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황하와 강남 그리고 초원의 정세는 고구려에 심각한 영향을 언제나 주었습니다. 짧게 고구려 후기만 언급하겠습니다. 고구려는 호태왕과 장수태왕시기 유연과 손을 잡고 지두우를 분할하면서 북위를 견제했습니다. 사실 이 당시 고구려의 전성기는 장수태왕의 완벽한 외교술로 동아시아 3대 문명권을(초원, 황하, 강남) 제어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초원정세가 동맹국 유연에서 적대적인 돌궐로 바뀌면서 고구려는 심각한 위기를 맞습니다. 대내적으로 왕위계승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신흥 강국 돌궐과의 전쟁은 엄청난 위기였습니다. 혹시 후대이지만 몽고족인 칭기스칸이 초원을 통일했을 때 서하, 금나라, 서요, 호라즘, 러시아 같은 대국에 보여준 엄청난 파괴력을 아시지요! 분열되있는 유목민족들이 하나의 지도자로 뭉치면 통일 당시에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역시 돌궐 제일 칸국은 지금의 몽고 일대와 중앙아시아를 모두 통일하고 인근국가를 무참히 유린하면서 고구려에도 칼끝을 겨누기 시작했지요. 끝내는 고구려는 돌궐을 저지했지만 결국 배후에 신라에게 한수를 상실하고 560년대에는 옥저까지 일시상실합니다. 신라는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구려가 돌궐과의 전쟁에 탈진 상태가 되자 뒤통수를 친 것이지요! (언제나 신라는 고구려가 북방에서 전쟁을 할때마다 배후쳤습니다.) 신라의 성장은 사실 돌궐의 의도되지 않은 도움이 켰습니다.
시간이 흘러 대수전쟁에 이긴 고구려는 분명히 서토지역(만리장성으로)에 진격을 고려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 가지 이유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습니다.
첫째는 고구려의 대수전쟁으로 인한 막심한 피해
둘째는 고구려의 마지막 명군이었던 영양태왕의 사망, 그리고 영류태왕(고건무) 등극
을지문덕, 연자유, 연태조 계열에 신흥무관세력이 약화하고 온건노선에 대로들의 집권이 예상됩니다
(물론 꼭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고건무도 대외강경파였으니까요.
불행하게도 당나라가 돌궐(?)과 고창국(?)정벌에 성공하자 이에 놀라 그의 입장은 변합니다.)
셋째는 돌궐의 급성장 때문이었습니다.
동서돌궐로의 분열과 내분으로 잠시 수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했던 돌궐은 고수전쟁으로 양측이 약해진 틈을 타서 초강대국으로 다시 성장했습니다. 거란과 실위 토곡혼 고창국을 복속하고 군사가 100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목간칸의 전성기를 능가했지요. 고구려로써는 돌궐이 동맹관계라면 같이 수나라를 나누어 먹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고구려와 돌궐은 밀약정도는 했지만 동맹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양쪽 다 전쟁까지 치룬 준적군이었기 때문에 무턱대고 상대방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고구려군이 수나라쪽으로 남하하면 돌궐은 비어있는 고구려본토를 칠지도 모르지요!
제 사견으로는 고구려가 수당교체기에 아무것도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초원의 패자 돌궐이라는 존재로 봅니다.
결국 고구려멸망의 원인이 중화문명권의 통일과 소국주의노선을 걷던 신라성장의 방치라면 근본적으로 따지고 보면 초원세력과 손을 확실하게 잡지 못했던 것이 또 하나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중화 문명권 통일과 신라의 방치 모두다 고구려와 돌궐과의 미묘한 힘에 대결 때문이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장수태왕처럼 뛰어난 외교력을 가진 멸망시기 고구려에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아쉽지요. 결국 연개소문이 집권할때는 당주(당나라 주인) 이세민은 황하 강남 초원 3대 문명을 완벽하지는 않지만 지배함으로써 고구려와 당은 1:3이라는 어려운 싸움을 언제나 반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3대 문명의 장점을 혼합해서 고구려를 쳤기 때문에 국력차는 1:7은 넘었을 것입니다.)
첫댓글참고로 옥저지역은 빼앗긴 정도는 아니고 신라가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가 금방 다시 수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급선이 너무 길어진데다가 신라에게는 거기까지 점령할 능력은 없었거든요. 이후 연개소문이 집권 후 백제와 손잡기 전까지 신라는 한수유역까지를 세력권으로 유지합니다.
신라가 야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는 초창기부터 소국주의 노선을 걷던 국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고구려 백제 가야 수 당 외세가 강할 때는 조공을 바치면서 살았습니다. 대국주의 노선에 고구려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들은 안정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대국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대국으로 성장할 수없는 약소국으로써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본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의 균형 질서에 파괴였고 중화주의 세계관이 성립될 수 있는 불행한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주제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동아시아사에서 유목제국의 위력은 언제나 과장되어 있는 듯 하군요. 백만이라...;; 정착화하여 대제국을 이룬 오스만투르크도 정규군은 30만 정도였다던데... 물론 원정때는 잡병들 모아서 수를 뻥튀기긴 했지만요... 무조건 결과만 놓고 대단하다고 말하기 보다는 좀 더 넓은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네요.
꼭 숫자뿐만 아니라 보통 유목제국은 엄청나게 강한 전투국가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분이 많지요. 그런데 유럽쪽에서는 유목민들이 강세를 떨치지 못했거든요. 훈족은 대제국을 세웠지만... 게르만, 로마 연합군에게 패하고 멸망의 길을 걸었고... 그 외 아바르족이 제국을 세웠지만... 유럽방면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고... 페체네그, 쿠만족들 역시 잠깐 위세를 떨쳤을 뿐 결국 비잔티움에 패하여 소멸했죠. 그리고 돌궐의 일족인 투르크인들은 십자군기사들에게 상당기간 밀렸습니다. 물론 몽골인들이 유럽쪽에서도 강세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는 예외라 칠 수 있겠죠. 그러고 보면 유목민들이 위력을 떨쳤던 곳은 동아시아
방면으로 한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건 동아시아의 유목민집단의 전투력이 서방의 유목민들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동아시아에서의 유목민들의 엄청난 위력은 서방과 다른 특수한 정치적 사정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 예로, 동방과 서방에 대제국을 세웠던 오스만투르크의 경우...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지만 서방진출에 있어서는 겨우 발칸과 헝가리 일부를 정복했을 뿐이죠. 게다가 유럽지역 영토에 대한 진출은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무조건 동아시아에서의 결과만 놓고 유목민들은 엄청나게 강했다, 라
벨리사리우스님 그건 약간 결과론적 해석이 아닌가 싶군요. 훈의 경우 게르만 로마 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 초토화의 길을 제지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훈이 망한 것은 훈왕 아틸라 사후 후계자 문제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은 내분 탓이 더 큽니다. 비슷한 예로 2세기 즈음에 북흉노를 격파하고 선비제국을 세운 단석괴가 죽은 이후에 같은 형태의 후계자 쟁탈 내분으로 선비족은 지역 유목민으로 추락합니다. 또한 투르크의 경우는 투르크가 이슬람화, 즉 정주문명화 했기 때문에 유목민 특유의 감각이 무뎌졌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서돌궐 제국 시대에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이슬람화 되었던 일부 투르크는 카라키타이. 즉 서요 시대가 되면 불교인이었던 거란인에게 배척이 되기도 하고 여러 일련의 과정을 거쳐 노예 병사나 용병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유목생활의 정지를 뜻합니다. 부족단위의 용병이 아니라 개개인이 용병이 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군대의 행동 지침에 속박되어 이전과 같은 유목생활을 할수 없게 되고 이것은 유목민 특유의 마인드나 감각을 무뎌지게 하지요. 또한 이슬람화 하면서 점차 일부 투르크인들은 유목민의 생활과는 조금씩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쇠퇴하고 난 후 소규모 국가단위로 쪼개진 후에는
이렇다할 대규모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투르크 기사들에 비해 전문적으로 전투기술을 닦아온 십자군 기사들(사실 깡패집단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들이지만)에게 당해낼 수가 없지요. 유목민의 감각이 사라진 뒤에 전투경험이라도 많아야 했는게 그렇지 못하니 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십자군 기사와 같은 중무장한 중장기병은 동양에도 있었고 기술적, 전술적 분야에서 보자면 십자군 기사들 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기도 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목민에게 우위에 점하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군은 이슬람화한 투르크인을 격파한 것일까요? 투르크라고 해도 다 같은 투르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방에서는 스키타이 이후로 자체적인 유목제국이 성립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해당 정주문명의 재화 차이, 그리고 상대 정주문명의 국력 규모 때문에 발생합니다. 스키타이와 상대하는 페르시아 제국과 훈제국 이후의 유럽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흉노제국 성립이 언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참고로 옥저지역은 빼앗긴 정도는 아니고 신라가 일시적으로 '진출'했다가 금방 다시 수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급선이 너무 길어진데다가 신라에게는 거기까지 점령할 능력은 없었거든요. 이후 연개소문이 집권 후 백제와 손잡기 전까지 신라는 한수유역까지를 세력권으로 유지합니다.
참고로 연개소문 집권 후 백제와 연합 한 고구려 군에 의해 신라가 진흥왕 때 확보한 한수 유역 30여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면 두나라의 스케일이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티얼님 말씀이 옳습니다. 옥저부분은 좀 고쳐야 겠군요.
진출이라는 표현보단 침략이 표현이 좋은것 같아요 신라는 역시나 비겁하네요 백제를 배신한것도 모자라 뒤퉁수를 때리다니 그런나라가 역사에 있는게 부끄럽네요 지딴에는 살아보겠다고 한짓일테지만
비겁하다고 할것까지야.. 너무 비하하시는거 아닌가요..
신라가 야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라는 초창기부터 소국주의 노선을 걷던 국가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고구려 백제 가야 수 당 외세가 강할 때는 조공을 바치면서 살았습니다. 대국주의 노선에 고구려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들은 안정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대국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대국으로 성장할 수없는 약소국으로써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본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동북아시아의 균형 질서에 파괴였고 중화주의 세계관이 성립될 수 있는 불행한 길이 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으음.. 주제와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동아시아사에서 유목제국의 위력은 언제나 과장되어 있는 듯 하군요. 백만이라...;; 정착화하여 대제국을 이룬 오스만투르크도 정규군은 30만 정도였다던데... 물론 원정때는 잡병들 모아서 수를 뻥튀기긴 했지만요... 무조건 결과만 놓고 대단하다고 말하기 보다는 좀 더 넓은 각도에서 연구가 진행되면 좋겠네요.
돌궐 백만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는듯 합니다. 말그대로 백만으로 받아들이면 곤란...
동감 ㅋ 백만대군은 과장임. 그냥 만리장성 북쪽만 장악했는데 어떻게 그런 대군이.. 받아들이기 곤란.
유목제국 군사 뻥튀기는 인구수를 기록한 자료가 그때 당시에도 없었기때문에 그런것이 아닐까요?
물론 한족들의 문언기록입니다만 정확히 썼다기 보다는 그정도로 돌궐이 강했다는 의견이 가까울 것입니다.
꼭 숫자뿐만 아니라 보통 유목제국은 엄청나게 강한 전투국가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분이 많지요. 그런데 유럽쪽에서는 유목민들이 강세를 떨치지 못했거든요. 훈족은 대제국을 세웠지만... 게르만, 로마 연합군에게 패하고 멸망의 길을 걸었고... 그 외 아바르족이 제국을 세웠지만... 유럽방면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고... 페체네그, 쿠만족들 역시 잠깐 위세를 떨쳤을 뿐 결국 비잔티움에 패하여 소멸했죠. 그리고 돌궐의 일족인 투르크인들은 십자군기사들에게 상당기간 밀렸습니다. 물론 몽골인들이 유럽쪽에서도 강세를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는 예외라 칠 수 있겠죠. 그러고 보면 유목민들이 위력을 떨쳤던 곳은 동아시아
방면으로 한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건 동아시아의 유목민집단의 전투력이 서방의 유목민들보다 뛰어나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이런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동아시아에서의 유목민들의 엄청난 위력은 서방과 다른 특수한 정치적 사정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 한 예로, 동방과 서방에 대제국을 세웠던 오스만투르크의 경우...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지만 서방진출에 있어서는 겨우 발칸과 헝가리 일부를 정복했을 뿐이죠. 게다가 유럽지역 영토에 대한 진출은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무조건 동아시아에서의 결과만 놓고 유목민들은 엄청나게 강했다, 라
고 하기 보다는 다양한 지역사정을 비교 고찰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양쪽에서 다굴맞는데 배겨낼 재간이없죠.
벨리사리우스님 그건 약간 결과론적 해석이 아닌가 싶군요. 훈의 경우 게르만 로마 연합군에게 패하여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니라 유럽 초토화의 길을 제지당한 것에 불과합니다. 훈이 망한 것은 훈왕 아틸라 사후 후계자 문제가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은 내분 탓이 더 큽니다. 비슷한 예로 2세기 즈음에 북흉노를 격파하고 선비제국을 세운 단석괴가 죽은 이후에 같은 형태의 후계자 쟁탈 내분으로 선비족은 지역 유목민으로 추락합니다. 또한 투르크의 경우는 투르크가 이슬람화, 즉 정주문명화 했기 때문에 유목민 특유의 감각이 무뎌졌다고 보는 것이 옳지요.
서돌궐 제국 시대에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면서 이슬람화 되었던 일부 투르크는 카라키타이. 즉 서요 시대가 되면 불교인이었던 거란인에게 배척이 되기도 하고 여러 일련의 과정을 거쳐 노예 병사나 용병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유목생활의 정지를 뜻합니다. 부족단위의 용병이 아니라 개개인이 용병이 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군대의 행동 지침에 속박되어 이전과 같은 유목생활을 할수 없게 되고 이것은 유목민 특유의 마인드나 감각을 무뎌지게 하지요. 또한 이슬람화 하면서 점차 일부 투르크인들은 유목민의 생활과는 조금씩 동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쇠퇴하고 난 후 소규모 국가단위로 쪼개진 후에는
이렇다할 대규모 전투를 경험하지 못한 투르크 기사들에 비해 전문적으로 전투기술을 닦아온 십자군 기사들(사실 깡패집단이라고 불러야 할 사람들이지만)에게 당해낼 수가 없지요. 유목민의 감각이 사라진 뒤에 전투경험이라도 많아야 했는게 그렇지 못하니 패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십자군 기사와 같은 중무장한 중장기병은 동양에도 있었고 기술적, 전술적 분야에서 보자면 십자군 기사들 보다도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기도 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목민에게 우위에 점하진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십자군은 이슬람화한 투르크인을 격파한 것일까요? 투르크라고 해도 다 같은 투르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방에서는 스키타이 이후로 자체적인 유목제국이 성립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이것은 해당 정주문명의 재화 차이, 그리고 상대 정주문명의 국력 규모 때문에 발생합니다. 스키타이와 상대하는 페르시아 제국과 훈제국 이후의 유럽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흉노제국 성립이 언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