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나는 교회를 다녔었다. 하지만 교회란 곳이 그다지 은혜로운 장소로 느껴지지 않는다. 3살 때부터 다니던 교회가 7살 되던 해 이유는 모르지만 교회가 분리되었고, 그 분리된 교회마저 고3이 되던 해 또다시 아픔을 겪게되었다. 고3때 설교하시던 목사님의 넥타이를 잡아서 강대에서 끌어내리던 그 장로님의 모습, 그 목사님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깡패들을 동원했던 어떤 집사님, 우왕좌왕하며 시끄럽던 그 때의 교회의 모습은 15년 이상이 흘렀는 데도 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 교회는 결국 사라졌다.
또 장신대 4학년 시절 강남의 모교회에서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또다시 했다. 안수집사들은 저녁 예배 때 대표 기도 할 때마다 목사님을 저주하는 기도를 서슴치 않았고, 밤마다 목사님의 사택을 습격하여 목사님을 협박하였다. 어떤 모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견디다 못해 설교 시간에 부엌칼을 강대에다가 꽂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전에 있었던 어느 교회에서는 원로 목사님과 담임목사님의 분쟁으로 인해 교회가 나누어지는 아픔도 경험했다.
짧은 세월 동안 자그마치 4번이나 교회의 아픔 속에서 있었다. 그 때마다 내가 느끼는 건 ‘교회는 참으로 무서운 곳’이란 사실이다. 강남에서 노회장까지 하셨던 그 목사님은 신대원에 진학하려던 내게 이런 모습을 보고도 목회를 하려고 하느냐고 물으셨다. 사실 난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교회라는 곳이 무서웠다. 사랑이 넘쳐야할 교회가, 이해와 용서가 넘쳐야할 교회가, 위로와 격려가 넘쳐야 할 교회가 자기만의 목소리로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는 그런 장이 되어있었다. 남을 섬기려는 곳이 아니라 남 위에 군림하려는 곳이 바로 교회요,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곳이 아닌 자신만이 인정을 받으려는 곳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나는 장신대 4년 동안 정말 많은 딜레마에 빠졌었다. 이런 무서운 교회들로 나가야하는가?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닌, 예수를 믿는다는 공동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힘들게하는 그런 교회 사역이 과연 내가 꿈꾸었던 목회였던가? 나는 신학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런 아픔을 눈으로 다 지켜봤으면서도 나는 신학을 그만둘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솔직한 이야기로 신학을 그만두고 다른 것을 해볼 것을 찾아보았으나, 불행하게도 나는 다른 할 일이 없었다. 아무 할 일 없는 나를 하나님은 신학교로 보내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다.
“동귀야, 내가 이 땅에 왔을 때도 이 땅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왔다. 그 혼란스러운 중에 죽어가는 나의 백성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대신 죽으러왔다. 너도 그러면 안될까?“
예수님은 내게 강요하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죄많은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위해 주신 사랑이 너무 컸기에 나는 감히 예수님같이 못살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이 길을 선택 할 수 밖에 없었고 예수님같은 목회자가 되자는 그런 각오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읽게된 오성춘 교수님의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는 이런 나에게 청량 음료와 같은 시원한 느낌을 주었다. 이 책의 서문을 보면 ‘성령의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현재를 보기 때문에 현재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소망의 눈으로 그것을 보기 때문에 미래에 하나님이 만드실 아름다운 비전을 보며, 사랑의 눈으로 거기에 임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거기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기에서 새 일을 시작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데 이 구절을 나에게 많은 생각을 주었다.
얼마전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님께서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에요’ 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 분은 그 아픔 속에서도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교회의 얼룩진 모습들만 경험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회의 아픔 한편에는 그 아픔으로 인하여 눈물로 기도하시던 분들이 계셨고 하나님의 역사가 그 교회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혼란 속에서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계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되면 우리 하나님이 거기에 오셔서 상처입은 자들을 싸매시고 치유하시며, 갈등은 화해로 침체를 감격으로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신다는 이 책의 표현은 나를 들뜨게 했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교회에 하나님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성령의 눈을 들어 한국 교회를 바라 볼 때 우리에게는 희망이 보이는 것이다. 바로 이 책은 어두워가는 교회에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다.
2.한국 교회의 모습
그렇다면 앞에서 경험했던 그런 교회들은 도대체 어떤 교회들이었을까? 왜 그 교회들은 그 무서운 교회를 연출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 책을 보면 거기에 대한 해답이 어느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즉 그 교회들은 믿음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행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행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다는 식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믿음은 인간 「나」가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무덤에 묻혀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오셔서 우리의 참 생명이 되시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이 무엇을 행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고, 새 사람이 되며, 사랑과 희락과 평강이 넘치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신앙을 행함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더욱 열심히 행하도록 격려하고 있다.우리는 아무리 행함을 강조하여도 부족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행함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댓가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노력과 믿음을 혼동 할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는 자들, 이러 저러한 헌신자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렇다. 한국 교회는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자는 어느새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나 역시 청소년들을 지도하면서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는 아이를 믿음이 좋은 아이라 생각하고 그 아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되면서 그러한 나 자신을 회개하게 되었다. 우리 예수님은 내가 잘 했기 때문에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먼저 오셔서 그 은혜를 체험케 하시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의 일을 감당케 하셨던 것이다. 즉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고 주님의 말씀이 사울에게 들려질 때에 사울 속에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의무는 모든 청소년들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 할 수 있도록 말씀 준비와 말씀증거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데 나는 이미 어느 학생들을 선별해 놓고 그들만을 위한 설교, 그들만을 위한 교육을 다른 학생들을 무시한 채 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사역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아이들의 영혼을 책임진다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모델이라는 아브라함도 그의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그 믿음을 발전시켜 나갔고, 하나님이 완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주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삶을 따라 사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만 바라보고 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지켜주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받으며 살게 하시는 분이시다”라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또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마음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에 순종의 삶을 살게 역사하신다.
아브라함은 실패도 있었고, 불신앙도 있었고, 인간의 주장도 있었다. 그 결과로 아브라함이 위기에 처하여 고난당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찾아와 아브라함을 위기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와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고 지키며 돌보아 주셨다. 아브라함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사랑을 베푸시며, 필요를 채우시고 위기에서 구원하시는 것을 체험하며 살았다...
우리 교회의 모습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속한 교회에는 은혜가 가득한 믿음의 소유자들만이 있는 곳이 아니다. 여러 가지 불신앙적인 형태와 눈쌀을 찌푸릴 정도의 모습을 교회에서 보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무한하신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온갖 형태의 사람들을 주님은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하시는 데 바로 우리 믿음이 있다는 자들이 그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평가하고 무시한다.
아브라함은 신실함 때문에 믿음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말씀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하는 데 그 말은 옳은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적인 기회를 열어줘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 사람의 믿음을 속단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모습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교회의 분열의 원인은 바로 그 영혼의 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영혼을 포기하시며 버리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대신 버림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우리의 교회는 바로 이 모습이 결여되어있다.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라면 바로 그 예수님을 닮은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는 입술만 살아있지 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이해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믿음이 없다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죽기까지 사랑하고 있지 않다. 바로 이런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되리란 것은 참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3.예수님의 관심
성경은 여러 가지 어두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어둠이 많은 세상 속에 빛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태어나 누우신 구유는 영원한 믿음의 상징이다. 짐승의 먹이 통인 구유는 냄새나는 것이요, 더러운 것이요, 아름다운 것도 아니며, 자랑스러운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기에 누우셨을 때 그것은 변화를 받는다...
세상의 아무리 냄새나고 더럽다 할 지라도 우리 예수님이 오시면 변화를 받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바로 이 내용에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병들고 상처받고 죄로 인하여 고통받는 다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이 그 곳에 임하시면 다 해결함 받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소외된 자들, 장애자들, 귀신들린 자들, 약한 자들, 천한 자들을 가차없이 짤라내어 이 땅을 오염시키고 더럽게 하는 자들을 이 땅에서 제거해 버리는 원칙을 따라 살았다. 유대인들의 원칙은 열매없는 나무를 찍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열매없는 나무를 위해 두루파고 거름을 주어 열매 열리는 나무로 재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몸으로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다. 십자가의 처참한 형벌을 통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셨다...
예수님은 누구도 업신여기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언제나 목마른 자를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세상이 무서워하고, 무시하고, 관심을 갖지 않고, 멸시와 천대를 주고있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관심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이 그런 자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무조건 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다른 이들의 아픔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찾아와도 그냥 넘어가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자신의 아픔에만 관심이 있지 다른 이들의 아픔과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흉내만 낼 뿐이다.
예수님은 목마른 자, 메마른 자, 빈잔을 들고 있는 자를 찾아 오시는 것이다. 죄인들을 찾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생명, 평화의 기쁨, 생수의 강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풍성한 삶을 살게하려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보다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즉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된 관심인 것이다. 소외받은 자,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모세 역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소리를 들었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절망하고 좌절하며 쓰러지는 것에 안타까워하셨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왜 나를 신학교로 부르셨는 지, 그 교회의 안좋은 상황을 다 보았으면서도 왜 신학을 하게 하셨는 지 그 이유를 다소나마 깨닫게 되었다. 바로 예수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살피며 지키고 그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같은 역할을 하라는 뜻이 아닐까? 그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아닐까?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모자랐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잔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더 이상 감격과 축복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쁨으로 시작되었으나 슬픔으로 끝나고, 축복으로 시작하였으니 저주가 남고,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나 원망과 시비로 끝난 것이 바로 가나의 혼인 잔치였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상징한다.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기쁨과 감격과 축하로 시작하지만 얼마 못가서 고민과 불만과 저주가 가득한 세상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 이 책의 표현대로 우리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바로 이런 주님을 올바로 증거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아픔을 만져주시고 함께하시는 그 주님을 다른 사람들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우리의 할 일인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성령께서 일을 하신다고 우리가 복음도 증거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도 예수를 몰랐지만 선교사들의 전도와 그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께서 오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 즉,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주님, 또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셨다는 그 주님을 널리 전파해야 할 것이다.
4.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교회상은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는 주님께서 교회 안에 살아계셔서 교회의 성도들을 화해와 용서의 사도로 만드는 교회, 주님께서 생수의 샘물을 터져나오게 하는 교회, 주님께서 끊임없이 역사하여 교회에 들어오는 자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마시는 교회, 주님께서 거기 오셔서 신비한 은혜와 기적을 베풀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교회가 바로 우리가 기대하는 교회라 말한다. 이런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가를 알 필요가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은 자격이 없는 자를 깨우치시고 일하지 아니한 자에도 은혜를 베푸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도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저자는 포도원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나중 온 사람들에게도 처음 온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탕자의 비유를 들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모자람을 보면서 그것을 결함이나 판단이나 질책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몸에서 풍겨나는 더러운 오물 냄새도, 돼지를 치면서 베어 있는 더러운 돼지 냄새도 맡지 못하시는 것이다. 오직 아들의 냄새, 살아서 돌아온 아들의 생명의 냄새를 맡는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시각은 행위에 있지 않고 사랑에 있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면서 죄로 얼룩진 더러운 모습을 보시지 않고 죄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과 비참함을 보시고 거기에서 건져내고 싶어하신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 이래야 할 것이다. 툭하면 서로의 단점을 잡아내려는 모습보다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허물을 감싸 안을 수 있을 때 생명이 있고 성령께서 활발히 움직이시는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조건 적으로 이해하시고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것같이 우리 또한 그런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탕자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아들이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아버지의 행위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오셔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며, 그들의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그들에게 생수의 강으로 넘치는 삶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이런 하나님의 뜻을 잘 기억하고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이룰 수 있도록 맡은 사명을 잘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까지 예수님을 따라 올라온 자들에게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아픔과 희망을 포용하고 그것들을 함께 나누고 그들에게 자기의 공감을 전달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뜻은 바로 “내가 너희를 세상의 소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주님의 의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연결하고 있는 데 즉,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그들을 세상의 빛으로 그리고 소금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 성경 해석에 대하여는 조금 특이하다고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공감이 된다. 즉 빛과 소금은 ‘명령’의 개념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렇게 되게 해주신다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은 참으로 우리의 짐을 가볍게 해준다. 그러나 이렇게만 봐서는 안될 듯하다. 두 가지 면을 다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교회는 쓸모없는 우리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만들어주셨고 그러기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설명해야 옳을 듯하다. 이것은 율법이라기보다 세상의 빛과 소금됨을 세상에 나타냄으로 어둠 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새로운 희망을 그들에게 던져주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즉 신앙이 어느정도 자리 잡은 사람들은 이제 그 은혜를 세상사람들과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자신이 받은 은혜에만 감격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는 정말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영성이란 근본적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분의 생명을 받아 생수의 강으로 넘치는 삶을 살아가며,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리고 영의 인도를 받는 영적 몸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의 몸이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 우리의 몸은 영성적인 몸이 되는 것이요, 영적인 몸을 개발하는 것이 곧 몸의 영성이라고 이 책은 말하다. 우리의 몸이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아가페의 통로가 되어야하며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영성이며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워져야 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 한다. 영적인 마음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 성령께 순종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마음의 영성을 개발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 개발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영성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은 우리의 더러운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질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기도만 많이 한다고 영성이 커져간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너’를 살리고 ‘너’를 완성시키며, ‘너’를 구원하기 위하여 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하며 남을 나보다 더 높게 여기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또 예수님처럼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자에게 관심이 있어야 하며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영성 훈련의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골방훈련이며, 둘째는 성도의 교제이며, 셋째는 예배와 같은 공동훈련이고, 넷째는 참여와 봉사라고 하면서 이것이 영성 훈련의 출발점이며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세상을 향한 구체적인 노력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 이것은 정말 우리의 꿈일까? 이런 교회를 정말 이룰 수는 없는 것인가? 세상에서 소외받고 상처받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이 우리 교회들을 통해서 참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날이 돌아왔으면 한다. 어느 누구도 받아 줄 수 있는 교회,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있는 교회가 속히 이 땅에 자리 잡기를 바란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살 길 이며 성령이 마음껏 역사 하실 수 있도록 돕는 길일 것이다. 아직도 복음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우리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서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 새롭게 변화 받는 놀라운 역사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고 계신데 우리가 너무 나태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듯이 우리도 세상 모든 자들에게 찾아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 내가 그런 교회에서 목회 한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마음이 설레인다. 그러려면 먼저 내 자신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득 채워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면서 자랐던 교회의 싸움과 분열과 저주들을 다시는 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첫댓글 어흑!!!스크롤바의 엄청난 부담이;;;; 전도사님!!! 연락처좀 알려주세용~ 비상연락망 만들게용 >.<
이번 한 주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이 될 거 같아요~ 전도사님 열심히 하는 모습에 저두 절루 힘이 난답니다~ 감사드려요!!!
종대형제..무늬자매 늘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동받고 있답니다..늘 화이팅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