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想, 산냐)도 새기는 역할이 있고, 마음챙김(念, 사띠)도 새기는 역할이 있다고 할 때,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여기에 대해 참고가 될 만한 법문이 있어 소개합니다.
https://youtu.be/bK3XYTZ_xSw?si=MHoSBTpdKpIYxWPx
(42분 50초 ~ 46분 5초)
https://youtu.be/HD6JNMLXFP4?si=EcBAC1SmCNsTqgmQ
(6분 8초 ~ 20분 30초)
(아래 글은 오근(五根)과 의(意)와 사띠(念)에 대한 어떤 한 측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 글입니다. 이글은 저의 생각이라서 틀릴 수가 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각장소(處)로 이야기를 할 때는 ‘눈-형색-눈의 알음알이’ - 촉 – 수 - ... 이렇게 잘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수행에서 눈의 감각기능,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의 다섯 감각기능(根, 인드리야)으로 이야기를 할 때는 그 다음에 마노(意)가 잘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기능(根, 인드리야)은 ‘지배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눈으로 보게 되면 눈으로 보는 것이 다른 것을 지배해버린다고 합니다. 즉 눈으로 볼 때는 그 순간에는 듣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고, 보는 것이 지배하고 맙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경전의 여러 곳에 종종 나타나듯이, “... 눈으로 형상을 봄에 그 표상[全體相]을 취하지 않으며, 또 그 세세한 부분상[細相]을 취하지도 않는다. ...” 이렇게 하실 것이고 ... 그러나 배우지 못한 범부라면 대체로 “... 그의 눈의 감각기능[眼根]이 제어되어 있지 않으면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그에게 [물밀듯이] 흘러들어 올 것이다. ...” 이런 일을 겪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전에서는 뒤이어 “...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며, 눈의 감각기능을 잘 방호하고 눈의 감각기능을 잘 단속하기에 이른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 몸으로 감촉할 때 왜 불선법들이 물밀 듯이 밀려옵니까? 그것은 의문(意門)에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뿌리로 한 마음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의문(意門)에서 탐욕없음, 성냄없음, 어리석음없음을 뿌리로 한 마음들이 일어난다면 볼 때, 들을 때, ... 몸으로 감촉할 때 불선법들이 밀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섯 감각기능(五根)은 마노(意)에 의지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자는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고 유익한 법들을 계발해야 하므로 의문(意門)에서 업을 짓는 마음들이 일어날 때에는 사띠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오근(五根) - 마노(意) - 사띠’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각장소(處, 아야따나)에서 ‘눈,형색,눈의 알음알이’ - 눈의 감각접촉 – 느낌 ... 이렇게 진행되는 흐름을 방치하지 말고, 감각기능(根, 인드리야)이 대상을 지배할 때 마음을 단속하여 (사띠하여 유익한 마음들이 일어나게 하여) 되도록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게 할 것이다.”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고: 저는 이 용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의문(意門): 사람이 말을 할 때 좋은 말을 하기도 하고 나쁜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 ‘말조심하시오’ 라고 할 수도 있고, ‘입조심하시오.’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도 업을 짓는 좋은 마음, 나쁜 마음 등 여러 가지 마음들이 있는데, 이 마음들은 눈이나 귀나 코나 혀나 몸에서 바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의(意)’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마음들이 마치 문에서 나오는 것 같다고 보아 문(門)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의문(意門)이라고 사용했습니다. 물론 원래의 바른 뜻은 달리 있겠지만요.)
첫댓글
<산냐(想)와 사띠(念)의 공통점>
‘산냐(想)와 사띠(念)의 공통점’은 ........ 둘 다 <法(dhamma)>이라는 사실.
그래서 ......... <作意(manasikāra)의 集(samudaya)이 法(dhamma)의 集>에서 ...........
‘올바른 作意(yoniso manasikāra)’를 하면
<반야계열의 ‘산냐(想)’와 잃어버렸던 ‘사띠(念)’>가 되찾아집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 ‘산냐(想)와 사띠(念)’를 학립해 나아가는 것이 ‘中道(majjhimā paṭipadā)’
@아위자
(‘올바른 작의’라는) 중도를 걷게 되면 ..............<ⓐ‘정견’이 생기고, ⇒‘정견’이 생겨서 ⇒ ⓑ‘정사유’를 하게 되고, ‘정사유’를 하게 되어서 ⇒ ⓒ‘正語(sammāvācā)’ ⇒ ⓓ‘正業(sammākammanta)’ ⇒ ⓔ‘正命(sammā-ājiva)’ ⇒ ⓕ‘正精進(sammāvāyāma)’ ⇒ ⓖ‘正念(sammāsati, ☜여기서 sati가 확립되는 것임)’⇒ ⓗ‘正定(sammāsamādhi)’>이라는 有爲(saṅkhata, 行에 의해 결합되어진 것)가 생겨나는데 ......................
@아위자
이처럼............ ‘正精進(sammāvāyāma)’이 생겨나서 ‘正念(sammāsati, ☜여기서 sati가 확립되는 것임)’에 들게 되면 ............ <意의 의지처인 sati>가 되찾아지어 ....... sati sati āyatane(處에 사띠가 있을 때) 상태가 되어 ....... 자동적으로 <‘vitakka(心)와 vicāra(意)’가 있는 三昧>... 즉 <jhāna(禪)>에 들게 됩니다.
@아위자
말하자면 ............ 자동적으로 ..........識(viññāṇa)이 배제된 상태, 즉 <jhāna(禪)>에 들게 된다는 것인데 ............ 이 <‘상태’의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아위자
<āyatana(處, =명색)인 ‘육내입처’와 역시 āyatana(處, =명색)인 ‘육외입처’>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육식(身, =識)>이 생겨나지 않아서 <‘육촉입처(六觸入處)’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곱씹어 언급하면 ..........
@아위자
<‘명(名) ca 색(色) ca 식(識) ca’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 觸이다.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이 자동적으로 불가능 ........ 하여 ........
@아위자
<abhiññā>를 얻게 된다는 것 ............인데 ....................
@아위자
이어서 ..........
@아위자
'不貳過'님께서는 ............
@아위자
增知하고(abhiññā, 수승한 智, =abhi-ñāṇa, =行을 파악한 智, =一切智) 遍知해야(pariññeyya, 철저하게 알아야, 두루 알아야)할 법은 五取蘊이다. / 增知하고 捨斷해야(pahātabba, 버려야)할 법은 無明과 有愛이다. / 增知하고 證得해야(sacchikātabba, 실현해야)할 법은 明과 解脫이다. / 增知하고 修習해야(bhāvetabbā, 닦아야)할 법은 ‘samatha(止)와 vipassanā(觀)’이다.
@아위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不貳過'님!
이해가 잘 안오시더라도 .......... 근심하시지 마시고 ...........
<가장 '이해가 잘 안오시는 부분'부터> 침착하게 ............ 질문하시면 ........... 답변하겠습니다.
니까야 약 500페이지 분량을 ............ 간략하게 요약하니 ......... 이해가 잘 안오시는 것이
<당연지사>!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不貳過'님!
한 가지 ....................
"중도[=아땅가(aṭṭhaṅga, 여덟 가지)] 이후에 ............‘samatha(止)와 vipassanā(觀)’[=다쌍가(dasaṅga, 열 가지)]를 닦는 것."
..............이라는 점만 .......... 가슴깊이 명심하고서 ............. 다문(多聞)성제자의 길을 ......걸으십시요.
(아침에 잠이 깨어 앉아 생각했더니, 어제 제가 쓴 글에서 ‘잘못이 있구나, 문맥을 잘못 이해했구나, 나는 아직 의(意)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등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카페에 들어와보니 아위자님께서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팔이나 손 등이 불편하셔서 글쓰기가 힘드실 텐데도 이렇게 글을 쓰시어 평생 공부하신 心得을 들려주시니 ...
아시다시피 경에서는 ‘동료 수행자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닦아라’고 하시는 취지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카페에 오시는 회원님들께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자애롭게 대해주십니다. 처음에 저는 제 견해에 취착하여 서로 견해가 다른 분들께는 불선법의 마음을 일으킨 적이 많았지만 지금은 저도 점점 바뀌어서 동료 회원님들께 자애의 마음을 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위자님께서 제게 질문의 기회를 주신 것이 맞다면 저는 몇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간략하게 답변해 주시면 제가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질문1. //<意의 의지처인 sati>가 되찾아지어//에서 意는 어떤 것인가요?
1) 마음이 ‘안이비설신의’로 활동하지 않고 있을 때의 마음, 그래서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을 일으키지 않고 있을 때의 마음
2) 이 상태의 마음이 저 상태의 마음으로 방향을 돌리는 시점의 마음. 예를 들면 눈에 형색이 들어왔을 때 그 형색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의 마음. 귀에 소리가 들어올 때 그 소리로 마음이 기울어질 때의 마음, ...
3)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이 각각 일어날 때 그것을 마음에서 받아들을 때의 마음
4) ‘안이비설신의’ - ‘색성향미촉법’ 할 때의 ‘意’
5) 위의 1),2),3),4)가 아닌 어떤 다른 마음
비색(非色)인 <心(citta)→意(manas, mano)→識(viññāṇa)>은......
각각 <貪(rāga)←瞋(dosa)←癡(moha)>와 관련이 깊습니다.
예를 들어 ........... 탐진치(貪瞋癡)는 <명색(名色)에 대한 ‘탐진치’>입니다.
<명색(名色)>에 대하여, ‘올바른 作意(yoniso manasikāra)’를 한 것이 ‘般若(paññā, 慧)’라면
<명색(名色)>에 대하여, ‘올바르지 않은 作意(ayoniso manasikāra)’를 한 것이 ‘(→)識(viññāṇa)’이고 ‘(←)癡(moh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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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비유로서 하신 말씀[☞‘독화살의 비유’]은 ............
[ →意(manas, mano), →識(viññāṇa), 貪(rāga), ←瞋(dosa), ←癡(moha), 명색(名色), 등등]은 모두 <‘苦(dukkha, ☜독화살)’인 法(dhamma, ☞여기에 作意의 중요성이 있음)>이라는 지적.
@아위자
초기의 ‘→意(manas, mano)’는 <sati를 의지처로 하고 있었음>.
@아위자
그러다가 ......... 處(āyatana)라는 상황이 ........... ‘名色’으로 바뀌자 ........... sati가 산만해지고 흩어졌음.
질문 2. //<육식(身, =識)>이 생겨나지 않아서//에서 身은 어떤 의미인가요?
1) 識이 일어날 때에는, 예를 들어 眼識이 일어나는 경우라면 眼•色•眼識•眼觸•(受) 등이 함께 무리지어 있기 때문에 身이라고 하는지
2) 아기가 태어나면 새로운 몸을 받듯이 六識이 생겨나는 것이 마치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는 의미가 있어서 身이라 하는지
3) 아니면 어떤 다른 이유로 身이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身’의 불교적 의미는 <유정의 ‘蘊(khandha)’>을 지칭하는 표현임.
@아위자
즉........... <명색[=處(āyatana)]의 불교적 지적>입니다.
@아위자
K‘Kāyo’ ti. Dve kāyā: nāmakāyo ca rūpakāyo ca. Katamo nāmakāyo?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nāmañ ca nāmakāyo ca, ye ca vuccanti cittasaṅkhārā. Ayaṃ nāmakāyo. Katamo rūpakāyo?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ñ 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 rūpaṃ assāso ca passāso ca nimittañ ca upanibandhanā, ye ca vuccanti kāyasaṅkhārā. Ayaṃ rūpakāyo.[Paṭisambhidāmagga vol.1. p.183].
@아위자 ‘身’은 名身과 色身의 두 가지 身이다. 名身이란 무엇인가? 受, 想, 思, 觸, 作意, 名이 名身이며, 心行이라 부르는 것, 이 같은 것들이 名身이다. 色身이란 무엇인가? <四大와 四大所造取色, 들숨과 날숨, 相에 밀착하여 가까이 서는 것, 身行이라 부르는 것>. 이 같은 것들이 色身이다.
@아위자
그래서 ............. 삼행(三行, =신행, 어행, 심행) 중에서 ‘신행(身行)’을 파악하면 ....... ‘그 앎과 봄(ñāṇa-dassana, 智見)’을 <아빈냐(abhiññā, 수승한 智, =abhi-ñāṇa, =行을 파악한 智, =一切智)>라고 부릅니다.
@아위자
예를 들어 ............ <육식신(六識身)>에서 ........ <육식(六識)>은 ‘心行’이고, <身>은 ‘명신[=심행]과 색신[=신행]’이므로 <‘삼행(三行, =신행, 어행, 심행)’의 복합체>이며, ......... 결국 <육식신(六識身)>은 ‘名色(nāma-rūpa)’임.
@아위자
그래서........... 경전에는 <오취온(五取蘊)이라고 부른 ‘명색’>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이 많은 것임.
@아위자
사성제(四聖諦)에서 첫 번째 ‘고성제(苦聖諦)’의 내용으로 거론되는 ‘두 法(dhamma)’은?
@아위자 오취온과 육촉처 인거같습니다.
@물마
초전법륜경 : 육내입처.............
<處(āyatana)=명색>
@아위자 네 선생님 고맙습니다. ㅎㅎㅎ
SN 56.13 (Khandha Sutta)와 (S56:14)Ajjhattikãyatana-sutta에서도 확인 가능하네요.
감사합니다.
기똥찬 말씀들 크흐흐흐
모두가 열반에 이르시기를 _()_ _()_ _()_
물마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아위자님.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저의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1. 들려주신 질문1의 답변에 대한 저의 이해(생각)
1) 意라는 마음이 저의 질문1의 선택지 1),2),3),4) 안에 있는 것이라면: 저는 意라는 마음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어서, 이런 몸과 마음은 우리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주어진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선한 마음이라든가 불선한 마음이라든가 하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여기에는 사띠도 적용이 안 되는 그런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 그런데 意를 탐진치에 뿌리한 마음과 무탐무진무치(無貪無瞋無癡)에 뿌리한 마음들까지 다 포함하여,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는 감각장소(處)라고 한다면, 이런 意處에서 일어나는 마음들에는 사띠를 확립해야 하겠습니다.
2. 들려주신 질문2에 대한 저의 생각
1) (예를 들어 욕계) 유정으로 태어나면 정신•물질(名色)로 이루어진 몸(身)을 받는데, 정신 쪽의 몸은 名身, 물질 쪽의 몸은 色身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것은 곧 名色과 같아진다. 즉, 識과 함께 거론할 때에는 名色이라 하고,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났다고 할 때에는 名身•色身이라는 표현을 쓸지도 모른다(사람의 몸을 받으면 五蘊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 연기에서 六入은 名色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미래 세상(죽은 뒤에 다음 세상에 태어남)에서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조건으로 하여 六識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지금 생에서 五取蘊이라는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상은 저의 생각입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아위자님의 본래 취지와 거리가 멀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열심히 .......... 공부하시는 모습이 ........ <아름다워서> 드린 말입니다.
<연기>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면 ........ '신행'이 더 이해가 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예, 아위자님. 이번에 들려 주신 말씀들을 통해서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위자님,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다른 회원님들께서도 모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