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 12일은 내가 998산우회에 처음 가입한 날이자, 낙남정맥 산행 첫날이기도 하다. 김해 매리에서 낙남정맥 산행의 첫발을 내디딘 후 2년 10개월만인 오늘 마지막 구간을 달려가게 되었다. 그 동안 숫한 오르내림과 가시밭길과 칡넝쿨과 억새풀이 발을 걸고 넘어지는 232km의 험한 산길을, 한 여름 뙤약볕과 살을 에는 한 겨울 추위를 견디며 쉬지 않고 달려 오늘 그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오늘 산행은, 오전 10시 30분 하동 묵계의 고운동치에서 외삼신봉, 삼신봉을 거쳐 영신봉(1651m)까지 가는 것이 A코스이고, B코스는 산청 거림에서 세석산장을 거쳐 영신봉까지 가기로 하였다.
A코스는 15명이 참가하고, B코스에는 12명이 동참하였다. 낙남정맥 마지막 코스인 오늘 당연히 전 코스를 걸어야 하지만, 컨디션이 좀 좋지 않아 자존심을 억제하고 B코스를 택한 사람들의 마음은 한없이 서운하고 허전하였지만, 우리의 대표적인 산꾼 산행고문과 윤총무를 비롯한 열 다섯 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대장정의 대미를 장식해 줄 거라고 믿고 거림으로 돌아서 왔다.
마산에서 하동과 산청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 들에는 기계를 이용한 벼 수확이 한창이었다. 옛날 농촌처럼 들에 벼를 베고 깻단을 묶는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락은 베어지고 타작은 진행 되고 있었다. 요즘은 콤바인이란 기계가 베기에서 타작하여 부대에 넣기까지 일관작업으로 다해 주기 때문에 벼농사 짓기가 훨씬 수월하다. 마을에는 집집마다 빨갛게 감이 익어가고 있어서 가을의 운치가 한결 돋보인다. 밭 언덕이나 산기슭엔 보라색 쑥부쟁이꽃이 한창이다. 가끔 흰색의 구절초가 함께 피어 있어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단풍과 함께 산촌의 가을 풍경을 아름답게 해 주고 있다.
12시 15분, 우리는 내대터널을 지나 거림이란 곳에 도착하여 오후 5시까지 버스 있는 곳 까지 모이기로 하고 산행을 시작하였다. 12명 중에 네 사람은 세석산장에서 A팀과 합류하여 내일 천황봉까지 가기로 하고 나머지 아홉사람은 오후에 마산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거림으로 오는 산골엔 옛날 집은 거의 보이지 않고 모두 반듯반듯한 양옥들이다. 여름 피서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지은 민박집들인 모양이다. 집 주변의 언덕엔 토종벌집이 즐비하다. 지리산 기슭에 사는 분들에게는 큰 수입원이란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는 비교적 완만하다. 지리산 등산로엔 태풍 매미가 수월하게 지나간 것 같다. 마산 근처의 산처럼 넘어지고 부러진 나무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들도 온전하게 붙어 있어 단풍이 정상적으로 드는 것 같다.
큰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 소리가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을 노래한다. 저렇게 큰 바위나 돌들도 여름에 내리는 큰비로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 간다고 생각하니 계곡물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된다.
산 아래엔 이제 막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등산로 주변의 잡목 숲 밑에는 조릿대가 빽빽하다. 그리고 언제 조림을 하였는지 낙엽송 이 숲을 이루고 있다. 저 빽빽한 조릿대 사이에 어떻게 저런 좋은 나무가 자랄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지리산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하여 참나무, 굴참나무 등의 잡목이 울창하다. 낙엽송 조림 지역 옆에는 신갈나무가 낙엽송처럼 큰 키로 자라고 있고 그 아래엔 신갈나무 열매인 굴밤이 간혹 떨어져 있다. 도토리는 둥근데 이 열매는 길고 뽀족하다. 모양은 달라도 묵을 해 놓으면 그 맛은 같다.
13시경에 길가 바위에 둘러앉아 점심식사. 반시간 후에 다시 시작할 때엔 숲 속 길이 갑자기 어둑어둑해지더니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다. 걱정을 하며 걸어 올라가니 다시 날이 밝아진다. 비가 오면 정말 큰 일인데 내려올 때까지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중간쯤 올라가니 단풍의 색깔이 짙어지고 아름답다. 똑 같은 단풍나무인데도 어떤 것은 새빨갛고 어떤 것은 불그스레하다. 또 다른 나무는 노란색에 가까운 단풍으로 변한 것도 있다. 붉고, 노랗고,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누르스름하기도 한 단풍들이 온 산을 수놓고 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점입가경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벌써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 남은 나무들도 있다. 며칠 후면 지리산 단풍도 절정이 될 것 같다.
천팔교, 북해도교 등의 나무다리를 몇 개 건너고 나무나 철로 만든 계단도 몇개 오른다. 북해도교를 자나 나무로 된 계단과 돌로 된 계단을 지나면 가파른 나무 계단 길이 시작된다.
한참 힘겹게 올라가면 다시 완만한 등산로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세석산장까지는 그렇게 힘이 드는 가파른 길이 없다. 세석산장 가까운 곳에 오르면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러 보이고, 구상나무가 꽤 많이 자라고 있다. 주목과 구상나무 전나무는 구별이 잘 안 된다.
아름드리 나무가 보기좋게 자라고 있는 옆에는 죽어서 썩어가고 있는 나무들도 더러 보인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천수를 다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리라.
세석교 아래엔 물이 흐르지 않는다. 물도 없는 곳에 멋진 다리가 있는 것이다. 15시 15분 경에 세석산장이 보인다. 부근엔 철쭉 군락이 있어 봄이면 철쭉제라도 열릴 것 같다.
처음 보는 산장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인다. 일본 후지산 산장들이 생각난다. 너무 초라한 집들이었다. 산장 2층 난간에 " 쓰레기는 배낭 속에 추억은 가슴 속에" 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내려갈 길이 바빠 혼자서 서둘러 산장 뒤쪽으로 걸어갔다. 정산 바위에는 안테나가 세워져 있고, 생태 복원을 위한 출입금지 구역으로 되어 있다. 금줄이 쳐진 바위 근처엔 아무도 들어간 흔적이 없다, 지리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그 규정을 잘 지키는 것이 마음에 든다.
거기에서 왼쪽으로 가면 벽소령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장터목 산장이란다. 연신봉은 거기서 20분 거리이다. 내려가는 길이 바빠서 영신봉은 친구 두 사람에게 부탁하고 ㅅ형과 같이 바쁘게 하산 길을 재촉하여 약속한 시간보다 10분쯤 늦게 거림으로 내려오니 해는 지고 어둑해진다. 그런데 산장에 남기로 한 네 분이 예약이 안 되어 숙박이 어렵다고 내려온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다시 1시간 반을 더 기다리다 캄캄해지고 난 후에야 버스가 떠났다.
A코스를 산행한 14분은 (한분은 우리와 같이 내려왔음) 산장에서 자고 내일 천왕봉 등반을 할 예정이다.
나이 예순을 넘어 일흔에 가까운 회원들이 낙남정맥 전 구간을 종주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산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리라. 영남지방의 지주인 낙남정맥의 산하여 영원하라. 그리고,998회원들의 앞날에 부디 행운이 함께 하시기를!
2003념 10월 22일. 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