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 중의 일이었다. 두꺼운 얼음층에, 대지를 방불케할 정도로 견고한 얼음층 위에 기체가
둔중한 울림을 일으키며 착륙했다. 한밤 중의 일이었지만 거대한 백색의 기체가 대지의 중
력권에 완전히 안착한 순간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푸르고 검은 형형색색의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천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촛불같은 눈동자들은, 몇초의 간격을 두고 하나둘 꺼졌다.
다음날 아침, 경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브릿지로 나갔다. 밖을 보기 위
해서. 전면의 넓은 창엔 푸르고 하얀 윤곽들이 해일처럼 거대하게 솟아올랐다가 그대로 굳
어버린 모습이 비쳐지고 있었다. 기체는 견고한 대륙 위에 내려앉았지만 그 머리를 바다쪽
으로 두고 있었다. 차갑고 무자비한 회색 빛이 전면을 가득 메웠다.
"뭐해?"
경님보다 약간 늦게 일어난 소연이 눈을 비비며 브릿지로 들어왔다. 아마 그녀도 비슷한 심
정이었나보다. 잠시 밖을 응시하더니 경님쪽으로 눈을 돌렸다.
"춥겠지?"
"얼어죽을 걸."
소연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소름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침이라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아마 영하 20도쯤은 가뿐히 넘을 꺼야. 바람불면 체감온도는 순식간에 40도쯤으로 떨어지
겠지."
"으에... 시, 싫다..ㅠ.ㅠ"
"해파리는 냉동해파리가 되는 거지~"
"나빠!"
경님과 소연이 아웅다웅하고 있을 무렵, 늦게 일어나기로 유명한 유나도 일어나있었다. 사
실 그녀는 어젯밤을 거의 뜬 눈으로 새웠다. 한밤중에 남극에 도착한 이후, 그 울림을 느낀
이후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잠들지 못했다.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불안감은 어느새 유나를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성격상, 몰려있는 정신상태라 해도 범인(凡人)들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잠시 무기를 점검하고 얇은 옷부터 차근차근 껴입었다. 몸을 움직일
때 둔해지지 않도록. 광선검을 꺼내어 한번 전원을 올려보았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빛
무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자칫하면 머리카락을 조금 태워먹을 뻔했다. 쓰게 웃으며 집어넣
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쉽게 뺄 수 있는 중검을 하나 들고 가기로 했다.
유나가 중검을 뽑아들어 그 새파란 빛을 확인하고 있을 때쯤 세라자드는 일어났다. 희미하
고 창백한 안색으로 옆을 둘러봤다. 살라딘. 그가 있었다. 옆으로 누워있어서 약간 마른 얼
굴의 골격이 잘 드러났다. 거칠고 지쳐보이지만 믿음직한 얼굴. 물 속의 바위처럼 가라앉은
얼굴이였다. 이런 얼굴을 했던 남자가 또 있었다.
'부탁입니다, 폐하.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이틀 전에 떠나간 아두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생각나서 세라자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그들이 누구란 말입니까? 폐하께서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과거와 어떤 상관이 있다고
해도 과거의 폐하와 지금의 폐하가 같은 입장일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의 뒤를 쫓아가셔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제발, 세라자드님. 투르를 생각해주십시오. 저희들에겐 이젠 폐하뿐이
란 말입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언성을 높혀가며 세라자드를 어르고 달래고 말리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세
라자드에게 있어 아두스 베이라는 사람은 오라버니와 더불어 그녀의 유년기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임은 물론, 훗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족'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둘 중 하나가 고인이 된 지금에 있어선 세라자드에
게 있어 아두스의 위치란 유일무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과거의 세라자드였다면 고집을 꺾었을 것이다. 아무리 고집쟁이 떼쟁이 왕녀라도 아
두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듣지 않을 세라자드는 아니다.
그러나, 세라자드는 그를 자비단으로 돌려보냈다.
'미안해요. 아두스. 하지만 가지 않겠다면 명령하겠어요.'
'폐, 폐하!'
'나도 이게 얼마나 무리인 이야기인지 알아요. 그러니까 변명하지 않겠어요.'
'........폐하....'
'가서, 아두스가 보고 들은 그대로 전해줘요. 알려줘야 할 사람에게. 알아야 할 사람에게. 그
래서 어째서 내가 남극까지 가야만 하냐고 묻는 자들에게 말해줘요.'
세라자드는 아두스에게 했던 그 말을 다시금 입밖으로 내보았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노라고..."
맨 처음 말했을 때도, 지금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낯선 말이었다.
살라딘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은 뒤, 세라자드는 조용히
일어서 문을 열고 나왔다.
부스스해진 긴머리를 대강 손으로 정리해서 다듬은 다음,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적당
히 차갑고 적당히 따뜻한 물방울들이 얼굴을 따라 흘러내렸다. 대강 수건으로 훔쳐서 아직
도 수분이 남아있는 상기된 얼굴로 세면실을 나왔을 때, 세라자드는 그제서야 자신이 서있
는 공간에 인기척이라고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저 먼 복도를 쳐다
보았을 때 그녀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노호라고, 생각했다. 맨 처음엔. 하지만 지금은 아침이고 유령이 나타나기엔 부적합한 시간
이다. 그러나 그것에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가 그 주인의 유령같은 존재감을
깼다.
"술탄이시로구먼. 아까 그대의 친구들이 브릿지에 있는 것을 보았지."
지그문트 박사의 얼굴은 세라자드로서도 어느 정도 눈에 익었다. 사실, 그는 노인이라는 점
외에는 노호와 닮은 점이 없었다. 약간 키가 작았고 훨씬 정정했다.
그는 자국의 국왕에게까지 뻔뻔하게 하대를 하는 근성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세라자드에게
도 반말을 썼다. 그러나 세라자드는 그 점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얻었다.
오호호호홋, 하는 웃음을 덧붙이며 지그문트는 세라자드에게 브릿지로 통하는 방향을 가르
쳐줬다. 그러나 세라자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달리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겐가?"
질문 자체가 특별히 의미심장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느 순간,
대답은 저절로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그럴 땐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가면 되지.
지그문트는 아주 평범한 의문이라도 되는 양 쉽게 대꾸했다. 세라자드는 잠시 물끄러미 그
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 크게 뜨는 눈을 찬찬히 들여보다가, 미소를 지
었다. 얼굴이 원하는 대로. 그는 어쩐지 좀 놀란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정리를 모두 마치고 유나가 향한 곳은 브릿지가 아니라 철가면의 숙실이었다. 똑똑하고 두
드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문이 스스륵 열렸다. 유나와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무장을 갖춘 그
는 오랜만에 크고 두꺼운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방한복이 필요없어보이네요."
"방한복 위에 입으면 더욱 좋지."
"언제 출발해요?"
"준비가 다 되는 대로 곧."
"야영준비같은 거 안해가도 될까요?"
"글쎄....."
철가면은 잠시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럴 필요는 없을 거야. 분명히."
철가면과 유나가 나란히 브릿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있는 사람은 경님과 소연, 그리고 세
라자드 뿐이었다.
"다들 자고 있는 모양이군. 불러오겠네."
그렇게 철가면이 가버리자, 브릿지는 그야말로 여인천하.
"방한복까지 껴입고 있네? 안 더워?"
"아, 익숙해지려고."
"그렇구나...."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경님은 본능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발랄한 표정
으로 유나와 친구들을 응시하며 발랄하게 말했다.
"자, 이제 드디어 본격전인 거네?"
그리고 그건 효과가 있었다. 유나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라스트 배틀이기도 하지."
"아아, 추운 데 움직이는 건 정말 싫은 데. 세라자드도 투르인이라 추위에는 무진장 약할
거고."
"두껍게 입고 손난로같은 거 들고 가면 괜찮을 거야."
"오래 걸릴까?"
"아저씨는 아니라고 하던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 그 사람이라면 뭔가 특별한 예감같은
게 있을 지도."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말했는 데, 유나의 귀에는 천둥번개처럼 들렸다.
"정말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요."
"뭐야? 세라자드도 뭔가 감이 와요?"
"예. 좀 그런 게 있네요."
"그럼 다행이네. 빨리 걸린다는 건 어렵지 않다는 거잖아."
"그 반대일 수도 있지."
유나는 심각하게 말했지만 소연과 경님에겐 그 심각함이라는 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행히도 그건 그녀들의 장점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벨제부르가 아무래 강해도 너랑 나랑 철가면씨가 사면초가로 둘러싸고
모다때리는 데 버틸 재주있냐?"
"마장기 있잖아."
"정 안되면 아저씨한테 아수라파천무 한번 더 쓰라지 뭐."
"아무리 남말이라지만 너무 쉽게 한다, 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네."
타이밍까지 맞춰서 램버트와 엘핀스톤을 자청룡 우백호로 끼고 나타난 철가면이 투덜투덜
댔다.
"어? 다른 사람들은?"
램버트와 엘핀스톤과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누며 유나가 물었다.
"깨웠네. 지금쯤 열심히 씻고 있겠지. 다들 어젯밤에 잠을 설친 모양이야. 아닌 척 해도."
쯧쯧 거리며 혀를 차는 모양이 어딘지 심상치 않아서 유나는 대뜸 물었다.
"그러는 아저씨는요?"
"나, 나?"
답지 않게 당황하는 그. 함께 10년은 산 사람 모냥으로 유나는 별다른 표정도 없이 철가면
의 눈가에 드리워진 피로의 검은 그림자를 지적했다.
"안색이 안좋네요. 꿈자리라도 뒤숭숭했어요?"
".....늘 생각하는 거네만 자네, 수정구슬이랑 빗자루는 어디다 감춰두고 다니나?"
"지하철역 코인로커 속에다가요. 별로 그렇게 생각해본 적도 없는 주제에 갑자기 그런 척
하지 말고 바른 대로 불어요. 클라이막스가 아무리 급해도 병자한테 원정나가라는 말은 안
할테니까."
"반은 알아듣겠고 나머지 반은 못알아듣겠군.(;;) 그다지 엉망이진 않아. 그냥...."
"그냥?"
철가면은 은근히 세라자드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별 표정이 없었다.
".....옛날 일이 자꾸 꿈으로 보여서 말이야. 별 거 아닐세."
"뭐, 좋은 징조로군요."
잠시 뜨끔했지만 유나는 그저 그렇게 넘어갔다.
유나가 철가면과 이것저것 시덥지 않은 말을 나누고 있는 동안, 경님은 노골적이라고 할만
큼 반짝반짝한 눈으로 엘핀스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렇게 대놓고 티내는 것에 유독
약한 엘핀스톤은, 경님의 정면공격뿐만 아니라 소연의 측면 지원사격, 세라자드의 뜻하지
않은 (그녀는 그냥 친구들을 따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 뿐이다) 후방지원에 패
배하여 금방이라도 식은땀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그는 몇 번 헛기침으로 목을 다듬었다. 어쩐지 필요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안녕히 주무셨는....."
"에게~ 겨우 그거?"
소연의 지원 사격 한방이, 정면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엘핀스톤의 옆구리를 콱 하고 찔렀
다. 모범적인 이론가답게 달변까지는 아니더라도 외교적 언사정도는 할 줄 아는 남자였건
만, 엘핀스톤은 그야말로 전전긍긍해서 잘생긴 얼굴에 시퍼런 빗금을 쫙쫙 긋고 있었다. 굵
은 땀방울이 나이스한 턱선을 타고 줄줄줄 흐르는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경님은 슬슬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구마구
잘해주고 싶은, 연애의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밀고 당기기 따위는 살아있는 한 못
할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가 넘어가기 전에 엘핀스톤이 넘어갔다.
"미, 미안합니다....."
"저......."
"그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요. 정말로."
그는, 이럴때는 정말 어린애처럼 보인다. 자기가 가진 감정을 남에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
남이 자기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을 표시하는 것에 조차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진절머리나게 요령없는 남자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나...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나 보다...'
경님은 헤헤, 웃더니 냉큼 옆으로 돌아서 엘핀스톤의 팔짱을 꼈다. 잠시 그의 몸이 뻣뻣하
게 굳는 것도 같았지만 이내 풀어졌다.
지금은.... 그저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다들 제대로 챙겨입어요. 대강 모니터링해본 것만 봐도 알 듯이 남극은 장난이 아니에요.
특히 날씨좋은 팬드래건에만 있었던 사람이랑 사막출신들은 요주의해주세요."
소연의 옷단추를 챙겨주고 있던 유나가 마치 유치원 선생님처럼 말하자, 철가면은 그 어투
에 피식 웃었다.
"뭐가 날씨좋은 팬드래건이라는 건가? 이래뵈도 다갈에서 비프로스트까지 안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그라테스 산의 정상을 향해 등반해본 경험도 있다구."
"젊은 날의 방탕함을 그런 말로 얼버무리지 말고 빨랑빨랑 다른 사람들 좀 도와줘요. 나이
사십이나 되어서 자기만 제대로 챙겨입었다고 폼잡고 앉아서 구경하는 거 아니예요."
"사십이라니?! 사십이라니!!" (발끈)
"몇년 차이에 민감해지지 마요. 어쨌거나 중년주제에."
몇 년간 민소매에 걸레짝같은 망토로 견딘 만큼 살라딘은 눈사람마냥 부푼 방한복이 영 거
슬리는 모양이었다. 자꾸만 어린아이같이 팔을 움지작거리길래 유나는 등 뒤로 가서 그의
뒷목쪽의 옷깃을 확 잡아내렸다.
"..............."
"어래? 치수가 좀 작은 거 같은 데? 어이, 아저씨가 입은 게 얼마죠?"
"응? 글쎄."
"내가 봐줄께. 에... 110."
마침 철가면 가까이에 서있던 소연을 말을 듣자 마자 유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
다.
"거봐. 이건 100밖에 안돼. 덩치가 산만한 사람한테 이걸 입혀놨어니 조끼입은 북극곰처럼
구는 게 당연하지."
"..............;;;"
"게다가 원래 방한복은 좀 크게 입는다고. 더 남는 거 없어요?"
"그나저나 대부분 이런 건 프리사이즈아닌가? 난 그런 줄 알았는 데."
"프리사이즈 좋아하네. 아저씨가 입는 거 네가 입었다간 그대로 망토 되게?"
"하긴 그렇구나~"
'어쩐지 정말로 보모같은 데...;;'
내일모레면 사십줄에 들어서는 남자와 '덩치가 산만한 북극곰'으로까지 불린 남자 둘은 자
신들이 '애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도 못한 채 그렇게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렸
다.
세라자드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가운데, 유나는 척척 걸어오더니 세라자드의 옷을 이리저
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안쪽 매듭이 잘못 묶였어요."
오만 정이 뚝뚝 떨어지는 것마냥 무뚝뚝한 말투였다. 유나는 아직도 뭐라고 말을 못하고 멍
청하게 서있는 세라자드 앞에 주저앉아서 무릎 밑까지 내려온 밑단에서부터 잘못 묶인 끈
들을 정리해나갔다. 평생 동안 얇은 옷만 입어왔던 그녀는 이렇게 단추와 매듭이 많은 옷은
생전 처음 보았다. 많다고 해봤자 각각 3~5개에 불과했지만.
"움직이기 불편해도 추운 것보단 나을 거예요. 정말 추우니까. 나중에 정 못견디겠으면 나
한테 말해요. 어떻게든 해줄테니까."
경님은 옆에서 그녀답지 않게 입을 삐죽거리고 있었다. 속으로 '편애다, 편애야~'라고 쫑알
대면서.
저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은, 옆에서 끼어드는 게 무례하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설령 그 사
람이 살라딘이라 하더라도.
아니, 끼어들 수 있기나 할까?
자신이 바로 그 끼어들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라는 사실도 잊고 경님은 그만
슬쩍 토라져선 어디론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한편, 세라자드는 어디론가 종종 걸음으로 가버리는 경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내
려다보며 옷깃을 여며주는 유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은, 그녀들과 함께 돌아갈 거죠?"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원래의 움직임으로 돌아오는 데는 매우 짧은 시간만이 걸렸을
뿐이다.
"....돌아가야 할 곳이니까."
유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세라자드를 똑바로 바라보진 않았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당신이 결국은 투르의 왕좌위로 돌아가야 하듯이."
"내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면?"
"....무슨 뜻이에요?"
"유나씨도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세라자드가 술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서 살라딘이 팬드래건으로 돌아가진 않아요."
".............."
"마찬가지로 내가 돌아가는 건 세라자드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다 된
것 뿐이니까."
"주어진 시간?"
"자, 다 됐어요."
"말 돌리지 말아요."
"................"
"손 내밀거나 안아주거나, 아무튼 트릭쓰지 말아요. 나는 대답을 원하는 거니까. .....날 떠날
거죠?"
유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갈 거예요."
"애원....해도요?"
"가야해요."
"......가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려도요?"
"내게는.... 어머니가 있어요."
그것으로 모든 대답은 끝이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세라자드와 마찬가지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게
아니라.... 돌아가고 싶기 때문에 돌아가는 거예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지만 세라자드는 담담했다. 아마 오랫동안 속으
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와서, 정작 직접 들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곧 정이 들 거예요."
다만.... 그것뿐이었다.
맨처음 라이트 블링거의 출구가 열리고, 눈 앞에 차가운 공기가 와락 밀려왔을 때, 잠잠하
던 피부 위를 와르르 달려가던 소름과 함께 유나가 생각한 것은,
이런 곳에서 몇 년간 혼자 죽치고 앉아있으면,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어도 미치기 딱 좋겠다
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미치지 않기 위해서 '그 일'을 해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빙산과 유빙들로 가득한 극해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은 몇 번 읽어봤다. 쌓이는 눈과 회색
빛 하늘, 소용돌이치는 바람에 낭만을 느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유나는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진짜 에스키모에게서 나온 적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마치 아프리카의 야생동물
사진집을 내는 아프리카인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추위는 가혹했고 잔인했다. 빙벽 위
를 소리없이 움직이는 슬라임과 몬스터들보다도 살을 찢어발기듯 불어대는 바람이 더욱 무
서웠다. 세라자드의 긴 머리카락은 이내 서리가 앉아서 흔들릴 때마다 따닥따닥하는 소리를
냈다. 유나 또한 푹신한 모자를 더욱 깊이 뒤집어썼다. 어쩔 수 없이 둔해지는 움직임에 유
나는 거의 절망감을 느낄 정도였다. 슬라임정도는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뭐야! 게임화면에선 쉽기만 했잖아아~!!! ㅠ.ㅠ'
인생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유나는 통감했다.
"추, 추워 죽을 것 같아...."
"......말할 수 있는 거 보니 멀쩡하군."
"왜 죠안은 저렇게 태연한 거야아아~!!!"
"그녀는 원래 추운 지방 출신이잖아. 비프로스트에서도 민소매에 드레스차림으로 돌아다닌
아가씨인데 뭘."
"댁도 멀쩡해보이네?"
"그래보인다니 다행이군. 노력한 보람이 있어."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턱 부근이 잔뜩 경직되어있다. 유나는 자기도 저런 표정일까 약간 걱
정이 되었다.
"총은 어때? 너무 얼면 총알이 안나오지 않아?"
"그렇게까지 고물은 아니지만... 확실히 좀 불안하긴 하군."
"벨제부르가 우리를 위해서 난방을 땔리는 없고... 아아, 이 상태라면 너무 힘들겠는 데."
"근데 아까 모니터링할때도 궁금했던 거지만, 대체 벨제부르가 누구야?"
"으음.. 설명하자면 긴데..."
"간단하게 해. 간단하게."
"시즈들 두목. 모든 음모의 흑막."
"........그건 간단한게 아니라 성의 없는 거야."
"그런 가?"
"뭔 이야기를 저렇게 딱 붙어서 한대?"
"죠안 오해할 만한 말 좀 하지 마. 뭔가 중요한 이야기인가보지."
경님이 소연에게 가벼운 타박을 주었다.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버몬트 자식도 데려오는 건데."
"에헤? 왜?"
"고생 좀 해보라고. 우리만 이렇게 고생하려니 억울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은 데...;;"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그 자식, 나한테 잘 갔다오라는 말 한마디 없었어!"
"뭐 그런 걸 가지고 삐지고 그래. 그만큼 놀려먹었으면 됐지."
"그게 바로 갱생의 노력이라는 거야! 지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 인간 사전엔 미운 정
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는 거냐구!"
"아, 알았어;; 미안미안;; 진정하라구."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엘핀스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굳은 각오를 내보였다.
"응? 뭐가 말인가?"
아직은 버틸 만한 지 철가면은 얼굴에 의아함이라고 '알아 볼 수 있는' 표정을 담고 엘핀스
톤을 뒤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어, 어이, 자네...."
"파이어 필드."
탈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새파란 빙판 위에 붉은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꼭 불꽃의
정원같아서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황홀했던 것도 잠시, 몸이 느끼는 실질적인 따뜻함에 일행
들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광신도처럼 엘핀스톤을 바라보았다.
"고, 고마워요..ㅠ.ㅠ"
"....여기서 울면 볼 얼어요..;;"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ㅠ.ㅠ"
"..........;;;"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몸을 녹이고 있는 모습이란 그야말로 궁상의 극치. 어쩌다보니 서로
이야기하며 가고 있던 차례 그대로, 철가면과 죠안(둘 다 비교적 멀쩡하니 자연스럽게 선두
에 서게 되었다), 경님과 소연(찰떡은 붙어있는 것이 순리), 살라딘과 세라자드(어쩔 수 없
는 메이저 커플), 유나와 크리스티앙(단지 같이 떠들다보니까) 순으로 무리지어 앉게 되었
다.
"아아, 살 것 같아.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베라모드까지."
"아, 맞아. 베라모드..... 그나저나 제국인들은 좀 감회가 새롭지 않아?"
"응? 왜?"
"베라모드는 베라딘이란 가명을 쓰고 흑태자의 통치시절에 재상까지 지냈잖아. 역사공부하
면서 안배웠어?"
"뭐... 배우긴 배웠지만... 아무래도 명분 상 주신을 받들고 있던 팬드래건에 밀리니까 그닥
자세하겐 배우지 않아. 물론, 주신도 별로 다를 게 없긴 했지만 최소한 태양신 비스바덴이
막강한 전력으로 남아주었으니까 이야기가 다르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세라자드와 철가면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
작했다.
"그가 고안해낸 여러 정책이나 제도같은 게 효율적인 건 사실이야. 한창 대외정복전쟁이 활
발할 때의 일이라 작금의 상황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실로 무리가 있지만. 음, 그래도 모
든 정책에는 기본 이념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걸로 치자면 '군주론'이랑 조금 비슷하지."
"베라딘이 그런 것도 썼어?!"
"그건 아니고. 대강 행정정책같은 걸 보면 알잖아. 이 계획의 발안자가 뭘 염두에 두고 이
런 계획을 세웠는 지."
"와아~ 이럴때보면 당신 과연 공작가 도련님~"
유나가 장난삼아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자, 유심히 그 둘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경님과
소연까지 덩달아 박수를 쳐버려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크리스티앙과 유나에게 몰렸다.
"좀 비인간적이거나 그런 정책 아니었어?"
"전혀. 그런 비능률적인 짓을 할만큼 시야가 좁은 인간은 아니었어. 사실, 그런 면에서 보자
면 그가 파괴신을 모으는 과정은 별로 그 사람 답지가 않아."
"그런 것도 생각하며 공부하는 거야?"
"뭐... 그냥 취향이니까. 사실 군주론엔 꽤나 흑태자와 베라딘의 관계에 대해서 자주 언급되
거든. 물론 직접적으로 실명이 거론되진 않지만."
"그래? 뭔가 정치이론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이라도 있는 거야?"
조금 더 오래있다간 테이블 펴고 차까지 끓일 분위기라서 철가면은 약간 말리고 싶었지만
어쩐지 다들 너무나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데다가 그 자신이 생각해봐도 들어둘 만한 이
야기같아서 몇 분정도 더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정치이론적이라기보다는 대인관계같은 거지. 심리적인 문제야. 당대 안타리아에서 최강의
무인이었는 데다가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하나였던 사람이 명색이 '친우'라고까
지 명명한 상대가 실은 암흑신의 최강자들 중 하나인데다가 인류멸망의 거창한 계획을 세
우고 있었으니 문필가라 하면 전공이 뭐든 간에 구미가 당기지 않겠어?"
"흔해빠진 2인자론이라면 별 재미없는 데."
"어이어이, 2인자론일 수가 없잖아. 말하자면 그 당시 제국은 2명의 군주를 모시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고. 그런 특이한 케이스를 사례연구하지 않을 학자가 있을 것 같아?"
"의외로 쿨하게 말하네? 명색이 자기나라 역사 중 가장 드라마틱한 부분 중 하나인데."
"그런가? 아무래도 황조가 다르니까 말이야. 팬드래건과는 경우가 다르지. 잠시 왕위계승전
쟁이 있었다고 해도 엄연히 한 혈통이 유지되어온 반면, 제국은 중간에 아예 황족의 정의가
달라져버렸으니까 말이야. 그리마의 피도 희석되어 사라진지 오래고."
"그렇게 전설따라 삼천리식으로 얘기하지마. 저기 아저씨만 해도 성왕 라시드의 얼굴을 똑
똑히 기억하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팬드래건의 죠엘 장군은 창세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하나인데. 그는 심지어 흑태자의 얼굴도 기억한다고."
"흑태자의 얼굴? 무슨 소리야 그게.... 아항~ 알겠다. ...뭐야? 그 설을 믿는 거야?"
"엥? 설? 무슨 설?"
"흑태자와 GS의 동일인물설. 그거 정식으로 팬드래건 왕가에서 부정하지 않았나? 아무튼
끈질기다니까."
유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소연과 경님도 마찬가지였다.
"자, 잠깐만! 설? 그냥 가설이란 말이야?! 가설이라면 생각해낸 놈은 또 누구고?!"
"내가 알겠냐? 난 사학도가 아니라구. 정론밖엔 배우지 않았어."
"켁;; 또 그렇게 취급되고 있었나..; 하긴, 의외는 아니지."
뭔가 혼자 중얼중얼 대는 유나와 아하~ 하고 자기네들끼리 납득하고 마는 소연과 경님.
"뭐야, 혼자 생각하고 혼자 납득하지 마셔!"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이제 슬슬 일어나죠."
자기 이야기 다 끝나니까 일어나자는 심보에 투덜거릴 여유도 없이 일행들은 꺼지기 시작
하는 파이어 필드의 불꽃을 뒤로 하고 앞으로 전진했다.
"으윽, 한번 불맛(;;)을 봤더니 더 추워;;"
"얼씨구..;"
"으엥.. 추워추워춥다구!!! 못 걷겠어~!!"
"자알 논다~ 니가 김소월이냐? 가시는 곳마다 불꽃을 즈려밟지 못하면 발걸음이 안떨어지
시겠든?"
"그래. 비꼬려면 얼마든지 배배꽈라. 난 못걷는 건 못걷는 거고 추운 건 추운 거다!"
"......(빠직) 니미야!"
소연과 조금 떨어져서 걷던 경님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에, 엥?"
"너 맞은 데 또 맞으면 피부가 뜨끈뜨끈해지지 않든?"
"에.... 아, 응..."
그제서야 유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소연은 방금전까지 춥다고 쫑알거린 게 거짓
말인양 날아가듯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렇게 쫑알대는 것도 잠시, 다시금 체감온도 40도의 강풍이 몰아닥치자, 사람들은 숨쉬는
것마저 괴로워졌다. 중간중간 덤비는 슬라임들의 아이스필드 공격은 남극의 실질적인 추위
에 비하면 메인디쉬 이후에 달려나오는 디저트같은 것이었다.
"그래봤자 메인디쉬는 나오지도 않았건만, 젠장."
"먹고 싶지도 않아."
칼날의 묻어있는 슬라임의 진액을 눈으로 닦아내려고 낑낑대던 소연이 투덜거렸다.
"제길, 벌써 얼어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네!"
"그런 점에선 광선검이 좋지."
"아~ 세라자드 너무해요. 나도 좀 예니체리로 임명해주지~ ㅠ.ㅠ"
세라자드는 그저 웃었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바위 같은 얼음덩어리들로 둘러쌓인 얕은 분지
가 나왔다는 것이다. 분지 안으로 슬슬 걸어가자, 바람이 막혔고 체감온도는 순식간에 올라
갔다. 숨쉬기가 훨씬 편해진데다가 피부에 와닿는 바람이 훨씬 덜 차가워서 일행들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으으~ 그래도 춥구나. ㅠ.ㅠ"
"불 한번 더 피우면 안될까요?"
엘핀스톤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파이어 필드 마법을 시전하자, 소연을 비롯한 일행들은 당
장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까보다 배는 궁상맞은 태도로 오글조글 모여앉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철가면은 어이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웃음이 피식피식 나왔다.
"군고구마 생각난다. 쩝."
"아, 맛있지. 그거. 감자랑 같이 삶아서 샐러드해먹으면 달콤하고."
"요리에 대해서 뭘 좀 아는 군, 크리스티앙~"
"당연하지. 웬만한 요리는 직접 만들 줄 안다고."
"우와~ 게이시르에 놀러갈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크리스티앙 수제 파스타같은 것도 맛
보고."
"와인도 좋은 걸로 한병 골라주지."
"그 기회는 아저씨한테 넘길게."
"맞다맞다. 유나는 술 못하지?"
"무알콜이나 술 조금만 들어간 칵테일은 좋아하지만 말이야."
"그런 건 달잖아. 쓴맛 나는 쥬스마시는 셈치고 먹는 거라고."
무슨 생각이 났는 지 철가면이 푸하하 웃어버렸다.
"15년된 코냑을 앞에 두고 쓴 약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너무한데."
"불량한 청춘을 보낸 사람은 입 좀 다무시죠. --+++"
철가면은 약간 발끈했다.
"철없는 한때였지만 별 거리낄 것도 없었다구. 뭘 자꾸 그렇게 걸고 넘어지는 겐가?"
"꼬랑지 머리 빨갛게 염색하고 앞 다 파진 옷 입고 깃털 장식 나풀나풀 풍기면서 날라리 괴
도노릇하는 게 젊은 날의 수치가 아니면 뭔데요?"
"..............."
"정말?! 정말이야?"
크리스티앙이 반색을 하며 달려들고, 엘핀스톤과 살라딘의 얼굴은 서로 짠 것처럼 새파래졌
다.
".....믿고 싶지 않군요. 폐하."
"엘리 누님이 대체 뭘 보고...."
소연이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으로 덧붙였다.
"사랑은 콩깍지예요."
"푸하하하~ 어쩐지 아저씨 그 요상한 디자인의 가면 쓰고 다닐때부터 알아봤었어!"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건데요. 크리스티앙."
죠안의 시큰둥한 반응따위인 안중에도 없다는 듯 크리스티앙은 푸하하 웃기에 바빴다.
"....진짜 너무 좋아하는 거 같은 데."
"선배님이라도 보는 거 같은 가보지."
"....크리스티앙도 알고보면 뒤로 호박씨인 거 아닐까? 슬럼가를 꿰고 있는 걸 봐도 그렇지
만 술담배는 기본이고 가끔 약 비스무리한 거 먹고 광란의 밤을 보낸 적도 있다던가..."
"어이어이, 그만 해."
"왜?"
"....이쪽 노려보잖아."
손에 든 장치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방위를 측정하던 철가면은 절망했다.
"분명 이 근처인데 말이지..."
"전파방해로 정찰시스템이 부서진 곳 말이죠?"
"방위는 확실한데... 아무래도 남극이라서 장치 안의 자기가 헷갈리고 있나보군."
손에 든 것이 첨단장비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철가면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쾅
쾅 몇 대 쥐어박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읽은 책에서 남극점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나침반이 소용없어진다는 거
본 적 있다."
"그거 나침반의 바늘이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의 방위가 전부 다 북을 가리키기 때문에 동서
남북 구분이 안되는 거지?"
"응. 나 그 말 듣고 지구는 거대한 자석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잖아."
"자연과학도 좋지만 좀 찾아봐. 뭔가 장치같은 게 없는 지."
"장치? 어떤 거?"
"그걸 내가 알겠냐?"
따라서 램버트가 살라딘의 도움을 받아 모종의 입구로 보이는 것을 찾아냈을 땐, 정말 그
사람의 자손들은 대대손손 무병장수하라고 백일기도라도 올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성인
남자 한 사람이 드나들만한 문은 맨홀뚜껑처럼 위로 나있었다. 입구의 표면이 얼어붙어서는
잘 열리지 않아, 엘핀스톤이 파이어볼을 한방 쏴서 부셔버렸다.
"......아무리 정식초대장이 있다지만 어째 쬐까 미안하네."
맨홀뚜껑같다고 생각했더니 마가 낀 걸까. 안쪽은 정말로 맨홀 뚜껑을 연 뒤의 하수구처럼
무저갱의 어둠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다행히도 하수구같은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그 차
가움과 황량함에 소름이 끼쳤다.
"......미안하다고 한 거 다 취소다."
그 안의 공간은 옛날 옛적 게임화면에서 본 것처럼 상상을 초월한 규모의 홀과 통로일 게
뻔했다.
".....일단 들어가볼까요?"
"아니면 지그문트 박사에게 위치부터 알리고 갈까?"
지그문트 박사가 일행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아론다이트때문이
었다. 사후대책도 중요한 점에서는 그 못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전력이 가
장 큰 이슈가 되는 법. 철가면은 잠시 고민했다.
"잠깐만요."
그러나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나섰다.
"여기가 아니에요."
"......세라자드?"
살라딘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녀의 이름은 어딘지 얼빠지게 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각상마냥 굳은 얼굴로 뻣뻣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으로선 이쪽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어요..."
세라자드는 잔뜩 겁에 질린 아이처럼 불안한 얼굴을 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자
기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라자드,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나도 몰라요! 제발 내게 묻지 마....!!"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비명같은 외침에 살라딘은 저도 모르게 몇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
다. 그녀의 반응은 거의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다들 의혹과 당황이 가득찬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는 환청이 들리는 사람처럼 귀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세라자드."
유나는 조용하게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세라자드. 제발 고개 좀 들어봐요."
천천히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유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고 애썼다.
'괜찮아요?' 라고 조용하게 물었다. 세라자드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닌 입모양으로 의미를 알
아들었다. 붉은 모세혈관이 일어선 눈은 불안해보였고 안색은 창백하기 그지 없었지만 유나
는 세라자드의 얼굴과 차갑게 식은 귓불을 매만지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
다.
"같이 들어갈래요?"
그녀는 유나의 손을 꽉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요?"
세라자드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다들 여기서 기다려요. 진짜 입구를 찾아올테니."
"아, 나도 갈래!"
"나도나도."
"시끄러. 여기서 다들 죽치고 앉아있어. 엘핀스톤, 파이어 필드 한번만 더 써줘요."
유나는 조명탄 몇 개를 빌렸다. 그 중 하나를 터트려서 구덩이 안을 비춰보더니,
"아, 다행이군."
이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훌쩍 구덩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유나!"
"자네...!!"
철가면과 소연, 경님의 부름이 한꺼번에 울렸지만,
"왜?"
저 아래에서 천연덕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이런 망할 자식!!! 깜짝 놀랬잖냐!"
".....그래, 불량한 과거를 가진 가출중년의 수명을 줄이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응?"
이라고 소연과 철가면이 함께 분기탱천했으나,
"뛰어드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 답지 않게 소심하기는."
라고, 가볍게 무시당했다.
이미 터진 조명탄으로 앞뒤를 휘휘 둘러보던 유나는 세라자드에게 내려오라고 손짓을 했다.
살라딘은 몇 번이나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표정이었지만 세라자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
고 조심스럽지만 신속하게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되
어버렸지만 유나가 이내 밑에서 잡아주어서 세라자드는 아무런 이상없이 지하에 도착했다.
'괜찮아요?'라고 다시금 작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이어 '예.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럼 잘들 기다리고 있으라구!!"
울려서 더욱 쩌렁쩌렁하게 들리는 유나의 말을 듣고자 있자니, 어쩐지 바보가 되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살라딘은 맥이 탁 풀려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세라자드와 유나가 안쪽 공간 너머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소연은 대뜸 도끼를 거꾸
로 세워놓은 것 같은 모양, '일명 가자미 눈'을 뜨고서 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몸을 돌려
살라딘쪽을 돌아보았다. 그 기세에 눌려서 버벅대는 남자에게 입모양도 분명하게 선언하기
를,
"바아~보."
뒷통수도 아니고 안면을 그대로 후려맞은 듯한 충격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자 제 2격, 3격이
연이어 날아왔다.
"필립,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네만........에휴."
"쯧쯧, 글렀다. 글렀어. 그쯤 재주가 없는 것도 정말 재주다."
"대체 맨 처음엔 무슨 수로 공주님인 그녀와 친해진 건가? 지금의 자네를 보면 거의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고 싶을 정도네."
"정말 대쉬해서 백년해로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라이벌 하나 없는 가운데 앞길이 이
만큼 탄탄대로인 케이스도 드물고 이만큼 죽쓰는 것도 진짜 드물다?"
자타가 공인하는 전직 플레이보이 국왕님과 성공도는 그렇다치고 아리따운 여성에 대한 빈
번한 수작으로 이름높은 공자님이 동시에 달려들자, 살라딘은 이 추운 와중에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있잖아. 니미야."
"응?"
비록 엘핀스톤에 가려져 잊혀졌지만 한때나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 바로 눈 앞
에서 묵사발이 되고 있으니 물러터진 게 꼭 청포묵같은 니미의 마음이 편할 리가 있으랴.
그러나 니미는 알지 못했다. 안그래도 쥐포처럼 납작해진 살라딘의 자존심에 마지막 칼을
박아넣는 것이,
"전에 유나가 보고서 무지하게 좋아해서는 만화방에서 중고구입한 만화책 생각나냐?"
"아, 그 26권짜리?"
"거기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바로 자신의 친구라는 것을.
"남자한테는 제일 당하기 싫은 일이 두개 있으니, 하나는 같은 사내놈한테 당하는(?) 거고
하나는 여.자.한.테 자.기 애.인 뺏.기.는 거.래."
"..........유나가 좋아할 만한 책이구나;;"
경님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동정과 연민을 담아 온 몸에 언어의 사시미가 꽂힌 채 처
참하게 죽어가는 살라딘을 처연하게 바라보았다.
먼 미래의 일인지, 먼 과거의 일인지 알 수 없는 어느 시간대에서 궁상살라딘으로 이름높았
던 만큼 살라딘은 정말 실감나게 궁상을 떨었다.
"어머나, 저 남자 또 저러고 있으니 은근히 귀엽네?"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불꽃 앞에서 온기를 받아 살만해졌건만 추위 때문에 더욱 업그
레이드된 심술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저 불쌍한 남자에
게 꽂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스티앙은 그래도 인지상정이라고 한마디 하려했
다.
자고로 낳은 정보단 기른 정이라고(뭔소리냐 이게;;) 존에 대한 애정이 필립에 대한 애정을
훨씬 상회하는 철가면이 이렇게까지 말하다니, 그가 얼마나 살라딘의 궁상에 깊은 감명(?)
을 받았는 지 알 수 있었다. 엘핀스톤은 간접경험한 여자의 무서움에 몸을 떨었다.
"어째서 남자란 존재는 이렇게까지 여자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기 보다는 세심하지 못한 거지."
"염색체 하나에 되게 짜게 구네. 술 퍼먹지 않으면 이야기도 못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거
죄다 참아주고 있는 데 그런 거 하나 신경 못써주나?"
".......하는 이야기가 어째 점점 유나를 닮아가는 거 같애;"
여자라고는 죠안을 비롯해 단 세명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묘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죠안
과 친구가 말하니까 그저 들어주고 있는 경님을 제외하면 소연의 성토에 다들 기가 질린
상태였다.
"그저 칼잡고 망나니처럼 휘적버적 돌아다닐 줄만 알았지, 쓸만한 일을 하는 꼴을 본 적이
없어, 아주. 난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인간들 보기 전까진 유나가 왜 그렇게 남자란 '동물'들
을 애물단지처럼 여기는 지 이해못했다니까. 어쩜 저렇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에다 배려라
고는 약에 쓸래야 없는 종자들일까.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아나? 대체 남자란
동물은 여자가 자기에게 보여주는 모습을 사랑하는 거야, 아니면 여자 그 자체를 사랑하는
거야? 이러니까 여자들이 쓸만한 남자는 죄다 유부남 아니면 게이라는 소리나 하면서 한숨
이나 푹푹 쉬고 있는 거야. 얼굴 잘생기고 몸만 좋으면 뭐해, 안에 든게 완전히 불량품인
데."
결국 소연은 열불터지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그 기세도 당당하게 살라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라딘과 같은 방향에 앉아있던 에스프리 유전자
함유의 두 생명체가 저도 모르게 움찔했던 것은 다행히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정말 이렇게 비실비실 굴꺼야?! 나중에 앙그라마이뉴한테든 누군한테든 내 친구가 남자가
아니어서 고맙다고 감사기도 올리기만 해봐!"
그건 그야말로 살라딘의 급소를 한방에 쳐올리는 거라 그는 온 몸을 가득 채운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말 한마디 못했다.
"사랑하잖아! 나도 보면 알 수 있다구!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세라자드가 뭐라고 생
각하는 거야? 그녀에게도 비밀이 있어! 당신 손금처럼 뻔히 들여다보일 때는 눈하나 깜짝안
하더니 당신 눈 밖에 나는 부분이 많아지니까 이렇게 잔뜩 오그라드는 거야? 원래 여자들
이란 남자들이 아무리 기를 쓰고 애써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수천년동안
도닦아봐라! 그 머릿속이 읽혀지는 지! 얌전하고 예쁜 성녀님을 사랑한 거라면 가서 대리석
상이나 끌어안고 있어! 피와 살과 감정과 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때로
는 우울증에도 빠지고 히스테리도 일으켜! 인간이 그렇게 멀끔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소연은 너무 한꺼번에 많은 말을 빠르게 내뱉는 바람에 단거리 경주를 마치고 온 사람마냥
헥헥거렸다.
"어, 어이, 진정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언어가 밀어닥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 갱생이 덜 되서 이런
식의 직선적인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살라딘이 벙쪄있는 동안, 적당히 무시하고 들을 수 있
었던 크리스티앙이 소연을 달래려고 나섰다.
"진정하긴 뭘 진정하라고! 이게 다 저 사람이 자기 일을 제대로 못하니까 유나가 떠맡는 거
잖아! 장래 마누라정도는 자기가 챙겨야 할 거 아냐! 언제까지 여자친구한테 맡겨놓을 셈이
냐구! 언제까지 장모님 노릇해줄 수 있을 거 같애!"
".............."
눈치가 빠른 만큼, 크리스티앙은 지금 소연이 진심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서 짜증을 내고
있으며 그 신경질을 살라딘에게 풀고 있는 거라는 걸 알았다.
"........야,"
크리스티앙은 언제부턴가 아무렇지도 않게 치고 받을 수 있게 된 동년배 여자애에게 자기
쪽에서 먼저 직격탄을 날리기로 했다. 은근히 폐쇄적인 크리스티앙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
었다.
"너,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거냐?"
안그래도 썰렁한 남극 한 복판에서 그야말로 썰렁한 분위기가 일행들을 휘감았다.
소연은 잔뜩 굳은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훽 고개를 돌려버렸다. 경님은 그런 친
구를 앉은 채 올려보다가 손을 내밀어 친구의 손을 잡았다.
쫑알대듯 중얼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린다. 경님은 계속 소연의 손을 잡고 앞뒤로 천
천히 흔들었다.
"......춥고 힘들잖아."
"응."
"시커먼 애들은 뭐가 잘났다고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면서 픽픽 죽어나가고."
"그래그래."
"유나는 갑자기 10년은 늙어버린 것처럼 굴고, 우린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겠고 불안한 거
투성이고 음식은 맛없고 세라자드는 신경쇠약 직전처럼 굴고 무엇보다 하나도 재미없어, 이
런 거. 명색이 수능끝나고 휴가 나온 건데 이게 뭐야, 이 꼴이."
"응, 응. 빨리 끝내고 돌아가서 신나게 놀자."
실로 어린애같은 투정이었지만 그만큼이나 진심이어서 일행들은 본의아니게 숙연해지고 말
았다. 사실 재미운운하는 부분만 빼고는 일행들의 마음을 정확히 집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철가면은 갑자기 자기도 덩달아 10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나이 사십
이면 (하도 사십사십하다보니 세뇌당한 모양;) 가족과 국가를 위해 한창 열심히 일할 나이
이건만 돌아가면 알케호니아 호수 부근에서 그림같은 별장을 짓고 젊고 이쁜 마누라랑 오
순도순 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클라우제비츠와 엘리자베스는 꽤 나이차이가 난다<-
그러고보면 템페스트 시절, 샤른호스트/클라우제비츠랑 동년배인 여자는 제인 쇼어뿐이었던
거 같은 데;; 그건 또 연상이었지;)
아무튼 한창 분위기가 꿀꿀할때, 유나와 세라자드가 내려간 구덩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밧줄 좀 내려줘요~!"
"유나?"
가장 빨리 경님이 반응했고 곧 그녀의 요청대로 매듭이 지어진 밧줄이 구덩이 안으로 내려
갔다. 먼저 끌어올려진 것은 세라자드였다. 뒤이어 손쉽게 밧줄을 타고 유나가 폴짝 올라왔
다. 유나는 어딘가 흥분해있었다.
"우후후, 이제 곧 재미있는 걸 보여줄께요."
"응?"
"자, 일단 여기서 좀 떨어져요."
일행들은 영문도 모르고 유나가 이끄는 대로 미적미적 이동했다.
"아... 이쯤이면 됐을려나.. 어때요, 세라자드?"
세라자드는 알게 모르게 상당히 침울한 얼굴이었지만 유나가 기대감으로 번쩍번쩍한 얼굴
을 하고 돌아볼때마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세라자드에 대해선 누구보다 민감하다
고 해도 좋을 유나가 이런 극단적인 변화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에스프리 삼형제중에서 가
장 연장자인 만큼 그래도 마음씀씀이가 괜찮은 엘핀스톤은 어딘가 불안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좋아요, 혹시 모르니까 다들 귀막으시고~"
"자, 잠깐만!"
철가면은 그제서야, 유나의 손에 들려있던 붉은 스위치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멋도 모르고
착실하게 귀를 막는 다른 일행들과 달리 손을 뻗어 그녀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5, 4, 1, 0."
쾅-!
굉음과 함께 공기의 진동이 일행들의 온 몸을 후려쳤다. 투명하던 대기는 잔잔한 얼음조각
들과 폭발에 날아오른 눈발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앞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만큼 두꺼워졌
다.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얼음이 쩌적쩌적 갈라지는 소리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귓가에 메아리쳤다. 다들 반쯤 패닉에 빠져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은 가운데, 철가
면은 자기혼자 용가리 통뼈라고 희희낙락 서 있는 유나의 실루엣을 보고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4에서 바로 1로 넘어가는 카운트 다운이 어딨나!!!"
고래고래 고함을 치는 와중에도 입안으로 차가운 얼음조각이 들어왔다.
"그거야 부르는 사람 마음이죠! 그 자리에서 꼼짝말고 있어요! 딴 데 새지 말고!"
그리고 서서히, 얼음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유나가 조명탄을 들고 갈 때 혹시나 몰라서 들
고간 소형폭탄이 무너뜨린 곳은 거대한 원형으로 분지처럼 중앙에서부터 움푹 들어가있었
다. 일행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성인 남자 두세명은 세로로 포길 수 있는 깊이로 분지를
파낸 붕괴는 아슬아슬하게도 일행들의 발 바로 1미터 앞에서 멈춰있었다. 분지의 크기는 거
의 운석이 떨어져서 생긴 크레이터랑 맞먹었다.
"이, 이, 이, 이...."
"이게 무슨 짓이냐고요?"
"죽을 뻔 했잖은가!!!!"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했잖아요.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섰으면 눈에
파묻어 질식사했을 걸요. 세라자드랑 다 측정하고 한 거란 말이예요."
"자네가 뭘 믿고!"
"거 참 쫑알거리네. 다 보고 온 게 있어서 그런 거라니까요......얼레? 그런데 이 정도론 부족
한 건가?"
"이 짓을 또하겠다고?! 말도 안돼! 대체 무슨 짓인가! 입구를 파괴하면 우리가 못들어가잖
아!"
유나는 깔끔하게 철가면을 무시하고는 경님과 소연, 세라자드, 엘핀스톤, 램버트 등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을 몽땅 불러 나란히 크레이터 바깥에 세웠다.
"자, 내가 셋을 세면 동시에 파이어볼을 쏘는 겁니다. 에... 기왕이면 저기 저 움푹 들어간
중앙부분을 향해서. 괜찮겠어요?"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다들 어영부영하면서도 손을 내밀고 주문 영창에 들어갔다.
뭔가 말하려던 철가면도 일단 뭘 할 셈인지 두고 보자는 심산으로 뒷짐 지고 물러섰다.
작은 태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불덩어리가 동시에 한 점을 향해서 쏘아져나갔다.
스무개 남짓한 거대한 열덩어리들이 얼음 위에 직격하자, 얼음은 물이 될 틈도 없이 수증기
로 승화했고 열에 의해 상승하는 순간 급속도로 냉각됐다. 조금 큰 물방울들은 작은 구슬같
은 결정을 만들어 그대로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지만 대부분의 수증기는 거대한 형상으로
희끄무레하게 공중에 뭉쳐있었다. 미묘한 각도로 반사된 빛과 우연의 일치로 그것은 마치
하늘에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기둥으로 보였다.
"............."
다들 정신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반사된 태양 빛에 의해 잠시 무지개의 일곱 색깔이
기둥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가 사라져갔다. 파이어볼의 열에 의해 움직인 대기는 다른 층의
공기까지 움직여서 강풍을 일으켰다. 강풍은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출현한 하늘의 기둥을 치
워버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마침내 자연이 만들어낸 현상이 건 집단적인 최면에서 깨어나
파이어볼이 강타한 지상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지금까지 자기가 본 것은 아무것
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서져서 밑으로 가라앉은 얼음층들은 죄다 녹아있었다. 얼핏 원형처럼 보이던 크레이터는
기하학적으로도 완전한 원형이었다. 구조물은 거대했다. 아직 채 녹지 않은 눈과 뜨거운 온
도로 달궈진 금속이 뒤섞여서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수증기 사이로 보이는 구조물은 아
무리 봐도 인공의 것이었다.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기둥과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차가운
금속들이 견고하고도 치밀하게 서로를 얽어매어 비스듬한 직선을 이루며 갈퀴같은 형태로
지하의 지층에 박혀있었다. 거의 동일한 형태와 크기의 기둥들 수십만개가 특정한 배열없이
노끈처럼 자유롭게 연결되어 전체적인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가히 초현실적이었다.
그 초현실성과 상관없이 땅 속으로 깊숙이 꺼진 원형의 인공구조물의 정체가 뭔지 철가면
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왕국과 그의 오랜 친구가 다스리는 제국에도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단지, 그들의 것은 지하가 아닌 지상에 솟아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비공정의 착륙장이었다.
유나는 어딘가 도취적인 표정으로 거대한 구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르의 술탄궁과 아드
리아노플의 지하미궁이 그랬듯이 이 거대한 건축물은 유나에게 기묘한 고양감을 선사해주
었다. 그녀는 빙그르르 돌더니, 턱이 빠질 것처럼 입을 벌리고 선 친구들을 향해 크게 팔을
펼치며 외쳤다.
"Welcome to Crystal Temple."
순간적으로 그녀의 등 너머 보이는 기이한 풍경과 그녀의 드라마틱한 행동의 조합은 이 모
든 상황에 일종의 오페라같은 웅장함을 더해주었다. 물론 바로 직후,
"뭐, 내가 집주인은 아니지만."
라고 말하며 경솔한 쇼맨쉽을 마무리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 앞의 경이에 대한 충격보다 유나의 뻔뻔하고도 과격한 행태에 기가 질린 동료들의 경악
스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유나는 다시 한번 자신의 뻔뻔함을 과시했다.
"라이트 블링거 불러와야죠? 지그문트 박사 불러요."
철가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리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재미없잖아요. 이왕 고생하는 거 재미있게 하는 게 낫지."
문제는 자기 혼자만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재미없다는 점이지만.
"니미야."
"응."
"내가 앞으로 한번만 더 재미운운하면, 내 입을 그냥 콱 꿰매버려라."
"........으, 으응;;;"
매끄럽고 투명한 빙퇴석으로 만든 옥좌는 견고하고 차가운 위엄에 가득차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처량해보였다.
- 소리높여 호령했던 대지는 바람과 세월에 묻히고 그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던 강건한
군대도, 시중을 들어줄 하인은커녕 다스리고 보살펴야 할 백성조차 간 곳이 없나니.
어느 유명한 극작가의 대사 한구절을 머릿속에서 읖조리며 남자는 시니컬하게 웃었다. 아무
렇게나 무릎 위에 던져져있던 팔을 들어 턱을 괴였다. 그저 입술에 걸려있던 곡선에 불과했
던 웃음은 미소에서 조용한 웃음소리로 번져나갔다.
마족의 왕은, 최후의 최후까지도 자신의 여유와 얼음처럼 차가운 유머감각을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첫댓글 베, 벨제부르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