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입니다. 그 자녀가 하느님의 품을 떠나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닐 때 하느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그리고 자녀가 다시 하느님 품에 안겼을 때 하느님의 기쁨은 또 어떠했을까요.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는 복음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가족과 식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 가까이 모여듭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듭니다.
뭔가 떨어지는 것이 없을까 하고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뭔가 청탁을 하기 위해 모여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듭니다.
이것은 뭔가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 찾는 바리사이와 다르고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 하지 않고 아쉬운 것이 있을 때 달라고 하기 위해서만 찾는 우리와도 다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듭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말씀을 듣기를 기대했을까요?
어제는 제가 며칠 후 주례하기로 되어있는 사람들을 면담했습니다.
이들의 혼인을 제가 주례하게 된 데는 사연이 좀 있습니다.
저는 보통 혼인주례를 잘 하지 않는데, 제가 혼인주례를 하게 된 것은 남자가 40대 후반이라서 젊은 신부들이 주례하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보다 먼저 주례하기로 했던 신부님이 이들에게 퇴자를 맞아서 제가 주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님이 퇴자 맞은 이유가 이미 결혼하기로 한 그들에게 나이 차가 나는데 어려움이 많지 않겠냐며 걱정하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러지 않아도 걱정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주례 사제에게서 또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축복의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세리와 죄인들도 이러했을까요?
어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러 왔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들으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면 그것이 어떤 말씀이건 자기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고 자기들을 꾸짖는 말씀일지라도 필요한 말씀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하고 투덜거릴 정도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아니 당시 모든 사람들이 싫다고 밀어내는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받아들이셨고 음식도 같이 드셨습니다.
며칠 전 식사를 하면서 형제들과 家族과 食口의 차이점에 대해 얘기 나눈 적이 있습니다.
얘긴즉슨 가족이 혈연에 의해 맺어진 한 공동체라면 식구는 혈연과 상관없이 맺어진 밥상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떨어져 있어도 혈연에 의해 가족이고 식구는 혈연관계가 아니지만 누군가를 공동체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밥을 같이 먹는 관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이런 식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잘못된 표현일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인 것이지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내친 적이 없기에 받아들일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비유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잃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원래 한 식구였는데 잃었던 것뿐이고 그래서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이었고, 더 나아가서 애타게 찾던 우리의 식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였기에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가리지 않고, 내 입맛대로 요구하지 않고 모두를 식구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오늘 이 복음을 읽은 저의 큰 과제입니다.
가치전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형제 여러분,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피서 3, 7-8)
개똥도 약으로 쓸려고 하니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필요로 할 때는 그 흔하던 것까지 없다는 자신의 운 없음을 한탄하는 것이지만 여기에 숨어 있는 뜻이 있습니다.
개똥도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흔하고 가치 없는 것이 필요하고 귀한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와 선택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많은 사람이 귀하게 여기고 모으는 금도 나의 필요와 선택에 따라 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필리비서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지고한 가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지식 때문에 전에 이롭고, 전에 가치 있던 것들이 해롭고 무가치한 것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우매한 보통의 우리에게는 나쁜 쪽으로 가치 전도가 일어나는데 바오로 사도에게는 좋은 쪽으로 가치 전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전에 그렇게 필요했던 돈이 하느님 때문에 불필요하고 무가치합니다.
전에 그렇게 필요했던 그 많은 인간관계가 하느님 때문에 다 필요 없습니다.
전에 그렇게 요긴했던 그 많은 세상에 대한 지식도 다 필요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지금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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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구보다 변화구에서 왜 더 많이 홈런이 나오는 줄 아세요? 변화구는 치기는 더 어렵지만 치기만 한다면 더 큰 힘을 받고, 더 많이 회전하면서, 더 멀리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앞에 남들보다 힘들고 어려운 변화구가 날아오고 있습니까? 축하드립니다. 당신에게 홈런을 칠 수 있는 멋진 기회가 주어졌군요.”
요즘 한창 잘 나가는 메이저리그 류현진 선수의 트위터에 있는 글이라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 그러나 홈런 칠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결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던지기보다는 더욱 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서 이 좋은 기회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렵고 힘들다고 그냥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냥 삼진 당해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돌아갈 뿐인 것이지요.
우리가 죄로 물들어 있는 상태는 어쩌면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냥 죄로 물들어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주님께 다가설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더 나은 ‘나’, 행복한 ‘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부족하고 나약한 마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너무나 쉽게 흔들리며 이로 인해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다는 것도 아시지요. 하지만 단 한 명도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계속해서 우리를 찾으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은 저희들에게 전해줍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나가는 목동, 잃어버린 한 닢을 찾고 기뻐하는 부인의 모습이 바로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버려두고서 나를 찾으러 올까?’라는 생각으로 포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단 한 마리의 양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찾으시고 편안하고 안전한 양 우리인 당신 품으로 우리 죄인들을 데려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의 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내게 다가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여유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말한다면, 자신의 나약하고 부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려는 우리들의 노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이 분명 우리를 찾아 나선 주님을 쉽게 만나게 될 것이며, 주님을 맞아들여 주님과 함께 큰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탁한 물속에 깨끗한 물을 계속 넣으면 탁한 물이 점점 맑아집니다. 죄로 물든 마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통해 분명히 깨끗해집니다.
프로 선수들은 자기 시간 중 20퍼센트를 시합에, 80퍼센트를 훈련에 투자한다. 반면 직장인은 자기 시간의 99퍼센트를 일에, 1퍼센트를 자기 계발에 투자한다. 연습 없이 시합에 임하는 것과 같다(혼다 나오유키).
황금 채굴 꾼처럼(‘좋은생각’ 중에서)
미국 기업인 메리 케이 애시는 직원을 대할 때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떤 대우를 받고 싶은가?”를 늘 고민했다. 누군가 직원들을 대하는 자신만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황금 채굴꾼의 마음으로 직원들을 대해요. 황금 채굴꾼이 약 0.028킬로의 금을 얻으려면 흙을 얼마나 퍼내야 하는지 아세요? 수십 톤이에요. 그러나 황금 채굴꾼은 수십 톤의 흙에는 관심이 없어요. 그의 마음의 눈은 오직 0.028킬로의 황금에 집중되죠. 그래서 황금을 가질 있는 거예요. 나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그런데 대부분은 타인의 장점보다 단점에 집중해요. 황금 채굴꾼으로 비유하면 금보다 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격이지요. 그러다 보니 금 같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없죠. 그러나 인간관계의 달인은 단점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직 장점에만 관심이 있죠. 모든 사람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니 어떤 사람과도 금 같은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지요.”
내 이웃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흙을 보는 것이 아닌, 금을 바라 볼 수 있는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
99명의 환자보다 1명의 응급환자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독일서 의학공부 심장전문의가 되어 여러 과정 마치고 병원을 차렸습니다. 작은 외상 감기 체증 환자들을 종일 돌보다 저녁에 긴급환자가 왔습니다. 심장마비 환자를 열정으로 초긴장 집도 후 살려내어 너무 기뻤답니다.
하루의 피곤이 확 풀리면서 절로 감사기도가 터져 나오더랍니다. 누구나 처리할 99명의 환자보다 1명의 응급환자를 제대로 살렸으니 말입니다. 99마리의 양보다 길 잃은 1마리 양을 찾아 기뻐하시는 성화를 보면서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깨달음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아갈수록 자유로워지니 깨달음의 여정은 자유의 여정입니다. 진정한 내적자유와 기쁨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깨달아 가면서 마음도 새로워지고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이라면 내적성장과 성숙이 정지된 무가치한, 무의미한 삶입니다. 구원과 직결된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그대로 은총이요 구원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마지막 구절입니다. 제3자가 편지체로 시골신부의 죽음을 전하는 감동적인 대목입니다.
-그는 자기 손을 제 손 위에 얹으며
제 귀를 자기 입에 가까이 갖다 대라고 분명한 눈짓을 했습니다.
그러더니 몹시 느리기는 하지마는 분명한 말소리로
"아무려면 어떤가? 모두가 은총인 걸"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아주 정확히 여기에 옮겨 적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곧 숨을 거둔 것 같이 생각됩니다.-
마지막 임종어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깨달음의 전 삶을 요약하는 마지막 임종어입니다. 묘비명으로 해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크나큰 깨달음과 더불어 선종한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의 시골신부입니다. 불가에서는 깨달은 자를 각자라 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예수님도, 바오로도 위대한 각자입니다. 바오로의 깨달음은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지요. 다음 바오로의 고백은 깨달음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불가의 깨달음과 다른 분기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은 바로 주님과 사랑의 '만남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만나 깨달음이 깊어갈 때 세상 모두가 덧없어 지니, 비로소 세상 모두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이런 이보다 자유로운 사람, 부요한 사람,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인간이 물음이라면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처럼 깨달음의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하느님의 마음을 즉시 이해합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깨달음에 도달했다면 예수님은 곧바로 아버지를 만나 깨달은 분입니다. 바로 복음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기쁨이자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기쁨 가득한 음성을 듣는 듯 합니다. 이어 예수님은 못박듯이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기쁨을 확신에 넘쳐 고백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바오로처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만나 깨달음에 이를 때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바로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매일미사보다 깨달음의 여정에 좋은 길잡이는, 이정표는 없습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5,10).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선배 신부님께서 ‘인생은 흑자’라는 강론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나는 기여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루만 살았어도 인생은 흑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덤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형제들을 만났고,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신앙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생명들은 왜 태어났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다만 주어진 본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가치를 부여하고,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은 가진 것을 빼앗길 때 생겨납니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서 자라납니다. 이 세상이 나의 것인 양 착각할 때 퍼져나갑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나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었음을 알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다른 이와 비교해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비록 지치고 힘들어도, 절망에 빠졌어도, 잘못된 길을 갔어도 하느님께서는 그런 나를 온전히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여행을 온 것뿐입니다. 우리는 여행을 가면 경치를 구경하고, 좋은 추억을 남기고 오려합니다. 우리는 여행지에 있는 것들을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시간이 되면 주저 없이 털어버리고 오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이 나의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투고, 속이고, 죽이고 죽습니다. 참 허망한 일입니다.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창을 펴서 보습을 만들고, 칼을 펴서 낫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는 민족끼리 싸우지 않고, 참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높은 산은 평평해지고, 골짜기는 메워지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가난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없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다만 우리가 인생은 하루만 살아도 흑자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생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은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소유에 필요했던 것들이 필요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문도, 지식도, 직책도, 능력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 15장은 참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부족함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해의 끝자락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재물을 세상에 쌓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것들에 기뻐할 때,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데려 가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재물을 쌓으려거든 하늘에 쌓으십시오.’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가 나눌 때,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우리가 양보할 때마다 하늘에 재물이 쌓일 것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송영진 모세 신부님
11월 6일의 복음 말씀은 '되찾은 양의 비유'(루카 15,1-7)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 15,8-10)입니다.
이 두 비유는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바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간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다, 하나도 예외 없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이 두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을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나를 찾으러 오시는 분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목자가 양을 잃어버린 상황이 아니라 양이 목자를 떠나서 방황하는 상황입니다. 하느님이 나를 잃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내가 하느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 앞에서 모두가 다 '잃은 양'이거나 '되찾은 양'입니다.
(성모님만 제외하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인데,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따라서 '잃은 양'은 한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 전부이고, 비유에 나오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은 '되찾은 양'입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간 성인 성녀들은 '되찾은 양들'이고, 그분들을 아흔아홉 마리 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루카 15,4)' 라는 말은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아흔아홉 마리를 포기하거나 버려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으로 생각하면, 그 아흔아홉 마리 양은 목자와 함께 잃은 양을 찾아 나서거나 그 양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양들입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나는 목자를 떠난 적이 없다. 나는 잃은 양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고, 결국 "나는 목자가 필요 없다." 라는 주장이 되어버립니다.
목자가 필요 없다는 그 태도가 바로 목자를 떠나는 양의 모습이고, 잃은 양의 모습이 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그런 사람입니다.
몸이 목자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떠나 있다면 '잃은 양'입니다.
미사 때에 몸은 성당에 있어도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면 미사 참례를 안 하는 것과 같고, 그것도 역시 '잃은 양' 상태가 되어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세리들 같은 죄인들만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복음 말씀에서는 세리들을 가리켜서 잃은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잃은 양이고, 죄인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투덜거린 일은 '잃은 양'이 '다른 잃은 양'을 죄인이라고 비난한 일이 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루카 15,6.9)."입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되찾은 일은 목자에게도 기쁜 일이고, 잃은 양 자신에게도 기쁜 일이고, 다른 양들에게도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이 두 비유는 모두가 함께 기뻐하자는 초대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렇게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나라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큰아들만 기뻐하지 않습니다. 큰아들 혼자서만 하늘나라 밖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자비' 라는 것은 '의무' 수행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거저 베풀어 주는 은혜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의무 수행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비를 받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고마워하면서 받을 뿐입니다.
'잃은 양'에게는 자기를 찾으러 오라고 목자에게 요구할 권한이 없습니다.
목자가 자기를 찾으러 온 것을 고마워할 뿐입니다.
만일에 양 자신이 목자에게 돌아가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를 찾으러 오라고 요구만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교만한 태도가 되고, 그런 태도 자체도 죄가 됩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 나설 때 양 자신도 겸손한 태도로 목자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정말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있다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처음에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이신 분으로 오셨지만, 나중에 재림 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계속 잃은 양으로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즉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잃은 양'은 '되찾은 양'이 되기는커녕 '쫓겨나서 멸망하는 양'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되찾은 양'이 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입니다.
참된 할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청년 때 2박 3일 동안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겨울방학 때여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등산복, 등산화, 배낭은 물론 아이젠과 부식 등도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물론 3일 동안 마실 소주도 엄청 배낭에 넣었습니다. 화엄사 쪽으로 올라 능선을 따라 걸은 후 중산리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였습니다. 도착해보니 눈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거의 뛰어오르다시피 하였습니다. 배낭엔 소주 피티병들이 많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매우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습니다. 그러나 뱀사골 대피소쯤 가서 무릎에 신호가 왔습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하루 자고 나면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다음 날은 더 아파서 배낭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계속 절뚝거리며 여자 청년들보다 훨씬 쳐져서 3일 내내 창피하게 다녀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산에 오를 때 하나 버리고 와야 하는 게 있는데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교만하면 산은 반드시 그 값을 치르게 해 줍니다. 무엇을 하기 위한 준비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며 그 증거로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할례는 불필요하고 어쩌면 더러운 부분을 잘라내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옛날에 하고 있던 무언가를 칼로 잘라내듯이 끊어버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첫 계약을 맺는 ‘세례’ 때, “마귀를 끊어버립니까, 유혹을 끊어버립니까?” 등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가는 것입니다. 산과 친해지기 위해서 교만을 끊어버려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불붙은 떨기나무로 다가오던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그 곳은 깨끗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명하시는 장면에서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도 깨끗해야 하고 하느님 계신 곳에 가기 위해서도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을 벗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그 더러움으로는 그분을 감당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는데 그때 겉옷을 벗어놓으셨습니다. 겉옷은 당신의 전부, 즉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희생으로 우리를 깨끗이 씻으신 것입니다. 당신 피로 우리 교만을 씻으셔서 우리가 당신 앞에 무릎 꿇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이루어 진 이후엔 육체적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유다전통에 묶인 이들은 육체적인 할례를 주장하였습니다. 바오로도 육체적인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구약의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을 반대하였습니다. 할례가 더 이상 육체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의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필리피인들에게 영적인 완전한 할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할례는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 모든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잘라내는 결단입니다. 이 결단이 그리스도와 계약을 맺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아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이들이야말로 참 할례를 받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야말로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직 내 자신이나 육체적 욕망,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에 칼을 대지 않았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맺을 준비가 된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버려할 때와
되찾을 때를 아는
자연의 순리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존재를 존재이게
하는 참다운 기쁨은
회개의 기쁨에 있습니다.
창조의 기쁨또한
회개에 있습니다.
생명은 새롭게
성숙되어야 하듯
회개는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진정한 치유는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가장 소중한 선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회개의 선물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되시는 하느님으로부터
소소한 일상을 넘치는 감사로
바꾸어놓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비를 통해서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회개는 분명히 알게 해줍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하느님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서
잃어버린 은전 한 닢에서
뜨겁게 만납니다.
우리의 회개는
애타게 기다리시고
찾으시는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회개의 기쁨이며
하늘나라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