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도산(島山)이다.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淸日戰爭)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李昇薰)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韓人共同協會)를 만들어 《공립신보(共立新報)》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李甲)·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갓난이의 방그레, 늙은이의 벙그레, 젊은이의 빙그레.
저마다 서로 웃도록 전국에 미소 운동을 일으키자.
견고한 기초 위에 좋은 건설이 있고,
튼튼한 뿌리 위에 좋은 꽃과 열매가 있다.
그대는 매일 5분씩이라도 나라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나는 밥을 먹어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먹고,
잠을 자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잔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남의 결점을 지적하더라도 결코 듣기 싫은 말은
사랑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꿈 속에서라도 진실을 잃었거든 뼈저리게 뉘우쳐라.
죽더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일은 참되고 실속이 있도록 애써 실행하라.
묻노니 오늘 대한의 주인되는 이가 몇이나 됩니까.
부허는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은 성공의 기초이다.
서로 사랑하면 살 것이요, 서로 싸우면 죽을 것이다.
매끈한 돌이나 거친 돌이나 다 제각기 쓸모가 있는 법이다.
남의 성격이 내 성격과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속이지 말자. 속지 말자.
우리가 믿고 바랄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 밖에 없다.
우리가 세운 목적이 그른 것이라면
언제든지 실패할 것이요,
우리가 세운 목적이 옳은 것이면
언제든지 성공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이 인물이 될 공부를 하지 않는가.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자가 되라.
자기의 몸과 집을 자신이 다스리지 않으면
대신 다스려 줄 사람이 없듯이
자기의 국가와 자기의 민족을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구해줄 사람이 없닺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책임감이요, 주인관념이다.
정식과 성실만이 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진정한 애국심은 그 말보다 실천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질서와 환경(청결)은 문명인의 자격이다.
책사도 학교다.
책은 교사다.
책사는 더 무서운 학교요,
책은 더 무서운 교사다.
책임 있는 곳에 주인이 있다.
청년이 다짐해야 할 2가지 과제가 있다.
첫째, 속이지 말자.
둘째, 놀지 말자.
나는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청년은 스스로 생각할 때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내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여라.
허물없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것을 다 용서하라.
훈히 사람들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잡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 전에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일에 더 열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