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정역으로 나가
삼월 첫째 월요일은 우수에 이어 다가온 경칩이었다. 날씨는 연일 포근해 봄기운이 온 누리에 번져갔다. 근교 들녘으로 나가 봄볕을 쬐며 새 움이 돋아 자라는 쑥을 캐 볼까 싶어 열차로 이동한 산책을 나섰다. 이른 아침 창원중앙역으로 나가 순천을 출발해 삼랑진에서 부전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비음산터널을 통과한 열차가 진영역을 지난 한림정역에 이르렀을 때 내렸다.
지난번 한림의 화포천 하류 금곡리가 궁금해 들렸더니 ‘쇠실’로 불리는 우리말이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쇠붙이를 캔 금광이 있던 골짜기라 그렇게 불렸는데 한자로 바꾸니 금곡이었다. 금곡리에 딸린 오서가 있었는데 이번엔 그 마을을 탐방하려고 나선 발걸음이다. 한림정역에서 북녘으로 난 찻길을 따라 걸어 철길 굴다리를 지난 화포천 다리를 건너니 오서마을 이정표가 나왔다.
오서는 예전에 쓰던 한자와 지금의 한자가 달라졌음에는 사연이 있었다. 마을 서쪽 산기슭은 금까마귀가 알을 품는 명당으로 네 마리 용이 조상을 돌보아 대대로 효자와 충신이 나올 자리로 전해왔다. 예전‘까마귀 오(烏)에 살 서(棲)’를 썼는데 조선 후기 영향력 있던 한 인사였던 의금부 도사 김병현이 까마귀는 흉조라서 그 글자를 ‘나 오(吾)와 서녘 서(西)’로 바꾼 오서(吾西)였다.
한림정역에서 북녘 찻길 따라 걸어 화포천이 샛강이 되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앞둔 오서교를 지났다. 오서는 한림면 동쪽으로 금곡리에 딸린 다섯 개 자연 부락 가운데 두 마을이었다. 경전선 철길의 마사터널이 지나는 모정과 정촌에 이어 쇠실로 불리는 금곡 본동이 있었다. 여기에 오서의 두 마을이 합쳐졌는데 야트막한 산자락을 기준으로 내오서와 외오서로 나뉘었다.
다리목에는 시니어클럽 노란 조끼를 입은 노인 셋이 환경 정화 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행정 관서에서 노인 일자리 창출 순번 따라 부여된 임무를 수행하는 분인 듯했다. 나는 창원에 사는 이라면서 마을을 탐방 나와 안길로 들어가 봐도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여쭈었더니 흔쾌히 허락했다. 한 노인이 오서는 내오서와 외오서로 나뉘는데 금곡리 다섯 개 마을의 두 곳이라 했다.
먼저 동구 왼편 내오서로 들어 마을이 끝나는 곳까지 가봤다. 근래 전원주택을 지어 귀촌해 사는 사람도 있는 듯했다. 뜰에는 매화가 만발했고 목련꽃이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골목이 끝난 막다른 곳에서 되돌아 나와 동구에서 들길을 지난 외오서로 향하니 마을 회관도 갖추어 아까 내오서보다 가구가 많은 동네였다. 이방인은 마을 어귀에서 수로를 따라 배수장 근처로 나갔다.
화포천이 흘러온 천변 양지바른 자리에서 움이 돋은 쑥을 캐 모았다. 시멘트가 포장된 찻길이 가까웠지만 오가는 차량이 드물어 매연과 분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쑥이 무더기로 자란 곳이라 짧은 시간에 캔 쑥은 양이 제법 되었다. 쑥에 붙은 검불을 한 번 더 가려내어 봉지에 채워 담았다. 화포천에는 한림에서 생림으로 뚫는 신설 도로 높다란 교각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생림으로 통하는 찻길의 교량을 건너는 화포천 습지에는 곧 본향으로 돌아갈 큰기러기들이 마지막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저지대엔 지난해 경작했던 콩밭의 그루터기가 시든 채 남아 있었다. 콩대 사이로 여러해살이인 전호가 겨울을 넘겨 파릇한 잎맥을 펼쳐 자랐다. 울릉도에선 이른 봄 명이나물만큼 알려진 전호였다. 배낭의 칼을 꺼내 전호나물을 캐 모아 배낭을 쉽게 채웠다.
배낭을 추슬러 둘러메고 한림정역 앞으로 나가 김치찌개로 요기를 때웠다. 부전을 출발해 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타고 창원중앙역에서 내려 창원대학 캠퍼스를 지나니 산수유꽃과 목련꽃이 화사했다. 아파트단지 맞은편 상가 주점으로 가 전호나물로 전을 부쳐 마주 앉은 꽃대감과 봄 향기를 나누어 맡았다. 주인 아낙은 전호나물로 부쳐낸 전을 이웃 테이블 손님들한테도 보냈다. 23.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