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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싫어하는 설교 40
1.1. 듣기 싫어하는 설교
설교의 주인은 바로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목사의 설교 가운데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고 설교자나 세상의 온갖 사건들과 저속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들만 보인다면 이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나가는 일은 아니다. 세상 이야기도 있고 예화도 있고 설교자 자신의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데 방해되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목사의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면 목사의 집이 보이고, 목사가 여행을 다녀오면 다녀 온 여행지의 모습이 보이며, 선거 철이 되면 강단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설교 강단의 주인 바꾸기는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고 설교에 식상하게 할 것이다,
어떤 목사의 말이다. “오늘의 한국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설교 사역의 현장에서 우리는 말씀의 주인이 보이지 아니함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설교자의 용모만이 감상되고 그의 개인적인 체험담을 들으면서 그와 관계된 연상(聯想)만을 계속된다. 그리고 회중은 거기에 도취되어 웃고 울다가 "기도합시다"의 구령에 따라 기도를 한 후 폐회 찬송을 부른다. 그들을 붙들고 오늘의 설교에서 하나님을 만났는지의 여부를 묻는다면 그 대답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성서적인 설교는 바우만의 다음의 충고대로 하나님이 현존하심을 전달하여야 한다.”
바우만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다음의 종결어(終結語)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설교의 탈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충분히 입증을 해 주고 있다. 설교 종결어의 주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 자신이다. 여기서 외국의 설교자와는 달리 한국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신의 등장을 극심한 경지에까지 끌고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설교 내용이 설교자의 말과 경험과 지식과 그가 즐겨 쓰는 예화로 완전히 채색된다. 그리고 회중들로부터 '아-멘'만 유발시키면 어떤 이야기들도 하나님의 순식간에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너무나 뚜렷이 나타난 현상은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말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를 몰고 온 위급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으며 계시지 않는 설교는 생명 없는 자기 선전이나 세상의 무엇을 광고하는 연설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 성도들은 틀림없이 죄인의 본색을 드러내서 이를 들어 내고 목사를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목사는 가끔 자기가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에서 이 시대에 일어 나는 모든 일들을 분석하고 관조하여 성도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세상 이야기를 장황하게 불어 말하려 한다. 50-60년대 우리 나라가 전쟁과 기근과 혼란으로 한참 어려울 때에 목사들은 종말론적 설교를 많이 하면서 당장에 주님이 재림하신다고 자기에게만 특별히 알려 주신 것처럼 소리 높여 설교했다. 그러나 그 설교들은 모두 허구에 불과한 것이 되었으며 세상을 비관하게 하고 공포와 공갈로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되고 말았다. 종말 즉 주님의 재림은 그 시간이나 정황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다면 정황과 시간이 어떻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는 복음의 진수를 외면하고 혼란과 가난이 주님의 재림을 촉발하는 원인인 것처럼 설교를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런 공갈 협박 식의 설교가 성도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오직 살아 역사하시는 참된 복음만이 죽은 심령을 살리며 그런 역동적인 새 삶을 주는 말씀의 은혜를 성도들은 사모한다. 그런 설교는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요, 바르게 나팔을 부는 설교자의 인격과 생활과 입술을 통해 전달된다.
나는 가끔 설교를 준비할 때에 내가 읽은 책의 이야기나, 누구에게 들은 예화나 신문에 보도된 어떤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선택하고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 즉 세상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내 생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어떤 특별함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전 건축이나 다른 목적을 위해 목사가 설교에서 흔히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떤 목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자 한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선포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데서 생긴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 수필 또는 교양 강좌가 아니다. 언제나 본문으로 봉독한 성경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正道)다. 그럼으로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눈을 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전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강단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설교자의 연출이 속출하고 있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 말씀인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예화를 나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들려주는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견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분석, 또는 경험을 말하고 난 다음에 그 경험담에 좀더 튼튼한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봉독한 본문을 인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선전하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설교 현실을 우리의 한국 교회에서는 너무 자주 본다. 이러한 선상에서 오늘도 설교하는 목사들은 다음의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재원(財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목사가 알아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은 설교와 간증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설교는 단순한 신앙 간증과는 너무나 다른 구속력을 가진다. 신앙 간증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회중들로부터 공감대만 형성되면 된다는 지극히 한정된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설교는 그 기준이 그 날의 설교 본문에 있다. 그 본문은 설교자와 회중 모두에 의하여 함께 읽혀진다. 거기서 회중들은 그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소유한 상태에서 설교자가 그 말씀을 어떻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자신들의 삶의 장에 적용시켜 주는지를 주시한다. 그러기에 설교는 수많은 회중의 감시를 받으면서 본문이 말씀한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되는 엄격한 제한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설교자의 앞에 앉아 있는 무리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봉독되어진 말씀의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될 것을 철저히 요구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만일 목사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하고 분명한 제한성을 다른 이야기들로 흐려 애매모호(曖昧模糊)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진 죄인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희석(稀釋)시켜 세상에서 흔히 듣는 잡담(雜談)이나 죄인들의 입에서 얼마든지 오르내리는 말로 전락시킨다면 하나님과 성도들에게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이야기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의의가 있을 수 없는 정설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상황에 맞추어 해석되는 일이 많다. 즉 자기를 선전하거나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생계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농담거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돌려 치려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땅에 글을 쓰신 일이 있으셨는데 그 글을 보고 살기 등등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묻기를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재미를 본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본 사람들이 놀라 도망을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낄낄거리며 웃는다.
우리들의 도덕적인 양식으로는 자기 아버지를 농담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런데 강단에서 목사들이 성도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나님과 주님을 농담거리로 삼는 일이 있다. 목사의 농담은 주님을 비하하거나 놀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 이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심각한 말씀과 행동이 이런 식으로 격하되어 농담의 소재가 된다면 성도들은 분노할 것이다.
지져스 크라이스트라는 뮤지컬이 이화 대학의 강단에서 공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공연을 보며 극찬을 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몇 번인가 그 뮤지컬이 어디선가 공연되었다. 그런데 그 뮤지컬의 내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연인으로 사랑했는데 그 사랑이 열매 맺지 못했다는 슬픈 내용이다. 주님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베푸신 더 찾아 볼 수 없는 사랑이 한 여자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아니한 비정하고 매몰찬 사랑으로 묘사가 되고 그 사랑을 얻지 못한 타락한 여인의 슬픔으로 묘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공연에 대하여 우리 기독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거나 그 잘못된 짓을 꼬집어 항의하고 말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름 성경 학교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 전도사가 강사를 한 사람 초청해 왔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뿐 아니라 동남아 일대를 다니면서 어린이 집회를 전문적으로 인도하는 유명 강사라고 했다. 그는 주로 인형극을 공연했다. 나도 전도사의 그런 소개를 듣고 상당히 기대를 하며 그의 공연을 보았는데 그 내용이 주님의 이름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 공연을 보면서 약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내일은 내용이 달라지겠거니 하고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 날도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아이들은 분위기를 한껏 잡고 음산한 목소리로 인형극을 진행하는 그 전도사의 이야기에 함빡 빠져들었다. 3일 동안 진행된 여름 성경 학교의 중요한 집회 시간이 이렇게 귀신 쫓아낸 이야기로 50%나 사용되고 말았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집회를 못하게 돌려보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 인형극을 보고 난 뒤 얼마나 그 인형극이 충격적이었는지 다른 배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말만 외쳐 대고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장사하는 사람들은 장사 속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 속으로,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척도(尺度)로, 각각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현상이 정말 두드러지게 만연되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단에 속한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기들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성도들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는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목사의 이런 설교를 듣고 함께 웃고 즐기는 것 같지만 되돌아서서 ‘오늘도 쓸데없는 잡소리만 들었다’라고 입을 삐죽인다. 하나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말씀이 전해지지 않고 왜곡된 말만 계속 전한다면 그는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이것을 우리들은 정말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고 그 말씀을 그 말씀으로 받아들여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고자 자기를 성찰하고 개선해서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도록 설교해야 한다. 성도들은 그런 설교를 원한다. 흥미 위주의 설교를 하지 말라.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새롭고 충격적인 무엇을 주려는 유혹을 여지없이 떨어 버리라.
목사가 설교나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왜냐하면 성경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다 알다 싶이 신학교에서 배운 성경은 성경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으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과 몇 가지 사례를 배웠을 뿐이다. 즉 신학교에서 성경 전체를 알 수 있도록 배운 것도 아니고, 부분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완전한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나온 목사들이나 성도들은 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을 아주 잘 알 것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해 준다.
더욱 더 웃기는 것은 목사가 정통적인 보수 개혁 신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 해석에 엄청난 오류가 있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목사가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 신학교를 나왔다면 그가 바른 성경 해석을 했더라도 무조건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다. 즉 목사가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에 따라 잘못된 성경 해석도 바른 것이 되고, 이상한 신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바른 것도 그릇된 해석으로 매도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우리 한국 교회에 비일비재(非一非再)하여 가장 보수적이라는 교단의 강단에서 가장 들어 줄 수 없는 성경 해석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다.
150여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가 가정 주간에 설교를 했다. 나는 특별한 기회가 있어 그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다. 목사는 요셉이 애굽에서 고생하다가 성공한 이야기를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아주 큰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그 목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온갖 손짓 몸짓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가 낮추었다 하면서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정말 열정적인 설교요 혼신의 힘을 다한 설교를 했다. 목사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목사의 유도에 따라 연신 아멘을 외쳤다.
그러나 그 설교는 크게 잘못된 설교였다. 목사는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가 그렇게 견딜 수 없는 고생을 했어도 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고생을 견딜 수 있었고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우리도 꿈을 가지고 노력하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지금 현실이 답답하고 어렵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고 꿈, 즉 희망을 가지고 살아서 요셉처럼 크게 인생을 성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축원 소리에 성도들은 화다닥 놀라 큰 소리로 “아-멘”을 외쳤다.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설교 후에 하는 목사의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요셉처럼 큰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크게 성공하게 해 주시옵소서. 아멘” “아 멘” 언 듯 보기에는 그럴듯한 설교요 기도지만 이런 설교는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며 그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다. 사람이 역경 중에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하는 말이다. 희망과 성공 사이에 꼭 있어야 할 하나님 없어 복음이 아닌 ‘적극적 사고 방식의 강연’인 것이다. 이것은 인본주의적인 값싼 연설에 불과하다.
요셉이 꿈을 꾼 것은 하나님이 꿈꾸게 해 주신 꿈이지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는 이상과 꿈이 아니며 희망 사항이 아니다. 그리고 요셉이 노력을 해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노력과 인내심에 의해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미리 애굽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에 의해 성공하게 된 사람이니 곧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요셉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와 늘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으며 요셉은 그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이 본문의 설교는 ‘사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축복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니 믿음의 생활을 잘해서 요셉과 같은 축복을 받고 살아야 한다’고 설교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목사의 설교에 이런 하나님과 요셉의 관계가 한가지도 언급이 되지 않았다. 오직 사람이 이상과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면 요셉과 같이 성공할 수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고 강변했다. 이것은 설교가 아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인생이 성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을 붙일 만한 연설인 것이다.
어떤 목사가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린아이를 밴 여자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어린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죄가 많다는 말씀이다”라고 해석했다. 이 해석은 60년대에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강조하며 다닌 부흥 목사들이 단골로 쓰던 공갈 협박용 성경 해석이었다. 어린아이 잉태한 것을 죄가 많다는 것으로 해석해 버리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많은 문제가 생기는지 아는가?
이런 목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말씀 해석의 오류는 결국 그 목사의 목회 생명을 단축하게 한다. 성도들이 목사의 말씀 실력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을 지라고 하나님께서 그대로만 두고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나에게는 지난 30여년 동안의 설교 노트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그 설교 노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겁이 난다. 그 설교 가운데 얼마나 성경을 잘못 해석한 설교들이 있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던가? 몇 번이나 성경을 통독하였으며 그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감격 감사하여 눈물을 흘린 일이 있던가? 진실로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이라는 찬송가가 마음에 와 닫는 신앙 고백을 해 본 일이 있는가? 사단은 목사의 성경 무식을 틈타고 들어 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신령한 강단을 자기 말을 전하게 하는 무대로 사용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런 사단의 장난에 놀아 난 일은 없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 노회에 수 십년 동안 중으로 있던 분이 개종하여 목사가 된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50이 넘어 개종한 그 분은 어떤 중소 신학교를 나왔고 목사가 되어 우리 노회에 가입했다. 하도 귀한 목사라고 생각되어 어떤 여 전도사가 결혼을 자원해서 오붓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그 분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한 노회 목사들은 그 목사를 초청해 사경회를 하고 생활비를 도와주기로 묵시적인 약속을 했다. 그래서 나도 순서대로 그 목사를 초청해 집회를 하기로 했다. 특별한 목사가 집회를 인도한다 하니 성도들이 많이 모였다.
그런데----- 그 목사가 하나님의 강단을 차지하고 무슨 짓을 했는지-----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설교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가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는 주로 그가 승려로 어떤 생활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는지를 말하는 것인데 승려로 있을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이틀 동안 계속했다. 예를 들면 불교 승려들이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고승이 되는데 그들은 앞으로 되어질 세상일을 모두 잘 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인 육여사가 시해(弑害)를 당하기 전에 서울의 모 사찰의 주지는 이미 그 날짜를 다 알고 있었으며 죽는 모습까지도 알았지만 천기를 누설할 수 없어 말하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불교의 경지가 깊어지면 천하는 움직일 수 있는 힘도 얻는다고 말했다. 그 외에도 불교의 경전인 팔만 대장경이 어떻고, 목사 되기는 쉽지만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과 고행을 겪어야 하는 가라는 등 도무지 그가 목사인지 고승인지 구별을 알 수 없는 말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수 십년 동안 불교의 승려로 살았다. 그러나 목사 된지는 겨우 일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의 개종은 3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 아는 것은 불경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석가의 말인 것이다. 그는 아직도 석가의 제자로서의 탈을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사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 성도들은 머리가 아파했다. 강단에서 보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사단에게 직격탄을 맞고 정신을 잃어버린 졸병들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회를 도중에 중단하고 그만 두게 했으며 노회의 여러 교회에 집회를 취소하도록 했다. 나중에 그 분이 부천 어디에선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직 소식을 모른다.
성도들은 이런 엉터리 성경 해석과 다른 이야기들을 듣고자 하여 교회를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해야 말씀의 능력이 살아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지 잘못 해석된 말씀을 전해서는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시험을 당하게 된다.
설교를 듣기 원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역동적인 복음을 듣기 원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한다. 성도들은 이런 목사의 자기 이야기를 싫어한다. 목사의 자기 자랑이나 자기 선전을 하지 말라.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하는 '말씀의 사자'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은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대사’라고 했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했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주어야 한다. 한국의 신학 교육의 초창기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목사는 성도에게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의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어떤 목사들은 이런 설교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자기 이야기를 마치 하나님의 복음 인양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이야기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설교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 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올바른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고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는 단순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된다. 만일 어느 누구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설교의 주체로 한다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대게 자기 이야기를 복음처럼 말하는 목사들을 보면 사실상 별 볼일이 없는 일들을 대단한 일인 것처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말하고 그것을 본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자기가 빈곤한 가정의 출신이라든지 아니면 청년 떼에 엄청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늘 이렇게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든지 하는 따위의 유치하고 보잘 것 없는 자기 성공담을 말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어느 누가 그런 설교 아닌 이야기를 듣고 있겠는가?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말을 수 없이 거듭 반복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예로 들어 설교를 하자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착각 잘하는 목사는 이 말씀을 “제가 길을 가는데 어떤 노인이 짐을 지고 가셔서 그 짐을 대신 져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노인이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서 복음이 아닌 자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일의 효율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오랫동안 계속하면 그 분야에 전문인이 되어 스스로 진전시킬 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된다 그렇게 되면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가진 도사(道士)의 경지에 이른다. 설교 사역도 같은 맥락에서 설교에 도사가 된 목사가 있다. 이렇게 설교 도사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목사는 강단에 설 때 넘치는 자신감을 가지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 나아간다. 그 자연스러운 몸놀림과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성도들은 목사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된다. 실제로 나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전국에 부흥회를 다니는 어떤 목사가 설교에 넘치는 자신감을 보인 일을 보았다. 그는 우리 교회에 부흥 목사로 초청을 받았을 때에 “김 목사 이번 부흥회에 어떤 점을 강조했으면 좋을 것 같아.”라고 질문했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 받게만 해 주세요”라는 주문 대로 그렇게 설교를 했다. 물론 원고는 한 장도 없었다. 그 목사는 건축이면 건축, 전도면 전도, 기도면 기도, 헌신이면 헌신, 모든 우리 기독교의 전문 설교에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무엇을 알지 못하며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설교에 자신이 넘치는 목사도 자기 설교를 비디오에 담아 스스로 볼 필요가 있다. 나도 남 못지 않게 설교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내 설교에 아주 실망한 일이 있었다. 친구 교회에서 장로, 집사, 권사의 임직식에서 설교를 맡아 하게 되었는데 모든 예식을 비디오로 찍었다. 며칠 후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내 왔다. 나는 무척 반가워하며 그 테이프를 보게 되었는데 얼마 후 크게 실망해서 끄고 말았다. 내가 설교한 장면 대문이다. 25년도 더 넘게 설교한 내 모습이 겨우 저 정도인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우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신경을 건드리는 놓은 목소리였다. 밀을 할 때마다 너무 많이 노출되는 아랫 이(耳)도 그랬다. 잘 한다고 며칠씩 준비한 설교 내용도 혼란스러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한가지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아내는 잘하고 있다고 했다. 100% 마음에 들지 않는 목사의 설교를 잘하는 설교로 듣고 있는 아내와 성도들은 그 동안 어떤 은혜를 받았을까? 정말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이 참담했다.
자신의 설교가 나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목사가 많을 것이다. 반대로 만족한 목사도 있을 것이다. 그런 목사는 얼마나 좋을까? 이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내 설교의 모습을 다시 보기 싫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설교 모습을 보고 자기가 만족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노력이 있어야 발전한다. 이런 자각과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없는 목사들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만족하며 설교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설교의 교조적(敎條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교만의 자리에 둥우리를 틀고 안주해 버린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목사가 자신은 초보 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본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목사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성도들은 이런 교만한 자의 거만한 설교를 극도로 싫어한다.
우리 한국적 상황과 인식에서 성도와 세상 사람들은 아직까지 목사에 대한 어떤 기대감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진실한 양심이며, 정(正)의 척도며, 죄인이 찾아 갈 마지막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목사에 대하여 그런 기대를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기대대로 목사가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최근 들어 이런 의문과 회의(懷疑)는 더욱 더 깊어져서 과연 우리 사회가 목사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고 잇는가를 의심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어떤 목사가 한국 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 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얻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 교회와 비교해서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한 목사는 이런 현상은 “이 땅이 유교 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즉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고 방식에 의한 답이지 설교하는 목사가 실제로 말씀대로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한 대답은 아니라는 말이다.
설교하는 목사에 대한 기대가 이처럼 너그럽고 관대한 사람들의 대답을 그렇다고 해도 목사 스스로가 하나님 앞과 자기 양심 앞에서 이 질문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해 보아야 한다. 정말 가장 고결한 성직자인 목사가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최근 들어 이런 자책(自責) 섞인 대답이 나오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목사들이 각종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에서 기인된다. 성전에서의 살인 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 낭비에 선두 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 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 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 출처를 알 수 없는 박사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간음과 모략 중상들의 사건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 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사건들이다.
설교자가 가져야 할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다. 과거 우리 한국 교회가 인구 비례 3%의 성도들이 나머지 97%의 국민을 선도했던 대의 목사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원수를 용서하고, 밤을 세워 나라와 민족의 죄 짐을 지고 통곡하며, 생명을 바쳐 애국 애족을 실천했다.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목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 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그러치 못한 몇몇의 목사들은 그 계층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작태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목사는 자기는 죄인이지만 주님의 말씀은 바로 전한다 하면서 자기가 선포한 설교와 자기의 생활의 이질 현상(異質 現狀)을 아주 당연한 것처럼 미화(美化)하고 있다. 어떤 부흥 목사의 부인이 하루는 부흥회를 인도하는 남편에게 찾아 와 모든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집에 가면 마귀가 되고, 교회에 오면 천사가 되니 나는 천사와 같이 살고 싶다’면서 강단에 이불을 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 설교는 천사처럼 하면서 살기는 마귀처럼 사는 목사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로 인해 생기는 우리 한국 교회의 비극이 얼마나 클지도 헤아려 보자. 주님의 경고처럼 우리는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내가 만난 다른 목사는 엄청난 비교를 했다. 그날의 설교는 본문이 엘리야가 아합에게 쫓겨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소원하는 말씀(왕상 19:4)이었다. 목사는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성도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낙심된 일을 당했다고 하면서 엘리야가 죽을 고통에서 하나님을 믿고 승리한 것처럼 자기도 그렇게 승리했다고 했다. 물론 목사와 성도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자는 말은 정말 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목사는 자기도 몇 번씩이나 엘리야와 같은 낙심을 했다고 몇 번씩 강조해서 말했다. 그 목사는 인제 겨우 40대 중반이 이었는데 어떻게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어느 누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런 고통을 당하자고 해도 그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없다. 그런데 그는 자꾸 자기가 엘리야와 같은 고통을 당했다고 하면서 성도들에게 자기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들을 주님과 비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과도 비교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망령된 이야기를 아주 거리낌없이 설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설교하는 목사가 스스로 하나님만큼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지는 무의식적인 망말인 것이다.
이런 설교는 듣는 사람들, 특히 인생의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듣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역겨울 정도다. 나이가 40인 사람이 60인 사람에게 자기를 본 받아 세상을 살라고 해서는 좀 이상하다. 가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목사는 자기를 낮추고 드러내서는 안된다. 어디 설교가 목사를 본 받아 살라고 가르치는 것인가?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스도를 본받고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본 받아 살아야 한다고만 말해야 한다. 혹 성도들이 목사를 본받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과 주님과 엘리야는 모두 우리와 비교될 수 없는 분들이다. 목사가 강단에 선다고 하나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고 사도가 되고 선지자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설교가 목회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젊은 목사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설교의 근본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이런 일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가 목회의 한 방법으로 된 예는 수없이 많다. ‘설교를 잘해야 교회가 부흥된다.’. ‘이번 부흥회에서는 우리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아 성전 건축 헌금을 충분히 해야 한다’. ‘설교를 잘하는 목사’ 같은 말들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말들로 들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왜 이런 말들이 잘못된 발상과 인식에서 나온 말인가는 설교의 본질을 헤아려 보면 금방 판단된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설교자인 목사를 당신의 자녀들 앞에 세워 말씀하게 하시는 것을 말한다.」 설교에 대하여 이 이상의 무엇을 말해서는 안되며, 이 이하의 무엇을 말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설교를 잘 해야 교회가 부흥된다’는 말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했더니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다는 의미로 정립되어야 한다. ‘설교를 잘 하는 목사’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잘하는 설교’, ‘설교 잘하는 목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바로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작금(昨今)의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만 있지 않다. 잘 못 믿는 자에게는 잘 믿으라 하시고, 죄인에게는 회개하라 하시며 회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신다. 이미 받은 축복이 크니 늘 감사하고 충성하라고 하신다.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다. 온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라 하시며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하신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고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하신다. 성경 이야기에서 말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칭찬보다는 경고가, 받는 축복보다는 헌신이, 선별된 지식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이, 자신보다는 이웃이 그리고 하나님이, 미움과 다툼과 시기 질투보다는 사랑과 이해와 용서가 훨씬 더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설교하는 목사가 이렇게 더 많이 강조된 죄 문제, 의무와 책임, 헌신과 희생, 자기 이익 보다 하나님을 위한 충성 등을 강조한다면 그 목사를 설교 잘하는 목사라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설교 잘하는 목사’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설교자라는 정석(定石)대로 해석되지 않고, 듣는 성도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설교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라고 해서 모셔 왔는데 성경의 말씀대로 비례해서 설교를 한다면 성도들은 결단코 그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설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설교 못하는 목사’로 매도되어 이삿짐을 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의 엄격한 의미에서 ‘설교 잘하는 목사’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누가 전하던지 바르게 전하면 전하는 사람이 목사든 어린 아이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으로 힘이 있어야 한다. 발람은 당나귀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크게 놀랬다.(민 22: )
설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고 이익을 추구할 수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설교자가 교회 성장을 목표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성전 건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목사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질적인 성격이 퇴색하고 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의 무식과 개으름을 숨기기 위해 신비주의를 도입하기도 한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목사는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제어하고 지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교를 사용한다. 그런 목사는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한다. 이럴 때 그는 자기가 하나님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이 헌금을 모금하는 금고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을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고 말한다. 한 때 우리의 목사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었다. 부흥 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특유한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했다. 그 때 강사는 자신과 교회가 집회 중에 거두어 드린 수입을 어떻게 분배해야 한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혹시 지금도 이런 파안무치(破顔無恥)한 일이 없는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 교회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어떤 형태든 설교가 목사의 야망 달성을 위한 목회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지 결코 목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또는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죄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전하는 것" 뿐이다.
1960년대 후반에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는 ‘설교의 위기(Empty Pulpit)’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는 여기서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empty pulpit)을 했는데 이 말의 의미는 설교가 없는 교회 강단을 의미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가 설교를 하는데도 좌석에 앉아 있는 성도들은 말 할 수 없이 허전해 하고,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심각한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은 ‘비어 있는 강단’이 아니라,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설교의 몰락' 또는 '설교의 임종'이라는 슬픈 비판들이 등장했다.
이와 같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목사들이 설교에 대해여 공부하지 않으며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되어진 결과다. 한국 목사 특히 앞으로 교회를 책임지고 나아 갈 젊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바른 종’되기 위해 공부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단적인 증거가 있다. 인터넷 싸이트 가운데 회원이 1,500명이 넘고 매일 접속하는 사람이 500명이 넘는다는 싸이트 운영자를 만났다. 젊고 의욕이 넘치는 강도사는 목회에 대한 유익한 세미나를 교통이 좋은 지역에서 그 분야에 실력 있는 강사 목사들을 초청하여 가졌다. 그는 적어도 1,500의 회원들 가운데 1/10인 150명은 오지 않겠는가 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회비를 한푼도 받지 않는 목회 세미나에 참석한 사람은 겨우 10여명이었다. 강도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사님, 요즘 목사들은 공부하려 오라고 하면 안 옵니다. 그 대신 인터넷에 동영상을 띄우면 많이 봅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내가 Moksa 홈을 운영하면서 설교 게시판을 이용해 이런 광고를 한 일이 있었다. “나는 30여년 동안 설교를 했습니다. 그 경험을 살려 설교 분석을 해 드리겠으니 혹 원하시는 분이 있으시면 설교 원문을 이 메일로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책이 기록되어 있는 친구 목사의 설교 한편을 분석해서 올려놓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반응이 좋지 않았다. 겨우 한 분 목사가 자기 설교를 보내 와서 분석해 보내 주었을 뿐이다. 물론 나의 이런 잘난 척하는 짓이 가소로워서 반응이 없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목사들이 설교를 배우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아니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나는 목사들이 자기 나름대로 설교에 대해 달관(達觀)했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물론, 오늘의 한국 교회 설교 사역은 아직도 건제(健在)한 면이 많다. 선진국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목사의 뜨거운 기도가 있고 생사를 걸고 뛰는 목회의 열심히 있다. 그리고 아직도 순교의 피가 우리의 바닥을 흐르고 선교의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은 교회가 우리 교회다. 어떤 땅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취성(深醉性)이 강한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에서 열거한 설교의 위기 요소에 물들지 않은 맑고 귀한 목사들이 우리의 한국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는 생존 경쟁이 살아남기 위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목사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뛰고 설교하는데 이 작업이 얼마나 많은 정성과 노력을 요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안일과 자만은 목사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이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동시에 파괴시키는 무서운 사단의 병기다.
이런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성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생긴다.
내가 잠시 몸담아 있던 노회에서는 이상한 풍속이 있었다. 노회 때나 매월 모이는 교직자 월례회에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하는 목사가 언제나 고정되어 있었다. 고정된 설교자는 회기(會期)의 노회 장이다. 그런데 그 해 노회 장은 나이도 40이 넘었고 목회도 상당히 오래 한 목사인데도 설교가 전혀 은혜가 되지 않았다. 목사가 노회 목사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할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말씀을 전하겠는데 늘 핵심이 빠진 뜻한 설교를 했다. 우선 그 설교가 상당히 어려웠다.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어렵게 표현하고 목사들의 현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를 주제로 했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가 자기의 설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노트에 기록해 와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듣는 목사들의 요구와는 너무 많이 빗나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지난 주일에 교회에서 설교한 설교를 그대로 가져 와 설교하는 것 같았다. 노회 목사들이 모였으면 목회를 어떻게 잘 할 수 있는지를 말해야 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목회하고 있으니 위로와 격려가 있는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 목사는 으레 어디서 그런 주제를 가져오는지 ‘성도들의 애국심’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주제로 장황한 설교를 했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설교는 목사에게 참으로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설교가 듣는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고, 관심도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거나 전혀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그 설교는 따분하고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설이 되고 만다. 나는 그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언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연구가 노회 적으로 있었으면 생각했지만 아깝게도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가정의 달 5월에 목사들은 가정 문제, 자녀와 교육 문제들을 설교의 주제로 해서 설교한다. 그런 설교들은 성도들 모두에게 아주 교훈이 되는 설교들이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평신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이의 없이 너무 많은 사상을 설교에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많은 사상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질 때에 그것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현실감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자료를 심방 하면서 찾거나 부 교역자들과 이야기하면서 얻든지 아니면 장로나 성도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정보들을 얻을 줄 알아야 하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사용하여 설교에 반영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성도들이 그 짧은 25분 동안의 시간에 무엇을 듣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지,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성도들에게 하시고 싶어하시는지를 알고 설교하는 중책이 목사에게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고 성도들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설교를 매 주일 하고 있다면 그 목사를 틀림없이 목회 생명이 단축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런 목사를 배척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그를 강단에서 몰아 내실 것이 뻔하다. 아니면 성도 모두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킬 것이다. 이런 설교는 풍요 가운데 말씀의 기근을 가져 와 성도를 영적 아사지경(餓死地境)으로 내몬다.
우리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소위 설교학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런데 그 설교학이라는 과목이 얼마나 엉성하고 배울게 없는지------ 그것을 배웠다고 해서 설교에 대하여 달인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설교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병아리 목사들은 대게 설교를 연설하는 것처럼 한다. 연설 같은 설교는 우리가 교회에 가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설교를 말한다. 평소에 쓰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 평소의 대화와 다른 높은 말소리, 일상 생활에서 쓰지 않는 언어들과 표현 방법, 얼굴 표정, 몸놀림이 동원되는 그런 설교를 말한다. 그야 말로 사람이 이상하게 변해서 소리를 지르고 평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모습으로 줄줄이 연설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거 철에 유세(遊說)하는 후보자들이 연설하듯 하는 설교를 말한다.
강남의 어떤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는 아주 맹랑한 교육을 한 일이 있었다. 부흥사가 되기 위한 교육이다. 교육 과목 가운데 부흥사 목소리 만들기가 있었는데 그게 좋은 목소리를 쇳소리가 나게 만들어 듣기 거북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목사의 목소리가 쇳소리가 나는 것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설교를 힘있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여기서는 아에 그렇게 목소리를 망가뜨리고 새롭게 만들어 성도들을 기만하는 짓을 했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목사들이 변질된 듣기 싫은 목소리를 얻어 얼마나 부흥사로 태여 났는지 모르지만 그런 모조품 부흥사가 우리 한국 교회에 활개를 친다면 우리 목사들은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일상 생활과 다른 목소리와 표현들과 몸놀림은 듣는 성도들에게 설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어 설교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조바심을 일으킨다.
주님의 설교를 자세히 연구해 보라. 그야말로 주님은 연설이 아닌 설교를 하시지 않는가? 늘 하는 일상 대화를 연구해 보라.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과 일대일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라. 대화 식 설교는 배워야 한다. 한경직, 곽선희, 옥한흠, 김삼환 목사님들의 설교를 참고하라. 그 분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분들의 설교와 여러분의 설교 차이를 모르겠거든 여러분의 설교를 녹음하거나 녹화해서 비교 해 보라. 그러면 확연히 구별이 될 것이다. 무엇이 대화 설교 인줄 모르겠거든 텔레비전 드라마 가운데 목사가 나와 설교하는 장면을 탤런트가 연기하는데 그 때 그들의 말하는 것을 자세히 보고 들으면 대화식 설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잘하는 설교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20분 내지 25분 정도면 족하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은혜를 받게 할 것인가?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시간은 20분 정도라고 한다. 20분이 지나면 말이 청취되지 못하고 귓전을 때리며 흘러 버린다고 한다. 60-70년대는 설교를 길게 했다. 친구 목사는 부흥회를 가서 10시부터 시작한 낮 성경 공부를 오후 4시까지 계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미 옛 날 이야기다.
문제는 이렇게 인색하고 짧은 시간에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가 되도록 설교하는가 이다.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점에 대한 설명을 이곳에서 다 할 수 없어 따로 설교 잘하기에서 말하겠다. 좋은 설교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즉 감동과 감화력을 가진 설교를 말한다. 나는 일반 대중 가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에서 설교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운다. 그들은 3-5분 동안 노래를 부르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얼굴과 온 몸에 땀이 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땀이 날 정도로 큰 소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청소년들은 혼절하기도 하고 어른들은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한번만 들은 노래가 아니고 수 없이 많이 들어 알고 있는 노래지만 가수들이 부를 때는 감동되어 울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르면 장난이 되고 만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목소리가 좋아서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노래를 부르는 그들이 그 노래를 부르기 위해 수 천번 노래 연습을 하고 거기에 자기들의 모든 인격과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부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노력으로 감동을 주지 못하면 유명한 가수가 될 수 없고 성공할 수가 없다. 3-5분 동안 사람이 듣고 즐거워하는 노래를 부르는데도 이토록 노력하고 심혈을 기울이는데, 하물며 죄인을 살린다는 목사들이 20-25분 동안 죽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분명 이는 이사야가 말한 ‘개는 개로되 짖지 아니하는 개’와 같을 것이다.(사 56:10)
이 글은 읽는 목사들이 설교를 아주 잘해서 사람들을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란다.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을 받으면 그 교회가 이층이던 지하실이던, 임대 교회든 성전을 가진 교회든, 크던 작던 가리지 않고 그 교회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암사동에 있는 어떤 아파트 단지에서 아주 잘 생긴 목사가 상가를 분양 받아 교회를 개척하고 5,000만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잘했다. 누구든지 그 교회를 처음 나왔을 때는 놀라면서 마음 들어 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린 후에는 다시 그 교회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그 교회는 개척한 후 2년이 넘었는데도 의자가 텅텅 비어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성도들이 듣기 싫은 설교만 골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처럼 하루 종일 설교해도 들을 만한 설교를 할 수 없거든 설교를 길게 하지 말라.
목사들은 설교에 욕심을 가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되 많은 것을 충분히 잘 전하려 한다. 이런 생각은 매우 좋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 설교에 주제를 몇 개씩 설정하고 설교하면 듣는 사람이 혼란스러워 하고 무엇을 말하는지 종잡을 수 없게 되어 머리 아파한다. 목사가 설교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한 복음 3:16절에는 성경 말씀의 모든 중요한 진리가 함께 들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신론이고, ‘세상을’하는 말씀은 인죄론이며,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씀은 기독론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라는 말씀은 교회론 이며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구원론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신론도 기독론도 얼마나 그 범위가 넓고 그 진리가 심오한가. 그런데 목사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선택해서 설교를 할 때 모든 것을 다 말하려 하면 정말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말씀에서 한가지만 설명하고 설교하기도 사실 쉽지 않다. Reuel L. Howe는 수백 개의 설교 테이프를 듣고 성도들과의 토의를 거친 뒤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회중 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목사가 설교에 너무 많은 사상을 포함시키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많은 사상들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들의 삶과 의미 있는 연결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라고 했다.
설교의 주제는 한가지만 해야 한다. 두 가지도 많고, 세 가지는 혼란하며, 네 가지는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가지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머리가 아파 다시는 설교들을 생각을 못하게 한다.
20-25분 동안 설교를 하는데 대지와 소지가 많으면 아주 혼란스러워진다. 설교하는 목사는 설교를 질서 있고 알아듣게 하기 위해 대지와 소지를 설정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설교의 대지와 소지는 원고에만 있어야 한다. 첫째, 둘째, 둘째의 첫째 소지는 ---. 이렇게 설교하면 듣는 사람은 설교 내용 보다 대지와 소지의 숫자를 세는데 신경을 쓸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할 때는 대지, 소지를 말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설교를 해서 앞뒤의 말씀과 내용이 잘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대지는 많으면 세 가지 정도로 하고 적으면 한가지만 해도 좋다. 특히 대지 가운데 소지를 나누고 그것도 모자라 소 소지를 나누어 설교를 한다면 정말 설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혼란스러울 것이며 나중에는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게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혼란스럽게 대 소지를 나눈 설교가가 있다. 그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의 설교문이 그렇다. 그러나 그 목사는 설교할 때 대지, 소지를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듣는 성도들은 그 목사의 설교 원고가 그렇게 복잡하게 나누어진 대 소지를 가졌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은혜를 받는다.
대. 소지를 나눌 때는 반드시 다른 색연필로 표시를 해서 설교자가 혼란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한다.
1.1.16. 싫증이 나고, 지루하며, 재미가 없는 설교
틸리케는 “우리의 설교가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닿지 않고 있으며 선명하지 못하고 지겹기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의사 소통이 안되는 중요한 원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재미없고 지루한 설교는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에 염증을 내게 하며 흥미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가 싫증 나고 재미없는 증거는 아주 쉽게 판단된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대부분 졸고 있으면 바로 그것이 재미없는 설교에 대한 무언의 질책이라고 받아 들여야 한다. 졸고 있는 성도들 깨우기 위해 종을 치고 강대 상을 칠 필요가 없다. 졸리지 않도록 설교를 하면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목사의 설교에 흥미를 잃은 이유를 찾아 개선하지 않으면 밤 낮 잠만 자야 하는 목사가 되고 말 것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학문적인 면에서 전문적으로 공부 한 사람이다. 그럼으로 전문 지식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사의 전문 분야인 신학을 설교에 자주 이용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신학을 말할 때에 목사는 아주 잘난 척하기도 한다. 듣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신학을 아느냐’라는 말투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목사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신학을 말하되 신학이 아닌 성경으로 풀어 말한다. 성도들도 목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알 것은 다 안다. 그들이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을 뿐이지 수 십년 동안 설교를 듣다 보면 신학도 알고 성경도 안다.
그런 성도들을 앞에 두고 목사가 “인죄론이라는 것은. 신론이라는 것은, 신학적인 입장에서 칼빈을 어떻고 루터는 어떠하며, 발트는 어떠하다.”라고 하면 듣는 사람 가운데 속이 뒤틀린 사람들은 “칼빈이고 루터고 발트고 좋아하시네. 빨리 끝이나 내시지”하면서 주보에 안경 쓴 목사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신학 뿐 아니다. ‘무슨 무슨 적(的)’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 철학적, 과학적, 의학적, 예술적등 가급적이면(여기서 나도 그 버릇이 나온다) 적, 적, 쩍, 쩍하지 말라. 그런 전문적인 지식을 아주 평소에 말하는 일상 용어로 바꾸어 알아듣기 싶게 바꾸어 말하는 고도의 표현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용되는 전문 용어에 대한 해박하고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게 일상적인 대화 중에 ‘무슨 무슨 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강단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가 무슨 대 학자나 된 것처럼 연신 ‘무슨 적, 어떤 적’을 찾으니 듣는 성도들은 공부를 하는 것 같아서 머리가 아프다.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 내는 가장 좋은 도구다. 그리고 그 도구는 사람의 말을 통해 나타난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쓰이는 형태의 언어가 바로 설교다.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죄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다. 그리고 설교는 말로서 이루어진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말도 있다. 몸짓으로 하는 말이 있고 음악이나 그림이나 다른 어떤 매체를 이용한 말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언어는 입의 말이다. 설교자의 설교도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여 이루어진다. 그런데 설교자의 말이 분명하지 않고 그 의사 전달이 확실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 잘하기를 위해 특별한 공부가 필요하다. 옛날에는 수사학이라는 것이 있어서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말 잘하기를 배우지 않고 천연적인 말투와 어투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쉴새없이 말 잘하기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그런 학원을 찾아 가 배우고 국어 사전을 옆에 놔두고 말의 바른 사용법을 배워야 한다. 긴말을 짧고 간결하게 하는 법을 배우고 같은 말이라고 상대방에게 감동과 기쁨과 확신을 줄 수 있는 말 잘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상대방에게 바로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성공의 방편이다. 그것은 목사에게도 마찬가지다. 언어로 전달되지 않는 의사를 위해 설교자는 바디 렝게쥐(Body lange)를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 눈 마추기(Eye contact), 표정 관리, 손놀림, 발의 움직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한시간 동안 설교했는데 내용 구성이 잘못되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해 하는 것 보다 설교하는 목사의 종잡을 수 없는 말투는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 준다. 호소적인 설교,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 회개를 말하는 설교, 헌신를 말하는 설교, 사랑의 고백 설교, 위로와 치유의 설교들이 모두 한결 같은 어투로 설교된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가 아니라 연설이다. 설교 가운데 논술, 전개, 사건 설명, 대화, 이야기, 베드로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에 구원을 바라는 화급한 소리, 귀신 들린 아버지의 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대에 주변 사람들의 놀라는 말들이 한결같이 같은 음성과 어휘로 되었을리는 없다. 입체적인 언어 구사법을 훈련하라. 그래서 듣는 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상황이 눈에 보이듯이 설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있어야 할까?
1.1.19. 말하고 그 말을 해석하는 잔소리 많은 설교.
설교의 초보자들은 어떤 말을 하고 그 말을 다시 설명하는 일이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설명하는 말은 대개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한데 결국 그 아까운 20분 동안에 말하고 설명하느라 다른 말씀 전할 시간이 짧아지고 그 설명은 잔소리가 되어 버린다. 설명할 때 쓰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잔소리’ ‘다시 말하면---- 잔소리’ ‘ 이 말에 대하여 누구누구는 이런 설명을 했다----잔소리’, ‘본문에 말씀하신 이 말을 내가 생각해 보니 이런 말이다---- 잔소리’ ‘일테면----잔소리’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설명하는 말을 먼저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만 부득이 설명을 해야 하거든 아주 짧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해야 한다. 설명이 길어지면 하나님의 우리 사랑하심도 잔소리로 듣게 되어 버린다. 그런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은 우리들이 다 아는 이야기를 왜 그렇게 잔소리로 말하는지----졸려 혼났네”라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고 혼이 나가면 되겠는가?
말을 많이 해야 설교자의 의사가 잘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잔소리가 된다. 적게 말하고 강력하며 생생한 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이제까지 한 설교를 다시 설명하고 계속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 짜증을 낸다.
설교자의 확신 없는 말투는 그 정도가 참으로 심각하다. 그런 말투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것입니다"와 ‘같습니다’가 있다. 조그만 신경을 쓰고 듣고 있으면 설교 중에 이런 말들이 거침없이 무수히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되는 것입니다.’, ‘기원하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입니다.’
또 확신이 없는 가정법의 언어사용이 심각하다. ‘인 것 같습니다.", "싶습니다.", ’짐작됩니다.‘같은 말들이 그것이다. 언제부터서 인가 이런 말이 우리 사회에 대 유행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이 꽃은 정말 아름답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의 이런 ’것입니다‘와 ’같습니다‘의 말 버릇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저히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다.
설교자는 언제나 확신이 차고 넘쳐 한다. 여기서의 자기 확신이란 자신의 신념이나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확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설교하는 중에 "---인 것 같습니다.", "---인 듯싶습니다"등의 표현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리성을 흐리게 한다. 이런 말버릇을 가진 목사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기도해야 주신다는 말인 듯 싶습니다.“ 또는 ”기도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인 것 같다'는 완전한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싶다' 역시 관형어 아래에 `듯' `성'들과 함께 쓰이어 추측을 나타내는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추측으로 전할 수가 있을까? 설교자 자신이 `이 말씀은 이 뜻이다'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 메시지는 전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을 설교자가 어정쩡한 표현으로 전하면 받아들이는 성도들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불 확실과 혼란만 가져 올 뿐이다.
일상적인 말버릇의 잘못 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각한 목사도 있다.
‘오늘의 이 말씀을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발트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글쎄요, 이 말씀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생각은 그 뜻이 성령님의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각자 적당히 해석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설교에 전혀 사용할 수 없는 말들이다.
설교에 사용해서는 안되는 말 가운데 ‘--라고, --라는’ 것도 있다. 이 말은 인용격 조사(따옴 자리토씨)로서 분별없이 사용할 때 그러한 폐단이 나온다 예를 들면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항상 기뻐해야 한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라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들이다. 이런 문장에 '---라고', '---라는' 등등의 인용격 조사가 사용되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한다라고"는 "---한다고"로 바로잡고, "---한다라는"은 "한다는"으로 바로잡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즉 ‘성경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 와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상의 경우는 거의 습관에서 울어나는 부작용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자의 단순한 분석이나 지식의 전달보다는 좀더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인용하려 한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럴 때는 이상과 같은 인용격 조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습관화되어서 필요 없는 곳에서까지 이러한 말들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세세한 언어사용 방법까지 공부하고 생각하며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 한국말의 토씨와 형용사와 접두어와 접미어의 사용이 너무 어려워 여기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정확한 언어 사용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듣는 사람은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인해 이질감을 느끼게 되고 은혜를 받는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설교자는 최소한 언어의 사용에서 이질감을 유발하지는 말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설교자는 쉬운 말을 사용하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므로 단호하고 결정적인 어휘를 구사해야 한다. 그리고 문장을 짧게 해야 같은 말이라도 힘이 있고 듣는 사람이 잘 알아듣는 효과를 가져온다. 한 문장에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하였습니다 만, 같은 접두어를 계속 사용하면 설교의 진의가 흐려지고 혼란스럽게 된다.
목사가 외국어를 말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말이 좋기는 하지만 우리말로 설명이 안 되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랑이라는 말이 그렇다. 천국이나 지옥이나 낙원이라는 말도 그 중에 속한다. 사랑이라는 말의 차이는 이미 잘 알 것이다. 우리 성도들은 천국이라는 말은 천국으로 안다. 그러나 지옥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는 불교의 지옥을 연상하고 낙원을 말하면 천국과는 조금 다른 세상으로 천국 가기 전에 임시로 머무르는 세상 정도로 안다. 케도릭식 사고 방식이다. 이럴 때 목사는 그 말을 설명할 필요가 있고 설명을 위해 그 말의 원래의 단어를 사용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나 라틴어나 영어나 독일어나 다른 외국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 구태여 그것을 말하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외국어들은 주석에 얼마든지 나와 있는 단어들로서 누구든지 쉽게 찾아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요 단어의 해석이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상한 외국어를 말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성도들의 비웃음을 살 우려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이 외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목사와 그렇지 못한 목사를 너무 잘 구분한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즉 신학대학원의 교수가 영어를 말하고 간단히 설명하면 거부감을 느끼지 않지만 영어를 못하는데 영어를 잘하는 것처럼 설교 노트에 문장을 우리말로 기록해 말하고 설명한다면 비웃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 목사라고 생각해서 미국 사람이라도 오게 한다면 얼마나 망신을 당할까? 외국어는 가급적 안하는 것이 좋다. 우리 한국말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강단에서 누구든지, 그가 비로 신학교의 교수로서 영어를 아주 잘한다고 해도 안하는 것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덕이 된다.
내 조카는 아주 큰 교회를 다닌다. 그 교회의 부목은 미국의 어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교육학 박사를 받았다. 그 목사는 설교 중에 영어를 잘 사용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외국인을 위하여 영어로 설교하는 목사가 있다. 그 목사는 별 말이 없는데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한 성도가 듣다못해 잔소리를 했다. 그 부목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식한 단어 사용이 온 교회에 널리 널리 퍼졌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목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받았다는 박사 학위에 대해서도 이런 말 저런 말이 많았다. 그가 잘못 사용한 단어가 누군가에 의해 그의 박사 논문까지 검토하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리고 박사 논문을 본 그 성도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논문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꼭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 목사는 10년도 더 넘게 있었던 그 교회를 사임했다.
성도들은 목사의 한가지 허물을 목사가 가진 모든 허물이라고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안해도 되는 외국어를 해서 그런 부끄러움을 자초하겠는가? 우리가 우리말도 잘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옛 날에는 말을 잘하기 위해 수사학이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 수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있는가? 차라리 외국어를 할 것 같으면 그만 두고 말 잘하는 방법을 가르친 책이나 사서 탐독하는 게 훨씬 목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설교를 성도들은 듣기 싫어한다. 위대한 설교가라고 이름이 알려진 어거스틴도 필요 없는 말을 반복했다고 자신의 설교 이론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그가 남긴 '크리스마스'라는 설교에서 동일한 대명사를 한 문장에서 12회나 사용할 정도였다. 이런 반복되는 말은 설교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복잡하게 하며 지루하게 만든다. 더욱이 설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을 반복하는 목사도 있다. ‘에---에---’, ‘그리고, 그리고’, ‘일테면, 일테면’, ‘말하자면, 말하자면’, ‘에 또, 에또 가서는’, ‘그러므로, 그러므로’ 따위의 설교에 전혀 불필요한 말들이다. 설교자가 설교할 때는 그렇게 필요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므로 반듯이 실제 설교를 녹음해서 설교의 언어 사용에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을 고쳐야 한다. 이런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말의 사용은 듣는 성도들의 신경을 매우 거슬르게 하며 혼란스럽게 해서 설교가 은혜가 되지 못하게 한다.
1.1.23. 복잡한 말이나 고어를 자주 사용하고 해설하는 설교
설교자가 당하는 유혹 가운데 아는 체하려는 것이 있다. 이 유혹을 떨어버리지 못하면 필요 없는 유식(有識)을 자랑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말이나 고어, 외국어들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따먹은 동산의 과일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무엇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가급적이 아니라 필수적으로 듣는 성도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들을 사용해야 한다. 꼭 써야 할 전문적인 용어들은 아주 쉽게 풀어 아무 저항 없이 듣도록 요리해서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와 듣는 성도 사이에 의사 전달이 안되면 그 설교는 실패한 설교다.
너무 심한 사투리와 지방 방언을 사용하는 것은 듣는 성도들에게 이질감을 불러일으키며 심한 경우에 협오 감을 준다. 그러나 가벼운 사투리와 호감이 가는 방언은 오히려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다.
반복 설교와 예화를 하지 말라. 똑 같은 자기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라.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싫증이 난다’는 말이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특별히 절기 설교는 그 내용이 모두 같고 짧게 해야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언제가 한 설교를 대충 대충 손보아서 설교를 재탕 삼탕한다. 성도들은 아무 표정이 없이 듣고 있지만 알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 전하는 것은 잘 듣는다. 그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다윗의 이야기 같은 성경 인물에 대한 이야기와 사건의 이야기들은 수 백 번을 들어도 들을 수 있는 진리가 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와 예화는 절대 그렇지 않다. 수 십년 전에 했던 예화를 성도들은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세 번만 자기 이야기를 하면 백 번도 더 많이 들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생각할 뿐 아니라 ‘우리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하지 않는 개으르고 나태한 목사’, ‘우리들을 무시하는 목사’라고 낙인을 찍는다.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고 듣는 성도들이 관심이 크기 때문이 아니라, 올바르게 전한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저항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겼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설교가 단호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현상을 가져 왔다. ‘여러분 새벽 기도회에 나와 꼭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시간과 장소 구별 없이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정성을 다한 11조를 받으실 것입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너무 바쁘신 분들은 언제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까? 요즘 시중에서 파는 성경 녹음 테이프를 사서 차를 타고 가시면서 듣도록 하세요.’ 이런 말은 수 없이 많다. 다 나쁨 말은 아니지만 시류(時流)에 편승한 목사의 어정쩡한 자세가 잘 나타나는 말들이다. 목사가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바른 태도라고 생각한다. 미리 겁을 먹고 개으르고 나태하며 자기 변명을 일삼는 성도들과 타협점을 찾아 흐리멍덩한 설교를 자꾸 하면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으실 뿐 아니라 성도들도 싫어한다. 설교가 치유적이기도 해야 하겠지만 단호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도전적이고 심령을 뒤집어 엎는 설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작금에 와서 목사들이 아주 즐겨 하는 설교는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설교다. 그런데 그 설교들이 복음이 아니라 다분히 ‘아첨 설교’가 많다. 아첨 설교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목동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고향 후배 한 가정이 합세를 해 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 고향 후배 부부는 여의도에 있는 어떤 아주 큰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부인은 그 교회의 부 구역 장이었다고 해서 더욱 더 고마웠다. 한 사람 일군도 귀한 개척 교회에서 그렇게 큰 교회의 부 구역 장을 출신 집사를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부부를 즉시 집사로 임명하고 구역이 확장되었을 때 한 구역을 맡겨 구역 장이 되게 했다. 그런데 구역 장이 된 여 집사가 전혀 구역 일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구역 관리를 위한 심방은 고사하고 구역 예배를 드리는 금요일이 되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나나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구역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를 기도시키면 안된다고 신신 당부를 했다. 몇 번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수요 예배 드릴 때 그 집사에게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기도를 하지 않아 눈을 떠보니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그리고 더욱 더 가관인 것은 성경을 읽으라고 하면 성경을 찾지 못해 읽지 못하는 것이다. 완전히 초신자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부 구역 장으로 임명했을까? 나중에 기회가 있어 물어 보았다. 그 집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그 교회에 등록 한 후 몇 달 후에 구역을 맡은 목사가 부 구역 장으로 자기를 임명하면서 ‘자매님은 정말 열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열심을 가지고 교회 일을 안하면 어쩝니까? 부 구역장을 하십시오“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교회를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무 것도 몰라 거절했는데 담당 목사가 다시 말하기를 ”다른 사람도 알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소리 말고 목사인 내가 하라는 데로 따라 하면 잘할 것입니다. 자매님이 교회 일을 안한다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할 만한 성도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일이 별 것이 아니로구나 생각되기도 하고 따라 다니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데 못할 것이 무엇인가 싶어 허락을 했더니 선물도 많이 주고 사람들이 부 구역 장님이라고 불러 주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집사가 마지막 내게 한 말은 “내가 꼭 성경을 일고 기도를 해야 하나요. 목사님만 따라 가면 되고 누가 기도하면 아멘 하면 되지 않아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감투를 씌어 자기 교회 교인을 삼으려고 그런 수작을 해서 사람 병신을 만들다니. 내가 만나 본 그 교회 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상당히 교만했다. 마치 자기가 그 큰 교회를 만든 것처럼 생각되는지 우리 같은 작은 교회 목사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고 목사를 자기 교회 주일학교 교사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몇 번 경험하고 아에 상종 못한 인간들의 집단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성도들에게 아첨하는 목사들, 아첨 설교, 초신 자에게 그렇게 믿는 것은 아주 잘 믿는다고 칭찬하여 그 심령을 죽이는 목사들이 있다. 무엇을 얻자는 짓인가? 잘못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에 진노하시지 않는 너그러운 분이시라고 거짓 말을 하고, 개으르고 나태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성도들을 앞에 놔두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장담한다. 성도들의 작은 헌신에 터부니 없는 축복 약속,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 것만도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과장된 칭찬들, 주님의 이름으로 가짜 싸인이 된 근거 없는 약속들, 도저히 이루어지지 않을 공수표의 확신들이 모두 목사가 가진 아첨의 목록들이다.
바른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바른 말씀을 가르치지 못하면서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면 성도들은 처음에는 좋아할 줄 모르나 양들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 결국 아첨꾼 목사를 알아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런 목사 곁은 떠난다. 성도들에게 아첨해서 교회가 성정하고 부흥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바른 복음을 전하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성장하도록 해 주셔야 바른 교회가 된다.
목사는 성도를 사랑하되 두려워 말며, 성도들을 양육하되 죄와 의와 심판을 가르쳐 양육하고, 성도들이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도록 돌보는 그런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설교했다고 쫓겨나면 이슬과 바람을 마시면서라도 잘 살 수 있게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실 것이다.
1.1.28. 성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비유나 말의 표현
내가 개포동에서 목회를 할 때 있었던 일이다. 설교를 마치고 성도들이 돌아가는데 한 집사가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 버렸다.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내가 설교를 하면서 무슨 실수를 했는가 해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설교를 잘못한 것 같지는 않았다. 본인에게 왜 기분이 나빴는지 물어 볼 수도 없고 며칠 동안 심란해 하다가 함께 우리 교회를 나오는 그 언니 집사에게 왜 기분이 상했는지를 알아보게 했다. 언니 집사가 며칠 후에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해 주었다. 지난 주일에 설교 가운데 사람을 더러운 벌레로 비유해서 기분이 아주 나빴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를 하는 목사가 어떻게 사람을 벌레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주일에 내가 선택한 본문은 시22편인데 6절 말씀인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는 말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때 그 처지가 벌레와 같이 비참해 지셨다는 말씀이다. 내가 이 말씀을 인용하여 한 말씀은 “주님께서 벌레와 같이 되셨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벌레와 같이 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벌레와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벌레가 아니라, 그 보다 더 못한 비참한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말에 기분이 상했다고 했다. 사람을 벌레로 비유했다는 것이다. 오해도 이만 저만한 오해가 아니다. 그 여 집사는 서울에 있는 어떤 유명 대학교의 미술 대학을 졸업했고 남편은 어떤 상선 회사의 중역이었다.
그 여집사가 교만해서인지 아니면 내 설명이 부족해서인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성도들은 자기들을 비하하는 듯한 비유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설교들을 듣기 싫어한다. 이런 자존심이 훼손되었다는 성도들의 생각을 나는 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것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세상에서 어떤 처지에 있던지 간에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할 죄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점점 더 성도들은 오만하고 교만하여 자기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 그럼으로 같은 말씀을 설교할 때에라도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선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같은 말이라도 ‘아’와 ‘어’가 다르므로 자극적이고 기분 상하지 않는 표현을 해서 충분히 말씀의 진의(眞意)를 전달할 수 있는 실력과 성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교회의 집회를 참석했다. 그런데 설교하는 목사가 유치하고 저속한 비유를 말해서 몹시 기분이 상해서 그 자리에서 빨리 나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을 정도로 언짢은 마음을 달래야 했다.
그 목사가 한 비유는 이런 것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누나의 젓꼭지를 보고 싶어서 목욕하는 누나를 훔쳐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것이 그렇게 보고 싶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고 싶던 여자의 젓꼭지를 장가를 가고 보니 날마다 볼 수도 있고 만지고 빨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 목사는 어렸을 대에 그런 호기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자기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런 비속하기 짝이 없는 말을 해서 듣는 사람들의 무엇을 자극하려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 들어 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첨단적인 예화나 하고 있는 것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어떤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원도 어디를 다녀오는데 그 깊은 절벽에서 차가 뒹굴었어요. 아우성이 터지고 사람들이 죽어 너부러졌습니다. 창자가 튀어나온 사람, 머리가 박살 난 사람, 손과 발이 절단된 사람-------”
우리 동네에 있는 교회를 갔더니 목사가 월남에 선교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월남 전쟁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말도 못합니다. 사람이 그냥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이 밴 임산부를 죽였는데 아이를 엄마 뱃속에서 꺼내서 땅에 떼기를 처서 죽이고 그것을 다시 엄마 자궁에 밀어 넣었다고 합니다. 또 땅에 대창을 수 십개 세워 놓고 그 위로 사람을 집어 던져 창자가 터지고 뼈가 으깨어져 죽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살인자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있는 성도들이 한없이 불쌍했다.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 하나님의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새 힘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아 온 것이지 살인자의 악귀(惡鬼) 같은 모습을 이야기 듣고 싶어 온 것이 아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다'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들. ‘아멘을 크게 해야 축복을 받습니다’
언젠가 부터 우리 한국 교회는 이런 설교의 분위기 맞추기 화답이 성도들에게 강요되어 왔다. 그런 화답을 유행시킨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고 이것을 본 많은 목사들이 그 교회와 같아지기 위해 모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화답 말이 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런 화답하는 말은 성경 말씀에 있다. 민수기서 5장에서 27장까지 모세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백성들이 순종하며 복종하겠다는 의미로 아멘이라는 말을 화답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오늘 날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아무 생각도 없고 의미도 마치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난발되고 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좋은 말들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해도 잘못 쓰면 오히려 병을 키우는 것처럼 좋은 말도 잘못 사용하면 성도들의 거룩한 양심을 더럽히고 어리둥절하게 하여 신앙적 방향 의식을 잃게 할 것이다.
그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병 고쳐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은혜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능력 주시고 권능 주심을 믿습니다” “아멘”
심지어 나는 이런 말까지 들었다. 설교 도중에 목사는 이런 예화를 했다.
“도적이 한 밤 중에 복면을 하고 이웃집의 담을 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축구팀이 오늘 축구를 합니다. 꼭 이기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믿는 대로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아멘” “아멘” “아멘” “아멘”이라는 말들이나 다른 말들의 홍수 속에 설교가 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개탄스럽다.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아멘”을 하게 한 것은 “주님의 말씀이 진실하시니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의미가 있는 신앙 고백이요 순종 맹세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순종과 복종의 의미가 없는 “아멘”이 대 유행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거룩한 말들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기원합니다' 이런 사람의 소원이 가득 담긴 말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너무나 간절한 성도들의 소원이기 대문에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들어 주셔야만 하는 것처럼 설교자에 의해 유도되고 있다. 그래서 많이 축원을 받고 ‘믿는다’는 말과 ‘기원한다’는 말들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설교자에 의해 유도되는 이런 말들은 복음도 아니며 설교도 아니다. 오로지 말장난에 의해 유도되는 극도로 유치한 자기 최면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강단에서 설교자에 의해 자행되는 자기 확신의 말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고 성도들의 신앙을 오도(誤導)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아무 생각도 없고 아무런 느낌도 없이 오로지 목사에 의해 유도되어진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이라는 말들을 큰 소리로 외쳐야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되고 그렇게 큰 소리만 지르면 하나님께서도 꼼짝 못하신다는 사단의 말장난에 성도들이 놀아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망말이 기복 신앙을 만들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우상 종교로 타락하게 만든다.
믿음이 좋고 칭찬을 듣고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받는 사람은 이런 말들을 크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충성하는 성도들이다. 지각이 있는 성도들은 이런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하는 목사의 설교에 실망한다.
이름을 말하면 알 만한 유명 목사는 설교 가운데 꼭 한 번씩 “죄송합니다.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다. 듣고 보면 죄송한 말도 아니고 잘못된 말도 아니다. 아마 자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것 같다. 그렇게 죄송한 생각이 들면 안하면 된다.
설교는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목사를 시켜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사는 많이 연구하고 준비해서 설교를 하지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잇는 것이다. 물론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잘못된 말이 아니며 죄송한 말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 목사는 언제나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제가 최전방에 잇는 군인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이런 식이다. 왜 이렇게 말해야 하는가? 내가 듣기에는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가를 듣는 성도들에게 말하기 위한 것 같았다. 겸손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살면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서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죄송하다는 말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면 듣는 다른 성도들도 이미 그렇게 그 말을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죄송하다고 사죄를 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짓이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인 것이다. 성도들은 이런 모순되고 강요된 겸손과 잘못을 고백할 수 없는 위치에서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짓은 하나님 앞에서도 좋은 짓이 아니다.
목사의 큰 고민 가운데 한가지는 설교다. 설교를 하기는 하는데 듣는 성도들이 도무지 감동이나 은혜를 받지 못한다면 정말 답답하고 괴롭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마지막 카드로 내놓은 이유가 목사의 설교에 대한 비판이다. 도무지 목사의 설교가 은혜가 안되어서 떠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목사는 기가 팍 죽게 꼼짝 못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정이 든 성도라고 해도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기 위한 노력으로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사서 본다. 나도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많이 사 보았다.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 책을 사서보고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기 위해 설교 책을 사 보는데 기독교 서적 가운데 설교 책에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하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 한가지 설교가 지천으로 날려 있는 곳이 있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설교만 취급하는 곳도 있고 어느 교회나 목사 개인 홈페이지에 많은 설교들이 올라 와 있다. 아마 그 분량을 책으로 계산하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해 보니 인터넷에 올라 있는 유명 목사의 설교는 얼마나 내용이 풍부하고 그 문장과 예화가 적절하며 풍요로운지 경탄할 만했다. 그런 설교들은 내가 수 십일씩 기도하고 주석이나 다른 참고서들을 보면서 몇 시간씩 원고를 정리하여 완성한 설교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 또 한번 나의 실력 없음과 감화력 없음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수 십번도 더 내가 준비한 설교를 버리고 유명 목사의 설교를 마치 내가 만든 설교 인양 자신 있게 전하는 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버릇은 교회가 아주 어려운 시험을 당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나도 시험을 당하고 성도들도 시험을 당해 피차에 상처가 많았을 때에는 어떤 설교를 해도 시험이 되었다. 할 수 없이 나는 우리가 가진 문제와 전혀 상관없는 설교를 하기 위해 유명 목사의 설교 책을 보고 그대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설교에 성도들이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부터 남의 설교를 내 설교로 설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설교 책을 그대로 강단에 가지고 갈 수는 없는지라 원고지에 그 설교들을 적어 가지고 강단에 올라 가 설교를 했다. 그러다가 인터넷의 설교들을 보니 이것은 원고를 작성하지 않고 그 설교들을 있는 그대로 인쇄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라 책을 보고 원고를 쓰는 일이 번거러워 인터넷 설교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남의 설교를 내 설교로 사용하는 빈도 수가 늘어나면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게 되고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인 설교를 앵무새처럼 흉내를 내는 모창 설교자가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모창 설교를 처음 할 때는 좀 괴롭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래서 그 설교가 우리 교회 현실에 맞도록 고쳐 설교했다. 그러나 조금씩 편의주의적 타성이 붙였다. 나중에는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어졌다. 그리고 괴로움도 없어졌다. 오히려 첨단적인 목회를 한다고 스스로를 미화했다. 나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목회 잘하고 설교 잘하는 목사의 은혜로운 설교를 우리 성도들에게 먹인다고 자위(自慰)했다. 사람이, 목사가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 갔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되더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모방하거나 다른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거나 또는 그 설교를 한자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선포하는 것이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설교에 대한 몇 가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①.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되 그 설교를 녹음기 재생하듯 따라 하지 말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유명 목사들의 설교는 많은 성도들이나 성숙된 성도들을 위한 설교가 대 부분이다. 그리고 그 분들은 목회를 아주 오래 하신 분들로 목회 경험이 풍부하며 그런 목회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연륜과 목회 경험이 없는 젊은 목사들에게는 그 설교가 설교를 하는 목사나 듣는 성도 모두에게 맞지 않는다.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는 한가지 아주 위험한 착각을 하고 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유명 목사의 설교를 자기 설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착각이 그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도들은 자기 목사의 설교 수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자기 목사에게 걸맞지 않는 설교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주 쉽게 알아차린다. 몇 번은 속고, 몇 번은 알면서 넘어 가지만, 계속되면 무시하고 멸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의 것을 훔쳐 자기 것인 양 속여 먹이는 목사를 배척하던지 교회를 떠날 것이다. 인류 호텔의 요리사가 만든 요리를 요리사 견습생이 손님들에게 가져가서 “이 요리는 바로 내가 만든 것입니다.”라고 속이면 싫어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②.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잘 알고 난 후에 다른 유명 목사의 설교를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후 좌우 위 아래로 많이 알고 자세히 알고 나면 다른 목사의 설교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요리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이어 온 설교자들의 설교는 어차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내가 아무리 새롭게 설교를 작성해서 선포한다고 해도 그 근거는 성경 66권에 있는 것이며, 어느 때에 누군가에 의해 선포된 말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같은 본문, 같은 내용의 설교를 했음에도 유명 목사의 설교에는 힘과 감동이 있는데, 내 설교에는 그것이 없다면 감동이 없는 설교를 한 목사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인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말씀은 그렇게 전하지만 실제 생활은 전혀 그렇지 않는 이중적인 인격을 가졌다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고지 곧 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목사의 외식된 생활을 성도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는 그 설교를 준비하면서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서 유명 목사의 설교든지 무명 목사의 설교든지,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면 얼마든지 진리를 정확히 선포할 수 있는 말씀의 실력과 영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일과 신령한 기도 생활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 모방 설교는 영양은 높지만 싸늘하게 식어 그 맛을 잃은 음식을 성도들에게 먹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이 저런 좋은 설교를 할 수 있는 실력이 없는데 저런 설교를 하는 걸 보니 설교 준비도 안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목사가 가는 길이 뻔하다.
③. 듣는 성도들의 수준에 맞도록 설교해야 한다.
유명 목사의 설교라고 해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듣는 사람의 신앙적 수준에 따라 은혜를 받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목사가 자기 교회 성도들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수준을 안다면 자기가 아닌 다른 목사의 설교를 있는 그대로 선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할 경우에는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맞도록 설교를 다시 만들어 선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용하면 처음에는 모를지 모르지만 나중에 그 설교가 자기 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다른 목사의 설교 인줄을 알게 되고 결국 녹음된 설교를 하고 있는 목사를 배척하게 될 것이다.
토요일 오후에 무슨 일로 후배 목사를 찾아갔다. 마침 목사가 없어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집배원이 편지를 가져왔다. 그가 두고 간 편지는 어떤 곳에서 보낸 인쇄물로서 큰 봉투에 담겨 있었다. 목사가 돌아 왔다. 그는 내가 건네주는 그 편지를 받아 아무렇게나 봉투를 ?어 내용물을 흘끔 살펴 본 뒤에 책상 위에 던지면서 중얼거렸다. “인간들이 언제나 이렇게 늦게 보낸단 말이야----” 나는 그가 왜 그렇게 그 편지에 기분이 나빠하는지 몰랐다. 그는 나를 잠시 기다리게 하고 몸을 씻으려 세면실로 갔다. 그 사이에 나는 그가 그렇게 기분 나쁘게 받은 그 편지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놀랍게도 이름을 말하면 누구도 알만한 어느 유명 목사의 두 주일이 지난 커다랗고 굵은 글씨로 기록된 설교 원고였다. 그것은 분명 그 유명 목사의 설교를 참고하기 위한 것은 아니였다. 설교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설교 원고였던 것이다. 후배는 그 원고를 자기 교회에 맞도록 손질할 생각이었는데 너무 늦게 도착을 해서 시간이 없다고 투덜거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내일 주일은 마침 부활 주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손질을 해도 그 원고의 설교는 부활 주일에 할 수 있는 설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칼빈은 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실 때에, 모여 있던 백성들의 귀에 하늘에서 직접 천둥소리로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직접 모습을 들어내시고 백성들에게 그 음성을 발하여 말씀하신다면 그 앞에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목사를 시켜 그때 그 장소에 모이게 한 성도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는 설교의 깊은 의미도 모르고 설교를 말씀하게 하신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성도와 아무 상관없는 설교를 시간 때우기나 헛된 칭찬을 받기 위해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사용한다. 이 일에 대하여 어떤 목사는 ‘돈만 내면 주일 설교를 위하여 수 편의 설교를 파는 선악과가 우리의 땅에 나타났다’라고 말했다. 이런 일에 설교자가 맛을 들이게 되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설교자가 아니고 남의 설교를 읽는 단순한 대독자(代讀者)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무슨 목사 모임에서 내가 이런 놀라운 일을 보았다고 했더니 젊은 목사들이 “목사님, 그게 뭐 잘못된 거예요? 목사들이다 알고 있는 일인데----. 우편으로 배달되는 설교는요 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뿐이에요. 그런 좋은 설교를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해 주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리고요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아요”라고 했다. 정말 우리 한국 교회의 미래가 암담해 지는 사고방식이 아무 여과(濾過)도 없이 만연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설교자는 주님께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 24:45)라고 말씀하신 말씀에서 그 사명을 찾아 야 한다. 주님의 자녀들에게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하는 직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이런 귀한 은혜를 다른 사람이 만든 설교를 가져다가 강단에서 대독하는 일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짓이다. 이런 목사는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 책망 받은 개으르고 나태한 종이다. 설교하는 목사가 모래 위에 집을 세우듯이 무성의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강단을 지키려 하는 것이 어떤 잘못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정말 개탄할 일이다. 이렇게 상당수의 한국 목사들이 소명을 받은 자로서의 임무 수행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설교의 신성한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설교를 위한 땀과 눈물과 살아 있는 생명이 없다. 오히려 설교를 목회의 한 수단으로 삼거나 자기 인생 목표 달성 방편으로 삼아 성도를 이용하려 드는 목사가 많아진다. 바로 이런 목사들이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한다. 설교자의 땀과 눈물과 피로 성도들에게 말씀의 은혜를 끼쳐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하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미 완성된 누구의 설교를 우편으로 파는 상혼(商魂)이 목사의 심령을 무사 안일주의로 빠지게 하고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상업적으로 만들어 진 설교’를 들으면서 그렇게 소중한 하나님과의 만남과 말씀의 은혜를 희생당하고 있다.
인터넷은 모든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류 최고의 문명의 이기(文明의 利器)다. 목사가 인터넷을 잘 이용한다면 목회에 많은 도움을 받을 거이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가 그렇듯이 잘못 사용하면 목회를 그릇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인터넷을 잘못 사용해서 목회의 질적 저하를 초래하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설교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인터넷에 실려 있는 설교를 그대로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모든 기독교 싸이트에는 한결같이 설교 게시판이 있다. 그곳에는 각종 설교가 올라 있고 그것도 모자라 설교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싸이트에 연결해 주기도 한다. 그 연결 고리를 찾아 가 보면 수천 수만 가지의 설교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고 그 설교들을 다운 받아 프린트해서 즉시 사용할 수 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전하는 전달자의 인격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듣는 성도들의 상황과 형편에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다른 목사들이 선포한 설교를 마치 자기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 인양 설교를 한다면 아무래도 무엇이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마치 슈퍼마켓에서 잘 만들어진 만두를 가지고 식구들에게 먹이면서 '엄마의 정성이 깃들인 만두'인양 말하는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리고 설교는 설교하는 목사가 기도 많이 하고 말씀을 깊이 연구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자녀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찾아야 하고, 설교 듣는 성도들의 형편과 입장이 깊이 고려되어 그 시간에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씀을 전하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고 설교 듣는 성도들의 심령에 믿음의 확신을 주고 생활에 활력을 넣어 주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한 번의 설교에 자기의 모든 인격과 사랑과 믿음과 열정을 담아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특권이며 큰 축복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하고 아름다운 특권을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독해서 스스로 낡은 녹음기 같은 짓을 한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설교에는 설교자의 영혼과 성도들의 생명의 부딪침이 없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설교를 듣는 성도에게 전혀 현실감이 없고, 영적인 감동도 있을 수 없고, 인격적인 감화력도 없는 거저 귓전을 스쳐 들리는 설교일 뿐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나는 서울의 모 교회의 집사인 조카의 말은 우리 목사들에게 하나의 경고로 들렀다. “목사님들이 다른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를 카피해서 설교하면 성도들이 모르나요? 우리 목사님이 저런 설교를 하지 못하시는 분인데 갑자기 저런 설교를 하는 게 이상하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거리지요. 물론 실망도 하구요”
나도 몇 번인가 다른 목사의 설교를 대독하면서 설마 우리 성도들이 대독 설교 인줄을 모르겠지 라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조카는 여지없이 대독 설교 목사의 그런 심리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사가 대독 설교를 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①. 유명 목사가 그렇게 설교해서 목회를 잘하게 되었으니 나도 같은 설교를 하면 목회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②. 설교를 아주 잘하는 목사의 설교를 내가 대독했을 때 우리 성도들도 그 교회 성도들처럼 큰 은혜를 받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③.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④. 아무리 정성 드린 설교라 해도 유명 목사의 설교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아무 유명 목사의 유명 설교라고 해도 대독 설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듣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안된다. 그것은 유명 목사의 설교가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의 교회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목사의 대독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몇 번은 속아 넘어 가겠지만 얼마 되지 못해 설교 준비하지 않는 자기 목사의 약삭빠른 짓을 알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내가 대독 설교를 하는 목사라는 것을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려 나갈 때 사울의 갑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물 맷돌 던지기로 골리앗을 물리쳤다. 목사들은 맞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갑옷을 입고 잘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 때문에 자기 발전이 안되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웃음을 자아내는 피에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처음에 인터넷이 마약과 같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을 쉽게 해결하려는 목사는 한 두 번은 양심의 가책도 느낄 것이고, 이런 일이 자기 발전에 큰 해악 된다는 것을 알고 자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입맛 드린 쉽게 하는 버릇이 발동해서 기도 대신 컴퓨터 앞에 앉게 되고 펜을 들어 원고를 쓰는 대신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두리게 될 것이며, 그리고 순식간에 글자 화되는 프린트기 앞에서 ‘하나님, 오늘은 너무 바빠 할 수 없이 다른 목사의 설교를 참고합니다. 그러나 다음 주일 설교는 기도하고 주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 설교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바쁘고, 또 그 다음 주일에도 바빠서 프린트 앞에서 기도하다가 나중에는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의 달란트다‘라고 이상한 감사 기도를 한다. 결국 인터넷 설교에 중독이 되어 이성적인 성경 연구도 없고,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도 없으며, 성도들을 살피는 발걸음도 생략된 체 온통 인터넷의 모든 지식과 정보와 설교들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엄청난 오류에 빠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며 자기를 합리화할 것이다. “나는 정보화 시대에 걸맞은 최첨단의 목회를 하고 있다. 일일이 책을 보고 지식을 얻어야 하는가? 그것은 한계가 있다. 인터넷에는 한계를 모르는 많은 지식이 있지 않는가? 노트 북 컴퓨터 한 개와 인터넷에서 내가 필요한 지식을 잘 찾아내는 검색 기술만 있으면 모든 지식이 다 내 것이다. 목회는 이렇게 첨단적으로 해야 한다. 설교도 마찬가지다. 착각하지 말라. 자기와 하나님을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생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지식을 계시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들을 우리들은 선지자라고 한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인터넷이 아닌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 그대로 죄인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해서 하나님이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이 오셔서 죽으셨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목사와 성도들에게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우리 모두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것은 ‘우는 자와 함께 울며,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며, 죄인들과 함께 하며, 이곳 저것을 다니면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며, 밤을 세워 기도하는 것이며, 죄인을 사랑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도 없고, 그 말씀을 해석 책(주석)에 대한 탐구도 없고, 성경에서 감동과 감화를 받음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기도도 없고, 성도들과 함께 아파하는 아픔도 없고, 성도의 즐거움에 동참하여 기뻐하는 기쁨도 없고, 이웃을 사랑하여 헌신 희생하는 섬김도 없이 오로지 인터넷을 구경 다니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것인가? 결국 첨단이라는 미명 아래 그리스도를 위한 조그마한 헌신도 거부하고 있는 첨단 목사와 성도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기대하실까?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한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집고 넘어가야 하겠다. 강남에서 부목으로 있다 강동 어디에 교회를 개척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어떤 목사는 미국의 유명 목사 설교를 많이 참고하여 설교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그 목사는 많은 설교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도 그런 말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설교를 잘한다. 즉 유명 목사의 설교를 모방해도 설교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설교를 대독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방 설교를 말한다.
모방 설교는 어차피 설교하는 모든 목사들이 피할 수 없는 설교의 한 형태다. 주님의 설교와 사도들의 설교와 선지자들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방 설교는 창조적인 설교 보다 위험성이 더 적고 안전하다. 그러나 모방 설교가 성도들에게 새로운 말씀으로 은혜 되게 하려면 고도의 무엇이 필요하다. 모방 설교에서 필요한 고도의 무엇에 대해서는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좋은 설교’에서 설명하겠다.
내가 아는 어떤 목사는 설교 가운데 유명인 들의 말을 많이 인용한다. 그 분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없고 자기 생각도 없이 오로지 유명한 사람들이 말만 있는 느낌을 가진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명언이나 금언들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설교를 기름지게 하고 짧은 말 가운데 가장 많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말의 인용이 크게 잘못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이 있다. 설교는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데 포인트가 맞추어져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들이나 교회를 극도로 핍박했던 자들의 말이 설교에 유익이 도는 말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불타의 말도 등용하고 공자 맹자의 말은 아주 즐겨 쓰이는 말들이 된다. 나와 동기 동창인 목사는 너무나 공자 맹자를 설교 가운데 많이 이용해서 공자의 이야기를 하는지 맹자의 이야기를 하는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그는 어려운 한문을 말하고 풀이하는 것을 아주 즐겼다. 그런 그의 심중에는 아는 자의 교만이 가득했으며 자기가 아는 것을 모르는 성도들에 대한 멸시가 있었다. 그는 결국 퇴계로 어떤 교회에서 시무 하다가 경기도 어디 시골 교회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을 전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으려 온 사람들에게 복음이 아닌 다른 무엇을 말해서는 안된다. 유명한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는 명언집(名言集)의 여기 저기를 찾아 필요한 단어를 골라 가며 인용하지 말고, 그 사람이 그 말을 하게 된 동기와 이유를 충분히 알아 써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인용(引用)하여 복음을 잘 설명하려면 그 작품 전체를 알고 인용해야 한다. 작품의 한 구절을 떼어 내서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인용의 신중 여하를 듣는 성도들이 결국 알게 된다. 인용에 대해서는 예화 사용하기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1.1.36. 성경에는 무식하면서 세상 지식을 다 가진 것처럼 말하는 설교.
어느 목사 장로 기도회에 친구 목사가 강사로 초청을 받아 한 시간 동안 특강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친구의 강의를 들으면서 아차 했다. 그것은 친구가 예배에 대한 강의 도중에 수도 없이 ‘예배 문화’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동안 강의를 들은 목사와 장로들은 ‘예배 문화’라는 말에 전혀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명 강의를 했다고 하면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나는 일단 안심을 했다. 그러나 강의를 마치고 상기된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띤 체 나오는 친구를 한 구석으로 불렀다. 그리고 다구치듯 물었다.
“야 김 목사. 예배가 무슨 문화냐? 너는 요즘 문화라는 말이 홍수가 되어 음주 문화, 흡연 문화, 심지어 남녀간에 못된 짓거리도 문화라는 말을 붙여 성(Sex)문화라는 말도 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예배를 그런 수준의 같은 단어로 묘사해야 되냐? 나는 내 강의를 듣고 있는 동안 죽을 뻔했다. 그런데 목사 장로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문화라고 해도 아무 질문을 하지 않아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너에게 질문할 수는 없잖아. 한심한 목사 장로들만 우글거린다. 그게 너에게 천만 다행 이지만---”이라고 말하며 몰아 세웠다. 친구는 난처한 얼굴로 아무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굳어 버렸다.
문화에 다하여 야후! 백과사전은 두산 세계 대백과 사전을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문화라는 용어는 라틴어의 cultura에서 파생한 culture를 번역한 말로 본래의 뜻은 경작(耕作)이나 재배(栽培)였는데, 나중에 교양. 예술 등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의 인류학자 E. B. 타일러는 저서《원시 문화:Primitive Culture》(1871)에서 문화란ꡒ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ꡓ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문화란 인류에서만 볼 수 있는 사유(思惟), 행동의 양식(생활 방식) 중에서 유전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소속하는 사회(협동을 학습한 사람들의 집단)로부터 습득하고 전달받은 것 전체를 포괄하는 총칭이다.“라고 했다. 즉 어디까지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정신적인 능력이나 획득된 습관이라는 것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인본주의적인 인간 사고의 생활 양식과 생각을 말한다.
그러나 신앙은, 더욱이 장로교의 신앙 관은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없으며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럼에도 친구는 이런 구원적 신앙을 종교 문화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동등시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장로교의 목사들과 그야말로 장로교의 장로 수 백명이 모여 ‘예배 문화’에 대한 강의에 열렬한 지지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아마 예배 문화라는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목사들이 있겠지만 강의한 목사의 체면을 보아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나 생각이 되었다.
칼빈이라면 하나님 다음으로 아는 친구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강의를 한 것은 분명 실수다. 그 실수는 문화라는 말이 뜻하는 인본주의적인 실체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성도들이나 사람들은 목사를 실상보다 높여 본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목사의 위신이 그렇게 천시(賤視)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식하면서도 유식한 척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비하(卑下) 시키는 것이다.
세상일을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척 말라. 무식이 탄로 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문가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도 다 몰라 실수를 연발하고, 그 실수 때문에 이단들이나 하는 설교와 말들을 거 침 없이 하면서도, 그 잘못을 모르는 판에 무슨 세상 지식을 그렇게 많이 가졌다고 아는 체를 해서 스스로 무식을 폭로해 빈축을 산다는 말인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서 성경의 전후 좌우, 선후를 망라하여 가르치고 전해 보라.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을 것인가? 성도들은 자기 교회 목사가 성경을 아주 잘 아는 바울처럼 되기를 바란다. 한 구절의 말씀으로 성경 66권을 모두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의 지식을 가지도록 하라. 아마 그것만해도 평생이 걸릴 것이며 그렇게 깨달은 말씀만 전해도 다 전할 수 없을 것이다.
1.1.37. 타 교단, 신학적 비판, 정치, 경제에 대한 비판 설교
목사들이 한가지 강력하게 도전 받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세상을 잘 살게 하기 위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강단에서 최근에 있었던 어떤 사건들이나 정보들을 성도들에게 말하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해설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경제에 대한 해설, 최근 정치에 대한 견해, 최근의 신학 동향, 잘못된 어떤 교단에 대한 비판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런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이야기를 하면서 목사는 스스로 가장 현실감이 뛰어난 첨단 목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목사 혼자 생각하는 자화자찬(自畵自讚)일 뿐이다.
특히 장로교 계통의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은 자기 교단에 대한 애착이 유난히 강력해서 자기 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성토하는 일이 많다. 지금을 그렇지 않지만 60년에는 합동 측 장로 교단의 목사들은 한신 계열의 기장 교회들이나 통합 측의 교단 사람들은 아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단 정도로 매도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반면에 그쪽 사람들은 합동 측 사람들은 바리세인들이며, 극 보수주의자들로서 하나님께서 벌써 오래 전에 버린 근본 주의자들이라고 정죄를 했다.
지금도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사들 가운데는 칼 발트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고 발트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를 보수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중견 목사는 천주교인들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성도들 앞에서 상대를 비방하거나 비판하며 정죄 하는 말과 설교를 하게 되면 성도들의 얼굴에 아무 표정이 없지만 마음에 심한 저항감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의 이야기도 그렇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목사들보다 성도들이 더 잘 안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방면에 훨씬 뒤떨어진 목사가 세상을 잘 살아 가는 방법을 말하면서 그 잘 살기를 위한 어떤 정보를-증권, 경제, 정치, 문화, 발전 없는 목사의 설교 체육등-을 제공하려 든다면 성도들의 차가운 비웃음을 살 것이다.
목사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착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데로 목사에게 다른 복음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성도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만을 듣기 원하고 있다. 그런데도 목사들은 시시하고 보잘 것이 없는 지식과 경험과 독서와 들은 이야기들을 굉장한 이야기처럼 떠벌리고 있다면 성도들에게 큰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세상의 지식이 목사를 목사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목사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성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설교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하셨는데 10년을 들어도, 20년을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 모양 그 꼴을 면치 못한다면 누가 그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들으려고 할 것인가? 성도들은 한 달에 한 번 만이라도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그 성도는 심령의 갈급함 때문에 헐떡거리지 않을 것이다. 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일년에 한 번 만이라도 목사의 설교에서 가슴 벅차 오르는 감동을 얻는다면 그 성도는 결코 목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성도들 가운데 외도를 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 저기 부흥회를 쫓아다니는 성도, 낯 예배는 자기 교회에서 드리고 저녁 예배는 다른 교회에 가서 드리는 성도, 시도 때도 없이 기도원을 찾아다니는 성도들이 있거든 ‘내게 체움 받지 못한 은혜를 받기 위해 방황하는 성도’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굶주려 먹을 것을 찾아다니게 만든 목사 자신이 크게 회개하고 각성해야 한다.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그런 성도를 비방하거나 경계만 하면 성도들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하면서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를 낸다. 이런 자연스럽지 못한 음성으로 설교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외식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이상한 목소리는 큰 소리를 말하지 않는다.
내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의 목사는 매우 인자하고 목회를 잘하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분에게 한가지 설교자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성도들을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고개를 깊이 숙이고 눈을 위로 치켜 뜨는데 흰 눈동자가 많이 보여 목사의 인상이 아주 이상하게 변하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흘려 내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는 것 때문에 성도들에게 심한 혼란을 준다. 또 다른 목사는 설교 중에 가끔 머리를 심하게 흔드는 버릇이 있어서 성도들을 불안하게 했다. 어떤 목사는 너무 손짓 얼굴 짓을 심하게 해서 듣는 성도들이 정신이 없다. 이런 나쁜 숩관들은 급히 고치는 것이 좋다. 고치지 않으면 더욱 더 빈번한 버릇이 되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홰손하게 된다. 설교자는 가장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해서 성도들의 신경에 거스림이 없어야 한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설교 단에 서서 설교하는 목사를 보았다. 자기는 가장 보편적이며 자연스러운 스타일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성도들을 무시한 예의바르지 못한 목사다. 정장은 자기만 좋으라고 입는 옷이 아니다. 자기는 불편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예의를 갖추기 위해 입는 옷이다.
눈처럼 흰옷에 빨강 넥타이를 하지 말라. 넥타이에 매달려 반짝이는 금 넥타이핀을 하지 말라. 이상한 머리 모양을 하지 말라. 색깔이 짙은 안경을 쓰지 말라. 황금색의 굵은 반지를 끼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쓰게 하는 모든 것을 목사의 옷차림과 말투와 강단 주변에서 치우라. 목사가 가운을 입는 것이 좋다. 가운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목사의 개성을 가리는 효과가 있다. 목사가 흘러내리는 안경을 몇 번 치켜올렸으며 어떤 손가락을 사용했는가를 매 주일 세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면 그 목사는 라식스 수술이라도 받아야 한다.
오늘의 설교가 너무 범람하여 옛날처럼 신선한 설교로서의 반응이 사라졌다. 60년대와 70년대만 해도 이웃 교회에서 부흥 집회를 하면 자기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 것처럼 은혜를 받기 위해 열심히 참석했던 광경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또 목사들 자신이 자기 교회가 아닌 이웃 교회의집회에 자기 교회 성도가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회를 하는데 사람을 많이 오게 하는 방법으로 극한 처방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아주 자극적인 광고를 하는 것이다. 그 문구 가운데 ‘축복 대 성회’, ‘신유의 종 김 돌세 목사의 특별 신유 집회’, ‘지리산에서 평생 기도하고 내려오신 능력의 종 박천사 목사의 특별 대 성회’, ‘전도의 왕 최전도 목사의 전도 폭발 성화’, ‘개척 일년만에 5가정을 3,000명의 성도로 성장시킨 능력의 종 장성장 목사의 능력 성회, 심지어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강남의 어느 곳에 커다랗게 걸린 ’안현수 목사의 말씀 한 마당‘이라는 선전 현수막을 보았다. 한참 생각한 후에 그 광고가 부흥회의 광고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아마 그 목사는 부흥회를 마당 굿으로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성도들은 그런 사람 끌어 모으기의 선전에 속지 않는다. 아니 자꾸 세상을 따라 가려는 교회 지도자들을 안타깝게 보고 있다. 큰 대(大)가 없는 ‘부흥 성회’, ‘사경회’들은 모두 어디를 가고 이상한 굿거리 같은 짓들만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을까?
나무나 돌처럼 몸이 굳어져서 설교하는 설교자의 설교는 듣기 힘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몸을 움직여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도 손을 사용하셔서 말씀의 내용을 더욱 확실히 하셨다.(마 12:49) 돌과 나무처럼 미동(微動)도하지 않고 입으로만 설교하려 한다. 이렇게 설교하면 설교가 딱딱해 지고 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은 말 보다 오히려 몸의 언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심포지의 지휘자, 야구 투수, 배우들, 생명을 건 전쟁터의 군의 지휘관들은 모두 언어 보다 몸짓을 더 사용해서 의사를 전달한다.
설교자는 대화를 할 때에 오감과 사지백체(四肢百體)를 사용하는 것처럼 설교에서도 자연스럽게 온 몸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햄릿(Hamlet)가 그의 배우들에게 말한 것처럼 “행동은 대사에 맞추어, 대사는 행동에 맞추어 조절하라”는 말은 설교자에게 매우 중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