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판계의 이단아 'B'
다큐멘터리 같은 잡지 만들자
업체가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닌 소비자가 사용하면서 마주치는 실제 장면을 다뤄
매장도 있는 그대로 찍어
1만3000원인데도 인기몰이··· 한 달에 2만부 발행
5월까지 총 16호 냈는데 4개호는 다 팔려 2쇄 찍기도···美·英에도 1만부 안팎 배포
잡지에 광고는 전혀 없어··· 오로지 판매 수익으로만 운영
"잡지에 실린 업체로부터 금전적 도움 없었다"고 표기 한국제품 1년에 1개 소개
잡지가 참 희한하다. 뭐 이런 게 있나 싶다.
가로 17㎝ 세로 24㎝ 크기, 130여쪽 분량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특정 제품 한 가지 이야기만 담겨 있다. 호주 화장품 '에이솝(Aesop)'을 다룬 최신 5월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이솝이 만드는 여러 제품 사진과 매장 사진, 사용자 후기, 제품 개발 스토리 등 에이솝 이야기로만 도배돼 있다. 같은 방식으로 빅(BIC) 볼펜, 브롬턴 자전거, 레이밴 선글라스를 예전에 다뤘다. 언뜻 보면 해당 회사가 제품 홍보를 위해 감각적으로 만든 특집 카탈로그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격이 무려 1만3000원이다. 인기 좋은, 게다가 300~400페이지 이상인 여성지나 패션잡지도 1만원을 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 참 '배짱 좋은' 가격이다.
보통 월간지들이 지면을 광고로 도배하고, 기사조차 스폰서로 제작하는 데 비해 이 잡지엔 광고가 없다. 책 뒷면에 "본지에 소개되는 브랜드로부터 브랜드 선정과 관련된 어떠한 금전적 지원도 받지 않았다"는 내용을 적어 놓았다. 업체에 미리 내용을 알려주지도 않고, 취재를 거부하면 스스로 알아서 사진을 찍고 기사를 쓴다.
겉만 보면 가장 광고 같은 매체인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가장 '탈(脫) 광고'적으로 제작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잡지 판의 '이단아'이고 '파격'이다.
어떤 잡지일까. 2011년 11월 창간호를 낸 월간지 'B'이다. 잡지를 발행하는 JOH란 회사는 "한 달에 2만부 정도를 찍는다"고 했다. 올 5월까지 총 16호를 냈는데, 이 중 4개 호는 1쇄 2만부가 모두 팔려 2쇄를 각각 1만2000부씩 더 찍었다고도 했다. 현재 잡지 시장에 2000여종의 월간지가 나오지만, 이 중 월 2만부 이상 발행하는 잡지는 10%도 안 된다는 게 정설이다.
브랜드들을 심층 분석하는 이 잡지에 기업의 마케터며 마케팅 전문가, 트렌드세터들이 열광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자. 일반인이 이 잡지를 돈 내고 사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제품의 모든 스토리를 보여준다. 다만 철저하게 소비자의 시각과 생활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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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지‘B’의 표지들. 왼쪽부터 스위스 가방 제품‘프라이탁’을 다룬 창간호, 캠핑용품‘스노우피크’를 다룬 3호, 영국 미용 제품‘러시’를 다룬 6호, 국 산 소주‘화요’를 다룬 9호.
기업이 아니라 소비자의 눈으로 본다
특정 제품을 다루면서도 광고로 전락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생산자와 광고주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아닌, 소비자가 사용하면서 마주치는 장면들을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 잡지엔 그 흔한 여성지 패션모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사진과 인터뷰가 나온다. 매장 사진도 가식 없이 소비자들이 마주치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부러 예쁘게 만들어 놓고 찍는 것은 지양한다.
잡지엔 해당 제품에 대한 소비자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 연상되는 단어, 해당 제품과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다른 패션 제품들, 제품군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전 세계 매장 소개, 여러 소비자의 사용 후기, 회사 창립 스토리도 담겨 있다.
이 잡지의 발행인인 조수용 JOH 대표는 NHN 디자인·마케팅 총괄 부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제품의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컨셉으로 잘 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잡지를 창간했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이 특정 제품을 어디서 어떻게 접하고, 구입하고, 사용하며, 어떻게 느끼는지를 24시간 지켜보면서 카메라로 찍는다는 개념으로 잡지를 만든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상품과 광고가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소비자들이 제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돼버렸어요. 수많은 잡지를 봤어요. 근데 보고 나면 뭔가 속은 느낌이 들었어요. 잘 가공한 '기능적인 광고'를 본 느낌이랄까요. 제품을 다루되 진짜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는 깊이를 담보하기 위해 선택과 집중 전략을 취했다. 잡지 한 호에 특정 제품 한 가지만 다루기로 한 것이다. 홍성태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다른 잡지들은 제품을 다뤄도 4~5페이지 정도에 그치는데, B는 100페이지가 넘는 지면에서 제품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기 때문에 깊이가 남다르고 소장 가치가 있다"며 "그런 가운데 자기 나름대로 시각을 담는 점이 돋보인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우리 일은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브랜드가 왜 사랑을 받는지 그 존재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라며 "어딘가에 숨어서 아주 묵직하게 커가면서 사랑을 받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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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수용(사진 가운데) JOH 대표와 직원들이 잡지‘B’의 제작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 잡지‘B’제공
"우리의 시각이 없어지면 잡지의 생명도 없어진다"
잡지를 만드는 데는 보통 3~6개월 정도 걸린다. 이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고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조 대표는 "관점이 희석되면 잡지의 생명도 없어지는 것"이라며 "이 때문에 외부 영향에 휘둘리지 않으려 하고 있고, 광고와 청탁에서도 자유로워지려 한다"고 말했다. 최근엔 브랜드 측에서 먼저 취재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기준에 맞지 않으면 사양한다. 광고의 영향이 절대적인 잡지 판에서 광고를 애초부터 비즈니스모델에서 제외한 것은 무모하다고도 할 수 있는 실험이었다.
잡지 이름 'B'는 '브랜드(brand)'와 '밸런스(balance)'란 의미를 함께 담았다.
"저희가 보기에 좋은 브랜드란 소비자 관점에서 봤을 때 균형이 잘 잡힌 브랜드입니다. 균형이 잘 잡혔다는 것은 기능성과 아름다움, 가격, 브랜드 또는 제조사의 철학 등 4개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하죠. 이 중 철학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캠핑 용품 '스노우피크'는 가격은 비싸지만 자연보호를 향한 독특한 철학이 선정 배경이었다. 보통 자연보호 하면 재활용을 생각하지만, 이 브랜드는 아주 튼튼하게 만들어서 버릴 수 없게 하는 게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강하고 고급 소재를 쓰고, 한번 사면 평생 보증 서비스를 한다고 한다.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B는 국내 잡지업계에서는 이례적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보통 7000~8000부, 많을 땐 1만부를 찍어 미국·영국·일본에 배포한다. 창간 초기 영국 '마그마북스' 서점에 들러 잡지를 보여줬다. 담당자의 반응은 호의적이었고, 즉시 공급이 시작됐다. 지난해 11월엔 미국에 진출했고, 일본엔 쓰타야 서점에 공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어판 판권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조 대표는 "창간 때부터 해외 시장을 염두에 뒀다"며 "브랜드의 진솔한 스토리는 세계 어느 나라 독자에게도 먹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구독자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은 1호부터 모든 잡지를 다 가진 수집가적 마니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한 달에 팔리는 물량 중에서 과월호에 대한 수요가 40%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3년 동안 다룰 브랜드를 이미 다 선정해 놓았다"며 "한국 제품도 가능하면 1년에 한 번 정도는 소개한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내 잡지계에 역발상의 새 바람을 일으키는 B의 실험이 한때의 유행으로 그칠지, 지속 가능한 모델로 살아남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Article in brief 잡지 'B'에서 얻는 경영 시사점① 소비자의 관점에서 시장을 재정의하라. 흔해 빠진 상품 정보도 광고주 관점이 아니라 소비자 관점에서 보여주니 훌륭
한 정보가 된다.
② 기존 비즈니스모델의 성공 공식을 과감히 탈피하라.광고에 의존하던 기존의 잡지 비즈니스모델에서 벗어나니 새 세상이 열리더라.
③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 (Less is more.) 하나의 잡지에 단 하나의 아이템만 다루니 깊이가 생기고 사람들이 소장용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④ 중소기업도 처음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하라.처음부터 세계 어느 나라 소비자에게도 통할 제품을 기획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