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사태 - 남파 공작원 31명 청와대 습격 사건
1968년 1월 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124군 부대. 영하 25도로 떨어진 초강추위 속에 남파 특수공작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어둠을 타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 공작원 초대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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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표정의 20대 초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24kg에 달하는 꽉 찬 배낭을 저마다 하나씩 둘러멨다.
모두가 하사관에서 하루아침에 소위로 임관되는 파격적인 계급 승진을 며칠 전 경험한 뒤였다.
그중 2명은 대위와 중위로 승진했다.
배낭 내용물은 다양했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 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쌀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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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대원은 76명이었으나 돌연 31명으로 축소됐다.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른 조치였다. 원래의 타깃은 청와대 외에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 수용소 등 5개소였다. 가히 휴전 이래 최대라 할 만한 초특급 작전이었다.
전날 밤 환송회에서 거하게 취했던 대원들은 최전성기의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추위 속에서 더욱 맛을 내던 소련제 보드카에 북한 인삼주, 생강주, 생맥주... 먹다 남긴 닭고기, 돼지고기가 다시 눈앞에 삼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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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해방을 위해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 임무'를 강조하던 124군 부대장의 말이 청년 엘리트 전사 김신조의 폐부에 아직도 비수처럼 꽂혀있었다. 그 부대장은 불과 1년 반 전 남파되어 경기도 송추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군경 포위망에 걸려 도주, 복부에 총상을 입고 5일 만에 임진강을 건너 귀환한 경력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참조: 김신조,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동아출판사, 1994>
휴전협정 이후 크고 작은 무력도발이 계속해서 자행되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사건은 북한의 무장공비 중 유일하게 생포됐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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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13일,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은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정부 요인에 대한 암살 지령을 받고 남파됐다.
이들이 임무를 달성할 경우 남한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어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흡수통일 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무장공비 김신조의 진술에 따르면 124 특수부대는 이 암살 지령 수행을 위해 2년 동안 강도 높은 특수훈련을 받았으며, 마지막 15일 동안은 청와대 실제 모형에서 목표 제거 예행연습을 지속적으로 실시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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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침투훈련과 탈주 훈련, 무기, 지도법, 공수작전 등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며, 특히 은닉법 훈련은 직접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매장되어 있는 시신과 함께 잠을 자기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1월 18일 그들은 한국군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틈타 수도권까지 잠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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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은 종로구 청운동의 세검정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는 도중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났다. 공비들은 검문 경찰을 향해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하고 그곳을 지나가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여러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군인, 경찰은 즉시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했으며, 적과의 소탕전에서 5명을 사살하고, 그 과정에서 김신조를 생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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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은 경기도 일원으로 합동 수색작전을 전개해 같은 해 1월 31일까지 28명을 사살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 최규식 총경이 공작원이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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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종결된 후 박정희는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 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했다.
국가 안보 우선주의는 반국가적 행위를 펼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운동을 처벌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김신조 사건 이후 남한도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북파 특수부대인 684 부대, 일명 실미도 부대를 비밀리에 설립하였으나, 얼마 뒤 남북이 화해 분위기로 바뀌어 684부대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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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당시 김일성은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다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김신조는 북한의 상투적인 수법이라고 반박했다.
김신조는 사건 직후 1년 동안 취조를 받았고 1970년 남한 시민이 됐으며, 북한에 있는 김신조의 아버지와 친척들은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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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정착한 김신조는 서울 침례 회신 학교에서 침례교 신학을 전공하고 서울 성락교회 목사가 되어 2009년까지 재임하였고 지금은 성락교회 원로목사로 가끔 안보 강연을 나가는 것으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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