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파워 게임에 조직 흔들려
갈등 노출된 자체가 위기 신호
국정원 로고.
국정원이 정권 교체 이후 1년 동안 인사 갈등과 자리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최근의 인사 파동은 정치권을 중심으로 외부에 모두 노출됐다.
김규현 원장이 올린 인사안을 재가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다른 경로를 통해 김 원장의 측근이 부적절하게 인사에 개입한 정황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처음 인사안을 번복해 대기 발령을 내렸다는 내용이었다.
인사 갈등 배경에는 정권 교체에 따른 내부 세력 간 다툼이 있었다.
국정원은 북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공(對共)·산업 스파이 수사와 사이버 테러 대응을 담당하는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다. 보안이 생명인 조직의 인사 파동이 외부에 알려진 것 자체가 국정원의 위기 신호이자 비정상적 모습을 노출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때 국정원에 대한 ‘적폐 청산’을 거치며 국정원 조직이 심각히 훼손됐다고 지적했다.
정권의 노선이나 대북 정책 기조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청산·역청산이 반복되면서, 국정원 요원 간 세력 다툼이 국정원 조직 안정을 흔들 정도로 심각해졌다는 지적이다.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 광복회장은 “정권 교체 등 외풍에 휘둘리지 않는 미 중앙정보국(CIA)이나 이스라엘 모사드처럼 요원 인사에서 전문성과 계속성을 바탕으로 인사가 이뤄지도록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가했다가 일주일 만에 번복한 이번 국정원 인사 파동은 1급 간부 승진·보직 인사가 문제가 됐다.
김규현 원장은 이달 초 윤 대통령 재가를 받아 1급 부서장 등 간부 17~18명에 대한 인사를 실시했는데, 김 원장 측근 A씨가 국정원 입원 동기거나 지연, 근무연 등으로 얽힌 인사들의 승진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반면 A씨와 가까운 인사들은 “문재인 때 대북 협력 사업이나 종전 선언 추진에 가담한 직원들에 대한 청산 작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A씨에 대한 반격에 나선 것”이라고 했다.
김규현(가운데) 국가정보원장이 지난달 31일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회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번 인사 파동을 두고 문재인 때 국정원 요원을 ‘적폐’란 이름으로 과도한 청산 작업을 벌였고, 정권 교체 후 이에 대한 역청산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정원 내 세력 간 갈등이 불거진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정권 교체 등 권력 지형 변화에 따라 청산·역청산이 반복되는 한국형 정보 요원 인사가 갈등 배경 중 하나란 것이다.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들은 “진상이 뭐가 됐든 전문성 등 국정원 직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사의 원칙이 공유되지 않으면 인사 갈등이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원장이 5년 이상 재직하고 요원들이 한 테러 조직을 십 년 이상 추적하는 이스라엘의 모사드나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전문성을 최우선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처럼 전문성과 계속성을 살린 인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CIA 국장은 평균 임기가 3~4년이지만, 한국의 국정원장은 평균 1년 반이다. 또 CIA나 모사드에서 적대 세력 추적을 전담하는 팀은 십수 년 이상 팀원 교체 없이 작전을 수행한다.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전문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전직 국정원 간부는 “한국은 정권에 따라 직원들도 담당 분야에 따라 좌천과 중용이 반복되면서, 내부에서 일종의 패거리가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여권 관계자는 “이번 인사 파동은 정권 초 국정원 내 주도권을 잡은 A씨를 중심으로 한 그룹과 이에 맞선 그룹이 충돌한 것”이라고 말했다.
현 정권 출범 후 국정원 내부 인사를 둘러싼 갈등은 1년 내내 이어졌다.
검사 시절 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됐던 조상준 전 기조실장이 임명 4개월 만인 작년 10월 돌연 사퇴한 것을 두고도 김 원장 참모 세력과의 갈등 때문이란 말이 무성했다.
정보 소식통은 “전 정부의 국정원 주류에 편승한 요원들을 대거 물갈이해야 한다는 김 원장 측근 그룹과, 조직 안정을 위해 어느 정도 화합이 필요하다는 조 실장 그룹 간 갈등설이 파다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국정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 인사 물갈이가 이뤄진다.
전 정부에서 인사 피해를 봤던 사람들은 정권이 교체되는 것을 계기로 부상하고, 전 정부에서 득세했던 사람들이 다시 소외되는 일이 반복됐다. 진보 정권이냐 보수 정권이냐에 따라 대북 담당 직원들의 조직 내 역할 비중이 달라지는 게 대표적이다.
문재인의 경우 정권 초기인 2017년부터 국정원 ‘적폐 청산 TF’를 만들어, 과거 정부 국정원 인사들을 수사·재판으로 이끌었다.
검사들이 파견을 가서 국정원 서버를 샅샅이 뒤져 검찰에 넘겼다. 이로 인해 민간인 사찰, 정치 관여 사건 등으로 국정원 인사 여럿도 수사와 재판을 받았고, 국내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조직은 없어졌다.
대공 수사도 대폭 줄었다.
예컨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민노총 전·현직 간부들이나 ‘자주통일 민중전위’ 조직원들에 대한 국정원 추적 수사는 2016~2019년까지 이뤄졌다. 그런데 돌연 수사가 뚝 끊겼다가 작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에 다시 재개됐다고 한다.
국정원 내부 권력 다툼이 심화해 정상적인 인사가 어려울 정도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대통령이 재가한 인사안이 번복된 것은 정상적인 인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국정원 1차장을 지낸 남주홍 경기대 석좌교수는 “어느 조직이든 정권에 줄 서기는 만연하지만 나름의 인사 원칙을 구축하고 요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면 파동까지 번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국정원 조직의 건강성이 위기란 방증”이라고 했다.
김 원장이 참모로 중용했던 A씨가 인사 전횡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나, 그를 둘러싼 인사 번복 파동이 외부로 알려진 것이나 현 정권의 국정원 조직 장악력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이 적잖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정보 업무는 전문성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일부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면 오판하기 쉽다”고 했다.
반면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정보기관의 속성상 간부 인사 번복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것은 인사 불만 세력의 반격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런 갈등은 투서와 제보라는 형태로 외부에 그대로 노출됐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간첩 잡는 데 특화된 국정원 요원들의 공작 노하우가 상대 세력에 대한 음해와 투서에 활용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