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8일 연중 23주일 설교
마르 7;24-30. 야고 2:1-10, 14-17
거룩한 갈망
띠로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외국 땅입니다.
오늘 여인은 그분의 소식을 듣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백성에게 모욕적이고 거친 언사를 던지신 예수님의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멸시와 노골적 적대에도 여인의 모습은 이상하리만치 꿋꿋합니다.
오늘 여인처럼 우리에게도 모욕과 고통의 경험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며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아픔입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레옹 블루아는 고통은 지나가지만, 고통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욕과 고통의 경험은 우리를 아주 자주 힘들게 하고, 여전히 트라우마처럼 상처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격한 어투와 멸시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 나와 우리의 근원을 봅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굴욕과 화끈거리는 모욕감, 온몸이 떨리는 수치심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 역시 세상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 특히 오늘처럼 수치심과 분노를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에서의 치욕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으나 믿었던 사람, 존경하던 이에게서 오늘과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떠할까요?
예수님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한 의도로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도 기존 관념을 뒤집는 뜻밖의 경험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체험은 소중하고 귀합니다. 모든 경험은 지나가지만, 우리 안에 고스란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체험이 있습니다. 안토니 블룸 대주교의 말입니다. 한 번의 경험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우리를 깊이 사로잡고 나면, 그 경험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뜻밖의 말씀과 대반전과 같은 치유의 엄청난 경험은 그 여인과 주변의 사람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삶의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교부들은 이 사건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는 남성과 여성, 선민과 이방인이 없이 모두 같은 은총 아래 살아야 한다는 선언적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그토록 갈망했던 딸의 치유를 기도 가운데 묵상해 봅니다.
나의 바람과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조금 더 들어가 봅니다.
모욕과 비아냥을 견뎌내며, 인내로 예수님께 재차 간청하는 열정이 나에게도 있을까요?
거절당하고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음에 쉽게 포기하고 세상을 원망만 한 것은 아닌지요?
그 여인에게서 나를 봅니다. 예수님의 뜻밖의 반응이 우리의 이성을 온통 뒤흔듭니다.
비상식적일 정도로 우리를 흔들어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올바로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여인을 움직이게 했던 결정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의 간절한 열망 즉 ‘갈망’입니다.
갈망은 모든 기도의 근원이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입니다. 아무리 멋지고 수려한 기도문으로 기도하더라도, 깊은 침묵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는 관상기도를 하더라도 그 안에 하느님을 향한 영적 갈망이 없다면 허무함으로 끝나기 마련입니다. 반복되는 기도와 신실한 기도 생활을 놓치지 않고 이어갈 때도 기도 생활의 근원에는 주님을 향한 갈망이 내 안에 뜨거워져야 합니다.
오늘 여인에게서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거룩한 갈망을 느낍니다. 그 여인처럼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큰 힘이 될 갈망입니다. 지난 주간 묵상했던 시편 42편에 시인에게 닥친 힘겨운 일을 겪는 동안 원수들은 비아냥거리며 ‘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빈정거립니다. (10절) 낙심하고 하느님의 부재를 실감하며 사는 시인에게, 당장 눈앞에 계시지 않는 그분은 목마름이었습니다. 시냇물을 찾는 암사슴처럼 주님을 목말라하며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막에서 고난과 낙심 가운데 목말라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셨듯이, 우리에게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생명의 물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고 하셨지만, 하느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님을 부활케 하시어 영원한 생명의 샘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 6:35) 우리의 영적 목마름은 주님 안에서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이 오늘 이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에게 쉽게 포기하지 말고 더디게 오는 기도의 응답에 지치지 말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 아닐까요?
다시 우리를 성찰해 봅니다. 우리와 역사와 문화가 다른 근동지역의 이야기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그보다 더한 배타성에 길들여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주님, 우리가 제일 옳고 구원에 다가선 사람들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먹일 빵을 하찮은 그들(개)에게 주시면 되겠습니까?’ 혹시 우리 역시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우선이고 먼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입니다. 더 나아가 이제까지 우리도 그 여인처럼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묵상으로까지 이어 집니다.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우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성찰해 봅니다.
진실된 바람과 희망을 갈망이라고 표현하고, 이에 덧붙여 거룩한 갈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모욕과 아픔에 개의치 말고 주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아픔을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살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극단적인 말씀과 행동이 무감각하게 사는 나와 우리를 온통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따르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이끄시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저의 기억에 잔재로 남아 있는 모욕의 경험과 이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쌓아놓은 감정의 아픔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시어, 아픔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똑같이 대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해 주소서. 그리고 이 모든 경험 역시 주님을 향한 거룩한 갈망으로 헤쳐 나갈 지혜와 용기를 저희에게 허락하소서.’ 아멘.
첫댓글 아멘, 특히 마지막의 기도가 너무나도 인상적이고 와닿습니다.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되어 울분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닌,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