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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스포츠 게시판 스크랩 내 이름은 거스 히딩크, 내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LAL]썬업 추천 0 조회 676 10.11.19 15:18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어쩌면 마지막 글일지도 모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글도 길고 초반에는 사진이 부족한 관계로 지루하겠지만 중반부터 사진이 많아지므로 계속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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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감독의 애창곡 'My Way'입니다.

긴 글을 읽다보면 지루할것 같고 마지막 내용을 위해서 첨부했지만

전반적으로 안 어울릴 수도 있으니 끄셔도 좋습니다.

글 중간에 움짤도 있으니까 ESC는 누르지 마시고요.^^)

 

 

 

 

 

 

내 이름은 거스 히딩크,

내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1946년 11월 8일,

나는 네덜란드의 바르세펠트에서 태어났어.

 

 

 

모두의 생각과 달리 사실 난 어린 시절 나는 자기 고집이 강해 지기 싫어했으며

공부에 우수했던 형제들과 달리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 한마디로 철없었던 거지.

 

 

 

공부엔 흥미가 없었지만 활동적인 운동을 좋아했어. 그중에서도 축구를 좋아했었지.

정원에서 항상 벽차기(혼자서 벽을 상대로 공을 차는 것)를 했었거든.

 

 

 

나는 기술학교를 다니고 체육교사가 되기 위해 전문학교에 들어갔어.

축구전공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

 

 

  

(사진의 맨 오른쪽)

 

20세가 된 나는 젊은 나이에 코치 자격증을 따는데 성공했어.

졸업 후 1967년 데 그라프샤프 팀에서 선수 겸 코치(플라잉 코치)로 뛰게 되었지.

 

 

 

처음엔 코치 역에 전념할 생각이였는데

팀의 사정상 생각보다 선수로서 출전 기회가 훨씬 많았어.

그러면서 점점 선수로 활약하게 되었지.

 

 

 

 데 그라프샤프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나는 1970년에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으로 이적하게 되었어.

 

 

 

 

그러나 PSV에서의 생활은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어.

선수로서의 실력이 특출나지 못해 출전기회가 드물거든.

결국 PSV에서의 생활은 1년만에 막을 내렸지.

 

 

 

실력도 문제였지만 포지션 문제가 결정적이였어.

당시 PSV엔 내가 뛰는 위치에 무려 4명이나 포진해 있어서 치열한 주전경쟁을 해야만 했지.

그 아픈 경험 이후론 난 팀을 이끌 때 한 포지션에 반드시 2명 이하의 선수만 두고 있어.

 

 

 

데 그라프샤프로 돌아온 나는 1977년까지 팀의 선수로서 헌신했지.

그러다 1978년부터 새로운 경험을 위해 미국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어.

 

 

 

나의 경력에 있어서는 미국에서의 생활은 큰 전환점이였지.

조국 네덜란드를 벗어난 나는 미국의 넓은 대륙을 경험하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어.

세계가 넓긴 넓다는 걸 새삼 깨달았지.

 

 

 

미국은 축구가 발달하지 않은 나라였기에 나는 코치, 교사로서 귀중한 경험을 쌓았어.

그중에서도 나는 퀸베아트릭스 학교에서의 교사 경험을 잊을 수가 없지.

 

 

 

퀸베아트릭스 학교는 비행 청소년과 정신지체아, 장애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였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주기 위해 그 학교에 자원했지.

 

 

 

생각대로 특수한 아이들을 다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어.

저마다 개성이 달라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시도때도 없는 돌발행동에 난감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지.

 

 

 

그렇게 그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성이 강한 사람을 다루는 법을 깨우치게 된거야. 

그때의 경험을 통해 난 선수들 한 명 한 명을 사로잡는 나만의 방법을 익히게 된 것이지.

 

 

 

"거기서 보낸 10년 동안, 나는 대단히 많은 것을 즐겁게 배울 수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 선생님으로 있다 보면 매일 동정심이 늘어 갑니다.

그때의 경험을 프로 선수와 지내면서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선수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음을 일깨워 주고,

그러므로 거기에 맞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걸 설득시켜야지요.

일반적인 훈련뿐만 아니라, 선수가 정신적으로 성숙할 때까지

계속 성장시키는 것이 코치의 책임입니다."

 

 

 

그후 1982년을 끝으로 데 그라프샤프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고

본격적인 코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

 

 

 

나는 젊었을 때부터 선수 생활과 코치 생활을 하는 까닭에

경기 실전감각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고 나만의 선수 관리와 전술 운영을 익힐 수 있었지.

덕분에 짧은 시간에 코치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게 되어 1984년 PSV에서 수석코치로 일하게 되었어.

 

 

 

 

길고긴 코치 생활 끝에 감독이 된 건 1986년.

PSV는 명문팀이였지만 그해 성적은 좋지 못했고 결국 감독이 사임하게 되었어.

갑작스런 사임으로 난감해진 구단은 급히 수석코치인 나에게 감독직을 제안하게 된거지.

그동안 내가 쌓아온 경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시간이 온거야.

 

 

 

임시 감독직을 승락한 나는 리그하위권에 있는 팀을 바로잡고

단숨에 치고올라가며 감독 첫해에 1위를 차지했어.

 

 

 

 

그후 정식 감독이 되어 총 5년간 PSV를 이끌게 되었어.

네덜란드 리그 우승 4회, 네덜란드컵 우승 2회, 게다가 유럽피안 리그(現 챔피언스 리그) 우승까지!

그야말로 대성공이였지.

 

 

 

1990년부터는 네덜란드를 벗어나 세계적인 명문팀인

터키의 페네르바흐체(90-91), 스페인의 발렌시아(91-93)에서 감독 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세계를 무대로 도전하게 되었어.

 

 

 

 

그후 2년을 공부하면서 쉬다가 1995년부터 조국 네덜란드의 국가대표 감독을 맡게 되었어.

유로96에서는 팀을 8강에 진출시켰고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임했지.

 

 

 

 

그러다 조별 예선에서 한국과 맞대결하게 되었어.

결과는 5-0. 네덜란드의 완승이였지.

당시 한국은 기술은 있었지만 그뿐이였지.

무엇보다 자신감이 부족했고 체력에서 떨어졌어.

그것이 내가 본 한국에 대한 첫 인상이었지.

 

 

 

네덜란드는 승승장구했지만 아쉽게도 4강에서 만족해야 했어.

아쉽긴 했지만 나로선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지.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알린 나는 월드컵이 끝난 직후

세계 최고의 명문팀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의 지휘봉을 잡을 수 있었어.

 

 

 

그때까지만 해도 그 누가 알았겠으랴?

레알 마드리드행이 내 축구인생에서 오점을 새길 줄을...

 

 

 

내가 부임한 98/99 시즌에도 레알 마드리드엔 걸출한 스타들이 있었지.

그러나 난 젊은 선수들을 키워 장기적으로 튼튼한 팀을 만들고 싶었어.

나는 젊은 20대이자 가능성이 보이는 라울, 모리엔테스, 카시야스 등을 중용했지.

이 때문에 거액의 연봉자인 98 월드컵 득점왕 수케르는 벤치 신세를 면치 않을 수 없었어.

 

 

 

 하지만 불운하게도 팀은 성적이 좋지 못했지.

그러다보니 경질설이 떠올랐고 연일 비난을 받았고 설상가상 팀은 번번히 대패하고 말았어.

심지어 당시 구단주가 자신의 아들을 팀에 넣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해 재계약에 실패했지.

 

 

 

그 충격으로 한동안 감독직을 쉬어야만 했어.

더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지.

 

 

 

이후 나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어.

팀을 맡을 때 최고의 팀보다 '가능성 있는 팀'을 골랐지.

때문에 첼시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의 제의를 받았을 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거야.

 

 

 

 그러다 2000년, 휴가를 보내고 있던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어.

바로 대한축구협회였지. 그들은 2002 월드컵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나를 원한다고 했어. 

 

 

 

그순간 나는 느꼈지.

새로운 곳에서 도전해보고 싶다고.

 

 

 

2000년 12월 18일. 나는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되었어.

그리고 운명적인 한국 선수들과의 만남.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한국팀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어.

 전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국 선수들의 열정을 말하는 것이지.

 그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했어.

한마디로 한국에게 엄청난 가능성이 보였지.

 

 

 

그러나 시작조차 쉽지 않았어.

한국축구는 실패를 대단히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했거든.

아시아만 벗어나면 줄어드는 선수들, 변화와 패배를 두려워하는 축구협회와 팬 등.

 그렇지만 결론은 이를 이겨내는 것이 중요했어.

 

 

 

 나 또한 낯설은 팀을 지도해야 했기 때문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지.

유럽식 파워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수많은 평가전을 치루면서

장기간 합숙 훈련을 통해 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려 노력했어.

 

 

 

한국 선수들은 똥볼을 차는 것에 대해 대단히 두려워했지.

그들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어.

상대팀은 한국의 실수를 100% 골로 연결시키는데 비해

한국 선수들은 상대팀의 실수는 골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바로 자신감이였지.

 

 

 

"똥볼도 자신있게 차라.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없는 건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이다."

 

 

 

나는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무대를 앞두고 있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자심감을 주입시키려고 노렸했어.

한국이 그동안 세계무대에서 큰 성적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자신감 부족 때문이였지.

 

 

 

프랑스와 체코에게 5-0으로 대패하자 나는 '오대영' 감독으로 불리는 수모를 겪어야 했어.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았어. 이는 어디까지나 과정에 불과했거든.

주위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나와도, 나는 계속 나의 길을 향해 나아갔지.

 

 

 

그리고 그 믿음이 선수들에게 통하기 시작했어.

선수들의 눈빛에서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지.

그들은 기다리지 않았어. 기회를 잡기 위해 앞으로 달려 나갔지.

 

 

 

월드컵을 한 달 앞두고 가진 강호와의 평가전에서

그동안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며 좋은 결과가 나왔고,

이는 결국 나의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어.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

(2002년 5월. 월드컵을 한달 앞두고)

 

 

 

그리고 다가온 운명의 2002 한일 월드컵.

난 아직도 그때를 떠올려...

 

 

 

첫 경기, 폴란드 전

 

 

 

 

한국의 시작을 알린 황선홍의 감각적인 선제골이 터졌어.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컸던 그였기에 더욱 감격적인 골이였지.

 

 

후반엔 멀티플레이어 유상철의 쐐기골.

  팀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그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

 

 

 

2-0 완승을 거두며 48년만에 염원하던 첫승을 이루었고

 

 

 

두번째 경기, 미국전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경기였는데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선제골을 내주는 최악의 출발로 인해

경기를 전체적으로 주도하고도 골이 터지지 않아 좀처럼 불안이 떨칠 수가 없었거든. 

 

 

 

 

다행히(?) 후반에 터진 안정환의 골로 동점으로 마무리 할 수 있었어.

 

 

 

조예선 마지막 경기, 포르투갈 전

 

 

 

모두가 월드컵 시작 전 강호 포르투갈과 같은 조에 속하자 불안해했지만

난 오히려 폴란드와 미국이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어.

당시 포르투갈은 공격이 단순해서 피구와 파울레타만 막으면 끝이였거든.

 

 

 

한국은 놀랄 정도로 완벽한 압박을 선보이며 포르투갈을 제압했어.

특히 송종국은 포르투갈의 핵심인 피구를 완벽하게 지워버리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

 

 

 

 

경기를 주도한 한국은 박지성의 결승골로 16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지.

 

 

 

16강에 진출하자 국민들은 열광했고 마치 모든 염원을 푼 듯 기뻐했어.

이에 선수들도 들떠서 풀어지기 시작했지.

 

 

 

나는 이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

나는 선수들과 기자가 모인 자리에서 한마디 했지.

 

 

 

"내가 잘못 본 것일수도 있지만

너희들에게 풀어진 냄새가 나는 것 같구나.

이 정도로 들떠서는 안된다."

 

 

 

그제서야 선수들은 긴장을 하기시작했어.

나는 팀의 분위기를 바로 잡기 위해 한마디 했지.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

 

 

 

16강에서 만난 상대는 이탈리아.

경기는 그야말로 혈전(血戰)이였어.

 

 

 

거친 몸싸움과 아찔한 상황이 반복되었고,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지.

 

 

 

경기 종료의 순간에 다가갈수록 나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어.

4명의 공격수를 올리는 2-4-4 포메이션을 강행시켰지. 그야말로 도박이였어.

 

 

 

예상대로 이탈리아는 수비에 치중했고 한국은 공격의 기회를 노렸지.

선수들의 정신력은 경기 종료 순간에 다가갈수록 더욱 높아졌어.

 

 

 

"(지고 있었지만) 질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 유상철 -

 

 

 

그 믿음이 통해서일까

 

 

 

 

경기 종료를 3분을 앞둔 후반 42분, 설기현의 기적같은 동점골이 터졌어.

대표팀의 주공격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감이 부족하여 비판을 받던 그였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꾸준한 노력이 비로소 빛을 보는 순간이였지.

 

 

 

경기는 연장으로 흘렀고 승부차기로 넘어갈 무렵...

누구도 믿기 힘든 기적같은 드라마가 연출되었지!

 

 

 

 

치열했던 경기의 종점을 찍은 안정환의 극적인 골든골.

전반에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수많은 찬스를 날리며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나는 그가 골을 넣을 선수임을 알았기에 계속해서 그를 기용했으며,

마침내 그는 이에 보답하며 자신의 진가를 증명했지!

 

 

 

내가 월드컵 전 그에 대한 욕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그의 잠재력을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였어.

나는 그가 누구보다 월드컵에 출전하고 싶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거든.

결국 그는 2002 월드컵에서 한국선수 중 유일하게 2골을 성공시켰지.

 

 

 

한국의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

 

 

 

8강에서 만난 상대는 무적함대 스페인.

나는 스페인에서 감독 생활을 하고 경험을 쌓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황이였지.

 

 

 

선수들은 상당히 지쳤지만 강한 정신력과 붉은 함성에 일어나 계속해서 뛰었어.

경기는 치열했지만 득점없이 0-0. 신의 선택, 승부차기에 돌입했지.

 

 

 

사실 스페인은 16강에서도 승부차기를 했던터라 어느 정도 예측을 할 수 있었어.

벤치에서 방향을 알려주겠다는 지시에도 이운재는 정중히 거부했지.

나는 그의 믿음직한 답변을 듣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맏겼어.

 

 

 

또한 키커들에게 스페인의 골키퍼인 카시야스는 (키커 입장에서) 오른쪽 방어가 약하다는 것도 알려주었지.

이는 스페인의 16강전 승부차기 자료분석과 내가 레알 마드리드에 있을 때 그를 직접 보고 느꼈던 것이였어.

 

 

 

선수들은 모두 가운데와 오른쪽으로 성공시켰고,

이운재가 4번째 키커 호아킨의 킥을 막아내는데 성공했지.

 

 

 

승리의 기회는 마지막 키커, 주장 홍명보에게 달려있었어.

한국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인 홍명보에게 말이지.

 

 

 

4강행을 앞두고 모두가 긴장한 순간,

 

 

 

 

한국의 4강 진출을 장식하는 홍명보의 성공.

 

 

 

 

 

 

한국은 4강 진출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데 성공했어.

그야말로 세계축구 역사상 길이남을 순간이였지.

 

 

 

준결승, 독일 전.

 

 

 

 

한국은 마지막까지 포기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0-1 패배였어.

 

 

 

여기까지 온만큼 반드시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로 가고 싶었지만,

한국은 너무 지쳐버렸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실점을 허용했지.

 

 

 

그렇게 거침없이 승리를 향해 달려온 한국의 질주는 4강에서 멈추고 말았어.

 

 

  

3/4위전의 상대는 같은 돌풍의 주인공인 터키.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이을용의 그림같은 프리킥 동점골로 추격.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 이것도 경기 전에 세운 전략으로 그대로 맞아 떨어진거야.

언제나 안보이는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던 이을용은 한국의 숨은 공신이였지.

 

 

 

 

종료 직전에 터진 송종국의 만회골.

그는 한국의 가장 뛰어난 체력의 소유자로 골키퍼 이운재를 빼고

한국의 전 7경기를 모두 풀타임으로 소화한 유일한 필드플레이여였지.

 

  

 

 

경기는 2-3으로 졌지만 모두가 우승 못지 않은 한국의 4강에 환호했고 붉은 함성은 식을 줄 몰랐어.

한국과 함께 한 2002 월드컵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였지!

 

 

 

 사실 경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선수들이야.

난 감독으로 그들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보조자 역할이지.

4강에 진출한 한국의 보이지 않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걸까?

 

 

  

 

한국이 전력을 100% 끌어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한국의 12번째 선수, 붉은 악마의 뜨거운 함성 덕분이였어.

정말이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온몸에서 흐르는 전율을 주체할 수 없었지.

 

  

  

 

월드컵이 끝난 후 '감동의 국민대축제, 카 퍼레이드'에서

나는 수만명이 있었다는 그 시청 앞 광장에서 화단이 멀쩡하게 살아남은 걸 보고 전율을 느꼈어.

내가 알던 한국 사람들의 진정한 힘은 여기에 있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였지.

 

 

 

 그리고 월드컵을 끝으로 나는 마침내 잊지 못할 한국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어.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기 위해 모인 수천명을 보고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랬지.

 

 

 

"안녕이란 말은 하지 않겠다."

(2002년 7월. 네덜란드로 출국하며)

 

 

 

 

 네덜란드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계속 한국 꿈을 꿨어.

2002 한일 월드컵은 끝났지만 거리 가득 붉은 물결 출렁이며 뜨거운 성원을 보내준 한국 팬들을 나는 잊을 수 없었거든.

 

 

 

 

그후 2006년까지 PSV 감독을 맡아 클럽팀 감독에 전념했어.

매시즌(02/03, 03/04, 04/05, 05/06 시즌)마다 우승하며 리그 4연패 달성했지.

 

 

 

특히 04/05 시즌에 있었던 챔피언스 리그에서 4강에 진출했으나

눈앞에서 결승 진출을 놓친 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지.

(당시 준결승에서 AC밀란과의 통합 점수 3-3. 어웨이 다득점 방식으로 탈락)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호주의 제안에 다시 한번 월드컵에 도전하고 싶었어.

호주는 얌전한 한국과 달리 비록 건방졌지만 늘 자신감과 의욕이 넘쳤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지.

 

 

 

 

오세아니아에게 주어진 0.5장의 월드컵 진출 티켓으로 인해 플레이오프를 치뤄야했어.

우루과이와의 치열한 플레이오프 끝에 승리하며 호주를 32년만에 월드컵에 진출시켰지.

 

 

 

 

조예선 일본 전에서 3-1 대역전승을 거두며 조 2위로 16강 전에 진출했어.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지만...

 

 

  

16강에서 또 한번 이탈리아(2006 독일 월드컵 우승팀)를 만나게 되었지.

종료 직전에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페널티킥을 내주며 탈락하고 말았어.

 

 

 

“히딩크 감독은 내가 그동안 겪어본 감독 가운데 최고였다.

감독은 선수 관리와 전술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축구팀을 이끄는데 히딩크는 전술은 물론 특히 선수 관리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난 히딩크 외엔 모든 선수가 팀을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충성하도록 만드는 감독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나도 히딩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수 있다.”

- 마크 비두카 (2006 월드컵 호주 대표팀 주장)-

 

 

 

월드컵이 끝난 후 호주와의 계약이 종료되었고

첼시와 잉글랜드에서 감독직 제의가 왔어.

 

 

 

 

물론 거절했지. 앞서 말한대로

난 최고의 팀보다 가능성 있는 팀을 맡기를 원했거든.

 

 

 

 이번엔 러시아 감독을 맡게 되었어.

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부임 전 한국과 굉장히 흡사한 팀이였거든.

나는 한국을 맡았을 때의 경험을 러시아에 적용시켰지.

강한 체력으로 만들기 파워 프로그램을 말이야.

 

 

 

 

유로 예선에서 한치도 앞을 볼수 없는 치열한 상황에서 축구종가 잉글랜드를 누르고,

극적으로 조2위로 유로 본선에 진출했어.

 

 

 

 그리고 유로 2008.

첫 경기에선 스페인을 만나 4-1으로 대패하고 말았어.

그러나 이 패배로 러시아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

 

 

 

 

그후 러시아는 심기일전하며 다음 경기에 임했어.

유로 2004 우승팀인 그리스와 북유럽의 강호 스웨덴을

각각 1-0, 2-0으로 제압하며 8강에 합류했지.

 

 

 

그리고 8강에선 죽음의 조에서 3전 전승을 거두며

최고의 화력을 뽐내는 네덜란드가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언제나 냉정한 법이지.

난 비록 네덜란드 인이지만 러시아의 감독이였어. 

 

 

 

"조국의 반역자가 되겠다."

(8강에서 조국 네덜란드와의 대결을 앞두고)

 

 

 

경기는 유로 2008에서 최고의 공격력을 보여준 양팀답게

화끈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지.

 

 

 

후반 11분, 파블류첸코가 선제골을 넣는데 성공했어.

그러나 후반 41분에 네덜란드의 반 니스텔루이에게 동점골을 허용했지.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했어.

그리고 치열하던 경기는 러시아 쪽으로 급격히 넘어왔지.

 

 

 

바로 체력과 전술에서 차이가 났거든.

러시아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으로 네덜란드를 압박했지.

또한 나는 3명의 교체카드를 모두 공격수를 투입하는데 사용했어.

이에 네덜란드는 급격하게 무너졌지.

 

 

 

연장 112분에 승부를 짓는 토르빈스키의 결승골이 텨졌고,

4분 후 아르샤빈이 멋진 쐐기골까지 성공시키며 3-1 승리를 거두었어.

 

 

 

 

러시아 최초 유로 본선 4강 진출이였어.

이 날은 6월 22일이였고 당시 한국이 4강에 진출한 날짜와 똑같았지!

 

 

 

그 누구도 네덜란드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기에 충격적인 결과였어.

나의 도전은 또 한번 세계를 경악시키는데 성공했지.

비록 조국의 반역자가 되긴 했지만 말이야.

 

 

 

"히딩크는 조국의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의 열정과 끝없는 도전 정신에 토를 달 수 없기 때문입니다.

1명의 네덜란드인 감독이 11명의 네덜란드 선수들을 이겼으니까요."

- 네덜란드의 어느 축구팬 -

 

 

 

비록 4강에 오르긴 했지만 이번에도 결승에 진출하진 못했어.

준결승에서 스페인(유로 2008 우승팀)에게 막히고 말았거든.

 

 

 

하지만 아직 끝난게 아니야.

러시아와의 계약은 2010 남아공 월드컵까지거든.

세계를 또 한번 놀라게 할 계획은 현재 진행형이지.

(여기까지 수정 전)

 

 

 

이후 나는 08/09 시즌에 첼시 감독으로 프리미어 리그에 데뷔했어.

이전에 첼시같은 강팀엔 관심도 없었지만, 이때의 첼시는 사정이 달랐거든.

 

 

 

스콜라리가 이끄는 첼시는 잇단 부진으로 팀의 분위기가 하락한 상태였어.

평소 로만과 친분을 쌓아온 나는 이번에는 특별한 경우로 판단했고 첼시 감독직을 받아들였지.

 

 

 

08/09 시즌 끝을 두달 남긴 후반부터 첼시를 이끌기 시작했고,

첼시는 좋은 성적으로 강호의 모습을 되찾아갔지.

 

 

 

비록 리그에서는 감독을 맡기 전부터 격차가 벌어지는 바람에

맨유에게 우승컵을 내주고 말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4강에서 바르셀로나(우승팀)에게

심판의 연이은 오심 판정으로 패하며 아쉽게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리그가 끝난 후 에버튼과의 FA 결승에서

2-1로 역전승하며 우승컵을 들어올려 유종의 미를 거두었지.

 

 

 

이후에 재계약 요청이 들어왔지만, 나는 끝내 거절했어.

말했다시피 이번엔 특별한 경우로 허락했을 뿐이거든.

 

 

 

이번 안첼로티의 첼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첼시는 화려한 멤버를 갖춘 팀이기 때문에

내가 선호하는 '가능성있는 팀'과는 거리가 멀었거든.

 

 

 

나는 2개월간의 짧고도 빛났던 첼시 생활을 마치고

다시 러시아 대표팀의 자리로 돌아왔지.

 

 

 

그러나...

 

 

 

2010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 러시아는 독일에게

조1위를 내주며 플레이오프로 밀리고 말았어.

 

 

 

플레이오프에서 슬로베니아를 만나 1승 1패 동률을 이뤘지만

원점 다득점 원칙에 의해 월드컵 본선 티켓을 내주고 말았지.

 

 

 

결국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어.

유로 2008에서 4강 신화를 이룩했기에 충격은 더욱 컸지.

 

 

 

그 이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어. 한동안 숨어지내기도 했지.

러시아의 본선 진출 실패가 모두 내 책임이라고 할 순 없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러시아 감독으로서 죄책감에 시달려야했거든.

 

 

 

물론 나에게 수많은 팀이 감독직 제의가 온 건 사실이야.

하지만 모두 거절해야 했어.

 

 

 

 러시아를 본선으로 이끌지 못한 내가 다른 팀으로 가게 된다면,

그건 정말 양심상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잘못된 선택이지.

나는 끝까지 러시아와의 계약 기간을 지킬 생각이야.

(재수정)

 

 

 

 

이제 내 경력에 대한 설명이 끝난것 같으니 나의 팀 빌딩(Team Building)에 대해 말해보겠어.

앞서 말했듯이 나는 선수와 코치 생활을 동시에 했었기 때문에 나만의 방식을 익히고 있었지.

 

 

 

우선 팀이든 선수든 동기부여가 필요해.

팀을 맡은 후 선수들에게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했어.

한국을 처음 맡을 땐 선수들에게 자나깨나 목표는 16강임을

거듭해서 강조시키며 완벽한 공감을 이뤄내고자 했지.

 

 

 

이는 선수들에게 목표를 제시함으로서

선수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알게 하기 위해서야.

목표가 있는 자와 목표가 없는 자의 차이가 분명한 건 모두가 잘 알겠지?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선수들의 마음을 낚아채는거야.

존경받지 못하는 스승은 아무리 가르쳐봤자 제자들이 따르지 않거든.

그래서 나는 감독이라는 이유로 위에서 무조건 누르는 '지위'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닌,

내가 가진 풍부한 지식과 이에 대한 논리적 설명으로 선수들을 설득시켰지.

 

 

 

또한 감독은 선수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어.

나는 언제나 선수 옆에서 그들을 지켜주고 기회를 주려고 노렸했지.

 

 

 

그렇게 나는 선수들을 나의 열렬한 지지자로 만들었고,

그 선수들은 나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고자 노력할 수 있게 되는 거지.

 

 

 

 

이를 바탕으로 다음 문제는 선수 기용이야.

여기서 나는 다른 감독과는 차이가 두드러지지. (훗)

 

 

 

 

쉽게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2명의 선수가 있다 치자.

한명은 기술이 뛰어나고, 한명은 기술은 좀 모자라지만 헌신적이지.

난 단연코 헌신적인 선수를 뽑아. 팀을 위해 사력을 다해 뛰는 선수를 말이야.

나 같은 경우엔 선수의 네임밸류 따위는 애초에 알 가치도 없어.

내가 선수들에게 원하는 건 넘치는 에너지와 집념, 책임감이였어.

이 선수들이야말로 승리를 부르며 무한히 성장할 수 있거든.

그래. 이런 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가 박지성이지.

 

 

 

그리고 팀을 단숨에 휘어잡는 나만의 방법이 있어.

바로 시범케이스를 박살내는 거지.

 

 

 

예를 통해 설명하는 것이 쉬울 것 같군.

표적은 팀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스타 선수와 최고참 선수야.

 

 

 

처음으로 이용한 선수는 PSV를 맡고 있을 당시 호마리우.

 

 

 

 

그는 설명할 필요없이 펠레에 이어 브라질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 중 하니야.

호마리우가 세계적 관심을 받기 시작할 때 나는 집요한 설득을 통해 명문팀과의 경쟁에서 그를 영입하는데 성공했어.

 

 

 

예상대로 그는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그의 콧대는 높아져갔지.

그가 팀에 절대적인 존재로 떠오르자 나는 이에 대책을 마련해야 했어.

 

 

 

다른 선수들은 훈련 시간에 10분 전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호마리우는 언제나 그렇듯이 딱 정시에 맞춰 나타났어.

영악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시계를 나의 시계에 맞춰놓은 것이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나는 어느날 나의 시계바늘을 1분 앞당겨 놓았어.

물론 그날 호마리우는 당연히 1분 지각했고 나는 나의 시계를 보여주며 호마리우를 집으로 돌려보냈지.

 

 

 

이후 그를 다음 경기에 출장시키지 않았고,

나는 4일간 호마리우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이에 팀 전체가 긴장감에 휩싸였지.

 

 

 

 내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였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나는 호마리우를 띄우기 시작했지.

 

 

 

드디어 호출을 받은 호마리우는 바짝 긴장했어.

건방졌던 이전과는 다르게 집중했고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고자 했지.

 

 

 

그 경기에서 호마리우는 15분만에 헤트트릭을 기록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어.

경기 후 나는 그에게 나의 시계를 가르키며 어깨를 으쓱였고 호마리우는 환하게 웃었지.

더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는 순간이였어.

 

 

  

 

그리고 여기에 건방진 선수가 한명 또 있었지.

바로 네덜란드의 '싸움닭', 에드가 다비즈.

그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거칠고 파워풀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파이터 형의 선수야.

강한 체력과 압박축구를 선호하는 나에게 그는 필수적인 선수였지. 

 

 

 

그러나 내가 네덜란드 감독에 부임했을 때부터 그는 나를 탐탁치 않게 여겼어.

그는 언론을 통해 나에 대한 욕과 비난을 아끼지 않았고, 나는 즉시 그를 대표팀에서 빼버렸지.

내가 화풀이로 한 행동이 아니라 그 어떤 선수도 팀의 분위기를 흐리는 선수는 필요 없었거든.

 

 

 

나는 그를 철저히 무시해왔고 98 월드컵이 다가오기 시작했어.

그러자 그가 나에게 신호를 보내았지. 자신을 대표팀에 뽑아달라고 말이야.

사실 나도 그를 필요로 하고 있는 참이였기에 그가 있는 AC 밀란으로 향했지.

내가 의사를 드러내자 그는 자신을 반드시 선발로 뛰게 해달라고 요구했어.

물론 나는 그의 되도 안하는 요구를 거절했고 그렇게 끝나는 듯했지.

 

 

 

98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그는 필사적으로 내 앞에 요구해왔어.

나는 그에게 조건을 제시했고, 그는 곧바로 동의하면서 대표팀에 합류했지.

때문에 그는 주어진 임무에 충실히 하며 한동안 벤치를 지켜야 했어.

월드컵이 시작되면서 나는 그의 달라진 태도를 인식하고 그에게 출전 기회를 주었지.

 

 

 

막상 월드컵이 되었음에도 그는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펼치며 번번히 실망시켰어.

유고슬라비아와의 16강전에서도 교체 시켜버릴까 수없이 고민했었지.

그런데 1-1 동점 상황에서 종료 직전에 다비즈가 역전골을 성공시킨게 아니겠어!

 

 

 

골을 넣은 다비즈는 나에게 달려와 얼싸안았지. 네가 그토록 미워했을 나를 말이지.

내심 그를 믿지 못한 내가 부끄러웠지만 그는 나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거야.

그는 나에게 감사했고, 나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는 묘한 느낌이였지만 감동적인 기억 중 하나였어.

 

 

 

그 이번엔 한국 선수에 대해 언급해볼게.

바로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에 대해서 말이야.

 

  

 

 

부임 전부터 그는 한국 축구에서 절대적인 존재였어.

하지만 나의 팀운영 방식상 그 또한 주전경쟁이 불가피했으며,

한때 주장 자리를 빼앗기도 했고 엔트리에서 제외시키기도 했지.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

그가 빠지자 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후배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했거든.

그리고 그가 다시 대표팀에 복귀했을 땐 오히려 높아진 팀의 수준에 따라가야 했지.

 

 

 

내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였어.

그도 어디까지나 팀의 한 선수일 뿐이야. 경쟁이 불가피할 수 었었지.

 

 

 

확실히 그는 높은 클래스의 선수였기에 놀랍게도 내가 원했던 수준을 곧 넘어서기도 했어.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에서 주장으로서 멋지게 장식할 수 있었지.

 

 

 

난 이렇게 다루기 힘든 선수가 좋아.

그들은 건드리면 반응하거든.

이런 선수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해내고야말거든.

 

 

 

 

 

이번엔 내 입으로 '히딩크의 마법'을 부르는 전략에 대해 알려줄게. 

 

 

 

한국과 러시아의 4강 신화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압박 축구를 선호하지.

체력만 있다면 사실상 강팀과 약팀의 차이는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거든.

 

 

 

체력은 곧 실력이야. 그 체력을 끌어올려주는 정신력 또한 필수지.

 2002 월드컵 때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인 고종수와 이동국을 뽑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였어.

 

 

 

 이를 바탕으로 이제 공격 축구가 이루어지게 되지.

쉬지 않고 끊임없이 공격하는 축구보다 더 무서운 축구가 어디있겠어?

이탈리아 전(2002)과 네덜란드 전(2008)에서도 보여주듯이

난 경기가 종료되는 그 순간까지 공격의 기회를 노렸거든. 

 

 

 

그러니 내게 있어서 4강은 껌이였지.

(호주는 말이지... 음... 그래 시간이 적었을거야... 킁)

더 말하려다간 끝도 없을 것 같으니 얘기는 여기 쯤에서 그만하도록 할게.

 

 

 

 

언제까지 감독 생활을 할거냐고?

글쎄... 내 나이 60이 넘었지만 난 아직 힘이 남아 있고,

사람들이 날 '고약하고 심술궂은 노인네'로만 여기지 않는다면 계속할 생각이야.

게다가 난 여전히 배가 고프다구!

 

 

 

 

 

주위에서 종종 나에게 물어보곤 하지. 어떡하면 잘 리드(lead)할 수 있냐고.

 

솔직히 나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난 그저 나의 길을 걸어왔을 뿐이거든.

(위에 말한 건 그냥 나만의 지도법 중 일부일 뿐이야.

그렇다한들 사람마다 자신만의 대화법이 있는데 적용할수 있겠어?)

 

한가지 말하고 싶은 건 난 항상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거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했으며 나만의 방식을 찾았어.

 

시련과 주위의 개입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길을 선택했지.

 

 

결국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을 때, 나는 진정한 승리를 느꼈어.

 

남들이 가르쳐준 길이 물론 쉽고 안정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자신의 길로 나아가는게 훨씬 즐겁고 흥분되지 않겠어?

 

제 인생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자기 자신이야.

 

자신의 주체성이 없다면, 가진게 아무 것도 없는거지.

 

남들과 같으면 아무 의미 없어. 남들과는 다른 너만의 방식을 창조해봐.

 

비로소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하는 순간, 너 자신과 팀을 리드할 수 있게 될거야.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팀을 사로잡는 작은 독재자, Guus Hiddink

 

 

 

 

 

"내가 선택한 길이 옳았다. 계속 나의 길을 가겠다."

- 거스 히딩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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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 감독님 커리어

 

(나 좀 짱인 듯?)

 

1986~1990  psv 아인트호벤 감독 (네덜란드) : 86-87시즌 네덜란드 리그우승,87-88시즌 네덜란드 리그우승,

                                                     88-89시즌 네덜란드 리그우승, 네덜란드 FA컵 우승, 챔피언스리그 우승 

                                                             

1990~1991 페네르바체 감독 (터키)

 

1991~1993 FC 발렌시아 감독 (스페인)

 

1995~1998 네덜란드 국가대표 감독 : 1998 프랑스 월드컵 4위 , 유로96 8강

 

1998~1999 레알 마드리드 감독 (스페인) : 1998 도요타컵 우승

 

2000~2000 레알 베티스 감독 (스페인)

 

2000~2002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 : 2002 한일 월드컵 4위

 

2002~2006 PSV 아인트호벤 감독 (네덜란드) : 02-03시즌 네덜란드 리그 우승, 03-04시즌 네덜란드 리그 우승, 04-05시즌 네덜란드 리그 우승, 05-06시즌 네덜란드 리그우승, 03-04시즌 FA컵 우승, 04-05시즌 FA컵 우승, 04-05시즌 암스텔컵 우승, 04-05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 

 

2005~2006 호주 국가대표 감독(아인트호벤 감독과 겸임) : 32년만에 호주 월드컵 진출, 2006 독일월드컵 16강 진출

 

2006~        러시아 국가대표 감독 : 유로08 4강 진출 (현재 진행중)

 

 

 1998 월드컵 네덜란드 4강, 2002 월드컵 대한민국 4강, 2004/05 챔피언스 리그 4강, 유로 2008 러시아 4강.

 "4강이 제일 쉬웠어요" 파문!

 

 

 

 

Thanks to(자료참고) -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 마이웨이(히딩크 자서전), 기타 히딩크 사진 올려주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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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사용하지 못한 히딩크 사진 대방출~

 

 

 

 

젊은 시절부터 포스가 ㅎㄷㄷ

 

 

 

 

 

 

 

 

 

 

 

 

 

"이봐 저건 반칙이잖아!"

 

 

"하하 흥분하셨네요 들어가시죠"

 

 

"미안. 목마르시죠? 이걸로 목 좀 축이세요"

-8강 스페인 전에서-

 

심판과의 심리전도 필요하다고 말했던 그...

 

 

 

 

 

 

 

 

 

 

 

 

 

 

 

 

 

 

 

 

 

 

 

 

 

 

"어떤 마법을 쓸까?"

 

 

 

 

 

 

 

 

 

당신이 전해준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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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감스럽지만 마지막 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리플 많이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치우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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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1.19 15:58

    첫댓글 토시하나 안 빼먹고 정독했는데 30분정도 읽은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무링요, 히딩크, 래리브라운, 김성근 이 4명의 감독님들은 제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능력있다고 생각하는 스포츠계의 거장들이라 생각합니다.

  • 제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님...ㅜㅜ 평생 다시는 잊을 수 없을 굉장한 추억을 선물해줘서 언제나 고맙습니다.항상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10.11.19 22:49

    명예시민!!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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