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부피의 책을 끝까지 읽는 일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완전한 분, 붓다의 위대한 삶과 가르침’이란 부제를 가진 <붓다 연대기>는 950쪽에 이른다. 위고의 <레미제라블>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혹은 나관중의 <삼국지> 같은 책은 훨씬 분량이 많다. 하지만 서사문학과 개인의 연대기 혹은 전기를 읽는 것은 전혀 다른 독서다.
불교 전문기자로 30년을 일하고, <선을 찾아서>(2000)와 <돌에 새긴 희망>(2006) 같은 서책을 펴낸 이학종은 2017년 이후 당진에 정착한다. 농사와 글쓰기 그리고 수행에 전념하던 그를 <붓다 연대기> 집필로 내몬 것은 의무감과 외경(畏敬)이었다. 붓다를 향해 끓어오르는 경외심과 기자의 책무가 그를 탈고의 즐거움으로 인도한 셈이다.
출가와 해탈
사끼야(석가) 왕국의 지배자 숫도다나(정반왕)가 50세, 마야 부인이 40세가 넘어서 태기가 있다. 전통에 따라 친정에서 출가하려고 길을 떠난 마야 부인은 다울라기리산이 멀리 보이는 룸비니 동산에서 산통을 느끼고 선 채 출산한다. 왕국의 브라만들은 아이에게 ‘목표를 성취하는 이’라는 이름 싯다르타를 부여한다.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이다.
싯다르타는 15세에 왕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16세에는 야소다라 공주와 혼인한다. 그러나 그의 흉중에는 수행자가 되려는 의지가 충만하다. 그가 부왕에게 말한다.
“네 가지 소원을 들어주시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건강, 영생불사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동행하게 해주십시오.” (130)
29살 나이에 아내와 아들 라훌라를 궁에 남겨두고 싯다르타는 야반(夜半)에 출가한다. 그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다의 두 선인을 찾아 명상을 통한 해탈에 도전한다.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던 그들의 가르침으로 명상의 최고단계인 ‘비상비비상처정(의식도 비의식도 아닌 경지)’에 이르지만, 그것은 오직 일시적인 열반에 지나지 않았다.
싯다르타가 선택한 두 번째 방법은 전무후무한 ‘고행’이었다. 누구도 해보지 못한 극도의 고행 6년 만에 그는 수잣따의 공양을 받고 고행을 포기한다. 싯다르타는 네란자라 강가의 아자빨라 나무 아래 길상초를 깔고 목숨을 건 선정(禪定)에 든다. 초야에 숙명통을, 중야에 천안통을, 후야에 누진통에 이름으로써 싯다르타는 완전한 해탈에 이르러 붓다가 된다.
연기법칙
선정에 든 지 18시간 만에 해탈에 이른 싯다르타는 35세의 나이에 붓다로 다시 태어난다. 붓다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의존적 발생의 원리, 즉 연기법칙을 따른다.
“이것이 존재하면, 저것 또한 존재한다. 이것이 생기면, 저것 또한 생긴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저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 또한 소멸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은 서로 기대고 의지해서 발생하여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진다. 모든 존재는 과정과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의식도 조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248-263)
연기법칙의 구체적인 실례가 ‘탐진치’ 삼독(三毒)이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 탐나는 대상을 향한 지독한 갈망(탐욕)이 성취되지 못하면 분노를 불러오고, 그 분노로 인해 인간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 까닭에 현자는 갈망과 탐욕, 미움과 증오, 무지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난 붓다는 고행할 때 알게 된 다섯 비구에게 중도와 사성제를 설한다. 범부의 방종과 수행자들이 행하는 고행의 양극단을 버리고 해탈로 인도하는 성스러운 진리가 중도(中道)이며, 그것이 번뇌를 소멸하고 열반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성제는 고통에 대한 진리(苦),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진리(集),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진리(滅), 열반에 이르는 진리(道) 네 가지다. 그는 고통을 극복하는 여덟 가지의 길(八正道)도 설한다.
붓다는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에게 연기와 탐진치 삼독을 설파한다.
“진리는 어떤 것이든 조건에 의지해서 발생하고 조건에 의지해서 소멸하는 연기(緣起)입니다. 정의 역시 연기로 설명되고 이해됩니다. 인간은 조물주나 자신이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조건들이 조합된 결과로 생성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탐진치 삼독으로 악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삼독은 제거될 수 있으며, 누구나 선도할 수 있습니다.” (335-336)
카스트의 부정과 평등사상
브라만이자 스승인 브라드와자가 15살 싯다르타에게 카스트의 위계를 성명한다.
“브라만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원리인 ‘우주아(宇宙我)’의 입을 대변하고, 우주아의 팔인 크샤트리아는 국가의 안녕과 통치를 위해 칼을 휘두를 권한과 책임이 있으며, 허벅지인 바이샤는 일용품을 생산하고 배포하며, 우주아의 발에서 태어난 수드라는 상위 세 계급에 봉사해야 합니다. 이런 사성 계급이 우주아 자체입니다.” (55-56)
싯다르타는 스승의 설명을 부정하면서 우주아를 악으로 생각한다. 수드라의 존재와 착취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붓다가 된 이후에 그와 같은 생각을 더욱 밀고 나간다. 극악한 살인자 앙굴리말라를 제자로 받아들여 회개시키고, 똥지게를 나르던 니디를 비구로 삼은 것도 그런 평등사상에서 출발한 것이다.
“더러운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종족과 신분과 직업으로 비구의 가치를 정할 수 없다. 신분이 낮고 천한 직업을 가졌더라도 행위가 훌륭하다면, 그 사람을 공경하라. 사람은 행위에 따라 천한 사람도 되고 브라만도 되는 것이다. 카스트로 인간을 구분함은 최악의 사회정의다. 인간사회 최상의 규준은 도덕성이다.” (647-693)
여성의 출가와 붓다
붓다의 깨달음을 전파하는 승가(僧家)로 인해 여성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진다. 어느 날 갑자기 출가하여 아내와 자식을 버리는 남정네가 부쩍 늘어난 까닭이다. 홀로 된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붓다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하지만 붓다는 그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나는 여자 이상으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남자 이상으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것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514)
남녀가 한 도량에서 수행함으로써 일어나게 될 불상사와 지배계급이 붓다의 승가를 공격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근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양모 고따미도 출가와 수행을 요청하자 붓다는 ‘팔경법(八敬法)’을 전제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한다.
“성냄을 멀리하라. 생명에 집착하지도 적대도 하지 말라. 탐욕과 갈애(渴愛)를 벗어나라. 탁발하고 명상하라. 성행위와 감각적 쾌락을 버려라.” (528)
고따미의 뒤를 이어 빔비사라 왕의 세 번째 왕비인 케마도 출가한다. 알라위국의 공주 쎌라, 창녀 위말라, 브라만 집안의 딸 나둣따라, 자식을 열이나 둔 어머니 쏘나 같은 여성들이 출가하여 아라한이 된다. 이들 여성은 도덕적-정신적인 문제에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듯 붓다는 2,500년 전에 남녀평등까지도 실현한 인물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깊고 그윽하다. 깨닫고 난 후에 그가 곧바로 설법을 하지 않은 까닭은 난해함 때문이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독단과 관념의 세계에서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까지도 유용한 붓다의 말씀을 함께 새겨보자.
“인정이나 부정은 극단적인 이분법에서 나온 것이다. 항상 양극단을 지양하는 중도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만나지 마라. 어리석은 사람과 상의하지 마라. 어리석은 사람과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마라. 어리석은 자는 하는 일마다 진실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주치는 최악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탐진치 삼독이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입에 도끼를 물고 태어나 악한 말로 자기 몸을 찍는다.”
“밖에서 의지처를 찾지 말고, 너 자신이 진리의 섬이 되어라. 너 스스로 자신의 귀의처가 되어라. 고집멸도, 고통과 고통의 근원과 고통의 소멸과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진리다.”
세속 나이 80세에 대열반에 들면서 붓다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하다.
“모든 것은 소멸한다. 방일(放逸)하지 말고 힘써 정진하라!” (927)
<붓다 연대기>, 이학종 지음, 불광출판사, 2021.
첫댓글 김규종 교수님은 코로나 백신을 맞았나요? 저는 월요일에 맞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날을 작정하기 전에는 백신에 대해 겁낼 것이 없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어 그 날을 딱 정하고 나니, 온갖 것에 마음이 꺼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작년 5월 초 폐염을 앓았다는 것이 아주 크게 부각되어 이런 저런 걱정이 달라붙었습니다. 몸상태에 다시 귀를 기우리니 온전한 구석이 한 곳도 없는 듯 한답니다. 그래도 맞아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붓다의 글을 읽으며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백신이라는 하찮은 일상의 선택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보고 듣는 정보를 거처 그것을 넘어서는 응답 곧 행위(경험)하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 교수님의 붓다연대기 읽기를 다시 읽으며 저가 얻은 지금의 인식수준입니다.
저는 6월 8일 화요일 오전 9시 청도 대남병원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맞습니다.
하도 여기저기서 백신 부작용을 말하니까 기분은 별로입니다.
그러하되 온 나라와 국민이 합심하여 백신을 맞아야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19에서 해방되리라
믿으며 흔쾌하게 주사를 맞으려고 합니다. 타이레놀 같은 약 준비하셔서 차분하게 접종하셨으면 합니다.
붓다의 깨우침을 향한 열망과 고행 그리고 설법은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인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