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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노래
삼상 2:1-11
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9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삼상 2:1-11 / [한나의 찬양] 한나는 아들을 주께 바치고 이렇게 찬양하였다. `여호와여, 주께서 제 마음을 기뻐 뛰게 하시고 주께서 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으며 주께서 제게 힘을 주셨습니다. 주여, 이제야말로 저도 원수들 앞에서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도와주셨으므로 이제는 제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 거룩하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밖에는 어디에도 거룩하신 이가 없습니다. 약한 자를 반석처럼 보호해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3) 원수들아, 너희는 그토록 떠들며 자랑하지 마라. 너희들 생각대로 뻐기며 건방지게 굴지 마라.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지 주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주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동을 달아 보고 더러운 것마다 심판하신다. 4) 강한 사람들에게서는 지닌 무기도 빼앗아 부러뜨리지만 약하고 기죽은 사람들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 5) 부자들은 밥먹기 위하여 품을 팔아야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울며 탄식하지 않아도 영영 굶주림을 잊고 잔치하게 되었다. 자식이 없던 여인은 일곱 아들을 낳지만 자식이 많던 여인은 한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죽는다. 6) 주께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어 사람을 지하로 내쫓기도 하고 다시 끌어 올리기도 하신다. 7) 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신다. 8) 주께서는 억울한 사람을 불쌍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도 하신다. 주께서는 천대받는 자들을 일으켜 존귀한 무리가 되게 하시고 멸시받던 자들에게 영예로운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신다. 온 세상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지어 흔들리지 않는 터전 위에 올려놓으신 분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9) 주께서는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다. 그러나 주께 대항하는 자들은 캄캄한 인생에서 헤메다가 죽게 하신다.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승리할 수 없으며 10) 여호와께 맞서는 사람은, 누구든지 깨어지고 만다. 그런 원수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주께서 하늘 우레로 벼락을 치실 것이다. 주께서는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드는 왕을 뽑아 앉혀 그에게만 큰 권세와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신다.' 11) [성소에서 일어난 비행들] 한나의 찬양이 끝나자 엘가나는 가족들과 함께 고향 ㄱ) 라마로 돌아갔고, 어린 사무엘은 실로의 성소에 남아 엘리 밑에서 제사장의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ㄱ. 예루살렘 북쪽 약 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나는 모정을 딛고 지켜내는 자신의 서원을 통해 더 깊은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니(1-2) 한나의 기도는 히브리의 전통문학적 표현 방식인 3중의 짝 맞춤 시로 시작합니다. 첫째 짝 맞춤은 괴로움(1:10)과 슬픔(1:15)에서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둘째 짝 맞춤으로는 짓밟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1:6) 내 뿔 곧 자부심이 여호와로 인해 높아졌다고 노래합니다. 셋째 짝 맞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처량한 신세에서(1:13) 내 입이 내 원수 앞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며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나의 구원의 기쁨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의 기쁨을 보여줍니다. 특히 한나는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기 거룩하신 이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온전함의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 완전성과 절대 구별성을 가리킵니다(레 11:29-47). 그 거룩하신 이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변함없는 주시며 언제나 피할 수 있는 분이라는 점에서 그분은 반석이라 고백합니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3-8) 한나는 자기를 괴롭혔던 이들에게 다시는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고 기억하시는 분이시기에 공평의 저울에 달아 판결하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오랜 기간동안 비천과 비참의 처지에서 몸부림의 세월을 보내야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될 아들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시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세상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만물을 조성하셨고, 만물을 유지, 운행, 섭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하였습니다(롬 11:36).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9-11) 또 한나의 노래 중 거룩한 자는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깨달은 한나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자들을 지키실 것을 확신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악인들은 흑암 중에서 잠잠할 뿐입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은 자기들 힘으로 이길 자 없고 오히려 산산이 깨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을 도구로 심판을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소망 안에서 한나는 자신의 서원을 지켜냈습니다.
적 용 : 한나의 간증적이고 구속사적인 찬양시를 읽으면서 어떤 부끄러움이 밀려오나요? 주옥같은 그녀의 찬양 시를 묵상하면서 항거할 수 없는 거룩한 감흥들은 무엇일까요?
아론과 엘리, 또 위대한 사사이자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의 아들들이 타락하고 부패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실망과 두려움을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부모가 신앙으로 바로 서서 자녀에게 말씀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통해 신앙의 길을 가르치고 보여주는 것이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부모가 먼저 믿음의 터 위에 서서 자녀들이 주 안에서 잘 자라도록 기도하고, 축복하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호크마 주석
=====2: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 한나의 기도는 '내 마음니...'(1절)부터 '...뿔을 높이시리로다'(10절)까지 이어진다. 진정 '마음이 슬픈 여자'(1:15)의 기도를 기억하사 아들을 허락하신 여호와께 자기 아들을 영영히 드린루(28절), 한나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내적 감정을 토로한 이 기도는 단순한 감사의 찬양을 넘어 예언적이고 구속사적 성격을 지닌 찬양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시였다. 따라서 이 노래는 기도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주에 대한 감사의 증거요, 주의 영광의 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Lange). 이러한 점에서 '한나의 기도'-여기서 '기도'(* ,테필라)는 '기도'(prayer)란 뜻외에 '찬가'(hymn),'기원'(supplication)이란 뜻도 지닌다 - 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 (1)개인적인 은혜의 체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신적 경륜하에 진행될 신국적(神國的)인 역사에로 확대 발전된다(Keil). (2)현세적인 은혜와 구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장차 그리스도의 나라와 교회의 승리를 예언하는 미래적인 영역에로 확대 발전된다(Pulpit com-mentary). (3) '구약 교회의 송가'라고 불리워지는 '한나의 기도'는 후일 '마리아 찬가' (눅 1:46-55)의 예표가 되며, '사가랴 예언'(눅 1:67-79)의 배경이 된다(E.J. Young). 그리고 구약 시대에 이와 비슷한 감사와 구속의찬가로서 '모세와 미리암의노래'(삿 5:1-18, 21)와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삿 5:1-31)가 있다. 내 마음...내 뿔..내 입 - 이것은 히브리 문학에서 전형적 수사 기법으로 사용되는 3중 대구법적(三重 對句法的)푸현 방식이다. 한나는 이같은 표현을 통하여 자신에게 베풀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벅찬 감격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사무엘이 출생함으로써,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1:10)과 슬픔(1:15)에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뿔'은 먼지 가운데서 짓밟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1:6) 다시 높아지게 되었다. 더구나 그녀의 '입'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처량한 신세에서(1:13)다시 크게 열려져 자신의 원수에 대하여 여호와의 은예를 마음껏 알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뿔'(* , 케렌)은 이것 달린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높이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다니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긍지', 등을 상징한다(신 33:17 ; 시 75:5 ; 89:17 등). 따라서 무자시(無子時)에 대적 브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 본절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거룩'(Holiness)에 대하여 찬송한다. 여기서 '거룩'(* , 코테쉬)은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으로 온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절대 완전성과 절대 구별성를 가리킨다<레 11:29-47 강해, 성경에 나타난 거룩하신 분으로 들어서 알았겠지만, 사무엘을 낳게된 기도의 응답 사건을 통하여 이제 하나님의 그 속성을 신앙의 준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욥 42:5). 이는 주 밖에 다른이가 없고 -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두번째 고백은 하나님의 절대 존재성, 곧'유일성'(唯一性)이다. 그런데 이 유일성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이겠지만(시 86:10), 또한 앞에서 언급된'거룩성'의 근거이기도 하다(R. Payne Smith). 당시 이방신을 겸하여 섬기는 풍조가 만연해있던 사사 시대 말기의 타락한 상황 속에서(삿 3:6 ; 6:25), 하나님을 유일하신 분으로 고백한 한나의 신앙은 놀라운 것이었다. 신 4:35 ; 6:4 주석 참조.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한나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의 '신실성'(信實性)이다. 왜냐하면 '반석'(Rock)이라는 단어는 구약 전체를 통하여, 언제나 변함없이 성도의 구원을 궁극적으로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상징적 명칭으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신 32:4 ; 시 19:14 ; 합 1:12). 한편 혹자는 '반석'(* , 추르)이라는 단어를 '산'으로 번역함이 더 타당하다고 말한다(Klein). 그 이유로 그는 (1) '산'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의 신실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시 27:5 ; 61:2), (2) 본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이라 할 수 있는 우라릿 단어가'산'을 뜻한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그러나 팔레스틴이라는 지리적 배경 하에서 '반석'은 급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언제나 가장 쉽게 피신할 수 있는 도피처요 안식처라는 점에서 '반석'이란 번역은 적당하다. 신 32:4 주석 참조.
=====2:3
교만한 말...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한나의 대적 브난나가 그랬듯이(1:6),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나 섭리를 무시한 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또한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마음이 슬픈자의 마음을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심령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말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한편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동의어인데, 여기서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이시라 - '지식의 하나님'(* , 엘 데오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 이말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변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Klein). 사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다<1:6, 7>. 또한 브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 서는 브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도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 16:2 ; 21:2 ; 24:12).
=====2:4-8
본문에서 한나는 인간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홀로 주관 섭리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거룩성과 전지성을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2:4
용사의 활은 꺾이고 - 고대 사회에서 '활'은 용사가 자신의 능력을 과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도구이자, 또한 무엇보다도 귀중하게 생각하는 신뢰의 대상이다. 그리고 '꺾이다'(* , 하타트)는 '산산히 부서지다', '깨지다'란 뜻으로서, 사람이나 국가가 안팎으로 철저히 붕괴되어 도저히 소생 불가능하게 된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 한다(렘 50:2 ; 51:56). 따라서 본 구절은 '활을 거머쥔 용사'로 상진된 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며, 또한 그러한 자신의 힘을 괴시하기를 일삼는 교만한 자들이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징벌에 따라(3절), 완전히 쇠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시 34:21 ; 37:35, 36 ; 잠 14:32).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 '넘어진 자'는 힘이 없고 연약하여 힘센 악인들 곧 활 가진 용사들에 의해 무참히도 짓밟혔던 자들을 가리킨다(Klein). 그리고 '힘으로 띠를 띠도다'란 말은 넘어진 자가 이제 일어나 전쟁을 준비하고 출전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힘을 다시 회복한 활기차고 강건한 상태를 가리킨다(엡 6:14). 한편 자유주의 고등 비평가들(Ewald, Pfeiffer, Eissfeldt등)은 본절과 10절 등을 근거로, 한나의 기도 속에 '국가적인 전쟁 및 승리'의 주제가 부각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한나의 기도송'(2:1-10)은 한나보다 훨씬 후대, 곧 왕정 체제하의 시기에 편집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문서설(文書設)의 입장에서 본 독단적인 견해일 뿐이다. 왜냐하면 본절에서 언급된 바 '용사'와 '넘어진 자'의 개념은 국가적인 강대국과 강자와 겸손한 약자의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절에서 언급된 '왕'의 개념 역시 반드시 왕정 체제하의 실제적인 어떤 왕을 전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는 이스라엘을 의(義)로 통치할 이상적인 왕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왕의 개념은 한나 이전 시대부터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창 17:6 ; 신 17:14-20 ; 삿 8:22 ; Esward J. Young, Introduchion to Oid Testa-ment).
=====2:5
유족하던 자들은...품을 팔고 - 고대 사회에서 호구지책(瑚口之策)으로 품을 팔며 살아가던 사라들의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때 먹을 것이 많음으로 교만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만홀히 여기던 '유족하던 자들'은 때가 되면 하나니의 징벌을 받아 위와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 이것은 비록 지금은 가난하지만, 하나님께 신실한 자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결코 배고픔을 모르는 유족한 상태에 이를 것임을 가리킨다(눅 16:19-31).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 이말은 일차적으로 한나 자신이 체험한 기쁜 감격을 노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특별히 여기서 '일곱'은 '신적 충만(완전) 수'를 상징하는 숫자이니 만큼(Kail), 이는 곧 자녀 출산과 간련해서 한나가 받아 누린 하나님의 최대 축복을 상징한다(룻 4:15). 비록 당시에 한나는 사무엘 한 명만을 자식으로 낳았지만, 그러나 그 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살핌 가운데 낳은 자식이었으므로, 그 당시 한나는 마치 '일곱' 아들을 낳기라도 한듯이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결국 이말은 이전에 한나가 당했던 것처럼 많은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슬픈 마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하시고 큰 기쁨으로 축복해 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 이것은 분명히 브닌나에 대한 언급일 것이다. 즉 브닌나는 한나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이제 교만한 말을 더 이상 떠벌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것은 실로 그녀가 쇠약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더 나아가 이말은 브닌나와 같이 자신의 자랑거리를 가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모든 악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자랑하던 것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더욱 쇠약하게 될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그런데 많은 성경 주석가들(Jerome, Augustne, Patrick, Wordswo-rth등)은 본 구절 속에서 영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즉 브닌나와 한나의 관계를 사도 바울이 구속사적으로 서술한 바 하갈과 사라의 관계로 이해하여(갈 4:21-31), 곧 브린나는 많은 자녀가 있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소망없는여인으로, 그리고 한나는 비록 처음 잉태치 못했으나 약속을 받은 소망있는 여인으로 각각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나를 장차 많은 열매를 맺을 기독 교회의 모형으로 이해하고 있
=====2:6
본절은 동의적(同意的) 대구법 방식의 표현이므로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와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도다" 는 동일한 의미이다. 이같은 수사학적 표현은 동의적 내용을 반복 엄급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히브리 시(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시 1:1 ; 2:1).따라서 여기 한나의 기도 속에서 '음부에서...올리기도,라는 언급이 있다고 해서, 한나가 부활 사상에 대하여 말했다고는 복 수 없다. 왜냐하면 본절을 대구법적 표현으로 보고 그 의미를 고찰할때,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라는 표현도 그앞부분처럼 단순히 모든 인간의 생사(生死)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절을 통하여 한나는 이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생사 문제를 언급한다. 이로써 그녀는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 섭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재권(主宰權)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신 32:39 ; 시 30:3). 한편 '음부'(* , 스올)는 원래 '구멍'이나'땅 속에 파놓은 지하실'을 가리켰지만, 성경 전반에서는 보통 '죽은 자의 사후(死後)처소'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창 37:35 ; 44:31 ; 시 16:10). 자세한 내용은 창 37:35 주석 및 욥 26:5-14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을 참조하라.
=====2:7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빈부(貧富)의 문제 및 귀천(貴賤)의 문제 역시 전적으로 주장하시는 분임을 증거해 준다.
=====2:8
진토...거름더미 - 이 표현들은 극도의 수치와 천대 가운데 있는 비천한 자의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Keil). 그리고 영적인 의미에서는, 자신을 철저히 부인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는 겸허한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자들을 그러한 비천한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영화롭게 면류관을 쒸우신다. 그 실례로 우리는 요셉과 모세, 다윗과 다니엘 등을 들 수 있다. 진정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노예 상태의 감옥으로부터 귀족 상태의 궁궐로 인도하셨고, 또한 보잘 것 없는 목자의 지팡이 대신 영광스러운 왕의 홀(笏)을 쥐어 주셨던 것이다(Matthew Henry' s Commentary, Vol. . p. 286).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 '기둥들'(* , 메추킴)은 여기와 14:4에 나오는 단어로서 원래 '거대한 바위'나 '바위산'을 뜻한다(Klein). 즉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것을 세상(땅)의 초석(礎石)으로 본 것이다<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그런데 바로 그 초석을 놓으신 분이 여호와시요, 또 관리하시는 분도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라'는 말은 우주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나타내는 말로, 곧 여호와께서 이세상 만물에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다.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 이것은 이 세상이 기둥에 받쳐져서, 공간에 달려 지탱되고 있다고 보는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상과 잘 부합된다(욥 26:7). 결국 위와 같은 사실 또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대해서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것은 곧 이 세상의 기초를 놓았을 뿐 아니라, 그 기초 위에 만물을 조성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그 만물을 유지. 운행.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후일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2:9
거룩한 자들 - 여기 '거룩한 자들'이란 말은 원문상 '경건한 자'(* , 하시드)란 뜻의 단수 형태로 나타내는데, 곧 신분상의 의인이 아닌(창 6:9 ; 롬 4:3),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윤리.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경건한 삶의 소유자를 가리킨다(창 6:9 ; 마 1:19). 한편 이 단어는 후일 신구약 중간 시대 때에 '하시딤'이라고 불리던 일단의 '경건한 무리들'에게 적용되었다. 이 '하시딤'들은 헬라의 세속주의 내지 혼합주의를 배격하면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유대적 전통을 지키려했던 자들로서, 이후 바리새인들의 뿌리가 되었다(Bruce). 발을 지키실 것이요 - 성경적 표현상 '실족' (신 32:35)과 '넘어짐'(시 116:8)은 곧 패배나 차락을 상징하는 말들이다. 따라서 '발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패배나 타락으로부터의 안전한 보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Klein). 악인으로 - 여기서 '악인'(* ,레솨임)은 신분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모든 면에서 의인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사악한 자들을 가리킨다(시 1:1 ; 잠 28:4).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 이표현은 (1) '흑암'이 성경에서 종종 '음부'(6절)처럼 죽음 혹은 멸망을 상징할 때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시 31:17), 이 말은 악행자들에 대한 죽음 또는 멸망의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 여기서 '대적하는'(* , 라야브)이란 말은 법정적(法挺的)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즉 이 단어는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강력히 항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를 향하여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는 교만한 자를 가리킨다. 산산이 께어질 것이라 - 여기서 '깨어질 것 '내리누르다'란 뜻으로서' 교만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단 5:20). 하늘 우뢰로...치시리로다 - '우뢰'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경우, (1) 당신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현현'(출 19:16-20 ; 시 18:7-15 ; 합 3:4-15)을 상징하고 (2) 당신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징벌'이나'심판'(77:10 ; 계 11:19)을 상징한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 우뢰 그들을 치시로다'라는 말은 대적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성군(다윗)을 통한 모든 이방 세력의 정복을 암시하고(삼하 8장), 궁극적으로는 메시야(그리스도 - '기름부음 받은자'란 뜻)를 통하여 모든 사단의 세력을 꺾은후 이룩될 하나님 나라의 의(義)의 통치(고전 15:25)를 가리킨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 이것 또한 앞의 문구와 같이 (1) 근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의로운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실 것과 (2) 원시적으로는 영원한 평강의 왕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다(Aalders, Goslinga). 이런한 점에서 '한나의 기도송' 은 메시야적 사상을 담고 있는 복음적인 예언의 노래요, 성령의 감화송이다(Wordswo-rth).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불을 높이시리로다 - 하나님께서 당신이 세우신 왕의 권위를 높이겠다는 뜻이다. 한편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자'(* , 마시아흐)는 왕을 가리킨다(왕상 1:30). 그런데 성경은 왕 이외도 또 다른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 대하여 언급하다. 즉 선지자(오아상 19:16)와 제사장(출 40:13)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실현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구별되어 임명된 자들이다.따라서 이스라엘의 왕, 선지자, 제사장은 장차 영원히 기름 부음을 받을 자, 곧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서 완전히 실현시키실 '메시야'(Mes-siah)-헬라어로는 '그리스도'( )-이신 예수를 예표하는 인물들로 볼 수 있다.
=====2:11
그 아이는...여호와를 섬기니라 - '섬기니라'(* , 솨라트)는 특별히 제사장적 직분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이다(18절 ; 3:1 ; 출 28:35, 43 ; 29; 30 ; 민 1:50). 그런데 여기의 '섬김'은 결코 일순간적인 의미가 아닌, 엘리의 사망 때까지 혹은 사무엘의 전생애 기간 동안의 봉사를 가리킨다(Smith, Fay). 엘리 앞에서 - '엘리 앞에서'(before Eli, KJV)라는 뜻으로, 곧 '엘리의 감독 하에서'(under Eli, NLV)라는 의미이다(민 3:6). 그 이유는 당시 실로 성소의 대제사장은 엘리(Eli)로서, 그가 성소의 총책임자였기 때문이다.
< 설 교 >
역사를 반전시키시는 하나님
삼상 2:1-10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 전체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는 엘가나라 하는 사람의 아내였습니다. 엘가나는 한나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띄고 있었습니다.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서 그런지 남편은 브닌나라는 또 한 사람의 아내를 두고 있었고 그 아내는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슬픔은 더욱 컸습니다(삼상1:8, 15). 게다가 자식을 많이 낳아주었으면서도 남편으로부터 한나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던 브닌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한나를 깔보며 심히 격분시켜 괴롭게 했습니다(삼상1:6, 7, 10). 한나는 속이 상해 식사도 안 하고 원통해하며 울곤 했습니다(삼상1:7, 10, 16).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그 문제를 하나님과 담판지어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울며 기도했습니다(삼상1:9-10, 15). 그녀는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삼상1:11).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전에서 간절히 기도한 한나를 생각하시고 그녀에게 아들 사무엘을 낳게 하심으로써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삼상1:19-20). 한나는 사무엘이 젖떼기를 기다렸다가 젖을 떼자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어린 사무엘을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전으로 데리고 가서 제사장 엘리의 손에 맡겨 하나님을 섬기게 했습니다(삼상1:22-28, 2:11).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27-28을 보면 한나가 엘리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거기서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때 한나가 하나님께 경배하며 드린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한나는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음을 기뻐하며 찬미하고 있습니다. 1절을 봅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기서 "뿔이 높아졌다"는 것은 부끄럽고 업신여김을 당하던 상태에서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머리를 드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또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다"는 것은 자식을 많이 낳은 브닌나가 아이 없는 자기를 비웃으며 격분케 하는 모든 말에 입을 열어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하던 처지에서 이제는 얼마든지 말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셔서 즐겁고 기쁘다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에서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한 말에서 한나는 더 이상 브닌나를 자기의 상대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음을 드러냅니다. 말로 한나를 격분케 하고 원통하게 만들던 브닌나가 이제는 감히 한나를 무시하고 괴롭힐 수 없이 그 존재가 미약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문의 기도는 한나가 자식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겪어야 했던 슬픔과 원통함과 괴로움으로부터 자기를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개인적 기도이고 개인적인 승리의 노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단지 한 개인의 기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아들을 얻고 기뻐하는 한 여인의 개인적 기도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단어들과 언급들이 더 많이 들어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몇 구절만 예를 들면, 4절에서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한 것이나, 8절에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한 것이나, 10절에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한나의 기도는 한나 개인의 삶의 여건이 달라졌음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넘어서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뒤바뀌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적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해 수치와 멸시를 당하며 슬픔과 고통의 날을 보내던 한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 사무엘을 낳음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당당하게 머리를 들 수 있는 여인이 된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변화의 징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은총을 누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충성과 순종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주위의 이방족속들로부터 멸시와 침탈에 시달리는 굴욕적인 상태에서 다윗왕의 출현으로 만방의 경의와 칭송을 받을 영화로운 왕조로 변화될 것임을 예견케 하는 징표로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훗날 다윗왕의 출현을 미리 알았던 몰랐던 하나님께서는 그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하신 당신의 뜻을 미리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나의 기도는 개인의 기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승리를 노래하는 예언적 찬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노래]라고 일컬어지는 이 기도는 교회가 [마그니피카트(Magnificat)]라고 부르는 [마리아의 노래]와 쌍벽을 이루는 여인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2천년 역사를 통해 교회의 노래가 된 [마리아의 노래]에 영향을 미친 것이 한나의 노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노래]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예고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는(눅1:26-37) 친족 엘리사벳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눅1:39-41) 큰 소리로 말하기를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2-45) 하자 이에 응답해서 마리아가 부른 노래였습니다. 눅1:46-55절에 나오는 노래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우리는 [마리아의 노래]가 [한나의 기도]와 그 내용과 구조에 있어서 매우 흡사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한나의 기도는 개인의 구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나아갔고, 마리아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구원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한나의 기도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원리를 보여주며, 특정한 민족의 특정한 시대의 구원의 진리뿐 아니라 모든 시대에 있어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나의 기도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반석처럼 신뢰할 수 있는 견고하고 불변하는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이시라고 2절에서는 노래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절 하반절에서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합니다. 여기서 "행동"이란 인간의 악한 짓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악한 행위를 다 알고 계시며 정확하고 공의롭게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했습니다. 인간사회의 만사가 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합니다. 생명과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합니다. "발을 지킨다"는 것은 미끄러지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미끄러짐은 패배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들로 하여금 결코 패배함이 없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도록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한다"는 말은 죽어서 조용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라"는 것은 악인들이 아무리 자기들이 옳고 잘났다고 떠들어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의 심판을 내리시고 멸망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안에 그의 백성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당할 자 없는 하나님의 힘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항상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9절 하반절에서 이미 하나님께는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다" 했고, 10절 상반절에서도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라" 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에게 순종하는 이들은 어디에서도 영원히 복될 것임을 10절 하반절에서는 이같이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한나의 기도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생명과 역사의 주인이시며 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히 한나의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은 역사를 반전시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식을 낳지 못해 슬퍼하고 원통해하며 괴로워하던 여인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머리를 드는 여인으로 역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입을 통해 개인의 처지뿐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를 반전시키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게 하십니다. 4절에서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합니다. 5절에서는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합니다. 8절 상반절에서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출생을 통하여 한 여인의 삶을 반전시키셨고, 다윗의 출현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반전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태어나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역사와 우리 모두의 삶을 반전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반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반전시키셨습니다. 저주와 죽음의 자리에서 구원과 영생의 나라에로 반전시키신 것입니다.
이 역사를 반전시키시는 하나님과 그가 보여주신 반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위로와 소망과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나처럼 우리도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뿔이 하나님으로 인해 높아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우리를 적대시하는 자들을 향하여 크게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의지할 반석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해 심히 교만한 말을 하며 오만하게 행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십니다. 악한 자들의 모든 행적을 정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금 권세를 휘두르는 자들의 활은 꺾이고 지금 그들에 의해 넘어진 이들이 힘으로 띠를 띠게 될 것입니다. 지금 불의하게 풍족한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게 되고 의롭게 주리던 이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록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정직하여 가난한 이들을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깨끗하여 빈궁한 이들을 거름더미에서 올리셔서 귀족처럼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며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구석구석까지 의의 심판을 내리시고 택하여 세우실 지도자에게 힘을 주시며 그가 머리를 높이 들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이 땅의 모든 주의 백성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의 백성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오만하여 떠들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적대시하는 모든 자들도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망할 것입니다. 오늘의 권세가 탐이 나서 악하고 오만한 자들 편에 서거나, 아니면 그 권력이 무서워서 입을 닫고 지내는 자들은 특히 이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억지로 돌려놓은 역사나 어리석어서 망쳐놓은 역사도 하나님에 의해 반드시 반전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잘못되어가고 있는 이 나라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반전시키시고 바로잡아주시기를 간구하는 모든 주의 백성은 한나처럼 주의 전에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궁극적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서 또한 오늘 우리 시대가 염원하는 민족의 참된 승리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무엘과 같은 영적 지도자를 주시며 이 나라를 다윗 때의 이스라엘처럼 강성하게 하시고 솔로몬 때의 이스라엘과 같은 영화를 누리는 나라로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삼상 2장 1~11절 / 이성우목사(왜관교회)
여러분께서 기도해 주셔서 필리핀 선교지방에서 있었던 감리사 협의회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새벽과 저녁 시간에는 감독님을 모시고 필리핀지방 연합집회가 은혜롭게 진행되었으며, 그 지방 감리사 이, 취임식에 참석도 하고 감리사 협의회도 있었습니다. 낮 시간에는 막간을 이용해서 가까운 곳 여행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처음 가본 필리핀이라서 모든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금년도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지나간 상반기 6개월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깊이 감사하면서 새로운 6개월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 중에 그려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현대의 가장 큰 비극 중에 하나를 말한다면 감사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평과 불만 속에 살아가게 되고 사회는 점점 각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맥추감사절 절기를 지킴으로 감사를 회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감사가 회복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년 세 차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해방 기념 절기이며, 맥추절은 유월절이 지난 다음 7주 후에 보리와 밀을 추수하여 그 첫 열매를 드리는 절기이고, 수장절은 마지막 곡식을 거두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맥추감사절을 지키라고 하신 걸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의 시작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기억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셔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도우심으로 달려가도, 걸어가도 피곤치 않도록 강건하게 하셨습니다. 성도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감사의 표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영어에서 ‘감사하다’라는 단어인 ‘thank’는 ‘생각하다’라는 단어인 ‘think’라는 말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감사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데서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서 받은 복을 생각하고 또 앞으로 주실 은혜와 복을 미리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들을 생각하면서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 참 감사입니다. 표현이 없는 감사는 참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지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게 되면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도 행복하지만 그 표현을 전해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가 잘 되기를,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더 큰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감사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축복의 통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통해 우리에게 더 큰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는 마치 눈을 뭉쳐서 눈사람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눈 덩이를 자꾸만 굴리면 점점 더 커져가는 것처럼 작은 일에 감사하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더 큰 감사의 조건을 만들어 내게 되고 그래서 또 감사하게 되면 자꾸만 감사의 조건이 커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무엘상 2장 1절~11절까지의 말씀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라고 하는 여인이 본래 아이를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이었는데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사무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고 나서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1장과 2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신앙생활 중의 중요한 요소인 감사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선 사무엘상 1장은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는 내용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으로 드디어 한나가 잉태하게 되고 사무엘이 태어나게 되자 한나가 그 어린 사무엘이 젖을 떼기까지만 데리고 키우다가 약속한 대로 어린 사무엘을 데리고 실로에 있는 성소에 찾아가서 엘리 제사장에게 사무엘을 바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2장의 내용은 한나가 사랑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친 후에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감사를 표현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과 함께 엘리 가문의 몰락을 예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신앙생활의 원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고통과 시련은 있을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고통과 시련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아가는 연결고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심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진정한 감사는 헌신적인 삶의 실천으로 완성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1절~10절까지는 한나의 감사기도를 통한 신앙고백이며, 마지막 11절은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어린 아이인 사무엘은 제사장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한나의 감사기도가 헌신적인 삶의 실천으로 완성되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나의 감사는 참된 감사였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특별히 1절 말씀을 보면 한나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고백하면서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자신에게 임한 감사의 조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분명하게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며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감사의 출발은 내게 임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의 나머지 내용들은 한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자기에게 감사할 조건과 행복한 삶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신실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인생의 상황을 얼마든지 반전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고 자기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분이심을 간증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의 고백을 갖게 되는 것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감사로 표현하게 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본문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감사는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이끌어 가는 기관차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맥추감사절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라시며 그것을 성숙하고 참된 감사로 표현함으로써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금년 맥추감사절을 지키시면서 참된 감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더 큰 복을 받아 누리시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나의 노래
삼상 2장 1~10절 / 양정근목사(정윤교회)
사무엘서에 나오는 주요등장 인물은 한나, 사무엘, 사울, 다윗입니다. 그중 오늘 한나의 이야기는 사무엘서를 여는 대문(입구)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불임 여성 한나
역사적으로 볼때 한나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시기는 무척 혼란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을 나와 40년동안의 광야생활과 가나안 정복전쟁을 거쳐 그 땅에 정착했지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정부 상황이었고 지파들간의 싸움, 종교적인 타락과 변절, 외세의 침략등으로 무척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의 한 가운데서 등장하는 여성이 한나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불확실한 민족의 운명 앞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해답을 불임 여성 한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가 풀어가야 할 여인 한나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도록 합시다. 한나가 시집온 가정은 어떤 집안입니까?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감동적인 족보를 가진 집안 출신입니다(1:1). 네 세대를 자세히 소개하는 것을 볼 때 그녀의 남편은 명문가 집안이고, 견실한 가계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합니다(1:2). 한나는 명문가의 집안에 시집와서 아쉬울 게 없지만 그녀는 불임입니다. 자녀가 없고 자녀를 가지리란 희망도 없습니다. 특히 이스라엘문화에서는 불임여성을 하나님께 복 받지 못한 여인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엘가나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아름다운 과거를 물려받았지만 아내를 생각하면 아무런 미래가 없습니다. 과연 우리 가정에도 미래가 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한나의 이야기는 갖고 있습니다.
아내 한나가 불임의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남편과 아내, 부부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습니다(1:4,5). 두 사람의 사랑에는 불임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그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 편견과는 달리 그녀의 아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그 모습 그대로 귀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을 아이낳는 하나의 도구로 여기던 그 시대에 엘가나는 아내를 달랬습니다.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니라(1:8)’ 그러나 아무리 남편이 다정다감하고 남편의 사랑이 크고 확실해도 한나의 불임은 남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한나의 기도
급기야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1:9,10). 한나는 자신의 문제 해결을 하나님에게서 찾고자 했습니다. 쓰라린 마음을 안고 흐느껴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한나를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던 제사장 엘리는 그녀를 오해했습니다(1:13,14).
그러나 한나는 제사장의 책망에 대하여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1:15)’ 제사장의 책망에도 주눅 들지 않는 이런 담대함은 그녀의 절박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만큼 그녀에게 있어 불임은 절박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의 중심을 헤아린 제사장 엘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17)’ 하나님의 중재자로서 제사장 엘리는 한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확증해 주었습니다. 제사장의 축복을 들은 한나는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 졌습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1:18)’
그리고 그 다음 장면입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1:19)’ 19절에 나란히 기록되어있는 두 동사를 주목해 주십시오 '동침하다'와 '기억하다‘라는 동사는 한 가지 행동에 대한 두 가지 양상입니다. 한나가 그녀의 남편과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하나님께서 한나가 요청한 것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임을 겪고 있는 여성이 아이를 가질 확률은 매우 낮습니다. 쉬운 일도 결코 흔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나의 이야기는 불임여성이 임신한다는 것이 하나님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생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야기는 하나님이 주도하여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불임여성 한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초대 합니다. 오늘 한나 이야기는 미래가 없고 희망도 없고 가능성도 없는 자신의 인생이야기에 하나님을 초청하였을 때 그 인생에 어떤 미래가 열리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을 초대하십시오. 특별히 여러분이 고난가운데 있을때 하나님께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추어서 인생이야기를 풀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한나의 감사 찬양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본문은 한나가 자신의 출산을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기도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기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기도로 받은 선물(아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뿔’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뿔’로 시작하여 ‘뿔’로 마칩니다.
(2:1)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서 뿔이란 가치, 위엄, 권능, 명예를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1절에서 한나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출산을 허락해 주셔서 자기 뿔이 높아졌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여자로서의 자신의 명예를 찾아주셨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10절에서는 하나님이 왕을 세우셔서 그 왕의 뿔을 높이실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 민족가운데 왕을 세우시고 그 왕에게 권능과 명예를 주실 것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자기 출산의 기쁨으로 시작한 노래가 자기 민족을 위해 세워질 왕을 기대하는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한나의 개인적인 사건을 넘어서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이 장차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을 예상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 땅에 오실 왕,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기뻐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한나의 노래입니다, 미래가 없던 한 여인 한나가 불임에서 탈출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노래는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위한 전망을 노래합니다. 기름부어 세우실 왕을 통해서 열릴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며 기뻐한 것입니다. 한나는 자기 문제 해결을 뛰어넘어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문제해결에도 하나님이 개입하실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즉 한나는 자신의 인생에 개입하신 하나님이 자기 민족의 문제에도 개입하실 것을 내다 본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선물, 여인으로서의 자기의 명예회복에만 기뻐하지 않고 그 하나님이 자기 민족의 명예도 회복시켜줄 것을 내다보고 노래한 것입니다.
한나의 신앙
한나에게 어떻게 이런 노래, 이런 찬양이 가능한 것일까요? 출산의 기쁨을 넘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는 데 까지 어떻게 생각이 미칠 수 있었을까요? 단순한 상상을 넘어 하나님이 자신의 민족을 위해 왕을 세우실 것을 어떻게 내다볼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한나가 아기를 얻기 위해 드렸던 기도를 통해 그녀의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1)’
이것을 서원기도라고 합니다. 이 한나의 이 서원 기도는 어떤 함의(숨은 뜻)를 갖고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전통에 의하면 ‘칼로 머리를 밀지 않은 채 아이를 길러 그 아이의 한평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아이’를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아이가 태어나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이 한나의 서원이었습니다. 나실인 제도는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유일신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고 하나님 신앙이 가나안의 바알종교에 흡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출신들도 성직자로 영입하기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실인 제도의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해 살면서 가나안화 되는 것을 막는데 있었습니다. 즉 이스라엘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나실인으로 키우겠다고 선언하면 칼로 머리를 밀지 않고, 포도주도 입에 대지 못하게 헸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지방에서 포도주는 가나안 농경문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목민의 전통을 가진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드는 독한 유혹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안지방에서는 단발머리가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므로 한나가 아이를 주시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서원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을 위해 전임 사역자로 헌신시키겠다는 뜻과 함께 그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민족에 동화되는 것을 막고 유일하신 하나님신앙을 보존하고 지킬 인물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이처럼 한나는 불임 여성이라고 하는 자신의 원통한 마음을 넘어 가나안 문화에 점차 동화되어가며 하나님 신앙을 잃어가는 자기 민족에 대한 원통한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임과 함께 지도자적 인물을 낳지 못하는 그 시대의 불임을 함께 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그 시대의 아픔, 민족의 아픔을 위해 자기 아들이 쓰임받기를 원했던 그 시대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한나의 서원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임과 개인적인 원통함을 보며 그 시대의 불임과 이스라엘 민족의 원통함을 함께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난국의 시대에 자신의 민족을 구할, 가나안 민족에 동화되어 있는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 시켜주고 하나님 신앙을 회복시켜 줄 시대의 아들, 민족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런 사명을 가진 아들을 낳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어머니들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의 어머니들에게서는 한나와 같은 민족적 모성애, 사회적 모성애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한국의 어머니들은 너무 이기적 모성애입니다. 제 자식이 잘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요. 공동체를 생각하는 모성애는 안 보입니다. 다른 자식이야 어떻게 되던 우선 내 자식이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있습니다. 내 자녀만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들어간다고 행복해 질 수 있나요? 모든 가정의 자녀가 다 행복해야 우리가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한나의 모성애처럼 한 시대를 살릴 아들을 원했던 민족적 모성애, 공동체를 위한 모성애가 너무 그립습니다.
한나의 노래의 주인공,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읽으면 오늘 본문이 한나라는 한 여성에게 초점을 맞춘 개인적인 영웅담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오늘 한나의 노래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한나의 노래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한나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암울한 민족의 장래에 자신의 아들을 통해 빛을 비춰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줄 분명히 알았습니다(2:3-9).
여러분, 누가 우리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습니까? 누가 민족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 있습니까? 누가 역사의 주인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이상적인 왕을 세워셔서 민족의 운명을 역전 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2:10)’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를 ‘하나님의 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일하시고 역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고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하나님이 역사안에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역사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크던 작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일어난다고 여겼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사무엘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의 근본 주체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며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땅의 어떤 역사도 하나님과 무관한 역사는 없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한나의 노래에 등장하는 약한 자, 굶주린 자, 자식이 없는 여자, 패자, 버림받은 자들은 변두리 인생들입니다(2:3-9).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변두리 인생들의 인생 역전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 역전을 꿈꾸십니까? 우리 민족의 장래를 걱정합니까?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바쁜 세상에 내몰려서 이 시대의 문화에 동화되어 살고 있는 자녀들을 염려하십니까? 해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시기를, 내 자녀의 인생에 개입하시기를, 우리 직장에 개입하시기를, 이 민족의 운명에 개입하시기를, 그 미래를 함께 내다보면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한나의 노래
삼상 2장 1~3절 / 조영태목사(임마누엘교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나는 슬픈 여자였습니다. 아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적 브닌나가 그를 격분시켰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웠고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면서 자신의 모든 심정을 쏟아냈습니다. 그녀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라는 야고보서 말씀처럼 기도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않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브닌나는 잠잠해졌습니다. 곧 그녀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처럼 즐거움으로 찬송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한나의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사이며 하나님을 향한 노래입니다.
그녀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을 지켰고 응답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보통은 기도할 때 너무나도 간절하여 서원을 하기도 하지만 응답해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잊어버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하며 드리고자 한다는 것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한나의 기도응답에 대한 태도는 성도들에게 좋은 본이 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에 대한 감사와 찬양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꿰뚫고 온 세상에 대한 메시야의 통치를 예언하는 영광의 ‘송영’이 되었습니다.
1절은 기도하는 그녀의 기쁨을 잘 보여줍니다.
① 내 마음 ② 내 뿔 ③ 내 입
세 번을 반복함으로써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에 대해서 감격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겠다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하나님 그 분으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뿔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습니다. 이 말은
뿔 달린 짐승들이 그 뿔을 높이 쳐드는 것은 힘과 품위를 상징하는데 이와 같이 성경은 뿔을 힘과 품위 및 권위 등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되었다. 여기서 한나의 뿔이 높아졌다는 것은 무자의 수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출산함으로 자신이 품위와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표현입니다.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다는 것은 그 동안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던 자신의 입을 열어 원수들에게 할 말을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브닌나의 멸시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내적인 갈등으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그녀는 드디어 입을 열어 그녀가 받은 은총을 소리 내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구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나의 경우에서는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된 것이 구원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7:7-8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내 필요를 아시는 분이시고 또한 기도할 때 그것에 대한 응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응답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아버지는 그것을 들어주며 기쁨을 누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녀 된 여러분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여러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기뻐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무턱대고 믿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잘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 때 하나님과 건강하고 올바른 관계를 갖고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있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진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격을 가지고 계시고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을 계시함으로 우리에게 신인식을 심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했기 때문에 갈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 먼 여정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시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직접 나타나시거나 환상 중에, 천사를 통해서 계시하셨는데 지금은 특별계시인 성경 66권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어떤 계획을 가지시고 인생을 다스리시고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 부부생활, 자녀교육, 인간관계, 사업구상과 진행 등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실 때도 많이 있고 특별한 사건과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시기도 하십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고 아브라함의 순종을 테스트하시는 과정에서는 이미 여호와께서 그의 산에서 준비하신다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여호와 샬롬’,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등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십계명을 주실 때 시내산에서 나를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중요한 것이 하나님 찾기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 또는 예수님, 성령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본문의 주인공이 주는 태도나 교훈 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면 그 분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경을 잘 모르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신앙생활 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몇 가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 기도는 어렵다. 물론 처음 할 때는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대화도 많이 해본사람과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기도하기가 편해집니다. 또한 기도는 신앙좋은 사람들,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즐겨해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만이 아니라 기도를 많이 해서 신앙이 좋아진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호흡이 잘 되어야 건강한 것처럼 기도가 자연스럽게 되어야 신앙이 건강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쉬지 말라는 것과 기도하라는 두 가지 뜻이 내포되어있습니다. 빌 4:6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람과 대화만 해도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경험하는데 모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대화하면 얼마나 영이 맑아지고 마음에 안정이 오겠습니까? 때로는 어떻게 기도할지 몰라서 어려워 할 때도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시고 때로는 위로해주십니다.
기도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꼭 형식을 따지지 않아도 되지만 순서를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이 순서는 기본이고 이 외에 도 더 넣을 수 있습니다. 다섯 손가락을 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엄지손가락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 이십니다. 우리의 공급자이며 피할 바위이십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 아버지 또는 아버지 하나님 이라고 부릅니다.
둘째손가락은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부활의 신앙을 갖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건강주신 것, 일자리 주신 것, 가족 지켜주신 것, 인도에서 임마누엘교회 만나 신앙생활 잘하게 해주시는 것. 등 감사한 일들을 말씀드리면 됩니다.
셋째, 손가락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실수하고 잘못한 것을 하나님께 다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리세요. 미워한 것, 상처준 것, 하나님을 멀리한 것, 욕심을 갖고 행한 것 등을 말씀드리세요.
넷째, 도와주세요. 우리 연약한 인생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밤새 지켜 주시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드리세요.
다섯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우리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린 기도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기도한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들어주십니다. 이 모든 기도가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의 아멘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은 많이 드리는 것을 좋아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많은 예물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신앙의 고백이 빠져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드리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면서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싸운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봉헌자의 마음이 빠진 것, 형식적인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억지로 한 것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배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려드리는 것이 많습니다. 송영, 기도, 찬송, 예물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나의 영혼을 담아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봉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드리는 봉사를 기뻐하십니다. 이것 저것 마음을 뺏기는 것보다 한 가지라도 섬기듯이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또한 그 봉사나 예물을 드리기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으십시오. 그래야 뒷 탈이 나지 않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음식을 준비한다고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느냐고 언니를 전혀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자신을 좀 도와주라 말씀해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도 좋고 말씀 듣는 것도 좋은 일인데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먼저 우선이 말씀 듣는 것에 초점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오해 내가 죄를 지면 나를 싫어하시고 멀리하신다.
이 말은 절반은 맞지만 절반은 틀립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지 않는 것을 더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로 사해주시는데 내가 그 죄를 고백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잘 아십니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 약한 모습, 반복되는 잘못에 초점을 맞추시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된자 하나님의 아들, 딸로 보십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 안에 흐르는 예수의 피는 모든 죄를 사하신 너무나도 진한 깨끗한 피입니다. 그 피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사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나는 영광의 송영을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첫째,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주 밖에 다른 이가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속성입니다.
히브리어로 카도쉬라고 하고 영어로는 'Holy', 'sacred' 라고 합니다.
거룩은 ‘구별되는 것’ 이나 ‘분리되는 것’ 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박국 1:12
하나님은 자신을 거룩하신 분이다고 소개해주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 19:2). 이 말은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이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분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완전하며 탁월하신 분이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일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둘지 말라 는 것이고 이계명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만들어 섬긴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가장 중요한 표지역시 거룩입니다. 신앙고백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사회의 모든 단체는 상호간의 약속이나 계약에 의해 세워졌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와 부르심 그리고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순종이라는 영적인 근거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거룩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함에서 비롯됩니다.
본래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는 특성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거룩을 사람이나 사물 시간 장소등에 적용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구별된 날은 성일 또는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일성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구별하여 지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사용된 건물 또는 물건은 성전, 성물이라고 구별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사람은 구약에는 제사장, 레위인 신약에는 목사를 포함한 성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훈련하기 위해서 광야로 불러내셨습니다. 그 핵심은 성막이었습니다.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 백성중에서도 레위인 그리고 구별한 장소, 구별한 물건,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곳 성막을 만드셨습니다. 바깥뜰에는 번제단. 물두멍, 바다, 제사에 쓰는 많은 기구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안쪽 성소에는 떡상, 촛대, 향단이 있습니다. 더 안쪽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 곳은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처소라는 의미에서 ‘지성소’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얼마나 거룩한 곳이었으면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하나님은 성막의 부분부분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 을 훈련하신 것입니다.
출 12:5 유월절에 잡는 양은 어린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가장 깨끗한 것, 흠이 없는 그때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돌아가셨습니다. 33년 된 남자 성인으로서 가장 좋을 때 드려진 것입니다. 완전히 몸이 찢기고 피를 흘러 온 몸을 주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성소에 들어갈 정도로 거룩하게 됐다는 증거입니다.
레위기의 주제가 거룩인데 말씀 중에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하는 음식을 구분했습니다. 돼지가 다른 짐승보다 더 더럽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거룩을 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구별된 사람 제사장이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옷 에봇을 입고 직분을 수행했습니다.
그 중에서 의복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별됨에 있어서 의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신약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에봇을 꼭 입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에 맞는 복장이 중요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별된 날 구별된 장소인 교회에 오면서 옷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거룩을 모르는 것입니다.
지난 세례식을 하면서 대상자들에게 평소보다 옷을 좀 더 깨끗하게 입고 오라고 했습니다. 교회 올 때는 평소보다 깨끗하게 해서 오는 것입니다.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을 필요는 없지만 가장 깨끗하고 준비된 옷을 입고 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할 때 교회의 역할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고 교회의 거룩성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성이 더해져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거룩을 회복할 때 교회의 부흥이 시작됩니다. 초대교회 때 사도들의 십자가와 예수님에 대한 선포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렸고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세속적인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듯이 예수님께서는 거룩을 잃어버린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누룩에 비유하시면서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군대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여리고성 함락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수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할례는 예전의 삶, 이전의 생활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고난주간과 같은 사순절기간은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하기 너무 좋은 기회입니다. 남성성경공부에서 고난주간 은혜를 나누는데 금식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왔습니다. 먹는 것을 절제하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내가 거룩성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기 위해서 잠자는 것을 구별해야 하고 금식을 하기 위해서는 먹는 것과 시간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교회는 거룩하신 주님의 닮아가는 것입니다.
지난번 금식과 새벽기도가 훈련이 됐습니다. 금식을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저도 ‘고난주가 미디어 금식에 동참하겠습니다!’ 를 책상에 붙여놓고 계속 의식했습니다. 필요한 연락외에는 미디어를 금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삶의 영역에서의 거룩성 구별됨을 훈련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된 무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학교 생활에서의 거룩, 직장생활에서의 거룩, 사업현장에서의 거룩
하나님은 섞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세상의 속된 말, 음란한 말과 성도의 말이 섞이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육신의 정욕은 성전을 모신 내 안 곧 심령을 더럽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탄식하게 만들고 내 안에 거룩한 열정을 사그라지게 만듭니다.
안목의 정욕은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눈에 욕심과 탐심을 갖게 합니다. 이생의 자랑 이 모든 것이 세상으로부터 와서 성도들을 현혹키고 시험에 들게 합니다.
처음에 어려운 일을 시작하면서 자문을 구할 때는 상대방에게 이것 저것 문의하고 친절히 대하다가 필요한 정보를 다 얻고 나면 더 이상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다면 참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 성품으로는 어떤 일을 해서 성공하기도 어렵고 그 속에서 예수 믿는 자로서의 칭찬은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는 것,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필요한 재료를 적당하게 빼고 시공을 한다거나 줘야 할 것은 주지 않고 받을 것만 악착같이 받으려고 할 때 세상은 우리를 욕합니다. 그 분이 집사든 장로든 교회를 욕합니다. 예수님이 욕을 먹는 것입니다.
때로는 가정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직장에서 직원을 상대하면서 말이 좀 안통하고 말을 안 듣는다고 막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에도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지적할 것은 지적하되 다른 사람과는 구별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주위에 보면 아는 힌두교인들이 자신의 경건의 훈련으로 일주일에 하루씩 금식하는 것을 봅니다. 무슬림들은 1년에 1번 라마단 기간 한 달 동안 오전부터 해지기 전까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까지도 금식합니다. 타 종교에 생명이 없지만 확실한 경건의 훈련이 있으니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현실에 뿌린 박은 거룩입니다. 산 속에서 거룩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실을 똑같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나를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답게 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주는 3대 복
이한규목사 / 삼상 2장 1-6절
< 자기 변화를 우선하라 >
한 성도에게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어느 날 그 딸이 탈선하기 시작했다. 점차 밤에 늦게 들어오고 이상한 클럽까지 다니면서 때로는 새벽에 귀가했다. 그의 마음은 무너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더 나빠졌다. 그가 기도했다. “하나님! 사랑하는 딸이 제자리를 찾게 하소서.” 그때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다. “네가 네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도와주겠다.” 그가 물었다. “하나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저의 딸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딸에게 조급하게 화를 내며 윽박지르지 말고 네가 사랑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보여주라.” 그 말씀대로 그때부터 그는 딸에게 한 번도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수시로 축복의 말을 해 주었다. “얘야, 너를 사랑한다. 너를 믿는다. 네가 자랑스럽다. 하나님이 너를 통해 큰일을 이루실 거야.” 그러자 딸이 점차 변하면서 나중에 많은 영혼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선교사 아내가 되었다.
누군가에게 한 축복의 말은 그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큰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그 축복의 말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는 것만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더 좋은 나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위해 하나님은 종종 고난과 문제를 허락하신다. 신대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저는 의기양양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세상을 변화시키게 하소서.” 그 후 목회를 하고 점점 낮아지면서 나중에는 점차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세상의 변화를 원하면 남을 변화보다 나의 변화를 우선시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회개란 나의 변화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돌아서면 그때부터 실패와 후퇴와 추락의 흐름에 극적인 반전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리고 계속 믿고 기도하면서 자기 변화를 이루면 환경과 상황도 신기하게 변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위대하고 복된 일은 없다.
< 믿음이 주는 3대 복 >
본문에는 어렵게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드리는 한나의 찬양 기도가 나온다. 그 기도를 통해 한나는 자신이 받은 은혜보다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처럼 하나님이 주신 복에 집착해 복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집착하지 말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에 집중하는 것이 진짜 복 받는 길이다. 한나의 찬양 기도를 통해 얻는 교훈으로서 믿음이 주는 3대 복은 무엇인가?
1. 구원
한나는 주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했다(1절). 구원의 복은 모든 복의 기초와 바탕과 핵심이다. 구원의 복음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벧전 1:12). 이 세상에 구원의 복음만큼 소중하고 매력적인 것은 없다는 암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구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참된 기쁨도 없었고 교회도 없었고 신약 성경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자에게 희망도 없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 땅을 떠나면 영원한 이별로 인해 그의 장례식 날은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날이 되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필자의 한 친구가 사회적으로 일찍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40대 초반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 친구의 장례식 때 그의 어머니가 서럽게 통곡했다. “아이고, 소중한 내 아들, 아까워 어떡해. 차라리 늦게 출세하지.” 예수님이 없었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통곡밖에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를 깨닫는다.
때로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내 곁을 떠나기도 한다. 그러면 그를 이 땅에서는 다시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이 곁에 빨리 두고 싶어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로 천국에 갔다고 여기고 언젠가 천국에서 재회할 생각을 하면 다시 소망이 넘치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서도 천국 소망을 노래하는 감격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복은 소중한 것이다.
2. 변화
본문 1절에 나오는 한나의 고백에서 뿔이 높아졌다는 말은 지위가 높아졌다는 뜻이다. 한나에게 구원은 자기 변화를 통해 자기 지위가 높아지고 자기 입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린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처럼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으면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실제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기 변화가 없는 믿음은 기복적인 믿음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반석 위에 굳게 서면 놀라운 변화의 능력이 나타난다(2절).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삶의 변화가 따라야 한다. 참된 믿음은 참된 변화를 낳는다. 믿은 후에도 믿기 전과 마음과 삶이 똑같다면 추상적인 믿음을 가진 것이지 참된 구원의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만이 믿음의 목적은 아니다. 믿은 후에도 마음이 어둡고 삶이 그늘지고 문제 극복 능력이 없고 믿음의 말을 하지 못한다면 참된 구원의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믿음을 가졌다면 삶이 달라져야 한다.
믿기 전에 사람들이 나를 싫어했다면 믿은 후에는 인간관계의 성숙과 어떤 깨달음을 주기 위한 전략적인 목적으로 나를 싫어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경우 외에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인격과 성품을 갖추도록 힘쓰라. 믿음이 깊어지면서 남에게 믿음을 주는 겸손하고 성실하고 온유한 삶을 추구하면 외모나 소유와 상관없이 영혼을 이끄는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게서 삶의 변화가 나타나게 하라. 나를 싫어했던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되게 하라. 남들이 나를 싫어한다면 그것이 그들 책임만은 아니다. 내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내가 남과 자꾸 부딪치는 이유를 남에게서만 찾지 말라. 인간관계에서 자꾸 부딪치는 상황이 많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거룩한 도전이다. 교회를 관성적으로 다니지 말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아지기를 힘쓰라.
3. 능력
본문 3절 이하에서 한나는 하나님이 주권자 되심을 계속 강조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행동을 달아보시고(3절), 용사의 활은 꺾이게 하며 넘어진 자는 힘을 주시고(4절), 있는 자는 없게 하시며 없는 자는 있게 하시고(5절),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신다고 고백했다(6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이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소유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열쇠를 내게도 주셨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베드로는 멋진 신앙고백으로 예수님으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았다. 그처럼 진실한 믿음을 가지면 한나와 베드로에게 주어졌던 천국 열쇠가 내게도 주어진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의 궁극적인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하나님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때로 신실한 성도에게 가난하고 낮고 비천한 자리에 처하게 하고 실패를 허용하시는가? 그 낮은 자리와 실패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공해서 높은 자리에 있을 때보다 실패해서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더 큰 교훈과 지혜를 얻는다.
그처럼 사람들은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많이 배우지만 꼭 그런 자리에서만 배우려고 하지 말라.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만 잘 배운다면 하나님도 계속 그런 자리를 허락하실 수밖에 없다. 굳이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만 배우려고 하지 말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선제적으로 잘 배우고 성숙해지면 고난과 시련을 통한 배움의 기회는 크게 줄어든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에 잘 순종하는 삶처럼 복된 삶은 없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만 60세 때 결심했다. “이제 살 날도 많이 남지 않았는데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 아내를 좀 더 위해주자. 이제부터는 아내의 말에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토씨를 달지 않고 잘 들으려고 해 보자.” 그때부터 말을 많이 하면 체력이 달려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아내가 말을 적게 하도록 귀를 기울여 듣는 훈련을 했다. 그처럼 한 마디 말만 하면 될 것을 두 마디 하지 않도록 좀 더 위해주는 마음을 가지고 아내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말한 대로 잘 따라 주려고 하면서 아내를 좀 더 편하게 해 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잔소리가 많다고 여겨지면 남만 탓하지 말고 내 입장에서 2가지를 점검해보라. 첫째, 내가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고 귀를 기울여 들으라. 둘째, 내가 상대의 말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여 따르지 않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모든 사람의 말을 따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의 말만은 주의 깊게 듣고 힘써 따르라. 사랑하는 사람이 잔소리를 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때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잔소리하는 상황을 줄여 주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고난과 시련을 통한 환경적인 메시지로 계속 잔소리처럼 느껴지듯이 여러 번 같은 말씀을 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힘써 순종하라. 그러면 고난은 적어지고 응답과 문제 해결은 빨라질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이면 천국 열쇠를 가진 최대 능력자가 될 것이다.
한나의 고백
전승문목사 / 사무엘상 2:1~11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하나님께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 맞습니까? 사실은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데 우리는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동안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약속을 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기도하겠다고, 예배 잘 드리겠다고, 순종하겠다고, 충성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중에 얼마나 지켰습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시편에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주의 성산에 사는 자”가 누구냐고 묻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시편 15:2,4)” 그렇습니다. 하나님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아무리 어려워도 지키는 사람인 겁니다.
믿음은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구원은 그 믿음만으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우리를 믿으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믿으실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서원한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마침내 한나가 아들을 낳은 겁니다. 한나는 그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로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또한 그 아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을까요? 하지만 그 아들은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아들이었습니다. 내 속으로 난 내 아들이지만 내가 키우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한 아들인 겁니다. 그러니 어쩌면 한나의 마음에 갈등이 일어났을 지도 모릅니다. 너무 귀한 아들이라 떼어놓고 싶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을 약속대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이가 젖떼기를 기다렸다가 서원한 대로 하나님께 데려간 겁니다.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정말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서원해서 받은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은 간절히 기도해서 얻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겁니다.
사실은 그래서 그동안 그렇게 눈물을 흘리게 하신 겁니다. 눈물로 기도해서 얻은 아들이 아니라면, 서원해서 받은 아들이 아니라면 드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입니다 하니” 한나는 남편과 가족이 매년 드리는 실로의 제사에 한동안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젖떼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올라가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만, 딱 젖을 뗄 때까지만, 데리고 있다가 하나님께 드리려는 겁니다. 젖을 떼면 아이를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려고 마음먹은 겁니다. 그것이 한나의 서원이었습니다. 한나는 그 서원을 지키려고 마음먹은 겁니다.
그런데 율법에 보면 아내가 서원한 것을 그 남편이 무효화시킬 수가 있습니다(민수기 30장). 그러니까 한나가 한 맹세지만 남편 엘가나가 무효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엘가나 역시 한나의 서원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후략)” 하나님께서 왜 엘가나와 한나를 택하사 사무엘을 보내셨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래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복된 가정이 되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과의 약속을 온 가족이 함께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겨우 젖을 떼고 난 후에, 그 어린나이에 하나님 앞에 선 겁니다 :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 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그랬습니다. 아이가 어렸습니다. 아주 많이 어렸습니다. 그 어린 아들을 하나님 앞에 두고 한나가 돌아선 겁니다. 그러나 한나는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마음에 기쁨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에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한나는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요? 그 어린 아들을 품에서 떼어놓으면서도 어떻게 이렇게 기뻐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에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들을 잘 돌봐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시는 것이 자신이 돌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습니다. 한나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하나님 앞에 두고 오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한나를 선택하신 겁니다. 그 믿음이 있는 여인이라, 하나님을 믿는 분명한 믿음이 있는 여인이라, 택하신 겁니다. 또한 그래서 사무엘을 낳게 하신 겁니다. 한나의 믿음만이 사무엘을 사무엘답게 키워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믿음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믿으실 수 있는 큰 믿음이 있습니까?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믿으실 수 있는 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만약 한나가 아들을 계속 품에 안고 키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그 위대한 사무엘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먹는 거는 더 잘 먹었을지 모릅니다. 입는 것도 더 잘 입고 노는 것도 더 잘 놀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한 사무엘로는, 자랄 수 없었을 겁니다. 사무엘을 성전에 두고 온 한나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귀한 아들을 바치고 너무너무 외로워하며 슬프게 지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들 하나를 바치자 하나님께서는 아들 셋과 딸 둘을 주셨습니다 :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시사 그로 하여금 임신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21절)” 다 잘 된 겁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자 모두가 잘 된 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드리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사실은 하늘에 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심는 겁니다. 하늘에 심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놀라운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마태 6:19~20)” 내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키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자식이지만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더 잘 키워주실 겁니다. 내가 키우는 것보다 상상할 수도 없이 잘 키워주실 겁니다. 내 돈이라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돈이지만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하늘에 심는 겁니다. 하늘에 심은 것은 때가 되면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 줄 겁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입니다. 한나는 그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중한 아들을 기쁘게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겁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얼마나 잘 키워주셨는지 모릅니다. 위대한 사무엘!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꾼 그 위대한 사무엘이 이렇게 태어난 겁니다.
아들을 여호와 앞에 두고 온 한나는 오히려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유명한 ‘한나의 노래’가 이렇게 탄생한 겁니다. 한나는 자신의 기쁨을 고백합니다 :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한나가 기쁘게 노래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마음이 즐겁다는 겁니다.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겁다는 겁니다. 아들을 주셔서 즐겁고, 그 아들을 받아주셔서 즐겁고,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즐거운 겁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꾸어 주셨음에 기뻐합니다.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한나의 원수는 브닌나였습니다 :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1장 6절)” 적수라는 말은 차라(צָרָה)라는 단어인데 심한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브닌나가 한나에게는 너무나 괴로운 상대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한나의 뿔이 높아졌습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한나의 위치가 변한 겁니다. 이제 더 이상은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겁니다.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주님이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당당하게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에게도 원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을 너무너무 힘들게 하는 브닌나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면 여러분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5)” 이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 놀라운 변화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잊지 않습니다 :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오직 우리 하나님만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내 인생을 변화시켜 새로운 인생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이처럼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애벌레 같은 인생에서 나비 같은 인생으로, 달걀 같은 인생에서 닭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조심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성도는 언제나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말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뱉은 모든 말을 다 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나의 모든 행동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그러니 절대로 교만한 말을, 오만한 말을 입에서 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인생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지옥에 던지실 수도 있고 지옥에서 건지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물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십니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그러니 부하다고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또한 가난하다고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바꾸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왕 중에 벨사살(Belshazzar)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입니다. 그런데 벨사살은 어쩌다가 바벨론 제국의 마지막 왕이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 원인을 벨사살이 하나님을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서 5장에 나오는 내용인데 벨사살이 귀족 천 명과 연회를 열면서 성전의 기구들을 가져다 사용한 겁니다. 거룩한 성물을 술을 마시는 도구로 사용한 겁니다. 그러자 그 때 돌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손가락만 나타난 겁니다. 그 손가락이 벽에 글을 썼다 :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만이 그 글자를 해석했는데 그 뜻은 이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저울에 벨사살 왕을 달아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무게가 맞지 않아서 버리셨다는 겁니다. 과연 다니엘의 예언 그대로 벨사살은 그 날로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바벨론제국도 그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분이 우리 하나님입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한나가 그 하나님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놀라운 분임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겁니다. 그 분이 내 아들을 맡으신 겁니다. 그 놀라운 분이 내 아들을 맡아주신 겁니다. 그래서 기쁜 겁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게 된 겁니다. 내 인생을 바꾸어주신 분이시니 내 아들의 인생도 바꾸어 주시리라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음을 믿는 겁니다 :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힘으로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은 아무도 해칠 수 없습니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자는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입니다. 내 아들이, 내 아들 사무엘이, 그렇게 구별된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사람인 겁니다. 비록 갓 젖을 뗀 어린아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겁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기뻐하는 겁니다.
한나는 분명히 믿고 있었습니다 :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땅 끝까지 도망가도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 왕에게는,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는 그 뿔을 높여주십니다. 한나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영광을 내려주시는 겁니다. 이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분이 내 아들 사무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는 기뻐할 일밖에 없는 겁니다.
신앙은 자기를 아는 것으로 시작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완성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아는 겁니다. 한나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아는 겁니다. 죄인인 나를, 부족한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당신의 독생자를 내 대신 죽게 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한나는 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겁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도 한나처럼 자기를 알고 또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래서 기뻐하십니까? 그래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립니다
삼상 2장 1~10절 / 강용규목사
어느 부부가 첫 번째 아이를 낳은 지 7년 만에 둘째를 낳았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이 부부는 일곱 살이 된 첫째 아들에게 동생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란다. 그러니 동생을 많이 예뻐해 주거라.” 그러자 동생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이가 아기에게 작은 소리로 “아가야, 잊기 전에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 좀 해줘”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9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도 아직도 모르느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19편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궁창이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연을 보며 하나님의 모습과 임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구약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을 가르치는 교수님과 그것을 믿지 않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믿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자기 집 지하실에 태양계를 그대로 옮긴 조형물을 만들고 그것에 기계를 달아 태양계와 똑같이 움직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교수님 집에 놀러왔다가 그 기계를 보고 “교수님, 참 정교하게 잘 만드셨네요”라고 하자 교수님께서는 “이런 작은 것도 만든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이 큰 우주를 만든 분이 없겠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데 풍랑이 일어 배가 물이 빠질 것 같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그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걸어오셔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안심시키며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고 제자들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이가 자연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아벡이라는 곳에서 전쟁을 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끄는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대패를 하게 되고, 심지어 블레셋 군대에게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게 됩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스라엘 군대로부터 빼앗은 법궤를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그 법궤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신전에 함께 놔둡니다. 자신의 신전에 함께 놔둔 법궤로 인해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신상이 무너지게 되는 것을 목격한 블레셋 사람들은 그 법궤를 자진해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고,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을 다스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욕심으로 인해 법궤를 사용하고자 했던 그들의 잘못이며, 빼앗은 법궤를 가지고 자신들의 미래를 안정화하려 했던 블레셋 사람들의 욕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은 사건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며 만물을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 세상 만물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8세기 예언자들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공부했었습니다. 주전 8세기는 주전 750년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785년부터 745년까지 약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북쪽으로 햇족속과 앗시리아가 경쟁하면서 북쪽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애굽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큰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중에 어느 한 나라라도 힘을 키우게 되면 이스라엘의 힘은 강대국 틈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785년부터 745년까지는 북쪽에 있는 앗시리아도 힘을 많이 잃었고, 남쪽에 있는 애굽도 힘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 두 나라가 힘을 가지고 팽창하지 않는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토도 다윗 왕 때보다 더 넓힐 수 있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이스라엘의 태평성대의 기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이 때 활동했던 예언자가 바로 북쪽에는 아모스, 호세아, 남쪽에는 이사야, 미가입니다. 이 예언자들의 예언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남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이 끝내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이뤄지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은 오늘의 역사 속에서도 심판을 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심을 보고, 8세기 이스라엘 민족처럼 잘 살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께 더욱 돌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우리 역사를 다스리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은 오늘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오늘 사무엘상 2장에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하나님은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고,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시기도 하시고, 진흙바닥에 떨어진 나를 높이시기도 하시고 영광된 자를 진흙바닥에 누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영원하지 못한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새보다, 들에 핀 백합화보다 더 존귀한 하나님의 존재라는 사실을 굳건히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이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 그 말입니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고 은총 받는 길입니다.
한나의 기도
삼상 2장 1~10절 / 박봉수목사
요한 계시록에는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신비한 영적 세계에 대한 장면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상달되는 지 그 신비로운 광경이 있습니다.
계 8:3-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지라”
저 천상의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천사가 많은 향을 담은 금향로를 가지고 제단으로 갑니다. 거기서 불을 그 금향로에 담아서 향을 피웁니다. 향연이 일어나면 그 금향로를 가지고 금 제단으로 가서 하나님께 그 향연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향연을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이 향연과 함께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천사는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를 금향로에 받아다가 하나님께 향연을 올릴 때 함께 올려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기도의 매우 중요한 특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맡으시는 향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흠향하실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기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나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 그 많은 기도 가운데 이 기도를 이렇게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을까요? 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향기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특별하게 흠향하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를 드릴까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안내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한나의 기도는 어떤 기도이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향기로 흠향하셨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흠향하실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한나의 기도를 보다 잘 이해하려면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시대 끝 무렵 엘가나와 한나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나에게 아이가 없었습니다. 고대시대 관습에 따라 엘가나는 또 다른 부인 브닌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브닌나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은 권세로 브닌나가 한나를 핍박합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만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미워서 더욱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한나가 견디기 힘이 듭니다. 그래서 눈물로 날을 보냅니다. 때로는 식사도 할 수 없습니다. 한나가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눈물로 기도합니다. 아이를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잘 키웠습니다. 젖을 뗄 떼가 되었습니다. 서원을 갚기 위해 사무엘을 데리고 성소로 왔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겨 하나님을 섬기게 했습니다. 기도로 낳은 아들을 하나님 앞에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나의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향이 담뿍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기뻐 받으셨습니다. 우리 기도에도 이런 향이 담겨져야 하겠습니다.
감격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한나가 기도를 시작하며 뜨거운 감격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1:1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한나가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 보면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여...”라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인생은 지금 역전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고통의 절규가 변하여 찬양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나의 인생을 바꿔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해 오시면 우리 인생이 바뀝니다. 이미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 때문에 바뀐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은혜 때문에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감격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흠향하십니다.
다음으로 한나는 은혜를 갚으며 감격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사무엘을 낳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그토록 오랜 세월 구박을 받아왔고, 고통의 나날을 겪던 것을 생각하면 그 감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감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토록 소중한 아들 자기 목숨보다도 더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했던 것을 갚게 된 것입니다. 한나가 더 큰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무엘을 얻게 되었을 때보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며 더 큰 감격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휘튼 칼리지라는 명문 기독교 대학이 있습니다. 이 대학 브랭카드 홀 2층에는 이 학교가 배출한 선교사들의 명단과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몇 사람의 사진에 십자가가 붙어 있는데 그것은 선교 현장에서 순교를 했다는 표시입니다.
순교자 명단에 제임스 엘리어트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남미 에콰도르의 이오카 인디언 부족에게 선교하다가 인디언의 공격을 받아 순교했습니다. 한 기자가 엘리어트 선교사의 부인에게 “얼마나 슬프십니까?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씀을 삼가해 주십시오. 비극이라니요? 제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그 곳에 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드리기 위하여 그 땅에 갔던 것입니다”
이 선교사의 큐티 노트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리고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을 위하여 결국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가운데 결국은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소유, 우리의 명예, 우리의 권력...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것을 얻게 될 때도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사명, 사랑... 이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그렇지만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할 때 더 큰 감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얻을 때의 감격보다 하나님을 위해 포기할 때 감격이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 감격을 누리게 될 때 그 감격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고백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나는 기도가 깊어지면서 하나님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 때문에 감격하다가 이제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도중에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이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한나는 여호와를 묵상하면서 제일 먼저 깨닫게 된 것은 자기에게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무슨 뜻입니까? 내게는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순교자 소양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일제치하에 신사참배를 강요당할 때 목숨을 걸고 저항했고 끝내 처참한 고문 끝에 결국 순교당하셨습니다. 주목사님께서 마지막 설교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내 어찌 이것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할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
한 마디로 주 목사님께서 순교하게 된 동기는 바로 자기에게는 주님 밖에 없다는 고백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오직 예수!, 오직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님 밖에 없기 때문에 주만 사랑하며 살겠다는 고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하나님께 특별한 향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고백을 즐겨 흠향하십니다.
하나님은 못할 것이 없는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6-7절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한나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정말 못할 것이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은 무슨 뜻일까요?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앞으로도 철저하게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마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께 하인을 고쳐 달라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말씀하시면서 그 집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그 때 백부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로 오라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놀라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병마도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먼 거리에서 병든 하인을 보지 않고도 고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마음에 품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 깜짝 놀라셔서 크게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못할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친히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 우리의 모든 장애물 주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다 해결될 수 있습니다. 다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님께 고백드려야 합니다. 이 고백이 주님께 아주 특별한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 향기를 즐겨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기대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나의 믿음의 고백은 장래의 일에 대한 기대로 발전되어갑니다.
우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기대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대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지금은 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지만 장차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육학 용어가운데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있습니다. 로버트 로젠탈이란 학자가 한 초등학교에서 IQ 검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무작위로 각 학급에서 20% 학생을 추출한 뒤 교사들에게 이 학생들이 지적 성장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장차 다른 학생들을 월등히 앞서게 될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1년 뒤 다시 방문해서 IQ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20% 학생들이 평균 12.22%나 IQ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교사들이 긍정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가운데 하나가 이 긍정적인 기대입니다. 이 긍정적인 기대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게 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속에서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긍정적인 기대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특별한 향기가 됩니다. 이 향기를 하나님께서 즐겨 흠향하십니다.
다음으로 저 천국에 대한 기대입니다.
10절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세상을 뒤바꾸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 간증을 들었습니다. 친구 중 교회에는 다니지 않지만 자신도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고 말한 분이 있답니다. 그리고 자신도 곧 교회를 가겠다고 말한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장의사였는데 수많은 시체를 처리하다보니 크리스천과 아닌 사람의 얼굴 표정이 너무나 달라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저 천국에서 주님을 뵈옵는 그 순간을 기대하고 삽니다. 그래서 죽는 순간에도 그 표정이 밝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으로 주 앞에 서서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특별한 향기가 됩니다. 주님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기도가 하나님께 향기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격, 고백, 그리고 기대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향기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로 노래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삼상 2장 1~11절 / 지태일목사
어떤 사람이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흙을 가져다 붓고 자신이 좋아하는 온갖 아름다운 씨앗들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정원에는 그가 좋아하는 꽃들만이 아니라 수많은 민들레가 피어났습니다. 민들레는 아무리 뽑아도 어디선가 씨앗이 날아와 또 피어났습니다. 민들레를 없애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는 결국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노란 민들레는 다시 또다시 피어났습니다. 마침내 그는 "정원 가꾸기 협회"에 전화를 걸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정원에서 민들레를 없앨 수 있을까요.
정원 가꾸기 협회에서는 그에게 민들레를 제거하는 몇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들은 이미 모두 시도해 본 것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원 가꾸기 협회에서는 그에게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을 일러 주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이 글은 시인 류시화의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이란 글입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오늘의 문제 상황속에서도 견고하게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 문제 많은 삶을 사랑할 수 있을 때 이겨 나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 상황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한 가지 비결을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마지막 사사이면서 이스라엘 최초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고통과 아픔의 상황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 문제로 인해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녀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까? 바로 기도였습니다. 변화는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변화시키는 인생, 역전시키는 인생이 어떻게 가능하다구요?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한나는 참으로 운명이 기구한 여인이었습니다. 평생 슬픔으로 가득찬 생을 살아 온 여인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조그마한 마을의 작은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결혼을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녀를 성태케 아니하시므로 아기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아기를 못낳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더구나 남편 엘가나에게는 브닌나라는 다른 아내를 두었는데 2절에서 보는 것처럼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본처에게 아들이 없고 두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이 있는 경우에는 갈등과 불행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의 가정도 그랬고, 그 불씨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아랍세계, 미국까지 개입되어 전세계, 우리 한국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를 격동시키는 대적자가 있었습니다. 한나는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나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고 있었습니다. 브닌나는 자기를 통하여 낳은 아들을 그의 자랑거리로 삼는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브닌나는 아들을 낳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자기보다 더 사랑 받는 한나에 대해서 시기하며 질투하며 기세등등하여 그녀의 약점을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킬 때에 한나가 대답할 말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남편 엘가나 한나를 지극히 사랑해 주었지만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열 아들보다 낫지 않냐?'고 말하며 그를 위로할 뿐이었지 아이의 어머니가 되기를 원하는 아내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위로하면서도 남편의 마음이 자식이 있는 브닌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한나는 늘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한나는 그 답답한 현실에서 브닌나를 시기하거나 아니면 남편에게 불평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에 낙망할 수 있지만, 그는 기도했습니다. 기도만이 능력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자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5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그녀를 성태치 못하게 하셨으므로 성태케 하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삼상1:10절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이런 상황 속에서 한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데,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지만,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 가운데서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괴로움이 없습니다. 한나는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힘들어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애절했는지 한 번은 제사를 드린 후 괴로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1)
엘리 제사장이 입술만 달싹거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줄로 알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습니다.(1:15-16)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롭다는 그의 표현을 통해 그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아 그의 재롱을 보고 그의 덕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고 오직 아들을 낳으므로 자기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과 수치를 벗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 없이 서원기도를 통해 아들을 낳게만 해주신다면 그의 평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술취한 여인같은 그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기도한 끝에 그녀는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고 드디어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아니면 브닌나로 인해 가슴아파 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브닌나의 핍박을 기도로써 이겨냄으로써 브닌나에게 갈 뻔한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역전의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를 놓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가장 멋있는 어머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기의 원하는 아들을 받았고, 그 아들을 원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앞에서 잘 키웠고, 또 서원한대로 드렸으며, 그리고 자기에게 이루어진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찬양하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삼상 2장은 한나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과 돌보심 앞에서 감격하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린 찬양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은 후 하나님께 또 다시 드리는 감사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본문 구구절절이 한나의 신앙 고백으로 가득 찼으며 감사와 감격 찬양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그녀는 어떻게 찬양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1. 한나는 삶에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1절)
1절을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고,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를 향하여 크게 열려졌으며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여기에 나오는 "내 마음... 내 뿔... 내 입이"이라는 3중 표현은 기도의 응답이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그녀의 '마음'은 괴로움(1:10)과 슬픔(1:15)에서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2) 그리고 그녀의 '뿔'은(동물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자랑하듯이) 먼지 가운데서 짓 밟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1:6) 뿔과 같이 다시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3) 더구나 그녀의 '입'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처량한 신세에서(1:13) 다시 크게 열려져 자신의 원수에 대하여 여호와의 은혜를 마음껏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1절 하반절에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나의 기쁨이, 곧 앞에서 언급된 3가지 표현, 마음의 즐거움, 뿔과 같이 높아짐, 입이 크게 열리는 벅찬 감격과 희열이 궁극적으로 '주의 구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구원'은 (1) 일차적으로는 자식이 없음으로 당한 온갖 수모와 멸시로부터의 구원이겠지만, (2) 한 걸음 더 나아가 장차 사무엘을 통한 타락한 종교적 상황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이며, (3)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류의 구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슬퍼지고 답답하고 억울했던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람니다. 죄와 허물로 먼지 가운데서 짓밝힘을 당하던 비참한 처지에서 우리를 높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원수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입을 열어 하나님의 하신 일을 크게 증거케 하심을 찬양합시다. ■ 찬양,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한나의 노래의 감격이 “여호와를 인해 즐거워한다"고 고백하듯 우리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높아지며 하나님 때문에 크게 외치는 귀한 찬양이 넘치시기를 바람니다.
2. 한나는 높여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7절)
본문 2:7절에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이 일으켜 높이 세우시면 세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이 낮추실 때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낮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권을 쥐고 계신 분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높이셔서 영광스럽게 하심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시는 분이며, 권고하시는 분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높아지고 싶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여 주셔야 높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낮추시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은 높이기도 하심니다(7절). 교만한 자를 겸손하게 하시며, 낮은 자에게 은혜와 영광을 주심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겨루는 자를 고발하여 진토에 묻고 밟아 버리심니다(욥40:12,13).
그러나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는, 주께서 그들을 높이시며 구원하여 주심니다(약 4:10). 교만하여 낮춘 자가 회개하여 드디어 겸손해지면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키신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여기에 대해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신다." 말하자면 낮고 보잘 것 없는 자리, 아니 쓰레기 더미와 같은 곳, 그리고 멸시받는 곳에서 부터 일으키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신다"(시13:78).
인간의 승진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님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인간이 볼 때는 합당치 못한 사람들이 높이 올리움을 받습니다.
요셉과 다니엘, 모세, 그리고 다윗 등은 감옥에서부터, 사자굴에서, 죽음의 나일강에서 궁전으로, 양치기 목자의 지팡이를 잡던 손에서 홀을 잡는 손으로 왕까지 놀라운 승진을 거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귀인들은 그들을 멸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으며, "영광의 보좌를 이어 받게" 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서 높이 쓰는 사람을, 그들이 진토에서 나왔으며 거름 더미에서 나왔다고 하여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들의 출발이 보잘 것이 없었다면 그만큼 그들은 큰 은혜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의 작은 어부 출신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세계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되는데 다 쓰셨습니다. 시골출신이라고, 학벌이 약하다고, 가난한 가정이라고, 작은 곳이라해서 심지어 편모슬하에서도 자랐어도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높이 들림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구두 수선공이었던 D.L 무디도 하나님께서 높여 주셨을 때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위대한 전도자,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높여 주심이 하나님께 있었음을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람니다. 나를 죄악에서, 사망에서, 진토에서, 허물에서 끌어 올리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무지와 나약함, 질병과 고통중에서, 가난과 고난중에서도,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높여 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에 응답이 있습니다.
3. 한나는 하나님의 주권과 우주적인 통치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2-10절)
한나는 자기 처한 어려운 현실에서도 여호와 절대신앙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순종한 이후에 자기가 만난 그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그 위대하심을 감사 찬송합니다. 한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고 나서, 감격에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녀의 감사의 찬양속에는 인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노래합니다.
1)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2절)
“여호와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과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한나는 이 세상의 어떤 신보다도 거룩하고 뛰어나신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 지식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3절)
3절에 하나님 앞에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라",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먼저 브닌나를 염두해 두고 읇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태를 닫고 여시는 하나님, 한 여인의 눈물어린 기도로 새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 가난하다고 연약하다고 함부로 무시하고 핍박하며 스스로 의로운체 하는 무지함을 탓하며 하나님을 높임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중심까지 행동의 동기까지 다 살피시고 아시는 분이십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함은 바로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같으신 하나님앞에 간구할 수 있기 바람니다.
3)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강한 자는 약해지고, 약한 자는 강해집니다(4절).
4절에 "용사의 활은 꺾어진다." 그 용사의 힘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며, 전과 같지 못하며, 계획했던 바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아무리 힘있는 장수라도모든 사람은 병들고 나이가 들면 연약해지고, 그들의 활도 그리 오랫동안 힘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에 의해 영광을 누리던 용사들도 자기가 믿었던 활 때문에 오히려 실패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말씀만 한마디 하시면 약해서 비틀거리던 자, 곧장 걸어갈 수도 없던 자가, 몸과 마음에 "힘을 얻으며," 커다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파서 병들어 약해졌던 자가 활력을 되찾으며, 슬픔에 젖었던 자기 위로를 되찾습니다. 그리하여 약한 손이 강해질 것이며, 떨리는 무릎이 굳게 되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사35:3).
4) 하나님만 원하시면 부자들은 곧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는 갑자기 놀랍도록 부하게 됩니다(5절).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부요한 자들의 재물을 앗아가 버리기도 하며, 그들의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창고에다가 집에다가 배에다가 좋은 것으로 가득 채운 자들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다가는 가난하고 곤궁하게 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구걸하며, 때거리를 위해 일해야 하며 창피를 무릅쓰고 땅을 파야 하는 신세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하나님의 섭리는 주린 자에게 주림을 면케 하시기도 합니다. 면케 하신다는 것은 지금처럼 일용할 양식을 위해 고된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 땅에서 산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다시는 주림이나 목마름이 없을 것입니다. 부해지는 것, 가난해지는 것은 단지 운명의 탓이거나 인간의 지혜나 또는 어리석음의 탓만도 아님니다.
전9:11절을 보면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술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했습니다. 또 가난하게 되는 것이 반드시 인간의 잘못만은 아님니다(7절).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난하게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신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부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그들의 부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 가시기도 하심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만족하고 거기에 알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자로 만드신 것인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넉넉한 재물로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욥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은 부자를 가난하게 만드실 수 있으며 다시 또 그를 부자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주실 수도 있으며 주었던 것을 빼앗아 가실 수 있고, 다시 또 빼앗아 가셨던 것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자랑하거나 안전하다고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금방이라도 가난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가난한 자들도 부자로 만들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식구가 없던 가족에게 많은 식구를 주시고, 많은 식구를 거느리던 가족이
오히려 쇠잔하게 되기도 합니다.(5절)
5절에서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가 일곱을 낳았다"는 이 말은 한나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 비록 지금 한나는 아들 하나밖에 없지마는 귀한 믿음의 그 한 아들이 그녀에게는 일곱(완전, 충만함) 아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지금은 그녀에게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지만 나중에 3남 2녀를 더 둘 수 있었습니다(21절).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가 일곱을" 낳는 동안,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잔 해지겠고," 이것은 짧게 보면 브닌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때는 득세하던 브닌나가 이제 완전히 풀이 죽고, 의기가 저하된 것을 말합니다.
유다 사람들의 전설에 의하면 한나가 한 자녀를 낳으면 브닌나는 두 자녀를 땅에 묻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주궈을 높이 찬양하시기 바람니다.
6)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6절).
6절에,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고 했습니다.
생명은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생명이 네게(사람의 것이라고 한 곳이)이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명은 하나님이 구속하십니다.
천지만물 하늘과 땅과 바다가 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요, 산천초목은 물로 공중에 나는 새와 짐승과 사람도 다 하나님이 창조했습니다. 원숭이가 진화되어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있고 사람은 하나님이 창세기 2장에서 분명히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범죄할 때 살리시기 위해, 생명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 생명을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의 생명을 부활시키기 위하여 다시 오게 했습니다. 죄에 빠져 영 죽게 된 영혼을 건져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43:1절에서 보면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롬14:8절에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로되"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생과 사의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무조건 죽이고 무조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살고 영생하고, 천국가고, 예수 안믿으면 죽습니다. 영원히 죽습니다. 지옥 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3: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낳고 죽는 것을 통할하심니다. 어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허락이 없이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계1:18) 분의 명령으로만 진토가 됨니다. 어떤 한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인간을 살리시는 분께서 하시는 일" 입니다. "아무도 영혼의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데 "영혼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서 나았고 고통에서 해방을 받았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만 "죽음으로부터 살리시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6) 빈부를 주관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합니다(7절).
본문 7절에서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부와 영화 빈곤과 불명예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나는 기도하며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며 하나님은 풍부하게도 하시고 부족하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욥은 욥기1:21절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 실 자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다 부유하고 명예를 얻고 잘 살아야 하는 데 왜 부유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가? 그것은 성도를 기도하게 하고 연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축복을 그냥 하나님이 쏟아 부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여야 할 일은 내가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주일을 지키고 계명을 지키고, 물질 시간 은사 재능 사랑으로 봉사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깨어있고, 근신하고, 충성하고, 겸손하고, 인내하여야 합니다. 십자가 지고,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시험도 이겨야 합니다.
독수리는 자기 새끼를 공중의 새의 왕으로 키우기 위하여 절벽에서 부자비하게 떨어뜨리기도 공중에 집어 던지기도 하고, 바다 위에 날개도 하면서 훈련시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힘이 센 독수리로 자랍니다.
잠17:3절의 말씀을 보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로마서5:4절의 말씀을 보면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들기 위하여 연단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라게 하고 기도를 통하여 시련과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이렇게 연단하며 기도하며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자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7)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임을 찬양합니다."(8절)
땅의 기둥들은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냄니다. 하나님은 땅의 기초가 되는 모든 피조물을 떠받들고 계시며 지금도 여전히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세계를 지속시키고 계심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훨씬 초월해서 우리의 가족 문제나 국가적인 모든 문제에서 하시지 못할 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비유적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주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는 감히 아무것도 항쟁할 수 없습니다. 땅의 왕자와 귀인들, 국가의 통치자, 왕, 정부, 지도자는 "땅의 기둥들입니다"(시75:3).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은 그들의 권력과 권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이든지 높이 들어 쓰심니다.
8) 그 나라에 충성스러운 자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강력하게 보호받음을 찬양합니다(9절).
"그가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택함받은 하나님의 성도들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가운데 속한 자들은 그의 신체의 가장 낮은 부분인 그 발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까지, 즉 서서 살아가는 땅위에서 지켜 주심니다. 가는 길을 인도해 주심니다.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길에서 비틀거리지 않도록 은혜로 돌봐주시며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들의 발이 미끄러질 뻔할 때(시73:2),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을 붙들며(시94:18),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심니다(유24).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걷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발을 지켜 주심니다(시37:23,24).
9)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9절)
힘으로는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위탁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이 교회에 위탁되어 있는 동안에는 인간의 힘이 감히 교회를 대항해서 이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교회는 힘이 없어 보입니다. 교회는 친구도 적고 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우월성은 인간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님니다(시33:16). 하나님은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하시지 않으심니다(시147:10). 또 인간의 힘을 두려워 하시지도 않으심니다.
10) 모든 대적들은 확실히 멸망받을 것을 고백합니다.(9절)
"악인들은 흑암중에서 잠잠케 될 것이다"(9절). 그들은 맹인이 되고 벙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길을 보지 못하게 되며, 스스로를 위해 말 한 마디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죄인은 바깥 어두움에 좇겨나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영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됨니다(마22:12,13).
특별히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노래하는 마지막 10절에서는 압도적인 감격과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1)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며,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 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그를 향하여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는 교만한 자를 가리킴니다.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는 말씀, 여기서 '깨어질 것은' 내리 누르다'란 뜻으로서' 교만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단5:20).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지도자들을 대적하고 잘 된 사람이 없습니다. 모세를 대적하고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었고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이 나와 그들을 삼켰습니다.(출10:1-2)
고라와 르우벤 자손인 다단과 아비람이 모세와 아론의 군위에 도전하다가 땅이 갈라져 그들을 땅이 삼켜 버렸습니다. 출16:40-50절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시하려고 염병을 보내어 14,700명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려다가 산산 조각이 나지 말고 깨어지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여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땅끝까지 널리 널리 확장될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와 확장은 상당히 멀리까지 미쳤습니다. 그러나 "땅 끝은" 메시야의 소유로 약속되었습니다(시2:8). 땅 끝은 메시야의 황금 홀에 의해 정복되며, 그의 철장으로 지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인의 삼판주이심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위하여 자기와 및 그의 백성들의 원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시10:5, 6).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심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성군(다윗)을 통한 모든 이방 세력의 정복을 암시하고(삼하 8장),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통하여 모든 사단의 세력을 꺾은 후 이룩될 하나님 나라의 의 (義)의 통치(고전15:25)를 가리킴니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 이것 또한 앞의 문구와 같이 (1) 근시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은 의로운 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실 것과 (2) 원시적으로는 영원한 평강의 왕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키실 것을 메시아의 예언까지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은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심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에 속한 자들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심은 위대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시89:21,눅22:43). 또한 부끄러움을 잘 참고 견딜 수 있게 하며 "그의 머리를 들어 올려 주기" 위해 힘을 주심니다(시110:7).
또 하나님은 당신이 "기름부은 자의" 뿔 즉 그의 힘과 영예를 높여 주시며,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심니다"(시89:27). 이것은 그 승리를 더 찬란하게 하며, 또 무엇보다도 한나의 기쁨이었습니다. 한나의 "뿔이 높아졌습니다" (1절). 왜냐하면 한나는 메시야의 뿔이 높아지리라라는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희망을 확고히 하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속한 자들은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원수들은 멸망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힘을 가지시고 구할 자는 구하고 멸망할 자는 철저하게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한나라는 이름의 뜻은 “은혜 또는 은혜를 입은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름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 속에는 기쁨에 넘치는 찬양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소원인 자식, 일곱 아들같은 사무엘을 보았기에 찬양하고 있지만 사실 긍극적으로 한나는 모두 하나님 때문에 찬양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으로 인해 노래와 감사가 가득함과 같이 우리들도 나로 하여금 노래하게 하신 하나님을 깊이 찬양할 수 있기 바람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은, 감사하는 찬양은 우리의 심령을 강건케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한 동산으로 만들 줄 믿습니다. 아멘.
한나의 노래
삼상 2장 3~10절 / 조영태목사(임마누엘교회)
지난 한 주간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을 훈련했습니까? 일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했고 고백했습니까? 지난주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성경을 볼 때 어떤 인물이나 사건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그 분의 성품에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한 주간을 지내고 또 한 주를 시작하는 주일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 우리들의 삶의 곳곳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높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 신자로서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한나는 계속해서 자신의 기도의 응답을 통해서 발견한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그녀가 고백하는 하실제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한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했습니까?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앉고 일어서는 것까지도 다 아시고 마음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생이 그 분 앞에서 잘난척 하는 것을 가만 두고 보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서는 어떤 힘센자, 부자라도 자랑할 수 없고 약한 자, 가난한 자라고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4절 용사의 활은 꺽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이 말의 뜻은 무기를 가진 용사라도 끝까지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넘어뜨리는 날이 온다는 것이고 실패한 자도 겸손히 회개하며 주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를 일으켜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 5장을 보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이 천 명이나 되는 신하들을 불러다가 술을 마시면서 예루살렘에서 탈취하여 온 잔을 가져오라 해서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또한 그들이 만든 신들을 찬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이 보는 맞은 편 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손가락들을 보고 크게 근심하면서 다리를 떨면서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 때 부친의 시대에 큰 지혜자로 알려진 다니엘을 불러서 그 글을 해석하게 했습니다. 그 글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니엘을 그 글을 해석하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였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높아짐으로 왕위가 폐한 바 되고 들나귀와 같이 되고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것을 알고는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부친의 그 역사를 다 알고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고 성전 그릇으로 술자리의 흥을 내면서 알지도 못하는 우상들에게 찬양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니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 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뜻은 이것입니다. 메네는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는 것이요 우바르신은 나라를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의 행동을 달아보시고 기준에 모자르게 되어 그를 치셨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3-4 말씀처럼 가난한 자들, 우는 자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할 수 있고 그 분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자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을 바라고 있을 때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5절 상반절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재정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 가리라 잠 23:5
하나님은 주리던 자들 곧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고된 일을 하지 않고도 배부르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경우에서 부자였던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시며 또한 다시 부자를 만드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욥은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을 때에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 1:21절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고백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의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아합의 악정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거기에다 엘리야가 왕의 잘못으로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할 것이라 하자 실제로 모든 지경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가뭄이 들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시돈지경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는 그리고 갔습니다. 그 성문에 이를 때에 나무 줍는 여인을 만났고 그에게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게 마시게 하라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가 청합니다.
그 과부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입니다. 이제 아들을 위해서 한 번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다고 안타까운 현실을 이야기합니다.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하면서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느니라는 응답을 주었습니다. 실제로 그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비상한 방편으로 가난한 성도들을 먹여주시고 그 어려움을 벗어날 길을 주십니다.
5절 하반절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기서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한나 자신을 가르킵니다. 많은 자녀를 둔 자는 브닌나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은 사무엘 하나였지만 그 아들이 일곱 아들과 같이 귀하다는 표현이고 자녀를 많이 둔 브닌나는 약해지고 잠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나의 경우와 비슷한 룻기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나오미는 기근시에 남편 엘리멜렉, 아들 둘과 같이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아들 둘 다 장가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곧 남편과 아들 둘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 후에 나오미가 쓸쓸하게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자부들이 함께 오려고 하지만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나오미의 하나님을 따를 것이라는 결심과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베들레헴에서 먹고 살기 위해 이삭을 줍던 룻은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알고 보니 보아스는 씨가 끊어진 나오미 가문에 기업을 이을 자입니다.
결국 보아스와 룻이 결혼식을 올리고 그 사이에서 오벳이 태어났는데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룻기 4:15 며느리가 낳았지만 기업무를 자 보아스를 통해서 엘리멜렉의 직계로 나오미의 자녀로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정도로 끝내지 않고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하고 그가 다윗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룻은 이방여인으로서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는 영예를 맞게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6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말씀을 듣는 중에 오늘의 말씀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떠오르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8절까지의 주제는 ‘인생을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이라고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이 주제를 구원역사의 관점에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약자 또는 죄인에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준을 가지고 타인이나 자기 자신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두고 행하십니다. 때로는 가장 연약한 자를 통해서 가장 무지한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써 가십니다. 라합은 여리고성 안에 있는 술집여성이었습니다. 성경은 창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능력과 구원의 소식을 듣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자신의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가 들어와서 여리고를 무너뜨릴 때 라합과 그의 가족들만 살아남는 은혜를 받습니다.
그녀는 젊은 지도자 살몬을 만나서 결혼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낳습니다.
다윗의 직계 조모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속에 영광스러운 여인으로 기록됩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인생을 완전히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르고 이방신을 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죽음 뒤에 영원한 심판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형제에게 라가 바보라고 하는 것도 큰 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죄와 마음속에 품은 미움 등으로 잡혀갈 일이 없기 때문에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것도 상을 잃지 않는 것처럼 내가 말한 것과 생각한 것 중에 작은 죄 하나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 부패한 마음속에서 가진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 이 모든 죄가 낱낱이 고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에 3번만 죄를 짓는다고 가정했을 때 1년이면 천 번 이상이 되고 80평생으로 계산한다면 8만 번입니다. 한 두 번의 범죄로도 재판관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런 큰 중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니 내 힘으로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어떤 구원의 방편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불못에서 형벌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로마신화에 보면 프로메테우스가 동물들에게 너무 많은 선물을 주는 바람에 인간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게 되자 모두가 반대하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함으로 제우스의 미움을 받아 코카서스 산꼭대기에 끌려가 끊어지지 않은 쇠사슬에 묶이게 됩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독수리가 날아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은 다음 날이면 다시 생겨나서 독수리에 의해서 간을 쪼이는 끝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프로메테우스와 같이 구원받을 아무런 소망이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제물을 죽여서 우리의 죄를 속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 1:13-14
영원한 심판을 당해 마땅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를 자유의 나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이 소식이 바로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지 않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 1:16
계속해서 사도바울은 고전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1절
전도라는 미련한 것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교회 나오세요 이런 방법으로 구원한다는 것이 때로는 미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인류 구속의 역사를 써가셨고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우리가 구원을 전하는 자로서 보여지게 됩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나만 누리고 있다면 너무나도 이기적인 신자일 것입니다. 모두가 구원받아야 하는데 먼저 예루살렘과 온 유대로 부터라고 했으니 내 가족, 내 형제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5월 3일 전교인 출석과 가족초청주일을 갖습니다.
전도부에서 준비했습니다. 너무나 예쁜 카드입니다. 이 카드를 받으면 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카드를 전달하면서 손을 한 번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아줌마의 손이 따뜻하지 않습니까? 성도의 손으로 전달해주시고 축복의 말 한마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계속해서 영혼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9-10절은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을 예언하는 노래입니다.
대략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입니다.
악인들을 잠잠하게 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을 힘으로 이길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입니다.
결국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심판하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입니다.
이는 가깝게는 사무엘과 그가 기름을 부은 다윗의 통치에 관한 예언입니다. 사사시대때에 이 나라에게 치이고 저 나라에게 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 왕 때에 와서 강성한 나라가 되면 주변국들을 통치하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의 출생은 그 시대의 여명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는 것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은혜의 나라에 대한 예언적 찬양이었습니다.
다니엘 2장에서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다니엘이 해석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가 꾼 꿈은 신상에 대한 것인데 그 신상은 머리는 순금, 가슴과 두팔은 은, 배와 다리는 놋 ,종아리는 쇠 발의 일부는 쇠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려서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날라 가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에 강성한 나라들이 오고 오는 세대에 계속 세워졌지만 모든 나라도 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 한 나라 곧 국권이 하나님께 속해있고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서게 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왕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나라였고 한나가 예언적으로 노래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게 될 나라였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의 현장을 통치하시도록 우리의 경영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한 주간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나의 모습, 나의 일을 통해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메시야의 통치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나의 신앙고백
삼상 2장 6~10절 / 박종순목사
사무엘상 2장은 한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무엘을 낳은 후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의 내용을 기술한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구구절절 신앙고백으로 엮어져 있으며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차 있습
니다. 본래 한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엘레 제사장이 책임자로 있던 성전에서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기도응답으로 하나님이 사무엘을 선물로 주셨고 그에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 사무엘2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특히 본문 6 - 10절은 한나의 신관이 그의 기도를 통해 고백되고 있음을 밝혀줍니다.
1.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6절을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라고 했습니다. 성경 그 어느 곳을 보아도 생명은 네것이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시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산절로 수절로' 라는 것입니다. 산과 물이 절로 생겼다는 시조인데 그것은 넋두리에 불과합니다. 하늘과 땅, 강과 바다, 산천초목은 물론, 짐승과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화론입니다. 이 진화론은 공산주의 이론 못지않게 무섭고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진화과정을 거쳐 인간이 됐다는 것이 진화론이기 때문에 창조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는 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도, 생명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생명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둘은 구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 : 1을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고 했습니다.
시편 2 :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고 했습니다.
남이 살던 집도 내가 돈주고 사면 내집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4 : 8절에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신앙을 소유했던 한나 역시 "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은 생과 사의 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무조건 죽이고 무조건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살려주시고 안믿으면 죽이신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3 : 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했습니다. 본문 6절 하반절을 보면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며 올리게도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이말의 뜻은 믿으면 천당으로 올리시고 안믿으면 지옥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즉 영생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전권이라는 것입니다. 중세기의 로마천주교회는 죽은 자를 위해 산자들이 기도하면 그 영혼이 음부에서 낙원으로 옮겨가고 죽은자의 영혼을 위해 헌금을 많이 하면 그 헌금액수를 따라 죽은 영혼이 낙원으로 옮겨간다는 허무맹랑한 교리로 교인들을 현혹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면 죽은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등 낙원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낮추는 망발이 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전권입니다.
내 생명이라고 해서 내 맘대로 하면 안됩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빈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하나님은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도 주관하신다는 것이 한나의 고백입니다.
욥기 1 : 21을 보면 욥의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5 : 19을보면 "재물과 부요를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로마서 8 : 15을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잘되고 성공하고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 : 13을 보면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 아버지는 나에게 실패를 주셨는가?, 왜 질병의 고통을 주셨는가?, 왜 슬픔을 주셨는가?, 왜 나를 절망에서 건져 내지 않으시는가? 라는 의문과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첫째, 기도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며칠전 극동방송 사보에 실린 알로에 마임 회사의 홍해실 전무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남편이 여덟 번째 사업에 실패하고 밤낮없이 찾아오는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다 못한 남편이 서로의 행복을 위해 이혼을 제안하기에 이르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 : 17 말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은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느니라."는 말씀을 붙잡고새로운 용기를 얻어 임마누엘이라는 식품회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주일성수 못하고 장사했던 죄를 회개하고 총매출액의 1%는 선교와 구제를 위해 쓰기로 하고 옥토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94년부터 생산업에 뛰어들어 회사를 「알로에 마임」으로 바꾸었는데 1년만에 300%매출 신장을 가져왔습니다.
96년 가을 인천 남동공단 안 대지 2천평에 공장 면적 1500평 규모의 공장을 건축했습니다. 요즈음 같은 불황에도 금년 매출 목표를 1200억으로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계산에 빠른 자는 큰 돈을 못 번다."는 것이 그들의 철학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회사를 가본 일도 없고 사장 내외를 만나본 적도 없고 그 회사에서 어떤 제품을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하나님께 내 사정을 말씀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스위스가 낳은 세계적인 의학자 폴 토우르니에(Paul Tournier)가 쓴 책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결핵균에 의해 결핵이 발병됩니다. 그러나, 그 결핵균은 반드시 결핵 환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결핵 환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결핵 환자가 안되느냐? 그것은 마음 속에 갈등이 일어나면 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전문가들은 그것을 심리 요법이니 상담 요법이라고 말합니다. 약물로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와 만나서 자기 내면의 갈등을 털어놓고 심리적 치유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의 말을 다 들어줄 수는 없고 들어 준다고 해도 완전한 해답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어떤 하소연도, 어떤 넋두리도 어떤 고민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전문 치료자, 전문 상담자가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독이 무엇입니까? 혼자 있는 것이 고독이 아닙니다.
"나 아퍼, 나 힘들어, 나 피곤해, 나 좀 쉬고 싶어, 나 좀 도와 줘."하고 말을 건넬 상대가 없는 것이 고독입니다.
그러니까 군중 속에 파묻혀도 고독한 사람이 있고 깊은 산 속에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도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다. 아바 아버지!를 외치며 기도합시다.
지난 주간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 총장님을 만날 일이 있어 총장실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용건에 관한 얘기가 끝난 후 함께 기도하고 일어서는데 김세열 총장님이 총장실 곁에 있는 기도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실 크기는 한평 정도였고, 벽은 베니어 판으로 막아 만든 방이었습니다. 40센티미터 크기의 상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십자가 상이 그리고 상 위에는 성경책이 펼쳐 있었습니다. 저는 그 방을 드려다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코가 찡해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여기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힘을 얻습니다."라는 김총장님의 말씀이 그토록 감동적이었습니다.
기도할 기회 주셨을 때 기도합시다.
나를 낮추고 기도하라고 사건을 주셨을 때 빨리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둘째, 연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독수리는 제 새끼를 공중의 왕으로 키우기 위해 무자비하게 훈련시킵니다.
잠언 17 : 3을 보면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5 : 4을 보면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
라"고 했습니다.
연단을 헬라어로 도키메( )라고 합니다. 그 뜻은 신임하기 위해 시련하는 것입니다. 연단을 통해 신앙이 자라고 인격이 자라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Biola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가 되겠다고 본인이 결정하고 나섰기 때문에 저로서는 마냥 감사하고 대견한 심정입니다. 혼자 가서 공부하랴, 유혹을 이기랴 힘들 것 같아 결혼 후에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솔직히 한국에서 한국말로 공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용케 공부해 나가는 것이 감사하고 대견할 뿐입니다.
아들은 방학이면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며느리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요즘 한국 식당에 나가 4시간씩 일을 합니다. 저로서는 대환영입니다. 그것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생하고 훈련받고 연단을 받아야 쓸모있는 일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이 되면 애굽에서 고생했던 때를 기념하기 위해 쓴나물을 먹고 누룩 넣지 않은 맛없는 빵을 먹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 : 8을 보면 "징계는 누구나 다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참 아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시련과 고통을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기회로 삼읍시다. 그리고, 연단으로 믿읍시다.
3.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0절 끝을 보면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고 싶고 인내하고 싶고 믿음으로 살고 싶지만 내 힘이 미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지 말아야지를 수십번 반복하면서도 다시 나쁜 짓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네 형편입니다.
바로 그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 : 31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새 힘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입니다.
내가 가진 힘, 돈의 힘, 권력의 힘, 건강의 힘은 새 힘이 아닙니다. 낡은 힘입니다. 우리가 당면한 정신적 위기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려면 새 힘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는 1500억불 외채도 우리 힘으로 갚지 못해 IMF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내 힘이나 우리 힘으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힘은 무한한 힘이 있고 유한한 힘이 있습니다. 경제력이나 정치 권력은 유한한 힘입니다.
3월이면 김영삼 대통령도 국가 최고의 권력 자리에서 야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은 피곤하지도 지치지도, 쇠하지도, 그리고 중단되지도 않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망한 자를 흥하게 하시고, 가난한 자를 일으키시고, 낮은 자를 높히시는 것이 새 힘입니다.
여러분, 새 힘을 구합시다.
하나님은 살고 죽는 것과 성공과 실패를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 힘으로 위기를 극복합시다. 그 힘으로 기도합시다. 그 힘으로 신앙을 지킵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삼상 2장 6~8절 / 이영택목사(동해명성교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든 성도들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한 가지 명심하고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생각대로 되는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100달러씩 갖다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기로 한 것입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갔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100달러씩 집 앞에 놓고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둘째 주쯤 되자 현관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고
셋째 주쯤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 하지 않았고
넷째 주가 되었을 때는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갔습니다.
실험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안 주고 가느냐?"고 따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었던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주지 않는 것을 서운해 하고 불쾌해 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알았습니다.
(신 4:29)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렘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한나가 만난 하나님을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든 성도가 만나고, 체험하고, 깨닫는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매우 간절한 기도, 통곡의 기도, 애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삼상 1:13~16)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14)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하니 (15) 한나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내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16)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분됨이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는지라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한나의 기도는 성도들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처럼 할 수는 없으나 엘리 대제사장이 볼 때 마치 주정뱅이가 술에 취에 구시렁거리는 것처럼 오해할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당시 한나는 성전에 올라가 지금처럼 방성대곡하듯 큰 소리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환경이나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음성은 들리지 않게, 입술은 움직이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한나는 무슨 일로 인하여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그토록 애절하게 통곡하며 기도하게 되었는지를 성경에 그 심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닥치는 수모와 멸시, 구박, 천대, 감당할 수 없는 모멸감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사람은 자신이 힘든 상황이나, 어려운 상황이 놓이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시험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 환란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 고난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 괴로운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속에 있는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중에 있는 나를 도우시려고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한나는 환난중에 기도하여 응답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중에 응답받았고, 기도중에 평안을 얻었고, 기도중에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후에 (삼상 1:18)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고하였습니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상2장 말씀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가 서원하여 낳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받칩니다. 그리고 엘리집안의 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 가운데는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사의 권한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합니다.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생명의 열쇠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류최고의 과학으로 생명을 만들지 못합니다.
과학의 미래는 무한합니다. 어디까지 발달할지는 모릅니다.
인간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께서만 주시는 것입니다. 생명에는 항상 영혼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이 있으면 생명이 산 것이고 영혼이 없으면 생명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코에 불어 넣으신 것이 생기입니다.
흙으로 만든 마네킹 같은 조각품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살게 하셨습니다. 살아난 사람을 가리켜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을 사람되게 하신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을 살게 하셨으니 또한 죽게도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생사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끊을 수도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생명을 자기 맘대로 끊는 사람은 천국도 못합니다. 자기 생명의 대한 살인죄를 하나님께 짓는 무서운 범죄행위입니다.
화복의 주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의 노력과 수고는 먹고 살기위한 노동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 3:17~19)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은 부자되는 목적으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인간에게 이것을 형벌로 내리신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업으로 정해주신 것입니다.
평생 먹고 살기 위해 허둥대다 결국 때가 되면 흙에서 취함을 받은 데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 사람입니다.
모든 인생은 노동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인간과 노동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관계로서 죽을 때까지 일을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하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부하게 하시는 사람이 부하게 됩니다.
(잠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잠 10:22)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3.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안에는 미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안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하나님안에는 불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려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내 주변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만다면 그것은 나에게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섬기고 경외하고 사랑해야 하는데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역행 합니다.
결국 불행한 죄인이 더 불행하게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고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두 번째는 생명과 영혼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성도들은 생명과 영혼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생명을 사랑하셨습니다. 영혼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생명이나 거지요 맹인의 영혼이나 천한 자의 영혼이나 부한 자의 영혼이나 예수님은 다 같이 사랑하셨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심같이 모든 이를 사랑하십니다.
죄를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결론:
우리가 믿고 섬기며 경외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지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이든 다 하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허다한 죄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다 덮으시고 가려주시고 용서하시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큰 은혜를 받아 깊이 있게 알고 깨닫는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삼상 2장 6~7절 / 김원효목사
얼마 전 설교를 준비하면서 영감이 떠오르는 말을 구글 서치엔진에다 적어보았습니다. 영감이 오는 말은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러자 가장 첫 번째 나오는 글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된 신앙생활의 시작’이란 글이 나왔습니다.
곧 바로 클릭해서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2021년 12월 6일 국민일보에 나왔던 기사 내용입니다. 국민일보 종교란에 보면 목사님들의 글들이 정기적으로 올라오는데 아마 그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쓴 분의 이름을 보면서 “어- 손문수 목사님이네! 반갑다. 요즘 뭐하고 지내시나?”라는 말이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손문수 목사님은 지금 ‘동탄 순복음 교회’ 담임 목사님이신데 제가 36년 전 쯤에 오산리 순복음 기도원에서 전도사로 있을 때 두 명이 같이 쓰는 기숙사의 룸메이트였습니다. 그 분이 저보다 나이가 한두 살 많지만 신학교는 제가 선배였고 그 분이 후배였습니다. 이 분이 국민일보에 쓴 글의 제목과 오늘 제가 설교하는 제목이 일치합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이 이 제목을 보면 “뭐- 뻔한 내용이겠네. 다 아는 사실인데 새삼...” 하고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제목일는지 모릅니다. 즉 이 설교 제목과 내용은 너무나 잘 알려진 신앙생활의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이런 기초 내용을 다시 설교하는 것은 요즘의 제 설교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최근 제가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매우 안타깝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이곳 캐나다 땅에 이민 와서 사는데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먹고 살기가 바쁘고 힘들다는 겁니다. 더구나 COVID-19 시대가 지난 후 인플레이션이 다가오고, 집값 및 렌트비가 급격히 올랐습니다.
그에 따라 각종 생활비도 크게 오르다 보니 먹고 살기 위해 이리저리 뛰게 되고, 결국 몸과 마음이 지치고 환경도 막혀서 주일에도 교회에 못 오시는 분들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 이거 안 되겠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전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일단 교회에 열심히 잘 나오는 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아니, 교회에 나오면 밥이 생깁니까? 쌀이 생깁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고 돈이 생깁니까? 오히려 시간 낭비하고, 돈 들어가고, 피곤해지는 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신앙의 체험이 확실히 있으신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목사님, 하나님 잘 믿으면 쌀도 생기고, 빵도 생기고, 돈도 생깁니다. 한국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손해나는 장사를 합니까?”
즉 하나님을 잘 믿으면 뭔가 삶의 현장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겁니다. 아멘이지요? 그러나 아직까지 신앙의 체험이 확실하지 않으신 분들은 이렇게 대답하시는 분들을 보고 고개를 꺄우뚱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혹은 “그거 기복신앙이나 미신 아니야?”라고 부정적으로 볼는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최근에 몇몇 신학자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가리켜 “그거 번영신학 아니야?” 하고 비판하시는 분들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번영신학’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번영신학’이 좋은 말일까요? 아니면 비꼬는 나쁜 말일까요?
‘위키 백과’에 보면 번영신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이란 재정적 축복이나 물질적 풍성함이 항상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신앙이 자신들의 물질적 부를 증가시킨다고 믿는 반성경적 신학이다. 번영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가 안정과 번영을 준다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으로서 성경을 이해한다.
번영신학의 교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성경해석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신학이다. 샤머니즘에 뿌리를 둔 번영신학은 성경적 관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기독교의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며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 않는다. 번영신학은 한국교회의 세속화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자- 어때요? 이 글을 읽으면 뭔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고, 이 글이 나와 생각이 같으면 기분이 좋으실 테고, 이 글이 나와 생각이 다르면 기분이 상당히 나쁘실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것을 강조하는 대표적 번영신학자들 중에 한 분에 조용기 목사님의 이름이 나오고,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거론됩니다.
여러분, 순복음 교회의 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입니다. 오중복음이란 첫째, 중생의 복음 : 예수님 믿고 거듭나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둘째, 신유의 복음 : 예수님 믿고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겁니다.
셋째, 성령 충만의 복음 : 예수님 믿고 성령 충만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능력 있는 신자가 된다는 겁니다.
넷째, 축복의 복음 : 예수님 믿고 축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다섯째, 재림의 복음 :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삼중축복이란 영혼이 잘되는 축복, 범사에 잘되는 축복, 강건하게 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때에 항상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이겁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여러분,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면 잘못된 신자인가요? 하나님을 믿고 이런 축복을 받는다고 설교하면 성경과 어긋난 잘못된 설교인가요? 여러분, 성경을 보다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정반합의 논리적 방식이 필요합니다. 한쪽으로 치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축복을 받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는 자의 고난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지고 갈 십자가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오직 이것만 강조하면서 하나님 믿으면 늘 고난이 오고, 계속 고통스런 일만 생긴다고 하면 그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번영과 건강은 모두 샤머니즘이고 미신이라고 하면 이거야말로 매우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성경의 처음 책인 창세기부터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큰 주제를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은 축복과 번영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과 번영이 임한다 수없이 말씀합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 역사가 증명하고, 세계 역사가 증명하고, 한국 역사가 증명하고, 성경이 증명하고, 그리고 오늘날 너와 내가 중인입니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면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면 하나님을 믿지 말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나님 믿고 저주 가운데 사는 것보다 축복 가운데 나눠주고 베풀며 사는 것이 더 좋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하나님을 잘 믿은 욥의 고난도 나오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다가 심한 고통을 당하고 처참하게 죽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고난만 오고,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난다고 말하고, 그렇게 고난만 당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신자라고 말하면 그건 성경을 한참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자칫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 까다로운 하나님, 복잡한 하나님, 저주의 하나님으로 비춰지게 합니다. 이는 결국 마귀가 박수를 치고 좋아할 일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축복의 복음을 잘못된 번영 신학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어라- 자신들도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나 자기의 가족 식구들이 병이 들어 아프면 치료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니, 그건 샤머니즘이나 미신이라고 하면서 본인들은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이것도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이중 잣대입니까? 아- 저는 이런 내로남불 신학자들 참 싫어합니다.
아니-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으면 남들도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하고,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았으면 남들에게도 “하나님 믿고 복 받으세요.”라고 복을 빌어줘야지요. 왜 자신은 하나님께 이런저런 복을 다 받고 나서 남에게는 “병들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얄밉게 말을 합니까?
여러분, 저는 누가 뭐래도 우리 순복음의 축복의 신앙을 좋아합니다. 저와 우리 집안은 순복음 교회에서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축복을 받고, 이전보다 더 큰 삶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증하며 전도하고 설교합니다. “애들아, 내가 하나님을 믿어보니 너무 좋다. 같이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하나님께 복을 받자.” 아멘이지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 외국 땅에서 먹고 살기에 바쁘고 힘들다고 하나님을 멀리하고, 주일 예배도 빠지고, 자기 힘으로만 사는 사람들이 잘못되고 타락한 신앙이지,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잘 믿고, 열심히 예배에 나오고, 그 결과 하나님께 복을 받는 분들은 도리어 하나님 중심주의의 올바른 신자가 아닙니까?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이 외국 땅에까지 와서 불행하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주가운데 빠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축복 받고 행복하기를 강력히 소원합니다. 건강하게 살기를 매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천국에 무사히 도착하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큰 상급을 받기를 너무도 갈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본문은 ‘한나’라는 여인이 하나님이 주신 어린 사무엘 아들을 하나님의 성전에 봉사자로 바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즉 너와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씀합니다.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애3:38)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 받아서 전하는 복음은 글자 그대로 복음입니다. 즉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으면 복이 임하고, 기쁘고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 유명한 신명기 28장 말씀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28:1-6)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번영의 하나님이요,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건강 주시기를 원하며, 축복 주시기를 원하며, 생명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누구에게요? 이 외국 땅에서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일을 먼저 하는 너와 나에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여러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우리들의 축복이고 번영이고 행복입니다. 아무쪼록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이 외국 땅에서도 더욱 가까이 하고, 더욱 열심히 잘 믿으므로 더 큰 축복과 번영과 행복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삼상 2장 6~10절 / 박종순목사
옛날이나 지금이나 과학이 지향하는 최종목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과학을 만들고 그 과학은 인간을 위해 보다 편리한 삶의 조건과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을 생명과학입니다. 학문적인 용어로는 휴먼게놈 프로젝트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매 생령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인간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와 똑같은 아들을 만들기 위해 유전자 복제를 통해 아들을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그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 쌍둥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 아들이 아버지를 형님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과학은 대립관계나 충돌관계는 아닙니다. 이유는 과학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산물이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안에 과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경제가 있고 정치가 있어야 그것들이 정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성경에서 생명의 시작과 삶의 원리를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7:25을 보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고 했고 창세기 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우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고 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본래 불임증 환자였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사랑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주변의 외면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내놓고 간절히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낳은 아들이 위대한 지도자 사무엘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녀가 사무엘을 낳은 후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몇 가지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1.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6절을 보면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구원과 멸망, 천당과 지옥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5을 보면 "마땅히 두려워 할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용서받는 것은 어렵습니다.
순간적 분노 폭발로 살인죄를 범하고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성격과 삶, 생각과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19년 되던 해 그는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죄는 순간에 짓고 사면은 19년 걸렸습니다.
질병은 순간에 걸립니다. 그러나 고치는 것은 순식간에 고칠 수 없습니다.
실패는 순간에 가능합니다. 그러나 회복은 순식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도 순간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시고 지옥 갈 자를 천당으로 이끌기도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나사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의 무덤을 예수님이 찾아 가셨습니다. 그의 누이 마르다는 이미 썩어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
"돌을 옮겨 놓으라 "
"나사로야 나오라 "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빌라도 총독도 헤롯대왕도 산헤드린 국회도, 제사장도,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건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죽은 자를 살리시며 멸망에 빠진 사람을 구원하시며 지옥 갈 사람을 건져내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신 것입니다.
누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십니까? 생명을 만드신 하나님만 가능합니다.
앞에서 잠깐 생명과학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만 체세포 유전자를 검색해 질이 나쁘거나 잘못된 유전자는 빼버리고 좋은 유전자만으로 인간을 복제해 가장 질 좋은 인간을 만들었을 경우 보나마나 인간들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었다. 우리는 신이 하던 일을 해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 "고 떠들고 교만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나 유전자 자체. 즉 생명의 씨앗, 뿌리는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제인간을 만들 수는 있지만 그 인간도 어느 날엔간 병들고 늙고 죽게 될텐데 그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인간이 죄짓고 지옥 가고 멸망하는 것을 유전자 감식이나 배아복제방법으로는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첨단 과학도 인간의 죄 문제, 영혼구원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죽을 영혼을 살리고 멸망할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린 여기서 단순명료한 진리 앞에 설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습니까? 누가 구원받고 누가 멸망합니까? 누가 천당하고 누가 지옥갑니까?
예수 믿으면 살고 구원받고 영원한 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안 믿으면 누구라도 죽고 버림받고 지옥갑니다.
요한계시록 18장을 보면 마지막 심판의 모습이 나옵니다. 음행하고 사치하던 자들이 울고 가슴을 칩니다(18:9). 치부하며 돈을 모은 재벌들이 울고 애통합니다(18:11, 15). 세계를 돌며 여행을 즐기던 선장들과 선객들과 부호들이 울며 애통하며 소리 지릅니다(18:17-19).
이유는 최첨단 문명을 자랑하며 떵떵거리던 바벨론이 멸망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야 합니다.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에 관해 알지 말고 예수를 영접하고 그 말씀대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2.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십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고 했고, 8절을 보면 "가난한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흥망성쇠를 장악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천대받고 멸시받던 불임녀였습니다. 그를 하나님이 높혀 위대한 종교지도자, 영적 지도자, 정치지도자, 민족 지도자인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아직 한나가 낳은 사무엘은 어린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사무엘을 통해 그런 믿음과 비젼을 본 것입니다.
크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크기로 보면 앗수르나 바렐론이나 애굽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그 둘을 이겼습니다.
학벌 좋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떠나신 고 정주영 회장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입니다. 성공과 실패, 흥성과 패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얼마전 들은 얘기입니다.
여자들 루즈 색깔과 국가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핑크나 빨강색 루즈를 바르는 것이 유행을 탈 때 한국경제는 상승지수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어둡고 시꺼먼 루즈를 바르기 시작하면서부터 IMF가 터지고 경기가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거품경제로 호황을 누리고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있을 때 주차장이나 동경시내를 둘러보면 온통 자동차 색깔이 하얀색 일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차색깔이 검정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일본경제가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통계도 근거도 없는 이야기들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 풍요와 빈곤, 발전과 퇴보가 색깔로 결정되고 바뀔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망할 사람도 없고 실패할 사람도 없을거라는 것입니다.
정치인이나 고위 관리들, 그리고 재벌들, 연예인들 가운데 점쟁이나 운명철학가들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들이 운명을 결정해 주고 길흉과 성패를 예언해주고 막을 길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운명철학가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명성을 날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주팔자, 관상, 운명을 귀신같이 알아 맞추고 복채에 따라 처방을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자기 점궤나 운명진단이 틀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꼭 망할 사람인데 망하지 않고 꼭 병들어 누워있어야 할 사람인데 건강하게 활보하고 있고 죽을 사람인데 잘 살고 있는 케이스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후와 배경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그들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예수가 궁금했습니다. 가난을 풍요로 바꾸는 예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예수,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예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예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예수 그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연구하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다 때려치우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값비싼 부적이 운명을 바꿉니까?
액운을 막아 줍니까?
현대의학이나, 정치적 배경이 나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줍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헬라의 알렉산더는 헬라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잠자리에 눕기만하면 코를 골며 잠을 자곤 했습니다. 어느 날 신하가 물었습니다. "대왕은 어떻게 그런 위험속에서도 그처럼 편하게 마음놓고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 그의 대답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파르메니온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였습니다. 파르메니온 장군은 알렉산더의 수행명장이었습니다.
시편 4:8에서 다윗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흥하고 망하는 것, 잘되고 안 되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넘어지는 것과 회복되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때 평안이 오고 평안이 와야 기도와 찬송과 감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과 구원과 영생과 성공과 회복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명안을 주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인가
삼상 2장 6~8절 / 김홍도목사
몇 일 전 미국 사람이 쓴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을 읽는데 제목과는 달리 읽을수록 심령이 가라앉고 기도의 불이 꺼지는 것을 느끼게 돼서 절반쯤 읽다가 찢어서 쓰레기통에 넣고 말았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의 축복을 구해도 안 되고 물질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해도 안 되고 전부 안 된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기도하시지도 않았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요사이 “물량주의”가 어떻고 “기복신앙”(祈福信仰)이 어떻고 하면서 날카롭게 비판하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한 마디로 고상한 불신앙이며 믿음을 무너뜨리는 자들입니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의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 때문입니다. 이 칸트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이 “기복신앙”(祈福信仰 Gunstwerberei, favorseeking religion)이라고 배척받아왔고, 이와 같은 자유주의 신앙의 노선을 따라 온 세계 교회가 기도를 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 보다 인간의 이성을 따르는 합리주의(合理主義),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칼빈(John Calvin, 1509-64)은 간구(Petition)가 기도의 핵심이라고 했고,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서 얻으려 하지 않는(obtain something through petition) 기도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구할 때에는 반드시 줄 것을 믿고 구하라고 했습니다(기독교 강요 3권 20, 6). 이와 같은 초자연주의 신앙을 칸트의 합리주의 철학이 깨뜨려 버린 후 구라파와 미주의 교회는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총체적인 불신앙에 빠져 많은 교회들이 죽어 버렸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절실히 하나님께 구해서 ‘무엇을 얻어야 할’(obtain something) 필요가 없는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한철하 박사님이 칼빈의 말을 빌어 역설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이 절실한 요구를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인도하지 않는다면 참다운 목회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본주의나 합리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전부가 초자연적인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특히 ‘복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복을 구하지 않는 자는 심중에 몰래 다른 곳에서 얻을 것을 계산하고 있는 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빠지지 않고 뜨겁게 기도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인본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와 교수들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여 얻는 것이나 복 받기 위해 헌금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교회를 죽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계속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여 계속 축복을 받고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석녀였던 한나가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 미친 듯이 전심으로 기도하여 아들 사무엘을 낳고 쓴 신앙고백의 시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이 하나님께 복을 구하지도 않고 어떻게 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민수기 6장 22-27절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축복해 주라고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에게 복을 빌어 주라(祈福) 하셨는데 왜 “기복신앙” 이니 “샤머니즘”이니 하고 불신앙의 말들을 합니까? 물론 기독교는 샤머니즘과 같이 죄를 따지지 않고 도덕적인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복을 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서 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의 차원이 높고 다를 뿐이지 하나님께 복을 빌고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성경에 수많은 하나님의 명령이 있는데 그 명령을 하실 때마다 “그렇게 하면 이런 복을 주리라”고 꼭 보상 혹은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그리하면 장수하리라”,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그리하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리라”, “말씀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와도 들어가도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것이나 복을 비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를 번제물로 드리라고 했을 때 순종했더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거룩하시고 고상하기 그지없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냥 제물로 죽어 없어지기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 17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유치하신 분입니까?
하나님의 보상을 믿고 축복을 기대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지 그릇된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모세가 공주의 아들의 신분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 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상과 축복을 믿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것은 고상한 불신앙, 허무주의인 것입니다.
2. 축복을 바라고 헌금하는 것은 잘못인가?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간구하여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도 비판하고 정성 드려 헌금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는 것도 그릇된 신앙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물질을 드리는 것과 우리의 신앙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하셨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하신 말씀도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재물에 치우쳐 있는 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헌금 넣는 것을 가까이 앉아서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의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를 가장 많이 바친 헌금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헌금 행위를 관심 깊게 보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은 물질의 양을 달아보시는 분이 아니라 정성을 달아보시는 분임을 또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헌금 생활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뇌물을 바치고 그 이권을 따내려는 것과 같은 불순한 마음으로 헌금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일부를 바칩니다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 축복을 받아 내 육신 편안하게 살고 세상 쾌락을 누리려는 마음에서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쓰려는 목적으로 헌금을 해야 됩니다.
욥은 물질의 축복보다 만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재산이 다 불타고 도적 맞아 없어졌고, 그의 열 남매가 다 죽어 없어졌는데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하며 찬송했습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 부요해 지도록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헌금해야 하나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① 첫 것(First)을 드려야 합니다
같은 분량의 헌금을 드려도 자기가 먼저 쓰다가 헌금하는 것 보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면 기뻐하십니다. 잠언 3장 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였습니다. 몇 주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최근에 여자 장군이 없었는데, 생겨났습니다. 그 여장군의 이름이 양승숙 장군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면서 평생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했더니, 그 집 딸이 한국에서 첫 번째 여자 장군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양에 수 백 년 내려오면서 잘 사는 귀족이 있는데 그 집 식당에 들어갔더니 “먼저 하나님을”(God First)하는 두 글자를 금실로 수놓아 벽에 걸어놓았더랍니다. 그 밑에 글자를 보니까 몇 백 년 되었더랍니다.
요사이도 베드로의 그물에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히게 한 기적을 볼 수가 있는데, 작년 1월 달에 경북 영덕군 남정면 구계리에 사는 김상태 집사님이 남들은 돼지 대가리를 놓고 절하고 푸닥거리를 했지만, 끝까지 거절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당을 지으려고 기도하는 중에 하루는 10Kg짜리 방어가 2,370마리나 잡히더랍니다. 그 방어 한 마리 당 16만 9천 원씩 도합 4억 7천 만원을 벌었는데 다른 그물에는 잡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배당을 지을 계획을 하는데 하루는 5m짜리 밍크고래가 그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 고래는 5천 만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늘날도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목회 하면서 취직하여 첫 봉급 탄 것을 첫 열매로 하나님께 드려 축복 받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② 가장 좋은 것(Best)을 드려야 합니다
말라기 1장에 보면 양떼 중에 흠 없는 것이 많이 있는데 눈 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리니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그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리면 받겠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 제물 가져오지 못하게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제일 좋은 것, 정성이 담긴 것을 드려야 합니다. 가난한 과부가 비록 엽전 두 닙이었지만 그 날의 생활비 전부를 바쳤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장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 뿐인 독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독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드리려 할 때, 다른 산양을 준비하셨다가 대신 드리게 하시고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세기 22장 17절)고 축복하셨습니다. 천국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저는 토요일이면 설교 준비에도 바쁘지만, 헌금 준비에도 바쁩니다. 새 돈으로 감사할 일을 생각해서 준비합니다.
③ 마지막 것(Last)이라도 드려야 합니다
헌금할 때는 때때로 목숨을 거는 모험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3년 반 비가 안 오는 흉년 기간에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병에 남은 기름을 순종하여 드렸더니 흉년이 다 지나도록 밀가루 통의 밀가루와 기름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했습니다.
지난 번 부산 수영로 교회에 갔다가 정필도 목사님의 은혜로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교회에 김종호 장로님이 계신데 IMF가 터지면서 부도나기 직전이었는데 건축헌금 2억을 가져오면서 부도나기 전에 건축 헌금이나 드리겠다고 하더랍니다. 직원을 다 감원해서 몇 명밖에 안 남았었는데, 다른 회사는 다 문을 닫았기 때문에 주문이 쇄도해서 미쳐 만들어 낼 수가 없을 정도가 되더랍니다. 그 다음부터는 걸핏하면, 1억 씩 또 드리고 또 드리곤 하더랍니다. 헌금하는 재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구약의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것이라도 드릴 때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귀한 것을 드리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오면 하나님이 큰 축복을 예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축복 받는 방법은 온전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계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험한 축복의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돈이 아까우면 시험해 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목사가 십일조를 안 가르치고 헌금을 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성도들을 복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나쁜 사람입니다.
주의할 점은 헌금하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도박을 한다든지, 신용카드를 남발하는 일, 규모 없는 생활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