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한남동의 기획사 연습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자들이 리드미컬하고 분위기 있는 노래에 맞춰 춤 연습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팔에 어설프게 붕대를 감은 찬영도 있다.
쾅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가 들어온다.
“윤찬영 어딨어? 나와 봐!”
찬영은 불량한 표정과 몸짓으로 우락부락 남자를 따라 나간다.
둘이 간 곳은 사장실. 아이돌과 연기자들의 브로마이드로 도배된 사무실의 한 가운데, 6인용 테이블이 있다. 사장실 치고는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소박한 모습이다. 테이블 옆 소파에 근심어린 표정으로 앉아있는 은색 양복의 중년 남성. 무표정으로 사무실에 들어오는 찬영을 쓱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쉰다.
“찬영아.”
“네, 사장님.”
“『내 반쪽이 되어줘』, 너가 나가라.”
“네????”
“병원에서는 환자 건강이 최우선이라 하지, 방송국 측에서는 대체자라도 내보내라 하지.. 시몽은 아무래도 힘들 듯 하다. 대체자를 밤새 고민했는데, 성격 보다는 얼굴이야. 너가 나가.”
“아니 근데 무슨.. 다음주가 첫 촬영 아니에요?”
사장은 일어나 찬영의 어깨를 잡는다. 비장하게.
“그래. 너 이게 마지막 기회다. 우리 회사에도 마지막 기회야. 그 열쇠를 지금 너한테 주는거야 내가.”
찬영의 미간이 좁아진다. 표정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5 동자의 보습학원.
10시가 넘은 늦은 밤. 잔머리 하나 없이 올린 포니테일과 뿔테안경. 그리고 시크한 표정이 참으로 도도해보이는 여선생이, 동자와 함께 교무실을 빠져 나오고 있다.
“안녕히 계세요~”
“내일 봬요, 원장님.“
학원 문을 닫자마자 원장 욕을 시작하는 포니테일.
“아오 정말 더러워서, 잔소리는. ”
동자는 그런 포니테일이 귀엽고 정겨워 씩 웃으며 쳐다본다.
“동자쌤, 아니 내가 그렇게 불평이 많아? 아니 2년을 같이 일한 직장 식구로써, 건의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무슨 내가 말만 하면 ‘도도선생님은 불만을 입에 달고 사시네요.’ 허! 참! 내가 여기 말고 갈 데가 없는 줄 알어?”
“도도쌤, 다 듣겠어요 안에서.”
“아 열받아 진짜. 어? 저기 지민씨 왔나보네?”
‘지민’ 이라는 말에 놀라서 앞을 획 보는 동자. 맞다. 저기 학원 현관 앞 거대한 뒷모습은, 그 사이즈가 딱 지민의 키이다.
“지민씨~”
동자보다도 몇 백 배는 더 반갑게 달려가는 도도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으로 반기는 지민.
“도도쌤~ 보고싶었어요!”
“헤이 미스터 한! 미국 물 좀 먹고 왔음 영어로 반겨야지, 나를!”
오지 말라니깐, 기어이 왔네.
동자는, 요란스러운 둘의 재회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다.
“어우, 미스터 한 잘생긴 미모는 여전하네. 근데 어째 살이 더 빠진 것 같애? 동자쌤이 속썩여?”
“아뇨~ 제가 동자 속을 썩였죠. 도도쌤은 더 예뻐지셨어요. 살도 좀 빠지신 거 같은데요? 아, 이것 좀 드세요.”
영광은 상냥한 표정으로 꼭 쥐고 있던 캔커피를 도도쌤에게 쥐어준다.
“어머~ 역시 지민이밖에 없네, 내가 너희 커플을 미워할 수가 없다니깐. 동자쌤 거기 왜 가만히 서있어?”
1년 전이었음 너무도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을 남자친구의 모습인데, 지금은 등에 붙어서 떼어지지 않는 거대한 짐짝처럼 느껴진다. 이런 동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도쌤과 지민의 시끄러운 대화는 멈추질 않고, 동자는 그제야 자신의 핸드폰을 위에 두고 왔음을 깨닫고 학원으로 다시 들어간다.
“동자야 어디가?”
“잠시만~”
살짝 열린 교무실문 틈 사이로 새나오는 작은 빛이, 컴컴한 학원의 복도 한 켠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원장 선생님의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그러니깐 계약직 교사들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니깐.”
동자는 잠자코 서서, 수화기에 대고 이야기하는 원장 선생의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이러려고 들어온 건 아닌데.
“응. 아니 학생이야. 그러니깐. 그 왜 2년 전부터 일한 여학생 있잖아. 응. 응. 구실이야 뭐.. 유아교육학과거든. 어쩔 수 없지 뭐.. 싹싹하고 능력 있긴 한데. 에고. 참..”
작별을 준비해야하나. 동자는 씁쓸하게 뒤를 돌아 다시 학원 문을 나선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지민의 호탕한 목소리가, 안 그래도 착잡한 동자의 마음을 더 답답하게 한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는 동자의 눈에, 발 앞에 구겨져 있는 작은 리플릿이 보인다.
‘논현동 고급 빌라 베이비시터 급구’
동자는 한참을 멍하니 리플렛을 쳐다보다가 구겨진 종이를 주머니에 넣은 뒤, 어렵사리 밖으로 나간다.
#16 동자의 옥탑방.
밤 12시가 넘은 늦은 시각이지만 이 집의 두 주인은, 여느 이십대 여대생의 마지막 일과가 그렇듯 작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놓을 생각을 않는다. 연예 기사를 훑고 있던 지영이 멍하니 핸드폰 사진첩을 보는 동자에게 말을 건넨다.
“동자야, 너 태어난 데가 가람도 맞지?”
“응 맞아. 왜?”
“아니 왜 이번에 유나가 신인 연예인들 데리고 가상 연애 프로그램 찍잖아.”
“아 그래?”
“몇 일 째 인터넷을 도배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냐 기지배. 암튼 그거 첫 촬영지가 가람도래~”
“정말? 신기하다~”
웬만해선 연예 기사는 잘 안보는 동자도 모처럼 검색을 해본다.
‘화제의 『내 반쪽이 되어줘』 첫 촬영지, 물 맑고 인심 좋은 가람도로 확정’
’유나의 『내 반쪽이 되어줘』, 이번 주 주말 첫 촬영. ‘시몽 대타’ 찬영까지 준비 완료!‘
‘국민여친 유나, 『내 반쪽…』에서 네 명의 신예들과 가상연애, 첫 촬영지는 가람도’
‘HKTV의 야심작, 『내 반쪽…』 대망의 첫 촬영지는? 100분의 1 경쟁률 뚫고 가람도로 확정’
‘『내 반쪽…』 첫 촬영지 가람도는 어떤 곳?’
‘국민여친 유나의 『내 반쪽…』, 축구선수 김태현부터 떼제베의 찬영까지.. 누구누구 출연하나’
아무리 연예계에 문외한인 동자라 할지라도 ‘국민여친’ 유나정도는 최근 작품이 뭔지, 어떤 CF에 나오는 지 정도는 안다. 이런 유나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가람도에서 첫 촬영을 하다니… 동자의 눈이 추억에 젖는다. 가람도는 동자의 어렴풋한 어린 시절과 힘들었던 사춘기의 기억이 곳곳에 남아있는, 동자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한 조각에는 지민이 있다.
첫댓글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