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6)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던지셨던 아주 의미 있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이 던져진 지 1,800년 이상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장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물음으로 남아 있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성향은 하나님께서 인간 본성에 심어 놓으신 가장 보편적인 감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이들이 사랑하지 말아야 할 대사을 사랑합니다. 오늘 저는 최고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의 자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사랑의 일부라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신 신성(divine Person)께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사랑하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관심을 이 위대한 주제로 모으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히 광신자나 열광주의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을 믿는 합리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구원과 밀접하게 관계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이 단순한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합니까?"
두 가지 논점으로 이 주제를 시작하겠습니다.
1. 우선,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향해 갖는 특별한 정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단순히 세례 받은 남자나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이면 형식적으로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주중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형식주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는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는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9:6). 이 말씀이 주는 실제적인 교훈은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이 땅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은 마음과 생활에 자리합니다. 마음에서 그것을 느낍니다. 행실과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됩니다. 자신의 죄악됨과 죄책, 사악함을 절감하고 회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자기 영혼이 꼭 필요로 하는 하나님이신 구주임을 알고 그분께 자신을 맡깁니다. 옛 사람과 아울러 육신적 습관과 정욕까지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덧입습니다. 항상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대적하는 새롭고 거룩한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야말로 그가 가진 신앙의 초석입니다. 무슨 근거로 자신의 그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무슨 근거로 마지막 심판 날에 죄 없는 자로 드러나게 되리라고 믿느냐는 물음에, 그는 그리스도의 의로움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냐는 물음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 외에도,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한 가지 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지식, 믿음, 희망, 경외함, 순종은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을 묘사할 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빼놓는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을 제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알고 신뢰하고 순종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을 사랑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에게서 드러나는 이 특별한 표지에 대해 성경은 여러 차례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라는 표현에 익숙합니다(행20:21).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이 "믿음" 못지않게 사랑이라는 말을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위험한 것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위험도 큽니다. 믿지 않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 모두 영원한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16:22).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 두지 않습니다. 핑계할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분명한 지식이 부족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사람을 두려워해서 용기를 잃고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다윗처럼 크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항상 저주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에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6:24). 사도는 지금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바람과 선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에베소 교인들을 만난 본 적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믿음과 지식과 자기부인에 온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이 연약한 형제들을 무슨 말로 격려합니까? 바울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을 단번에 담아낼 수 있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교리나 실천에서 다 같은 정도의 지식과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했으리니"(요8:42). 예수님은 대적들이 잘못 알고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하며 자긍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무지한 그리스도인처럼,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는 그들을 보시고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권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유대인에게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사도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셉 번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세 번이나 거듭해서 지었던 죄를 조용히 상기시키고 계십니다. 교회를 목양할 공적인 사명으로 회복시키시기 전에, 새로운 믿음의 고백을 이끌어 내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그에게 던진 물음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믿느냐", "회개했느냐", "나를 고백할 준비가 되었느냐", "이제 나에게 순종하겠느냐" 하고 물으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신앙이 여기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단순하지만, 사실 가장 예리한 물음입니다. 이는 가장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도 이해할 만큼 쉽고 분명한 물음이지만, 가장 탁월한 사도가 가진 신앙의 실재를 가늠할 수 있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모든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그리스도를 향한 이 특별한 정서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까? 사도 요한의 말에서 그 비밀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이 본문은 특별히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자 하나님도 가리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피흘림을 통해 그를 모든 죄책과 죄의 권세와 그 결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그를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회개와 믿음과 희망과 거룩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모든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 주셨습니다. 지옥의 낭떠러지에서 데려다가 좁은 길을 가게 하시고, 천국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흑암 대신에 빛을, 사망 대신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시는 일 때문에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날마다 자신의 무수한 허물과 죄악을 깨끗하게 하시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 간구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날마다 영혼의 필요를 채우시고, 끊임없이 자비와 은혜를 더하십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인도하시고, 연약하고 무지할 때마다 오래 참으시며, 넘어지고 자빠질 때마다 일으키시고, 무수한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시며, 그 영혼을 위해 천국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던 채무자에게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친구가 나타나, 자신을 대신해 모든 빚을 갚아 줄 뿐 아니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자금을 대주고 자신을 동업자로 받아 준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 중에 포로가 된 자신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을 뚫고 자신을 구출해 준 전우가 있다면, 그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이, 목숨 걸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삼척동자도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원리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1)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구원하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도 마귀의 믿음, 즉 단순한 지적인 믿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하는 믿음은 갖지 못합니다. 사랑이 믿음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양심을 잠잠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는 참 믿음이 있는 곳에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사랑도 있는 법입니다. 진실로 용서받은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합니다(눅7:47).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 없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2)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사역의 원천입니다.
의무감 때문에, 또는 옳고 바른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손을 움직여서 일을 계속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격정과 흥분을 통해 일시적이고 즉흥적으로 일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는,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지치지 않고 선교 사역을 할 수도 없고, 선한 일을 끝까지 잘해 낼 수도 없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도 자기 의무를 적절히 잘 이행할 수 있습니다. 환자에게 때맞춰 약을 줄 수도 있고, 음식을 먹일 수도 있고, 환자의 모든 필요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의 병상을 지키는 아내와 간호사는 아주 다릅니다. 또는 죽어 가는 자녀를 돌보는 어미와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 명은 급여를 받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사랑하기 때문에 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팽개치고 떠난 선교지에 들어가서 세상을 뒤집어 놓는 위대한 사역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한 탁월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웬과 백스터, 그리고 러더퍼드와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레이턴과 허비, 윗필드와 웨슬리, 헨리 마틴과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비커스테스와 시므온, 휴윗슨(Hewitson), 맥체인, 바런 스토웰(Baron Stowel)과 휴 맥닐(Hugh McNeile) 같은 사람들의 특징을 잘 보십시오. 이들은 세상에 신앙의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신조를 분명히 믿고 따랐을 뿐 아니라 한 인격을 사랑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습니다.
(3)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치면서 특별히 관심을 두어야 할 부분입니다.
선택, 의의 전가, 원죄, 칭의, 성화 같은 문제는 아이들에게 어려울 수 있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은 감사하며 마땅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아이들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는 말씀은 진리입니다(마21:16). 아타나시우스 신조, 니케아 신조, 사도 신조가 고백하는 모든 내용은 조목조목 알면서도, 진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어린아이보다 훨씬 더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4)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모든 종류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하나로 만나는 공통 접점입니다.
감독교인이나 장로교인이나, 침례교인이나 독립교인이나, 칼뱅주의자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나, 감리교인이나 모라비아교인이나, 루터교인이나 개혁교인이나, 국교도이나 비국교도이나 적어도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있어서 동일합니다. 형식과 예식, 교회 정치와 예배의 형태는 서로 많이 다르지만, 한 가지 점에서만은 분명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 구원의 소망을 두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에 대해 동일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들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합니다(엡6:24).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조직신학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할 것이고, 기껏해야 자기 신앙을 간신히 방어만 할 뿐 주장하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향해 갖는 마음이 무엇인지는 모두 잘 압니다. 잘 배우지 못한 한 노인이 찰머스(Thomas Chalmers) 박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잘 말하지는 못해도, 그분을 위해 죽을 수는 있습니다!"
(5) 구원받은 모든 영혼들이 천국에서 갖는 두드러진 표지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 누구도 능히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차이는 같은 마음으로 합해지고, 이 땅에서 신랄하게 논쟁했던 교리적 특징들은 그리스도께 빚진 마음 하나로 덮어지게 됩니다. 루터와 츠빙글리(Ulrich Zwingli)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웨슬리와 탑레이디(Augustus Toplady)도 더 이상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국교도와 비국교도는 더 이상 서로 물고 뜯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한마음과 한소리로 송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 1:5-6).
존 번연이 사망의 강가에 서 있는 견고 씨의 입에 둔 말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강물은 많은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했습니다. 저 역시 이 강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치가 떨리곤 했는데, 이제는 이렇게 편하게 서 있습니다. 저는 지금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너는 동안 법궤를 멘 제사장이 서 있던 바로 그곳에 서 있습니다. 강물은 너무나도 쓰고 내장을 얼어붙게 할 만큼 차지만, 제가 이르게 될 곳과 저를 안내하기 위해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 생각에, 오히려 제 마음은 불타는 장작처럼 이글거립니다. 이제 모든 여정의 끝자락에 선 제 자신을 봅니다. 제 수고의 날들이 다 지나갔습니다. 저를 대신하여 가시관을 쓰시고, 침 뱉음을 당하신 그분을 이제 곧 뵙겠지요. 지금까지는 듣기만 하고 믿음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저는 저의 모든 기쁨이신 그분의 얼굴을 마주 대하며 살 곳으로 갑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얼마나 듣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 남아 있는 그분의 발자국을 볼 때마다, 그 걸음걸음을 얼마나 따라가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제게 그분의 이름은 향유 옥합만큼이나 소중합니다. 그럼요, 어떤 향유보다 더 달콤합니다! 그분의 얼굴은 또 어떻고요. 햇빛을 사모하는 자보다 더한 갈망으로 그분의 얼굴 뵙기를 원합니다!"
이런 경험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천국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채 죽는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