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은 전체보다 크다
임동확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게 사실이라면,
한 개의 정자와 또 하나의 난자가 만나
한 아름다운 소녀와 한 튼튼한 소년의 몸과
정신으로 마침내 인류의 대열에 합류한다면
부분은 전체를 위한 합이 아니다
부분은 늘 전체보다 크다
연초록 느릅나무 이파리 하나가 보이지 않는,
흘러간 모든 시간의 흔적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철길 아래 깔린 무수한 포석(鋪石)의 하나가
더할 수 없는 쓸쓸함의 하중을 넉넉히 견뎌내며
시속 3백 km의 고속열차를 넉넉히 감당하는 중이라면,
때로 제지할 틈 없이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
어떤 경우의 수에도 포함되지 않은 예외 하나가
문득 새로운 세계의 심장을 닿는다면
부분이 전체보다 먼저다, 악마도
천사도 이 부분 안에서만 날뛰거나 자유롭다면
부분은 전체의 합이다, 아니 부분이
그 모든 전체보다 무겁거나 거대하다
백 권의 역사서보다 김종삼의 「민간인」 한 편이
더 깊고 슬픈 얘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면,
마침내 풀뿌리까지 누워버린 김수영의 「풀」이
하늘과 대지, 바람과 비의 합창을 부르고 있다면
모든 전체는 허구다,
모든 부분 그대로가 전체다
한 개의 조사(助詞), 한 구절의 문장이
혹은 한 편의 시가 단숨에 저 멀리
몇 백 광년의 우주로 달려갈 수 있다면,
한 시인의 눈이 여전히 광속보다 빨리 사라지는
영원의 어깨를 붙들고자 밤새 앞서 달려가고 있다면.
⸺월간 《현대시》 2018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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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확 / 1959년 전남 광산 출생.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1987년 시집 『매장시편』으로 등단. 시집 『살아 있는 날들의 비망록』『운주사 가는 길』『벽을 문으로』『처음 사랑을 느꼈다』『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태초에 사랑이 있었다』『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와 시화집 『내 애인은 왼손잡이』, 산문집 『들키고 싶은 비밀』,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