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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
지인으로부터 ‘오미로제’의 이종기(56) 대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오미자로 만든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OmyRos)! 짤막한 신문기사를 읽고 퍼뜩 떠오른 느낌은 ‘이 사람 참 무모했구나’였다. 역사를 만들고 시대를 개척한 사람은 언제나 무모한 사람이었다. 비록 진창에 빠지고 무릎팍이 깨지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무모한 사람이 종국에는 위대한 승자가 된다.
이종기 대표는 왜 무모한 사람인가. 그는 어리석게도 한국을 대표하는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겠다고 뛰어들었다. 스파클링 와인(sparkling wine)? 유럽에는 수백 년간 대(代)를 이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개발한 최고급 스파클링 와인들이 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술 박사’가 이종기 대표다. 그런 그가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겠다고 했으니 어리석다고 말할 수밖에. 그는 7년간 미친 듯 연구에 매달렸고 마침내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를 지난 11월 출시했다.
지난 12월 2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포도플라자에서 이종기 대표를 만났다. 그는 우직한 인상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막 올라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타이틀은 다양하다. 한경대학교 친환경농축산물연구센터 생명공학부 교수, 우리술연구소 소장, JL크래프트 와인 대표, ‘이종기 교수의 술 이야기’의 저자, 우리나라 유일의 마스터 블렌더.
30년 술에 바친 인생
1955년 충북 진천에서 났다.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1980년 전공을 살려 동양맥주(OB맥주 전신)에 입사했다. 1981년에는 국산 위스키 1호인 윈저를 출시하는 데 참여했다.
이후 그의 인생은 양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다. 오비씨그램사가 만든 국산 위스키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갔다. 외국산 수입 위스키도 그가 원액 비율을 조절해 병입하는 일을 지휘했다. 26년간 술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1992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2년간 양조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무모한 도전’의 맹아는 유학 기간에 뿌려졌다.
“1990년대 초 영국 스코틀랜드 헤리옷 와트 대학원 양조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죠. 어느날 담당교수가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대표 술을 갖고 시음회를 열자고 제안했어요. 나는 별 생각 없이 인삼주를 준비해갔습니다. 여러 나라 술을 음미하던 담당교수가 다른 나라 술을 전부 칭찬하더니 인삼주에 대해 한마디로 혹평했어요. ‘이 술은 인공감미료 맛이 지배적인 것 같군. 한국 사람들은 술과 약도 구분하지 못하냐’는 것이었죠. 웃으며 농담이라고 했지만 저는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때 아주 막연하게 ‘반드시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산 명주를 만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종기는 이날 파티에서 스파클링 와인의 진수를 경험했다. 이것은 한국산 명주의 방향까지도 결정했다. 다시 이야기를 들어보자.
“프랑스에서 온 여학생이 프랑스 대표 술로 연분홍색 로제(rose) 샴페인을 가져왔습니다. 그 빛과 맛과 향이 환상적이었죠. 세상에 이런 술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언젠가는 한국에서 이런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한국인은 세계 위스키 업계의 봉이라는 사실은 오래된 이야기다. 발렌타인 17년, 조니워커 등이 한국인이 애호하는 스카치 위스키다. 발렌타인을 제조하는 페르노사(社), 조니워커를 생산하는 디아지오사는 지금까지 폭탄주를 즐기는 주당들 덕분에 천문학적인 돈을 쓸어담았다. 26년간 술 회사에서 근무한 그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동안 한국인이자존심 상하는 일을 계속 해왔다”고 고백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해왔다는 자괴감이 역설적으로 그에게 ‘한국을 대표하는 술’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한국 명주를 만들 것인가. ‘마스터 블렌더’의 고민이 시작됐다.
“막걸리와 청주는 쌀로 만든 술입니다. 주원료를 쌀로 고집하면 일본의 사케와 중국의 소흥주를 넘어서야 합니다. 일본과 중국은 수백 년 동안 사케와 소흥주를 만드는 전통과 기술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 전통 술의 맥이 끊어졌어요. 다시 시작해서 어떻게 일본과 중국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싶었죠. 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외국의 포도 품종을 우리나라에 심는다고 해서 세계 명품 와인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술 담그는 방식을 첨단으로 하되 재료는 토종을 쓰기로 했다. 그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로 술을 담가봤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2006년이었다. 그는 우연히 경북 문경에 있는 오미자 농장을 방문했다.
다섯 가지 맛의 신비
“오미자는 색과 향이 뛰어난 원료였습니다. 오미자 원액 자체는 짜고 시어서 먹을 수 없습니다. 희석해야만 먹을 수 있죠. 이거다 싶었습니다. 맛, 색, 향 등 관능적 매력이 탁월했죠. 흑단으로 조각하면 목조각이 변하지 않듯 오미자로 와인을 만들면 천년을 가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군다나 오미자는 한반도, 만주, 시베리아 등에서만 나는 과실이니 우리나라 토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미자를 스파클링 와인 재료로 선택했습니다.”
2007년 그는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에페르네의 샴페인 연구소를 찾아갔다. 샴페인연구소 관계자에게 오미자 원액을 주며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고 싶은데, 발효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금방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3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자기 일도 아니니까 몇 번 발효를 시켜보다 안된 것 같습니다. 오미자는 쓴맛과 매운맛이 아주 강합니다. 그게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해서 발효가 안된 거죠. 나는 시간은 걸리지만 발효가 될 것으로 확신했어요. 내가 균을 못 찾아서 그렇지 분명히 있을 것으로 봤죠. 거기서는 자기들 하던 대로 했겠죠. 나처럼 절실함이 없었겠죠.”
그는 수백 번 실험을 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돈을 다 썼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발효 실험 2년 만인 2008년 발효에 성공했다. 그는 2008년 경북 문경에 ‘JL크래프트 와이너리’와 우리술연구소를 설립했다. 문경에는 오미자 재배농가가 많다. 그는 오미자 20톤을 구입해 본격적으로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기술은 프랑스 샹파뉴 방식을 그대로 들여왔다. 프랑스 샹파뉴 방식? 오미자 즙을 짜내 스테인리스스틸 탱크에서 12개월 동안 발효시키면 와인이 된다. 이 와인을 효모와 설탕, 효모 먹이와 함께 병에 담아 다시 12개월 발효시키면 자연적으로 기포(버블)가 생긴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효모와 같은 이물질을 제거해 병에 담아 코르크 마개로 밀봉한다. 그는 2008년산 오미로제 2만병을 생산했다. 2012년까지 판매할 수 있는 분량이다.
지난 11월 11일 포도플라자 지하에 있는 와인바 ‘뱅가’(vin ga)에서 오미로제 출시 행사를 가졌다.현재 오미로제는 포도플라자에 있는 와인숍 와인타임에서만 독점 판매된다. 한 병에 10만원.
육류·생선… 모든 음식과 어울려
- ▲ 경북 문경의 오미자밭에서 익어가고 있는 오미자. photo 조선일보 DB
이 대표가 “오미로제는 육류와 생선류에 잘 맞고 입안이 개운해지는 느낌이 나는 게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오미로제는 2010년 12월 17일에 특허출원했다. 특허번호 10-100-3764. 세계에 단 하나뿐인 오미자 스파클링와인은 이종기 대표만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수많은 국제행사를 벌입니다. 외국 VIP를 상대로 하는 이벤트에서 한국의 대표술로 막걸리를 내놓는 것은 한계가 있지요. 이제 오미로제를 한국의 대표술로 내놓아도 결코 손색이 없습니다. 오미자로 만든 천연 스파클링 와인은 오미로제가 처음입니다. 프라이드를 가져도 됩니다.”
이종기 대표에 따르면 오미로제는 유명 호텔의 외국인 셰프들로부터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장밋빛과 과일 바닐라향이 매혹적이며, 잔잔한 신맛과 쓴맛이 입안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요리사 롤란드 히니) “오미로제는 버블을 통해서 오미자 그 자체를 입안에서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최고급 와인과 공통점이 있다.”(와인칼럼니스트 김혁)
오미로제는 이들의 인정으로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에 있는 식당의 와인 리스트에도 올라갔다.
품질은 자신! 문제는 마케팅
남은 문제는 오미로제가 이 대표의 희망대로 한국을 대표하는 명주로 자리 잡을 것이냐 하는 것이다. 본인이 인정하듯 이 대표는 술 전문가이자 개발자이다. 7년간 문경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술 연구에 정신을 팔았던 인물이다. 오미로제의 성공 여부는 이제 일정 부분 마케팅 전문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오미로제의 술병은 프랑스에서 수입한 것이다. 술병 디자인과 이름은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대표가 맡았다. 오미로제! 이름도 예쁘지만 디자인도 이름값을 한다. 마케팅은 포도플라자(대표 길정우)가 맡았다. 새 와인이 만들어져 시장에서 자리 잡는 데는 보통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유명 와인 생산자들은 모두 포도밭을 갖고 있다. 현재 이 대표는 오미자밭을 갖고 있지 않다. 와인칼럼니스트 김혁씨는 “오미자밭을 확보해 좋은 재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사람의 손을 최소화하는 자동화시스템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성 품종을 교배해 계속적으로 우성 품종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 대표는 “오미로제가 우리나라 농업에 비전과 희망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오미로제가 외국 시장에서 성공하면 백두대간이 오미자밭으로 뒤덮이게 됩니다. 농촌 지역의 활성화에 크게 도움이 되죠. 오미로제는 무공해 관광산업이에요. 5월에 꽃이 필 때 얼마나 환상적인지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가을에 익을 때도 한 달간 장관이에요. 오미로제를 위해 죽을 때까지 해야죠.”
우공이산(愚公移山)은 계속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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