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현지시간)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자흐란 궁 앞. '럭셔리카의 정석'으로 불리는 1968년형 빈티지 '롤스로이스 팬텀V'가 멈춰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명 디자이너 엘리 사브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티아라(왕관)를 쓴 신부가 사뿐히 내렸다.
아름다운 신부의 등장에 모여있던 군중은 일제히 환호를 보냈고, 황금 장식의 군도(軍刀)를 찬 군복 차림의 신랑은 환한 미소로 신부를 맞이했다.
지난 1일(현지시간)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후세인 빈 압둘라 왕세자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력 가문 출신인 라즈와 알사이프가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주인공인 신랑 신부는 요르단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후세인 빈 압둘라(28) 왕세자, 사우디아라비아 유력 가문 출신인 라즈와 알사이프(29)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자흐란 궁은 역대 요르단 왕조의 예식이 거행됐던 유서 깊은 장소다.
지난 1일 요르단 수도 암만의 자흐란 궁에서 요르단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후세인 빈 압둘라 왕세자의 결혼식이 열렸다. 사진은 식장 앞으로 신부 라즈와 알사이프가 탑승한 1968년형 빈티지 '롤스로이스 팬텀V'가 들어서는 모습.
결혼식은 꽃이 만발한 탁 트인 야외 정원에서 이슬람 전통에 따라 진행됐다.
하객으로는 영국의 윌리엄 왕세자와 케이트 미들턴 왕세자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 등 140여 명의 각국 명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요르단은 왕세자 결혼식에 전역이 들썩였다. 지난 1993년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61)과 라니아 왕비가 결혼한지 30년 만에 열린 왕가 결혼식이었다.
정부는 이날을 임시 공휴일로 선포하고 거리 곳곳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결혼식을 생중계했다.
1일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왕실 결혼식에 영국의 윌리엄 왕자(왼쪽)와 캐서린 미들턴 왕세자빈이 참석해 후세인 요르단 왕세자와 신부 알사이프를 만나고 있다.
"정치적 동맹 강화 현장"
한 편의 로맨스 영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같지만, 정치외교가에선 "양국의 정치적 동맹 강화 현장"이란 분석이 나온다.
에얄 지서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 중동사 교수는 "중동에서 혼인은 기본적으로 정치가 깔려있다"며 "(이번 결혼은) 대외적으로 시아파 맹주 이란과의 갈등 등과 같은 도전에 직면해 있는 두 국가끼리 우호 관계를 확립, 강화하려는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신부 알사이프는 배경은 이같은 '동맹 강화'라는 해석에 힘을 싣는다.
알사이프는 사우디 주요 건설사를 소유한 억만장자의 3남 1녀 중 막내딸이다. 아랍어·영어·프랑스어에 능통하며, 미국 뉴욕 시라큐스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미국과 사우디에서 건축가로 활동 중인 엘리트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우디 알사우드 왕가의 핵심 세력인 '수다이리 세븐(압둘아지즈 현 국왕의 8번째 부인 후사 알수다이리의 친아들 7명) 혈통으로, 사실상 사우디 정통 왕실의 일원이다.
알사이프에게 공주의 칭호가 부여됐는데, 요르단에선 왕세자비라는 직함이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식 후 후세인 왕세자와 신부 알사이프가 거리에 모인 요르단 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신랑 후세인 왕세자는 압둘라 2세 국왕의 맏아들로, 2009년 15세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미 조지워싱턴대에서 국제역사를 전공한 후세인 왕세자는 이후 영국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2015년 당시 20세였던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를 주재한 최연소 인물로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었다. 이후 2017년 유엔총회 연설, 2022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 등 굵직한 외교 무대에 등장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요르단은 입헌군주국이지만, 왕은 군의 최고 통수권자이며 정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후세인 요르단 왕세자(오른쪽)와 그의 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라즈와 알사이프가 1일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결혼 예식을 올리고 있다.
베일에 싸인 러브스토리, 정략결혼?
사실상 왕가의 결합인 이번 결혼에 외신들도 "아랍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군주국 간 결합"으로 평가한다.
요르단과 사우디 양국이 전략적 유대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계획의 첫 단추가 바로 두 사람의 결혼이란 의미다. 실제로 신랑·신부는 둘 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는 공통점과 사우디에서 약혼했다는 사실 외에, 첫만남 등 구체적인 러브스토리는 알려진 바 없다.
요르단 왕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략 결혼을 택하는 일이 흔했다.
후세인 왕세자의 아버지인 압둘라 2세도 역내 안보를 위해 이웃나라 팔레스타인 여성과 혼인했다. 전 요르단 국왕인 후세인 1세(재위 1952~1999년)도 서방의 오랜 동맹국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영국과 미국 출신 여성들을 왕비로 맞이했었다.
요르단 왕궁이 1일 암만의 자흐란 궁전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후세인 왕세자(오른쪽)와 그의 아내 사우디 라즈와 알사이프가 혼인 서약에 서명하고 있다.
요르단의 현 상황은 사우디와의 '정략결혼'이 필요하다는 게 외신의 분석이다.
중동 한가운데 위치한 요르단은 예루살렘 성지 국가로서 중동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주변국과 달리 천연자원이 부족한 데다 시리아 난민 유입 문제까지 겹치면서 요르단은 높은 실업률과 고물가 등 만성적인 경제 부진에 시달리는 중이다.
요르단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1분기 실업률은 21.9%에 달하는데, 이 중 실업자의 25%는 대학 학위를 딴 고학력 청년층으로 나타났다.
그나마 걸프협력회의(GCC)·미국 등 해외 원조에 의존하던 경제도 흔들리는 처지다.
2018년 36억 달러(약 4조 6000억 원)에 달하는 GCC의 원조 패키지가 이행된 후, 중동 최대 부국인 사우디가 경제난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대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질적으론 이 시기에 사우디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를 요르단이 옹호하지 않는 데 대한 보복 성격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세자(오른쪽)와 그의 신부 라즈와 알사이프가 1일 결혼식을 올리고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또 빈 살만 왕세자가 실질적 통치자로 집권한 이후 사우디가 러시아와 석유 생산과 관련해 밀착 행보를 보이자,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인 요르단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관계가 계속 경색됐다.
그러다 최근 들어 사우디가 적대적인 중동 국가와 단절됐던 관계를 복원하는 등 외교 노선을 선회하면서 요르단과 사우디 사이에도 해빙 모드가 조성되고 있다.
지난해 요르단을 방문한 빈 살만 왕세자는 "요르단과의 관계를 새 국면으로 전환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든든한 사우디 처가, "미래 국왕 발표식"
결국 이번 혼인의 최대 수혜자는 후세인 요르단 왕세자가 되리란 관측이 나온다.
이번 결혼으로 사실상 차기 국왕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다졌기 때문이다. 앞서 요르단 왕실은 2021년 압둘라 2세 국왕의 이복동생인 함자 왕자가 국외 정부의 도움으로 국왕 자리를 빼앗으려다 가택 연금되면서 승계 분쟁을 일단락지은 바 있다.
"단순한 결혼식이 아니라 후세인 왕세자가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임을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후세인 빈 압둘라 요르단 왕세자가 1일(현지시간) 암만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중 그의 신부 알사이프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아메르 사바일레 요르단 정치분석가는 AP통신에 "이번 결혼은 요르단의 국내·외 정치 모두에 중요하다"며 "요르단의 미래 국왕을 발표하는 행사임과 동시에, 사우디와의 관계 회복은 요르단에 대한 더 많은 원조의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즉위 후에 사우디의 처가가 후세인의 든든한 뒷배가 돼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요르단 국민의 88% 이상이 사우디에 호의적이라는 국내 여론도 후세인 왕세자에 유리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