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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들아, 들어라. 지혜를 배워라.>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6,1-11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3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그분께서 너희가 하는 일들을 점검하시고 너희의 계획들을 검열하신다.
4 너희가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면서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그분께서는 지체 없이 무서운 모습으로 너희에게 들이닥치실 것이다.
정녕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6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
7 만물의 주님께서는 누구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누가 위대하다고 하여 어려워하지도 않으신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
8 그러나 세력가들은 엄정하게 심리하신다.
9 그러니 군주들아,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을 듣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10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11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19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18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19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임금들의 권력과 통치권은 주님께서 주셨다며,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나,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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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서의 저자는, 권력과 통치권은 주님께서 주셨다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엄격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하느님을 찬송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뿐이었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간청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성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기에 늘 거리를 두어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간청하려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이런 그들의 처지를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손을 대시는 등의 특별한 치유 행위를 하지 않으시고, 그냥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아직 치유받기 전인데도 그들은 하나같은 믿음으로 사제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는 가운데 몸이 깨끗해집니다.그런데 그들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 환자보다 예수님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던 “외국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이런 그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병을 치유받은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진정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뵙고 구원에 이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제1독서인 지혜서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지위 고하, 출신 성분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 곧 지혜를 갈망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옵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 곧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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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 열 사람은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절박한 외침과 딱한 처지를 헤아리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십니다. 하지만 병이 낫자,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겨우 한 명뿐이었지요.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이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급할 때면 “주님, 주님!” 부르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을 때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병이 나아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마리아 사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남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곤 하지 않습니까?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많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서운했던 경우나 상처받은 것들만 기억할 때가 더 많은 듯합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난 나날들을 되돌아본다면 하느님께서 보살펴 주셨기에 가능했던 일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실로 많기만 합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이를 깨닫고 감사를 드렸는지, 오늘 차근히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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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많은 이가 정치에 어떤 희망을 갖기는커녕 오히려 냉소적인 것이 현실인데,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정치인들은 주로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며, 지혜서 6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임금들아, 들어라.” 하고 시작하는 오늘 말씀을 여러 나라 임금들이 읽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지혜서는 구약 성경의 전통을 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책입니다. 게다가 다윗 왕조가 무너지고 오백 년이 더 지난 뒤에 쓴 책이므로, 이 책의 실제 독자는 이방 임금들이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 사회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경종을 울립니다.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의 권력이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통치자들을 “그분 나라의 신하들”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절대 권력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또한 왕권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스리시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도구 노릇을 하는 것이기에, 그 책임이 막중하며 이에 대한 심판도 엄격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다스리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하느님의 다스리심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정의가 백성에게 실현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서는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1,1)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정의는 주님께서 부여하신 세상의 질서이며 사회의 규범입니다. 그러나 지혜서는 추상적인 정의보다는 의인들과 악인들의 생활 태도를 비교함으로써 정의를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지혜를 추구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오늘날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책임이 얼마나 엄중하고 두려운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백성들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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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주님께 다가와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대로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치유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십니다. 육체적 치유와 함께 그들이 사회적 복권을 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로써 새로운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치유의 기적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복음은 치유의 기적이 끝난 곳에서 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열 명이 치유되어 자신의 삶터로 돌아갔습니다. 그중의 한 명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찬양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몸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실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아직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그의 내면에서 자라나는 놀라운 실재가 무엇인지를 대신 말씀해 주십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의 삶을 전혀 새롭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작용하는 그의 믿음은 그의 삶을 온전히 구원할 것입니다. 어느 한 사제는 ‘살아간다’는 단순한 사실이, 모든 사람을 믿음의 상황에 놓는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그래서 종교적 교리의 고백이기 이전에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원초적 현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의 계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사하십니다. 어떤 이에게는 치유처럼 기쁨의 체험일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고난과 상실의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의 사건과 만남들 안에서 믿음의 계기들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삶과 함께 자라난 믿음만이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깊이 대면하도록 이끌 것이고, 그 믿음의 눈만이 삶의 궁극적 의미를 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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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보기에도 끔찍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청원을 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나병은 인간이 걸릴 수 있는 질병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병이라는 뜻입니다. 최근에는 의학의 발달과 높아진 생활 수준 탓에 나병 환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체가 직접 상처 부위와 맞닿지 않으면 전염되지 않는다는 임상 결과까지 나와서, 나병이 결코 ‘천형’이 아님이 확인되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몹쓸 병에 걸린 사람이 나으면, 사제에게 가서 확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 병은 깨끗이 나았지만, 주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람은 사마리아인 한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자신들의 이권만 챙긴 뒤 어디론가 가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구원을 덤으로 주십니다.
믿음이 깊은 사람이 주님께 감사드릴 줄 알고, 더불어 주님께 구원의 은총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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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한센인 열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혼혈인이라며 비웃고 이방인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은 감사드리러 왔는데, 정통 유다인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한센병보다 나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홉’은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은혜를 망각하며 산다는 암시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들은 왜 감사를 잊고 가 버렸을까요? 예수님께 갔더라면 또 다른 은총을 받았을 터인데, 왜 그랬을까요? 너무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랬더라도 그들은 은혜를 망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그렇게 됩니다. 청할 때의 ‘다급한 모습’을 감추려 들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은총에는 감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더 큰 축복으로 인도됩니다. 감사는 은총을 붙잡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아홉이고 감사가 하나이더라도, ‘하나’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바뀌게 됩니다. 기쁨이 아홉이고 불평은 하나인데도 불평만을 잡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지요? 언제라도 시각이 삶을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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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문둥이올시다./ 어머니가 문둥이올시다./ 나는 문둥이 새끼올시다./ 그러나 정말은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 사이에/ 꽃과 나비가/ 해와 별을 속인 사랑이/ 목숨이 된 것이올시다./ 세상은 이 목숨이 서러워서/ 사람인 나를 문둥이라 부릅니다.”
천형의 시인이라 불리었던 한하운의 시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의 한 부분입니다. 일생을 나환자라는 멍에 속에 살다 간 그의 한이 유리 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한과 설움은 오늘날의 현실만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이 병의 출발은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았는지 모릅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려집니다.
레위기에서는, 그 병의 증상이 나타난 사람이 있으면 ‘7일간 격리 수용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검진을 받아 병이 진전되지 않았다면 ‘7일간 한 번 더 수용된 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13,4-5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아픔을 아셨기에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은혜를 망각한 것입니다. 너무 기뻐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을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이라도 받은 은혜에 감사드려야 합니다.
라틴어로 ‘Amor fati’(아모르 파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지요. 운명이 끔찍할 때도 있지만 이 운명에 슬퍼하기보다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안에서 감사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운명을 사랑하면 지금의 내 일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비롯한 나와 관계된 관계를 사랑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나의 감정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저절로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두려움을 내 삶에 끼어들지 않게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드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 감사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듯 운명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보지 못하고 받고 싶은 것만을 떠올리면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수천 번 뛰고 있는 내 심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식사를 할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더군다나 크든 작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기에 감사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주님을 찾아와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주라고 이르시지요. 가서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셨던 것은 이렇게 할 것을 율법이 지시했기 때문입니다(레위 14,2 참조). 이 점만을 봐도 주님께서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신 말씀처럼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이 율법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사람은 열 명이었지만, 다시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나병의 치유라는 커다란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드리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쳐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에 더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쳐주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고쳐주신 분을 먼저 봅니다. 그 결과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큰 구원이라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사람은 구원의 선물까지 받게 됩니다.
삶은 인간만큼이나 말 없는 생명체들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죽음이 아닌 생명을 원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그러하다(달라이 라마).
감사하는 마음.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매일 내용을 달리해서 21일 동안 계속하면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로 변한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평생 비관론자로 살아왔던 84살의 남자도 이 방법을 사용한 결과 낙관론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의 성격 구조까지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성격은 안 바뀌어.”
바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격이 마음에 드십니까? 혹시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길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보십시오. 평생 비관론자로 살아온 사람도 3주 만에 낙관론자로 바뀝니다.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수도자 시절, 삶 자체가 온통 회색빛이던 시절,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쌓여 탈출구가 안보이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혼자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방이 다 적군으로 둘러쌓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은 분노와 불평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영적 지도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사려깊은 신부님께서는 꽤나 어려운 숙제를 하나 내주셨습니다. 우리 수도원의 장점, 경쟁력, 긍정적인 면을 한번 찾아보라고, 그리고 제 구체적인 삶속에 숨어있는 감사꺼리들을 한번 찾아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나 긍정적인 측면, 감사꺼리는 찾아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도 신부님의 각별한 당부도 있고 해서, 기를 쓰고 노력했습니다. 두달 가까이 애써 찾아보고 또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자세를 완전히 낮추고,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니, 전혀 없을 것 같았던 작은 감사꺼리들을 하나 둘 발견했습니다. 시건이 흐를수록 감사꺼리들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방이 온통 은총과 축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간 제 눈이 어두워 지천으로 널려있던 선물과 장점, 기쁨과 감사꺼리들을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결론을 내릴수 있었습니다. 제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감사의 미덕의 결핍!' 이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자신있게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속적인 영혼의 평화와 행복의 비결은 항상,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데 있다는 것을!
자신과 동료 이웃들, 공동체와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분들에게 꼭 권장하고 싶은 일이 생겼습니다. 축복 노트, 감사 노트를 한권 장만하라고. 불평불만들은 자비하신 주님께 모두 맡겨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은총과 축복, 주님께서 주신 선물과 감사꺼리들을 하나 하나 적어보시라고.
모든 감사꺼리들을 다 적었다고 생각이 들면, 가장 아랫쪽에 굵고 빨간 매직으로 이렇게 써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 모든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 리스트를 적는 과정에 유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감사 방식은 세상 사람들의 감사 방식과는 철저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사형통, 승승장구 앞에서는 누구나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감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옥중에서도 감사했습니다. 병고와 박해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감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게 되었다며 크게 감사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감사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참으로 신비스럽고 위대한 존재여서,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견딜 수 없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비극이나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존하시고, 실패 속에서도 성공을 이끌어내시고, 비극을 아름다운 결말로 변화시키신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주님의 인호, 주님의 흔적이 아로새겨져 있기에,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폭풍우를 아름다운 무지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끝까지 그분을 믿고 신뢰한다면 언젠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비극, 굴욕을 통해서 주님의 은총이 찾아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차 있다할지라도 지난 세월에 감사해야겠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도 감사해야겠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믿음의 크기와 찬양의 크기는 비례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는 다행히도 여러 나라의 미사 전례에 참석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미사 안에서 찬미 소리의 정도와 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수가 비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은 독일의 한 성당의 평일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뒤쪽의 2층 성가대석에서 정말 아름다운 성가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성가를 부르는 이들은 딱 들어도 프로였습니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걸출한 음악가들이 이런 분위기 때문에 탄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사 참례자 수는 10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미사 참례자 들은 미사 내내 성가를 하나도 따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화음 속에 자신의 목소리를 끼어 넣을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미사가 아니라 콘서트였고 그 콘서트장에 몇 명의 노인들이 참석하여 음악을 감상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미사도 이와 비슷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례는 더 경직되고 그와 발맞추어 신자들은 덜 나옵니다. 성가대는 신자들이 따라 부를 수 없는 특송을 많이 부르고 신자들은 마치 성가대가 대신 찬미해 주는 것처럼 앉아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할 때도 형식적입니다. 그냥 옆 사람과 고개만 살짝 숙이며 눈인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셨을 때 그렇게 눈인사만 살짝 하였을까요? 서로 기쁨에 끌어안고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요?
전례의 생동감은 믿음에서 오는데 그 믿음은 소리 높은 찬미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들이 소리 높여 찬미하지 않으면 그 전례는 죽어가는 것입니다. 소리 높여 찬미 할 수 없는 이유는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 샘솟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해지는 전례에 절대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전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례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기쁘게 찬미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르코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시다가 먼저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전의 장사꾼들을 모두 쫓아내신 다음, 다시 돌아오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바싹 말라 죽어버린 것을 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단의 구조가 마치 샌드위치처럼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고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버린 것을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 이야기가 감싸고 있는 형식입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이 없는 전례는 결국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버릴 것이란 예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도 바로 참다운 예배는 어때야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 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
믿음이 있다면 받은 것에 감사해서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사는 이전부터 ‘에우카리스티아’, 즉 ‘감사’로 불렸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은 구원되었다는 믿음 때문에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감사의 찬미가 우러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창피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병이 치유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치유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찬미소리가 저 사마리아인보다 적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참례한 미사 중 가장 길었던 것은 6시간입니다. 피정 때였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6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찬미를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려보았고 평화의 인사를 하며 함께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이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임을 느꼈습니다. 그 가슴 뜨거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뜨거운 찬양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돌아와 큰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한 사마리아 사람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전례가 과연 구원받은 기쁨에 성당이 떠나가라 찬양하고 춤을 추는 시간인지, 아니면 의무이기 때문에 참아내야 하는 무엇인지 되돌아볼 때인 것 같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 옆에는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성당이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피정 강의를 요청했고,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강의 도중에 ‘선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기쁘게 행하고, 나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호히 행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한 일은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에게 선한 일은 신문을 구독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강의를 마쳤는데 신문을 구독하겠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신문 구독에 대해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신문의 지면 중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가 있습니다. 매주 한 분씩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분, 투병 중인분, 갑작스럽게 재난을 당한 분, 직장을 잃어버린 분, 얻어먹을 힘조차 없는 분들의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있습니다. 매주 신문의 사연을 읽고 도움을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성금을 한국의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을 보니 기분도 좋고, 보람이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시사 고발 프로를 10년 넘게 제작했습니다. 세상이 변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여! 화났어요?”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고, 바로 잡겠다고 방송했지만, 세상은 그리 깨끗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울을 보니 예전에는 늘 웃는 모습이었는데, 정말 화난 얼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태석 신부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아프리카로 가서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촬영했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모든 걸 바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초대받았고, 교황님과 추기경님들 앞에서 이태석 신부님의 다큐멘터리를 보여 드렸다고 합니다. 어느 날,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아빠 얼굴이 참 밝아 보여요. 요즘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세상의 좋은 면을 드러내는 그분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유럽의 정치를 보았고, 유럽의 사회 복지 제도를 보았습니다.
인터넷으로 모든 걸 검색하는 시대입니다. 신문을 제작하고, 홍보하는 일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문을 보고, 마음이 변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선한 일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면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지혜서는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전해줍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 거룩한 것을 익힌 이들은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힘없는 이와 고아의 권리를 찾아 주고, 가난한 이, 불쌍한 이에게 정의를 베풀어라. 힘없는 이와 불쌍한 이를 도와주고,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어라.”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 받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사의 감사송은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이유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신부님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천상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차동엽 노르베르또 사제와 죽은 모든 교우들의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육체만 보고 정신없이 살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제대로 된 사람이지 아니면 정신이상이죠.
육신 병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이상도 고쳐야 다 고친 거 아녜요?
하늘에 감사 부모 조상 형제 이웃 작은 어린이에게까지도 감사해야죠.
행동처신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건 정신이 불량이거나 미숙상태입니다.
신세지고도 고마움 모르면 인간 괴롭히고도 잘 모른다는 거 아닌가요?
정신 고장 난 사람 9명에 바른 정신 1명꼴이면 현세대와도 같다 봐요.
육체만 보고 정신없이 살면 세상만 중하고 하늘은 인생에서 빠지지요.
그러나 하늘관점에서 세상사는 신앙인은 정신 차린 값진 인물 맞지요.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17,18)
곽승룡 비오 신부님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가족 식구들에게서가 아니라 외국인들한테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자들이 많다. 심리적으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가족으로부터 정당성과 권리를 받는 것을 보통으로 생각하듯이, 우리는 부모, 남편, 부인, 선생님에게 은혜를 잊고 살거나 저버리는 경향이 있다. 특히 하느님을 향해서도 배은망덕한 경우가 있다.
이냐시오 영신수련에서 양심성찰의 근본 목적은 각자의 부족함, 결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교정하는데 있다. 이냐시오는 조언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는지에 관해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가는 생명을 주신 모든 분을 위해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께 감사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지만 단 한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만 하느님을 찬양하고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병이 나은 이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장자의 글에 조삼모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조련사가 원숭이들에게 먹이를 주면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를 줄 것이라고 하니까 원숭이들이 크게 화를 내기에 조련사가 다시 말하기를 그러면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를 주겠다고 하니까 그제야 원숭이들이 만족하여 좋다고 하였다는 말에서 나온 사자성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언제나 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어리석게도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에 대해서 감사드리기보다는 때로는 그 은총을 느끼지도 못하거나 또는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많고 적음을 따지며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 인간관계 안에서도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매순간 감사드리며 믿음을 고백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더 큰 은총, 곧 구원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감사를 앚어서는 안 된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어제의 일상을 살펴본다. 하루를 선물로 받았다. 미사를 봉헌하며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를 드렸다. 성체를 모시고 당신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다. 오전에는 회의를 주재했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선생님들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고속도로를 오가며 질주하는 차량 속에서 무사했다. 운전대를 놓고 감사를 드렸다. 지인들로부터 암 소식, 사망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며 무너지는 소식을 듣는다. 하루의 시간이 얼키고 설키고 뒤죽박죽 누벼놓고 난 마음 속은 나병을 닮았다. 그들의 애원을 담아 청원기도 드리며 나의 하루를 정리하며 용케도 살아있움에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루를 살아도 우리들 마음 속에서서 나병의 모습을 본다. 그럴때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나병을 낫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다. 그분께서 우리의 사정을 들여다 보시고 나병을 깨끗이 낫게해 주셨다. 감사를 드림은 당연한 것이다.
오늘 복음(루카17,11-19)에서 외국인 하나만이 온전한 구원에 이렀다. 아홉은 감사없이 사라졌지만 외국인 한 사람만이 찾아와 감사를 드렸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8-19). 외적인 나병의 치유는 물론 내적인 마음의 치유까지 누리게 된 것이다. 그의 나병은 온전히 깨끗해졌다.
뽑힌이들 중 많은 사람이 감사를 잊고 산다. 뽑혔다는 사람 아홉이 그랬다. 그런 사람을 만난다. 외적으로 나병은 나아 말쩡한 것처럼 보이나 내적으로는 여전히 나병을 앓고 있다. 깨끗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나병같이 누벼놓은 하루를 본다. 용케도 살아있음을 본다. 감사를 드렸다.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감사'(루카 17장 11~19)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갈망과 갈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빌고 또 비는 정성을 기울입니다.
구하는것을 얻고 나면 두가지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감사할 줄 아는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명을 고쳐줬는데 한명만 와서 감사를 드리니 나머지는 어디 갔느냐고 물으십니다.
말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옮겨지는 감사는 더 큰 감사를 할 일이 생깁니다.
감사는 하면 할수록 내가 더욱 행복해집니다.
원하는것을 얻고 나서 입 닦는 사람 되지 않기를!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떠올리기'
<믿는 이의 행복>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병 환자 열 사람 …
그들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뼛속 깊은 나병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하여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줄
주님을 만났을 때
무엇을 청해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주님과 마주했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온 몸 던져
간절히 기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께 되돌아온 한 사람 …
그 사람은 정녕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온 몸으로 체험했으니까요.
그의 깨달음은 그의 발걸음을 돌려
다시 예수님께로 향하게 했으니까요.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채워진
주님과의 첫 만남은
감사와 찬미 가득한
믿음의 두 번째 만남으로
곱게 곱게 이어졌으니까요.
있는 그대로 나를 아는 것
주님과 마주하기 위한 첫걸음이기에
나를 아는 만큼 행복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어주신 것들을 깨닫는 것
주님께 온전히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니
깨닫는 그만큼 더욱 행복합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2-14).”
여기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병을 고쳐 달라는 뜻입니다.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는 것은 병이 나았음을 확인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도 전에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여주라고 말씀하셨을까?
어쩌면 “내가 너희의 병을 고쳐 주겠다.” 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을 하셨는데 복음서에는 생략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병자들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간 것은, 병을 고쳐 주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제들에게 갔습니다. 따라서 여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에 어떤 문제점이 안 보입니다.)
두 번째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냥 병을 고쳐 주시지 않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고쳐 주셨을까?
이 의문에 대해서는 보통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하는데, 믿음과 순종을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시련’입니다.
만일에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이야기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치유 기적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다음에 아홉 명은 그냥 가고, 한 명은 되돌아옴으로써 다른 치유 기적 이야기들과는 다른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5-19)”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사제들에게 가서 병이 나은 것을 확인받았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각자 자기 갈 길을 갔을 것입니다.
1) 그들의 첫 번째 잘못은 청할 줄만 알고 감사드리는 것은 잊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은총을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은총은, 큰 은총이든지 작은 은총이든지 간에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항상 특별한 선물입니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냥 가버린 아홉 명처럼, 청할 때에는 정말로 간절하게 청하지만, 은총을 받은 다음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감사드리지 않으면,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초보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계속 그런 식이면, 기복신앙으로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청하는 것만 잘하고 감사드릴 줄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어떤 고통 속에 있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청원기도를 바쳤다면 감사기도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이 말씀은 원래 ‘의심하지 않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지만,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감사드리는 믿음’에 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미 받은 줄로 믿는다면, 원하는 것을 받기 전이라도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사실 감사기도는 받은 후에나 바치는 기도가 아니라, 받기 전에도 바쳐야 하는 기도이고, 언제나 항상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감사드리는 믿음’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더욱 성숙한 신앙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그냥 가버린 아홉 명의 두 번째 잘못은, ‘몸의 치유’만 원하고, ‘영혼의 구원’은 원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몸의 치유’를 원하고, 그것을 간절하게 청한 것 자체는 잘못한 일이 아니라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이 치유된 것에만 만족해서 거기에서 멈추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즉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몸의 치유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병 없이 건강하게 사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몸’은 썩어 없어질 물질일 뿐입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아홉 명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계속 건강하게 살았겠지만, 그냥 그것으로 끝났을지, 아니면 나중에라도 예수님께 돌아와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을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되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사제에게 가지 않고 중간에 되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사제에게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은 하느님의 참 사제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의 권능은 곧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또 그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지 않고,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혼의 구원’을 원했음을 암시합니다.
(발 앞에 엎드린 것은, 하느님을 향한 공경의 표시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그 사마리아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서 영혼의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희망하며 인내합시다.
2세기 어느 저술가의 강론의 시작(Cap. 10,1-12,1; 13,1: Funk 1,157-159)
나의 형제들이여, 생명을 얻어 덕행을 충실히 실천하도록 불러주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악에로 기울게 하는 충동을 벗어 버리며 악이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게 불경건을 피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데 분투 노력한다면 평화가 뒤따를 것입니다. 평화란 인간적 두려움에 매여 지내고 미래에 있을 축복의 약속보다 현재의 즐거움을 더 원하는 사람들로서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의 쾌락이 내포하는 쓰라림과 미래 축복의 약속이 가져다 줄 기쁨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그들 자신에만 국한된다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그들의 나쁜 가르침이 순박한 영혼들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자기 자신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듣는 이들마저 단죄 받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순결한 마음으로 섬기도록 합시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부족하여 우리가 그분을 섬기지 않는다면 참으로 비참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두 마음을 지니고 끈기가 없으며 이렇게 말하는 자는 불행하다. ‘이 모두를 우리 조상께로부터 들어 왔지만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어도 들은 말이 실행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를 실과 나무에 비교해 보라. 포도나무의 예를 들어 생각해 보라. 포도나무는 먼저 잎을 내고 그 다음 꽃을 피우며 그리고 나선 신 포도를 맺고 마침내 때가 되면 단 포도 열매를 맺는다. 나의 백성은 그러하다. 그가 재난과 고뇌를 받은 후 행복을 얻게 되리라.”
나의 형제들이여, 두 마음을 지니지 말고 영원한 상급을 얻을 수 있도록 희망하며 인내합시다. 우리에게 그 상급을 약속하신 분은 충실하십니다. 그분은 각자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고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주차 하지 못한 일”을 상급으로 받을 것입니다.
시간마다 사랑과 정의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임하심을 고대합시다. 주님이 오시는 날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매함과 사악으로 가득 차 있으니 지체없이 회개하고 선한 일을 찾도록 합시다. 이전의 죄를 우리 영혼에서 깨끗이 닦아 버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경건한 마음으로 참회의 생활을 합시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꾀하지 말고 거룩한 생활로 우리 형제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 없는 이들에게도 훌륭한 모범을 주도록 합시다. 우리 때문에 하느님의 이름이 욕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 <루카 17, 11-19>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친 열 사람 중 사마리아인만 병이 나은 것을 큰소리로 감사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부정적 생각으로 ‘병이 나았으니 그것으로 그만이다.’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감사하는 사람은 지속해서 주님과 관계를 갖고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감사하며 믿음을 고백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오래전 본당 신부를 할 때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만나서 “요사이 왜 성당에 나오시지 않는가?” 물으니 “저는 이제 성당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하며 병이 들어 성당에 나갔는데 성당에 나가서 병이 나았으니 성당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제가 젊어서 억지로 끌고 올 수 없어서 상대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기도의 삶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감사하고, 못 얻으면 하느님이 무능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입동 후 며칠 전 가을 산 단풍을 뒤쫓아 가서 떨어진 단풍 보려고 보은 속리산에 갔습니다. 단풍 한 닢을 손에 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쓸모없는 가랑잎, 쓸어서 불에 들어가면 재가 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고맙다. 감사하다. 여름내 나무에 붙어 그늘지어주어 길 가던 나그네가 더위를 피하게 하고, 나무뿌리에 태양의 영양분을 공급하여 나무가 튼튼하게 하고, 열매를 맺게 주고, 겨울에 나무 위를 덮어 추위를 막아주고, 거름 되어 봄에 새로운 입을 나게 하니 고맙고 감사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인이 가을 단풍처럼 시들어져 있지만, 긍정적 생각을 하면서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별 볼품이 없는 사람도 하나하나 다 그 가치를 지니고 살아왔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면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죄인을 더 사랑하셔서 품어주듯이 긍정적 생각으로 서로 사랑하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서로 감사와 신뢰를 지니고 살아가야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서 3, 57-88 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주님을 온갖 피조물이 찬양하라고 외치는 소리, 우리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명을 얻고 누리고 있으니 피조물이 주님을 찬양하도록 함께 찬양하듯이 순간순간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살아갑시다.
영육靈肉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 -찬양과 감사의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복음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줍니다. 어제 강론은 묵묵히, 충실히, 항구히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충복에 대해 했습니다. 마침 어제 피정 온 자매들 미사 강론시 드린 말씀입니다.
“오늘 집에 가면 오늘 복음 말씀,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는 말씀을 잘 보이는 곳에 써서 붙여놓고 매일 보며 마음에 담고 생활하십니다.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의 충실한 여종이 되어 살아가십시오. 참으로 주님을 충실히 섬기는 주님의 충복으로 살아갈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세상을 섬기는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종임을 강조했습니다. 바로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사촌 형과 아우가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형님, 이제 감사하시면서 교회에 나가시면 되겠습니다. 기도하며 응원하겠습니다.”
“교회나 절간에 나갈 시간이 없네. 늘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친구들이나 주변 인물들에게도 감사하며 산다네. 쉽게 말해서 어느 틀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자는 생각이지.”-
나름대로 훌륭하게 살아가는 형입니다. 순간 '감사의 중심인 하느님이 빠졌구나. 웬지 공허하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주님을 믿는 이들이면 하느님께 감사가 우선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의 기도는 우리의 영적 본능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명의 나병환자들, 만일 부를 예수님 이름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이래서 사랑을 가득 담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끊임없는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열명의 동병상련의 나병환자들 공동체였고 이들은 주님께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간절히 찾았기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주제는 ‘지혜를 찾아라’입니다. 세상의 권력가들이나 세력가들, 통치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다음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신다.---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그러므로 너희가 나의 말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지혜이자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당신을 갈망하고 갈구하는 모든 이를 찾아 오십니다. 열명의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우리 모두입니다. 잘 깊이 들여다 보면 병자 아닌 사람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로 이 가르침대로 열명의 나병환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찾아 만났고 병도 치유 받았습니다. 열명의 나병환자는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부르짖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대로 매일미사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바치는 자비송 기도입니다. 나병환자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을 바칠 때 똑같은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들의 간절한 믿음의 기도에 주님은 응답하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은 깨끗이 치유되었습니다.
문제는 육신의 치유만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 전인적 치유의 구원입니다. 육신의 병만이 아니라 무지의 병의 치유가 근원적입니다. 몸은 깨끗해 졌지만 마음은 아직 깨끗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열명의 나병 환자 중 온전한 믿음으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찬양과 감사의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 다음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
과연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앎으로 우리의 근원적 병인 무지라는 마음의 병도 치유되어 온전한 믿음을 지니게 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온전한 치유의 구원에는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다음 시편 구절이 좋았습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 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5,1)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온전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사실 우리의 영육의 전인적 치유와 구원에 미사 은총보다 더 좋은 식食과 약藥은 없습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루카 17, 14)
(And when he saw them, he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And it happened that, as they were going, they were cleansed.)
김웅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루카 17, 11~19)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멀찍이 서서 큰소리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7, 14)크게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져서 고쳐주시지는 않으시고, 숫자가 많아서 그런지 그들에게 이르기를,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분부하셨는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고 합니다. (루카 17, 14)
예수님은 나병환자들의 불쌍한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치유의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즉 그들로 하여금 사제를 찾아가도록 하신 것이죠. 그리고 나병환자들은 사제를 찾아가는 도중에 몸이 나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치유의 기적적인 현상을 보면서, 어떻게 그러한 일이 벌어졌을까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몸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그들 모두가 깨끗해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도 사제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 치유됐다고 하는 것은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 치유를 받았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보통 나병환자들은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지요. 나병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질까봐, "나는 나병환자요!" 이렇게 스스로 외치면서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들로 하여금 "사제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하신 것은 어떤 면에서 참으로 단순한 것을 이행하도록 하신 것이죠.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열 사람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간단한 권고사항이었지만 그것을 따름으로 써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달리 예기하자면, 만일 그 나병환자들이 "과연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인다면 병이 나을까?" 이렇게 의심하면서 가지 않았다면 치유가 이뤄질 수는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갈 때, 그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치유가 일어난다는 사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의 지침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십계명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러한 길들을 걸어갈 때, 그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치유된다는 사실, 이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 됩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 목적지를 향햐 갈 때 이미 자기 안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걸어간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복음에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그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르침을 따라서 그 길을 갈 때 이미 우리는 치유가 일어났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의 그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처럼 감사의 기도를 예수님께 드려야 되겠습니다 :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던 말이냐?" (루카 17, 17~18)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서, 예수님이 알려주신 구원의 길을 가면서 치유가 된 우리는 감사생활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계속 가야 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축복된 길임을 생각합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길을 갈 때, 내 마음에 평화가 오고 나의 아픔이 치유된 적이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일년 반 동안 이곳 생활이 반추된다. 이곳에 와서 하느님, 나 자신, 세상, 그리고 사람들을 바라다 보는 영혼의 눈이 변화되었다. 오늘 나병환자 처럼 나 자신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니 많은 것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동안 삶은 아홉명의 나병환자 처럼 치유된 사실도 모르고 그냥 살아왔다면 지금은 내가 치유되고 있음을 느끼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올린다. 죽을 때까지 변화해야 하지만 지금 오늘이 행복하다. 하느님의 품에서 바라다 볼 수 있는 영혼의 눈이 있기에 말이다.
오늘 아침 겨울의 냄새가 뭉클 나는 풍경이다. 기온의 변화에 따라 옷을 갈아 있듯 나의 영혼도 항상 변화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한다.
감사, 신앙생활의 진단표
이종경 비오 신부님
예비신자들이 입교를 하면 교리기간 중 감사노트를 쓰게 합니다. 성당에 오면 곧장 세례를 받을 거라 예상했던 분들은 교리기간도 짧지 않고 감사노트 같은 숙제도 있다고 하니 부담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감사노트를 하루하루 쓰다 보면,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고, 자기 자신의 소중함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매일 감사노트를 꾸준히 쓴 예비신자는 세례 때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은 ‘원하던 은총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의 차원을 넘어 ‘은총 자체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가능케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받아도 계속해서 바라기만 합니다. 그렇게 불행에 머물러버립니다. 이제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더 이상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받았는지에 대한 자각과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는지’의 여부를 떠나 언제나 우리와 함께해주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시는 하느님’보다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깨끗해진 나병환자 중 유일하게 주님을 다시 찾아온 사마리아 사람처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받기만 하는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들은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이 더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은혜를 당연히 생각 말고 은혜를 통해서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결국은 불평불만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할 것을 찾아보십시오. 살아있음이 감사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받기만 하는 것, 기다리기만 하는 것, 청하기만 하는 것, 이제는 그만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충실과 초탈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그리스도인들은 기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바오로 사도의 이런 권고대로라면 감사는 응답이 아니라 의지와 깨달음이다. 선물을 받거나 곤경에서 벗어나서가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프고, 갖가지 어려운 일들로 머리 아프고 속상하며,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쳤는데 감사하라는 권고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는 모습은 다르지만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고통은 여전하고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뒤바꿔주실 것이라고 한껏 기대했지만 그분도 다른 예언자와 의인들처럼 세상의 권력에 희생되셨다. 예수님도, 하느님도 이 세상에서는 힘을 못 쓰시는 것일까?
예수님을 믿는다. 그분은 그렇게 희생되셨지만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고 지금도 믿는 이들 안에서 살아계신다. 예수님은 하느님 안에 계시고 하느님이 그분 안에 계신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영원하신 하느님과 그리고 그분 안에서 산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 살지만 그분은 전혀 다르게 사신다. 예수님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는 성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현재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사는 우리는 기도하고 기다리고 견뎌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쉽지는 않지만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사신다고 믿기 때문이고, 그 믿음은 희망을 준다.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고 꿈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다. 사실 그런 꿈과 바람들이 오히려 나를 더 괴롭힌다. 여기서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지만 내일 아침 여기를 떠날 것처럼 애착을 갖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 안에 있고 이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면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고 완전한 영혼들과 기쁘게 영원히 산다고 믿는다.
예수님,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이 널뛰기를 합니다. 감사하고 기쁘다가도 여러 어두운 소식에 마음도 함께 어두워집니다. 희로애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에 제 영혼을 빼앗기지 않고 오늘도 이렇게 주님 앞에서 기도하며 어제와 같은 결심을 처음 하는 것처럼 새롭게 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충실하지만 초연한 마음으로 살게 도와주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게 해 준 것은 생각이 잘 나지 않고, 우리가 다른 이에게 해 준 것만 생각이 나서, 그가 내게 뭔가 섭섭하게 하면 배은망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주님과 교회에 얼마나 부덕하고 배은망덕한가 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중에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돌아와 자신이 고쳐졌음을 확인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라고 어이없어 하십니다. 그러시고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라고 이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겨 봅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런지도. 힘 안들고 돈 안들면서도 하지 못하는 기도 뿐만 아니라,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으로 내 수준에서 어떻게 되갚을 수 있을지 고려해 보고 실천해 봅시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루카17,15-16)
김성민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와서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들이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나병이 낫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열 사람 중 아홉은 감사를 드리지 않고 이방인(외국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예수님께로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9)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마음 자세를 갖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풍요로움은 매우 달라질 것입니다.
내 안에는 긍정의 마음과 부정의 마음이 함께 공존합니다. 긍정의 마음 안에 머물러 있으면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영육이 건강해지는 기적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도 긍정의 마음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먼저 찾아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착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감사
김기현 신부님
오늘 복음 중간과 끝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감사를 드리는 일이 곧 믿음을 고백하는 일임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신앙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선물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감사로 응답하는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에 나오는 그 아홉 사람처럼 그 치유와 선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주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알아채지 못하니 감사드릴 수 없고, 감사하지 않는 삶은 내 자리를 그분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열에 아홉 사람이 그렇게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감사를 잊고 사는 삶이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사’ 라는 단어를 마음속에서 자주 떠올리고 되뇌어 보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감사’ 라는 단어를 반복하다보면, 알아채지 못하여 슬며시 지나가는 그 감사의 일을 붙잡고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제 복음을 읽고 ‘감사’ 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생각하다가 두 가지 감사의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산길을 걸으면서 입니다. 보통 미사 후에 성당 뒤 야트막한 산을 두 시간 정도 걷습니다. 걷다보면 운동도 되고 마음도 정리되고 정신도 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문득 이러한 산이 이 자리에 있음에 감사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이런 산이 있어서 참 좋다는 느낌으로 걷기만 했지, 그 산이 그 자리에 있어주어서 감사하다는 느낌은 가져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산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사람이 많지 않고,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도 않고, 내 기분과 상관없이 나를 품어주는 이 산이 없었다면.. 아마도 여러 순간 힘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네 안에 이러한 산이 가까이 있게 해 주신 주님을 생각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면서 영상을 보는데 희귀병으로 팔 한 쪽을 잘 쓰지도 못하고, 수시로 통증이 몰려와 죽을 생각까지도 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문득 내가 아프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를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일이고 선물인데, 때로 다른 생각이나 계획이나 고민으로 감사함을 너무 많이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제는 평소에 알아채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새삼 감사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그 감사하는 순간에 내 생각과 시선이 그것을 주시는 분에게 살짝 열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오기 전부터 그 길을 만들어 주신 분, 내가 아플 때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분, 하루라는 시간을 허락하신 분에게로 마음이 향하여 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일상 안에서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로 응답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지금 성당에 나까지 신부가 셋이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데,
서로 주례를 미루는 느낌이다.
미사 전 묵주기도가 끝나면,
이미 두 명은 약식 제의를 입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센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10명의 한센병 환자들을 만나신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1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신다. 아울러 치유도 해주셨다. 그래서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들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고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하는 예물을 올리라고 명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른 한센병 환자에게 그러셨듯이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루카 5,13) 하시지 않고 사제들에게 보이라고 하신 이유이다. 성 라자로 마을의 피정의 집을 “아론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아론은 사제이다. 구약에서 사제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한센병이 걸린 사람이 치유되었을 때, 보고 치유되었음을 선언한 다음 정상생활을 할 수 있었듯이, 아론의 집의 의미도 같다. 아론의 집에 들어 와서 모든 치유를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인 사제들은 늘 그분의 영광을 시기하였다. 한센병 환자들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사실을 증거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이 치유되기를 바라시자 자신들이 불행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그분은 그들을 먼저 고쳐주지 않으시고 사제들에게 보내셨다. 그들은 나병의 증세와 그것이 치유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1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쳐주신 한센인들을 꾸중하신다.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한 사람은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총을 받았다. 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9절)
유대인 한센인들 아홉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으로 이스라엘이 마음이 굳어 감사할 줄 모르는 백성임을 보여주신다. 외국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타민족이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반면 유대인은 그토록 은총을 입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것을 알려준다.
감사드리는 이들과 찬양하는 이들은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은총을 내리신 분을 찬미한다. 바오로 사도가 모든 사람에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 하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사야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섬에서마다 그분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이사 42,12)고 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이런 반성을 해 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신앙인으로써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살고 있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인인지를!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앞에 똑같이 사랑 받는 귀중한 존재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며 항상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자.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거룩함을 향합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루카 17,12-13).
예수님께 나병환자 열 사람이 치유를 청합니다. 그들은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도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 못합니다. 부정한 전염병이라고 접촉을 꺼리는 이들을 피해 살아왔기에 스스로 조심합니다. 그래서 "멀찍이"라는 말씀 안에는 그들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슬픔이 서려 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7,13).
소문으로 들었는지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분임을 압니다. 치유와 기적, 죄의 용서와 말씀은 그분의 능력과 힘, 자비와 거룩함을 드러냅니다. 부정하다고 낙인 찍힌 그들은 그런 예수님께 자기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더 다가설 수 없지만 그분께 무엇을 청해야 할지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자비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루카 17,15-16).
예수님 말씀대로 사제에게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 중 한 명, 사마리아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 가까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발 앞에 엎드렸으니 예수님과 매우 근접한 자리입니다. 이 가깝고 밀접한 관계성의 회복이야말로 단순한 치유를 넘어서는 자비의 효과입니다.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세상의 임금들, 통치자, 권력자, 군주들, 세력가들을 일깨웁니다.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재판을 받을 것이다"(지혜 6,6).
그러니 하느님에게서 권력을 받은 이들은 그 힘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도록"(지혜 6,9) 애써야 합니다. 그들이 지닌 세속적 힘은 세상에서나 유용할 뿐 오히려 진정한 구원에 장애가 되기 십상입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고"(지혜 6,10).
하느님의 거룩함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그분 현존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숨쉬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거룩해지니까요.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분 마음을 차지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고통 속에 비참히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그분께서 주신 힘을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지혜 6,7) 주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
돌아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나병환자는 비록 한때 부정하다고 세상에서 내쫒긴 이였지만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길 줄 아는 이였습니다. 치유를 물리적 변화로 치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라고 꿰뚫어 볼 줄 알았으니까요. 여기까지 깨달은 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거룩하신 분 발 앞에 몸을 던짐으로써 거룩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큰 사람이건 작은 사람이건, 건강하건 병들었건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 때 거룩함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를 둘러싼 존재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깨달을 때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한 이는 거룩함을 나누어 주신 분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이르러야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치유된 이는 깨끗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이는 구원됩니다. 자비를 청하여 치유의 은혜를 받고, 감사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루카 17,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치유로 가는
모든 길 위에
치유의 주체이신
구원의 주님이
계십니다.
깨끗하게
하시는 분은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돌아가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간절함이
너무도 빠르게
하느님을 망각하는
당연함으로
바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을 너무 쉽게
우리는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마음을
보는 데서
진정한 관계는
시작됩니다.
감사가 구원으로
찬미가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감사와 영광을
먼져 올려드리는
삶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은 비로소
소중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구원의 선물이 됩니다.
믿음이 없다면
구원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돌아가는
믿음의
위령성월입니다.
할리우드 원조 섹시 스타라고 불리던 샤론 스톤(Sharon Stone)을 아마도 웬만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잘 아실 것입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녀가 2001년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지요. 다행히 응급수술로 목숨은 건졌지만 말을 더듬게 되었고 다리를 절며 시력이 떨어지는 후유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연기도 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갔습니다. 물론 일상 삶 역시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이러한 상태에서도 샤론 스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뇌출혈로 쓰러진 뒤의 제 모습은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저입니다. 그래서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쓰고 싶습니다.”
처음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에 절망하고 아파합니다. 심지어 죽음까지 선택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그런데 샤론 스톤은 그러한 고통을 겪는 나 역시 ‘나’라는 것을, 그래서 처음 겪게 되는 이 새로운 나를 받아들인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이제 더 이상 배우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음에도 이를 극복해서 다시 TV 드라마로 재기에 성공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그 순간에 절망하고 아파하는 것에 집중한다면 분명히 불평불만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시련을 겪는 나 역시 ‘나’라는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다시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은 딱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왜 깨끗해진 나머지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를 고민해 봅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건강해진 자신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다시 나병의 상태로 돌아갈 것 같아서 계속 괜찮은지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치유되었다는 기쁨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또 치유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지 않아서 자신 역시 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나병 걸렸을 때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싫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나병 걸렸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기 싫어서 심지어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께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주님께 돌아가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병 걸렸을 때와 치유되었을 때의 모습 모두를 인정했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 고통과 시련을 겪는 나 역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한 긍정적이고 희망을 간직한 사람만이 믿음을 갖게 되고 이 믿음이 자신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열린 출구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에리히 캐스트너).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만 셉니다(‘좋은 글’ 중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생활하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생활합니다. 이유는 한 가지 세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잃은 것을 셉니다.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었다고 셉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잃게 됩니다. 잃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비워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얻은 것만 셉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었다고 셉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감사함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셀수록 만족감도 얻게 됩니다. 얻은 것을 세는 만큼 행복이 채워집니다.
잃은 것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재물이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든...
모든 사고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잃은 것만 세는 어리석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라, 얻은 것을 셀 수 있는 지혜로운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교의 사목연구소 주체로 “교구 사제 성소의 계발과 양성”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소국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발표를 하였습니다. 본당에 12명의 신학생이 있는 신부님께서도 발표를 하였습니다. 동성고 예비 신학생을 담당하는 신부님께서도 발표를 하였습니다. 모두들 현장에서 경험한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학교의 신부님께서는 양성의 의미와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현장에서 있었던 경험보다는 양성의 의미와 방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기존의 양성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것처럼 일정한 틀에 맞추어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념, 가치, 지식, 교리, 직무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양성의 방법은 신속한 면이 있고, 양성을 받는 이들을 선별하는데도 이점이 있습니다. 기준에 맞지 않으면 탈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붕어빵에는 영혼이 없듯이, 이런 양성의 방법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기는 어렵습니다. 규율과 질서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도 하고, 자리에 있을 때만 따르기도 합니다. 본인이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양성은 ‘식물’을 키우듯이 하는 것입니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만 식물은 스스로 햇빛을 받으며, 땅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식물은 스스로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어두운 땅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변화를 가지도록 이끌어주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게하고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정표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정표를 조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동기를 부여해 주면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세우고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성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누가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내가 당신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고 나를 믿습니까?” 예수님의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스스로 답을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은 답은 정답을 배워서 아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시련과 박해를 이겨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길을 찾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붕어빵을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거짓과 불의 앞에서 당당하셨습니다. 위선과 허위를 냉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말씀하셨으며,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양성 방법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단순히 피부가 깨끗해 진 것을 넘어서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선포해 주십니다.
학생들과 면접을 하면서 사제가 되고 싶은 동기를 물어보았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태석 신부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사제성소의 계발은 신부님들이 충실하게 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사제성소의 계발은 가정에서 함께 기도할 때 자라납니다. 사제성소의 계발은 내적인 동기부여를 할 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아비규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 -찬양과 감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신비합니다. 어제 자주 묵상하던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말마디를 새벽에서야 발견했으니 말입니다. 반가운 마음에 즉시 강론 제목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으로 정했습니다. 수도원 정문 옆 돌판에 새겨져 있는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은 바로 분도회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마지막 두 구절 말씀입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17,18-19)
언제 읽어도 새롭고 교훈이 되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신 장면은 흡사 미사전례를 압축한 듯이 생각됩니다. 나병환자들의 자비송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듯 우리 역시 자비송으로 미사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나병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합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격리되어 있었기에 일정한 거리이상 가까이 올 수 없었습니다. 육체적 단절뿐 아니라 심리적 단절까지 겹쳤으니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나병환자들의 처지였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만납니다. 그대로 나병환자들의 영적갈망의 표현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입니다. 고립단절의 지옥같은 삶에서의 탈출은 주님을 만남으로 가능하며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 간절한 기도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드릴 마지막 청원 한마디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라.” 주님의 즉각적인 응답에 나병환자들은 가는 동안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말씀의 은총에 치유의 기적이 발생합니다. 문제는 치유받은 열사람 나병환자중 한 사람만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찬양과 감사의 삶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임을 깨닫습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 열명중 한명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를, 영광을 드렸습니다. 아, 이게 인간의 현실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최종적 구원선언입니다. 말 그대로 나병환자 사마리아 사람의 부활체험입니다. 한 명 사마리아 사람만이 온전한 영육의 구원이요, 나머지 아홉명은 육신의 치유뿐인 반쪽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치유받은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 찬양과 감사를, 영광을 드리고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일치함으로 영적나병이 치유받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대로 이 말씀은 미사가 끝났을 때의 파견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육신의 나병못지 않게 무서운 것이 영적나병입니다. 허무와 무의미, 좌절과 절망, 불평과 불만, 원망과 실망등으로 이웃과 고립단절되어 자폐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일종의 영적나병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는 영육의 질병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우리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에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낫습니다.
평상시 건강할 때 더욱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에 온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영육의 병의 예방과 치유에 최고의 특효약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이 믿는 이들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더불어 우리의 성화와 구원입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은 비단 전례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지도자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의 권력은 주님께서 주셨고, 통치권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주셨다.”
모든 권력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았으니 지도자들이나 권력자들은 겸손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배워 맡은 바 책임을 다함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지도자들, 권력자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미천한 이들은 자비로이 용서를 받지만 권력자들은 엄하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며, 영육의 병을 치유해 주시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찬미와 감사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예수님의 발 앞에 엎디려 감사를 드렸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현대인은 자신의 정단한 권리가 침해당하면 못견뎌합니다. 경제적 이익이 침해당하면 더욱 못견뎌하고, 인권에 대한 침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반면에, 감사에는 대단히 인색합니다. 모든 것을 정당하고 합당한 권리와 의무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의료보험이 모든 경비를 지불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하다!”고 정당한 권리라 여기면서, 치료가 끝나면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떠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나병을 치유 받은 열 사람 중에서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루카 17,18)
만약 오늘 우리가 감사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아홉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 질문은 가장 어려운 영적인 선택 하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하는 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묘하게도,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믿지 않고 있기가 일수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는 마음속에서 그 실상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감사하지도 기뻐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비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채우고자 안달하거나, 불평하고 원망하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베푸는 잔치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 있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병을 치유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감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약한 탓일 것입니다. 또는 자비가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탓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돌아와 감사드린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니, 나병의 치유가 구원인 것이 아니라, 그 치유가 하느님의 사랑임을 믿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치유 받고도 감사하지 못함은 치유에 대한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것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가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가림 질 해줍니다.
그러기에, 지금 감사하며 기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곧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주고,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 감사할 수 있을까요?”
아침 식사 때 먹은 꿀 한 숟가락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꿀 한 숟가락, 이를 위해 하느님은 몇 천 마리의 벌을 몇 천 시간 동안 날아다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몇 천 가지 꽃들을 피게 하셨고, 태양을 비추셨습니다. 비가 오면 벌들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지구를 약간 기울어지게 만드셨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해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발육과 성숙을 체험하고, 죽음과 소멸도 체험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같은 계절만 있었을 것입니다.
또 밥상의 반찬을 두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음식들이 바로 나를 위해 목숨 바치고 있음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나를 위해 몸 바쳤는지! 닭은 나를 위해 몇 마리 쯤 목숨을 바쳤을까요? 또 몇 마리의 소가, 몇 마리의 멸치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까요?
이처럼, 감사하는 일은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을 의식하면서, 모든 삶을 지속시켜주고 있는 많은 기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신비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눈! 신비를 바라보는 눈! 우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 그분을 볼 줄 아는 눈이야말로, 바로 감사의 눈 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되새겨 봅니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20)
리더의 자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갖은 수모와 상처 속에 수많은 우여곡절과 부침을 거듭하며, 오랜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민족사를 돌아보며, 백성의 리더들, 학자들, 영향력 있는 인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비전이나 철학이 결여된 인사들, 기본적인 양심이나 상식마저 찾아볼 수 없던 지도자들, 백성들을 향한 애정이나 마음이 눈꼽만큼도 없던 리더들, 그래서 결국 자기 호주머니나 곳간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정치인들로 인해 우리 백성들이 겪었던 고초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식별력입니다. 누가 양떼를 생명의 땅과 기름진 푸른 초원으로 이끌 착한 목자인지, 누가 양떼를 이리 저리 팔아먹고 잡아먹을 삯꾼인지 식별하는 힘이 요구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독일 출신 도미니코회 수도자 알베르토 주교 학자(1206~1280)입니다. 아름다운 도나우 강변에서 태어난 그는, 오늘날로 치면 ‘엄친아’ ‘만물박사’ ‘팔방미인’이었습니다. 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엄청난 학문적 성취와 뛰어난 인품, 거기다 그리스도와 진리를 향한 강렬한 목마름, 교회와 수도회를 향한 애정, 그리고 양떼를 향한 사목적 열정, 그리고 겸손의 덕까지 갖춘 불세출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그를 그냥 성 알베르토라고 하지 않고 성 대(大) 알베르토라고 부릅니다.
알베르토는 신학의 기초로서 철학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후에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합니다. 그는 당시 유럽 학문의 중심지였던 파리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강의했는데, 그의 가르침에 매료된 수많은 제자들이 그의 노선을 따랐습니다.
알베르토는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식물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기상학, 윤리학, 수학, 논리학, 수사학, 경제학, 정치학, 형이상학 등에 대한 수많은 집필을 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얼마나 찬란한 것이었는지는 비오 2세 교황님은 이렇게 극찬했습니다. “알베르토는 인간으로서 알 수 있는 바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역에서 발생한 극한 분쟁의 해결사로서 활동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는 대학자로서 자신의 학문 안에만 머물지 않고, 그가 터득한 진리를 자신이 살아가던 사회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알베르토 생애 안에 또 한 가지 놀라운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평생토록 일관되게 추구했던 극단의 겸손입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로서의 그는 1254년 독일 북부의 테우토니아 관구의 관구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과 3년 후인 1257년 자진해서 관구장직을 사임합니다.
이런 겸손한 알베르토를 사람들은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눈여겨본 알렉산데르 4세 교황님께서는 1256년, 그를 아나니아에 초청해 교황청 고문으로 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차례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1260년, 그를 레겐스부르크의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불과 2년 후, 수도생활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어, 또 다시 주교직에서 자진 사임합니다.
성(聖) 대(大) 알베르토 주교 학자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와 진리를 끊임없이 갈구했으며, 모든 것을 인간의 지혜와 신앙으로 조화시켰습니다. 대학자이면서도 한없이 겸손했던 그는, 그 누구도 단죄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부족한 의견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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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읽는 동시에 오버랩 되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루카18,13)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에 눈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멀찍이 서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나병환자 열 명과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 아픔이란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나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가족으로부터조차 스스로 떠나 살아야만 했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들이었다.
세리라는 직업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매국노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사람들과 고립되고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세리는 동족을 배신한 죄로서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함 앞에 서야 할 때, 두려움과 죄송함으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보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선택하신다.
자기가 짓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착각에 빠져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더 이상 기댈 것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멀찍이 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렵게 청을 드리던 그들의 태도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의 죄를 아는 것처럼 큰 은총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를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그리고 깨끗하게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자.
그러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열린 마음과 감사로 여는 구원의 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구원의 순례길’에 오르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경계 지역을 지나가십니다(17,11). 이런 길 선택은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취급받아 적대감을 가졌던 사마리아인들 모두를 받아들이시어 해방하시려는 몸짓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뻗어가는 교두보였지요. 이렇게 그분이 향하는 예루살렘 상경 길은 죽음을 통해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 살리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생명의 말씀’을 목숨을 다해 온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심오한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길목에서 예수께 다가온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었음은 의미심장합니다. 나병 환자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청합니다(17,12-13).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자리잡고 있는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를 없애버린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을 향한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의 토대 위에서 ‘사랑의 갈증’을 드러냈고, 그 목마름은 결국 치유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십니다.”(17,14) 그런데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17,14)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유 받으려는 이의 지향과 순수한 사랑의 갈망과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치유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의 유대인은 주님께서 주신 해방의 선물을 자기것으로 소유하는 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선물을 주신 주님을 곧바로 잊어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명은 병이 낫자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17,15-16) 치유와 해방의 선물을 주신 주님을 기억하며 선이신 그분 안에 끝까지 머문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로 민족적, 종교적인 적대감과 증오심까지 치유받습니다.
우리도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시며 사마리아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문화와 이념, 민족과 종교가 다르고 신분과 빈부에 차이가 있다 하여도 열린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해야겠습니다. 모든 관계 속에서 조건 없이 자신을 내놓을 줄 아는 너그러움이 치유와 해방을 불러옴을 기억해야겠지요.
나의 일상의 발걸음과 몸짓은 어떤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차별과 배척 의식, 폐쇄적인 태도, 선입견과 편견의 틀을 벗어버려야겠습니다. 더는 우리 모두 자신만의 기준이나 좋고 싫음의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보다 근원적이며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 사랑만이 해방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치유하고 세상에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오늘 복음의 사마리아인이 지녔던 갈망과 감사의 샘물을 마셔야겠습니다.
김종오 신부님
받고 또 받아도 받은 줄 모르고 삽니다. 마음이 공허한 만큼 받아도 우리는 받은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받아도 흘러넘치도록 받았지만 받은 줄 모르고 삽니다. 아무리 채워도 부족함을 느끼는 우리는 처음부터 조금씩 부족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사랑의 빚은 쉽게 잊어도, 조금이라도 베푼 것은 기억합니다. 아무리 갚아도 갚지 못할 빚을 우리는 지고 살지만, 조금이라도 받아야 할 빚은 죽어도 잊지 못합니다. 준 빚은 기억해도 진 빚은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먼저 배운 우리는 주는 만큼 성장합니다. 주기보다 받기를 고집하는 것은 우리가 엄마 품에 안긴 아가로 되돌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엄마처럼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이든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사랑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만큼 우리는 땅에서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께 드리는 영광은 진 빚을 기억하는 거룩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영광이 주님께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마땅한 도리입니다.
평생 드려도 모자라는 우리의 경배지만 작은 경배에도 주님은 감격하십니다. 열 명 중에서 한 명이 돌아와 드리는 경배에 주님께서 오늘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경배를 잊은 아홉 명에게도 여전히 자비의 눈길로 찾으시는 주님입니다.
가장 어렵게 살며 배척을 당하던 한 사람이 감사와 영광과 경배를 드리려고 되돌아 왔습니다. 아홉 명의 무리에 섞여서 풍부하게 받은 은총과 사랑에는 아직도 둔감하고, 더 받을 것에만 민감한 우리는 사랑의 철부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최원석
예수님 저희를 아니 나를 구해 주세요 하면서 목청을 돋우면서 소리를 고뢰고뢰 소리를 집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사람들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고통만 의식하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순간 주님은 그들앞을 지나가십니다. 주님이 보시니 아니 이것은 밥도 않먹고 거의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10명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측은지심의 마음이 드시어서 당신의 행렬을 멈추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저의 병의 치유를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지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러면서 가면서 자신의 몸이 나은것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 순간 무시당하고 그리고 거의 바보 천치 같은 소리를 들은 사마리아 사람이..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상념에 잠깁니다. 이것은 나의 행실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자비를 배푸신 결과야 ..그럼 그분에게 가서 감사를 드려야지 하면서 결심을 하지요.. 그리고 다시금 가던길을 멈추어서 돌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앉아서 있던곳을 보고 그리고 자신이 변한것을 확인하고 하늘을 향하여서 감사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다시 찾습니다. 주님 당신이 계신곳을 .. 당신이 계신을 곳을 찾으니 주님은 그 많은 환자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뚫고 들어갑니다. 주님!! 제가 병이 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이 보시니 대견합니다. 감사할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 그런데 한편으로는 왜 10명중에 너만 오니 ? 그런 마음이..그래도 당신의 마음은 따뜻한 마음이 듭니다 .. 다행이야 이들이 병이 나아서 .. 주님의 마음은 한결 같으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고 그들이 당신의 품에서 영원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마음은 한결 같으시지요 ..그래서 항상 당신은 무상으로 자비를 배푸시지요..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것을 감사할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죄이지요 ..항상 자비를 청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그리고 감사를 표해야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이지요 ..주님 감사합니다..아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바람이 떨어진
낙엽을 쓸어갑니다.
언제나 치유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뜻또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올바른
우리의 영광입니다.
올바른 영광은
자아를 낮추고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은
삶의 실천을
반드시 동반합니다.
방황과 좌절의
시간까지도
하느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치유와 영광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회개의 참된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의 사람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은총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남자들은 살다가 너무 힘이 들 때면 지갑에 있는 아내의 사진을 꺼내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내가 이 사람과도 사는데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나?’
그런데 여자도 살다가 힘이 들 때면 지갑에 있는 남편 사진을 꺼내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답니다.
‘내가 이것도 사람 만들어 데리고 사는데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나?’
솔직히 부부란 완벽해서 사는 것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스스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사람끼리 만나다보니까 다툴 일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녀 앞에서는 싸우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부가 싸울 때 아이가 느끼는 공포는 전쟁터에서 동료의 죽음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50대에 성인병에 걸릴 확률은 7%인데 반해, 늘 싸움만 하는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50대가 성인병에 걸릴 확률은 86%나 된다는 것입니다. 물려줄 유산이 없다고 미안해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사실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자녀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건강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싸우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에게 완벽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작은 것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또한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서로의 단점을 덮어주고, 아픔을 안아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진정한 "파트너"가 될 것입니다. 파트너의 뜻이 ‘서로를 덮어준다’라는 의미라고 하지요. 서로를 잘 덮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관계, 부족함을 잘 채워주는 멋진 관계, 그래서 감사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자녀에게 가장 큰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들이 영적으로 깨끗해지도록,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십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내시면서 동시에 치료도 해주시지요. 그런데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은 은혜를 입음을 깨닫자마자 주님을 찾아와 찬미와 감사를 믿음으로 응답하지만, 유대인인 나머지 아홉은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은 주님께 다가와 찬미와 감사를 드림이 먼저라고 생각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사제들에게 자신들이 깨끗해졌음을 증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과연 어떤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병이 없어져서 깨끗해짐을 증명하여 이제 자신은 죄 없는 사람이라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구원으로 이끌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올림이 먼저일까요?
사실 우리 역시 복음에 등장하는 감사하지 못하는 유대인의 몫을 취할 가능성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가정 안에서, 삶의 일터 안에서, 또 이웃과의 만남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작은 감사에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큰 사랑도 느낄 수 있으며 비로소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마치 내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하세요. 그러면서 열심히 준비하세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꿈은 이루어집니다(혜민 스님).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난 월요일에 울산에서 강의가 있었습니다. 석 달 전에 강의 부탁을 받고서 처음에는 약간 망설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인천에서 울산까지는 너무 멀었거든요. 하지만 ‘울산까지 간 김에 그곳 여행을 하면 좋잖아? 언제 일부러 시간 내서 그곳을 가겠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월요일 새벽 일찍 인천에서 떠났습니다. 울산 근처에 가볼 만한 장소를 몇 군데 뽑았고, 저녁에 있을 강의 전까지 모든 곳을 돌아볼 계획이었지요.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가을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 되었지요.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곳들이 울산에 있는데 정작 울산에 사는 사람들은 알까?’
그래서 열심히 제가 돌아다닌 곳들을 사진에 담아서 강의 도입 부분에 이곳이 어디인지를 물었습니다. 맞추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모르더군요. 어떤 분은 제게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내가 다녀온 곳은 하나도 안 나오네. 다녀온 곳 좀 문제로 내지.”
어딘지를 맞춘 분들에게 선물을 주었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모두 다녀보지 못한 곳이라서 맞추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다녀온 곳은 이분이 사는 울산 근처의 장소였지요. 조금만 힘을 쓰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곳인 것입니다.
가까이에 있는데도 가까이에 없다고 생각하고, 또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가까이에 그리고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것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스스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근처의 아름다운 곳뿐만이 아니지요. 내 근처의 사람들, 또한 내 근처에 머물고 있는 주님의 사랑 등등……. 우리가 신경서서 봐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자기 가까이에 있는 멋진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8년에 세례를 드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에 한분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씩 만나서 대화를 하고, 주로 책 읽은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시기 때문에 제가 모르는 분들을 많이 아시고 계십니다. 제가 서서울 지역 교육담당 업무를 할 때에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시인, 시민운동을 하는 분들께서 좋은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지난 월요일에도 잠시 만남을 가졌습니다. 2017년 서품식 장소를 구해야 하는데, 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매님께서는 장소를 운영하는 분과 잘 아신다고 하면서 대관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하셨습니다. 드러내시지는 않지만 언제나 저의 부탁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화를 하면서 작은 체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모 교구에서 부제님들을 대상으로 평신도들과 모임을 주선하였다고 합니다. 주제는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였다고 합니다. 부제님들도 이야기를 경청하셨고, 모임에 참석한 분들도 진지한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신도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전하셨다고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서로 소통을 하시고, 친교를 나누셨듯이 교회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신학교도 서로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하였습니다. 선발은 각 신학교에서 하지만 교육은 학년별로 통합을 할 수도 있고,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통합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밥을 먹는 사이라면 교구간의 사제 연대도 더욱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사제의 인사이동도 원하는 경우에는 각 교구에서 통합으로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라도에서 자란 신부님께서 경상도로 가서 사목을 하시고, 제주도에서 서품 받으신 분이 서울에 와서 사목을 하시고, 서울 신부님은 안동으로 가셔서 사목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작은 땅에서 사제들이 서로 연대해서 사목을 할 수 있다면 지역 갈등을 해소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분주함 속에서 지친 사제들은 시골의 자연 속에서 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지내던 신부님께서도 도시의 다양성과 분주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의지만 있다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에서 존재로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도 같습니다. 해외 선교를 지망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서 먼저 나눔과 소통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10명이었지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1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사제는,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우리는 어디에 속할까요?
예전에 결혼한 지 10년이 넘은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친정어머니께서 그 자매를 제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그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고,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그 자매와 남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작은 선물을 가져왔고, 저는 축하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는 쌍둥이를 출산했다고 하면서 신랑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다 잊고 지냈는데 그분들은 저의 기도가 고마웠었고, 아이를 출산한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제게 감사를 드린 것이 제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의 힘으로 그렇게 되신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제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은 앞으로도 그분들의 가정에 더 큰 은총으로 다가 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를 하였습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뻐하면 기뻐할 일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감사와 찬미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 같지만, 사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창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고, 고맙게 보일 것입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시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이비귀환으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들의 몸도 있는 것입니다.
행복 영성. -찬양과 감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온누리에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셉수도원의 단풍만 아름다운줄 알았는데 여기 인보성체수도원의 단풍도 아름다웠습니다. 새삼 하느님은 공평하시며 언제 어디에나 계심을 깨닫습니다. 인보성체 수도원에서 나온 ‘윤을수 신부의 말씀과 함께하는 행복한 나날’의 일력을 보며 가장 많이 나온 두 단어를 발견했습니다.
'하느님'이란 단어와 '행복'이란 단어였습니다. 마침 어제 어느 수녀님의 고백성사때 보속의 말씀 처방전도 이와 관련된 말씀을 써드렸습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하느님만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합니다. 피정기간 내내 ‘하느님’과 ‘행복’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어제 저녁식사중 수녀님과의 주고 받은 문답이 생각납니다.
“수녀님, 여기 수녀님들은 항상 이렇게 기쁘게 사십니까?”
환히 기쁘게 웃는 꽃같은 얼굴의 수녀님들을 보며 물었습니다. 수녀님 역시 늘 이렇게 기쁘게 산다는 답변이었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할 때 꽃처럼 피어나는 기쁨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물론 윤을수 신부님의 영성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행복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우리의 마땅한 권리이며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실 잘 깊이 들여다 보면 누구나 행복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찬양과 감사의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찬미의 기쁨, 감사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행복한 삶입니다. ‘그래서’ 찬미와 감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미와 감사를 드릴 때 더 큰 축복을 받습니다. 찬미와 감사는 하느님의 하늘을 훨훨 자유롭게 날게 하는 영혼의 양날개와 같습니다. 찬미와 감사를 습관화할 때 운명이 바뀝니다.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니게 됩니다. 진정 행복한 삶과 죽음은 ‘알렐루야’ 찬양으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마치는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받은 10명의 나병환자중 온전히 영육의 치유 구원을 받은 자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아홉은 육신의 치유는 받았지만 영혼은 치유받지 못한 반쪽만의 치유였습니다. 찬양과 감사를 통해 영혼의 치유를 받을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묘사가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찬양과 감사는 한 셋트입니다. 찬양과 감사가 행복하게 하고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사 받게합니다. 찬양하고 감사할때 비로소 사람입니다. 살줄 몰라 불행이지 살줄 알면 행복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찬양과 감사입니다. 새삼 행복도 발견이요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진정 마음의 눈이 열려 찬양과 감사를, 행복을 발견했던 이는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실망과 감동이 교차되는 장면의 말씀입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찬양과 감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 주어진 선물인생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사람에게는 구원의 행복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역시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영광이 되는 삶입니다. 하여 분도회의 모토도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 아니라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오늘의 주님 말씀입니다.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끊임없는 찬양과 감사의 삶과 더불어 성장 성숙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분입니다. 오늘 지혜서의 말씀대로 하느님은 ‘작거나 크거나 다 그분께서 만드셨고, 모두 똑같이 생각해 주십니다.’ 차별없는 공평무사한 사랑을 베푸시며 모두를 배려하시고 돌봐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갈구하면 가르침을 얻고 지혜를 배워 탈선하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갈망하여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감사로 표현되는 참 믿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큰 선물이나 배려와 호의를 받을 때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사소한 것들이나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생명, 시간과 공간, 사람들, 가족, 일, 건강, 공기, 자연 등 수없이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곤 합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에 감사가 곁들여질 때 진정한 하느님 찬미가 됨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다가옵니다. 그들은 나병이 불결하고 전염성이 강하여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으므로(루카 5,12 참조),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소리를 높여” 자비를 청합니다(17,12-13). 자비를 구하는 이 간절함이 치유를 불러오고 예수님과 나병 환자들의 멀찍한 간격에 하느님의 자비가 채워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 하고 나병환자에게 이르십니다(17,14).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도 병을 고치시는 권능을 지니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로 하여금 사제들에게 가도록 한 것은 그들이 율법을 준수할 뿐아니라(레위 13,49), 믿음을 갖고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창조의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나병 환자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17,14)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품으며 사제에게 갔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자비에 그들의 믿음이 더해져 병 고침이 일어납니다.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외침을 들어주신 분도 주님이요, 병을 고쳐주신 분도 주님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대목에서 기적적 치유보다는 치유 받은 이들의 대조적인 처신을 강조함으로써 유다인의 불신앙과 외국인의 믿음을 대조시킵니다(17,18). 병이 낫자, “소리를 높여”(17,13) 자비를 청하던 그들 가운데 차별을 받던 외국인인 사마리아인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17,15) 돌아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17,15-16). 결국 그만이 신앙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됩니다(17,19).
감사는 하느님 앞에선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감사란 내가 누군가로부터 배려와 사랑과 은혜를 입고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고, 그것을 준 존재를 의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인데 감사하지 않는다면 주제 파악을 못한 것입니다. 믿음에는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찬미의 길인 감사가 곁들여져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
하느님께서 나 자신은 물론 모든 것을 주셨고 주고 계심을 잊지 않을 때 믿음에 감사가 곁들여진 참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세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삶의 경배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나아가 감사를 통한 하느님 찬미는 사소한 일상사, 미소한 이들과의 만남,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순간들, 공기와 태양, 땅과 하늘을 포함한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성소, 만나는 사람, 부딪치는 사건과 일들, 희로애락의 순간들과 피조물에 감사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루카 17,17-18)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당연한 것인 양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닐까요?
조금만 불편하거나 방해를 받아도 화를 내고 불쾌해 하면서도 정말 감사할 일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로부터 치유받은 열명의 나환자 중에 감사드린 사람은 하나밖에 없고 아홉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고 하지요.
아마도 우리 중에 열 중 하나만 제대로 감사하며 산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면서 사세요?
오늘은 내가 감사해야 할 것 열 가지를 한번 생각하고 나눠보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를 백 번만 되네어 봅시다.
참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저는 아니겠지요?
신희진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셨는데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올해 초 건강검진을 했는데 폐에 이상이 발견되어 몇 가지 검진을 더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폐암이 의심되니 조직검사를 하자는 의사의 말에 하늘이 노래졌습니다.
입원을 해서 준비하는 동안 ‘하느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살려만 주신다면….’ 등의 기도와 더불어 살아온 시간들이 영화필름처럼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검사 결과 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고 약물로 치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사람이 달리 보이고 세상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 후 약을 다 먹고 일상생활로 돌아온 요즘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그때의 간절함, 다짐과 결심들은 다 어디 갔는지. 잊어버리는 게 사람이라 하지만 늘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주님! 다시 감사드립니다.
올해 은경축 선물로 결핵이라는 아픔을 주시어 나를 돌아보게 하시고 당신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셨으니 찬미 받으소서.
남은 생은 덤이라 생각하고 더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늘 감사하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일에 감사를 느끼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짜증 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눈앞의 이익이나 좋은 것뿐만이 아니고 나쁜 것에서도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말에도, 그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난의 말이 바로 자신에게 보약과 같은 것입니다. 보약은 본래 쓴맛을 냅니다.
자신의 장애물 같은 사람도 그 사람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길러주니 감사해야 합니다. 돌 갈 위에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지만, 건강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혈통과 신경을 자극하여 온몸이 안정을 찾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어떤 힘이나 도움이 되면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무관심하여 표현이 없으면 사랑이 없는 태도입니다.
저는 318명의 카톡 친구가 있어 하루에 두 번 이상 글을 보내는데 어떤 이는 귀찮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관심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에게 하루에 7, 8개의 내용이 옵니다. 중복되는 것도 있고 한 달 전에 전해 받은 것도 있지만, 책을 두 번 세 번 보는 것같이 감사하게 받아봅니다.
어떤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받으면 더 성실하게 보내 드리고 있지만, 어떤 이는 무관심해도 관계가 중요하여 계속 보냅니다. 저는 전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본인이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어서 정성껏 보내시는 내용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 말을 주고받고 생각을 나누는 것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외국인 말고 감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시며 그의 믿음을 칭송하였듯이 우리도 감사하는 마음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감사의 정을 표함은 마음에 믿음, 희망, 사랑을 품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도록 다짐하고 주님께 자비를 구합니다.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절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진심으로
높이면서 믿음은
자라납니다.
믿음이 없는 치유는
언제나 일시적인 치유로
치닫게 됩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치유의 여정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참된 치유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믿음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변화된 삶이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며
목적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믿음이란 거룩하신
하느님만을 갈망하며
거룩한 것을 몸소 익히는
우리의 충실함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실천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깊어 갈수록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치유는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마무리됩니다.
아픔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확실한 믿음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믿음을 청하는 은총의
위령성월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머리로만 하는
치유가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치유가 진짜
치유입니다.
고유한 우리자신을
필요로 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건강해져야 할 믿음은
주님과 함께 하기에
결코 삶을 가리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은 흔들리는
우리의 살에
중심을 잡아주며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치유는 새로워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치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치유와 믿음은
결국 하나의
몸일 뿐입니다.
요며칠 무척 바빴습니다. 주말에도 계속 행사가 있어서 일주일 중에 단 한 하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보니 계속해서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하루 푹 쉬고 싶다.’라는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비웠고 그날이 바로 어제였습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도 찾아놓았고, 새벽 묵상 글을 쓰고서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지요.
떠나기 직전, 평소의 습관대로 다음날 복음(오늘 복음) 말씀을 미리 읽었습니다. 그래야 새벽에 묵상할 때 편하거든요.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9명의 감사하지 못하는 나병환자의 모습을 바로 제 자신한테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식사를 하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식사 한 것이 곧바로 내 몸에 드러날까요? 오늘은 밥 두 그릇 먹었고, 고기를 얼마 먹었다는 식으로 내 몸에 쓰여 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양이 내 안에 들어오는지는 몰라도, 그 모든 것들이 내 몸을 유지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영적 양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미사를 통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영적 양식을 모시게 됩니다. 내가 매일 미사 참석했다고, 영적 성장이 얼마만큼 되었다고 표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영적 양식을 모시지 않으면, 마치 식사하지 않으면 내 몸을 유지 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영혼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쉬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었지만, 사실 주님께서는 단 1분 1초도 쉬지 않으시면서 우리 각자 각자를 지켜주고 계심을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사실을 기억하다보니 감히 ‘쉬고 싶다’면서 하루 땡땡이를 치지 못하겠더군요.
단순히 내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내 눈을 뛰어넘는 주님의 사랑이 계시기에 지금 내가 영적으로 또 육적으로 살 수 있음을 느끼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감사의 표시를 잘 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감사하지 못한 9명의 나병환자처럼 말이지요.
그들은 자기를 고쳐 주신 분에 대해서보다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더 마음이 가 있었지요. 이렇게 자기에게 갇혀 있다 보니 마음이 굳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 기쁨이 있게 된 이유에 감사하기보다는 나병이 나았다는 기쁨 자체에만 매여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곧바로 감사를 표현했던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그 한 사람이 나머지 아홉보다 훨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병이 나은 것 말고도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내가 만족할 기쁨 자체에만 매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그 기쁨이 있게 된 이유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늘 간직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 구원의 선물도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닳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누면 나눌수록 늘어난다(데모필).
비 오는 날(김수열)
얼마 전에 수능이 끝났지요. 사실 수능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앞으로 남아 있는 나의 생을 생각한다면 하나의 과정이고 순간일 뿐입니다. 따라서 수능을 잘 보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또 잘 봤다고 교만에 빠질 것도 아닌 것이지요. 아무튼 모두들 힘내시고요.... 그 안에 담겨 있는 주님의 뜻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어제 책을 보다가 하나의 시를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
수학 시험 볼 땐데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 짱나
배 둘레만 알면 됐지
도형의 둘레랑 나랑
뭔 상관?
창밖엔 운수 좋은 날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데
틀렸다, 틀렸다 하면서
사선으로 내리는 거예요
아, 졸라
그런데요, 운동장 물웅덩이 보니까
맞았다, 맞았다 하면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틀린 게 하나도 없어요
다 동그라미예요
선생님,
내 답안지가요
물웅덩이였음 졸라 좋겠어요
아, 진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1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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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절을 읽는 동시에 오버랩 되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루카18,13)
‘멀찍이 서서’라는 표현에 눈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멀찍이 서서’라는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나병환자 열 명과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 아픔이란 자신들은 죄인이라는 의식이었다.
나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한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가족으로부터조차 스스로 떠나 살아야만 했던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들이었다.
세리라는 직업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매국노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사람들과 고립되고 고독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나병은 천형(天刑)으로서, 세리는 동족을 배신한 죄로서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죄가 아니었다.
이런 사람들이 거룩함 앞에 서야 할 때, 두려움과 죄송함으로 거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이 보인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선택하신다.
자기가 짓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착각에 빠져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이들의 기도가 아니라, 더 이상 기댈 것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의 기도를 받아들이셨다.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에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안다면, 우리 모두는 ‘멀찍이 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어렵게 청을 드리던 그들의 태도와 같은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의 죄를 아는 것처럼 큰 은총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죄를 자신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그리고 깨끗하게 인정하고 뉘우치면서 용서를 구하자.
그러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시리라 믿는다.
도둑은 감사하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요?”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어.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방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원을 내놓았습니다. 옛날 돈 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얼마 후 날이 밝았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을 했다고 하기에 확인을 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 때 방 선생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방 선생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들은 조금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청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제에게 자신들을 보이러 가는 것에서도 그들의 믿음은 보통믿음이 아닙니다. 나병이 걸린 상태에서 사제에게 보이러 간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돌아 맞아 죽을 위험성을 감수하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큰 믿음으로도 이들은 아직 예수님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오직 사마리아사람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기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그 믿음이 구체적인 감사의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저 빈 공간에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까지 구원받고 싶으면 몸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에게 도둑질을 하러 온 강도도 아주 작은 고마움이야 왜 없었겠습니까? 그 많은 돈을 아무 주저 없이 꺼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고맙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도망갔다면 나중에 방정환 선생이 그를 도와줄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고맙다고 한 마디라도 했기 때문에 경찰을 설득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고맙다고 말하지 않으면 훔치는 강도이지만, 고맙다고 말하면 그것은 주는 것을 감사히 받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께 고마움의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에 대해 오늘 복음의 명의 사람들처럼 먹고 튀는 강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고마움이 말로만이 아니라 ‘십일조’와 같은 구체적인 것, ‘봉사’와 같은 것으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예수님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이 돌아가시게 되는 이유가 바로 ‘도조’를 바치기를 원치 않는, 즉 감사할 줄 모르는 도둑들에 의해서임을 밝히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포도밭을 맡기고 떠난 주인의 외아들까지도 그 도조를 바치기 싫어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강도가 되지 않는 방법은 돈이든 시간이든 재능이든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그 십분의 일을 봉헌하면서 드러내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세상 모든 땅이나 거기에서 나오는 십분의 일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쓰고 있고, 예수님도 십일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문제는 아주 단순합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봉헌할 줄 안다면 그 감사를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마지막 희망은
언제나 믿음뿐입니다.
우리의 시간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향하는
모든 길이 치유입니다.
믿음같은 생명
생명같은 믿음이
주님을 향하는
걸음걸음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의 믿음을 타고
내려오는 감사의 오늘입니다.
모든 삶의 여정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치유이신 주님께로 돌아가는
믿음의 하루 되십시오.
아픔은 주님께로
되돌아갈 것을 다시 알려줍니다.
아픔을 치유해주시는
구원 자체이신 주님께로
일어나 가십시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지난주에 저를 꼭 만나고 싶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으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당히 부끄러워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낮에 이 자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상담을 원하는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성소후원회에 기부를 하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오신 것이었지요. 하지만 액수가 너무 적다면서 부끄러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돈이 생긴 경유를 같이 오신 친구 분이 설명을 해주십니다.
이분께서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하느님 도우심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보험금을 받게 된 것이지요. 갑자기 생긴 이 돈을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사제를 양성하는 성소후원회에 기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져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자매님께서는 남편도 없고 자녀들도 하나 없는 생활보호대상자인 독고노인이십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하느님 덕분이라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몸을 다쳐서 생긴 돈을 오히려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가져 오신 자매님의 마음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감사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지요. 바로 이런 마음이 세상을 더욱 더 살기 좋게 만드는 마음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하게 원하는 마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떤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 때, 만 원짜리 세 장을 꺼내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한 장은 하느님께 봉헌하고, 또 한 장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 마지막 한 장만이 나만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 목적으로 하느님께서 재물을 주셨는데, 우리들은 이 세 장 모두를 나만을 위해서 쓰려고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과 더욱 더 멀어진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랬던 것이 아닐까 라는 반성을 해봅니다. 나만을 위한 행동과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었던 지요.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그래서 하느님께 깊이 머리 숙여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딱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큰 은총을 받았음에도 감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를 드린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감사의 기도와 또 이에 따른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늘 부족하다고, 아직도 형편없다면서 불평불만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바로 그때 앞서 말씀드린 그 자매님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를 더 좋아하실까요?
몸은 도구다. 마음은 그 도구를 움직이는 기능, 증거, 보상이다(조지 산타야나).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에서 소개된 한국 문화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고 합니다. 한번 읽어 보시지요.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유교적인 국가다. 연장자에 대한 복종은 필수적이다. 연장자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지 말라. 연장자와 논쟁을 벌이지도 말라. 선을 넘어선다면 무거운 처벌(신체적 처벌을 포함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종이 공짜는 아니다. 손위 누나는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돕고 상사는 항상 점심 값을 낸다.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은 끈기. 한국전의 잿더미에서 일어선 앞 세대, 휴일 없이 일하는 건설 인부, 컴퓨터 게임 중독자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다. 이 나라의 끈기 있는 황소 정신 말이다. 일단 한국인들이 무언가에 자물쇠를 채워 놓으면, 부수고 나가기란 힘들다. 생활은 경쟁적이며 모든 것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것이다.
한국인의 또 다른 특징은 관대함이다. 계산서를 서로 집어 들고 싸우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만약 어떤 한국인이 당신을 극진히 보살피기 시작하면, 당신이 계산하기란 정말 힘들어진다.”
어떻습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부끄러운 것도 있고……. 아무튼 이 글을 보고서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정말로 좋은 것은 계속 유지하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발전하고 나아가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네 눈물이 곧 내 눈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습가운데 가장 제 마음에 와 닿는 모습은 아무래도 자비하신 모습입니다. 복음서 곳곳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생활 기간 내내 예수님께서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고통 속에 신음하는 백성들 머리 위로 당신 자비의 팔을 펼치셨습니다.
매일 미사 시작 예식 때 마다 우리는 하느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자비’라는 말, 생각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자비(慈悲)란 너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네 고통을 내 고통으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네 눈물이 곧 내 눈물이란 뜻입니다. 네가 잠 못 이루며 힘들어 할 때 나도 네 옆에서 깨어있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바로 그러하십니다. 하느님을 단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자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멀리서가 아니라 내 가까이서, 내 위에서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서, 나와 그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가 되어, 한 마음이 되어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 등장하는 나병환자들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의 아픔이 당신의 아픔, 우리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 우리의 울부짖음이 당신의 울부짖음이었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침을 절대로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들이 겪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과 슬픔을 보십니다. 마음 가득히 차오르는 연민의 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십니다. 당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토마스 머튼은 자비를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 사이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명철한 의식’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매 순간 살아있고, 매 순간 숨 쉬고 있는 우리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역시 또 다른 존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자비의 실천으로 또 다른 하느님의 얼굴을 그들에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비야말로 가장 ‘하느님스러운’ 것입니다. 자비는 가장 충만한 신적 속성입니다. 자비가 자랄 때 우리 내면에서 신성(神性)도 자라납니다. 자비를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왜곡하거나 죽이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보물 창고
김수만 신부님
하루 일과를 마치고 끝기도를 바칠 때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 하고 되돌아봅니다. 어떤 일은 ‘참 잘했구나.’ 하고 미소를 짓고, 어떤 일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생각보다는 제 생각이 더 커질 때가 많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느님을 찾는 것은 아닌지 반성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천사의 안내로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러고는 한 창고를 보게 되었는데, 안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창고가 비어 있는 거죠?” 천사가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곳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가득했던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느라 보화가 가득한 창고가 텅 비워지게 된 것입니다.”
천사와 그 사람은 또 다른 하늘 창고를 구경했습니다. 그 창고는 아까 본 창고와는 반대로 안에 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이곳은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내려줄 보화가 있는 창고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너무 적어 아직도 이렇게 보화가 쌓여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루를 살아가면서 감사할 일이 많음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왜 이방인 한 사람만 찾아왔을까요? 축복의 선물을 받았으면 마땅히 감사드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요?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릴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빛을 잃어갑니다.
우리 삶, 그리고 우리 삶의 자리, 오늘 하루, 온통 감사할 것투성이입니다.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드리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감사는 고사하고 내 뜻,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께 불평·불만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요. 제1독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두 손 모아 감사기도를 해보십시오.
감사하며 살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입니다.
하나는 치유된 뒤 감사를 드리러 예수님께 왔고 아홉은 오지 않았습니다.
감사드리러 오지 않은 아홉에 대해서 저는 너무 나무라고 싶지 않습니다.
나무라는 마음 대신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 아홉도 감사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긴 생애동안 병의 고통을 당한 사람으로서 감사의 마음이 없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감사드리러 오지 않았을 뿐일 것입니다.
마음이 있어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니 애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는 해도 이 아홉의 경우는 표하지 않을 정도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면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그 정도는 아니기에 감사를 표하러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 한우리 징검다리들과 강원도로 Workshop을 갔습니다.
그간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여행하는 그런 성격도 띠었기에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치 좋은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면서 저를 비롯한 남자들은 한 번 감탄을 하고 마는데 자매님들은 아름다운 경치가 나올 때마다 매번 감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들은 감탄이 열 번 중 한 번만 넘치는데 자매님들은 감탄이 매번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매번 감탄하시냐?”고 농 삼아 말씀드렸지만 누가 더 행복한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열 번을 봐도 열 번을 다 감탄하는 사람과 열 번을 봤지만 한 번만 감탄을 하는 사람. 열 번에 한 번만 감탄이 넘치는 사람보다는 매 번 감탄이 넘치는 사람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이니 그가 당연히 더 행복한 사람이겠지요.
感자가 들어가는 모든 말은 기울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넘쳐서 나오는 것입니다.
感動,
感興,
感歎,
感情, 그리고
感謝.
이런 것들은 절대로 기울여 나오는 것들이 아닙니다.
기울여 나오면 비어지기 때문에 그 뒤 공허감이 남지만 넘쳐서 나오면 자신도 채우고 남도 채우는 것이 됩니다.
나도 만족, 너도 만족이고 나도 충만, 너도 충만입니다.
그런데 感謝는 感자가 들어가는 그 많은 말들 중에서도 특별합니다.
감사는 은총, 은혜에 대한 감사이기에 감사가 넘쳐 나오는 순간 은총으로 충만해집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음은 하느님 손해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그 큰 은총으로도 다 차지 않는 자기 손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감사를 드립시다.
횟수로는 매 번, 양으로는 넘치게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Eucaristia)와 구원
전삼용 요셉 신부님
송명희라는 시인은 태어날 때부터 소뇌를 다쳐 뇌성마비 장애를 얻었습니다. 몸의 성장발육이 느리고 연약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그렇듯이 얼굴과 몸이 비틀어져 거울을 보기도 싫었습니다. 몸이 그래서 초등학교도 가지 못해서 아는 것도 없었습니다.
수차례 반복되는 이사와 찢어지게 가난한 자신을 보면서 그녀는 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하느님은 ‘말하는 대로 써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왼손에 토막연필을 쥐고 받아 적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그녀는 너무 어처구니 없는 말씀에 울며 소리쳤습니다.
“아니요! 못 쓰겠어요! 공평해 보이지가 않아요! 내겐 아무 것도 없어요!”
하느님은 ‘시키는 대로 공평하신 하느님이라 써라!’ 하셨고, 그녀와의 반복되는 공방전 속에 결국 하느님이 승리하셨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이렇게 ‘나’라는 시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사로 한국 복음성가 작사대상을 수상하고 그녀의 책도 기독교 저서 최우수 서적으로 선정되었으며 지금은 장애인 학교 건립을 추진 중이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 열 명 중에 유일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 곧 그 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 때에야 비로소 그 사람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예부터 나병은 죄의 상징이었고 나병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세례로 상징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보증이 아니라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송명희 씨는 비록 개신교 신자지만 우리에게도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녀를 바뀌게 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변화시킨 것은 ‘하느님의 공평함’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하느님을 찬미 하면서부터 였습니다.
가끔 미사시간에 신자들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 나와 있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분들을 의외로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미사는 파견한다는 뜻이 있고 동시에 ‘감사(Eucaristia)’의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으면 미사가 아니고 다른 이들이게 주님을 전하려는 사랑이 없다면 미사는 그 사람에겐 헛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미사는 오늘의 치유 받고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미하기 위해 제대 앞에 모이는 이는 비로소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기가 얼마나 인색하고 어렵습니까?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았다고 느낄 불행한 순간에도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태양의 찬가를 지어 자연과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한 시는 그 분이 눈이 멀어 보이지 않을 때였다고 합니다. 눈이 멀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보이지 않는데도 그 분을 찬미하였기에 성인이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이런 문구를 보았습니다.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그대, 사랑합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것은 말이 아닙니다. 바로 관계입니다. 말을 못 해도 엄마가 함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찬미도 바로 이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능히 찬미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과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그분이, 그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도록 합시다.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회색 빛 나날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제 "신앙생활"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길이었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평탄하고 호젓한 오솔길을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가파른 오르막이나 아슬아슬한 절벽 사이를 기어갈 때도 있지요.
지난 제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로 희망과 설렘으로만 가득 찼던 맑은 날이 있었는가 하면, 답답함과 좌절과 쓰라림뿐이었던 회색빛깔의 나날들도 많았습니다. 아버지와 이웃들 앞에 떳떳하고 의기양양하게 살아가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쥐구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날들도 있었습니다. 절실하고 감미로운 하느님 체험으로 가슴 뛰던 때가 있었는가 하면,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하는가? 이게 도대체 뭔가?"하며 막막해하던 시절도 많았습니다.
제 신앙여정 안에서 참으로 피하고 싶었던 불행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봅니다. 물론 그 순간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제 삶 전체가 뒤흔들렸던 위기의 순간들이었지요. 어떤 체험들은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떠올리기조차 싫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조금씩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좌절의 순간이야말로 제 삶 안에 큰 쉼표를 찍게된 보물과도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불행했다고 여겨지던 그 순간이 비록 육체적으로 괴로웠지만 제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바라다 볼 수 있었던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병고의 십자가를 지고 가던 순간이야말로 진한 하느님의 은총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희망과 구원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한평생 나병으로 시달리던 사람들을 말끔히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의 병고를 모른척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고통 앞에 함께 아파하며 함께 고통 당하시며 함께 눈물 흘리시는 연민의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거듭되는 실패 속에 헤맬 때도 우리가 결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한가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를 외면한다할지라도 예수님 그분만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그분만은 끝까지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결코 고통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통 안에 계심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노화마저 거부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고목의 등걸에서 연녹색 푸른 싹이 돋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죽음마저도 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마저 물리치셨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아야만 정상적인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들에게 자신의 깨끗한 몸을 보여 줄 날만을 고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으로 살 수 없었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을 억눌렀던 온갖 굴레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복음(기쁜 소식) 자체였습니다.
나병 환자들이 더 이상 예수님 앞에 머무를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모든 멍에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사제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졌다.
나병 환자들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사제에게 달려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곧 나병의 치유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사제들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었는지, 그들은 자신이 온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사제들에게 달려만 갔습니다. 단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똑같이 나병을 앓았고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께로, 다른 아홉 사람은 사제에게로 향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제 서로의 길이 갈립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굴레를 벗겨 준 해방자에게로 달려감으로써 가장 가까이에서 참 해방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당장의 현실적 이익을 향해 달려감으로써 해방자에게 멀어집니다.
한 순간의 일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입니다. 어디로 달려갈 것인가? 지금까지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굴레를 벗어버렸다는 해방의 기쁨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이 해방의 기쁨을 온 몸으로 체험했기에 더 완전한 해방, 총체적인 해방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
머리로서는 명확하게 대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으로 결단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욱 충만한 내일을 향해 얻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당장의 편안함과 이익이 너무나도 아쉽기 때문입니다.
"너는 과연 어디로 달려갈 것이냐?"
"너는 과연 지금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느냐?"
오늘 주님께서 던지는 화두입니다.
로또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이 계셨지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인생은 한방이야.”를 읊조리면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을 이 형제님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 역시 일반 사람들의 취미 활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만약에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글쎄 시험을 빵점 맞아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났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의 시험지를 받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적어보시오.”
이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나의 행동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집니다.
먼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도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으며, 다시금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그래서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신의 치유가 마치 받을 빚을 받은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받은 이방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임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체의 치유만이 아닌, 영혼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누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바로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이방인이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 때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을까요?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합시다.
E.T.라도 감사해요.
임영인 신부님
한센병을 겪은 것처럼 코가 없고, 한쪽 눈과 눈썹도 없고, 입술이 뒤틀린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E.T.할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채규철 선생님입니다. ‘E.T.할아버지’라는 말은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이랍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덴마크에 유학 가 선진 농업기술을 배워 돌아온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던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언덕에서 차가 굴러 폭발하면서 전신 3도 화상을 당해 얼굴이 도깨비처럼 변했습니다. 한창 나이인 서른한 살 때였습니다. 2년 뒤에는 아내마저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은 절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식당이나 다방에서 거지 취급을 당하고 버스 승차를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원망스러워서 자살하려고 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나를 살리신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주님 뜻에 순종하며 살자.’
그 후 채규철 선생님의 삶은 변했습니다. 모든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고름이 나던 머리에서 새 머리카락이 돋아나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머리카락이 조금이라도 가려 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귀가 없어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남은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입술이 없어졌어도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청십자 운동을 하고, 간질 환자들을 위해 활동 했으며, 86년에는 아이들을 위해 두밀리 자연학교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감사의 전도사가 되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마음씨 좋은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록 돈이 많았지만, 정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런 그가 어느날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목수를 불러 집을 좀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우리 부부가 3개월쯤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최상의 건축재료와 초일류 목수를 총동원해 멋진 집을 지어주세요. 건축비를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고 주인이 여행을 떠나니, 목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요. 그리고 그는 싸구려 건축자재와 형편없는 인부를 동원해서 날림으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건물을 다 지었어요 구멍이 나고 금이 간 곳이 생겼지요. 이런 부분은 페인트칠로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드디어 부탁을 했던 부자가 돌아왔고, 목수는 부자에게 열쇠를 주며 이렇게 뻔뻔하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집을 지었어요."
그러자 부자가 목수에게 그 열쇠를 다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집은 내가 당신 가족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목수는 땅을 치며 후회를 했지요. 그는 자기에게 돌아올 집인지도 모르고, 단순히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엉터리로 건물을 지었으니 말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지요. 즉,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은 결국 낭패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렇게 당장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서 은혜도 모르고 엉뚱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시다가 10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그들 중에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이란 불치의 병으로 뭇사람과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외를 당했겠지요. 따라서 그들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서 예수님께 외치지요.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불행을 가련히 여기시어 나병을 낫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들은 모두 깨끗해졌던 것이지요. 그런데 치유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한 사람만이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은혜도 모르는 짓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율법에는 나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였던 자신들과 접촉한 예수님은 이미 부정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부정해진 예수님을 만나면 그들 자신이 또 다시 부정해 질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병이 나기 전의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지요.
이 모습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지만, 우리 자신의 편리와 이해타산으로 인해 다시금 멀어지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온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홉 명의 유대인처럼 단순히 병의 치료만 될 뿐,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겠지요. 앞서 그 가난한 목수처럼 나에게 돌아올 것도 그냥 차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이 치유를 받아야 할 죄인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죄인임을 고백하고, 굳은 믿음으로 주님의 자비를 간청해야만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생각과 말과 행위의 십일조
이인옥
오늘 한 말 중에 고맙다는 표현은 얼마나 되나? 한 달 동안 한 일 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 일은 얼마나 될까? 올 한 해 사람들에게 받은 호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이제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 은인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일생 일어난 일들 중에 감사드릴 사건은 무엇인가?
하루 종일 한 말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표현을 하고 살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이다. 한 달 내내 한 일 중에 십분의 일만 감사의 마음으로 했어도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만났던 분들의 고마움을 십분의 일만 되새겨 잊지 않았어도 지금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 중에 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그만큼 마음이 겸손하다는 증거다. 정말로 은인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살아오는 동안 감사드릴 일이 너무도 많아 손꼽을 수 없다면 그만큼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이다. 정말로 감사할 일이 많아서라기보다 그만큼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의, 말의, 행동의, 시간의 십분의 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다.
치유된 나병환자 열 명 중에 감사한 사람은 겨우 십분의 일, 단 한 명이다. 그런데 육신의 치유에 감사할 줄 알았던 그 한 명에게는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주어졌다. 작은 감사가 더 큰 감사를 불러온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동안 행복해진다고. 감사할 일이 많아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써 더 많이 감사할 일이 생긴다고. 그러니 행복하고 싶다면, 구원받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 일생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야 하지 않을까? 나머지 아홉은 그만두고라도.
참된 치유
서현승 신부님
미국의 한 언론사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당첨 이후의 삶을 조사해봤더니, 당첨된 사람들은 당첨금을 받은 이후에 거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마약에 빠지고 도박에 빠져서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이 대부분이더랍니다. 그런데 복권에 당첨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반대로 아주 행복하고 건실하게 사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네요. 그들에게는 비슷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복권 당첨금의 상당 부분을 사회단체에 기부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도와주는 삶을 사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중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고 구원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의 나병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고나서도 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요? 결국, 육체적인 나병의 치유가 그들 삶의 목표였기 때문이죠.
복권에 당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상시 간절히 바랐던 것이 돈 자체였고 갑자기 행운의 돈이 생기자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병환자 아홉 사람도 육체의 치유를 통해 그들 삶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었던 나병환자만 병을 치유해준 하느님을 찬양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분께 감사드리고자 찾아와서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그는 믿음을 통해 이제는 몸만이 아니라 나병환자로서 살았던 삶까지 치유를 받습니다. 참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홍성만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어떤 마을에 들르십니다.
마침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이르십니다.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집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구원된 사람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입니다.
다른 아홉은 몸은 깨끗해졌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영혼의 나병이 치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감사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영혼의 나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부족한 작은 것에 집착한 나머지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런 나머지 주어진 큰 은혜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혹시 나도 부족한 작은 것 때문에,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감사의 정을 드리는 정도가, 영혼이 건강한 정도입니다.
감사의 정을 잊지 않는 매일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평범한 일상에서의 감사
이강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할 줄 아는 한 사람을 등장시켜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열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 사람들 중에서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 사람이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얼마나 무감각하게 보내는지를 또한 알려준다.
마태오복음 5장 43절을 보면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고 전해준다. 즉 세상사람들에게 똑같은 배려와 똑같은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그러나 이에 감사하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리도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병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이 치유되었다면 몸의 변화를 매우 크게 체험했을 것이다. 문드러지던 몸이 낫는다는 것은 매우 큰 변화이다. 그뿐 아니라 나병환자들의 비참한 삶에서 정상인의 삶으로의 변화 또한 매우 큰 변화이다.
나병환자들은 숨어서 생활해야 했고, 정상인의 삶의 터로 내려와 거리를 다닐 때에는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쳐야 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라고 외쳤던 그들의 신세는 주님을 만나면서 더 이상 부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 이런 매우 큰 변화를 체험했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얼마나 그들의 삶이 무감각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묵상할 수 있는 내용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 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늘 복음에서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듯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도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부각시키신다.
오늘 복음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 이방인을 부각시킴으로 신앙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계시는 것이다. 이웃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감사할 줄 알았던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신앙을 가졌다
는 신앙인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감사의 생활에서도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이 더 뛰어났고, 이웃을 받아들이는 이웃 사랑에서도 그들이 더 모범적이었다. 이런 내용을 알려주면서 신앙인인 우리들에게 더 분발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제 신앙적 감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큰 변화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 스도인들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열 명의 문둥병자
김웅태 신부님
오늘 복음[루가 17:11-19]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줄 알아야 한다는 것에 대한 교훈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레아 사이를 지나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열 명의 나병환자들 중에는 이상하게도 사마리아 사람이 하나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천시해서 그들을 상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고 피하는 것이 마치 그들에게 공노가 되는 것처럼 멀리하는 처지였는데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사마리아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인 불행에 처하게 되면, 서로가 "사람이다"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중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문둥병이라는 비극 속에서 서로가 고통받는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을 뿐, 유대인이라든가, 사마리아인이라는 구별을 잊어버리고 함께 같은 처지를 마음 아파하면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서로도 하느님 앞에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을 때, 타인을 멸시하거나 할 수 없고 서로를 용서하고 함께 손을 잡고 살 수 있으며, 진정한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사람이 어떤 은혜를 누구에게 받은 다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가운데 이 장면에서처럼 인간의 배은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고 못견디게 부르짖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사제들에게 자기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에 낫게 해 주셨다. 그런데 자신들이 평생의 절망이요,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과 같은 그 무서운 문둥병에서 해방시켜주신 은혜를 모두 받았으나, 은혜 받은 것을 알았을 때, 예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멸시 받아왔던 사마리아인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 은혜 받은 적이 없는가? 받았다면 얼마나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만큼 있는가? 누구는 그럴 것이다. 내가 하느님 덕본 것이 무엇이 있기에 그분에게 그토록 감사할 것이 있는가? 나는 내 노력으로, 내 힘으로 여유있게 살아가는데, 그분의 도움도, 그분께 감사할 것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그러한 자신이 자신 만만한 존재인가? 자신의 살아있는 목숨부터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에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감사가 먼저입니다.
장재봉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가 풍요로우심은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 하느님께서는 약자를 ‘편애’하신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탈출 22,22)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니까요. 오늘 치유를 받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 가운데 아홉 명은 아마도 사제에게로 갔을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러주셨으니까요. 열에 아홉은 다수결 원칙에 따르면 우위입니다. 열 가운데 아홉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곧 옳은 것이고 정의라고 믿는 것이 세상의 잣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먼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잣대가 세상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외롭고 때로는 고독합니다. 하지만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변치 않으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일이라면 강합니다. 절대 꺾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홀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지셨는지요? 그리고 무엇을 감사하셨는지요? 그분께 엎드려 감사할 것이 지금, 이렇게 온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우리들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곤란하지요.
수험생을 위한 기도
임종심
우리 성당 근처에 입시학원으로 유명한 종로학원이 있어서인지 주일날 청년미사에 수험생들이 많이 온다. 본당 신부님과 종로학원에서 가르치는 두 분 신자 선생님의 도움으로 4년째 수험생을 보살피고 있다. 고해성사도 보고, 냉담하는 수험생들이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봄에는 삼겹살 파티도 한다.
매년 수능 전날 미사에서 수험생들에게 일일이 안수해 주고 십자가나 기적의 패를 목에 걸어준다. 미사 후에는 구역에서 정성껏 준비한 저녁식사를 수험생들과 함께 나누며 1년 내내 수능이라는 굴레에서 마음 졸이고 힘들어한 그들을 격려한다. 시험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떠나겠지만 결코 이 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일 수능을 치를 수험생들의 마음이 무척 초조하고 불안할 것이다. 지금 수험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쪼록 침착하게 시험 잘 치르고 그동안 노력한 모든 수고가 좋은 결실을 맺기를 바라며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지혜라는 큰 복을 주신 주님! 모든 수험생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수능을 준비하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장차 미래의 큰 일꾼이 될 수험생들이 수능이라는 뚜렷한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여여(如如)한 마음으로 큰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지금까지 준비한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볕돋?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감사하는 삶
강영구 신부님
그들 중 한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예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갔느냐?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루가 17,15-18)
사랑하는 예수님,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까지 나음을 받고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뿐입니다.
그는 감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나머지 아홉은 육신의 상처는 치유 받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들어있습니다.
감사는 행복과 기쁨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행복합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에 감사하고, 잠을 깨우는 새소리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음에 감사하고, 곱게 물든 나무 잎과 아름다운 국화 때문에 감사하고, 계절의 변화에 감사하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불평과 불만은 불행과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괴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고 불평하고, 밝아오는 새날을 어떻게 살까 염려하고 걱정하며 투덜대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귀찮아하고, 떨어져 수북이 쌓이는 낙엽 때문에 투덜대고, 국화가 너무 아름답다고 불평하고,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투덜대면 사는 것이 괴롭고 불행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데살5,16-18)
인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유일회적인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늘 행복합니다.
예수님, 우리를 행복의 나라로 초대해주신 당신께 감사드립니다.(一明)
감사에 더디고 파티에 익숙한 우리들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예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오늘 복음의 기적사화는 루가복음만의 고유한 사료이다. 루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8)를 엮어가면서, 예수께서 상경 길에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9,51.53; 13,22.33; 17,11; 18,31; 19,11.28) 뿐만 아니라 베레아 지방을 통해 가시면서 오늘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지방을 언급한 이유는 나병환자 열사람 중에 이방인으로 취급받던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나간 복음들에서 드러났다. 애당초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예루살렘 상경계획을 잡았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를 제자들이 꼽게 여겨 하늘의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초연히 우회로를 택하셨다.(9,52-56)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10,29-37)에서도 예수님의 호의적 속내가 드러난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사화에서도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돋보인다.
구약성서에서는 사제들이 나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부정함으로 규정하고 그 환자들을 격리시켜 살게 하였다. 그들이 완치되었을 경우, 자신의 피부를 사제에게 보여 정함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레위 13장) 사제가 정함을 선포하면 병이 나은 자는 사제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의 장막에서 복잡한 ‘정화예식’을 치러야 했다.(레위 14,2-14) 하루도 아니고 8일씩 걸리는 이 예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사실 골치 아픈 것인지는 레위기의 이 대목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이 대목을 읽고나면 나병환자 10명 중에서 유대인이었던 9명의 배은망덕한 행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악성 피부병자들이 마을 중심과 격리된 어귀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마을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치유의 자비를 청했다. 사실 예수께는 어떤 병이든 치유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병자들이 사제들로부터 치유를 인정받고 공식적인 정화예식을 치름으로써 가족들과 함께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제에게 가는 도중에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10명중에서 9명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이 나병환자로 격리되어 지내는 동안 살아서는 결코 그들 가족과 동족에게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만에 하나 낫게 된다면 율법이 규정하는 ‘정화예식’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그 예식을 치러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백 번을 뇌까렸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유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힘차게 사제들에게 달려갔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바로 이방인으로 간주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예수께로 돌아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제대로 치유를 받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과연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법(法)이 사람을 깨끗하다고 선포한다 해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가? 깨끗하고 흠 없이 산다는 것은 사람의 인정을 받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다. 정화예식은 천천히 치러도 늦지 않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자신의 길을 가야 하시는 것이다. 오늘 9명의 유대인들 속에서 찬양과 감사에는 더디고, 축하파티에는 잽싸고 익숙한 우리들 자신을 본다. 감사와 찬양에는 정한 날 없이 미루고, 파티와 회식과 약속에는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우리들이 아닌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두 배의 기쁨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몸의 건강, 영혼의 구원>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서 환자 열 사람을 고쳐 주시는데 아홉 명은 그냥 가버렸고,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7,16).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7-19)
그 열 명이 앓고 있던 병이 무슨 병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그냥 가버린 사람이 아홉 명이고 되돌아온 사람이 한 명이라는 것도, 돌아와서 감사를 드린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도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몸의 병만 고치고 영혼의 구원은 받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은 몸의 병도 고치고 영혼의 구원도 얻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홉 명이 그냥 가버린 것이 서운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받을 수 있었던 은총을 안 받은 그들이 안타까워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은총은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못 받는 사람은 안 주셔서 못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아서 못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안 받는' 사람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다른 아홉 명은 믿음이 없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뜻도 되는데, 그들은 믿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은 아니고, 몸의 병을 고치는 정도의 믿음만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은 '많이 부족한 믿음'입니다.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청하지 않고, 당장 눈앞의 일만 생각하고 그것만 청하는 믿음이 바로 그렇게 '부족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홉 명이 그냥 가버렸어도 그들을 고쳐 주신 일을 취소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건강해져서 계속 건강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나중에라도 영혼의 구원 문제를 생각하고, 구원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했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을 되찾은 것에만 만족하고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면, 믿음 없는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인생을 살다 갔을 것입니다.
몸이 건강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몸의 건강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면, 즉 건강한 몸으로 지옥에 갈 것인가? 병들고 약한 몸으로 천국에 갈 것인가?
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실제로 그렇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추구할 것인가는 모든 신앙인들이 날마다 선택해야 하는 숙제입니다.
의학이 발달했어도 아직도 여전히 불치병과 난치병이 많고, 일생 동안 병석에만 누워 있다가 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고, 불의의 사고로 장애자가 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게 살다 갔다면, 그 인생은 실패한 낙오자의 인생인가?
그런 경우에도 하느님께 감사드릴 이유를 찾아서 기쁨 속에서 살다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계속 원망하고 저주하다가 불행하게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이 말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병이든지 장애든지 간에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병에 걸리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고, 병에 걸렸다면 치료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다쳤다면 재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긴 한데, 신앙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 감사, 희망, 기쁨의 태도를 잃으면 안 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어떤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에 걸린 일 자체를 기뻐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병에 걸렸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 기쁨은 믿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고, 기도하고 있다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전이라도, 또는 다른 결과가 생기더라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과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천국이든지 지옥이든지 어디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건강한 사람들과 병약한 사람들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몸의 건강 상태를 보는 심판이 아닙니다.
죽어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는 몸의 건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갔느냐?”
<불평불만, 이제 그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미혼남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한 가지를 관심 있게 본적이 있습니다. 질문 내용이 ‘내 남자(혹은 여자) 친구, 이럴 때 제일 싫다.’였는데, 그중에 눈에 띄는 상위권 대답이 이랬습니다. ‘대중식당에서 큰 소리로 종업원들에게 야단치고 유세부리는 남자(여자)친구.’
저 역시 대중식당에서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상전도 그런 상전이 없습니다. 종업원들을 마치 몸종 다루듯 다룹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피곤한 사람들을 제대로 괴롭힙니다. 다른 데서 못 푼 스트레스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수시로 불러대고, 이것 왜 짜냐? 저것은 왜 식었냐, 갖은 불평불만들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부터 다짐을 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키지 않고 직접 가져온다. 주면 주는 대로 먹는다. 절대로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참으로 하지 말아야할 것이 ‘불평불만’이란 것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그게 쉽지 않습니다. 불평불만이란 것, 한 번, 두 번 하다보면 그게 슬슬 습관이 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자기도 모르게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불평불만, 그것은 우리 인류의 역사와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때도 이 불평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출애굽 시절을 한번 돌이켜보십시오. 민족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염원이었던 이집트 노예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향해 기쁨의 행렬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자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섰을 때 홍해를 둘로 가르셔서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게 하십니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백번 천 번도 더 감사하고 찬양해도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몇몇 ‘개념 없는’ 사람들 처신하는 것 좀 보십시오. 즉시 불평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를 이집트에서 빼내왔느냐?” “왜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이집트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고기에, 술에 산해진미였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지긋지긋한 만나를 먹어야 되나?”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시고 전혀 그러실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크게 진노하십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것, 바로 불평불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치유의 은총을 입은 나병환자들의 모습도 한번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새 삶을 부여하신 예수님, 생명을 도로 찾아준 예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었습니까?
하느님께서 가장 즐겨 받으실 봉헌은 바로 감사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생토록 베푸신 하느님 자비에 대한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은 너무나도 당연히 ‘감사’여야 하지 않을까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참 수도자라면, 입을 열었을 때, 즉시 튀어나와야 하는 말이 감사의 말이어야 합니다. 찬미의 노래여야 합니다. 축복의 인사여야 합니다.
가장 많은 불평불만은 대체로 인간관계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말입니다.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러나? 저 사람은 왜 인생 저렇게 사나? 저 사람은 왜 나와 이토록 철저하게도 다른가? 내가 과연 언제까지 저 사람을 참아줘야 하나?
그러나 한번만 생각을 뒤집어보십시오. 한번 크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은 선물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선물입니다. 한 사람이 내게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입니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정현종, 방문객 참조).
이웃에 대한 불평불만은 이제 그만 접읍시다.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로 우리 삶을 가득 채웁시다.
몇 년 전 자동차를 새로 구입했을 때의 일입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차였고 그래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애지중지했고 매일 차를 깨끗이 닦으면서 저의 애정을 차에게 표시했지요. 그런데 차를 구입한 지 한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청주에 내려갈 일이 있었지요. 전날 눈이 많이 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차는 일반 승용차가 아닌 4륜구동 SUV 차였거든요.
하지만 저의 예상과는 달리 눈길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면서 제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결국 어떤 집의 담벼락에 제 차가 쳐 박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 차 밖으로 나왔는데 차의 상태가 영 아니었습니다. 엔진 부분까지 완전히 박살 나 있었지요. 차 뽑은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착잡했습니다. 새 차가 이렇게 완전히 박살 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제 차에 의해서 파손된 이 집의 담벼락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라는 원망도 하게 되었습니다.
차가 담벼락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만 바라보고 있는 제게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차 박살난 것 보니까 운전사가 크게 다쳤겠어요. 운전사는 벌써 병원 갔어요?”
그 순간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면서 원망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큰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멀쩡하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저는 감사하기보다는 원망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다 은총입니다. 괴롭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 역시 잘 생각해보면 감사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쁜 일이 있을 때에는 끊임없이 남의 탓 그리고 주님 탓을 외치면서도,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고,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선물 역시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며 은총을 청하는 나병환자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들의 병을 고쳐주셨고, 당시 나병은 치유 후 율법적 절차를 거쳐야 하는 법적 치유 인정이 필요했기에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순간 병이 나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딱 한 사람,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감사를 표시한 이 사람만이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의 말씀,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을 듣게 되지요.
어쩌면 사제에게 먼저 자신의 몸을 보이고 치유되었음을 인정받는 것이 더 우선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좋든 나쁘든 어떤 새로운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감사의 표시를 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도 덤으로 받습니다.
감사는 가장 세련된 형식의 예의다(J.마르탱).
무엇이 성공인가?(랄프 왈도 에머슨)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뼘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제가 오늘 오후부터 구반장님 가을 연수에 함께 참석합니다. 따라서 내일 새벽에 올릴 수가 없어서 하루 전인 오늘 올립니다. 참, 내일 새벽에는 제가 부재중이라 인터넷 방송도 할 수 없으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내일의 새벽묵상글 시작합니다.
로또를 좋아하는 어떤 형제님이 계셨지요.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매주 토요일 저녁에 복권을 손에 쥐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인생은 한방이야.”를 읊조리면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복권을 사서 당첨번호를 확인하는 것을 이 형제님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이것 역시 일반 사람들의 취미 활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요. 또 만약에 당첨이 되면 그야말로 ‘인생역전’을 이룰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울상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글쎄 시험을 빵점 맞아서 선생님으로부터 혼났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 아들의 시험지를 받아들었지요. 그리고 그는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험문제는 이러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적어보시오.”
이에 대한 아들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인생은 한방이다.”
나의 잘못된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와 나는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히 나의 행동은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 지가 분명해 집니다.
먼저 하느님께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 역시도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풍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가 있으며, 다시금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기만 하려하고 그래서 늘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예수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 한 명 뿐이었습니다. 9명의 유대인은 자신의 치유가 마치 받을 빚을 받은 것처럼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치유받은 이방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총임에 감사하며 주님 앞에 엎드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육체의 치유만이 아닌, 영혼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10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누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될까요? 바로 단 한 명의 치유받은 이방인이 우리의 모범이 되고, 우리 역시 이러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면서 살 때 영혼의 구원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모범을 보이며 살고 있을까요?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도록 합시다.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좋은 생각’ 중에서)
평생을 일그러진 얼굴로 숨어 사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심한 화상으로 자식들을 돌볼 수 없어 고아원에 맡겨 놓고 시골의 외딴집에서 홀로 살았다. 한편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자식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식들은 아버지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흉한 겉모습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외면해 버렸다.
어느덧 자식들은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외롭게 살다 생을 마감했다. 아버지와 왕래를 끊고 살던 자식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장례식에 마을 노인 한 분이 문상을 왔는데, 아버지가 화장은 싫다며 뒷산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일러 주었다. 하지만 자식들은 산에 묻으면 때마다 돌봐야 하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을 것 같다며 화장을 했다.
장례를 마치고 아버지 유품을 태우던 자식들은 일기장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흉한 얼굴을 가지게 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어릴 적 자식들의 불장난으로 집에 불이 났고 자신들을 구하다 화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 사고로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죽은 아내와 자식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일기장에 편지를 썼다.
“여보, 당신을 구하지 못한 날 용서하구려.”
“아들과 딸아,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했지만 마지막 부탁이 있다. 내가 죽으면 부디 화장은 하지 말아다오. 평생을 밤마다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리며 살았단다.”
뒤늦게 자식들은 통곡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화장되어 연기로 사라진 뒤였다.
감사
정희완 신부님
“사라지는 것만이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 세상은 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지만/ 끝내 그 어디에도 다다를 순 없었다/ 가는 곳까지만 길이었을 뿐”(유하, ‘7월의 강’).
11월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그래서 조금은 황량한 11월의 풍경은 언제나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아보게 합니다. 11월은 우리들의 죽음에 대한 희미한 예감, 세월이 지나간 흔적에 대한 슬픈 기억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한 애상을 불러일으키는 달입니다. 11월의 느낌은 참 애잔한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우리의 생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정성 속에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생은 어머니의 희생과 기도 속에서, 나를 사랑해 준 많은 이들의 정성 속에서 일구어져 왔음을 고백합니다.
지난 내 사제의 삶 역시 결국 신자들의 헌신과 기도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것도 같습니다. 참 이기적인 세상에서, 참 이기적 본성을 지닌 우리 인간이 제 힘으로 제 노력으로 사는 것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 부모와 이웃들의 도움 속에 언제나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이 지상의 땅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감사의 노래뿐입니다. 11월은 지나온 삶의 시간들에 대해 감사하는, 또 그 삶의 순간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유시찬 신부님과 함께하는 수요묵상
열 사람이 깨끗해졌는데 이방인 한 사람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묵상을 해도 좋겠지만, 전체적 흐름으로는 관상을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과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 초점을 맞춰 주변의 분위기를 좀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네 분위기를 살펴본다고 할까요, 나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태도 그리고 나병 환자들 자신들의 몸짓과 표정을 좀 살펴봤으면 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나병 환자들이 만나는 장면을 좀 세밀하게 봤으면 합니다. 성경에는 그저 말마디만 주고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멀찌감치 떨어져 서로 그렇게 말만 주고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까이 불러 뭔가 다른 대화들이 오고가고 있는지 등을 봤으면 합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이때도 선입견에 사로잡힌 기도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네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배타성 내지 적개감만 드러내고 있다든지 예수님은 오로지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만 그들을 바라보며 대하신다든지 하는 식의 기도 말입니다. 내용의 맞고 그름을 떠나 기도에 신선한 감동이 빠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병이 나은 나병 환자들 각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단순히 모두 병이 나았다고 천편일률적으로만 정리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과 걸어온 역사가 다르고 그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 병 나음의 체험들이 각자에게 다른 울림으로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 특수한 예로 사마리아인의 반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중심으로 살펴보되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병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며칠 전 모임에서 오래간만에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을 보자 가라앉아있던 기억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다 해소된 줄 알았는데 기억과 더불어 조금 남아있던 부정적인 감정도 같이 올라왔습니다.
그분은 어찌 보면 저로 인해 인생이 바뀐 분입니다.
그대로 살았으면 어쩌면 폐인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이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배은망덕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저를 반대한다면 저도 이해하지만 정의와 명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분명 감정을 가지고 저를 비판하고 음해하였습니다.
이럴 경우 저는 대체로 그것을 큰 문제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가 부족하여 그리 하기도 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와 허물과 악을 통해서도 뭔가를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쫒길 때에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고 이에 대해 다윗 진영의 아비새가 가서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은 그를 만류하며 하느님께서 시켜서 그리하는 것이니 그대로 두라 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가라앉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나한테 감사해야 할 너인데 오히려 내 등에 칼을 꽂았지!’하는 생각이 살짝 지난 간 것입니다.
즉시 그런 저를 질책하고 아무 감정 없는 것처럼 그를 대했지만 크게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감사를 받으려고 했던 저의 교만과 자기중심성에 대한 반성입니다.
내가 은총과 복을 베푼 것처럼 내가 감사를 받으려고 하다니!
이런 면에서 오늘의 주님은 참으로 올바르십니다.
아니 주님은 참으로 겸손하시고 가난하시며 주님의 올바르심은 바로 이 겸손한 가난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국인 나환자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자 아홉 유대인 나환자가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시지만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영광 드리지 않음을 한탄하십니다.
당신이 감사를 받지 않고 아버지께서 영광 받게 하심,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완전한 겸손이시고 가난이십니다.
분명 당신이 연민의 정을 품으시고, 당신이 치유해주셨지만 그 연민의 정과 치유의 은총이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임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인정하십니다.
온갖 선은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받아 지니면 하느님의 선도 우리가 나누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기도하는 하루가 됩시다.
어제 낮 12시에 가게 축성을 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유를 가지고서 20분 전에 출발했지요. 사실 우리 성당에서 축성할 가게까지는 차로 10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길이 너무나 막힙니다. 또한 왜 이렇게 신호에 계속 걸리고, 신호도 왜 이렇게 깁니까? 그러면서 차 안에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왜 이렇게 차가 많은 거야? 신호체계는 왜 이 모양 이 꼴이야? 아니 바빠 죽겠는데 끼어드는 저 차는 뭐야?”
결국 축성할 가게에 5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막상 도착을 하니 주차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부정적인 생각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니, 이 사람들은 일도 안하나? 평일 낮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것이 말이 돼?”
그런데 문득 한심한 제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가게 축성이니 기쁜 마음을 가지고 축하해야 할 자리이지요. 하지만 저는 2~30분 동안 계속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찬 나쁜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바꾸자고 생각했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내가 약속시간에 10분 늦음으로 인해서 약속시간 늦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차보다는 자전거가 약속시간 맞추기가 훨씬 좋으며, 자전거 주차할 곳이 더 많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안 좋은 일만 계속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즉, 주님께 감사를 드렸을 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망이나 미움이 가득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감사야 말로 내가 겪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서 단 한 명의 나병환자만 감사의 인사를 하러 옵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는 정말로 자신의 치유를 간절하게 예수님께 외쳤었지요. 당시의 나병환자가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사람들에게 접근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이들이 자신의 치유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가를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졌지만,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감사는 더 커다란 선물을 얻게 된다는 것이지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육체의 치유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라는 선물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감사할 일이 없다하더라도 감사하십시오. 입으로만 말해도 괜찮습니다. 더 큰 감사를 드릴수록 주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분명히 감사할 이유는 있으며, 그 이유로 우리는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세요.
사랑이란 이름의 아들(이도환, ‘마음을 밝혀 주는 인생의 지도’ 중에서)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이 다스리는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그 마을은 사람들 간의 빈부 격차가 매우 심했는데,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게으름뱅이라고 욕했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를 뱃속에 기름만 잔뜩 낀 비곗덩어리라고 비난하며 서로를 헐뜯었다.
왕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연회가 끝날 무렵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왕자가 볼일이 있어 당분간 이곳에 머물며 지내게 되었으니 부디 내 자식을 사랑으로 잘 대해 줄 것을 부탁하노라.”
왕은 마을 사람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자가 몇 살이며 어느 곳에서 누구와 살고 있는지 밝히지 않고 그 마을을 떠났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어느 아이가 왕자인지 몰라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했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다 보니 어른들끼리도 서로 헐뜯지 않았고 마침내는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마을은 점차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 갔다.
일 년이 지난 뒤 왕이 다시 그 마을을 방문했을 때 마을 촌장이 말했다.
“왕이시여, 얼굴도 모르는 왕자님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달라졌습니다. 이제 왕자님이 누구인지 밝히시고 궁으로 데리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촌장의 말을 들은 왕은 한바탕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궁궐에 잘 있는 왕자를 또 어디로 데려간다는 말인가? 내가 이곳에 남겨 놓고 간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식일세. 그 자식이 잘 커서 이 마을을 이토록 아름답게 만들었는데 내가 어찌 데려가겠는가!”
반성과 감사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티토서.3,3-5)
남자들은 군대 얘기를 많이 합니다.
군대에서 고생 많이 했다는 얘기.
군대에서 있었던 무용담.
군대에서 있었던 특별한 일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군대에서 이러저러한 경험을 많이 했는데 자기는 그것을 겪어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삼아 또는 적당히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삶의 양념이 되겠지만 지나치게 옛날 일을 자랑삼는 것은 허풍일 뿐 아니라
현재의 초라함을 가리려는 가여운 과거 안주(安住)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성실히 그리고 제대로 산 성숙한 사람이라면 지난날의 자기 잘못을 늘 성찰하고 개선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과거를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한 때 우리가 얼마나 세속적으로 살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과거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내가 전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성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얼마나 그릇되고 헛된 것들에 빠져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에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현재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고 앞으로도 어리석지 않은 삶을 살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얼마나 잘 못 살았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과거를 돌아보며 신앙인인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내가 이렇게 어리석고 잘못을 하였는데도 하느님께서 나를 일깨우시고 인도하셨고 구원하셨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가 드러난 그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나의 모든 허물과 죄는 성령을 통하여 깨끗이 씻어주시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게 하셨다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 교육을 받고 있는데, 강사가 ‘삶의 수레바퀴’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삶의 수레바퀴는 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 개인의 삶(가족), 경제력, 행복지수 등의 만족도를 표시해서 그 점을 이었을 때 어떤 모습인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항목 중에 ‘경제력’이라는 부분에서 저는 최고점인 ‘10점’을 표시했습니다. 10점을 표시한 저를 본 옆에 앉으신 분께서 “경제력이 충분하신가 봐요.”라고 말씀하시며 웃으십니다. 그분을 보니 5점에 표시를 하시더군요.
비록 억대의 부자도 아니고, 통장에 그리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기에 최고점인 10점을 표시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처럼 10점을 표시한 분이 함께 교육을 받는 사람 중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직도 부족하다는 생각, 즉 지금 여기서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책에서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원하면 가난뱅이고 덜 원하면 부자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솔직히 20년 전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을 비교해보십시오. 사회와 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단지 상대적 빈곤을 느낄 뿐이지, 분명히 더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도 ‘더 더 더’를 외치면서 계속해서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를 외치며 더 많은 성취를 얻으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도파민이 나오려다가 나오지 못합니다. 대신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큼 얻지 못한다는 불평불만이 커질 뿐입니다.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의 이유를 물질적이며 세속적인 ‘더 더 더’에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소중한 가치들을 찾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병 환자 열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깨끗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찬미하고 감사함으로써 믿음으로 응답했던 사람은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던 아홉 사람은 감사하지 않았다고 다시 나병이 재발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쫀쫀하신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구원이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감사했던 사마리아 한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영혼의 치유까지 덤으로 얻습니다.
육체의 치유를 얻었지만, 감사하지 못한 이유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을 주신 것도 아니고, 또 만져주신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치유된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몸의 변화가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했기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왔던 것입니다.
오감을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는 것만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따뜻한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한다는 사실에 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라는 선물도 덤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력이었다. 오래 버티고 서 있으면 앉을 자리가 생긴다(애니 프루).
명의(인터넷에서 퍼온 글)
옛날 당나라에 송청이라는 한의사가 살았는데 송청은 많은 환자를 치료해 큰 명성과 부를 얻었다.
하루는 가난한 의원들이 송청을 찾아와 물었다.
“이토록 많은 환자가 찾아오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글쎄요... 굳이 나에게 비결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구불약(九不藥) 덕분이죠!”
“구불약이요?”
“예, 아홉 개의 ‘不’을 치료해 주는 신비로운 약이지요.”
송청은 차례로 그 의미를 설명했다.
- 상대방이 나를 의심하지 않게 해주고(不信)
- 불안한 마음을 없애 주며(不安)
- 나에게 앙심을 품지 않게 해주고(不怏)
- 내 마음이 곧다는 사실을 알려 주며(不具)
- 내가 약값을 속이지 않음을 믿게 해주고(不治)
- 나와 상대방의 거리감을 없애 주며(不義)
- 내가 성의가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해주고(不忠)
- 내가 공손하지 않다는 불쾌감을 없애주며(不敬)
- 내 언행이 원칙에 어긋난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 주지요(不規).
설명을 끝내자 의원이 송청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과연 명약이군요. 그토록 신통 망통한 약이라면 엄청 비싸겠군요?”
“이건 약재로 지을 수 있는 약이 아닙니다.”
의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송청은 한바탕 껄껄 웃고 나서 대답했다.
“잘 들어보세요. 만인을 부자로 만들어 주는 구불약, 그것은 바로 웃음이랍니다.”
힘껏 웃을 수 있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저의 기도가 다른 사람과 달리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제 두 손을 꼭 잡고서 “신부님, 기도 좀 꼭 해주세요.”라면서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그분들은 바로 수험생과 수험생 부모들이지요. 아마 오늘과 내일은 이곳 성지뿐만 아니라, 많은 본당에서도 기도하시는 분들로 가득 메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과 내일 뿐, 내일 모레부터는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분들을 만나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수능이 끝나고 나면 저한테 기도 부탁하시는 분들도, 성지와 본당에서 기도하시는 분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맞다. 합격자 발표가 날 때쯤 되면 또 다시 기도하시는 분들이 늘기도 하네요.
하긴 저의 모습도 이러했을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닥치면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그 일이 해결되면 언제 간절한 기도를 했냐는 듯이 주님을 외면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런데 그 모습이 보기 좋을까요? 혹시 이런 말이 떠올려지지 않나요?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치유 받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를 통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청하면서 치유를 요청했고 실제로 병의 치유를 받았으나,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다시 주님을 찾은 사람은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한 명 밖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치유 받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지 않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아마도 이제 깨끗해진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율법을 기억하면서, 다시 사마리아 지방을 간다는 것을 또한 자신들로 인해서 부정해진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나병으로 인해 부정해짐이 얼마나 큰 아픔을 준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바로 이러한 유대인의 완고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은혜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역시 이렇게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은총과 사랑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다시 주님을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지요.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을 찾은 그 한 명의 이방인은 이제 또 다른 선물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주님을 찾지 않은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다른 병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전과 마찬가지로 고통으로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방인은 완전한 치유를 얻습니다. 그는 나병만이 아니라 그 어떤 병에서도 당당히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감사하는 마음은 바로 믿음이라는 또 다른 선물을 받게 합니다. 그 선물은 우리들 마음의 어려움과 힘듦을 완벽하게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감사하지 못할까요? 참으로 어리석은 나였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감사의 기도를 잊지 맙시다.
나눔('좋은 글' 중에서)
휘셔라는 건축 설계사가 2차대전시에 자기가 겪은 체험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수백만의 유대인들과 함께 죽음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그런데 점점 기력을 잃고 죽어가고 있던 한 사람이 자기가 먹고 있는 딱딱한 빵 조각과 휘셔가 마실 수프와 바꾸어 먹자고 항상 애걸했던 일이 있다고 했다. 딱딱하게 굳은 빵 조각보다는 차가워도 수프가 먹기에도 좋고 배도 부르게 하기 때문에 휘셔도 수프를 원했으나,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자기의 수프를 그에게 주고, 자기는 늘 그의 작은 빵 조각을 받아먹었다고 했다.
드디어 미군이 진주에 들어와서, 휘셔는 집단 수용소에서 해방이 되어 미군의 병원에서 건강진단을 받게 되었다. 진단 중에 휘셔는 자기가 수프와 빵 조각을 바꾸어 먹은 이야기를 의사에게 했다. 그러자 의사가 정색을 하고 그에게 말을 했다.
"당신은 그 사랑을 베푼 일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당신이 오늘날 이렇게 살아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당신이 수프를 먹지 않고, 그 빵 조각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사 결과 그 수프에는 영양분이라고는 거의 포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빵 조각을 먹었기에 지금까지 살 수 있는 영양을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양보를 하거나 나누어주면 조그마한 나눔이 결국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된다.
하느님을 만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5,16-18)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차고 넘칠 때는 물론 부족함을 느끼는 가운데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잘되면 자기가 잘했기 때문이고, 잘못되면 탓을 다른 사람이나 하느님께 돌리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서운함이 앞섭니다. 그 처지가 어떠하든 감사하면 또 감사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또 은혜를 입고도 전혀 아닌 양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아니, 더 받아야 하는 데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에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 탄 사람들로 낙인 찍혀 멀리 동네 밖에 쫓겨나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부르며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루카17,13).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고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했더니 병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 졌는데 한 사람만이, 그것도 유다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건강해진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건강을 되찾았고 성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은총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베푸시는 분에게까지 이른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 누려야 할 혜택을 누린 것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보다 자기의 노력으로 이루어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먼저 사제를 찾아가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 받는 일에 급급하게 행동한 모습입니다. 당시상황은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사제가 확인해 주어야 외부와 차단된 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혜택은 이방인, 죄인에게도 열려 있고, 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은총과 그 사람 자신의 믿음과 협력이 중요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스라엘의 자녀들 가운데 들지 않는 이방인이었고 자기가 하느님께 어떤 것을 내세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간구했고 결국 얻었으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몸의 치유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아홉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은 그야말로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하여 큰 은총을 입었음에도 하느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에 머물렀습니다. 몸의 치유를 통하여 은혜주시는 분을 만났어야 하는데 은총의 열매에 매어있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러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수 있는 분, 능력의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몸이 깨끗해진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깨끗해진 몸으로 하느님께 돌아온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습니다. 몸은 아무리 깨끗해도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가 썩는 것이 몸입니다. 사람의 몸의 가치는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데 있습니다”(이현주). 받은 은혜를 돌판에 새길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방패, 내 마음 그분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았으니 내 마음 기뻐 뛰놀며 나의 노래로 그분을 찬송하리라.”(시편28,7). 사랑합니다.
구원의 시험(試驗)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구원은 시험이자 선물입니다. 단번의 시험이나 구원이 아니라, 최종시험의 죽음의 날까지는 매일매일이 시험의 날이자 구원의 날입니다. 수능고사야 날자라도 정해져 있지만 위령성월에 주로 묵상하는 죽음의 날은 아무도 모르기에 하루하루가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 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죽음의 시험은 벼락치기 공부가 불가능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어제의 구원의 시험 결과에 연연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 구원의 시험을 통해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시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의 시험 결과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구원의 시험 점수 높아도 오늘의 점수가 나쁘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자각이 우리를 분발하여 깨어 일어나 오늘 여기를 살게 합니다. 다시 '일상의 늪'에 빠져드는 나를 추슬러 다시 나와의 영적전쟁에 임하게 합니다. 모두에게 열린 구원의 문이요, 노력하면 누구나 구원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바오로의 입을 빌려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바로 세례를 통해 구원 받은 우리의 내적현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잘 나서 구원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유일한 기도는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뿐입니다. 이래야 매일매일 구원체험을 통해서 세례은총을 깊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성령을 풍부하게 부어 주셨고, 또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부어 주십니다. 하여 모두가 구원의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닙니다.
"예수님, 스승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이 기도가 복음을 요약합니다. 이 기도가 우리를 내적으로 가난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이 기도만 제대로 하면 구원의 1차 시험 관문은 너끈히 통과합니다. 그러나 1차 시험이 끝이 아니며. 2차 시험에 합격해야 온전한 구원입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내 노력 또한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10명 모두가 1차 시험에 합격하여 나병의 치유는 받았지만, 2차 최종 합격자는 1명으로 합격률 10%입니다. 바로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하나뿐입니다. 자비를 청하는 기도에 이어 찬양과 감사의 기도와 삶이 뒤따라야 영육의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하여 평생, 매일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미사와 성무일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의 최종 2차 합격을 통보하십니다. 새삼 찬양과 감사로 표현되는 믿음이며, 찬양과 감사의 삶과 기도를 통해 깊어지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저절로 나오는 우리의 고백이 다음 화답송 시편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머니와 함께 ‘선산’엘 다녀왔습니다. 선산에는 지난 70년 동안 고향을 지키고 계신 형님이 계십니다. 고향에서 농사를 하시면서, 조상들께서 잠들어 계신 곳을 지키고 계십니다. 어쩌다 선산을 찾아가면 형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형수님께서는 정성껏 음식을 마련해 주십니다. 큰 바위 얼굴처럼 언제나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형님께 늘 죄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저는 52년 전에 선산 아래 고향 집에서 태어났고, 어려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 뒤로 6번 정도 고향 집을 찾아갔습니다. 중학생 때 부모님과 함께 갔었고, 고등학생 때는 혼자서 갔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는 교우촌인 고향 선산에 가서 첫 미사를 하였습니다. 그 뒤로 부모님을 모시고 2번 갔었고,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에 어머님과 함께 어제 다녀왔습니다. 무엇이 바쁜지, 어머님께서 늘 가고 싶어 하시는 선산엘 몇 년에 한번 꼴로 가곤 합니다. 앞으로는 1년에 한번은 어머님을 모시고 다녀 오려합니다.
오늘 길에 ‘천호성지’엘 들렸습니다. 성지를 관리하시는 신부님께서 고향 친척이시기 때문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일가라는 이유로 잠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성지 안내도 직접 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문뜩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맺은 혈연으로 이렇게 좋은 환대를 받았으니, 언젠가 하느님의 품으로 가면 신앙인이었다는 이유로, 사제직을 수행했다는 이유를 참 많은 환대를 받을 것 같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시는 큰 집 형님처럼, 일가라는 이유로 따뜻하게 성지 안내를 해 주셨던 신부님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나 이제 돌아갈래!’ 언젠가 보았던 영화에서 주인공이 했던 대사입니다. 세상의 명예, 권력, 재물에서 벗어나 겸손, 감사, 사랑으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넉넉하게 품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이 치유된 환자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다시 주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께 돌아온 나병이 치유된 사람은 이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곧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올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하기보다는 꼭 해야 할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를 청할 일이 있다면 그렇게 해 보십시오. 저처럼 고향엘 가려 했다면 한번 가보십시오. 나눌 것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보십시오.
성지에 계신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교우분이 성지 순례를 왔습니다. 그 교우분은 여행을 하면서 많은 성물을 모았다고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그 성물을 봉헌 해 주시면 성지 안에 성물 박물관을 만들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교우분은 평생 마련했던 성물을 기꺼이 봉헌해 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시장님과 상의를 하였고, 시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성물 박물관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강생, 환희, 수난, 부활, 미사의 테마로 구성된 성물 박물관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이것은 바로 나눔에서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차별 없이 품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치유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께서는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구원의 순례’를 하시면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의 경계 지역을 지나가셨다(17,11). 예수께서는 단지 사마리아인의 냉대를 피하시려고 그 길을 택하신 것일까? 예수께서 신변을 걱정하여 안전한 길을 원하셨다면 갈릴래아를 통과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두 지역의 경계를 지나가셨다. 이런 길 선택은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갈릴래아의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취급받아 적대감을 가졌던 사마리아인들 모두를 받아들이시어 치유하시려는 몸짓이었으리라!
이 길목에서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었음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사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다른 민족들에게로 뻗어가는 교두보였다. 이렇게 그분이 향하는 예루살렘 상경 길은 죽음을 통해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 살리기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고, ‘생명의 말씀’을 목숨을 다해 온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심오한 구원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의 일상의 발걸음과 몸짓은 어떤가? 나를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생각이 같은 사람과 다른 사람,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와 힘 있는 이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를, 이념이 아닌 더 크고 더 근원적 인 하느님의 사랑으로 품고 있는가?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께 간절한 바람으로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르며 자비를 청했다(17,12-13). 인간의 구별증, 이분법적 사고의 상징인, ‘다가갈 수 없는 그 거리’를 없애버린 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을 향한 외침’이었다. 자비를 청하는 그들의 외침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한데 모여 쏟아내는 ‘사랑의 갈증’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의 토대 위에서 ‘사랑의 갈증’을 선포하였고, 그 목마름은 자비를 불러일으켜 치유 받았다.
나에게 이런 목마름이 있는가? 혹 헛것으로 갈증을 채우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17,14)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사제를 찾아 가게 한 것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고 치유 받은 이들이 율법(레위 14,2; 16,29)을 준수했음을 드러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음을 갖고 감사의 마음을 품을 ‘창조의 시간’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17,14) 이렇게 하느님께서 하시는 치유는 인간이 정해 놓은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치유 받으려는 이의 지향과 순수한 사랑의 갈망과 믿음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과 사랑과 감사를 품도록 매일 시간의 선물을 주고 계심을 명심하자!
놀랍게도 치유 받은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17,15-16) 치유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은 참으로 배은망덕한 이들이다. 우리 모두 감사의 태도야말로 사람됨의 기본이요 하느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삶의 경배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병이 낫자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눈길을 돌리면, 예수님의 치유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민족적, 종교적인 적대감과 증오심이 더불어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생면부지의 가난한 사람, 배척받고 고통 받고 소외받는 사람,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돕고, 타종교인들, 다른 생각과 이념을 지닌 이들의 말을 경청하고, 모든 관계 속에서 조건 없이 자신을 내놓도록 하자! 이것이 바로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경계를 지나시며 사마리아인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치유의 비결이요,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는 죽음을 거쳐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생명의 순례’가 아니겠는가!
유일하게 나를 받아주신 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도 삶 자체가 고달프고 힘겨운 나병환자들인데, 변변한 치료제도 없던 예수님 시대 당시는 얼마나 더 괴로웠겠습니까? 당시 그들이 겪었던 가장 큰 고통은 아무래도 ‘추방으로 인한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일단 세상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었습니다. 당시 나병환자들은 마을에 들어오는 것까지는 허용되었지만 성벽 안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특히 유다인이면 정기적으로 순례를 해야 할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 성은 절대 출입금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환자들은 건강한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도 엄격히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입장 바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그들이 괴로웠겠는지? 자기 잘못으로 걸린 병도 아닌데, 무조건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만남조차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도 벌레 씹은 듯합니다.
병세는 하루하루 점점 깊어만 갑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멀찍이 도망가기 바쁩니다. 점점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어 가고 자기 안에 갇히게 됩니다. 스스로 너무 무가치해보이기에 스스로를 거부해서 자존감은 완전 바닥입니다.
이렇게 당시 나병환자들은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병환자들의 고초를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들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시어 죽음과도 같은 나병을 말끔히 치유시키십니다.
공동체는 나를 따돌렸고 세상 사람들은 다들 멀찌감치 피해 도망갔는데, 다들 더럽다고 돌을 던지며 무시했는데, 유일하게 한 사람 예수님께서 두 팔을 크게 벌리시고 나를 받아주십니다. 내 참혹한 상처를 어루만져주시고, 내 허물어진 마음을 달래주십니다. 예수님의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치유의 에너지로 인해 나병환자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죽음의 기운이 물러가게 됩니다.
그런데 나병의 치유 이후 한 가지 중요한 과정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단 한명의 이방인만 제외하고 9명의 유다인들은 그 과정을 생략함으로 인해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중요한 과정은 바로 감사였습니다. 불행하게도 9명의 유다인들은 그 큰 은혜를 입고도 아무런 감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물을 당연히 받아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죄인, 이교도 등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그러나 구원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몇 가지 의지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아 하느님이라는 확고한 믿음, 그분이 보내시는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자발적인 응답, 그리고 깊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신부님들은 무자식 상팔자래요.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하더군요. 저는 어떤 할머니의 약값을 지원했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이 의사라네요.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들에게 당하는 부모님들의 슬픔사연 종종 듣습니다.
부모님이 고생하며 키운 자녀들이 유산까지 탐낼 때 부모는 어찌 합니까. 신부님은 무자식 상팔자라며 행복한 줄 알고 한 턱 내라니 그래야지요. 자식들이 부모님께 부모님들도 자식들에게 고마운 마음 늘 지녀야 하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 17,15~16)”
온유함의 비결
전삼용 요셉 신부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 중에 ‘집 지은 사람의 잘못일까?’라는 것이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어렸을 때, 그의 집에는 매우 좋은 도자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 도자기들을 아끼며 소중히 여겼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그 도자기들 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을 달라고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을 선뜻 딸에게 내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또다시 아버지에게 그 도자기를 달라고 강력히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눈물까지 주루 주룩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쯤 되자 아버지는 딸을 향해, “그래,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니 그것을 가지렴”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동생은 그 도자기를 손에 꼭 움켜쥐었습니다. 오빠에게 보여주고 자랑도 하며 또 약을 올려주려고 오빠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빠 방을 향해서 뛰던 여동생은 그만 문턱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손에 들고 있던 그 도자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습니다. 여동생은 깨져 조각난 도자기를 바라보면서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을 지은 사람이 누구예요? 누가 우리 집을 이렇게 지어서 저를 넘어지게 했단 말이에요?”
제 잘못, 제 실수는 탓하지 않고, 그렇게 좋은 집을 지은 건축자를 탓하고 원망하는 이 여동생을 기억하며 후일 톨스토이는 ‘집 지은 사람의 잘못일까?’라는 글을 썼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오늘 독서인 티토에게 쓴 편지에서 신자들을 상기시켜 통치자들에게 순종하고 남을 중상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들’이 되도록 교육하라고 합니다. 온유하지 않은 사람은 화를 잘 내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온유해지기 위해 두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도 한때 어리석고 순종할 줄 몰랐고 그릇된 길에 빠졌으며, 갖가지 욕망과 쾌락의 노예가 되었고, 악과 질투 속에 살았으며, 고약하게 굴고 서로 미워하였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모두 죄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죄를 서로의 탓이라고 미룬 것처럼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나는 선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하신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합당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될 수 있었음을 잊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단 한 명도 구원될 수 없었고 나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 같이 지옥에 가야 할 처지인데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 그리스철학의 대가 탈레스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는 “자신을 아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또 “가장 쉬운 일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남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함의 비결은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 모두는 지옥에 갈 처지여서 누구도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구원이 오로지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내 공로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닌데 무엇을 잘 했다고 남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고 구원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열 사람이깨끗해 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머리로만 하는 치유가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치유가 진짜 치유입니다.
고유한 우리자신을 필요로 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근본적인 치유는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서는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건강해져야 할 믿음은 주님과 함께 하기에 결코 삶을 가리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은 흔들리는 우리의 살에 중심을 잡아주며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치유는 새로워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치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치유와 믿음은 결국 하나의 몸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