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iyā adhivacanaṃ 기억에 대한 비유
'문지기' 비유도 나오지만 다음과 같은 비유도 경문(S47 : 20)에 나타납니다.
이때 삶을 원하고 죽음을 원하지 않고 즐거움을 원하고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 자가 찾아왔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이와 같이
'이 보게 그대는 이 기름으로 가득 채운 그릇을 가지고
대중들과 나라의 최고의 미인 사이를 돌아 다녀야 한다.
또한 칼을 뽑아 든 한 남자가 그대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기름을 조금이라도 흘리면, 그는 즉시 그대의 목을 벨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atha puriso āgaccheyya jīvitukāmo amaritukāmo sukhakāmo dukkhappaṭikūlo.
tamenaṃ evaṃ vadeyya —
‘ayaṃ te, ambho purisa, samatittiko telapatto antarena ca mahāsamajjaṃ
antarena ca janapadakalyāṇiyā pariharitabbo.
puriso ca te ukkhittāsiko piṭṭhito piṭṭhito anubandhissati.
yattheva naṃ thokampi chaḍḍessati tattheva te siro pātessatī’ti.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그 기름 그릇을 새기지 않고 밖으로 방일하게 한눈 팔 수 있는가?
세존이시여, 그럴 수 없습니다.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so puriso amuṃ telapattaṃ amanasikaritvā bahiddhā pamādaṃ āhareyy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이 그 기름 단지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밖으로 방일한 채 가져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수행승들이여, 내가 비유를 설한 것은 그 의미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그 의미는 이와 같다.
“upamā kho myāyaṃ, bhikkhave, katā atthassa viññāpanāya. ayaṃ cevettha attho —
비구들이여, 이 비유는 뜻을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그 뜻은 이와 같다.
수행승들이여, 가득 찬 기름은 이 몸에 대한 새김을 두고 하는 말이다.
samatittiko telapatto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etaṃ satiyā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두고 한 말이다.
경문의 상황이 상상이 되시지요?
이미 처해진 상황이 명확하지만 조금 더 양념을 쳐보겠습니다.
내가(혹은 당신이) 기름이 가득 찬 단지를 머리에 이고 간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절세미인이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고 있고 대중들이 모여 있습니다.
내가 그 사이로 지나가야 하는데 뒤에서
'너 기름 흘리면 그 자리에서 목이 베어진다.'라는 경고가 아닌 협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 내가 대중들 사이를 접觸하지(/부딪히지) 않고 조심해서 빠져 나가려면
대중들 사이를 세밀하게 인지하지면서 자신(內로) 몸(身)의 中心을 잘 잡아(균형, 三昧) 가야하는데
만약 절세미인의 자태에 주의를 기울이면(한 눈을 팔면, 外로 흩어지면) 목이 떨어질 상황입니다.
여기서 기름 단지는 자신의 몸(身)과 연동되어 있고 몸은 마음상태와 연동되어 있습니다.
만약 취해서 밖으로 흩어지게 되어 念이 작동하지 않으면
身 범위에 속하는 것(身至)으로 作意가 작동하지 않게 되고(telapattaṃ amanasikaritvā)
그러면 기름을 흘리게 되게 되고, 그 결과 죽음과 죽음에 가까운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억(에 의해 작의)의 대상이 되는
단지란 念(에 의해 作意)의 대상이 되는 身至의 비유라고 말씀하십니다.
첫댓글 부처님처럼 수행이 먼저 있었기에 그에 대한 니까야 언설이 있답니다.
"마노가 문지기sati를 의지한다"는 이러한 경문을 수행에서 체험할 수가 있답니다. 이렇게 함 해보세요.
손 등에 숨을 후하게 불어보세요. 이렇게 닿아 사라지는 느낌처럼 붓다의 호흡 명상이라는 '아나빠나 사띠(안반선)'를 개발하세요. 즉, 긴 들숨과 긴 날숨과 긴 들숨 및 날숨 등의 3가지로 구분해서 15분 연습하면서 입술위에서 숨이 닿아 사라지는 촉감(니밋따)만을 문지기로 삼아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가 있다면 비로소 사띠sati를 확립한 것이랍니다.
이때, 촉감이 일어나 사라지는 것을 법이라고 말하고,
그 법을 대상으로 헤아리는 감각기능根을 마노意이라고 하죠.
여기서, 마노意가 일어나 사라지는 촉감의 니밋따에 대한 관찰인 문지기sati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었죠.
그래서 마노意는 사띠sati를 의지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거랍니다.
sati를 다시 봅시다.
" Tattha saraṇalakkhaṇā sati, asammussan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문지기sati는 기억하는 특징을 가진다. 잊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보호함으로 나타난다.)"
//samatittiko telapattoti kho, bhikkhave, kāyagatāya etaṃ satiyā adhivacanaṃ.
비구들이여, 기름으로 가득 찬 단지는 몸에 대한 문지기 (sati)을 두고 한 말이다.//
기름 특성을 비유하신 부처님 의도는 지수화풍 이라는 사대물질로 구성된 몸에서 들어 있는 물水과 같이 기름이 서로 구분이 된다는 뜻으로서 문지기 역할인 sati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네요.
사띠sati가 문지기 역할을 하므로 기억에 대한 통제가 일어납니다.
지금 여기에서今 집법즉멸법(불고불락)의 마음心을 문지기로 삼아 즉, sati 문지기를 통해서
satima라고 하는 기억 통제가 됩니다.
이제 sati를 아래 청정도론의 문구 처럼 다시 이해 해봅시다.
" Tattha saraṇalakkhaṇā sati, asammussanarasā, ārakkhapaccupaṭṭhānā(
문지기sati는 기억하는 특징을 가진다. 잊어버리지 않는 역할을 한다. 보호함으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