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막연하게 살아간다. 그 결과 삶은
항상 불안하다. 현실은 믿을 수 없는 곳이다. 믿을 것은 당장
나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것들이다.
그래서 내면은 일단 뒤로 미루고 돈이나 명성에 포커스를 맞춘다.
균형을 잃어버린 나머지 반칙과 불법을 써서라도 돈과 명예를 얻
으려 한다. 그것을 얻는 것은 복이다. 삶에서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기적일수록 얻지 못한 사람을 보며 상대적 행복감을
느낀다. 자존심도 한꼇 고양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카르마의 법칙에 의하면, 수 없는 생을 통해 쌓아올린 긍정
적 카르마(공덕)를 소비함을 의미한다.
관심을 마음으로 돌린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생각 혹은 생각의 덩어리들과 거기에 대응하는 체험과의 관계를
알기 시작한다. 마음과 체험, 삶은 그야말로 신비다. 이렇게 생각
하고 행동하면 이렇게 살게되고,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면 저렇
게 산다.
카르마의 법칙을 과거를 기준으로 보면 운명이지만 현재를 기준
으로 보면 선택이다. 카르마의 진정한 의미는 지금 이순간에 이뤄
지는 삶에 대한 선택이다. 다만 과거의 흔적에 의한 과보는 피할
길이 없다. 자기가 행한 것이므로 정직하게 받아야 한다. 정직하게
받겠다는 마음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정화가
일어난다. 수 없는 생을 통해 쌓아올린 부정적 카르마의 흔적은 그
렇게 지워진다. 마음이 청정해지는 것은 붓다의모습에 다가가는 것
이다. 라마소파린포체는 말한다.
"역경과 어려움을 통해 나쁜 업을 정화시키는 것은 고통이 주는 고
마움 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바라보면 수행이 된다. 원인을 해체하는 또다른 행
위로 고통을 줄이거나 끝낼 수 있다. 대개 인간은 고통이 오면 압
도된다. 그래서 또다른 고통의 원인을 만든다. 자신에게 정직해지
면 고통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붓다에 대한 진
실한 존경심, 삶에 대한 이해와 연습을 통해, 고통을 여유있게 맞
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고통과 행복은 마음과 관계있다. 길가다
어떤 사람과 옷깃을 스치는 것도 마음에서는 이미 그런 기대를 반
영한 흔적이 있었다. 체험이란 그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파융도 논문에서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길가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는 것은 오래전부터 심리적으로 미리 준비된
것이라고 한다.
마음과 체험의 관계를 알아 갈 때,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인간 이외의 존재는 대개 카르마를 소비한다. 인간은 카
르마를 선택할 수 있다. 동물들은 지금 이순간에 가까운 삶을 살
지만 마음을 돌아볼 만큼 지혜가 없다. 그래서 본능이라는 과거의
영향을 받기만 한다. 그들에게 더 나은 존재로서의 진화는 불가능
이라 해도 좋을 만큼 희귀한 경우다. 대부분 천신들은 마음 수양
보다 즐기기 바쁘다. 고통이 없고 수명이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 많은 생에서 쌓은 좋은 흔적(긍정적 카르마 또는 공덕)을 소비
한다. 지옥이나 아귀는 고통이 너무 심하다. 긍정적인 카르마를 쌓
을 여유가 없다. 그들은 고통을 겪으며 그동안 쌓아두었던 안 좋은
흔적(부정적 카르마)을 소비한다.
불교에는 저주하기 위한 벌이 없다. 우주를 지배하는 카르마의 법칙
은 벌의 개념이 아니고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통은 내면의 균
형이 무너졌으나 자각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고통이 있기 때
문에 진리에 관심을 가지며 스스로 사유하는 지혜가 있다. 그래서
인간계는 붓다가 태어나는 곳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청정하고 이
타적인 생활로 좋은 카르마를 쌓으면서 좋은 과보를 받지 않는 것,
그리고 고통으로 부정적 카르마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것은 충분히
마음의 힘을 쌓은 대승불교도, 붓다가 되기 위해 서원한 자들의 길
이다. 붓다가 되려면 연기의 법칙을 체득할 뿐 아니라 3아승기겁의
공덕을 쌓아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이라는 깨달은 자가 될
즈음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생명을 위해 붓다가 될 것을 서원한다.
다른 생명을 위해 붓다가 되고자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한다. 여
기서 말하는 대승불교는 오늘날 소승이 어떠니 하며 뿌리를 무시하
며 목탁이나 두드리는 비불교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
개의 종교생활은 기복에서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기복을 위해서는
행동할 것을 이야기한다. 연못에 돌을 던지고 떠올라라고 아무리 기
도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거기에는 돌이 떠오를 만한 원인이 없기 때
문이다. 카르마의 법칙에 의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 행위를 하면
거기에 대응하는 체험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원하는 것은 내면을 닦거나 다른 생명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어
야 의미를 가진다. 붓다가 되고 싶다면 부와 명예를 얻어 공덕이 소
비되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 그럴 경우 사회적 책임을 더욱 크게 느
끼며 더 큰 공덕을 쌓아야 한다. 부와 명예를 양심적 노력에 의해 얻
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 태어난 순간은 매우 짧
다. 그러나 수행할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순간이다. 아무리 가난하
고 치명적인 질병이나 장애가 있더라도 문제 없다. 생각만 할 수 있
다면, 이타적인 생각이나 불보살에 대한 생각을 하면된다. 그러면 마
음에는 긍정적인 흔적, 공덕이 쌓인다. 그게 바로 죽어서도 가져가는
재산이다.
우리는 매 순간 카르마를 짓고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체험한다.
길을 걸을 때도 걸음을 만들기전에 마음에서 걸으려는 의도가 먼저
생긴다. 그 뒤에 걷는 행위를 한다. 그러면 위치이동이란 결과를
체험한다. 아주 찰라에 벌어지는 일이다. 의식하기가 쉽지 않다.
카르마의 법칙에 의하면 삶이란 마음이 체험으로 옮겨지는 현상이다.
최초 불교 경전이라 할 수 있는 숫타니파타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세상은 카르마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들도 카르마에 의해 존재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카르마에 의해 매여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쐐기에 의해 매여 있듯이"
우리는 좋다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선한 의도를 가진 행위는 행복을, 악한 의도를 가진 의도는 고통을
반드시 체험한다. 선악은 종교의 중요한 영역이고 보통 카르마라고
할 때도 선악의 의도를 가진 행위를 의미한다. 업(業)이란 카르마를
한자로 의역한 말이지만 번뇌나 운명과 관련된 악업의 의미를 내포
하여 대단히 부정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원래 카르마는 대단히 긍정
적인 말이다. 제사의 신성한 행위에서 나왔다. 번뇌를 없애고 선을
낳을 수 있는 특별한 행위란 말이다. 명상, 이타적 행위, 참회 같은
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부정적 행위를 내포하는 업(業)과 구분하여
갈마(磨)라고 음역해서 쓰기도 했다. 우리는 매순간 긍정적인 행위를
선택할 수 있고, 거기에 따른 보상체험을 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행복과 고통을 만드는 창조자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카르마라는 마
음의 물리법칙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행위와 체험간의 시간
차 때문이다. 의도를 가진 행위는 즉시 체험하는 경우가 드물다. 씨
앗과도 같이 마음의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떤 조건이 갖춰지
면 체험으로 나타난다. 꽃이 피기 위해 씨앗 외에도 물, 바람, 온도,
흙, 등 과 같은 간접적인 조건이 필요하다. 마음의 씨앗은 여러 조건
과 결합하여 훈습되다가 생을 달리하며 나타나기도 한다. (윤회는 증
명이 어렵다. 개인적 사유와 붓다와 보살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어느날 일이 잘 풀리고 예상치 못한 행운이 온다면 과거의 어떤 행위
가 단독으로 혹은 여럿이 모여서 체험으로 나타난 경우이다. 과거의
행위가 어떤 행운을 불렀는 지 안다면 그런 행위를 반복 하려고 할
것이다. 즉, 본능과 눈앞의 이익보다 삶을 길게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눈 앞에 다가온 행복을 움켜쥐려면 본능과
이기심에 기대게 된다. 그 때 행복은 또다른 고통의 원인이되고, 고통
은 반복되면서 깊어진다. 행복을 느낀다면 근거 없이 신의 축복이 내
앞에 툭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진정한 축복은 자신이 쓰는 카르마의 시
나리오대로 운명이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운명의 디자이너들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난 일과 현실의 관계에 관심
을갖자. 이것이 수행 또는 마음공부다. 그 때 삶에 대한 비밀의 문이
열린다.
우선, 생각과 감정의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 흐르는 습관을 관찰해보자.
즉시 나타나지 않는 과보는 동일한 성질을 가진 여러 행위들이 모여
익어가는 성질, 즉 훈습과 경험을 반복하는 성질이 있으므로 생각의
습관이나 패턴에서 추론할 수 있다. 물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카르
마(행위)는 하나의 행위로도 강렬한 체험을 불러온다. 도둑질, 사기
같이 나쁜 의도를 가진 행위는 매우 강렬하다. 들키지 않는다해도 마
음에 잠복해 있다가 비슷한 일을 당한다. 그리고 오랜 죄의식에 의한
고통을 겪게 만든다. 차라리 감옥에서 댓가를 치르는 것이 훨씬 행복
할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과보를 죽기전에 받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
라고 한다. 진심으로 장애아를 돌본다던지, 다른 생명을 위해 희생한
다던지 하는 것 역시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이 것 역시 커다란 공덕
이 되어 좋은 체험을 하던지 붓다가 되는 원인이 될 것이다. 마음을
들여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는 삶 전체에 통찰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체험이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통찰이 생기면 체험의 주체인 자
신에 대해 의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열반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
생긴다. 깨달음이란 자신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도달한다.
이것을 중용이라 한다. 좌나 우나 중간에도 치우치지 않고 정직하게
보는 것. 거기에는 일체의 미혹도 의심도 없다. 무엇이 절대로 옳다
는 정해진 결론을 짓고 거기에 맞추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괴로움에 많은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그것은 자신을 속인 결과 생
긴 고정관념이다. 견해가 다른 사람에게 종교나 사상, 세계관을 강요
하는 재앙이 된다.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을 위해 계속 자신을 속이게
된다. 인류의 대규모 학살같은 폭력은 모두 정해진 결론에 맞추려는
자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만든 결론에 끼워맞추기
사고를 한다. 이것이 무지의 전형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깨어 있어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 첫 걸음은 현실은 마
음에 새겨진 인상이 만든다는 카르마의 법칙을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보다 사려깊은 이타적인 사람으로
진화할 수 있다. 나중에 붓다가 되는 씨앗이 될 것이다.
자비,보디사트바, 보리심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인가
조건 없는 사랑을 의미하는 자심(慈心)과 남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비심(悲心)을 가진 존재. 자비심(慈悲心) ! 모든 욕망이 꺼진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본성이여.
첫댓글 카르마에 대한 자세한 글 감사드립니다_()_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고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