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평등한 이치를 밝히는 참선 / 서암 큰스님
1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과학문명이 발달했다 해도 아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푸르게 알든지 둥글게 알든지 길게 알든지 짧게 알든지 궁극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알음알이가 갖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불교요, 참선은 참된 불법으로 곧장 들어 가는 방법입니다. 알음알이의 한계를 뛰어 넘자면 먼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리저리 따져서는 모른다는 결론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대의단(大疑團)이 참선의 첫째 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커다란 의심 덩어리를 안고 뚫어 가는 것이 화두(話頭)입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 의심하는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가령 주먹을 딱 쥐고 '이 안에 뭐가 들었는고?', 혹은 '저 궤짝 속에 무엇이 들었는고?' 하면서 한계를 정해 놓고 의심해 들어간다면 알아 봐야 주먹 속에 있는 것과 궤짝 속에 있는 것뿐입니다. 따지고 분석하여 원리를 캐려는 자세로 온갖 선입견을 갖고 화두를 배우고 따라 행한다면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수천 년을 해도 깨달음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에 임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저 의심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지식이 없어지는 그 순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로, 다시 들어 갈 수 없는 벽에 딱 부딪치는 그것이 화두입니다. 그렇게 화두는 전체가 의심 덩어리 하나뿐이어야지, 거기에 무슨 조건이 붙을 수는 없습니다.
따지고 가르칠 수 있는 알음알이 지식 보따리는 다 집어던지고 들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그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의심해서는 참선의 근본을 깨치기는 어렵고, 되지도 않습니다. 마치 붉은 안경을 쓰면 하얀 것을 봐도 전부 붉게 보이듯이 자기가 안다는 한계, 그 선입관에 가려서 근본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신을 믿는 그 생각을 갖고 참선 화두에 몰두하면,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 중에 그 모르는 것을 신에다가 붙여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하는 바른 자세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충분한 기초를 닦고 해야 합니다. 그저 남의 말 듣고, 남이 하는 것 보고 딷라 해서는 안됩니다.
집을 지을 때에도 지도자가 필요하고 기초를 잘 다져야 합니다. 만약 급한 생각으로 모래밭에 기초도 닦지 않고 집을 짓는다면 한 순간 반듯했다 해도 오래 가지 않아 무너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법의 이치에 단도 직입적으로 들어 가는 참선을 하려면 그런 기초가 단단해야 합니다. 그냥은 잘 안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모든 종교나, 모든 인간이 짜낸 지식을 다 섭렵해서 그것이 아닌 줄 알아 완전히 포기한 입장, 그런 자격이 되어야 참으로 참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강원에 가서 10년이고 5년이고 철저하게 팔만대장경 경전 공부도 하여 이론이 그 한계에 달해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데까지 도달해버리면 참선 공부가 제대로 되지요.
반면에 그렇게 모든 것의 한계를 알도록 깊이 공부하지 못했다해도 참선의 길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자 무식일지라도 헛된 상념 없이 어느 선지식을 절대로 믿는 사람도 참선의 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모든 것이 타당성이 있어야 하고 객관성이 있어야 하고 또 이성적으로 모든 것이 맞아야 남의 말을 믿지 맹목적으로 믿는 시대는 아닙니다. 우리의 인지가 이렇게 발달할수록 뭔가 자기 상념을 구사해서 자기 창의력에 비추어서 비판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맹목적으로 따라 가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널리 인정되고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도 인지가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여 밝게 알고 그만큼 지헤가 밝아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선과 화두는 지례를 갈고 닦아 그 지혜의 한계를 넘어서 이론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들어설 대 제대로 공부가 됩니다.
2 집중해야 힘이 생긴다
24시간 하루를 살아도 정신없이 사는 것이 우리 중생의 삶인데 그런 가운데에도 항상 자기의 근본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안으로 자기 마음에 모든 산란심이 사라진 자리가 참선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모든 상념이 불끈불끈 일어나 계속해서 온갖 생각이 들끓습니다. 이래서는 백 년을 앉아서 참선한다고 해도 잘 안 되게 마련입니다.
거울에 초점을 맞추어 햇빛을 모아야 불이 일어 나듯이 우리의 생각도 초점을 맞추어야 그 모르는 의심 덩어리를 뚫고 갈 힘이 생깁니다. 기쁜 생각, 슬픈 생각, 미워하는 생각, 사랑하는 생각, 과거·현재·미래의 온갖 잡념에 흩어지면 집중력을 잃고 힘이 없어집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학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철저히 알면 알수록 마음이 정돈됩니다. 그래서 공부가 많이 된 사람들은 몇 마디 안 해도 서로 마음이 통합니다. 몇 마디 근본만 얘기해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정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한두 마디로 인류의 모든 이론을 다 끊어 버리는 것이 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말이 간단해집니다. 이러석고 공부 정도가 얕을수록 말이 많습니다.
바닷물을 한 군데만 찍어 먹어보고도 그 바닷물이 다 짠 줄 알 듯이 우리가 한 가지를 딱 이해할 때, 우주의 모든 것이 파악됩니다. 그렇게 꿰뚫는 이치를 모르고 일상생활에서 그저 토막토막 "이게 뭐꼬, 저게 뭐꼬" 이렇게 의심내어서는 참선 화두가 안됩니다. (계속)
서암 큰스님 법어집 [자기 부처를 찾아] 중에서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