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청391-2.hwp
17장
(1) 원문
太上, 下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 信不足焉, 有不信焉. 悠兮, 其貴言. 功成事遂, 百姓皆謂我自然.
태상, 하지유지. 기차, 친이예지. 기차, 외지. 기차, 모지. 신부족언, 유불신언. 유혜, 기귀언. 공성사수, 백성개위아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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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譽) : 기리다. 칭찬하다. 명예롭다.
외(畏) : 두려워하다. 으르다. 협박하다.
모(侮) : 업신여기다. 깔보다.
유(悠) : 멀다. 아득하다. 느긋하다. 걱정하다. 생각하다.
수(遂) : 이르다. 성취하다. 완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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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
가장 훌륭한 통치자는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다만 자신을 있는지만 알게 한다. 그 보다 못한 통치자는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친근감을 느끼게 하고 자신을 칭찬하도록 한다. 그 보다 더 못한 통치자는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 보다 더더욱 못한 통치자는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업신여기게 한다. (훌륭하지 못한 통치자일수록) 백성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가 결국 믿지 못함에 이른다. (이에 비해 훌륭한) 통치자는 (피지배자들의 능력을 믿고 내버려두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말을 아끼며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면) 공을 이루고 일이 완수될 때, 백성들은 모두 내가 원래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라 스스로 했다고 말한다.
(이 때 어리석은 통치자는 피지배자들이 자신의 역할과 존재를 작게 여기는 같아서 기분 나쁘게 생각하겠지만, 훌륭한 통치자는 피지배자들이 통치자의 역할과 존재를 모를 만큼 각자 자신감을 가진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3) 해설
17장은 통치자가 피지배자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통치자는 피지배자에게 존경 받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존경받으려는 것은 피지배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명예욕이며 자신이 우위에 있는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더구나 피지배자를 제압하여 자신의 말을 듣도록 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권력욕이며, 그의 의욕을 꺾는 행위이다. 그가 힘이 없을 때는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겠지만, 그가 힘이 생겼을 때는 통치자를 업신여긴다.
통치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세는 피지배자의 능력을 믿고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간섭을 최소로 하면서 말을 아끼면 저절로 피지배자는 최대치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어 일이 잘 완수된다. 가장 훌륭한 부모는 자녀에게 여러 가지를 해주는 부모가 아니다. 자녀를 믿어주는 부모이다. 부모에게서 믿음을 받은 자녀는 스스로 열심히 그 믿음에 보답하면서 능력이 커진다. 자녀를 망치는 부모는 간섭을 많이 하는 부모이며, 가장 나쁜 부모는 자녀를 강압적으로 대하는 부모이다. 이 원리는 교육현장에도 필요하고, 리더십이 요구되는 모든 자리(윗사람과 아랫사람)에 필요하다.
17장의 핵심어는 신(信, 믿음)이다.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아랫사람이 지금은 다소 미숙하지만, 앞으로 스스로 잘 해낼 것이라는 윗사람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강하면 윗사람은 간섭할 필요가 없고, 믿음이 약하면 간섭을 하게 된다. 윗사람 입장에서는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한 아랫사람의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가르쳐 주고 싶고, 빠른 지름길로 인도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지적하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짧은 시야에서 보면 도움이 되지만 먼 시야에서 보면 방해가 된다. 아랫사람의 자생력(自生力)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윗사람이 조급해서는 안 된다. 유(悠, 멀리보아 느긋하게 기다림)하면서 말을 아껴(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自然)의 힘을 믿어야 한다. 윗사람의 자연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아랫사람은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는 사람으로 존중받게 된다. 이때 아랫사람은 자존감이 강화되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되며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할 수 있는 세계의 주인이 된다.
이러한 믿음이 부족하게 되면 아랫사람의 결정권이 줄어들면서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결정을 기다리게 된다. 이때 다행인 경우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한 두 가지 믿음을 갖는 것이다. 하나는 윗사람이 자신과 친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내보다 판단능력이 좋은 윗사람의 지배를 고맙게 생각하고 칭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속에는 타자에 대한 의존감이 강화되면서 자존감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세계의 주인으로서 자각도 함께 약화된다. 윗사람의 지배력이 덕(德)에 기반 해 있다 해도 차선(次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친함과 칭찬이 커질수록 윗사람은 명예욕이 충족되어 기쁘지만, 지속되는 경우 아랫사람의 자생력이 약화되고 의존심이 커져서 결국은 윗사람이 감당을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윗사람이 커져가는 아랫사람의 요구를 감당할 정도로 무한의 덕을 베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빨리 아랫사람을 자립시켜야 한다. 그러면 아랫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공을 이루고 일을 완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을 윗사람은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섭섭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명예욕에 지배받고 있다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더 약화되면 대부분의 결정을 윗사람이 하게 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결정에 따르기만 하는 노예가 되고 사육되는 짐승이 되고 자율성이 없는 사물이 된다. 닭장 속의 닭이나 우리 속에 있는 소나 돼지는 운명을 받아들이면 큰 고통 없이 생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받아들일 때까지는 반항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큰 감옥과 같은 곳에 살아도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그렇게 살고 있으면 큰 고통 없이 생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가 있다는 의미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 칸트는 이 자유를 인간다움의 핵심인 인격이라고 했다. 인간에게 자유결정권을 뺏어버리면 반항할 수밖에 없고, 이 반항은 윗사람의 강제진압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을 겪게 되고, 강제진압에 무력을 사용하게 된다. 무력사용은 공동체 질서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사항이라고 윗사람은 말한다. 그러면 이제 아랫사람은 공권력이라는 폭력 앞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윗사람을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지 않고 칭찬하지도 않는다. 이제 윗사람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기회가 되면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이것을 아는 윗사람은 더욱 강한 폭력으로 구속하게 되면서 폭군이 되어간다. 권력욕의 노예가 되어간다. 윗사람이 폭군이 되면 아랫사람들이 처음에는 목숨을 아껴서 움츠러들지만,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길어지면서 아랫사람들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즉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아랫사람들이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때가 되면 더 이상 폭력이 통하지 않는다. 드디어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을 비웃으며 경멸한다. 심지어 권력욕의 노예라고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지배구조는 유지되기 어려우며 조직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17장 지도자의 4가지 등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