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회화의 시대:
렘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전
페터 파울 루벤스, <젊은 여인의 초상>
약 1620-30년, 97*67.8cm, 목판에 유채
피터 드 호흐, <안뜰에서 담배피우는 남자와 술마시는 여자>
약 1660년, 78*65cm, 캔버스에 유채
얀 스테인, <아픈 소녀>
1663-65년경, 58*46.5cm, 목판에 유채
빌럼 헤다, <정물>, 1629년, 46*69.2cm, 목판에 유채
발타사르 판 데어 아스트, <조개와 꽃이 있는 정물>
약 1640년, 53*43cm, 목판에 유채
렘브란트 판 레인, <깃 달린 모자를 쓴 남자>
약 1635-40년, 62.9*46.8cm, 목판에 유채
전시 장소
덕수궁 미술관
전시 기간
2003. 8. 15 - 2003. 11. 9(제 1, 2전시실 )
관람료
일반I(만 25세-64세) 10,000원 단체 8,000원
일반II(만 19세-24세) 8,000원 단체 6,000원
초중고생(만 6세-18세) 6,000원 단체 4,000원
아동(만 5세이하) 4,000원 단체 2,000원
* 단체는 30인 이상
전시 설명회
어린이 대상 영어투어 : 매일 10시(그외 시간은 예약제, ☎ 02-753-7222)
내국인 대상 : 금요일 11시, 토 · 일요일 11시, 2시 30분
외국인 대상 영어 투어 : 화요일 오전 10시, 토, 일요일 오후 1시
전시구성
네덜란드회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하를렘Haarlem-자유의 도시',
독창적인 화풍의 '델프트Delft-일상의 순간을 영원으로',
정밀화풍이 발전했던 '레이든Leiden-작은 것이 아름답다',
보수적인 경향의 '헤이그The Hague-궁정문화',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암스테르담Amsterdam-국제도시,렘브란트의 도시',
루벤스를 배출했던 앤트워프 Antwerp(플랑드르 지방)-바로크 미술의 꽃'
사회적 배경
17세기의 네덜란드
이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다.
네덜란드 북부 7주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 혁명을 이루어냈고,
반면에 카톨릭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남부 10주(플랑드르 지역)는 스페인의 치하에 있다가 후에 벨기에로 독립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상무역을 통하여 자유도시국가들이 경제적인 번영을 누렸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부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계급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른 유럽지역에 비해 사상과 신앙의 자유가 존중되면서
많은 유럽인들이 모여들었고 네덜란드는 다양한 문화적인 영향을 흡수하게 된다.
또한 시민문화가 융성하는 등 여러 제반 여건이 변모한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들어와 유럽에서 외교,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 시기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른다.
미술사적 배경
카톨릭 지배가 우세했던 유럽사회에서는 실제 교회나 궁정의 후원으로 바로크의 궁정풍 문화가 유행하였다.
반면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교회, 궁정, 귀족 계급의 문화적 후원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주 구매자가 되면서 일상적인 주제들이 선호되었다.
즉 네덜란드인들의 삶과 도시, 환경을 묘사하는 사실적인 경향의 정물화, 장르화(일상장면), 풍경화 등이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또한 수요가 많아서 각 장르마다 다양하고 전문화된 화풍이 발전될 수 있었다.
가령 정물화에서도 아침식탁 정물, 꽃 정물, 바니타스(인생무상) 정물 등, 풍경화의 경우에도
해양화, 강풍경, 건축화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또한 하를렘, 델프트, 레이든, 헤이그, 암스테르담 등 각 도시마다 지방색을 살린 화풍들이 발전하고 있어
네덜란드 회화는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독창성과 질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다수의 천재가 배출되는 위대한 시민의 미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앞에서 언급한 사실주의 경향이란 어떤 것인가?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당시 회화들은 원래 화가에 의해 신중하게 재구성된 것으로 대부분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짧은 인생에 대한 암시라던가 검소하고 정숙한 삶에 대한 도덕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 출품작에 담겨있는 풍부한 상징성은 관람객에게 많은 이야기와 즐거움을 전달할 것이다.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
이 당시 미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했을까? 대체로 중류층에 속했다고 한다.
미술가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은 호의적이었지만 인식 수준 자체가 높은 편은 아니었다.
물론 루벤스처럼 국제적으로 활약한 화가의 경우 외교관의 역할까지 수행할 정도로 상류층에 속한 경우도 있지만
겸업을 한 경우도 있었다.
풍경화가인 메인더르트 호버마Meindert Hobbema의 경우 세금원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얀 판 데어 헤이든Jan van der Heyden의 경우 발명가로서의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 외엔 빚으로 고생했다는 얀 판 호연Jan van Goyen의 경우도 전해진다.
그러면 작품 판매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 당시 화가들은 성 누가 길드St. Luke's guild에 소속되어 있었다.
화가는 길드에 소속되어 있음으로해서 전문성을 보장받을 뿐아니라 작품을 판매 할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다.
아트딜러가 작업실을 방문하여 직접 작품을 고르거나 시장이나 박람회를 통해 매매가 이루어졌다.
이 당시 가격을 비교해보면 한때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던 헤리트 다우Gerrit Dou의 작품이
렘브란트의 작품보다 더 비싸게 팔렸었다고 하니 지금의 평가와는 또 다른 가치평가가 그 당시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우리츠하위스 왕립미술관
이번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마우리츠하위스Mauritshuis는 오란녀Orange가의 후손인
요한 마우리츠(Johan Maurits, 1604-1679)의 이름을 본따 지은 집이다.
헤이그의 명소인 이 건물은 마우리츠가 사망한 후에는 대사관저, 군사학교, 왕립 도서관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1816년부터 왕실 소장품을 보관하기 위한 미술관 용도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마우리츠하위스는 1625-1795년 동안에 오란녀가에서 수집했던 소장품을 기본으로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17, 18세기동안 서유럽에서 형성된 대부분의 왕실 콜렉션은 유산으로 흩어지거나 혁명이 일어난 후에 팔려나갔으나
이 미술관은 소장품의 우수성과 보존성, 차별화된 소장 정책으로 인하여 유럽에서 가장 특색있는 곳으로 인정받고 있다.
출처;푸와족세상
I Don`t Stand A Ghost Of A Chance With You - Diana K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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