作意 manasi karoti (~을) 意에 두다 (~으로 主意를 기울이다)
[mettācittaṃ manasi karoti 자애의 心을 意에 두다. / 자애의 心으로 主意를 기울이다.]
[작의가 意(행)인가, 心(행)인가?]
먼저 作意의 위상이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名입니다.
受 ․ 想 ․ 思 ․ 觸 ․ 作意<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명(名)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금 경험하는 색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마나시까라는 함께
느낌, 지각, 의도, 접촉이라는 마음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라는 설명도 있지만
아래 [Manaṃ manasi karoti]처럼 非色에 대한 (受 ․ 想 ․ 思 ․ 觸 ․) 作意도 나타납니다.
受 ․ 想<vedanā saññā>을 심행이라고 나오는 경문은 있지만
思 ․ 觸 ․ 作意<cetanā phasso manasikāro>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심행인지 의행인지 나오는 경문이 없습니다.
물론 思<cetanā>가 意와 연결되는 것으로 해석될 경문이 있으므로 의행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문제의 作意<manasikāro>는 여러 경문을 통해 해석될 수밖에 없지 싶습니다.
이 해석 또한 논입니다.
하여튼 선학들의 논에서는 남북방 모두 심행(변행心所, 때때로)으로 설명합니다.
[Yo manasmiṃ chandarāgo, cittasseso upakkileso. 意에 대한 欲貪은 心의 汚染]
[manaṃ, bhikkhave, yoniso manasi karotha; manāniccatañca yathābhūtaṃ samanupassatha.
manaṃ, bhikkhave, bhikkhu yoniso manasikaronto,
manāniccatañca yathābhūtaṃ samanupassanto manasmimpi nibbindati.
nandikkhayā rāgakkhayo; rāgakkhayā nandikkhayo. nandirāgakkhayā cittaṃ suvimuttanti vuccatī”ti.
…
마노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노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
비구들이여, 마노에 대해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노의 무상함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마노에 대해서 염오한다.
즐김이 멸진하기 때문에 탐욕이 멸진하고 탐욕이 멸진하기 때문에 즐김이 멸진한다.
즐김과 탐욕이 멸진하기 때문에 마음은 잘 해탈하였다고 한다.]
Manaṃ manasi karoti (manaṃ, bhikkhave, yoniso manasi karotha)는
manaṃ대격(~을) manasi처격(~에) karoti두다(起動동사)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6根인 '(안이비설신)意를 意에 두다.'의 맥락입니다.
문법적으로는 '意를 意에 두다.'라고 직역되지만, 언어습관인지 모르지만
여러 용례에서 보듯이 '~을 意에 두다.'라는 표현은
'~으로 主意를 기울이다'라는 의미로 생각되고 대체로 이런 맥락으로 설명들 합니다.
作意(憶念)의 集이 法의 集이라는 말씀도 이런 맥락이지 싶습니다. (이 法에 대한 설명은 생략.)
[심의식을 동의어]로 설명들 합니다만 개인적인 견해를 먼저 밝혀 둡니다.
心意識-심의식-心意識-심의식-心意識-심의식 ....에서
1. 心意識
2. 意識심
3. 識심의 ...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족. 굳이 識意心의 순서는 2. 識이 意문을 통한 심과 같은 과정이지 싶다.
여기서부터는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의견은 배치되는 경문이 나타나면 헛소리입니다.
먼저 心은 과거 누생의 모든 업들의 총합이면서 지금 현재 基底에 흐르는 低流라고 전제하겠습니다.
意는 현생에서, 대상을 대할 수/대하고, 볼 수/보고 있는 놈이라고 해보겠습니다.
識은 그렇게 대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판단(識 혹은 般若)이라고 짐작합니다.
이와 같이 반풍수(識과 般若가 혼재함)일 가능성이 높은 識이라는 과보가 다시
누겁의 心으로 아주 심대하게 혹은 일부 혹은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등의 방식으로
다시 基底에서 흘러가는 低流인 心으로 편입되는 수많은 순환을 상상해 봅니다.
욕계 우리들의 현재 상황은 (안이비설신)意라고 해 봅시다.
외부의 경계가 어쩌다 들어오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대상을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지 意門을 통해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상황이라고 해봅시다.
이런 경우가 '~을 意에 두다' 혹은 '~으로 주의를 기울이다'가 되지 싶습니다.
그러면 대상을 대면하게 됩니다.
이럴 때 心상태(念 등)를 반영한 意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法(대상)으로 여겨집니다.
“ye keci, bhikkhave, dhammā akusalā akusalabhāgiyā akusalapakkhikā,
sabbe te manopubbaṅgamā.
mano tesaṃ dhammānaṃ paṭhamaṃ uppajjati, anvadeva akusalā dhammā”ti.
비구들이여, 불선법(不善法)과 불선법에 동참하는 것과 불선법의 편에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모두 마음이 그들을 선행한다.
마음이 그 법들 가운데서 첫 번째로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불선법들이 일어난다.
Manopubbaṅgamā dhammā, manoseṭṭhā manomayā;
Manasā ce paduṭṭhena, bhāsati vā karoti vā;
Tato naṃ dukkhamanveti, cakkaṃva vahato padaṃ.
법들은 마노가 앞장서서, 마노가 중요(한 역할을)하여, 마노가 만든 것이다.
만약 오염된 마노에 의해 말하거나 행한다면
그로인해 그를 고통이 따른다. 마치 바퀴가 운송(수단인 소의) 발을 (따라 가듯이).
“idha pana, brāhmaṇa, ekacco na heva kho nimittena ādisati,
napi manussānaṃ vā amanussānaṃ vā devatānaṃ vā saddaṃ sutvā ādisati,
napi vitakkayato vicārayato vitakkavipphārasaddaṃ sutvā ādisati,
api ca kho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ṃ samāpannassa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ti —
‘yathā imassa bhoto manosaṅkhārā paṇihitā
imassa cittassa anantarā amuṃ nāma vitakkaṃ vitakkessatī’ti.
so bahuṃ cepi ādisati tatheva taṃ hoti, no aññathā. idaṃ vuccati, brāhmaṇa, ādesanāpāṭihāriyaṃ.
바라문이여, 그러나 여기 어떤 자는 드러나는 몸짓과 인간이나 비인간이나 신의 소리를 듣거나
혹은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과 일으킨 생각의 여파로 인해 무의식으로 내는 소리를 듣고
[남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 없이 삼매에 들어 자기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꿰뚫어 안다.
'이 존자는 심행(心行)이 잘 안정되었기 때문에
지금 이 마음 바로 다음에는 이러한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그가 많은 사람에게 말을 하더라도 말한 대로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바라문이여, 이를 일러 [남의 마음을 알아] 드러내는 기적이라 한다.”
mettaṃ, bhikkhave, cetovimuttiṃ yoniso manasi karoto
anuppanno ceva byāpādo nuppajjati uppanno ca byāpādo pahīyatī”ti.
비구들이여, 자애와 함께하는 마음의 해탈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여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의는 일어나지 않고, 또 이미 일어난 악의는 버려진다.
citte, gahapati, arakkhite kāyakammampi arakkhitaṃ hoti,
vacīkammampi arakkhitaṃ hoti, manokammampi arakkhitaṃ hoti.
장자여, 마음이 보호되지 않으면
몸의 업도 보호되지 않고 말의 업도 보호되지 않고 마음의 업도 보호되지 않는다.
“evamevaṃ kho, bhikkhave, santi adhicittamanuyuttassa bhikkhuno
oḷārikā upakkilesā kāyaduccaritaṃ vacīduccaritaṃ manoduccaritaṃ,
tamenaṃ sacetaso bhikkhu dabbajātiko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에게는
몸으로 지은 해로운 업[不善業], 말로 지은 해로운 업, 마음으로 지은 해로운 업이라는
거친 오염원들이 있다. 마음을 닦는 현명한 비구는 이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
parato ca ghoso, yoniso ca manasikāro.
ime kho, bhikkhave, dve paccayā sammādiṭṭhiyā uppādāyā”ti.
다른 자의 소리를 듣는 것과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조건은 바른 견해를 일으키게 한다.
“tena hi, brāhmaṇa, suṇāhi, sādhukaṃ manasi karohi; bhāsissāmī”ti.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잘 듣고 마음에 잡도리하라. 이제 설하리라.
“adhicittamanuyuttena, bhikkhave, bhikkhunā tīṇi nimittāni kālena kālaṃ manasi kātabbāni —
kālena kālaṃ samādhinimittaṃ manasi kātabbaṃ,
kālena kālaṃ paggahanimittaṃ manasi kātabbaṃ,
kālena kālaṃ upekkhānimittaṃ manasi kātabbaṃ.
비구들이여, 높은 마음을 닦는 비구는 때때로 세 가지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때때로 삼매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때때로 정진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때때로 평온의 표상을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so tasmiṃ āsane nisinno tassā kathāya neva ādiṃ manasi karoti,
na majjhaṃ manasi karoti, na pariyosānaṃ manasi karoti;
vuṭṭhitopi tamhā āsanā tassā kathāya neva ādiṃ manasi karoti,
na majjhaṃ manasi karoti, na pariyosānaṃ manasi karoti.
그는 그곳에 앉아 있을 때에도 그 설법의 처음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중간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마지막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일어날 때에도 그 설법의 처음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중간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마지막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첫댓글 '잡도리' 라는 말이 한국어에 있습니까? 니까야를 번역 해 쓰시는 분들이 함부로 '공부짓다' 등등 같이 한국말에도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경향이 우려 스럽습니다. '의에 새긴다' 든지 '마음에 둔다' 혹은 '마음을 쓴다' 와 같이 통상적인 우리말을 써서 의미를 전달해야 하지 않을까 사료 됩니다.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참고로 동영상 법문에서 들은 내용을 올려봅니다.
“오온(五蘊)에서 상카라(行)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 대상과 마음이 (분명하게) 만나는 성품을 촉(觸, 팟사)이라 하고, 대상을 마음에 넣어주는 것과 같은 것(대상쪽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은 것)을 마나시까라(作意)라고 합니다. ... 한편, 상카라(行)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의도(思, 쩨따나)인데, 그것은 부추기고 노력하고 권장하고 선동하고 고무시키는 성품입니다. ...”
참고: 철학 동영상에서 들음
“저기 사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가 등장하면 ‘사물(물 자체)’은 대상이 됩니다. 대상을 경험한 것이 머릿속에 있으면 그것이 개념이고 (관념이고 표상입니다.)”
(저의 생각)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이 있고,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고, ... 마노로 인식되는 법들이 있습니다. ...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일들은 과거가 됩니다. 그런데 본 것, 들은 것, ... 법을 식별한 것 등은 다음날에 다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는 한자로 보면 상(想)의 형태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想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마음(心)에서 보이는(또는 보는) 모양(相)’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즉, 눈으로 본 형색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음속에서는 어떤 모양인지, 귀로 들은 소리가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음속에서는 어떤 모양인지... 식별한 법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음속에서는 어떤 모양인지, 바로 그런 모양들이 한자 想의 한가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마음속에서 보이는(보는) 모습을 ‘표상’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수정했음: 보이는 모습을 → 보이는(또는 보는) 모양으로)
//作意 manasi karoti (~을) 意에 두다 (~으로 主意를 기울이다)//처럼 mano가 나오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치는 법이나 현상을 헤아리거나 법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육근의 감각기능이 의意를 고려해야합니다. manasi-karoti의 작의를 마음에 잡도리로 해석은 육근indriy이라는 mano意를 버린 심각한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