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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아픈 기억들
역사를 말할 때 줄곧 변함없는 나날들의 반복이라 한다면 이는 장구한 세월일 뿐 역사의 시간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역사는 한 시대를 풍미한 굵직한 사건이나 사고가 있으며 도도한 물줄기가 바뀌어 시간의 구분으로 이정표를 말하고 그 행위가 무엇이었는지 말이 필요한 때 비로소 역사의 매듭을 가지며 진정한 역사라 말 할 수 있다. 수만 년의 석기시대로 일괄하여도 별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은 긴 시간이지만 아는 게 없고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때 그 시절이라는 것은 바로 주어진 어느 시간을 말하며 그 시간 열차 속에 동승한 그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의 그 대상은 너무도 많아 일일이 담기도 추려서 살펴보기도 어렵다. 당시의 엄청난 센세이션이나 아픈 상처를 깊게 남긴 사건이나 사고들만 추려도 그 끝이 없다. 긴 시간도 아닌데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다. 그로 그 사건 사고로 그 시절을 기억하는 편이 어느 면에서는 수월하고 생동감이 있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던 1964년, 동경올림픽이 열린 그 해 도쿄에선 한반도 남북분단의 아픔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있었다. 남북으로 갈린 지 14년 만에 남한의 신문준씨는 북한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한 딸 금단을 도쿄에서 만났다. 단 7분간의 재회에 불과했지만, 이산의 아픔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65년 이른바 '무즙 파동'은 '일류병'에 빠진 사회모습을 드러냈다. 중학입시 과학시험 '엿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묻는 답안에서, 출제자가 제시한 정답 '디아스타아제'외에 '무즙'도 답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결국 소송까지 벌여 '무즙'을 정답으로 썼다가 불합격된 학생들이 구제됐다. 그러나 승소한 학생들이 경기 경복 등 일류고로 전-입학 하는 사이, 일부 상류층 자제가 슬쩍 끼어들어 뒷구멍 입학을 한 것이 들통나면서 고관들이 줄줄이 옷을 벗었다. 당시는 보결이라는 뒷구멍 입학이 흔했다. 그런 가운데 전국을 마약공포에 몰아넣은 '메사돈 파동'(65년 5월) 이 벌어졌다. 합성마약을 진통제로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킨 것이다.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배가 아파도 한대, 머리가 아파도 한대…. 습관적 으로 진통제를 애용하다 마약중독자가 됐다.
당시 당국은 마약중독자를 1만5천명으로 밝혔지만, 비공식 통계론 30만명의 마약중독자가 있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68년 1월21일 서울의 심장부가 북한 무장공비 31명에게 뚫렸다.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들은 '박정희 모가지를 따러' 잠입, 시내버스에 수류탄을 던지는 등 서울시내는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우리는 김신조를 기억하고 있다. 70년 3월17일 밤. 한강변 도로에선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미모의 20대 여인이 코로나 승용차안에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 바 정인숙사건. 오빠는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동생을 '문중의 명예'를 위해 죽였다는 진술이었지만, 그녀의 빨간색 슈트케이스에서 나온 사회 저명인사 26명의 명단과 전화번호는 온갖 소문을 만들어냈다. 당시의 총리가 낳은 자식이 있다는 풍문을 나도 엿들은 적이 있다. 보름여 뒤인 4월 8일 새벽에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아직까지 부실공사의 표본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 붕괴사건은 바로 서울특별시가 주관해서 지은 아파트의 갑작스러운 붕괴였고, 33명의 사망자와 39명의 부상자를 낸 불상사였다. 당시 서울특별시장으로‘불도저’ 라는 별명을 지녔던 김현옥이 전시효과를 위해 자랑삼아 지었던 아파트의 붕괴였기에 그 충격과 파장은 클수밖에 없었다. 71년 8월10 서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살고 있던 경기도 광주에 선 5만여명이 분양지 불하가격 인하를 요구하며 파출소 방화 등 난동을 벌였다. 불과 2주 뒤인 23일,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수용 중이던 공군 특수부 대원 24명이 섬을 탈출, 민간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들이닥치면서 곳곳 에서 교전을 벌이다 영등포에서 자폭, 15명이 숨졌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실미도가 나중 그 배경이 된 영화다.
그러나 71년 최대 악몽은 후에 할리우드 영화 타워링의 소재가 된 대연각호텔 화재였다. 성탄절날 호텔에서 발생한 화재는 외국인을 포함, 1백57명이 숨졌다. 전국민이 보는 가운데 침착하게 사고에 대응하던 11층 투숙객, 수건을 입에 댄 대만사람이 잊혀지지 않는다. 75년 '살인마 김대두 사건'은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두달 동안 무안, 송탄, 수원, 서울 등 전국을 누비며 9곳에서 17명을 살해하고 그가 강탈한 것은 현금 2만6천여원, 고추 30근, 쌀 1말, 청바지 1개, 시계 1개였다.
77년 11월11일 전북 이리역에서는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폭발이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24t이 일시에 터지는 소리였다. 이 폭발로 59명이 사망하고 1천 여명이 부상했다. 역 주변엔 거대한 분화구가 패였다. 그러나 사고원인은 단순했다. 호송원이 술을 마시고 화약 열차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자다 불을 낸 것이다. 이후 그곳은 익산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광주 민주화운동을 정녕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며 한창 데모를 하던 바로 그때였다.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하였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를 개최하였다. 삼청교육대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삼청교육대란 기관을 설치하여,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를 발표하여 폭력범과 사회풍토문란사범을 소탕하기 위하여 죄질에 따른 순화교육, 근로 봉사, 군사재판 등을 병행함으로써 이의 근절을 선언했다.
1981년 1월까지 총 6만 755명을 체포하고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헌병대 요원과 검찰, 경찰서지역 정화위원으로 구성된 심사 위원회에서 A·B·C·D의 4등급으로 분류하여 A급 3252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하였고 B·C급 3만 9786명은 4주 교육 후 6개월 복역하게 한 다음 2주 교육하여 훈계 방면한 무시무시했던 그 시절 이야기다. 이와 병행하여 공직자 숙정작업을 대대적으로 하였는데 그 바람에 우리 아버지도 졸지에 해직공직자가 되었고 나는 유학의 꿈을 접고 말았다.
1981년에는 비상계엄령 해제. 전두환 대통령 취임. 제5공화국 수립이 이루어졌던 때로 전두환정권이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려는 심산이었는지 올림픽 서울 유치 결정이 되고 해외 여행 자유화가 시작됐었는데 당시의 지구촌은 미국 우주 왕복선 발사 성공, 프랑스 미테랑 사회당 정권 출범. 폴란드 자유노조 활동 정지. 이란 억류 미국 인질 석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암살 같은 굵직한 사건이 도처에서 터졌다. 바로 그 해 5월 14일 경북 경산군 경부선 상행선 건널목에서 부산 발 서울행 특급 열차가 건널목을 건너던 오토바이를 친 후 급정거, 사고현장을 확인하던 중 뒤따라오던 동대구행 보통열차가 추돌했다. 이 울산 열차 추돌 사고로 54명이 사망하는 등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82년에는 영국의 포클랜드 전쟁. 미국 인간 유전자 복제 성공. 야간통금 해제.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프로야구 출범. 조오련 도버해협 횡단. 일본 역사 왜곡 교과서 파동. 교복 및 두발 자율화가 시행되었으며 복싱선수 김득구 맨시니와의 타이틀매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83년에는 중국민항기 불시착,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미얀마 (당시 버마) 아웅산묘소 폭파 사건. 5000원권 및 10000원권 새지폐 발행. 한국인구 4000만 돌파했으며 . 지하철 2호선 개통을 그 해 했다.
그 해 9월 1일 새벽3시 26분 소련 전투기 수호이 15기가 사할린 인접 해역 1만m 상공 을 비행하고 있는 대한항공 소속 007점보 여객기를 향해 2발의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해 269명의 탑승객 전원을 사망케 한 이른 바 KAL기 격추사건이 발생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북한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 방문 중이던 한국 전두환대통령 및 수행원들의 아웅산 국립묘소 참배를 이용,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이 묘소 건물 천장에 설치한 원격 조종 폭탄을 폭발시켜 한국의 부총리, 장관등 수행원 17명을 순국하게하고 14명을 부상시키는 천인 공노할 테러를 감행했다.
1984년 1월 14일 오전 8시경 부산시 진구 부전동 257소재 대아호텔에서 연소 중인 석유난로에 기름을 붓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대형화재가 발생되었다. 이 화재로 2억 8천 9백만 원의 재산 피해와 108명(사망40명, 부상68명)의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고 진화되었다. 1986년에는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 - 페레스트로이카.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후 공중 폭발되었으며.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발생했으며 1986.08.04 독립기념관 본관이 준공을 불과 11일 앞둔 1986년 8월 4일 화재가 났다.
1987년은 민중대항쟁이 일어난 해이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필두로 노태우 6·29선언 발표, 이한열 열사 사망. 노태우 대통령 당선.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이 있었으며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그 사건은 도심 한 복판에 넥타이부대를 만들며 민주화운동의 불꽃이 피어오른 해이기도하다.
1988년 2월 노태우(盧泰愚)와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 문제가 논의되자,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 동안 백담사에 은둔하다가 90년 자택으로 돌아왔다. 95년 노태우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관련, 5·18특별법의 제정이 논의되었고 11월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가 이루어져 12월 3일 12·12반란 수괴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88올림픽을 치루었건만 90년대에 들어서는 사건은 부지기수로 늘어난다. 1993년 3월 28일, 부산 열차탈선 사고.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던 제117호 무궁화호 열차(기관사 노진환·32)가 덕천2동 빅토리아호텔 뒤 덕천천앞에 이르렀을 때 철도지반이 내려앉은 것을 발견, 급정거 했으나 열차가 관성으로 미끄러지면서 탈선해 일어났다.(사망 78명, 부상 105명).1994.10.21. 성수대교 붕괴사건. 사망 32명, 부상 17명 .삼풍백화점 붕괴 대참사 사건 (1995;사망 502명, 부상 937명).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사건 (1995년;사망 101명, 부상 202 명)대한항공기 추락사건 대참사 (1997년: 2백29명(외국인 16명)이 사망 )
끝도 없이 늘어지는 사건 사고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도 그렇고 어느 것 하나 안타까운 것이 없지는 않지만 제일 가슴 아픈 것은 최근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세월호 사건이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안전불감은 시대가 변하여도 여전히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중학생 때 시민회관 화재사건이다. 버스를 타려는데 하춘화 쇼를 보려다가 맨발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역사적으로 실감이 안나 두고두고 기억하는 뉴스가 있다.1974년 광복절 날 청평 유원지를 제물포고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친구들하고 놀러 갔는데 나는 솥단지를 들고 강변을 향할 때였다. 육영수여사가 저격을 당하였다는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밤 대학교 3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것이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긴박하고 숨 막히게 살아가던 그 시절 박대통령의 죽음은 큰 빈자리였다. 방송 또한 그 뉴스밖에는 없었지만 그가 죽는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아서 뉴스를 되풀이해서 들었는데 그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그를 무척 싫어했다. 그의 독단으로 무수히 꿈 많았던 젊은 친구들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품은 뜻마저 버려야 하는 것을 증오의 마음과 애처로움으로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에 나왔던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래는 그 때의 참담했던 어눌한 영상미를 그리움으로 진하게 남겨준다. 분개하던 젊은이들의 가슴이 한 순간 아무 느낌 없는 공허한 바람처럼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그 속에 있고 그의 덧없는 인생도 그곳에 숨어 있는 듯도 싶다. 실제로도 젊은 적 시월의 끝 무렵은 무척이나 많은 갈림을 가져왔던 것이 사실이다. 계절의 훈풍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다가선 것은 많은 이별이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은 한해 말 보다 혹독한 추위였으며 고독이 자리하는 긴 하루였다.
교정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지 입영열차에 몸을 실어야 할 때가 그 무렵이었으며 그 누군가를 기다림으로 버티다가 현실의 면사포를 써야 할 결정을 할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러기에 무수히 많은 것을 숙명이란 이름으로 간직한 채 날밤을 세우며 마지막 그리움의 눈물을 진한 소주에 담아 가슴에 묻어두었다. 그래서 과거가 그립다하면 대개가 그때가 많이 떠오르고 과거가 많다하여도 그때의 낙엽 지던 그림자처럼은 선명하지 않다.
경복궁의 돌담길에 가지런한 은행잎이 지금도 곱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보단 어림도 없을 것이란 생각도 그래서 하게도 된다. 지우지 못할 그리움의 미학은 어느 아름다움보다 곱고 애틋하다. 그래서 과거를 떠올리면 가을 낙엽 다 지던 때 황혼 빛이 미련으로 돌변하고 흔들리는 갈대가 내 마음 같기도 하여 먼 하늘 기러기가 되고 싶기도 하는 것이다.
사는 내내 사건사고가 너무 많아서일까, 정말이지 요즘 같은 무감하고 삭막한 일상 속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이 사는 존재들과 같이 존립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우두커니 창 밖에 시선을 두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그 뭔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일 것 같고 연민이 인다. 하지만 내가 어디론가 가고 있듯 세월 쫓아 그들 또한 가고 있기에 단지 이런 생각은 가을 바람에 스치는 단순한 감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연민이라 한들 말을 해 또 무엇할까. 이러한 사유 자체가 권태로운 삶의 청승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한 심사이기도 할 것이다.
꼭 그래야만 세월이 켜켜이 쌓이는 것인지 지나온 세월, 사건도 사고도 너무 많고 여직 가슴속에 많은 것들이 잠들지 않고 남아 있다. 그간 무사 무탈한 것을 고마워라도 하여야 하는 것일까. 연관된 사람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시련의 나날들이었을까 새삼 돌아보게 된다. 뒤를 몰아보는 요즘, 그때 그시절을 아련히 기억하는 것 부터서 이제는 내가 삶의 가장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도 된다. 그래서 너무도 바삐 지난 가혹한 세상이라고 말하고 싶어지고 그래서 가는 세월이 매정하고 아쉽기만 하다. 억울한 세상 꼴이라고 야속해 했던 그 시절의 숨 막히는 긴장된 젊음이 다시 보고만 싶어진다. 불안정했지만 그리운 그 추억의 길을 찾아 단풍같이 야울야울 불같이 내 마음도 불 살라 진다면 좋으련만.... 오늘도 가는 세월은 지나간 꿈을 기억하지 말라하며 어디론가 싣고 바람처럼 무작정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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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아주 어렸을때 빼고는 거의 다 생생하게 기역이나네요 참으로 슬프고 가슴 아푼 이야기가 대부분 이고요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