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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此岸
# 1. 바다를 그리는 소녀
스노 드리프트snow drift는 멎는다는 단어를 잊은 채 계속 되고 있다. 바람에 몸을 맡긴 눈들은 계속해서 날린다. 거친 대지는 이미 설원. 쌓인 눈 위로 다시 눈이 쌓이고, 깔린 눈은 그대로 짓눌려 얼음이 된다. 그 얼음과 눈들은 그들을 간질이는 햇빛에게 으스대며 야유를 보냈고, 신새벽의 부지런한 햇빛은 그 야유에 발끈하지만 그들의 시간이 올 때까지 묵묵히 눈을, 빙하를, 대지를 때리기로 한다. 제 3자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안쓰럽다고 여겼을 그 왜소한 저항은 밤이 최후의 미련마저 박탈당해 그 권세를 잃고 먼 길을 떠나려 차비를 할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보답을 받게 되었다.
하늘이 찢어지며 일단의 태양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들은 거침없이 새카만 어둠 속을 비집고 황폐한 대지 위로 날아와 꽂혔다. A.E.(After Epoch) 4년, 북반구에 위치한 한 쉘터shelter에도 어김없이 그러한 빛은 내려 꽂혔고, 곧 무수히 많은 조각들로 갈라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언덕의 완만한 능선을 닮은 쉘터는 직경이 거뜬히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듯 보인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외양의 건축물은 지구 위에 남아있는 다른 수많은 쉘터가 그러하듯 해빙기 이전(B.T.; Before Thaw)에 만들어진 것이다. 노쇠한 쉘터는 비록 바닷물과 조우한 경험은 없었지만, 거친 폭풍은 수도 없이 겪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비바리, 또 바다를 보고 있니?」
비바리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곤 생긋 웃었다. 경쾌하게 뒤를 돌아보는 아홉 살 소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허공에 가볍게 흩날린다. 비바리는 그녀를 부른 진영을 향해 강동거리며 뛰어가 폭하고 안겼다.
「아저씨, 망원경을 봐요. 오늘은 하늘이 정말 맑아서, 바다가 정말 잘…….」
「비바리.」 하고, 진영은 비바리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비바리는 심통이 난 듯 볼을 부풀렸고, 그는 비바리를 떼어내곤 조금 무릎을 굽히며 소녀의 새카만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후에, 재차 입을 열었다.「비바리.」
이 소녀에게는 에둘러 말하는 것과 같은 고상은 떨 필요가 없다. 진영은 비바리의 이러한 솔직한 모습을 나쁘지 않게 생각했으나, 마찬가지로 가끔씩 난색을 표하곤 했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거침없이 바다를 부를 때.
「그렇게 바다가 좋으니?」
소녀의 고개는 당연하다는 듯 위 아래로 움직인다. 진영은 비바리의 두 어깨에 팔을 얹었다. 힘없이 닫힌 그의 입술은 금세라도 무엇인가를 말할 것처럼 조금 달싹였으나, 곧 그 작은 움직임조차 멎는다. 그는 말 대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 보자꾸나.」
비바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진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진영은 망원경 앞에 눈을 두게 되었고, 두 눈을 감았다.
「예쁘죠?」
그는 두 눈을 감은채로 대답했다.
「아름답구나.」끔찍하겠지.
비바리는 바다를 동경했다. 소녀가 보는 바다는 언제나 고요히 자리를 지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을 터였고, 혹 바다가 요동을 치는 날이면 기상이 악화되어 망원경으로는 바다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비바리는 난폭한 바다는 단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비바리가 바다를 동경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비바리를 생각했다. 사실을 말해야 한다. 지금 눈을 뜨면 보일 그 위선적인 바다의 이중성을, 그 위험성을 소녀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진영은 절대로 비바리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그는, 비바리의 희망을 앗는다는 것을 생각하기조차 힘들다고 생각했다.
바다, 바다여.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바다여!
진영은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고, 결국 망원경 앞에서 물러났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가자.」 이 끔찍한 곳에서 어서 벗어나자.
두 사람은 내벽(內壁) 안으로 향하는 승강기에 탔다. 윙 하는 기계음이 울리며 좁은 방이 하강했다. 그들은 승강기에서 내려 주거구역으로 향한다. 아이들에게는 다소 험할만치 비탈진 길의 연속이었지만 비바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듯이 내려갔다. 진영은 그런 비바리를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아이는, 저 아이를, 저 아이가.
스스로도 이렇다 정의내리지 못할 상념들이 진영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생각 따위, 부질없다는 것은 4년 전에 이미 깨달았다. 그랬을 터인데.
「노하나(野華) 언니!」
반갑지만은 않은 이름이 비바리의 목소리를 타고 진영에게 전해졌다. 덕분에 그는 머리가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비록 자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어머, 비바리구나. 또 바다 보고 왔어?」
응응, 하고 비바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영은 노하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비바리는 노하나를 좋아한다. 게다가 노하나는 비바리를 잘 보살펴준다. 따라서 진영은 그 둘을 떼어놓을 수 없다. 그는 무뚝뚝한 걸음걸이로 그녀들에게 걸어갔다. 익숙하지 않은 싸구려 향수 냄새가 옅게 퍼지고 있다. 하긴, 요즘은 싸구려 향수도 사치로군. 그는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그가 노하나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진영은 혹여 그녀가 비바리에게 이상한 것들을 가르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다.
노하나의 거친 머리칼이 비바리의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고 있다. 비바리는 노하나와 손장난을 하는 것 같다. 곧 비바리는 노하나에게 꼭 안겨 들었다. 그런 비바리를 보며 진영은 가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아니다. 저런 웃음을 짓게끔 만드는 사람은 김진영이 아니다. 후유츠키 노하나다.
「후유츠키(冬月) 양.」
노하나는 진영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어머, 진영 씨도 계셨네요. 죄송해요. 비바리 덕분에 그만.」
노하나는 비바리를 안은 채로 일어났다. 노하나에게 안긴 비바리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말을 잇는다.
「비바리를 부탁합니다.」
노하나는 미소 지은 얼굴 그대로 대답했다.
「이름으로」 노하나는 말을 끊고는 그녀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웃고 있으나, 지극히 염세적인 미소. 공허.
「부르시지 않네요. 그렇게 하셔도 상관없는데.」
그는 노하나를 바라본다. 어둡다. 겉으로는 화사하게 웃지만, 그 내면은 칠야(漆夜)조차도 비견할 것이 못될 정도로 새카만 암흑. 그는 그 어둠이 싫었다. 비바리가 그 어둠에 영향 받지 않길 바랐다. 비바리가 지금 이대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변화라는 것은, 결코…….
진영의 대답이 없자, 노하나는 예의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보내는 싸늘한 냉소. 성으로 부르든 이름으로 부르든 의미 같은 건 없지 않아? 어차피 본명도 아닌데. 어째서 아직까지도 그런 것에 집착하는 거야. 노하나는 멋쩍음을 감추지 못하고 당황한 듯 말을 쏟아 내었다.
「그런가요? 뭐, 어쩔 수 없죠. 아, 혹시 바쁜 일, 있으신가요?」
비바리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던 진영은 말했다.
「예, 급한 일이 생겨버려서.」
「그렇다면 제가 비바리와 놀아도 괜찮을까요? 딱히, 나쁜 일을 할 생각은 없는데요.」
노하나는 ‘나쁜 일’을 강조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영 씨.」
「예. 말하십시오.」
노하나는 잠깐 망설이다 말했다.
「한 번씩은 웃는 것도 좋아요.」
노하나의 말에,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진영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의외로군요.」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잘려버린 뒷말은 잘리지 않은 채 노하나에게 전해졌다. 냉기마저 묻어나는 차가운 대답에 노하나는 화악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비바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요?」
「아저씨, 바빠요?」
동시에 두 가지 물음이 진영을 향한다. 난 복잡한 게 싫어.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질문에 답해나갔다. 우선은 노하나에게. 「아니, 아닙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은 비바리에게. 「응, 조금 일이 있어서. 노하나 양에게 너무 폐 끼치면 안 돼.」
비바리는 우물거리더니 「빨리 와야 해요.」하고 말했다.
「노력할게.」
그는 황망해 보이는 걸음걸이로 그 둘에게서 벗어났다. 비바리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려버릴 뻔 했다. 노하나는 그러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영이라는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언니.」
노하나는 생각에 빠져 비바리의 말을 놓쳐버렸다. 그렇기에 비바리의 목소리가 얼마나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는가 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비바리가 노하나의 팔을 흔들고 난 후에서야 노하나는 비바리를 보았고, 눈에 아롱진 물방울을 보았다. 길게 생각했던 것이 이상할 정도로, 결론은 간단히 도출되었다.
「최저.」
노하나는 진영이 사라지던 순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거짓말. 그는 비바리를 그 누구보다 소중히 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의 마음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가 버렸다. 그는 비바리를 사랑하긴 하는 것일까. 노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김진영, 죽은 채 사는 남자. 아마도, 그에게 남은 것은 과거의 잔재, 변화에 대한 두려움. 오로지, 그것 뿐.
「최저.」
노하나는 허리를 굽혀 비바리를 껴안았다. 더 세게 껴안는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꽉 껴안았다. 이 불쌍한 아이 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나처럼은…….
「언니?」
비바리는 노하나의 품속에서 웅얼거렸다. 비바리가 숨 막혀하는 것 같아 노하나는 조금 열없이 웃더니 손에 넣었던 힘을 풀었다.
「응, 말해.」
「바다, 보러 가면 안 돼요?」
「으응, 그러자.」
# 2. 이방인
절제를 모르는 양 줄기차게 휘몰아치던 광풍마저 아무 말 없이 일몰의 황혼을 지켜보는 어느 오후. 토로할 상대도 없는 적막을 익숙하게 가슴에 묻으며 잠들 준비를 하던 대지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버렸다. 대지는 그의 위를 뒤덮은 눈들 때문에 직접 그 소리의 원인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가만히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부아──앙.
흐릿하고 자그마한 무언가가 망망히 펼쳐진 설원의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대지는 그제야 그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5년 전 쯤에는 저 소리를 치가 떨릴 정도로 들었었지. 예전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단 말씀이야.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무엇인가'에 타고 있는 청년-브릭 샌슨은 대지의 생각을 알 수 없었으며, 따라서 정확히는 5년 전이 아니라 4년 전이었다고 오류를 정정해주지 않아도 되었고, 땅도 노이로제에 걸릴까, 하는 소박한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게 되었다. 더욱이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도 떠올리지 못한 브릭은 그의 즉흥적인 느낌을 아무런 여과 없이 표현하기까지 했다.
「니미. 이놈의 젠장맞을 날씨는 아직도 그대로잖아. 이래서 북반구는 안 된다니까……. 쯧!」
브릭의 눈에 비치는 대지는 눈이 아플 정도로 희었다. 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설맹(雪盲)에 걸렸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그는 선글라스를 매만졌다. 지나친 건 없는 것보다도 못하다고 했었지. 압도적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순백의 눈들은 차라리 섬뜩함 그 자체로, 아마 어떤 시인이라도 이런 곳을 예찬하지는 못했을 게다. 그 작자들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으며 쓸모없는 상상을 하는 걸로 하루하루를 소비하기 바쁘니까. 브릭은 그렇게 불만을 한가득 터트리며 외부시야를 차단했다. 바깥을 훤히 보여주던 의 설상차(雪上車)의 윈드실드windshield가 점차 어두워진다.
어두워진 차 안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3차원의 홀로그램으로, 그 안에는 파란 점과 붉은 점이 점선으로 이어져 있었고, 파란 점은 쉬지 않고 붉은 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붉은 점, 쉘터. 멀지 않은 곳에, 쉘터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생존자들이 남아있는지 없는지는 100% 확신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마도 쉘터 만큼은 남아있을 터였다. 그는 다른 모든 건축물이 부서져도 그것만큼은 굳건히 버티어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기능들만이 집약된 인류의 과학의 산물, 그것이 바로 쉘터였으니까.
그는 의자를 조작해 몸을 눕혔다.
「여어, 지미.」
「또 뭐냐!」
공중에 50대 가량의 흑인 남성의 또렷한 모습이 비춰지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브릭은 씩 웃었다.
「다른 것 좀 보내줘요. 질리네.」
「……망할 놈.」
사람이라면 한 두 시간으로도 절대 도착할 수 없는 거리에서부터 영상 파일이 전송되어 왔다. 브릭은 상기된 얼굴로 파일을 실행했다. 화면에는 나신의 여성과 남성이 나타났고, 브릭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희미하게 지미의 욕지기가 들려오자, 브릭은 <그럼 안녕. 좀 이따 또 봐요!>하고는 통신을 강제로 끊었다. 저 멀리 쉘터가 보였다. 쉘터는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사실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
주변은 서서히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해는 이미 안녕을 고하고, 싸늘한 밤의 여왕이 그녀의 커튼을 드리운다. 어두워진 하늘은 높고도 맑다. 저 높은 곳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브릭은 어느새 시야를 열어 밤하늘을 구경하며 별빛에 취한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것 하나만큼은 쓸 만하단 말야. 예전엔 별 한번 보려면 온갖 고생을 다 했어야 했다고 하던데.」
하긴, 지미 그 영감이야 워낙에 허풍이 세니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브릭은 혼자서 낄낄대며 서치라이트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브릭이 쉘터의 위에 쌓인 눈이 떨어져 내리면 순식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닐까 순간 고민했을 정도로 거대한 위용.
「정말 그렇게 될라. 재수 없는 생각은 버려야지. 젠장.」
자신의 실없는 생각에 야유를 보내며 청년은 거대한 돔 형태의 건축물을 바라보았다. 이 압도적인 건축물을,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인간이 만들었다는 말이지! 라고 감탄을 터트리지만, 어디에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보이지 않자 브릭은 한숨을 내쉬며 서치라이트를 켜곤 하늘로 빛을 뿜어내었다. 과학이 자아낸 인공의 빛은 밤하늘의 별빛을 유린하며 마음껏 활개를 친다.
「아무나 얼른 튀어 나와라, 응?」
……낯선 불빛이 번쩍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남자가 쉘터 안에서 브릭을 부른 것은 30분가량이 지난 후였다. 그가 있던 곳에서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노랗게 빛났다. 브릭이 그쪽으로 접근하자 쉘터의 외벽이 육중한 움직임으로 열린다. 그런데도 소음은 거의 없었고, 그 광경은 경탄을 넘어선 전율을 느끼게 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차라리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브릭은 꿀꺽 침을 삼키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외벽 안에는 또 다른 벽이 하나 더 있었다. 외벽과 내벽의 사이라는 어정쩡한 공간은 생각 외로 넓었고, 어두웠다. 툴툴거리며 차에서 내린 브릭은 순간 그의 몸을 침범하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확성기를 통해 낯선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 누구야?」
순간 브릭은 당황했지만 평소대로 대응했다.
「Excuse me.」
저쪽 편의 목소리도 몹시 당황한 것 같았다.
「아, 하이. 에, 그. 그러니까, 으, 음. 아이 캔트 낫 잉글리시.」
남자의 발음은 그야말로 몹시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브릭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고민해야 했다. 대충 단어들을 추측해 내자, 브릭은 또다시 고민에 빠져야 했다. 캔트 낫? <can`t not>인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뭐, 보아하니 저 남자는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 같다. 하지만…….
「Hey, Mac. But you speak English now, aren`t you?」
브릭은 자신이 조금 짓궂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확성기 너머의 남자는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파, 파던 미?」
오오, 그래도 이건 좀 알아듣겠군. 브릭은 씩 웃었지만 그에게는 사실 어떤 타개책도 없었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아차차. 플리즈, 웨이트 모먼트!」
그 뒤로 남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실례합니다만, 누구십니까?」
갑자기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고, 브릭은 거의 울 뻔 했다.
「에이, 괴물은 아닙니다! 좋은 밤이죠?」
「…….」
「참, 아까 그 멋진 친구는 어디로 갔습니까?」
「……옆에 있습니다만.」
브릭은 유쾌하게 웃으며 외쳤다.
「고맙다고 전해 줘요! 」
남자가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잠시 후, 브릭은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 유어 웰 컴.」
뭔가 배꼽잡을 반응을 기대했던 브릭은 기어코 폭소를 터트렸다. 「우히, 우힛. 우히히.」하지만 저 너머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으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웃는 도중에 이런 말을 드리게 되어 몹시 유감입니다만, 당신은 누구입니까?」
「브릭 샌슨입니다.」
「나는 김진영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떠한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농담도 통하지 않는 재미없는 친구로군. 브릭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런 친구들이 대개 변비에 걸려서 고생하지. 멋 부린답시고 잡는 무게 때문에 그런 거야. 나라도 저 친구의 쾌변을 기도 해야겠어. 저런 친구는 십중팔구 외톨이에다 적은 수두룩할 테니까. 그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나는 '연방'에서 왔습니다. 목적이라고 해봐야, 별건 없습니다만.」
브릭은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짐짓 말을 끌어 보았지만, 벽 너머의 남자는 아무런 낌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칫 하는 잇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을 쉘터 바깥으로 이주하는 것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바깥이라면, 중위도 지방으로의 이주를 말하는 겁니까?」
브릭은 너무 놀라서 거의 까무러칠 뻔 했다. 도무지가 진영이라는 사람의 감정은 완전히 연소되어 버린 것인지, 이런 말을 듣고도 무덤덤하게 질문을 한 것이다. 그는 벽 너머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졌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니, 우리는 연방이라는 단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간략히 설명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말 그대로 입니다. 살아남은 인류 전체의 연합 국가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이쯤 되면 혹하고 넘어올 때가 됐을 텐데. 브릭은 여유가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것입니까.」
얼핏 들으면 <왜 이제야 온 거냐, 더 일찍 오지 않고.>라고 들릴 법한 대사였지만, 브릭은 상대의 억양에야 다분히 조롱이 섞여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대단한 주제에, 어째서 이제야 나타나서 잘난 척 하느냐, 라고. 그는, "젠장. 우리도 정신없이 바빴단 말입니다."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밂을 느꼈다. 하지만 교양 있는 현대 지식인으로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그런 조야한 말을 내뱉을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동시에 그런 생각을 개소리로 일축했다.
「젠장. 우리도 정신없이 바빴단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이렇게 바깥에서 면박 주는 게 이 동네 예읩니까?」
「……우린 당신을 모릅니다.」
「……나도 댁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뎁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진영의 그 말 이후로 약 십여 분 동안의 정적이 있었고, 이윽고 내벽의 문이 개방되었다. 건물 안은 브릭의 예상대로 몹시 어수선했다. 아까까지 브릭과 대화했던 남자들이 다른 사람을 불러온 듯, 피곤해 보이는 사람들 여럿이 꽤나 큰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도 서넛 있었는데, 그 조용한 사람들 중의 한 여자가 싱긋 웃으며 브릭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브릭은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고, 이름을 교환했다. 나는 브릭 샌슨입니다. - 후유츠키 노하나예요.
그녀의 영어 발음은 일본인 특유의 억양이 다소 섞여 있기는 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 쉘터 안에서 어쨌든 대화가 통하는 사람은 두 번째로 만난데다가, 그 첫 번째 사람과는 달리 말이 잘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당히 아름다운 편에 속하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브릭은 솔직한 심정으로 환호했다. 그는 그의 옆에 예의 그 재미없는 첫 번째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다.
「저, 혹시 결혼하셨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사람은 많이 죽어간다. 그렇게 되면 자연 결혼 적령기는 앞당겨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이 여자는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생각해보라. V에어리어에 살던 제레미만 하더라도 벌써 결혼을……. 브릭은 스스로 감탄할 만큼 논리 정연한 결론을 도출해 내었지만, 그의 결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의 억지를 부리는 심정으로 질문했다. 대답은 간단했다.
「아뇨.」
「오오!」
이것이야 말로 신이 내린 운명! 신은 인간에게 시련을 주었지만 그러나 그의 갈 길을 밝혀 주실지니! 혼자 무엇인가에 대해 찬양하고 있는 브릭을 바라보며 노하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콧소리가 섞인 애교 있는 목소리였다.
「애인이라면, 여기 있지만요.」
브릭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은 많았다. 노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남자였다. 진영이라는 재미없는 남자도 있었고, 브릭에게 멋진 인상을 남겼던 동구라는 남자도 있었으며, 그 외에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두 명의 남자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브릭은 동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요?」역시, 미인은 유쾌한 남자에게 끌리는 모양이군. 아까워,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왔었더라도 사랑을 쟁취해 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문지기가 있다고 문이 안 열리는 건 아니지. 하지만 난 신사니까.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는 브릭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은 노하나는 진영의 팔짱을 끼었다. 「아뇨.」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꺽, 꺽.
실감나게 숨이 막힌 사람의 모습을 연기하던 브릭의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은 와 하고 웃음을 터뜨릴 법도 했지만, 주변은 싸늘할 정도로 적막했다. 노하나는 왼쪽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미안해요, 진영 씨.」
「그럴 줄 알았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정확한 시점에서 초를 치는 진영을 본 브릭은 눈썹을 찌푸렸다.
「아아, 예. 그럽지요.」
그리고 그들은 이주에 대해 대화했다. 중위도로 갈 이동수단은 무엇인가. 도착한 곳에서는 어느 정도의 인권이 보장되는가. 왜 쉘터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인가…….
여태껏 못미더운 모습만 보여주던 백인 남자는 진영이 속으로 놀라움을 표현했을 만큼 차분하게 대답해 나갔다. 브릭의 말이 끝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진영이 입을 연다. 꽤나 능숙한 번역이었다.
「요즘은 태양풍이 강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야기된 자기폭풍으로 인한 기존의 통신체계는 이미 박살이 나있는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은 기존의 통신기기로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묵묵히 브릭의 말을 옮겨 말하는 진영의 말을 들으며 모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는 통신 시스템을 개혁했고, 따라서 태양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통신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도 언제든지 본부와 연락이 가능하다. 본부에서 이곳까지 도착할 이동수단을 기다리는 것은 길어야 일주일 안일 것이다.」
와, 하고 젊은 치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브릭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두 사람 외에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더 빠르게 내뱉기 시작했다.
「인권은 상대적인 개념이므로 절대적으로 호오를 가릴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이 부분에서 진영이 말하던 것이 잠시 흐트러졌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 그리고 살아갈 집은 반드시 주어질 것이며, 노력여부에 따라 최고의 지위를 가질 수도 있다. 연방은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동구의 옆에 있던 소년이 동구에게 작은 목소리로 자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물었다. 동구는 머뭇거리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영은 그들을 보며 쓴웃음을 흘린다. 빙하기는 고작 4년 전에 시작됐을 뿐인데, 하고.
「우리들이 생존해 있는 인류들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확인된 인류의 수는 과거에 비해 너무나도 적다. 따라서 많은 인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채택한 정책 중 하나가 쉘터의 거주민들을 찾는 것이었다.
……끝입니다.」
진영의 말이 끝나자,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우선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지. 지금은 늦은 시간이니, 내일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모여 있던 사람들은 동의했다.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차에, 노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증거를 보여줄 수 있나요?」
브릭은 흔쾌히 대답했다.「물론이죠!」
사람들은 브릭이 세워 두었던 차가 있는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사람들은 연락을 보내고 응답을 기다리는 브릭을 신기하게 보았다. 그러나 응답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신기한 시선은 점차 의문부호로 변했고, 의문부호는 점차 의심의 눈빛으로 변해갔다.
「아, 씨. 지미 이 영감탱이는 뭐해!」
잠시 후, 짜증으로 범벅된 목소리가 차 안을 크게 울렸다. 안에 들어가 있던 브릭과 진영과 40대 중반의 남자는 물론,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순간 놀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야, 이 변태 자식아! 이젠 보낼 것도 없어, 없다고!」
보일락 말락 미소를 짓던 노하나는 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브릭에게 어떻게 대화하는 지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듣고, 마이크에 대고 나직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근데 뭘 보낸다는 말씀이시죠?」
「어, 어. 너 누구야?」
이미 브릭 외에도 다른 사람들까지 화면에 비춰졌던 지라, 지미는 당황하며 말했다. 노하나는 언제나 그렇듯 생긋 웃었다.
「후유츠키 노하나입니다. 그런데 뭘 보내셨다고요?」
「그러니까 말이지. 저 변태 색마자식이 어찌나 XXX를 보내달라고 성화를 부리던지…….」
노하나는 브릭을 빤히 쳐다보았다. 브릭이 어색하게 웃음을 짓자, 그녀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외로우셨던 모양이네요?」
「하, 하하. 네. 뭐, 저야 아직 젊고 말이죠.」
어색함도 잠시, 브릭은 자신의 ‘건강함’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시도를 했고, 덕분에 지미를 반쯤 미치게 만들었다. 진영은 그런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유창한 영어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지미에게 아까 브릭이 했던 말들을 확인했다. 그 사이 브릭은 노하나에게 치근거렸고, 노하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변태는 싫어요.」하고 대답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나고, 진영은 다른 사람들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 3. 겨울 달, 들꽃
-알립니다. 각자 개인의 영상단말기(映像端末機)로 전송된 메일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각자 개인의 영단기로 전송된 메일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비바리는 확성기를 통해 들려오는 말을 듣고는 그녀의 영상단말기를 부팅했다.
<쉘터에서……중위도로의……일주일가량 예상되며…….>
소녀가 이해하기에는 하나같이 이상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 이해한 것이 있다면, 이 ‘집’을 나서서 바깥으로 간다는 것. 바다를 더욱 가까이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비바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고자 진영을 찾아 다녔다. 진영이 옳다고 한다면 그건 옳은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아닌 것이다. 아홉 살 소녀의 생각은 그러했다.
두 시간 가량 진영을 찾아다니던 소녀는 결국 지쳤고, 어느새 식사시간이 된 것을 확인하고 결국 그녀의 방으로 돌아갔다. 쉘터의 중간부분에 위치한 거주구역의 두 번째 층, 오른 쪽에서 다섯 번째 방. 진영의 옆방이었다. 비바리는 그녀의 방 앞에 달린 스위치를 누르고 눈을 가져다 댄다. 홍채인식이 끝나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배급시설에서 운송되어 온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동그란 사탕모양의 캡슐을 꿀꺽 삼켰다. 밍밍한, 개성 없는 맛. 소녀는 머뭇거리더니 조미기(造味機)를 뒤집어썼다. 헬멧 형태를 한 조미기를 뒤집어 쓴 비바리는 맛있는 것, 맛있는 것……. 하고 웅얼거렸다. 비바리가 진영이 말한 것들 중 유일하게 믿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조미기가 ‘맛’을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진영은 소녀에게 조미기를 씌우며 말했다. 이것을 쓰고 네가 먹고 싶은 음식을 생각하면, 그 맛이 저절로 느껴질 거야, 하고. 소녀는 물었다. 음식이 뭐예요?
진영은 그때 눈물을 흘렸다. 비바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비바리는 노하나에게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그녀는 먹는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캡슐이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아니라고 한다. 노하나는 차분히 비바리를 보듬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쉘터에 들어오기 전에 네가 먹었던 거야.
비바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5년 전의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자, 노하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만히 비바리를 껴안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소녀는 그녀에게 따뜻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저씨…….」
소녀는 결국 조미기를 벗었다. 그러자 영문 모르게 슬퍼져서, 펑펑 눈물을 흘린다. 소녀는 왜 자신이 우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슬펐기 때문에,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달래주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는 울음을 그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울었다. 결국 아무도 달래주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는 울음을 그쳤다.
비바리는 진영의 방으로 갔다. 방 안에는 아직도 진영이 없었다. 소녀는 축 늘어진 채 진영의 방을 나섰다. 그녀 앞에는 노하나가 서 있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소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울었던 것은 나인데, 언니가 아닌데. 근데 언니도 울려고 하네.
「언니?」
노하나는 비바리 앞에 쭈그려 앉아서는 아직 다 마르지 않은 채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소녀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였다.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노하나는 비바리의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복도의 저편에는 헉헉대며 숨을 고르는 진영이 서 있었다. 그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저 편에서 묵묵히 그녀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곧 호들갑스러운 남자의 말이 들려왔다. 진영의 바로 뒤에, 브릭이라는 청년이 불평을 터뜨리고 있는 모양으로, 갑자기 그렇게 달려갔으면서 이번엔 또 왜 갑자기 멈춰서느냐 하는 내용이었다. 노하나는 저 남자의 귀여운 모습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저 바보. 아직도 망설이고 있어. 서른 살이나 먹었으면서. 나잇값 좀 하지. 바보. 멍청이.
「아저씨가 왔네.」
비바리는 빨개진 눈동자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진영은 보이지 않았다. 비바리는 노하나가 그녀를 속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볼을 부풀렸다. 노하나는 웃으며 「뒤.」라고 말했다. 이윽고 뒤를 돌아본 비바리는 진영을 보았다. 진영은 뒷걸음질 쳤지만, 뒤에 있던 브릭에 부딪힐 뿐이었다. 어느새 비바리는 진영의 앞까지 달려와, 폭하고 안겼다.
브릭은 진지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딸입니까, 아니면 애인입니까?」
진영은 어색해하던 얼굴을 돌연 굳히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노하나마저 몇 번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십시오.」
노하나는 설핏 웃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딸이에요.」 「겨, 결혼은 하지 않으셨다고…….」 「미혼모랍니다.」 브릭은 비바리의 손을 쥐었다. 「I`m your father.」 비바리는 물론 브릭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에 놀란 브릭은 깜짝 놀라 손을 놓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낯가림이 심한 아입니다.」
브릭은 진영을 빤히 보았다. 「혹시, 이 애 아빠가…….」 「비바리는 고아입니다.」 「그럼 후유츠키 씨의 말은…….」 「농담이었죠. 언제나 반응이 재밌으시네요?」 「하하, 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한동안 한담을 나눴다. 비바리가 진영의 품에서 잠들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 브릭은 벼르던 말을 꺼냈다.
「쉘터는, 참 재밌는 구조를 가지고 있더군요.」
「재미? 글쎄요.」
이때까지의 대화와 마찬가지로, 진영은 침묵하고 노하나가 그의 말을 받았다.
「마르크스가 보았다면, 유레카,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를 모습이겠…….」
「그건 아닐 겁니다.」
브릭이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진영이 말을 끊어버리자, 브릭은 신기한 듯 진영을 보았다. 이때껏 브릭이 파악한 진영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브릭의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영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곳은 이상향이 아닙니다.」
물론 브릭도 그렇게 생각했다. 사회주의를 거치지도 않았으면서 공산주의가 실현되는 공간이 있다면 이런 곳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런 사회를 이상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분명 특이한 사회구조를 가졌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능력에 맞는 일들을 수행한다. 배급부에서, 그리고 에너지 관리부에서, 오폐물 처리부에서, 심지어 식수 조달부도 철저하게 개인의 역할을 분담해 놓았다. 화폐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개인들은 그저 그들이 맡은 일들을 수행할 뿐이었다. 브릭은 순간 떠오른 궁금증을 말로 자아내었다.
「쉘터 내부의 인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이미 완성된 곳이니까요, 쉘터는. 비록 지독히 척박하다고 해도 말이죠. 각 부서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담당한 기계를 손보는 것 정도뿐이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랍니다.」
「그럼, 자기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말은 개소리다. 이건 지미의 지론이었다. 뻔히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혼자만의 영달을 위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생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뭐라더라. 놀이? 오락? 그 비슷한 이론이라고 했었는데. 그 비슷한 거였는데. 그렇지, 게임이론. 그거였어. 이상한 늙은이. 나까지 옮아버린 것 같잖아. 브릭은 투덜거렸다.
「죽겠죠.」
노하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런 사람에게는 배급이 중단되고, 전기 시설이 중단된답니다. 자신의 몫을 다 해 낼 때까지.」
「그, 몫의 분담에서 힘센 사람이 덜 일하게 강짜를 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4년, 4년이죠. 비극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에요. 먼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그렇게 막나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설사 미쳤다고 해도, 알고 있는 거예요.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스스로를 들꽃(野花)이라 불러 달라던 여자는 웃었다.
「그런가요?」
*
브릭은 진영이 왜 그렇게 비바리를 감싸고도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그들의 일이라고 일축한 뒤 쉘터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브릭의 능력 중에 쉘터 안에서 쓸 만한 것은 정말 몇 가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쉘터의 사람들은 브릭을 위해 새로운 부서를 만들었다. 브릭은 덕분에 하루 종일 그의 차 안에서 머물러야 했다. 그는 ‘통신부’였고, 지미는 덕분에 정말 미칠 뻔 했다고 후에 진술했다.
하루 네 번 지급되는 캡슐은 쉘터에만 도착하면 맛있는 진수성찬을 먹을 지도 모른다고 기대를 하고 있던 브릭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했고,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캡슐을 데시겼다. 그리고는 빈 방에서 빼온 조미기를 썼다. 이것만큼은 그를 흡족하게 만들 수 있었는데, 연방에서는 뇌파에 영향을 주어 맛을 꾸며내는 이 조미기를 위험 품목으로 분류해 사용금지 처분을 내렸던 것이다. 브릭은 이 조미기를 통해 산해진미를 마음껏 즐겼다.
「언제쯤 도착한다고 합니까?」
진영의 옆에는 예의 그 소녀가 있었다. 비바리는 진영이 또 알 수 없는 말을 하자 겁을 먹은 듯 진영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진영은 조금 서투르게 웃더니 그런 비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브릭은 그런 그들의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연방과 연락을 취했다. 브릭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빠른데요. 이틀 정도 지나면 도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빠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정도 속도라면 내가 연락하자마자 수송대를 출동시킨 모양인데요?」
토라진 것이 풀리지 않은 비바리는 진영에게 전망대로 같이 가 줄 것을 요구했다.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브릭은 그런 그들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따라가는 것 정도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그들을 따라 나섰다. 진영은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간접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승강기를 타고 내벽의 바로 위에 있는 전망대에 도착한 비바리는 그 길로 쪼르르 달려가 망원경을 차지했다. 바람은 거칠었고,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시야는 모조리 차단되었다. 바다를 보지 못한 비바리는 울상을 지었다.
「저, 뭐하는 건지 물어도 됩니까?」
「비바리가 이곳에 온 것은 망원경을 통해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만, 비바리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바깥은 바람이 거센 모양이군요.」
「바다요? 아아, 바다. 좋죠.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는 물이라지요?」
그리고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죽었던 것도 그 물 때문이었소. 진영은 반사적으로 이 말을 꺼낼 뻔 했으나 간신히 삼켜내었다. 하지만 일그러진 진영의 표정은 브릭을 의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혹시 공수증(恐水症)이라도 있는 겁니까?」
「……예. 조금.」
「아,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브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나 망원경 앞에 서 있는 진영과 비바리를 관찰했다. 작은 소녀는 잘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보이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었고, 진영은 쩔쩔 매며 그런 비바리를 달래고 있었다.
「우습지 않은가요?」
브릭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노하나가 나타나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는 것에 대해 몹시 만족했고, 따라서 뜬금없는 말을 꺼낸 것에 대해 의아해 하지도 않았다. 「으하하, 뭔지는 몰라도 몹시 웃깁니다.」 「정신이상자셨군요. 미처 몰랐네요.」
가볍게 브릭을 제압한 노하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진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저 사람이 저 아이에게 저렇게 약한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아, 뭐 궁금하긴 했습니다만…….」
우습죠, 하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다고 봐도 될 거예요.」
「……예?」
「그냥, 저 아이가 있고, 그를 따랐었기 때문에. 참 시시한 사람이죠, 저 사람.」
브릭의 머리는 광속을 수십 배 가량 상회하는 속도로 회전했으며, 여기서는 살짝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요.」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왔다.
「본인은 모르겠죠. 스스로 죽어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지독히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말예요. 그리고 조만간 정말 그렇게 되려고 하는 것도 같고.」
젠장, 사랑싸움인건가. 뭐라 답할지 고민하던 브릭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상대방이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곤 머리를 긁적였다.
-알립니다. 2조의 작업 시간이 완료되기까지 10분 남았습니다. 3조에 속하시는 분들은 속히 각자의 일터로 가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2조의 작업 시간이 완료되기까지 10분…….
「아,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해야겠네요.」
「갑자기 왜?」
「방금 방송에서 절 찾더라고요. 쉘터 최고의 미인을 찾는다나.」
헛웃음을 흘리는 브릭을 뒤로 하고 노하나는 느긋하게 떠났고, 한참을 굳어있던 브릭은 팔짱을 끼곤 진영 쪽을 바라보았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데.」
# 4. Kakotopian
며칠이 지나고, 브릭이 두 시간 이내에 수송대가 도착한다고 알렸지만, 쉘터는 그의 기대만큼 어수선해지지는 않았다. 살던 곳에 대한 별 것 아닌 미련인가, 아니면 정말로 아무런 감각이 없어져 버린 것인가. 브릭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살았었다고 말하기도 힘든 자신은 알 수 없는 문제라 결론지으면서.
「저, 짐들은 전부 챙기신 겁니까?」
「챙길 것도 없는 걸요, 뭘.」
노하나는 그렇게 말하며 몇 명은 쉘터에 남겠다고 하던 말을 전했다. 그 수는 약 십여 명. 쉘터는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에 떠나는 이들도, 남겨진 이들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의아했던 것은…….
「저, 김 씨(Mr. Kim)는 남겠다면서 어째서 비바리 양은 보내겠다는 것인지…….」
「쉘터에 김이라는 성을 쓰는 남자는 많답니다.」
노하나는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브릭은 불만스러운 듯 코를 조금 긁적였다. 「제 말은, 김진영 씨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그의 고집이겠죠. 대충 눈치 채지 않았나요? 그 사람의 생각들.」
「……이해하기 쉬운 사람이군요.」
「아뇨, 그 사람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도 없어요.」
글쎄, 난 그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당신이 더 이해하기 어려워. 그는 보이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브릭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대화를 중단했다. 노하나는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그럼 이만.」하고는 사라졌고, 그는 정말이지 이해하기 힘든 동네군, 하는 시답잖은 불평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곤 할 일이 없자, 그는 몇 분 정도 그의 차 근처를 서성이다 전망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브릭의 예상대로 그가 한 소녀의 등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실례합니다.」
「아, 샌슨 씨입니까.」
진영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 ‘살아있는’ 이방인. 그의 경박한 모습은 그에게는 상당히 맞지 않았지만, 그는 그런 그를 딱히 탓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것으로 그가 ‘살아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는 한때 그런 것들을 좋아했으므로.
「4년 전엔 말입니다.」
「……예?」
「4년 전엔,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처럼.」
브릭의 눈가가 조금 좁혀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표정에 그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꽤 늙은 사람도 있어요. 당신도 대화해봤죠? 지미 영감.」
진영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도 공수증을 심하게 앓았었어요.」
진영은 무엇이라 대답하지 못했지만, 브릭은 예상했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무서워요?」
「……조금, 무섭군요.」
「뭐가요?」
무서운 것.
김진영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남자가 무서워했던 것.
물?
진영은 실소를 머금었다. 인간은 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건 과학이 얼마나 고도로 발달하든지간에 변하지 않을 불변의 진리일 터. 그런 물을……. 그러나 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다. 그가 무서워했던 것은 물이 분명하다. 그가 살아가게 하는 것. 그건 틀림없이 물인 것이 분명하니까.
「저 아이가 무섭죠?」
푼수 같은 남자의 말에, 늘 어두운 표정을 짓던 남자의 얼굴이 더욱 굳어진다.
「어떻습니까. 사는 게 무섭죠?」
곤란하다. 이대로는 곤란하다. 어차피 2시간 후면 다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의외의 곳에서 이런 난관을 겪을 줄은, 그는 절대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혹은 상상하길 거부했던가.
「난, 갱이었수다. 4년 전에.」
진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난 오히려 난리가 난 게 좋았어. 쓰레기라고 경멸받지 않아도 됐고, 뭐, 솔직히 맘 내키는 대로 사는 건 지금 쪽이 더 편했거든.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도 꼭 그런 건 아니더라, 이 말입니다.
그 영감, 완전히 폐인 직전까지 갔었어요. 나름대로 유복한 살림이었다더군요. 잘난 가족에, 잘난 수입에. 제기랄, 난 모르겠지만. 근데, 난리 터지면서 죄다 없어져 버린 거야. 그러면서 넋이 나가선, 지껄인다는 말이 그거야. 난 물이 싫어! 염병.」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나는 지미라는 어르신이 아닙니다.」
「정말입니까?」
브릭은 비바리가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는 망원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그는 깊게 숨을 삼키고는, 길게 내쉬었다. 옅은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이방인은 입을 열었다.
「죽으려고 했죠?」
「…….」
「어차피 끝이잖아. 그렇잖아요? 이젠 미련도 없다 생각했을 테고.」
진영은 파란 눈동자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변명처럼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럽게 비바리를 향하게 되었다. 소녀는 아까부터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진영과 브릭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곧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후회는 충분히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어때요, 저 아이가 무서워요?」
진영은 이를 꽉 깨물었다. 대답하지 못했다.
「물이 무섭죠?」
물을 닮은 빛깔의 눈을 가진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진영의 대답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는 물었다. 물이 무서운가. 그리고,
「저 아이가 무섭고, 또 사는 게 무섭겠네. 틀려요?」
이미 나왔던 질문이었다. 다른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 없수다. 그냥 이 질문에만 대답해 줘. 브릭의 모든 행동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진영은 비바리와 마주친 시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저씨?」「대답해요.」
동시에 두 가지 물음이 진영을 향한다. 난 복잡한 게 싫어. 진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브릭은 그런 진영의 시선을 쫒았다. 그 끝에는 어린 소녀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불안? 그래, 불안하겠지. 브릭은 싱긋 웃었다.
「저 애를 봐요.」
비바리는 아저씨가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다, 싸움이 난 것 같다는 것만 인지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소녀가 모르는 말들로만 진행되었으니까. 비바리는 불안감을 느꼈다. 묘한 대치. 겁을 집어먹은 아이와 그 아이를 보는 성인 남자 둘. 그 어느 한사람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들은 주변의 배경에 녹아 스며드는 것 같았다.
「어머,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셨나 봐요.」
비바리는 울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의 구도는 깨지기 시작했다. 노하나는 정신없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비바리를 얼렀다.
「눈물도 물인데 말이죠.」
브릭의 말에 진영은 흠칫 몸을 곤두세웠다.
「무서워요? 근데…….」
브릭은 진영에게 다가갔다. 진영은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브릭이 다가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두 사람의 거리가 불과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게 되자, 브릭은 조용하게 말했다.
「저 아이가 울고 있어요.」
브릭은 진영의 등을 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영은 마치 브릭이 그의 등을 밀기라도 하는 양 잠시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영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투로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노하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진영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後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이야기
비바리는 어린 해녀의 순 우리말입니다.
XXX는, 사전에 검색해보세요. 제가 왜 이런 단어를 아는지는 부지 묻지 말아 주시고요.
제목인 '차안'은 이 언덕이란 뜻입니다.(한자 그대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세상'이라고 해요. 반대의미로는 피안彼岸이 있어요. 물론 뜻은 저 언덕입니다. -_-; 이상향이라고 할 만한 곳이겠죠.
소제목이었던 Kakotopian은 제가 만든 조어입니다. Kakotopia라는 단어를 제 마음대로(라고 해봐야 n하나;) 고쳤어요.
공수증은 사실, 광견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_-; 본문에서는 물론 광견병의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광견병 걸린 주인공이라니, 뭔가 슬프잖아요.
본문중 쓰였던 영상단말기는 휴대폰이랑 비슷하지만, 영상을 통한 이미지 전송과 대화가 가능한 휴대용 통신기기……라고 야심차게 만들었던 건데, 참 세상은 빠르네요. 벌써 흔한 기술이 되어 버렸잖아요. -_-; (이 글은 처음, 2005년에 v43이라는 pmp로 쓰기 시작했던 글입니다. 초안도 아마 이 카페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2005년엔 그런 기술 없었어요. 진짜로! 아, 비참하다.)
원래 웰스 허버트 박사의 케이베릿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쓰면서도 잉여잉여싶었던 부분이긴 한데, 지우기가 아쉬웠거든요. 결국 이번에야 지우게 되었습니다. -_-; 물론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인 허버트 조지 웰스에 대한 오마쥬였습니다. 근데 참, 네, 뭐, 좀, 그렇네요. -_-;
카페 이전에 대해서
처음 글이 올라왔을 때부터 오늘까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최소한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네요. 저는 그래도 아직 추억을 회상하며 그 시절은 참 아름다웠지……하고 기억을 곱씹을 나이는 아니라서요.
근데 한가지 중요한 건요, 만약에 카페를 옮기면, 최소한 옮긴 분들은 열심히 활동하실 건가요? 아니면 막무가내로 신입 회원만 오기를 기다리면서 신입회원이 활발하게 작품활동 및 커뮤니케이션을 구축하기를 기대하실 건가요? 아니면 그에 대한 계획이 있는 건가요? 이런 대책 없이 막무가내로 카페를 이전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최소한 후발주자들을 끌어모을 계획은 있어야지 않겠어요?
솔직히 오래는 못하겠고, 한 반 년 정도라면 매달 두어 작품씩 선정해서 감평만 할 수는 있어요. 솔직히 감평을 할 실력은 아니니까 사실 감평이라기보단 감상에 가까운 글이겠지만.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 정기적으로 감평을 해주는 곳은 의외로 많지 않고, 감평을 원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아요. 이런 사람들을 유치하는 데에는 감평이란 게 꽤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Right now는 허경영의 말이 아니에요. 오바마의 말이죠. 뭔가를 해야 하는데도 소극적인 자세를 계속 유지한다면, 결국 그건 현상의 유지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