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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기 93년 8월 30일 토요정례법회 ○
청년강연
실시품 47장
청년 4단 박여주 교우님의 강연이 있었습니다 :)
김제원 교무님 설법
47장에 보면 김광선. 김광선은 대종사 9인 제자 중 팔산님 이십니다.
8산님 아드님은 형산 김홍철 선생님이십니다.
팔산님은 마을 훈장도 하셨고, 덩치가 크고 재산도 많으며 대종사님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십니다.
팔산님 아들이 정산종사님과 나이가 같은데 정산종사님은 대종사님과 10살 차이다.
팔산님은 대종사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요.
그런데 대종사님 구도 당시에 밥도 안 먹고 할 때에 팔산님이 식량도 대주시는 등 뒤를 돌봐주셨다.
한참 어린 동생이고 가난한 대종사를 열심히 후원해주신 분이다.
대종사님이 26세에 대각을 하시고 나니까 팔산님이 스승으로 받듭니다.
자기보다 한참 아래의 대종사님을 스승으로 받듭니다.
팔산님과 여러 가지 행적이 있습니다.
천도품을 보면 팔산님 돌아가시니까 대종사님이 펑펑 우셨다고 합니다.
팔산님이 나이가 더 많으시기 때문에 먼저 돌아가셨는데 펑펑 우셨다고 합니다.
대종사님은 공부를 못하셔서 애착에 끌리신 거죠? 법문에 속으면 안 됩니다.
팔산님하고 영광 장에 가서 꿩 이야기도 있었고, 팔산님이 대종사님을 모시고 정읍 화해리에 정산종사님을 만나러 가시기도 하셨다.
팔산님 아드님 형산님 자녀분 중에 전무출신이 있습니다. 대대로 전무출신을 하고 계십니다.
형산님 따님이 대타원님이라고 아주 열정도 있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팔산님이 대종사님을 모신지 약 30년간 모셨습니다.
이 법문이 원기 22년 8월달에 나온 법문입니다.
원기22년이면 대종사님이 대각하신지 22년인데 대종사님 대각하기 전부터 후원해주셨기 때문에 30년 가까이 대종사님을 모신 것이다.
그 정도 대종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다른 것은 다른 사람들도 할 만하고 자기도 열심히 하다 보니까 같이 따라갈만 하지만,
그 중에 특히 세 가지는 내가 도저히 그 분을 따라잡기가 어렵다 하고 짚어서 내어주신 법문이 이 법문입니다.
원래 제목이 뭐였냐면, ‘학이불능(學而不能)’이다.
배우고자 하지만 능하지 못한 것이 있다. 아무리 배우려고 해도 배움이라는 것을 통해서 따라가지 못할 것이 있다.
그 세 가지를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말씀하신 것이다.
배운 다는 것은 보통 책을 통해서나 말로 지식을 배운다고 한다. 그런데 대종사님은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잖아요.
공자님 제자 중에 증자라고 있다. 증자 제자 중에 공명선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 양반이 얼마나 웃기냐면 증자 선생님 밑에 들어온 지 3년이 됐는데 한 번도 글을 보지 않는 것이다.
증자가 이상해 물었다.
“아니, 공명선이. 너 문하 들어온 지 3년 지났는데 도무지 배우지 않으니 그게 무슨 일이냐?” 하고 증자님이 제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공명선이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 하되
“제가 어찌 감히 배우지 않겠습니까?
제가 선생님께서 여러 가지, 여기저기서 취하심을 보고, 또는 선생님이 부모님 모시는 걸 보고,
개나 소를 대하는 걸 보고 제 마음에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되 그것을 아직 능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으며,
또 선생님께서 빈객을 응접하시는 걸 보고 공손하고 겸손하며 해태(懈怠)함이 없으실 때
제 마음에 감탄해서 배우고자 하되 아직 못 따라가고 있고,
또 선생님께서 조정에 거하심을 보면 엄격하게 아랫사람을 거느리면서도 각박함이 없으실 때
제 마음에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되 아직 능함이 부족하니 어찌 배우지 않으면서 선생님 문하에 살고 있겠습니까?”
배우고 있습니다. 하는 말이다.
그러니깐 이것은 소학에 있는 얘기다. 증자는 배우는 자가 어떤 마음으로 배워야 하는가를 적어놓은 소학의 문구다.
세상 천하의 만사를 사람들이 배우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법문을 잘못 이해하면 ‘글을 보지 말란 소리냐?’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뭐냐? 공명선이 취한 태도는 뭐예요?
심법. 취사력. 그것을 배우되 배우는 것 뿐 아니라 내가 그것을 그만큼 실행했는데
지금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마음으로 실행을 단련하고 있는 배움을 말하는 것이다. 이해하시겠어요?
저는 여기서 몇 년 간을 아침에 좌선을 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좌선을 안 합니다.
이것은 배우는데 있어서 가장 어렵다는 증거가 되면서, 배우는 핵심이 빠졌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글을 배우고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만 그 행동을 배우고 본받고, 그 마음을 체받고, 그 마음을 배우고.
이것을 역사 이래로 많은 수행자들의 신앙의 세계나 일반사회에서도 그것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말로는 뭐라고 하고, 이해는 했다 치더라도 내 삶속에 그 심법을 실행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종사님은 스승님의 가르침에 의해서도 아니고 당신 스스로가 발심해서 당신 스스로가 깨침을 얻어서
당신 스스로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전혀 흔들림이 없이 그 세 가지를 한 것을 옆에서 본 제자가 강조하는 것이다.
그 첫째가 순일무사한 공심이다.
순일무사라는 것이 무슨 뜻이에요? 純一無私한 公心이다!
공심은 공심이되 순일무사다.
그러면서 거기에 설명이 나오시기를,
345페이지에 보시면, 대종사의 운심처사. 마음을 움직이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일언일동이 말씀이나 그 행동이 오직 공 하나 뿐이다.
사라는 대상이 따로 있지 아니하사 오직 이 회상을 창조하시는 일 이외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말씀도 행동도 없으시나니
이것이 마음 깊이 감탄하여 배우고자 하는 바요. 내가 배우려고 해도 따라가기 어려운데 이것을 배우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순일한 공이다. 순일무사한!
보통 사람들이 공심 있다 하면 어떤 걸 공심 있다 하죠? 사를 챙기다가 공이 나타나면 공을 조금 우선 하는 것을 공심 있다 한다.
그러나 대종사님의 공심은 뭐냐. 대종사님 공심은 지공무사한 공심이다.
지공무사한 공심이라는 것은 지극히 공변되어 가지고, 사 즉 나라하는. 이것이라 하는 게 없다.
公이라고 하는 것은 空에서 나온다. 공이라는 것이 無私하다는 것.
그러면 뭐냐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를 인식할 때 가장 중생은 내 몸이 나다 이런다.
조금 수준이 있는 사람 이 영혼과 몸이 나다.
생각만 하면 문제다.
생각을 넘어서서 ‘이 몸과 마음이 나다’고 하면 몸에도 공을 들일 것이고 정신에도 공을 들일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말로는 몸과 마음이 나다 하면서도 몸에 공을 들이고 마음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왜? 그 증거가 뭐냐?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간과 돈,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봐라.
옷을 사고, 세수를 하고, 화장품을 바르고, 신발을 사고, 먹어주고, 자고 한다.
그런데 내 마음에는 내 영혼에는 얼마나 시간을 쓰느냐?
그것은 말로는 몸과 마음이 나라고 하면서 살지만 실지로는 몸이 나로 알고 사는 게 아니냐?
그런데 여기서 영혼이라는 것도 생각해보자.
설사 이해만 하는 정도. 영혼과 육신이 하나인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그 사람이 어떤 영혼을 나로 아는가?
조금 어중간히 공부한 사람은 생각하는 나. 생각하는 어떤 ‘나’가 이 안에 있어서,
부모로부터 몸받고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어떤 실체가 있어 그것이 나인줄 알고 육신 건강을 관리하며 살아간다.
조금 수행가 종교가에 들어온 사람도 그렇게 산다.
실제로 어떻는가. 과연 어떤 것이 영혼이요, 내 참마음이요, 어떤 것이 참 내 생명인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성품이요 정신이요 참 마음이다. 이것이 가장 큰 영혼 생명이다.
그런데 그 생명 그 영원한 참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 쫓아가는 사람까지는 있다.
그런데 실지로 그것이 얼마나 나와 관계가 어떻게 되고 그것이 실지로 어떻게 되는가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그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지느냐? 지공무사가 되게 되어있다.
거꾸로 뒤집어 말하면 나라고 하는 실체를 깨달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지공무사로 살게되어 있다.
그런데 공과 사를 적당히 놓고 비교해 가면서 기분 좋을 때는 公이요 피곤할 때는 私고, 사업이 안 될 때는 私고
사업이 잘 될 때는 公心 좀 내고. 이 정도는 내 근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보고 뭐라 하느냐? 선공후사(先公後私) 선사후공(先私後公) 빙공영사(憑公榮私) 이 세가지로 설명한다.
여기서도 급이 다르다.
그래도 조금 양심이 있고 조금 뭔가 배웠다 하는 사람은 지공무사는 아니더라도 선공후사는 한다.
교당일과 내 개인일이 겹쳤으면 “네, 교무님. 잘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한다.
그런데 이것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욕심만 알고, 자기가 육신이 나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 욕심에 가린 사람은 또는 영혼의 실체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선사후공.
개인적인 거 먼저 처리하고 기분 나면 마음이 풀리면 부탁을 너무 간절히 하면 살짝 공적인 것을 한다.
그 중에도 어떤 사람은 빙공영사를 한다. 공을 빙자해서 사를 경영한다.
공심이 났는데 그 속에.. 여러분들 사회의 자선단체나 엔지오단체 시민단체보세요.
기업에서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언론도 무서워하지만, 법조계도 무서워하지만, 시민단체를 아주 무서워 합니다.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정당한 시민 단체는 불의를 교정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 숨어있는 것이 있다.
시민단체 활동하는 사람들. 다 집 떵떵거리며 잘 살아요. 왜? 뒷구멍으로 다 빙공영사다.
“너희 회사 망할래? 잘 해먹을래?” “뒷구멍으로 돈봉투 안내면 찔러버린다!” 이렇게 해서 빙공영사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인과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요, 진리를 모르는 것이요, 참 나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저도 이거 모를 땐 이렇게 살았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나도 좋은 차 장만하고 좋은 집 장만하고, 좋은 회사 취직해서, 좋은 마누라 얻어서 새끼들 잘 살고, 외국 여행 다니면서 편안하고
우리 형님도 도와주고 우리 부모님 도와주면서..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잘 사는 것인줄 알았다. 그것이 행복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 공부를 해보니깐 ‘아! 나를 중심으로 한 사고였구나.’
어떤 나이죠? 사를 중심으로 공을 바라보는 눈이 있고, 공과 사가 대치되면서 서로 구별되면서 나누면서 바라보는 사가 있다.
그렇지만 원래는 뭐냐? 원만구족 지공무사가 나다.
나라는 존재는 원만구족 지공무사다. 그것이 일원상이다.
내가 마음 좀 나고 교무님한테 은혜를 입었으니까 선공후사로 살아야겠다..?
복을 받는다니까 복 좀 지어야겠다..? 이게 아니다.
내 자체 그대로 사는 게 지공무사다.
보통사람은 공심있다고 하면 선공후사로 바라본다.
우리는 진공으로 체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지공무사가 바로 근본이다.
그렇지만 남들이 바라볼 때는 선공후사로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교무님, 지공무사면사가 없겠네요?”
즉 가정도 꾸리지 않아야 하고, 개인의 몸도 돌보지 않아야 하고, 개인 돈도 하나도 없어야겠네요?
이것은 지공무사가 아니다. 지공무사라 하는 것은 공과 사가 엄연히 존재하면서 그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가 급할 때는 사를 하는 것이고, 공이 급할 때는 공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가 공을 위한 것이고, 그 공이 사를 위한 것이 되버리는 것이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사를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고, 공을 위한 건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공무사 효과는 어떤 효과가 있느냐?
철저하게 공도 살리지만 사와 공 둘 다 살리는 길이다. 이것이 인과의 이치다. 이것이 진리요 이치다.
그런데 이것은 쉽게 가는 것입니까? 나를 놓기 쉬워요? 쉽지 않지.
그러면 초반에는 어떻게 해야하냐? 원만구족 지공무사의 이치를 깨달아 버리면 된다.
그러면 설사 내가 욕심나고 습관에 의해서 이쪽으로 가려해도, 참회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고 성공할 확률도 높아진다.
그런데 그 근원에 욕심과 무명을 채워놓고, 나라는 존재 항상 내 안에 두고
내가 기분 좋을 때 교무님 고마우니까 단장이 전화하니까 내가 공적인 일을 해주겠다.
이것은 언젠가는 얼마든지 뒤돌아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입자는 먼저 어떻게 해야 하냐?
원만구족 지공무사가 저 일원상이요, 원만구족 지공무사가 바로 나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살아가자.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나도 살리는 길이고. 가장 보은하는 길이고, 그것이 바로 가장 행복한 길 믿어야한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종사님 살아가신 길이다.
어떤 사람은 그러죠. “대종사님같이 살면 얼마나 미련한 짓거리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영광에 내려가지도 않으셨다. 나중에 내려가셨다.
아버지가 아프다고 해도 공적인일 먼저 처리하고 동생 먼저 내려보내셨다.
당신 부인이 총부에서 밥 먹으려고 해도 밥값 내고 먹어라 하셨다.
정산종사님은 당신 어머니가 하도 어렵게 하니깐 주위에서 총부 옆에 집을 해주자 했어요.
정산종사 나중에 “그래 고맙다.” 하셨다.
“늙으신 우리 부모님 총부 가까이 내가 한번 볼 수 있게 해주니 얼마나 고맙느냐.”
그리고 날마다 아침 시자를 보내서
“오늘은 우리 어머니 어떠하시냐?”고 물으셨다. 한번은 박정훈 시자가 그랬다.
문 열고 가니까 하나도 춥지도 않은데, 날씨가 따뜻한 날씨인데 “지금이 동지지?” 그러시는 것을 듣고 웃어버렸다고 한다.
시자가 웃어버렸다. 왜? ‘노망 들었나 보구나’
그 말을 정산종사님께 전하니 ‘아, 방이 찬가 보구나. 방이 차니까 어머니께서 동지라고 겨울이라고 착각하시는구나’
시자는 소갈머리 없이 웃어 버리고,
효자인 정산종사님은 당신 어머니가 “동지지?” 하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파서 방이 차가운가 보다.. 하고
어머니께 집을 해준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시며, “그 분께서 돌아가시면 결국 결국 우리 교단 것 아니냐.”하셨다.
그러시면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셨다.
대종사님 당신 부모님 돌아가신 것도 적극적 공적인 처리하시고 간 것이나,
정산종사님이 당신 어머니 집을 총부에 마련한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신 후 다시 교단에 돌려주신 것은
다 공과 사를 넘어선 일들이다. 사적인 것을 받았어도 그것도 공이요.
그런데 그 분들 생각과 달라 보통 사람들은 항상 공과 사가 항상 나뉘어있다.
그래서 ‘내가 공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좋은 일 하고 있다. 복 받을 것이다.’ ‘저 사는 미워.’ ‘저 사는 싫다.’
어중간히 공부한 사람은 선공후사를 해요. 그러면서 이쪽 사람(至公無私)들을 아주 미워합니다.
그러면서 또 어떤 사람은 약자에게 어떻게 하죠? “너는 왜 私를 미워해?” 하면서 자기 것 챙겨먹고 있습니다.
先私로. 어떤 사람은 뒤로 “히히..”하면서 빙공영사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과의 이치를 놓고 볼 때나 진리를 인식하는 단계를 놓고 볼 때 나는 어딘가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는 대종사님 법을 만나고, 이 법문을 들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至善. 들어보셨죠?
사람들은 착하게, 止惡修善이라고 해요.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지악수선은 불교의 3대 목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선도 그냥 악을 미워하는 선이 아니라 악을 취하지 않는 선이다.
악을 상대하는 선이 아니라, 악과 대비된 선이 아니라, 악도 넘어서버린 그런 선을 지선이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지공이나 지선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분별의 세계를 넘어선 성리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하바드 대학을 나오고 옥스퍼드를 나오고 예일을 나오고 MIT를 나왔어도 이 세계는 머리가 좋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 사람 말하는 걸 들어보세요. 아주 훌륭하고 감동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그 사람은 공과 사, 선과 악의 구별 속에서 나는 이것(公 善)을 하겠다는 말이에요. 잘 들어보세요.
그런데 대소유무 즉 성리에 바탕한 선과 악. 성리에 바탕한 공과 사라고 하는 것은 다 그 안에 두루 포함하고 남는 것입니다.
상대가 없어요.
“교무님, 현실에서는 분명히 이익이 있고 손해가 되고, 악이 있고 선이 있고, 사심이 있고 공심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大 - 至公無私 / 小 - 先公後私 / 有無
대소 유무 원리이다. 우리 본래자리 전체는 대도 소도 없고, 그 안에는 대라고 할 것도 없고, 공이나 사라는 것이 없다.
이것이 일원상의 자리다.
그렇지만 현실 속 철저하게 공이 있고 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이 있고 사가 있지만 이 대를 여의지 않고 공과 사를 구별하느냐,
대를 전혀 제껴버리고 공과 사에 빠져버리느냐 하는 것은 다르다. 이해하시겠어요?
무시선법에 보면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여기에 적용시켜보면 ‘지공무사에 체를 삼고 선공후사를 해라.’는 말씀입니다.
지공무사에 체를 삼지 않고 선공후사를 하는 사람은 뭐죠? 공과 사를 분리하는 것에 바탕한 公 우선이에요.
그런데 지공무사에 바탕한 선공후사는 뭐냐?
공과 사를 분리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를 미워하면서 구별하면서의 공이 아니라 사를 싫어하지 않는 공이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저도 큰소리치지만 때로는 나도 사가 앞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해?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하자는 것이다.
아무리 팔산님이 대종사님 공심 따라가려해도 대종사님은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일원상 자리를 깨쳐버려서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배우는 의지력으로 열심히 노력 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짜 마음으로서 들어가는 자리이다.
그 마음은 기초적으로 신심과 서원의 마음이요, 더 나아가서는 공심의 마음.
그 공심이 공부심에 바탕한, 깨달음에 바탕한 공심이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주위사람 이목에 상관없다. 그 공심은 주위 사람 이목에 상관이 없어요.
제가 임원들에게 업무를 줍니다.
자기를 중시하는 사람은 박수 받는 일은 앞장서서 해요.
뒤에서 이끄는 보살같은 일은 안 합니다 시켜주면 안 한다고 하고, 하다가 말아버린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다.
제가 언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이 자기인 사람이 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자기면 괜찮다.
그런데 천상천하유아독존의 獨이 어떤 獨이에요?
이런 독과 달리 우주의 중심이 자기인 사람의 독은 사심의, 자신의 국한에 잡힌 독존. 독존도 아니고 독살이다.
홀로 사적인 것이다. 그 생각 사로잡힌 사람은 결국은 주위 사람로부터 배척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인과의 원리에요.
보세요 학교에서나 동문회에서나 직장, 친구들 모임, 친척들 간에 한 번 보세요.
끝이 안 좋은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죠? 미움받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죠?
여러 가지가 있죠. 거짓이 있는 사람도 그렇고, 두려운 사람도 그렇고, 성질이 까칠한 사람도 여러 가지로 미움 받지요.
그렇지만 핵심을 들어가보면 나에 대한 아상. 집착 욕심. 나에 대한 상이나 집착 욕심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한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인생의 후반으로 갈수록 가난해진다. 내생에 몸을 바꾸면 찢어지게 가난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의 이치다.
자, 대종사님은 얼마나 미련하셨습니까?
자기를 일체 돌보지 않으시고 이 회상 창건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신 멍청한 양반이에요.
자~ 내생을 바라볼까요? 다음 생을 봅시다.
내 것 적당히 챙겨먹고, 공적인 것은 살살 봐서 박수받을 일만 하고 그렇게 살다 죽었어요. 그 사람과,
오직 순일무사하신 공심 하나로 산 사람의 후광의 일생과 더 나아가 내생은 어떤 삶이 될 것인가?
사람들은 남들 복 받을 때 부러워합니다. 남들 좋은 인물 부러워하고, 부잣집 아들, 지혜 있는 사람, 건강한 사람,
부모 잘 만난 사람, 좋은 나라, 부잣집에 태어난 사람들을 다 부러워합니다.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막상 살아가면서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자기가 사은의 은혜를 모르고 오직 빚만 짓고 산다.
이 세상에 제일 미련한 놈이 어떤 놈이냐?
원망생활 하는 놈이다.
우리가 진짜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사는데.. 천지가 없이 1분이라도 살 수 있어요? 1초도 못 살아요.
부모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없어요. 성질내면서 부모가 왜 나를 이렇게 낳아서 이렇게 산다고 하지만,
다 떠나서 부모가 없어서는 내 존재 자체가 없는 것이다.
동포 없이는 아무것도 먹을 것도 없고, 그 어떤 것도 내가 만들어 걸친 것이 뭐 얼마나 있겠어요?
동포가 없이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동포가 없이는 순간도 못 산다.
법률이 없이도 마찬가지다. 마피아가 성행하고 야쿠자가 성행하는 나라에 살아야 법률의 은혜가 팍팍 더 드러나는데..
아니면 종교가 없는.. 저기 변지보를 받아야 성자가 내놓으신 법률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데,
쉽게 얻어먹고 쉽게 만나고 쉽게 알려주니까 잘 모른다.
국가에서 잘 관리해 주니까 모른다.
우리나라 같이 의료문제라든가 치안문제가 잘 된 나라가 드물다.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이번에도 오바마가 부시를, 멕캐인을 친다. 환경 의료 문제. 사실 miss했거든요.
돈 있는 사람이 더 잘 살고, 돈 없는 사람 죽어버리고..
흑인들 평균 수명이 몇 살인지 아세요? 53세다. 평균 수명에 다 죽는다.
왜 그래요? 40대 후반되면 다 비만된다. 아프면 병원에 못간다.
가도 가난한 병원밖에 못 가는데 병원마다 차이가 있다.
이런 차별, 이런 불평등 속에 지금 살아가는 나라가 많다.
대종사님은 오직 공과 사를 넘어서서 공을 취하시고 사를 취하신 어른이시고, 생각도 말씀도 그러셨다.
여러분들은 교당 올때만 생각 하십니까? 무슨 생각 하세요? ‘먹고 살아야 하는데..’ ‘집장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은 쉽게 같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따라가고 흠모하고 사모하고, 또 우리도 그렇게 방향을 잡고 나가야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누구를 위해서? 원불교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나를 위해서다.
두 번째는 무엇이죠?
시종일관하신 성의다.
聖卽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자는 어떤 양반이냐? 정성스런 양반이다. 성자는 다름이 아니라 정성스러운 양반이다.
정성스럽다는 것은 間斷이 없다는 말이다.
간단이라는 것은 사이 간. 끊어질 단. 도로를 가는데 도로가 뚝 끊어져 버렸어. 그러면 어떻게 되요? 죽어버리죠.
성이라는 것은 간단이 없는 것을 말한다. 사이가 있거나 끊어짐이 없는 것을 성이라고 한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단장 연초에 마음 먹었던 것이 끊어지지 않던가요?
교당에 오려고 나왔더니 비가 막 쏟아져요. 어떤가요? 그러면 마음이 바뀌죠. ‘에이, 말아버리자!’
마음이라는 것은 生住離滅이 특징이다. 생기면 머물렀다가 이사를 가요, 그러다 다시 사라져요.
교당에 나가려고 마음먹었죠. 비가 오니 고민하죠. 그러다가 교당 올 마음이 싹 사라지죠. 이것이 생주이멸이다.
그런데 신심이란 것은 무엇이냐? 정성이란 것은 무엇이냐?
그래서 신성이라고 한다. 신과 성은 맞통한다. 신분의성의 준말이 신성이다.
믿음의 마음이나 정성의 마음은 생주이멸을 초월하는 마음이다. 이해하시겠어요?
이 생주이멸을 분별성, 주착심이라 한다.
생주이멸을 초월한 마음이 신심이요, 정성스런 마음이다.
왔다갔다하는 분별, 망상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것이에요.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다.
무엇으로? 마음의 힘으로, 믿음의 힘으로, 정성의 힘으로 넘어서는 것이에요.
그래서 공자님은 성자를 天地謂誠. 하늘과 같은 것이 성이다.
정성이라는 것은, 하늘에 해는 오늘도 내일도 춘하추동에도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천지와 같은 것이 정성이다.
그런데 우리 사람 마음은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생주이멸한다.
이 생주이멸을 1분에도 수십 번 하는 사람도 있다. 수십가지를 1분동안 하는 사람도 있어요.
수십가지를 동시에 엮어져서 한다. 한 가지 하고 딴 생각하고.. 한 가지 하고 딴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생각 저 생각 서로 얽혀서 있다. 그것을 분별성, 주착심, 번뇌심, 망상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염불을 하거나 좌선을 하거나 수양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생주이멸의 번뇌를 확! 모으고 모으고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혜라는 것은 뭐냐? 보통 사람의 지혜는 자연과학적 지식이다.
그러나 참 지혜라는 것은 자성의 지혜광명을 말하는 것이다.
즉, 자성의 지혜광명은 어떻게 나오는 것이냐? 비워버렸을 때 솟아나오는 것이다.
번뇌가 녹아버렸을 때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원리다.
식망현진(息妄顯眞)이라고 한다. 망념을 쉬니 진성이 나타낸다. 이것이 수양이라는 것이다.
그랬을 때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고요함을 느낀다. 맑음을 느낀다.
그 속에서 생생함을 느끼는 거에요. 그 속에서 사람이 여유가 있어진다. 그 속에서 사람이 기뻐진다. 그 속에서 생각이 고상해진다.
수양이라는 것이 그냥 개, 돼지같이 땅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높은 고상한 생각이 나온다. 비웠을 때 그런다.
사업을 하려고 하면 파란곡절이 있죠. 그리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힘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젊을 때 대로 왕성하지만, 나이가 먹으면 나이가 먹은 대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교무님, 육신에 정성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의는 마음의 성의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육신도 지혜를 바탕으로 한 조정이죠.
마라톤하는 사람이 처음에 막 뛰었다가 막판에 못 뛰어 꼴등한다. 이것은 성의로 마음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죠.
마음만 있고 지혜가 동반되어야 한다.
100m달리기 하고, 계주하고, 마라톤 하고 에너지 조절해야잖아요. 성의는 마음만 있으면 되요? 그것은 아니에요.
그 성의 있는 마음에 의심이 들어가야 한다. 신분의성의 의심이 들어가야한다.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까닭있는 마음이 들어가야 한다.
우리가 진짜 속아 버리는 것이 있는데 딴 사람 거짓말로 속고, 정부에 속고, 회사에 속고, 은행에 속고, 다단계에 속고 합니다.
하지만 진짜 속아버리는게 뭔지 아세요? 생주이멸하는 번뇌의 마음에 속아버리는 것이다. 이해하시겠어요?
뭐냐? 내가 무결석을 하겠다. 또는 나는 헌배와 기도를 하겠다. 하고 마음 먹었어요.
그런데 무엇에 속아요? 생주이멸하는 이 마음에 속아요. 경계가 오면 자빠져 버린다.
여러분에게 희망을 주는 말이 있잖아요. 자빠지고 자빠져도 끝에 오뚝이처럼 일어나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일어나면 일어난 것이라고 희망을 줬지만 대종사님은 과연 자빠지고 자빠지다가 죽을 때 일어나셨는가?
일생 내내 정성을 끝까지 놓지 않고 하셨는가?
대종사님은 구도 일념을 하셔서 대각 하신 다음에 간척사업을 하십니다.
법인 기도를 하십니다. 변산에 들어가서 교법을 제정하십니다. 초기 인연을 모집하십니다.
익산 신룡리에 가서 개척을 해서 제자들 모으시고, 여기저기 지방순회하시면서 온갖 그 짧은 인생 28년동안에
이렇게 우리가 은혜를 입는 엄청난 회상을 그 한 분을 기점으로 해서 비로소 그 제자 분들과 함께 하셨지만,
이 회상을 우리가 그런 은혜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대종사님도 생주이멸하는 마음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이 회상을 창건하셨다고 하면 이렇게 됐겠어요?
93년동안에 세계 20몇개국에 원불교가 나가고, 원음방송하는 방송국을 가지고 있고, 군종을 하고 있고, 4대 종교로써 이렇게 과연 했겠는가?
이랬다 저랬다해서 이렇게 했겠느냐 하는 것이죠.
시험 보는 학생도 이랬다 저랬다 하면 시험 보는 기간이 늘어난다. 1년에 끝낼 것을 2년 3년 4년이 걸린다.
대종사님이 만약에 이랬다 저랬다 하면서, 기분 나쁘면 쉬자, 몸 아프면 쉬자, 짜증나니깐 쉬자,
이렇게 해서 과연 회상을 만들어 막판에만 잘하면 되겠는가?
결국은 우리가 넘어지고 자빠져도 일어서야겠지만 넘어지고 자빠지는 그것을 최소화 하자.
그래서 의사들이 그런데요. 처음에는 치료를 중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 care가 중요하구나.’ 실질적 의료행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보살핌이구나. 그 보살핌도 미리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의학만 그러냐? 우리 공부도 마찬가지다.
우리 공부도 상처입고 넘어지고 자빠져서 “교무님 살려주세요”하는 사람은 상처를 해줘야죠.
그렇지만 사전에 인생의 길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니까 20대에는 무엇을 해야하고, 30대에는 무엇을 해야하고,
하루 일과는 어떻게 해야하고, 마음은 어떻게 하고, 앞으로 삶의 방향은 어떻게 해야하고,
이런 경계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사전에 미리 준비하고 사전에 차단해야 하지 않는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불나서 소방설치하면 뭐하냐 말입니다.
과연 대종사님은... 질문할게요. 뛰어난 천품을 가져서 그렇게 시종일관한 성의가 있었을까요? 대답해보세요.
대종사님은 나와 다른 뛰어난 성품을 가지셨을까요? 그래서 일생동안 시종일관한 성의가 있었을까요?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 하는 것 같다. 저 분은 나랑 다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뛰어난 천품도 있었지만 그만한 성의,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성자가 되셨고,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고, 열의가 있었기 때문에 뛰어난 천품도 오히려 갖춰졌다.
천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시종일관한 열의와 성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뛰어난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일생동안 성의를 지속한게 아니라,
일생동안 지속한 그런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분은 뛰어난 역량을 갖추지 않으셨는가 생각한다.
교당에 처음와서 ‘워매, 좋은거.’ ‘나 이거 괜찮구나’ 이런 단계를 넘어서서
‘야~ 내 일생을 여기에 받칠만 하구나’ ‘내가 여기에 어떻게 살아볼 것인가’ 하는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 생주이멸하죠. 바람에 파도가 물결치듯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마음이 “교무님 저 무결석하겠습니다.” “이 생에 항마위 출가위 하겠습니다.” “교무님 제가 좌선 안 빠지겠습니다.” “교무님 제가 사경 언제까지 끝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물결치듯이 왔다리 갔다리 하게 된다.
그것을 잡는 마음이 서원이고 신심이다.
반조하지 않으면 무서운 생주이멸하는 그 마음의 변화에 속아 버린다.
지속적으로 챙기지 않으면 속아 넘어간다.
처음에는 “걱정마세요 교무님.” 하다가 한 경계 오면 흔들린다.
그래도 흔들린 줄은 안다. 조금 더 진도 나가면 흔들린 줄도 모른다.
또 더 지나가면 그것이 편해요. 헌배 안하는 것이 편하고, 좌선 안하는 것이 편하고, 법회 빠지는 것이 편해요.
‘내가 그때 뭐하러 그런 생각을 했다냐?’
저번에 우리 수한이가 종법사님 법문 듣고
‘그래, 시시작주, 처처작주. 어디서나 주인이 되어야지. 그래! 내가 서울대 원불교동아리 회장 한 번 해봐야지!’ 하다가
힘드니까 ‘내가 왜 그 때 그 법문을 받들어서 회장을 했을까’ 한다.
법문 받들 때 그 기뻤던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내가 왜 그 법문을 받들어서 이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마음은 기기묘묘하다. 그래서 세상에 마음같이 기묘한 것이 없고 마음 같이 변화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아서 그 마음을 내가 잡을 때 잡을 줄 알고, 놓을 때 놓을 줄 알고,
쓸 데 쓸 줄 아는 것은 신통 중에 신통이요. 이 세상에 가장 능력있는 사람 중에 능력있는 것이다.
세번째가 뭡니까?
청탁병용하신 포용이다.
포용이 뭔 말씀인지 아시겠죠? 여러분들 어떠세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죠.
대종사님은 대중을 거느리실 때 미운 짓거리 하는 사람을 잘 무마하시고 애호하셨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을 누가 못 보냐? 미운 사람 잘 보는 것이 바로 대자대비다.
여러분 그렇게 되세요? 저도 잘 안 되요.
그런데 법문에 속으면 안되는데, 대종사님같이 일체 중생과 부처가 전부 하나의 신경 안에서는 이게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법률에서는 국가에서는 사형을 시키는 사람도 있고, 감옥에 가둬 넣는 사람도 있고, 전자팔찌 채워서 감시당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왜 그러냐?
소자리에서 뻘짓거리 하는 사람 잡아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그려면 종교가에서는 그런 짓거리 하지 말아야 하느냐?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을 사전에 예방해주고 그런 사람을 최대한 충고를 하고 지도를 하지만, 때로 아닐 때는 잠시 놓을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이 “교당에 오면 마음만 편하고, 순수한 것을 간직하고 싶은데, 교화하라고 하고 데이터를 뽑으라고 하고 돈을 내라고 합니다.
여기는 돈 떠난데 아니에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돈 밝혀도 여기는 돈을 안 밝혀야하고, 세상 사람들은 다 명예 드러내는데, 여기서는 그런 것 좀 없이 하고,
세상에서는 다 계산속인데 여기서는 좀 순수한 마음 갖고 살면 안 됩니까?
어때요? 그럴 듯 하죠? 여기에 대해서 제가 선물을 줄게요!
순수- 자체
지혜에 바탕한 순수
어두운 순수
잘 보세요. 내가 연구 많이 했어요.
사람들이 순수함을 좋아합니다. 원래 우리 본래 마음이 순수해요. 그런데 살면서 때자국이 끼죠.
그런데 자, 이 세상은 순수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일과 이치 속에서 일과 이치가 구분되고 미운 사람도 있고 거짓말하는 사람도 있고 악인도 있고 둘려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거짓말 할 수 있고, 종교가에 들어와서는 돈도 밝히지 말고 돈이라는 것은 말도 말고 프로테이지도 말도 말고
그냥 순수한 마음만 지켜주고, 무슨 교화의 데이터를 빼고 몇 명을 언제까지 교화하고 왜 순수함이 없고 계산적이십니까?
그것이 바로 무식한 소리다.
그것은 바로 뭐냐?
순수를 강조한 사람 중에 어두운 순수를 착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즉 순수하기는 하는데 일에 어두워요.
그러면서 이 어두운 순수한 사람은 일 잘 하는 사람은 순수하지 않다.
마치, 겸손과 적극성을 구분하지 못한 것과 같다. 그 정도 수준은 넘어서야 한다.
적극적인 사람을 겸손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을 적극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과 적극은 하나다.
마찬가지다. 일 못하고 마음만 착한 사람을 순수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순수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순수에요. 알지 못하는 순수가 아니다.
잘 돈 벌 줄도 알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줄도 알아. 그것에 바탕한 순수여야 하지,
게으름에 바탕한 순수, 무지에 바탕한 순수, 어둠에 바탕한 순수를 순수로 착각하고 여기서도 그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깨달음을 회복한 순수. 본래 것을 회복한 순수여야지.
자, 돈 이야기 합시다. 종교가에서 돈 이야기를 해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사회에서 많이 하니까 여기서는 안 해야하지 않겠어요? 머리아프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반인이 생각하는 돈. 종교가에서 생각하는 돈.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지요.
보통 사람들에게 돈은 의식주를 운용하기 위한 돈이에요.
거기다가 더 나아가서 더 추구하기 위해서, 나만이 더 앞서고, 나만이 더 편하고, 나만이 더 취하려고 하는 돈이 많다.
그러나 기본은 의식주를 위한 돈이 필요한 한 것이지요.
교당오려고 해도 차비도 있어야 하고, 교당 유지하는데도 전기요금도 있어야 하고, 고장나면 다 고쳐야 하고 해야하잖아요.
지난 달 전기요금만 해도 70만원 나왔어요. 프로젝터 고치는데 40만원 나오고, 스크린 고치는데 80만원 나오는데 고치지 못하고 있어요.
자 여기는 돈 안밝혀야 하죠? “교무님 순수하게 돈 얘기 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무지이다.
그런 사람은 일 잘하는 사람을 순수하지 못한다고 바라보는 거에요.
민첩하고 적극적인 사람을 겸손하지 못하다고 바라보는 거에요.
자, 이 돈이 철저하게 밝혀야 종교가이다. 그런데 어떤 돈이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돈은 기본 의식주. 거기만이 아니라 내가 더 취하려고 하는 즉 사를 위한 돈이다.
그런데 종교가의 돈은 철저히 대중을 위한 돈이다. 부처님 위한 돈이다.
그래서 종교의 역할 중에 재분배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종교의 역할 중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살려주는 역할,
희망을 주는 역할,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고 그 속에서 때로는 복지 장학, 의료 혜택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것을 하는데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돈은 에너지다.
에너지가 없이 교당이 어떻게 돌아가느냐? 교당에 돈 필요 없으니까 전기 다 끄고, 마이크도 다 끕시다.
마이크도 필요없지. 인위적인 것이니까.
자연주의로 돌아가서 마이크도 다 끄고 없애버리고 전기도 다 끄고 깜깜한 상태에서 살아볼까요?
이런 무식한 사람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종교가도 돈을 밝혀야하는데 진리를 바탕으로 한 돈이어야 한다.
영육쌍전할 때 말씀드렸죠. 어떤 사람이 원불교에 들어왔는데, 하도 세상 사람들이 돈을 밝혀서 그게 싫어서 종교가에 들어왔어요.
법문을 듣다보니 ‘그래 돈이라는 것은 죽을 때 가져 가지 못하는 거구나.’ ‘그래 돈이 참 허망한 것이다.
살아있을 때 필요하지만 내 것도 아니고, 아무리 잘 지어놔봤자 죽을 때 가져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식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싸움만 하는 구나.’
‘내가 관 속에 들어갈 때는, 내가 불에 태워질 때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
그래서 철저하게 돈을 쫒아가다가 아 돈은 허망하구나. 그런데 이 사람이 공부를 더 했어요.
그러더니 교무님 제가 욕심이 생겼나 봐요. 요즘 자꾸 돈이 생각나요.
마음공부 잘못했죠? 돈이 철저하게 쫓아가다 지쳐서 돈이 필요없다는 것을 배웠더니 공부를 하다보니 나중에 돈이 더 필요하더라.
처음의 돈은 나 하나만을 위한 돈이고, 나중의 돈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돈이다. 불사를 하기 위한 돈이다.
세상 사람들을 위한 돈이다.
처음의 돈은 내 쾌락과 내 만족과 내 편안함만을 추구하기 위한 돈이었다.
돈에 빠지면 안 되지만 돈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돈을 무시한 사람은 가난할 것이고, 돈에 빠진 사람은 죄업이 많을 것입니다.
돈에 빠지지도 않고 무시 하지도 않고 철저한 대중을 위한 공의 세계. 인과를 바탕한 돈. 불사를 위한 돈.
그래서 돈을 벌어도 나 하나 잘먹고 잘 살려고 열심히 돈 벌고 그 중에 일부 쪼금 교당에 내겠다 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 생에 내가 교당 5개를 세우겠다.
나는 장학재단을 하나 세우겠다. 학사 짓는다면 최소한 얼마를 하겠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내가 돈을 추구하는 것과, 종교가에 와서 아이고 돈 머리 아파. 고생 안 하고 싶어. 이렇게 하는 것과 어떠냐?
원불교는 생활종교입니다.
철저하게 돈도 밝혀야 하지만 진리에 바탕한 돈이어야 하고, 명예도 무시하고 명예있는 사람 더럽게 보면 안되요.
그 명예도 철저하게 있을 자리에는 있어야 하는 거에요.
단지 욕심에 바탕한 끌림의 명예가 아니라 바로 공을 위한 명예 대중을 위한 명예, 진리를 위한 명예가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누가 “교무님, 왜 차별심을 가지십니까?” 그래요.
대종사님도 “나도 이쁜 짓거리 하는 사람이 예쁘다.”
그래서 자와 비 아닙니까? 예쁜 사람한테 자요, 미운 짓거리 하는 사람에겐 비다.
에라, 멍청한 놈아 하면서도 다시 살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대종사님이 목 뒤에 뭐가 많이 나셨다. 대산종사님도 목 뒤에 뭐가 많이 나셨다. 정산종사 암이셨다.
어떤 사람은 그래요. “정산종사님은 자비 덕이 넘치셔서 성질도 안내셨고 일생을 자비훈풍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야, 정산종사님이 그랬다고 누가 그러냐? 정산종사님이 화가 나면요 눈썹이 호랑이처럼 서버린다.
대산종사님은 화가 나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오신다.
대종사님 화가 나시면 총부 정문에 들어오면서부터 안다.
여러분들 부처님을 잘못 아시고 있다.
부처님은 어떤 양반이냐? 전능하신 양반이다. 전지하신 양반이다.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똑같은 말이다. 또 전덕하신 양반이다.
全자는 公자와 같은 말이다. 전체를 다 능하셨고, 전체를 다 아셨고, 전체를 다 덕으로 끌어안으셨다.
전능 전지 전덕이라는 것은 만능 만지 만덕이다. 똑같은 소리다.
그것은 또 무능 무지 무덕이다.
무능 무지 무덕은 그대로 전능 전지 전덕, 만능 만지 만덕과 똑같은 소리다.
그래서 우리가 덕이 있다 생각하면 덕이라고 하는 것이 없이 그대로 나투어지게 되요.
안다는 것에 가려지면 더 배우려 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 없이 소소영영 아는 것 이것이 무지라는 것이다.
능력이라는 것도 나는 능력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부족한 것이다.
이해하실려나 모르겠다.
수양을 통해서 전능 만능 무능이 갖추어지고,
연구를 통해서 전지 만지 무지가 갖춰지는 것이고,
취사를 통해서 실행공부를 통해서 전능 만능 무능이 갖춰지는 것이다.
부처님은 요 3대력을 갖추신 분이다.
질문과 답변
Q. 이제선 교우님 : 만능만지만덕하고 무능무지무덕하고 같다고 하셨는데 잘 이해가 안됩니다.
내가 안다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결국 그것에 막혀서 알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내가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맞는건가요??
A .교무님 : 그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안다는 상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모른다는 상이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굴레와 테두리 한계가 있으면 그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안다 하면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고, 이것이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는 능력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순수함도 아니고,
진짜 능력있는 것이나 진짜 아는 것이나 진짜 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까 말한 공심이라던가 포용이라던가 성의는 여기에 바탕한 것이다.
바로 일원상자리이다. 일원상 그 자리가 무능 무지 무덕의 자리다.
내 안의 본래의 성품자리가 그 자리다.
내 안의 성품 자리에 무슨 아는 것이 따로 있으며 덕이라는 것이 어떻게 따로 있고,
능력이라는 것이 따로 어디있냐는 말이다.
그렇지만은 단련이 없는 무지 무능 무덕이 아니라
철저한 수양과 철저한 깨침과 철저한 솔성과정 속에서 어떻게 보면은 피어나는 꽃이죠?
우담바라. 그 바로 꽃이 참 부처님의 꽃이다. 반야의 세계가 그런 것이다.
Q. 김명선 교우님 : 지공무사인 것이 대자리에 바탕해서 공과 사가 있는 것이고,
대자리에 바탕하지 않고 공과 사가 있으면 지공무사가 아니고 선공후사정도라고 말씀하신 것과
만능이랑 무능이랑 말씀하신 것이 잘 정리가 안 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대자리를 깨우치려고 노력을 하는데 내가 무엇을 했다라는 생각은 들 수 있잖아요.
내가 어떤 덕을 베풀었다는 자만이 아니라 인식은 할 수가 있잖아요.
그 순간에 그게 상으로 가려지지 않고서는 대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그런 인식이 있되 속지 않는 것인지?
생활에 대조할 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A. 교무님 : 내 근원은, 내 안은 지공무사요.
내가 마음을 꺼내서 쓸 때는 용자리로 선공후사로 쓰는 거에요. 그렇지많은 체를 떠나지 않고 선공후사에요.
그리고 이 일을 저지르고 나면 이 일을 마치고 하루를 참회할 때나 그 일을 끝마칠 때는
반드시 다시 돌아와야 한다. 우리가 저녁에 참회대조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좌선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자꾸 번뇌망상으로 마음이 나가버리잖아요. 자꾸 사심이 나잖아요.
그러면 조석으로 수시 때때로 본래 내 자리로 회귀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공부다. 이것이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것이다.
지공무사와 선공후사가 서로 맞물려돌아가야지, 지공무사가 빠져버린 선공후사는 상대된 선공후사다.
그래서 칭찬 안 해주고 상 안 주면 열 받는 거에요. 일 안하는 사람 미워하는 것이다.
기분 나쁘면 안하는 것이다. 이름 나올 때만 돈 내는 사람 있다. 조용히 뒤에서 안 해요.
그 사람은 지공무사도 아니고 선공후사도 아니고 저~ 구석의 빙공영사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훈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