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 출장 갔다가, 사상최초로 관람객이 천만 명을 돌파했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중심 가에 위치한 개봉관을 찾았다. 줄서서 표를 사야 할 줄로 알았는데, 예상외로 300석의 좌석은 5분의1도 차지 않았다. 관람객의 대다수가 연인들이거나 끼리끼리라 50대다 솔로인 경우는 내가 유일한 것 같아 괜히 왔다는 자괴감이 든다. 주위가 텅 빈 좌석을 골라 옆에다가 서류가방을 올려놓고 구두를 벗은 양발을 앞좌석의 팔걸이에 얹었다. 각종 광고물을 구경하면서 빨리 불이 나가서 본영화가 상영되기를 바라며 회상에 젖는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과 겨울 방학 때에는 시골에서 유일한 문화행사인 활동사진이나 서커스단이 찾아왔다.
상연이 있기 일주일전부터 여러 지역을 다니며 붙였다 떼었다를 수도 없이한 조잡하고 너덜너덜한 포스터가 동네마다 선을 보인다. 이때부터 처녀·총각들의 가슴에 바람을 넣지만, 덩달아 꼬맹이들도 같이 갈 동무를 찾거나 입장료를 챙기느라 부산을 떤다.
2∼3일 앞으로 다가오면, 5일장이 서는 시장 통에 천막이 둘러쳐지고 확성기가 설치되어 2km나 떨어진 우리동네까지 들릴락 말락하는 선전문구가 애간장을 태우고, 주인공을 큼지막하게 그려 붙인 Jeep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동네방네를 돌면서 구경꾼을 끌어 모은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영화 장화와 홍련, 계모에게 구박받고 버림받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을 놓치지 말고 보시라"든지 "빼앗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생과 사를 오가며 일본순사와 싸우는 신출귀몰한 돌쇠의 활약상을 보시라."는 확성기가 귀를 멍멍하게 만든다.
공연당일이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서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일찌감치 천막극장으로 내려간다.
가정에서는 호롱불이나 남포등을 사용하지만 이곳은 발전기를 이용한 백열등을 밝힌다.
하루살이들이 때를 만난 듯 춤을 추는 불빛주위로 선남선녀들이 평소에 보아둔 짝을 찾느라 부산하다. 밤 공기를 가르는 휘파람소리와 더불어 도망 다니는 아가씨의 외마디도 흥을 돋운다. 우리 또래들은 그런 축에 끼지 못하는 형들을 따라다니며 공짜로 들어갈 기회를 노린다. 입구와 천막주위로 몇 명의 경비원이 있지만 틈만 생기면 국방색 천막을 들추거나 자르고 들어갈 구멍을 찾아 맴을 돈다.
이때쯤이면 찍찍거리는 확성기에서 상영이 임박했음을 알리지만, 우리들을 속이기엔 역부족이다. 여러 번의 시도에 실패하면 위쪽이 뻥하게 뚫려 별들만 보이는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직사각형의 화면을 중심으로 흙바닥에는 엉기성기한 가마니가 유일한 좌석이다. 선전과는 달리 입장한 사람은 많지 않고, 언제나 한·두 명은 불법으로 들어오다 붙잡혀 벌을 서고 있다. '빨리 시작하라.'는 고함이 수도 없이 반복된 뒤에 활동사진이 돌아가면 주위는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 소리만 요란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배우들의 행동거지와는 맞지 않은 대사를 변사가 구성지게 들려주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성우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그러나, 어느 때든 화면에 비가 줄줄 내려서 짜증나는 장면들이 있는 것은 여전하였다. 하고많은 시간을 도시의 극장에서 돌리다가 폐기처분 직전에야 이곳에 흘러들어 왔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필름이 끊기는 것은 무슨 법칙인가? 일본 놈의 앞잡이로 활동하다가 개과천선하여 일본순사에게 총구를 겨눌 때 필름이 끊기거나 정전이 되니 환장 안하고 배겨! 휘파람 불고 소리지르고 한숨쉬며 보는 흑백사진이지만, 오줌을 저릴 정도로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밤나들이를 걱정하는 할아버지·할머니, 부모님의 잔소리에도 순회공연이 있을 때는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웃다가 울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섰다 앉다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끝이 나고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다 소쩍새와 부엉이소리에 여우의 울부짖음까지 겹쳐서 간담을 서늘케 한다.
같이 왔던 형들은 짝이나 친구를 찾아 어디론가 사라지고 몇 명의 누나·형들과 손을 잡고 2km가 넘는 길을 걸어야 한다. 무서움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누구하나 말을 꺼내기는커녕 숨소리조차 죽이고 앞만 보고 걷는다. 서로 의지하며 걷든 길도 큰 마을로 갈라지는 곳부터 혼자서 300m을 가야 한다는 게 언제나 걱정이었다. 고무신을 벗어 양손에 움켜쥐고서 눈을 질끈 감고 내달린다. 등으로 땀이 흐르고 숨이 목구멍까지 차 오를 때쯤이면 우리 집 앞이다.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잠을 청하지만, 자꾸만 오버랩 되는 무섭고도 짜릿한 잔상에 하얗게 밤을 새웠어도 그때가 그립다..
그기에 비하면, 대형화면에 총천연색, 완벽한 효과음에다 안락한 좌석까지 갖춘 이곳은 외롭기만 할까? (4/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