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딸인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은 바빌론의 원로 두 명이 거짓 증언을 한 것을 밝혀내어 수산나를 구해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용서하시며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3,41ㄹ-62
그 무렵 회중은 41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복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어려운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고해소 앞에 섭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미움과 증오가 왠지 스스로를 더 초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을 외면하고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때가 생각나 가슴이 저려 옵니다. 머리 속에서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떠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그 말씀이 더욱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 옵니다.
큰 죄를 지은 여자가 유다인들 앞에 있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죄를 지은 여자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여자를 용서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용서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들이 용서하게끔 기다려 주십니다. 용서를 위하여 먼저 자신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둘러볼 시간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아흔아홉 개의 죄만 바라본다면 용서의 마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눈을 돌려 자신이 지은 작은 죄 하나라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용서는 시작됩니다.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교만과 오만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시작은 다른 이들이 지은 큰 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죄를 바라보면서 시작됩니다.
또한 용서는 무관심이 아닙니다. 용서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평화만을 위하여, 나 한 사람의 구원과 깨끗함만을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를 청하지 않는 자에게, 자신이 어떤 잘못을 하였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무관심일 뿐입니다. 그들이 잘못하였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불의한 마음에 하느님의 정의를 새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우리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최종훈 토마스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책, ‘사피엔스’를 읽다가 재미있는 내용을 보게 되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 종이 다른 모든 종의 최상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은 유연한 언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간단한 의사소통을 하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유연하게 또 자세하게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100마리 넘는 집단을 동물은 형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인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사소통되지 않는 사람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유연한 언어 중에서도 가장 큰 결속력을 가져오는 것이 ‘뒷담화’라고 말합니다. 뒤에서 남 얘기하는 것은 분명히 나쁘지만, 대규모 협력을 일으키기 위해 큰 역할을 이 뒷담화가 담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의 결속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폭넓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모든 종에서도 가장 최상위 종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뒷담화도 무조건 나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인류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행복’의 측면에서는 말의 사용이 중요합니다. 즉, 어떤 뒷담화를 하느냐에 따라 함께 행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 빠지는 뒷담화가 아니라, 힘을 더하는 뒷담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거짓이 아닌 진실의 뒷담화가 되어야 합니다. 미움이 아닌 사랑의 뒷담화가 가득한 우리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려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마주치신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용서해야 하는가, 용서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곤혹스러운 문제에 부딪히십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율법 준수 여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고발은 사랑이 전혀 없는 말이었고, 거짓의 말이었으며, 힘 빠지게 하는 뒷담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고발한 자들을 아무 말씀 없이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시는 행동을 하십니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부터 의로움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이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장면 하나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을 뿐 그들을 바라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고,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에게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은 힘을 더해주는 말이고, 진실의 말이며, 사랑 가득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말을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한 해가 끝날 때, 그 해의 처음보다 더 나아진 자신을 느낄 때이다(톨스토이).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운보 김기창 화백)
행복을 담는 상자
어떤 남자가 꿈에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천사는 뭔가를 열심히 포장하고 있었지요. 무엇을 포장하는지 궁금해서 묻자, “행복을 포장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에게 나눠줄 행복이요.”라고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포장을 너무 단단하고 튼튼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도 묻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면 너무 멀기도 하고 시간이 오래 걸려서 튼튼하게 포장하고 있답니다. 이 포장지는 ‘고난’이거든요. 이것을 벗기지 않으면 행복이란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남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천사님! 그 고난이라는 단단하고 튼튼한 포장은 어떻게 하면 열 수가 있나요?"
천사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포장을 쉽게 열 수 있는 열쇠는 바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포장은 스스로 벗겨지며 행복이란 선물을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왜 행복을 잘 찾지를 못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감사라는 마음의 열쇠로 쉽게 풀 수 있네요. 오늘도 감사의 마음으로 행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세요.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