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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의 作意
M2(모든 번뇌 경)의 앞부분에 作意라는 표현이 총 71번 나타납니다.
처음 나타나는 표현은 여러 경문에서도 정형적으로 나타나듯이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모든 번뇌를 단속하는 법문<*그 진행되는 방법, 과정>을 설하리니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sabbāsavasaṃvarapariyāyaṃ vo, bhikkhave, desessāmi.
taṃ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 설하는 것을(taṃ) 들어라, (설하는 것으로 taṃ) 잘 주의를 기울여라, 나는 말할 것이다.]
[jānato ahaṃ, bhikkhave, passato āsavānaṃ khayaṃ vadāmi, no ajānato no apassato.]라는
말씀을 하시고
[kiñca, bhikkhave, jānato kiñca passato āsavānaṃ khayaṃ vadāmi?
yoniso ca manasikāraṃ ayoniso ca manasikāraṃ.]
如理作意와 비如理作意를 알고 보는 자는 번뇌가 소멸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ayonis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yoniso ca kh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na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hīyan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증가한다.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없어진다.]
如理作意와 비如理作意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비如理作意하는 자에게는 번뇌가 생겨나지만
알고 보아서 如理作意하는 자에게는 번뇌가 소멸하게 된다고 나타납니다.
번뇌를 소멸하게 하는 여러 방법 중 첫 번째로 소개된 방법이 (知)見에 의한 번뇌 단속법입니다.
'자我' 등과 연동된 상태에서, '대상(法)'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번뇌는 일어나거나 증장하고,
4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苦/集/滅/道'를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번뇌는 일어나지 않거나 사라진다고 말씀하십니다.
苦란 取된 5蘊 혹은 6入(안이비설身의)입니다.
즉 욕계 중생들의 根이고 그 중의 하나가 身입니다. 그 '대상'으로 주의를 기울인 결과는
[tassa evaṃ yoniso manasikaroto tīṇi saṃyojanāni pahīy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그가 이와 같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면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라 한다.]
즉 4념처의 身隨觀에 의해서 身과 관련된 족쇄[有身見]인 번뇌를 제거합니다.
이상이 作意하는 방법에 대한 (知)見으로써 족쇄를 없애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so aparena samayena ariyadhammaṃ suṇāti, yoniso manasi karoti, dhammānudhammaṃ paṭipajjati.
tassa ariyadhammassavanaṃ āgamma yonisomanasikāraṃ dhammānudhammappaṭipattiṃ
oḷārikā kāyasaṅkhārā paṭippassambhanti, oḷārikā vacīsaṅkhārā paṭippassambhanti,
oḷārikā cittasaṅkhārā paṭippassambhanti.
그는 그 후에 성스러운 법을 배우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고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에 따라 도를 닦습니다.
그는 성스러운 법을 배우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고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에 따라 도를 닦아, 거친 몸의 작용들을 가라앉히고,
거친 말의 작용들을 가라앉히고, 거친 마음의 작용들을 가라앉힙니다.]
[성스러운 법을 배우고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이고
[출세간] 법에 이르게 하는 법에 따라 도를 닦습니다.] 이 과정에서
붇다나 직계 제자로부터 수행방법을 배우고 그것을 잘 기억하고, 그 기억에 따라서
여리작의의 대상이 되는 (苦인) 身에 대해 主意를 기울여서 잊지 않고 지켜보게 되면
그것이 身(至)念이지 싶습니다.
그러면 身口意가 아닌 거친 身口心行(oḷārikā cittasaṅkhārā)이 가라앉는다고 합니다.
이하 경문 전반부 입니다.
mūlapaṇṇāsapāḷi 1. mūlapariyāyavaggo (MN 1) 2. sabbāsavasuttaṃ (MN 2)
모든 번뇌 경94) Sabbāsava Sutta(M2)
94) 본경에는 모두 7가지 번뇌의 대처 방법이 설명되고 있다. 이 가운데 첫 번째인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가지는 『앙굿따라 니까야』제4권「번뇌 경」(A6:58)에 나타나는 여섯 가지 번뇌의 대처 방법의 설명과 같다.
14. evaṃ me sutaṃ —
ekaṃ samayaṃ bhagavā sāvatthiyaṃ viharati jetavane anāthapiṇḍikassa ārāme.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bhikkhavo”ti.
“bhadante”ti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95)에서 제따숲96)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97)에 머무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 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95) 사왓티(Sāvatthi)는 꼬살라(Kosala) 국의 수도였다. 꼬살라는 부처님 재세시에 인도에 있었던 16개국(16국은 『앙굿따라 니까야』제1권 「팔관재계경」 (A3:70) §17을 참조할 것.) 가운데 하나였으며 16국은 차차 서로 병합되어 나중에는 마가다(Magadha)와 꼬살라 두 나라로 통일되었다. 부처님재세 시에는 빠세나디(Pasenadi) 왕이 꼬살라를 통치하였고, 그의 아들 위두다바(Viḍūḍabha)가 계승하였다. 부처님께서 말년에 24년 정도를 이곳 사왓티의 제따와나 급고독원에 머무시는 등 부처님과 아주 인연이 많았던 곳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사왓티라는 이름은 두 가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첫째는 사왓타(Savattha)라는 선인(仙人, isi)의 거처가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 한다. 마치 꾸삼바 선인의 거처가 있던 곳을 꼬삼비라 하는 것과 같다. 둘째는 이곳에 대상(隊商, sattha)들이 모여들어서 '어떤 상품이 있어요?'라고 물으면 '모든 게 다 있습니다(sabbam atthi).'라고 대답했다고 해서 sāvatthi라 했다고 한다.(SnA.i.300; UdA.55, PsA.iii.532 등) 주석서들에서 사왓티를 당시 인도의 가장 큰 6대 도시 가운데 하나라고 했을 정도로 사왓티는 번창한 곳인데 이런 사정을 보여주는 설명이라 할 수 있겠다.
96) 제따(Jetā)는 사왓티(Sk. 슈라와스띠)를 수도로 한 꼬살라의 빠세나디 왕의 왕자 이름으로 √ji(to win)에서 파생되었으며 '승리자'라는 뜻이다.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급고독) 장자가 자신의 고향인 사왓티에다 원림을 만들려고 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 수많은 수레에 황금을 가득히 가져와서 땅에 깔았고(이 일화는 인도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에 그림과 조각으로 많이 남아 있다.) 그 신심에 감격한 왕자가 공동으로 기증해서 원림(ārama)을 만들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불자들이 잘 알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이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 1억 8천만의 돈을 지불했다고 하며 제따 왕자는 이 돈을 모두 대문을 짓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MA.i.50; UdA.56)
97) 원문은 Anāthapiṇḍikassa ārāma이다. Anāthapiṇḍika는 급고독(給孤獨)으로 한역되었으며 '무의탁자에게 음식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부처님 재세 시 재가신도 가운데서 제일가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급고독 장자에 대해서는 『앙굿따라 니까야』제2권 「수닷따 경」(A4:58) §1의 주해를 참조할 것.
이 제따 숲[祇園]의 아나타디까 원림 즉 급고독원은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정사(祇園精舍)로 잘 알려진 곳이고 세존께서 말년 19년간을 여기서 보내셨다고 한다.(DhA.i.3; BuA.3; AA.i.314) 사왓티의 동쪽 원림[東園林]에 있는 미가라마따(녹자모)의 강당(『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족쇄 경」(A2:4:5) §1의 주해 참조)에 머무신 것을 합치면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만 24년 정도를 보내셨다. 세존께서 아난다 존자를 시자로 삼으신 것도 여기 계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깨달으신 후 보내신 세존의 45년간의 삶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반부 20여 년은 인도 중원을 다니면서 법의 전도에 역점을 두셨고 나머지 25년 가까운 세월은 이 아늑하고 편안한 기원정사에 머무시면서 사리뿟따 존자를 위시한 제자들과 교법을 체계화하는 데 중점을 두셨다. 물론 해제 때에는 제자들과 여러 곳으로 유행을 하셨지만 후반부 24년을 사왓티 한 곳에서만 머무셨다는 것은 분명 법체계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52개의 본 맛지마 니까야의 경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대략 69개의 경들이 이곳에서 설해진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사왓티의 급고독원은 법체계화에 중점을 둔 부처님 후반부의 삶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sabbāsavasaṃvarapariyāyaṃ vo, bhikkhave, desessāmi.
taṃ suṇātha, sādhukaṃ manasi karotha, bhāsissāmī”ti.
“evaṃ, bhante”ti kho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2. “비구들이여, 그대들에게 모든 번뇌98)를 단속99)하는 법문을 설하리니 [7]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그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98) “그곳에서 나오기(āsavanti) 때문에 '번뇌(āsavā)'라 한다. 눈으로부터 나오고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생긴다는 말이다. 혹은 법(dhamma)으로는 고뜨라부[種姓, gotrabhū, 『아비담마 길라잡이』 9장 §34 참조)의 영역에까지 흐르고, 공간으로서는 최고로 높은 존재 즉 비상비비상처까지 흐르기(savanti) 때문에 번뇌라 한다.” (MA.i.61)
번뇌로 옮긴 āsavā는 '흐르는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원래는 종기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오랫동안 발효된 술(madira) 등을 뜻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DhsA.48) 이것이 우리 마음의 해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정착된 것이며 중국에서는 번뇌(煩惱)라고 옮겼다. 이런 마음상태들을 아사와 (āsava, ā + √sru, to flow, 생기는 것, 흐르는 것)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도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악취 나는 술과 같기 때문이다.
99) '단속'은 saṃvara를 옮긴 것이다. 『청정도론』 (Vis.I.18)과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MA.i.62)는 계목을 통한 단속(pātimokkha-saṃvara), 마음챙김을 통한 단속(sati-saṃvara), 지혜를 통한 단속(ñāṇa-saṃvara), 인욕을 통한 단속(khanti-saṃvara), 정진을 통한 단속(vīriya-saṃvara)의 다섯 가지 단속을 든 뒤에 경을 인용하여 이 다섯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주석서는 계속해서 본경에서 7가지로 분류되고 있는 번뇌들 가운데서 ⑤ 피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19) 중의 적합하지 않은 자리에 앉거나 갈 곳이 아닌 곳에 다니는 것을 피하는 것을 계목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들고 있다. 그리고 ② 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12)을 마음챙김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7가지 항목에 나타나는 '지혜롭게 숙고하여'라는 구문을 지혜를 통한 단속의 보기로, ⑥ 버림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20)을 정진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④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18)을 인욕을 통한 단속의 보기로 들고 있다.
15. “jānato ahaṃ, bhikkhave, passato āsavānaṃ khayaṃ vadāmi, no ajānato no apassato.
3. “비구들이여, 나는 알고 보는 자100)의 번뇌들이 소멸한다고 말하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의 [번뇌들이 소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100) “여기서 '아는 자(jānato)'와 '보는 자(passato)'는 단어만 다를 뿐 같은 뜻이다. 아는 자란 지혜의 특징(ñāṇa-lakkhaṇa)과 관련하여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아는 특징(jānana-lakkhaṇa)을 가지기 때문이다. 보는 자란 지혜의 힘(ñāṇa-ppabhāva)과 관련하여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는 보는 힘(passana-ppabhāva)을 가지기 때문이다.
지혜를 가진(ñāṇa-samaṅgī) 사람은 마치 눈을 가진 사람처럼 눈으로는 형색을 보고 지혜(ñāṇa)로는 드러난 법들(vivaṭā dhammā)을 본다. 그는 무엇을 알고 보는 자인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āra)'이 일어나도록 아는 자(jānato)이고,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ayonisomanasikāra)'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렇게 보는 자(passato)이다. 이렇게 알고 보는 자의 번뇌는 소멸한다.” (MA.i.63)
kiñca, bhikkhave, jānato kiñca passato āsavānaṃ khayaṃ vadāmi?
yoniso ca manasikāraṃ ayoniso ca manasikāraṃ.
비구들이여,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는 자의 번뇌들이 소멸하는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과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101)이다.
101)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은 중국에서 여리작의(如理作意)로 옮긴 yoniso-manasikāra를 옮긴 것이고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은 중국에서 불여리작의(不如理作意) 등으로 옮긴 ayoniso-manasikāra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이란 [바른] 방법에 의해서 마음에 잡도리함(upāya-manasikāra)이고 길에 따라 마음(patha-manasikāra)에 잡도리함이고 [일어남에 대해서 마음에 잡도리함(uppādaka-manasikāra) SA.iii.165]이다. 이것은 무상한 [것]에 대해서 무상이라고, 괴로운 [것]에 대해서 괴로움이라고, 무아인 [것]에 대해서 무아라고, 더러운 것[不淨]에 대해서 부정이라는 이러한 방법으로 진리에 순응하여(saccānulomika) 마음이 굴러가고(āvaṭṭanā) 함께 전개되고(anvāvaṭṭanā) 관심을 가지고(ābhoga) 마음에 두고(samannāhāra)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을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이라 한다.(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은 이와 반대로 설명하고 있어서 인용하지 않음.)” (MA.i.64)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은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는 덕목이다. 그래서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에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은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은 버려진다.”(본경 M.i.7) 고도 설하셨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반연하여(paccaya) 정견(正見)이 생겨난다.”(M43/i.294)고도 하셨다. 그리고 『상윳따 니까야』제2권 「위빳시 경」등(S12:4~10)에서는 위빳시 부처님 등 칠불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통해서 12연기를 통찰지로 관통하여(paññāya abhisamaya)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눈[眼], 지혜[智], 통찰지[慧], 명지[明], 광명[光]이 생겼다고 나타나고 있다. 한편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술어를 문맥이나 역자에 따라 '근원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함'이나 '지혜로운 주의' 등으로도 옮겼다. 그리고 manasikāra가 단독으로 나타날 때는 주로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옮겼으며, 동사 manasi karoti는 대부분 '마음에 잘 새기다.’옮겼다. 그리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과 반대되는 ayoniso manasikara는 본서에서는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옮기고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지혜롭지 못한 주의[非如理作意]'나 '근원을 벗어나서 마음에 잡도리함' 등으로도 옮겼다.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에 대해서는 아래 주해를 참조할 것.
ayonis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yoniso ca kho, bhikkhave, manasikaroto
anuppannā ceva āsavā na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hīyanti.
비구들이여,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증가한다.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없어진다.”
16. “atth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saṃvarā pahātabbā,
atthi āsavā paṭisev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adhivās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parivajj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vinodanā pahātabbā,
atthi āsavā bhāvanā pahātabbā.
4. “비구들이여, ①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②단속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③ 수용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④ 감내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⑤ 피함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⑥ 버림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
⑦ 수행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이 있다.”102)
102) 이 일곱 가지는 본경의 기본 주제이다. 여기서 ① '[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은 āsavā dassanā pahātabbā를 옮긴 것이다. 같이 하여 ② '단속함'은 saṃvāra를 ③ '수용함'은 paṭisevanā를 ④ '감내함'은 adhivāsanā를 ⑤ '피함'은 parivajjanā를 ⑥ '버림'은 vinodanā를 ⑦ '수행'은 bhāvanā를 옮긴 것이다. 이 가운데 ①을 제외한 여섯 가지는 『앙굿따라 니까야』제4권 「번뇌 경」(A6:58)에도 나타나고 있다.
dassanā pahātabbāsavā (MN 2) (1)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
17. “katame ca,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5.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들인가?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지 않아서,
manasikaraṇīye dhamme nappajānāti, amanasikaraṇīye dhamme nappajānāti.
so manasikaraṇīye dhamme appajānanto amanasikaraṇīye dhamme appajānanto,
y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te dhamme manasi karoti,
ye dhammā manasikaraṇīyā te dhamme na manasi karoti.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103)
그는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지 못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음에 잡도리해야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다.”
103) “'마음에 잡도리하다(manasikaroti).'는 주의를 기울이다(āvajjati), 주의를 돌리다(몰두하다, samannāharati)라는 뜻이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다.(anamasikaroti).'는 그 반대의 뜻이다.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manasikaraṇīyā dhammā)'과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amanasikaraṇīyā dhammā)'이라고 했다. 이 법들은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것이고, 이 법들은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한 것은 사실상 법으로서는 정해진 것(niyama)이 없고, 방식(ākāra)으로서는 있다. 즉 마음에 잡도리할 때 해로운 법들이 일어날 가까운 원인(akusaluppatti-padaṭṭhāna)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에 잡도리할 때 유익한 법들이 일어날 가까운 원인(kusaluppatti-padaṭṭhāna)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MA.i.67)
복주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익한 법들에 대해서도 아름다움, 행복, 영원함 등으로 마음에 잡도리할 때 달콤함(assādana)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비난받아 마땅하고(sāvajja) 손해와 괴로움을 가져오며(ahita-dukkh-āvaha), 해로운 법들에 대해서도 무상함 등으로 마음에 잡도리할 때 염오(nibbidā)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비난받을 일이 없고 이익과 행복을 가져온다(hita-sukh-āvaha), 그렇기 때문에 법으로서는 정해진 것이 없고, 방식으로서는 있는 것이다.” (MAȚ.i.69)
“katame ca, bhikkhav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manasi karoti?
6.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지만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인가?
yassa, bhikkhave, dhamme manasikaroto
anuppanno vā kāmāsavo uppajjati, uppanno vā kāmāsavo pavaḍḍhati;
anuppanno vā bhavāsavo uppajjati, uppanno vā bhavāsavo pavaḍḍhati;
anuppanno vā avijjāsavo uppajjati, uppanno vā avijjāsavo pavaḍḍhati —
im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manasi karoti.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104)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면,
그 법들은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지만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이다.105)
104)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 kāmāsava]'란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가진 탐욕(rāga)을 말한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 bhav-āsava]'란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갈망(chanda-rāga)과, 상견과 단견의 사견과 함께한, 禪에 대한 열망(jhāna-nikanti)이다. 그러므로 사견에 기인한 번뇌도 이 존재에 기인한 번뇌에 포함된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 avijjāsava]'란 사성제에 대한 무지(aññāṇa)이다.
다섯 가닥의 얽어매는 감각적 욕망을 맛보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일어나고, 일어난 것은 증가한다. 고귀한 법들(mahaggata-dhammā)을 맛보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일어나고, 일어난 것은 증가한다. 삼계의 법들에 대해 네 가지 전도됨[四顚倒, catu-vipāllasa]의 가까운 원인이 될 상태로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일어나고, 일어난 것은 증가한다.”(MA.i.67)
여기서 고귀한 법들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법들을 말하고, 네 가지 전도됨이란 무상한 것을 항상한 것이라고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무아를 자아라고 부정한 것을 깨끗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 즉 무상 · 고 · 무아 · 부정인 것을 상 · 락 · 아 · 정(常·樂·我·淨)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105) 여기서 보듯이 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욕망(kāma), 존재(bhava), 무명(avijjā)의 세 가지 번뇌만 나타나지만(「합송경」(D33 §1.10 (20)), 「띠깐나 경」 (A3:58), 「번뇌 경」 (S38:8) 등등) 『무애해도』 등의 『쿳다까 니까야』(소부)와 아비담마에서는 사견(diṭṭhi)의 번뇌가 첨가되어 네 가지로 나타난다. (Dhs.195 {1096}) 그래서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7장 §3)에서도 네 가지로 나타난다. 이 네 가지는 4가지 폭류(ogha)와 4가지 속박(yoga)으로도 나타나는데 그래서 『논장』에서는 이 네 가지를 다 번뇌라고도 분류하는 듯하다.
“katame ca, bhikkhave, dhammā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na manasi karoti?
무엇이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지만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인가?
yassa, bhikkhave, dhamme manasikaroto
anuppanno vā kām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kāmāsavo pahīyati;
anuppanno vā bhav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bhavāsavo pahīyati;
anuppanno vā avijj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avijjāsavo pahīyati —
ime dhammā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na manasi karoti.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면,
그 법들은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지 않지만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이다.
“tassa amanasikaraṇīyānaṃ dhammānaṃ manasikārā
manasikaraṇīyānaṃ dhammānaṃ amanasikārā
anuppannā ceva āsavā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vaḍḍhanti.
그가 [8]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이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증가한다.”
18. “so evaṃ ayoniso manasi karoti —
7. “그는 다음과 같이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한다.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na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athaṃ nu kho ahosiṃ atī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ahosiṃ nu kho ahaṃ atītamaddhāna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ṃ? na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athaṃ nu kho bhavissāmi anāgatamaddhānaṃ?
kiṃ hutvā kiṃ bhavissāmi nu kho ahaṃ anāgatamaddhānan’ti?
etarahi vā paccuppannamaddhānaṃ ajjhattaṃ kathaṃkathī hoti —
‘ahaṃ nu khosmi? no nu khosmi? kiṃ nu khosmi? kathaṃ nu khosmi?
ayaṃ nu kho satto kuto āgato? so kuhiṃ gāmī bhavissatī’ti?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106) 아니면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을까?107)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에 어떠했을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는 미래에 존재할까? 아니면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에 어떻게 될까?
나는 미래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할까?
지금 현재에 대해서도 안으로 의심한다.
나는 존재하기는 하는가? 나는 존재하지 않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떠한가? 이 중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라고”
106) 여기 §7에 나타나는 16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러한 의심(kathaṃ-kathī)은 본서 제2권 「갈애 멸진의 긴 경」 (M38) §23에도 문답식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상윳따 니까야』제2권 「조건 경」 (S12:20) §6에도 나타나고 있다.
『청정도론』 XIX.5~6은 이를 과거에 대한 5가지와 미래에 대한 5가지와 현재에 대한 6가지로 설명하여 모두 16가지 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것의 극복은 『청정도론』 XIX.21~27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러한 16가지 의심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을 위빳사나의 7청정 가운데 4번째인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kankhā-vitaraṇa-visuddhi,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9장 §31과 『청정도론』 XIX.1 이하 참조)이라 부른다. 『청정도론』의 설명과 「조건 경」 (S12:20) §6에서 보듯이 연기 혹은 조건발생을 정확하게 알아야 삼세의 모든 의심이 극복되며 이것은 도와 과의 증득에도 필수적인 항목이다.
107) “'나는 과거에 존재했을까? 아니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까(atītamaddhānaṃ ahosiṃ nu kho nanu kho)?'라는 것은 상견(sassata)의 측면과 우연발생론(adhicca-samuppatti)의 측면에서 과거에 자신이 존재했던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kaṅkhati). 그 이유를 물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미친 사람마냥 어리석은 범부는 아무거나 마음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이다.
'무엇이었을까(kiṃ nu kho ahosiṃ)?'라는 것은 계급(태생), 성별, 재생(jāti-liṅg-upapatti)과 관련하여 캇띠야(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 재가자, 출가자, 신, 인간 중에 무엇이었는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어떠했을까(kathaṃ nu kho)?'라는 것은 모습(saṇṭhānākāra)과 관련하여 긴 것, 짧은 것, 흰색, 검은색 중에 어떠했을 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했을까(kiṃ hutvā kiṃ ahosiṃ)?'라는 것은 계급 등과 관련하여 캇띠야였다가 바라문이었을까, 신이었다가 인간이었을까 라고 계속적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미래에 존재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까(anāgatamaddhānaṃ bhavissāmi nu kho nanu kho)?'라는 것도 상견의 측면과 우연발생론의 측면에서 미래에 자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같은 방법을 적용하면 된다.” (MA.1.68~69)
19. “tassa evaṃ ayoniso manasikaroto channaṃ diṭṭhīnaṃ aññatarā diṭṭhi uppajjati.
8. “이와 같이 지혜 없이 마음에 잡도리할 때
그에게 여섯 가지 견해들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긴다.
‘atthi me attā’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① '나에게 자아가 있다.'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natthi me attā’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② '나에게 자아란 없다.'108)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108) 주석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자아가 있다(atthi me atta)'는 것은 상견(sassatadiṭṭhi)이라는 사견이 자아를 거머쥐는 것(attano atthitaṃ gaṇhāti)이고, '자아가 없다.(natthi me atta)'는 것은 단견(ucchedadiṭṭhi)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무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유물론자들의 주장을 거머쥐는 것(vibhava-ggahaṇa)을 말한다.”(MA.i.70)
‘attanāva attānaṃ sañjānāmī’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③ '나는 자아로써 자아를 인식한다.'109)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109) “'나는 자아로써 자아를 인식한다(attanā va attānaṃ sañjānāmi)'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想蘊, saññā-kkhandha]를 선두에 두고, 그 인식의 무더기로 다른 무더기들에 대해 자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 나머지 무더기들을 인식하면서 나는 이 자아로써 이 자아를 인식한다는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MA.i.70)
‘attanāva anattānaṃ sañjānāmī’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④ '나는 자아로써 무아를 인식한다.'110)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110) “'나는 자아로써 무아를 인식한다(attanā va anattānaṃ sañjānāmi).'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는 자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무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써 인식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MA.i.70)
‘anattanāva attānaṃ sañjānāmī’ti vā assa saccato thetato diṭṭhi uppajjati;
⑤ '나는 무아로써 자아를 인식한다.'111)라는 견해가 그에게 진실로 확고하게 생긴다.
111) “'나는 무아로써 자아를 인식한다(anattanā va attānaṃ sañjānāmi).'는 것은 인식의 무더기는 무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무더기들은 자아라고 거머쥐고는 인식으로 그들을 인식하면서 이러한 견해가 일어난다. (MA.i.70)
atha vā panassa evaṃ diṭṭhi hoti —
‘yo me ayaṃ attā vado vedeyyo tatra tatra kalyāṇapāpakānaṃ kammānaṃ vipākaṃ paṭisaṃvedeti
so kho pana me ayaṃ attā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ī’ti.
⑥ 혹은 그에게 이런 견해가 생긴다.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며, 여기저기서112)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경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113)라고,
112) “'여기저기서(tatra tatra)'라는 것은 각각의 모태(yoni), 태어날 곳(gati), 머묾(ṭhiti), 거처(nivāsa) 부류(nikāya)나 혹은 각각의 대상(ārammaṇa)을 말한다.” (MA.i.71)
113) “'항상하다(nicca).'는 것은 일어남과 멸함이 없다는 것이고, '견고하다.(dhuva).'는 것은 정수(sāra-bhūta)를 나타내고, '영원하다(sassata),'는 것은 어느 때에나 항상 있다는 것이고, '변하지 않는 법(avipariṇāma-dhamma)'이란 자아의 본성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이고, '영원히 지속된다(sassatisama).'는 것은 달, 태양, 바다, 땅, 산은 세상의 용어로는 영원한 것(sassati)이라고 불리는데, 그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들이 머무는 한 이 자아도 머문다고 이와 같이 견해가 일어난다. (MA.i.71)
이 견해는 본서 제2권 「갈애 멸진의 긴 경」(M38) §2에 나타나는 사띠라는 비구(Sāti nāma bhikkkhu)가 가진 삿된 견해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idaṃ vuccati, bhikkhave, diṭṭhigataṃ diṭṭhigahanaṃ diṭṭhikantāraṃ diṭṭhivisūkaṃ
diṭṭhivipphanditaṃ diṭṭhisaṃyojan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견해에 빠짐, 견해의 밀림, 견해의 황무지, 견해의 뒤틀림,
견해의 요동, 견해의 족쇄114)라 한다.
114) '견해에 빠짐, 견해의 밀림, 견해의 황무지, 견해의 뒤틀림, 견해의 요동, 견해의 족쇄'는 각각 diṭṭhi-gata, diṭṭhi-gahana, diṭṭhi-kantāra, diṭṭhi-visūka, diṭṭhi-vipphandita, diṭṭhi-saṃyojana를 옮긴 것이다.
diṭṭhisaṃyojanasaṃyutto,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비구들이여, 견해의 족쇄에 계박되어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20.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
ariyānaṃ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ṃ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
manasikaraṇīye dhamme pajānāti amanasikaraṇīye dhamme pajānāti.
so manasikaraṇīye dhamme pajānanto amanasikaraṇīye dhamme pajānanto
y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te dhamme na manasi karoti,
ye dhammā manasikaraṇīyā te dhamme manasi karoti.
9.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성자들을 친견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고,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능숙하고 바른 사람들의 법에 인도되어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안다.
그는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꿰뚫어 알아서,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9]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한다.”
“katame ca, bhikkhav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na manasi karoti?
10.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지 않는 법으로서,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인가?
yassa, bhikkhave, dhamme manasikaroto
anuppanno vā kāmāsavo uppajjati, uppanno vā kāmāsavo pavaḍḍhati;
anuppanno vā bhavāsavo uppajjati, uppanno vā bhavāsavo pavaḍḍhati;
anuppanno vā avijjāsavo uppajjati, uppanno vā avijjāsavo pavaḍḍhati —
ime dhammā na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na manasi karoti.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가 일어나고
이미 일어난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증가하면,
그 법들은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지 않는 법으로서,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이다.
“katame ca, bhikkhave, dhammā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manasi karoti?
yassa, bhikkhave, dhamme manasikaroto
anuppanno vā kām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kāmāsavo pahīyati;
anuppanno vā bhav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bhavāsavo pahīyati;
anuppanno vā avijjāsavo na uppajjati, uppanno vā avijjāsavo pahīyati —
ime dhammā manasikaraṇīyā ye dhamme manasi karoti.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는 법으로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존재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무명에 기인한 번뇌가 없어지면,
그 법들은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는 법으로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이다.
“tassa amanasikaraṇīyānaṃ dhammānaṃ amanasikārā
manasikaraṇīyānaṃ dhammānaṃ manasikārā
anuppannā ceva āsavā na uppajjanti, uppannā ca āsavā pahīyanti.
그가 마음에 잡도리하지 말아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해야 할 법들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번뇌들은 일어나지 않고 이미 일어난 번뇌들은 없어진다.”
21. “so ‘idaṃ dukkhan’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samudayo’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nirodho’ti yoniso manasi karo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oniso manasi karoti.
11.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115)
115) “사성제를 명상주제로 가진(catu-sacca-kammaṭṭhānika) 성스러운 제자는 갈애(taṇhā)를 제외한 삼계의 무더기들을 '괴로움(dukkha)'이라고, 갈애를 '괴로움의 일어남(dukkha-samudaya)'이라고, 둘 모두 일어나지 않음을 '소멸(nirodha)'이라고, 소멸을 성취하게 하는 것(nirodha-sampāpaka)을 '도(magga)'라고 이렇게 이전에 스승의 곁에서 습득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였다. 그는 그 다음에 위빳사나의 도에 올라서서 [조건[緣, paccaya]과 더불어 정신 · 물질을 무상 등으로 명상하면서 – MAȚ] 삼계의 무더기들을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이렇게 하여 위빳사나의 지혜(vipassanā-ñāṇa)가 일어난다. – MAȚ] 예류도까지는 마음에 잡도리함이라는 주제로 위빳사나를 말한 것이다.
이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고 생기게 하는 갈애를 '이것이 일어남이다.'라고 지헤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괴로움과 일어남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소멸하고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열반이라 부르는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소멸을 성취하는 성스러운 팔정도[八支聖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ā]를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한다.” (MA.i.72)
tassa evaṃ yoniso manasikaroto tīṇi saṃyojanāni pahīyanti —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
ime vuccanti,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그가 이와 같이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하면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116)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17) 번뇌들이라 한다.”
116) '세 가지 족쇄들이 제거되나니 [불변하는] 존재 더미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와, 의심[疑]과, 계행과 의례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이다.'는 tīṇi saṃyojanāni pahiyyanti sakkāyadiṭṭhi vicikicchā sīlabbataparāmāso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세 가지 족쇄(tīṇi saṃyojanāni)'는 스무 가지 유신견과, 여덟 가지 의심 (불, 법, 승, 학습[계], 과거, 미래, 과거와 미래, 연기법의 8가지를 의심하는 것 – Dhs.183)과, 계를 통해 청정해지고 의례의식을 통해 청정해진다고 집착하는 계금취견이다. 네 가지 번뇌 중에서 유신견과 계금취견은 사견의 번뇌(diṭṭhāsava)에 속하기 때문에 번뇌이면서 족쇄다. 그러나 의심은 오직 족쇄이지 번뇌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것을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āsavā dassanā pahātabbā)'라 했는가? 봄으로써 없애야 할 번뇌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MA.i.73~74)
여기에 대해서 복주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해서 설명한다.
“마치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a]가 그 역할이 통찰지와 비슷하기 때문에 통찰지의 무더기[慧, paññā-kkhandha]에 포함되듯이, 의심도 그 역할이 비슷하기 때문에 번뇌에 포함(āsava-saṅgaha)되었다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네 가지 번뇌'란 아비담마의 방식에 따른 것이지, 경의 방식에 따른 것이 아니다. 경에서는 결코 네 가지 번뇌를 설한 적이 없다.”(MAȚ.i.63)
복주서의 설명처럼 4부 니까야에서는 감각적 욕망(kāma), 존재(bhava), 무명(avijjā)의 세 가지 번뇌만 나타나지만(D2 §98 등 참조) 『무애해도』 등의 『쿳다까 니까야』와 아비담마에서는 사견(diṭṭhi)의 번뇌가 첨가되어 네 가지로 나타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제7장 §3을 참조할 것.)
그리고 '족쇄(saṃyojana)' 혹은 열 가지 족쇄에 대해서는 본서 「뿌리에 대한 법문 경」 (M1) §99의 주해를 참조할 것.
117) “'봄[見]으로써 없애야 할(dassanā pahātabbā)'에서 봄[見, dassana]이라는 것은 예류도(sotāpatti-magga)를 말한다. 그 예류도로써 없앤다는 말이다. 어떻게 예류도를 봄[見]이라 하는가? 처음으로 열반을 보기(nibbāna-dassana) 때문이다. 고뜨라부[種性, gotrabhū]가 그보다 먼저 열반을 보지 않는가? 물론 본다. 보지만 해야 할 일(kattabba-kicca)을 하지 않는다. 족쇄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봄[見]이라고 할 수 없다.”(MA.i.74)
고뜨라부(종성)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제9장 §34의 [해설]과 『청정도론』 XXII.5 이하를 참조할 것. 고뜨라부(종성, gotrabhū)는 『앙굿따라 니까야』제5권 「공양받아 마땅함 경」 (A9:10)과 제6권 「공양받아 마땅함 경」(A10:16)에 나타나는데 이 둘은 아비담마에서 설하는 고뜨라부에 대한 경전적인 근거가 되는 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