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군위 인각사를 가다
내가 108사의 답사절을 선정할 때 어떤 기준으로든지 인각사는 108사 안에 들어가고도 남는 절이다. 그런데 오늘까지도 답사를 차일피일 미룬 이유라면 대중교통이 불편한 탓이다.
아이들이 설날에 찾아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부산에 있는 아이는 차를 가지고 올테니, 그 차로 인각사를 다녀오자고 집사람과 마음을 정했다. 예전에 한 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나 다녀온 절인데도, 절로 가는 길이 삼삼하다. 그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찾아가기로는 길이 불편하다는 것은 같다.
인각사는 일연스님이말년에 머무시면서 삼국유사를 지필한 곳이니, 삼국유사가 유명한 만큼 절도 유명하다. 역사 흔적이 뚜렷한 곳이어서 답사팀과도 여러 번이나 찾았고, 혼자서도 찾았다. 인각사 때문이 아니고, 절 앞에 우뚝 솟은 바위절벽을 보러 찾아가기도 했다. 하천은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절벽 밑에는 깊은 소(물 웅덩이)를 만든다. 깎아지른 절벽을 학소대라고 한다. 이름이 학소대라고 하는 곳은 많다. 거의가 우리의 토속신앙지이다. 이곳은 기린이 놀다가 뿔이 바위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서 인각(麟角)이라 하였다 한다. 기린이 전설 속의 성수이니, 성스러운 장소라는 뜻이다. 절이 들어설 만큼의 성지의 여건을 갖추고 있다.
학소대라는 곳의 특징이라면 바위 절벽과, 그 아래로 물이 흐른다. 물길이 바위에 부딪히는 곳은 거의가 소를 만든다. 깊은 물웅덩이임으로, 용이 산다든지, 용이 승천 한 곳이라는 전설을 지닌 곳이 대부분이다. 학도 성스러운 짐승이다. 성수가 지을 짓고 사는 곳이니 선경이다. 흔히 이런 곳은 무당이 굿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토속신앙에서 성지라는 뜻이다.
내가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창건설화라든지, 인각사처럼 주변지의 이름(학소대 등) 등으로 유추해보면 우리 절의 옛 터는 우리의 토속 신앙지로 생각되는 곳이 많다. 이런 이유로 절보다도 물이 흐르는 학소대를 찾았던 것이다.
원효대사가 648년에 창건했다고 하나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다. 절에 가면 대부분의 절이 창건년대를 의상대사나 원효대사 때로 올려잡는다.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린다. 그러나 최근에 경북대 박물관에서 절터를 발굴하면서, 통일신라 시대 유구가 나온 것을 보면 신라 때 창건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후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인각사 복원사업을 추진 중에 있었다. 이번에 찾아가보니 절은 많이 다듬어 놓았다. 그러나 아직 전각은 많이 들어서지 않고, 빈 터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황량해보인다. 옛 절의 맛이 나지 않았다.
고려말에 이색이 ‘인각사무무당기’를 남겼다. 무무당의 축성을 축하하는 글이다. 이 글에 당시의 인각사 가람 배치를 평하면서 자료를 남겨두었다. ‘불전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에 탑이 있으며 왼쪽에 강당이 있고, 오른쪽에 살림채가 있는데,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 건물은 멀어 건물의 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무무당을 선방 옆에 세워 좌우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아직까지 복원 작업을 진행 중이라선지 절집의 구조인, 사천왕문도, 불이문도 없이 바로 넓디 넓은 절 마당이 나온다. 이색의 글로 그때의 절 구조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고려 말에는 절의 짜임새가 균형을 유지하여 지금보다는 훨씬 더 멋졌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설날 서둘러 세배며, 설 행사를 끝내고 아들의 차를 이용하여 인각사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들이 어느 길로 가는데요. 라고 묻는다. 절이 군위에 있다는 것만 안다. 길이 삼삼하니 차가 인도하는데로 찾아가자고 하였다. 정말 차가 가자는데로만 가니------, 신령을 지나서 고개를 넘는다. 그제서야 절로 가는 옛길이 생각난다.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니 주변의 풍광이 훨씬 더 낯이 익다. ‘저기 학소대가 보이네. 이제 다 왔구나.’ 절집으로 가는 길이, 낯이 익은 절 주변의 풍광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다.
예전에는 절이 퇴락하여 이끼낀 돌담이며, 옛날 기와를 무겁게 이고 있던 요사체며, 폐허가 되어 있는 전각터까지 궁상이 덕지덕지 하였는데. 지금은 손질을 많이 해서 법당도 깨끗하고, 요사채도 새 건물이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설렁해서 절집다운 포근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일까. 내 생각으로는 절문이 없으니 뚜껑이 열려있는 사이다 병마냥 김이 빠져버린 모습이다.
인각사는 군위군이 삼국유사를 군의 트레이드 마크로 정하면서 많이 다듬었다. 역사적으로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4년에 일연스님이 왕사가 되어서 주석하면서 하산소가 되어(하산소-왕사가 주석하는 절) 유명사찰이 되었다. 1362년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무무당을 건립하였다.
조선시대 이래로 이 절이 걸어온 역사도 잠시 보기로 하자.
태종 때는 조계종 소속의 자복 사찰이었다. 자복 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칠이다. 이 지역에서는 유명 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1597년의 정유재란 때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타버렸다. 보각국사비도 크게 손상을 당하여서 거의 폐사의 지경에 이르렀다. 효종 때와 숙종 때 그리고 경종 때에 중수하였다. 우리나라 사찰의 역사를 보면 거의가 임진란 때 불탔고, 숙종 때 보수와 증축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숙종 때에 우리가 잘 살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민간 설화도 ‘아조의 숙종 년간에’로 시작하여 숙종 때 일어난 일이라는 전재를 단 것이 많은 것도 같은 의미가 아닐까.
예전에 절 공부를 하면서 답사를 다닐 때 조선 말이 되면 억불정책으로 절은 폐사에 지경이 되고, 고을의 양반네가 절터에 집을 짓거나 산소를 만들었다고 했다. 대체로 절 터는 풍수지리 사상에 의하면 명당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절도 1890년에 이 지방의 토호가 보조국사비를 쓰러트리고 조상의 산소를 쓰려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일연의 비와 전각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무식한 소치를 당연히 나무라지만, 그때, 유가의 가치에 매몰되어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눈꼽만치도 못 느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들도, 진보니 보수니 하는 외통수 가치관에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고도 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1992년에 인각사 절터가 사적 374호로 지정되어서 이후로 다섯 차례나 발굴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 말에 수난을 겪은 보조국사 탑비 이야기도 조금 하자. 일연 스님은 그의 행적이 바로 역사이고, 그 자료가 탑비이다. 그런 탑비를 무덤을 쓰겠다면 훼손하다니, 우리 대구문협 회원이신 권영시 선생님은 일연 스님의 발자취를 찾아 전국을 누비며 일연을 연구하는 전문가이시다. 나는 노년의 시간을 이처럼 하나의 공부에 집중하여 보내는 분을 존경한다. 선생님을 모시고 답사라도 다녀와야지 않을까.
문화재로는 탑비를 비롯하여 석불좌상 2기, 3층 석탑이 있다.
절에 들리면 아내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 법당에 들려서 작은 돈이나마 공양을 한다. 설날이라 찾는 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번잡하지는 않지만 절을 찾는 차가 한 두 대가 아니다. 대부분이 할머니 쯤의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들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마당을 돌아다나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고, 아내는 아들과 법당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차다. 절 마당에 서서 학소대를 바라 보았다. 불경소리보다는 무가의 가락이 들려올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