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장
마사장을 아는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마사장’의 ‘사장’은 회사 사장이라고 하는 그 사장이고, ‘마’는 물론 말 마(馬) 자의 그 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성씨가 마씨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마씨가 아니다. 혹시 마필을 취급하나? 제주도에서 조랑말을 떼다가 놀이공원이나 유원지 등에 넘긴다거나...... 아니면, 우리 친구 한(韓) 사장처럼 마구 판매점을 운영하나? 그렇지도 않다. 그래도 하여간 마사장이다. 왜?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삼례에 사업장을 가지고 있느냐고? 그렇지 않다. 이 사람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큰 코를 다친다. 이 사람의 활동 무대는 그보다 훨씬 넓다. 전국적이다. 우리나라 전체라는 말이다. 최근 들어서는 외국하고도 거래를 한다. 사실, 이 사람의 사업을 특징짓는 것은 취급하는 상품의 독특성에 있다기보다 그 상품을 거래하는 방식의 독특성에 있다. 넓은 지역의 소비자와 거래를 한다고 말했지만, 거래 방식은 옛날 방식이다. 이 말을 듣고 듀크 엘링턴의 오묘한 음악을 떠올리면서, 사막을 횡단하는 카라반(隊商)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까? ‘말’은 낙타를 가리키는 모양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장돌뱅이를 상상하는 사람이 있을까? 삼례에서 3·8장을 보고 북으로 북으로 길을 잡아 아중, 진안, 무주 등등을 거쳐 끝내 봉평 장에 도착한다 이거지. 마사장은 카라반도 아니고 장돌뱅이도 아니다. 이 사람은 혼자 움직인다. 독고다이지. 그리고 시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개인 소비자를 찾아다닌다. 그러니 방물장수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릴 때만 해도 방물장수가 있었다.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살던 제기동이나 청량리 등 서울 변두리에까지도 남아있었다. ‘방물’은 ‘박물(博物)’이 아니다. 아마도 ‘방물(房物)’, 즉 ‘방에서 쓰는 물건’이라는 뜻일 것이다. 주로 여성 용품이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머리에 이고 온 보따리를 풀면, 바늘이나 골무 같은 바느질 도구, 색경(色鏡), 화장품 — 아주 예전에는 그 유명한 동동구리무나 박가분을 가지고 다녔겠지 — 등속이 튀어나왔다. 우리 할머니는 동백기름과 참빗을 사곤 하셨다.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리 할머니는 이 아줌마들한테 (빠진) 머리카락을 팔기도 하셨다. 방물장수들은 그것을 걷어가서 가발 공장에 파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마사장이 바늘이나 화장품 등의 방물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람은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내 연구실로 찾아온다. 상당히 고급 물건을 취급한다. 외제 물건이다. 주로 미제. 그런 점에서, 따지고 들면, 마사장은 어디에 가까운가 하면, 미제 물건 장수라고도 불렸고 양키 물건 장수라고도 불렸던 그 직종에 가깝다. 왜, 미제 소세지, 주스 가루, 초코렛, 이국적 견과류, 지포 라이타, 그리고 닭고기 통조림 등 레이션 박스에 든 물건 등 미군 부대에서 나온 미제 군납품을 역시 머리에 이고 손에 들고 다니며 팔던 아줌마들이 있지 않았는가?
나는 3호관 4층 끄트머리에 있는 내 연구실에 앉아 꾸벅 꾸벅 졸고 있다. 어떤 때는 아예 신발까지 벗은 채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길게 앉아 본격적으로 존다. 마사장이 나타나는 것은 꼭 이 때이다. 돌돌돌돌. 시그날 음악이다. 복도 저 끝에서부터 돌돌돌돌 하는 시그널을 울리면서 등장한다. 그 소리가 연구실 안에서 어떻게 들리느냐고? 나는 여름이 되면 방문을 활짝 열어 놓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발을 쳐 놓는다. 학생 시절, 교수님들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것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받아 연구실에 전시해 놓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방문 앞에 발을 쳐 놓는 것이다. 돌돌돌돌. 한 여름, 매미 울음소리는 한가한 시골 학교의 교정을 가득채우고 있는데, 그 소리를 뚫고 방문객의 기척이 점점 커지며, 나는 발을 쳐 놓은 연구실에서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고 잠이 들듯 말듯하다가 깨어나고 만다. “안녕하십니까?” 마사장이 항상 하는 인사말이다.
간혹 잡상인이 찾아오는 수가 있다. 언젠가는 군용 쌍안경을 팔러온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마사장은 잡상인이 아니다. 벌써 이렇게 길어졌네. 내일 이어서 써야겠다. (계속) (2008, 6)
첫댓글 예전에 쓰다가 만 글인데, 이번에 완성해서 올린다.
마사장은 과연 무엇을 가져올까....
아니 무엇을 보여줄까....
미제 물건 파는(?) 마사장의 정체가 매우 궁금..근데 마여사님이 왜 갑자기 생각날까?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