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비 숨겨주기
김 소 연
그가 그가 쓰다듬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밤새 웅크려 그것을 어루만지다 웅크린 채 앉아서 잠이 들었다 20여 년을, 50여 년을 밤마다 그렇게 했다 그것을 나는 전해 듣기만 했을 뿐 본 적 없다 그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 만약 그가 돌아온다면 그가 쓰다듬었던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될까 혹은 그가 그것을 트렁크에서 꺼내 나에게 직접 보여주게 될까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도 그것을 만져보려고 손을 뻗게 될까 그가 쓰다듬은 것이 내리는 비 같은 것이라면 눈사람이거나 안개 혹은 연기 같은 것이라면 그를 만난 적은 없으나 그는 날마다 밤새 웅크린 채 앉아서 잠을 잔 사람이다 내가 그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안 만나도 된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아무도 없는 높은 곳에 올라가 가끔씩 그의 이름을 외쳐보면 된다 그는 그러나 자기 이름조차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믿을 수 있다
- 시집〈촉진하는 밤〉문학과지성사 -
촉진하는 밤 - 예스24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에게 굴하지 않기”깊고 두텁게 덧칠된 밤의 풍경과 사유를 지나,끝나지 않는 끝이 계속되면서 끝을 향해 가는 시시인 김소연의 여섯번째 시집 『촉진하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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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