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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성(神靈性)과 인간성(人間性)의 조화(調和)
-신령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일 수 있을까? -
Harvie M. Conn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낡은 성경책을 들고 다니며 미니스커트 앞에서 눈살을 찌푸리는 것인가? 수요 기도회까지도 빠지지 않고 다니며 tv를 볼 때 문화 프로그램만 보는 것을 의미하는 가? 자연적인 것을 배제한 초자연적인 것, 육체 없는 영혼, 세속을 도외시한 성스러운 생활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하면 예수 장이 냄새를 풍기지 않고 예수 믿는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신령하다는 것에 대한 오늘의 잘 못된 두 가지의 정의는 오늘에 와서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켜 버렸다. 세속적인 신앙은 영혼 없는 육체를, 그리고 영혼 위주의 신앙은 육체 없는 영혼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가 영적예배(롬12:1)의 의미를 뜯어 고치는, 즉 전자는 온 세상만큼이나 광범한 것으로, 후자는 포켓용 기도서만큼이나 작은 것으로 변형시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세속적 신앙
세속적 신앙은 기독교와 세속화 사이의 전쟁을 종식시키려는 일차원적 요구이다. 이 운동의 대제사장격인 하비콕스는 세속화는 복음의 적이 아니라 그 결실이며 세속 도시는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주장한다. 영혼 위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를 따르려 하며 세속적 신앙은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을 지워 버린다. 그래서 WCC 2차 총회(1954)의 주제가 교회와 세상의 소망되신 그리스도에서 세상의 소망되신 그리스도로 바뀌었으며 같은 이유로 wcc 뉴델리 총회(1961)는 헌장 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구절에서 우리라는 말을 빼어 버렸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말은 제한적이어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떼어 놓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세속적 신앙은 단순히 기독교인에게 현실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단순히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현실 참여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기독교인이다 라고 말한다. 세속적 신앙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가 아닌 당신의 하늘인 이 땅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라고 기도한다. 세속적 신앙은 우리에게 현세에서 내세(천국이든, 니르바나이든) 로 통하는 모든 도피구를 봉쇄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형태의 일차원적 신앙에 의하면 우리가 가진 것은 바로 현재 이곳뿐이라는 것이다. 세속적인 것이야 말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거룩한 것이라는 것이다.
영혼 위주의 신앙
일차원적 신앙의 다른 한쪽 끝에서는 영혼위주의 신앙이 성대속(聖對俗) 식의 응수를 하고 있다. 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으로 만족해 왔다. 세속적 신앙이 부당한 임금을 받고 쥐가 우글거리는 셋집을 얻어 사는 사람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묻는 물음에 대해 영혼 중심의 신앙은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부당한 임금이나 쥐가 우글거리는 셋집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라고 응수한다. 전자는 영적인 것을 현세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반면 후자는 내세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또한 전자는 개혁을 인정하나 후자는 현 상태를 인정하면서 영성을 정의하고 있다. 둘 다 일차원적이다. 세속적 신앙은 현재 시상으로 현제 이곳에 사는 반면, 영혼 위주의 신앙은 미래 시상으로 곧 오게 될 것에 산다. 전자는 내다 보자라고 말하나 후자는 올려다 보자라고 말한다. 전자는 영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정의하나 후자는 비물질적인 것으로 정의한다. 또한 전자는 보이는 것으로, 후자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영혼만의 존재로 축소시킬 때 사회와의 접촉은 간접적인 것이 된다. V. ground 가 그러한 입장을 분석한대로 복음의 메시지는 그 적용과 교회 외적인 일에 있어서 그 사회성(社會性)이 단순히 부수적인 것으로 보여 진다. 이와 같은 유리한 위치에서 본다면 세속적 신앙은 제도적 교회를 사회개혁을 수행하는 기구로 만들고 있다는 비난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서 구분화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신앙은 인생관을 제공하지도 못하며 따라서 하나님 중심적인 것도 되지 못한다. 브라질의 대학생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마르크스에게로 전향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구분화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네들 프로테스탄트 들은 담배와 술을 끊고 춤을 추지 않게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주린 자들을 먹이고 문맹자들을 가르치며 착취와 불의를 근절시킬 것을 말해 준다. 이 -분화 때문에 흑인 사회는 흑백 분리주의 교회의 강단에서 신령한 것을 외치는 기독교에 반감을 품는다. 말콤 엑스는 이슬람교의 성직자로 지내면서 일찍이 이러한 구분( 區分)교회에 반발했다. 그는 구분교회를 배척하면서 그리스도마저 함께 버렸다. 노예를 부리는 백인들이 믿는 기독교는 여기 북아메리카의 벌판에 있는 우리 흑인들에게 우리가 죽으면 날개가 돋아나서 하나님이 마련해 둔 천당이란 특별한 곳으로 날아가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것이 우리 흑인들의 머리를 세뇌시키기 위해 사용된 백인들의 기독교이다. 이 푸른 눈의 악마가 우리의 등을 계속 짓밟기 위해 ....우리의 눈을 천당의 달콤한 것에 묶어 두기 위해... 그 자신은 천국에서 누릴 권리를 여기...이 땅에서...이 생에서 누리면서 기독교를 왜곡시켜 왔다. D. 존슨과 G. 코넬이 그들의 저서 ‘빗나간 예상’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마 영혼 위주의 신앙일 것이다. 북미에서 3,454명의 교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그들에게 ‘지역교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을 했다. 14가지로 분류한 리스트에서 그 으뜸을 차지한 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전도 업무였고 이와 거의 비슷하게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 것은 예배의식 제공이었다. 그 중간쯤에 지역사회에 대한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기능이 있었다(p.31,82) 이 여론 조사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를 위로와 안심 그리고 피난처를 제공하는 공적 기관으로 생각한다고 논평했다(P.30).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과 사회 양심으로서의 기능 사이에 존재하는 이 간격은 영혼 위주의 신앙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영혼 위주의 신앙이 얼마만큼의 성서적인 것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성서의 전부를 받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 믿지 못하는 영혼의 자율성에 대해 스스로 부여한 견해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차원적 신령
영혼 없는 육체의 일차원적 오류와 육체 없는 영혼의 일차원적 공포를 피할 길을 모색하면서 오늘의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중생과 함께 시작되어 현실 그대로의 사회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사회적 양심을 요구하는 책들을 쓰고 있다. 예수님의 구속계획은 최근의 복음주의자들이 빈번히 빠뜨렸던 사회적 구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그 결여된 조화에 대한 해답은 또 하나의 구원 즉 크리스챤 센튜리는 물론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의 주장도 받아들이며, 자유주의의 이웃을 사랑하고 봉사하는 수평적 의무와 보수 복음주의의 하나님에 대한 수직적 의무, 이 두 가지의 가장 좋은 점을 결합시킬 차원을 부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극화는 이제 드러나고 있는 공통성 속에서 해결되지 않으면 안된다 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은 두 가지의 명령, 문화적 위임명령(창1:28) 과 복음전도 위임명령(마28:18-20)에 따르도록 요청되고 있다. 과거에 세속적 신앙은 문화적 명령에 대해 구약의 예언을 강조하는 일변도였다. 그리고 영혼 위주의 신앙은 복음전도 명령에 대하여 신약의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일변도였다. 두 차원은 복음 전도 명령에 중점을 두면서 서로를 교정해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한 차원에 다른 차원을 부가하는 것으로 구분화를 제거하지는 못한다. 이 일은 또 다른 하나의 구분을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에는 육체냐 영혼이냐, 구원이냐 사회적 행동이냐, 교회냐 사회냐의 문제였으나 지금은 육체와 영혼, 구원과 사회적 행동, 교회와 사회의 문제이다. 이 두 추상적 개념들은 완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 그 추상적 개념들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 숨겨져 있는 대로 그대로 남아있다. 교회가 육체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필요에만 관여한다는 인상이나, 혹은 교회의 사명이 극도로 영적인 것이라는 즉 교회의 관심이 생의 비물질적 양상의 주위만을 맴돌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 만큼, 교회와 그 증인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없다.
그 추상적 개념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영역들에 대해 근본적인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신약의 은총이 구약의 시내산 율법에 대한 교정 수단이 될 수 없듯이 세속적 신앙이 영혼 위주의 신앙의 균형을 바로 잡는 교정 수단이 될 수 없앋. 세속적 신앙은 복음전도 명령을 거부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명령 역시 거부해 왔다. 이 땅을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할 것을 요구하는 문화적 명령은 이 땅을 정치적 수단에 의해 인간의 왕국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는 복리 번영 명령으로 바뀌어졌다. 이런 것이 어떻게 전도와 선교에 복음주의적으로 관여하는 일에 대해 필요한 교정 수단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같은 식으로 영혼 위주의 신앙은 복음전도 명령을 마 28:18-20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신령하기는 하나 비물질적인 그리고 육체의 필요에 일차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사명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이런 것이 어떻게 사회 정의와 정치적 행동에 자유롭게 관여하는 일에 대해 필요한 교정 수단을 제공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것의 정의 자체가 논쟁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언약적 신령
문화적 명령과 복음전도 명령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며 둘 다 동시에 취하는 관계도 아니고 어느 것에 우열을 두는 관계도 아니다. 존 m.l. young이 본대로 창 1:28은 창조주께서 그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그의 사명을 처음으로 선포하시는 위임명령 언약이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생활을 지배하는 고립된 명령 이상이다. 그것은 생명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체결을 의미한다. 그 언약 파괴에 대한 저주가 아직 유효한 것처럼 확실히 그 언약의 요구 역시 아주 유효하다(창2:17). 다만 그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 지금은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은총의 이름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였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이다.(마28:18) 소위 선교적 명령이란 구속 은총 속에서 이루어지는 위임명령 언약의 고대하던 성취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두 개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간과의 언약관계에 있어서 나타난 두 단계일 뿐이다. 전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인에게 의무언약을 말씀하시며 후자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약 파괴자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의 언약에 대해 말씀하신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이러한 용어 사용의 합법성을 의심케 할 정도로 통합시키는 것은 바로 이 언약차원, 즉 제 4차원이다. 신령한 것이란 물질적인 것, 자연적인 것, 가시적인 것, 세속적인 것에 반대되는 비물질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거룩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이제 성령님의 치유하시는 손길에 닿은 그 삶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것은 주님께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거룩하고 영적인 것에만 역사하도록 계획되어 있지는 않다. 하나님의 중심의 신앙은 엿새 만에 자연을 창조하시고 매일의 만드신 것 각각에 축복의 언약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1:4,10,12,18,21,25) 그 전체에 특별한 축복의 언약을 말씀하신(1:31) 하나님을 선포한다. 사람들이 소위 본체의 반 (the natural half of reality) 이라고 불러 온 하늘과 땅은 하나님에 의해 언약의 증인들로 세움을 입었다(시19:1, 롬1:20) 그들은 이 땅이 창조주께서 그의 피조물과 만나 교제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동산(겔 28:13) 으로 계획된 사실에 대한 증인들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가졌던 교제는 지상의 물질적인, 즉 그가 자연을 정복하여 다스리는, 활동 속에 나타난다(창1:28). 그것이 진정한 신령이다.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그것들을 구별하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온전히 통합시킨다.
진정 통합된 신령
아담의 범죄(창3)로 인한 상처는 너무나 깊어서 그 자신과 하나님 사이뿐 아니라 (3:10,15) 그와 자연사이(18-19절) 그리고 같은 인간 사이에도 (12,13) 깊은 틈이 생겼다. 하나님에 의해 그 회복이 약속되었는데(15절) 그것은 죄가 만들어 놓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피조물 사이의 틈을 틀림없이 제거할 것이었다. 생명의 약속 가운데 아담과 그 후손을 위한 신성한 목적으로 표현한 문화적 위임명령은 그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통합의 날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성취를 위하여 신기원의 날을 기다려야만 했다. 모든 나라를 제자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부름이며 장차 올 왕국의 새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있어서(요3:3,5)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인 복음전도 명령은 그 통합과 성취를 위한 새로운 수단이 되었다.
이는 구원에의 두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듯 두 개의 위임명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은혜로의 한 부름이며 인간이 문화 건설(창1:28) 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인 것이다. 진정한 신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은둔자가 되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정치적 방관자가 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신령만이 유일하게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에서, 세상 앞에서 문화를 향하여 하나님 말씀의 사자가 될 수 있게 한다.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별하기를 거부한 이와 같은 사실이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시내 산에서 주어진 모세 율법 속에 기록되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 산으로 이끌어 왔다. 구속이란 성경 어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으로 부터 홍해를 건너 시내 산으로 가는 승리의 행군 도중에 생겨났다. 나의 백성을 보내라 라는 말은 단순히 영혼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 그 이상의 요구이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이것이 아모스로 하여금 벧엘로 뛰어 들어가게 했다. 자비와 긍휼이 아니라 공의를 베풀기를 원하셨을 때 하나님으로 하여금 진노하시게 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암 5:24). 이 거부는 부동산으로 폭리를 취하며 소수자를 차별하는(사 1:28). 렘5:28) 물질적 행위로부터 기도와 예배의 영적 행위를 분리하려는 (사5:8,9)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사3:15). 그러나 하나님의 희년의 마지막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레25:) 그것은 괴로움을 당하는 자에게 기쁜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에게 고침을, 사로잡힌 자에게 해방을 포로에게는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었다(사61:1).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온전히 도우실 구원의 날(사49;8, 고후 6:2)이, 회복의 날이,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으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며, 황폐한 성읍을 중수할 날이 (사61:4,행15:13-18)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회가, 그의 aquarius 시대가, 메시야의 복된 계획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며, 재를 화환으로 바꾸며, 애통의 기름을 기쁨의 기름으로 바꾸게 될 것 이었다.
성령적 신령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오실 때 일어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왕국회복 사업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구세주를 보내실 것이었다. 그리고 주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머물러 그 일을 하게 하실 것이었다(사61:1)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실 것이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하시리라(사11:2,4) 나의 종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사42:1).
진정한 신령이 메시야와 그 백성의 표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의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도래할 것이었다. 구약을 신약으로 전환시킨 아름다운 소식은 바로 이 진정 신령한 날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날은 그날의 시작을 알릴, 그의 동정녀 탄생이 성령과 밀접하게 관련된(눅1:35) 메시야가, 그리고 그의 오심이 새로운 바람을 설명하려는 복음서 기자들의 입술에 새로운 언어를 두실 메시야가 오셨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라는 말은 새로운 날의 백성- 세례요한(눅1:15), 엘리사벧(1:14), 사가랴(1:63), 시므온(2:25) -의 표가 되는 새로운 슬로건이 되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그이 자신이 (눅3:16,행1:5)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눅 3:22) 메시야 직분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으셨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 직분을 성취함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성령에 이끌리시어 40일간 광야에 계셨다(눅4:2). 시험을 받으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돌아오신 후(눅4:14)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희년이 성령의 권능으로 도래한 것을 의식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설교하시면서 그의 메시야 사역을 수행하셨다(눅4:17-21). 성령의 지시로 그는 죄인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고 성령에 의해 부활하실 곳인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롬8:11,벧전3:18).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이러한 신령한 사업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가? 마리아라면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주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으니 그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1:46,52,53)라고 외친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그 큰일들을 시작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그 일은 시작되어야 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며, 해방자 이신 이가 역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헤롯의 아들들이 떨며 왕국을 지키는 자들이 경성할지어다. 하나님께서 권력에 굶주린 자들의 일을 부수시며, 이 땅을 그의 백성에게로 돌리시려 하고 있었다. 그는 거만한 군인들과 경제적 압박자들을 일소하시려고 했다.
새 세계의 신령
예수께서는 갈보리에서 그의 사회 회복사업을 시작하셨다. 그는 사회를 그 죄에 묶어 두는 사슬을 끊으셨다. 골고다로 불리 우는 피 흘려진 은총의 보좌에서 공의와 자비는 서로 만났다. 믿음으로 세상은 하나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종말의 시작이 도래했다. 공의가 거하는 신천 신지를 장차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온전히 회복하시는 날에 있을 그 아름다움을 미리 보게 되었다(벧후3:13).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창조 사업은(고후5:17)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영광으로 완성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사회의 출발이었다. 죽임을 당하신 것처럼 서 계신 어린 양(계5:6) 예수는 세속도시나 혹은 하늘에 있는 달콤한 천국을 회복하시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갈 새 예루살렘 을 이 땅에 내리우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계21:27)
그러나 그 동안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성령의 사람처럼(행1:5,2:1-4 고전12:13) 그리스도께서 지체하시는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없다는 말인가? 바울이 우리가 육체에 거하지 않고 영에 거한다고 말한 것은 신령한 모임에서는 정치, 경찰, 빈곤 문제등은 논제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바울이 자연인의 몸과 신령한 몸(고전15:44)을 그리고 자연인과 신령한 사람을 대조하여 이야기할 때 보통의 평범한 크리스천과 달리 보이게 하는 특별한 어떤 것을 가진 성직자를 가리키고 있는가? 만일 성령안에(롬7:6, 8:9,고전12:3) 있게 되면 그로 인해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에서부터 나오게 되는가? 오히려 실은 그 반대이다. 육체에 거한다는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을 빌리면)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것이다. 육과 영을 대조하는 의미에서 본다면 육이란 그리스도 밖에서의 삶을 말하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어느 한쪽에 ) 완전히 의탁하려는 싸움에서 큰 잘못된 쪽 사탄 편에 있는 것을 말한다(갈5:16). 육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삶,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삶, 죄 속에서 사는 삶에 대한 바울의 경구이다. 마찬가지로 성령 안에 거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아래 있어서 성령께서 이를 XD하여 자신을 나타내려 하시는 기관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고전12:3). 영과 육이란 말은 둘다 그것이 지배하는 전 상황을 속기한 것이다. 성령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고 그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상황 속에 거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신기원의 날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 후 영광 안에 들어가셨으며 또한 그의 영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새로운 관계, 새로운 기질,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새 창조를 이끄시는 사역을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신령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 신령한 자들의 세계 성령에 의해 생겨난,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성령에 의해 붙잡힌 새로운 스타일의 삶 속으로 이끌어 넣는다. 그것은 외부적인 사역에 반대되는 내면적 사역이 아니라, Geerhar-dun Vos 가 표현한 대로 ‘전혀 새로운 환경이 창조되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전혀 새로운 세계... 주위의 세계가 새로운 모습과 빛깔을 띄게 되었다‘. 새 창조를 이루는 기관은 십자가이다. 그 주역은 성령께서 맡고 계시며 그 무대는 역사이다. 크리스쳔은 새로운 세계에 사는 새로운 인간이다. 성령 안에 거한다는 것은 역사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그것을 적용하는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 도래한 ’역사 속의 새로운 현실에의 참여‘이다. 그래서 신약의 서신들은 정치적 착취와 인종차별, 이교 의식에 허비되는 음식, 여자의 지위, 가족관계, 의복에 대한 예법, 비기독교인과의 관계, 징세, 매음, 동성연애, 빈곤추방 같은 문제를 포함하는 신령한 삶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찬 것이다. 신령한 것을 비물질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일은 신약의 표준에 의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신령한 생활 속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무기가 들어 있다. 우리의 왕 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 시에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셨다(슥9:9). 그는 그의 백성에게 왕의 홀이 아니라 수건을 주어 다스리게 하신다(요13:12-15). 로마의 권세는 전쟁이 아니라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에게 십리를 함께 가는(마5:41)‘양보와 희생의 미덕에 의해 와해되었다. 사회 부정이나 정부의 부패, 인종차별, 빈민가의 증오에 대항할 무기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갈5:22-23)와 같은 성령의 열매이다 . 신령한 삶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갈 것인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지혜 되심을 선포하면서 크리스챤 스쿨 망을 조직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빈민가에 들어가야 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남의 사랑이심을 선포하면서 그들은 회개와 성령 안에서의 새 생활로 이끌기 위해 한국과 홍콩의 사창가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왕과 의로운 재판장이심을 선포하면서 워터게이트홀 안으로 형제가 그 이웃으로부터 격리된 교회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교회가 마약중독자 재활 계획에 참여하여 변두리의 크리스챤 스쿨이 흑인에게 그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신령한 순례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 괴로움은 성령의 새 날이 도래했으나 아직 세상이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자의 괴로움이다. 그 괴로움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알고 고백하며 섬기는 곳마다 새로운 것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자의 괴로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옛날의 속박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가 갈보리에서 이미 얻어졌으나 그 성취를 보기 위해서는 영광의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자의 괴로움이다. 이 세상의 신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너무 빈번히 사회 속에 새 창조의 특성인 근본적인 의와 사랑을 표시하는 것을이 너무나 적은 것을 본다. 그래서 신령한 자들은 이 땅 위에서 계속 기도하며 제단 아래에서 그들의 형제와 함께 괴로워한다.
‘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계6:9)
-신학지남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