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지식인 故 리영희의 <"대화>중에서 /대담 임헌영
李泳禧/한양대학교 문리대 교수 역임
1926년생 /합동통신 외신부기자
목숨을 걸고 밤낮없이 전투가 계속되는 마당에서는 싸우는 군인으로서의
경험 이외의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특이하고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민간인 사회와는 다른 극한 상황이라 특이한 사건들이 많으니까.
나는 경외심(敬畏心) 깊은 부끄러움.속에서 귀중한 깨우침을 얻은 경우가
세번 있어요 그 세번 다 군대에서였지.
그 첫째가 진주기생과의 사건입니다 지리산 전투의 와중에서 나는 운명과 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 전투가 끝난 후에 연대장이 장교들을 위로하겠다고
진주시내의 허름한 술집에 모아놓고 회식을 베풀었지 어쨋든 진주기생"이라는
여자들을 모아놓고 회식을 한거지.
그날 저녁 회식에서 연대장옆자리에 앉게 됐어. 연대장도 별스스럼없이 나를
대했지. 그날도 연대장과 내가 진주기생이랍시고 모아온 여자를
차지하게 됐지. 물론 10여명의 다른 장교들도 오래간만에 분내나는 술집여자
들을 하나씩 옆에 앉히고.
그렇게 한참 마시다가 정신을 잃었어요,깨어보니 여자가 사라지고 없더라고.
한참 취기가 오르고 있을 때 이 자리가 끝나면 우리 따로 가자고 했는데 어느새
사라졌더라구.!전투지에서는 위관장교도 마치 장군행세를 하게 마련이예요.
그래서 그때 그 기생이 뭐라고 대답했든지 간에 이쪽은 상대방이 응했다고 믿
어버린 거지
화가 나서 집이 어딘지 대충 물어보고 지프차를 몰고 쫓아갔어요, 남강가 절벽에
있는 보잘것 없는 초가집에 살고 있더구만.싸리문을 열고 들어가서 처음엔 공손
하게 여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했는데 아무런 기척이 없어. 괘씸하다고
생각한 나는 조금 소리를 높혀서 나오라고 했어. 그래도 안나오길래 "약속을 해놓고
왜 아무말 없이 사라진거야? 라고 큰 소리로 따지니까 그제야 창오지 문이 삐꺽
열리더니 돌축대 툇마루에 나와 선 여자는 아무말도 하자않고 나를 내려다 보면서
미동도 않고 있더라고.
마침 그때가 보름달이라서 중천에 뜬 달이 교교한 빛을 여자의 정면으로 내리 비추고
있었어. 아무 말도 안하면서 그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서있는 그 여인은 형용할 수
없이 고고한 모습이었지.
나는 차츰 그 여성에게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어. 상대방과의 위상이 역전되는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더라고. 술이 확!깰정도로 상대방의 자태가 너무나 도도
하고 심지어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로 보이기까지 했어요.
보잘것 없는 기생.그저 술따르는 여자"가 아니라 위엄에 싸인 존재의 氣에 압도된 나는
순간 허리에 찬 권총을 빼들고 마당밖으로 한 발을 쏘았어요.적막한 밤에 그 소리는
남강 위로 멀리 메아리로 퍼져나가더군. 그리고는 여자를 향해서 내려오라고 소리
질렀어.
당시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에 나선 위수령부 장교라고 하면 소위의 계급장만 달아도
이순신 장군쯤이나 된것처럼 우쭐했던 그런 시절이예요. 게다가 총도 한발 쐈으니
제가 논개가 아닌 바에야 그까짓 기생이 버선발로 달려 내려와 무릎꿇고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지
그런데 그렇지 않아.여자는 그런 판국에도 자세하나 흐트러짐없이 그대로 조용히
버티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면서 훈계를 해요.
"그렇게 사람을 총으로 겁을 줘서 마음데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젊은
장교님은 나중에 큰 분이 되겠지만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기생은 강요당해 아무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나는 그 훈계에 氣가 죽어버렸어.그래도 나는 대학을 막 나온 22세의 순진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이에요
내가 얼마나 왜소한 인간인가? 보잘것 없는 술집여자라고 업신여긴 상대방의 그 당당
한 기백이 인간적으로 얼마나 위대한가?나는 그 기생에게 정신을 차릴수 없을만큼
압도당했어요. 나는 큰 절을 하고 깊이 사죄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지프차를 몰고
돌아왔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인간의 크기.도덕적인 크기를 깨닫게 해준 사건이었어.
고귀하기까지 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기회였어요.
임헌영./ 아! 정말 인상적인 일화네요 인간의 값을 직업이나 신분.또는 학벌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본질로 따지는 방법론이지요.
리영희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분단을 넘어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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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한줄/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