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이씨대종회 한양도성길 • 청와대 역사탐방 보고]
- 일시: 2024. 12. 14(토) 10:30 ~ 17:30
- 모임: 흥인지문공원
- 코스: 한양도성길 ~ 청와대 [흥인지문공원 - 낙산공원 - 혜화문 - 성북동칼만두국 - (중식) - 와룡공원 - 말바위전망대 - 삼청공원 - 청와대(춘추문) - (석식) - [사온동: 서울경찰청사(집의공 한양본가)] - 해산
- 참석: 이재광 대종회장 외 [1-2. 이재광 • 강영선 대종회장 내외, 3. 이영수 집의부회장, 4. 이승림부사고문, 5. 이상훈 부사회장, 6. 이중석 벽동회장, 7. 이종민 병판회장, 8-9. 이종대 • 유암순 판결사이사 내외, 10. 이종렬 문안이사; 11. 이근수 고문(서종회장), 12. 이창영 부회장, 13. 이상두 부회장, 14. 이정훈 감사, 15. 이노수 서종이사, 16. 이민석 서종이사, 17. 이봉환 서종감사, 18. 이성권 서종이사, 19. 이일현 서종부회장, 20. 이종규 서종이사, 21. 이종채 종친, 22. 이세환 서종총무]
# 고맙습니다, 정읍종친회 종민회장님과 종대 판결사이사님, 종렬 문안이사님~ 융숭한 점심식사 협찬해주시어서
# 고맙습니다, 영수 집의공파 부회장님~ 저녁 식사 협찬해주시어서
# 고맙습니다, 상훈 부사공파 회장님~ 고부이씨대종회 한양도성길•청와대 역사탐방 행사 후 다과간담회 협찬해주시어
이 모두 우리 고부이씨 조상님들의 음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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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보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고부이씨 족보는 1710년(경인, 숙종36)에 소심재 극(자)수(자) 선조께서 제종의 가승을 채록하고, 연인멸족의 세보를 찾아 수집하여 보첩일팩을 필사성보를 남기셨습니다.
이로부터 한 갑자 지난 1781년(신축, 정조5)에 종의를 모아 부안 돌모산에 고부이씨족보소를 설치하고, 이듬해인 1782년(임인, 정조6) 음력 2월에 목판본 2권 2책으로 간행하니, 우리 고부인 뿌리의 시작인 ‘고부이씨 족보 <임인보>’입니다.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조상님들은 대를 이어 고부군 와석동에 사셨고, 15세 평양서윤공 이문수의 세 아들 ‘회•삭•망’ 삼공시대에 이르러 종가인 사서공 ‘회’의 자손은 와석동 집을 지켜 살고; 사서공 ‘삭’의 자손은 부안 남상과 석제(돌모산); 진사공 ‘망’의 자손은 정읍의 차단으로 옮겨 사셨습니다.
당시 집의공은 경성 사온동(오늘 답사한 서울경찰청사 인근)에서 여환하였는데, 단종 퇴위를 맞아 종손인 사직공(집의공 ‘백첨’의 아들, 집의19)이 한양에서 부안 하서로 낙향하여 그의 증손 ‘운령’(집의22)이 1570년경 줄포 목리 서당동으로 이거하여 세거하고; 종가의 차손인 첨정공 ‘우맹’(부사19)이 와석동 고향에 들어와 살았으며, 그의 증손인 부사공 ‘세택’(부사23)에 이르러서 제주 삼도리에 입도하고, 와석동에는 그의 사위인 한씨가 제주 남원에서 와 세거하였습니다.
‘삭’의 자손들은 장자 처사공 ‘처겸‘(처사18)이 남상 집을 지켜살고; 차남인 진사공 ‘화’(처사18)의 아들 군수공 ’원량‘(군수19)이 정읍 초산에 입향하였으며; 사서공 ’원소‘(석호17)의 후손은 돌모산 집을 지켜살고; 그의 차남 벽동공 ‘정’(벽동18)이 김제 이평에 입향하고; 설서공 ’거겸‘(성서17)은 정읍 흑암리에 입향하고; 전적공 ’형소‘(전적17)는 전주에 입향했습니다.
진사공 ’망’(진사16))의 자손은 차단리에 적거하고; 병조판서공 ‘초’(병판16)의 자손은 입암 안양리에 적거하고, 그의 차손인 장례원 판결사공 ‘아’(판결사18)는 음성에 입향하였으며; 해남현감공 ‘국’(해남16)의 자손은 해남 계곡에 입향하고; 여판삼사공 ‘서’(문안16)의 자손은 정읍 흑암에 적거해오다 20세 ‘종근’의 장남 문안공 ‘희맹’(문안21)은 흑암 집을 지켜 살고; 차남인 진원현감공 ‘희삼’(진원21)이 함평 손불에 입향하였으며; 중록대부공 ‘효번‘(서울부사16)의 자손은 정읍 내장에 적거해 오다 19세 ’택‘(서울부사19)의 장남 ’희수‘(서울부사20)는 내장 집을 지켜살고; 차남 ’존수‘(부장20)의 아들 부장선무공 ‘정’(부장21)이 동진 봉황에 입향했고; 16세 교위사예공 ‘협‘(참의 16)의 아들 공조참의공 ’운재‘(참의17)의 자손은 예산 광시에 터를 잡아 세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