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에서 첫번째 인클로저 운동은 16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초에 벌어진다. 모직물의 수요가 늘면서 양털 가격이 오르고, 이에따라 경작자들은 곡물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양모를 생산하기 위해 경작지를 목장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이와함께 이전에는 공동으로 이용되던 목초지에 울타리나 담을 쳐서 사유지임을 분명히 하였는데 이를 인클로저(Inclousure; 울타리를 두름)운동이라고 한다. 18세기 중반 이후 19세기 초까지는 산업혁명과 더불어서 인구 폭증하면서 곡물 수요가 늘어난다. 동시에 곡물 가격이 오르면서 인근 목장의 양이 경작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설치하는 새로운 형태의 2차 인클로저운동이 전개된다. 두 차례의 인클로저 운동 과정에서 상당수의 소작농이 토지를 잃고 도시로 유입되면서 대규모 실업자군을 형성하여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2차 산업이 발달해가면서 저임의 노동자로 신분이 전환된다.
런던을 출발하여 북부의 스코틀랜드로 이동하면서 인클로저 운동의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수백년전의 경제의 틀이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잉글랜드 지방은 낮은 구릉지가 끝없이 연속되는 지형으로 차창으로 멀리까지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도심을 벗어나면 어디서나 끝없이 펼쳐진 Inclosure의 자취를 볼 수 있었고 그곳에선 지금도 양과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잉글랜드지방에서는 나무를 심어 구분하는 울타리가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넘어선 스코틀랜드 지방에서는 얇은 판석을 쌓아 놓은 것으로 모습을 달리한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러했듯이 A.D 122년, 로마군이 더 이상 북진하기 힘든 곳에 쌓았던 방어선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의 원산-평양선을 잇는 곳에 위치한다.
나무와 돌의 차이는 남부와 달리 북부 지역이 산악지형이라 나무보다 돌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제주도에서 현무암을 쌓아 울타리를 친 것과 같은 이유다. 이 차이는 에든버러를 비롯한 스코틀랜드 도시들의 건물들에서도 나타난다. 같은 석조건물이더라도 남부의 매끈한 외관과 달리 거친 석면이 밖으로 드러난 것들이 많다. 어디서나 건물은 비용이 덜 들고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자재로 지어지기 마련이다. 이곳에서는 건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석재가 매끄럽게 가공하기 어려울만큼 단단한 모양이다. 스코틀랜드의 유적들이 잉글랜드보다 거칠어 보이는 이유의 한가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부 유럽의 아름다운 석조 건물은 그들의 미적 감각과 더불어 가공하기 쉬운 돌의 산지가 주변에 널려 있어서 가능하였다. 광화문 앞 해태상이 두리뭉실한 형태인 것은 조상들의 예술 감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단단한 돌을 조각하면서 망치에 힘을 가하는 순간 조각끌칼 끝에서 뭉터기로 돌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정교하게 돌을 쪼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은 단단한 화강암이 분포되어 있다. 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