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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청년학생들의 북녘유적답사가 진행됩니다. 평양의 대동강,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등과 묘향산 백두산 등지에서 진행될 이번 유적답사는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로 진행되며, 특히 올해는 지난 해와 달리 백두산에서 1박 2일간의 야영까지 하게 되어서 민족의 성산에서 북녘의 청년학생들과 밤을 지새우며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더 많은 꿈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독청년들은 전체 100명 규모 중에 5명의 참가자가 배분되었습니다. 대강의 개요는 아래와 같고, 여러분이나 주변에서 북녘의 역사답사와 함께 통일에 대한 관심이 있는 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알려주시고, 또 직접 참여해주십시오. 참가자 선정기준은 선착순으로 하되, 신청자가 5명을 넘어설 경우 지금까지 기독청년운동 참여 정도를 기준으로 참가자를 결정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빨리 전화주세요.
일시 : 8월 3일-5일 사이에 출발. 4박 5일 일정. 규모 : 100명
답사지 : 평양지구, 백두산 지구(1박 2일 야영), 묘향산 지구, 신천지구
7월 24-25 : 참가자 수련회 참가비: 240만원 예상. 7월 7일까지 최종명단 확정
지난해 북녘유적답사에 참여했던 강서구(기청 총무)님의 기행문을 올립니다. 읽어보시고 생생한 북녘 동포와 산하의 숨소리를 느껴보세요!!
첫째날 22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또 하나의 조국을 방문한다니...!
6·15공동선언의 힘으로 국가보안법도 무용지물이 된 것이 아닌가?
그동안 민간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어 북녘에 다녀왔던 동료들을 계속 만나기는 했으나 막상 내가 방북을 하려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들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 5시 30분 연희동에서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출입국 표지판에 뜬 평양이라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평양발 9시" 정말 낯설은 풍경이다. 9시 평양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 지나기 시작할 때부터 창밖에 북녘의 산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옛날 많이 불렀던 노래 중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가? ” 가사대목이 문득 생각이 났다.
“평양에 력사적인 북녘답사를 진행하기 위해 오신 청년학생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버스 안에서 우리와 4박 5일을 함께 하실 북측 선생들과 뜨거운 인사를 나누었다.
범청학련 사무국에서 일하시는 최성준 선생, 인민소년궁전 지도원으로 일하시는 강경순 선생, 창광봉사국에서 일하시는 김철호 선생이 소개와 함께 환영의 인사를 전하였다.
최성준 선생이 우리가 지나는 곳마다 무슨 거리고, 어떤 건물들이 있는지를 상세히 소개해주었다.
버스를 타고 평양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본 평양의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길가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며, 잘 정돈된 농경지들, 평양 중심부로 들어오면서 보이는 제각각 의미를 가진 웅대한 건물들과 상점들, 온통 거리를 수놓은 구호들, 평양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평양거리에서의 첫 느낌은 잘 계획된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로 양옆으로는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있어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시민들이 많았으며 대동강변에서는 한가로이 낚시를 하는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평양 외각에서 중심부로 점차 들어서면서 평양임을 재확인 시켜준 것은 수많은 구호였다.
우리가 머물 청년호텔로 향하였다. 호텔에서 일하시는 이북 인민들의 뜨거운 박수 속에 호텔에 발을 내딛었다. 남쪽 청년학생들의 역사적인 방문이기 때문에 더 좋은 다른 호텔도 많이 있지만, 청년호텔에 머물도록 하였다는 북측의 이야기를 들었다.
첫 답사지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이었다.
이곳은 이북 어린이들의 과외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1989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ꡒ어린이들은는 우리 나라의 보배들입니다. 앞날의 조선은 우리 어린이들의 것입니다.ꡓ라는 김주석의 ꡐ교시ꡑ가 적힌 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재능에 따라 다양한 소조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어찌나 소조가 다양한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어린이들의 실력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다음으로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예술 소조원들의 공연을 관람했는데, 공연장에 들어서자 북측 어린이들과 대학생들이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께 뜨겁게 우리를 환영했다. 너무나 열렬히 우리를 환영하는 이북 동포들의 모습에 약간은 당황스럽기도 했다.
공연 마지막에 남과 북 모두가 일어나서 "우리는 하나"를 목청껏 부르면서 조국통일의 절절한 염원을 확인하였다.
저녁노을이 질 때쯤, 김주석의 생가인 만경대에 도착했다. 만경대 생가는 대를 이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를 배출한 집안치고는 너무도 소박하고 수수하게 꾸려져 있었다. 집 앞에 세워진 비석이 없었다면 만경대 고향집이라는 것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외형 상 특별한 것도 없었고 집안에 보존된 가재도구 역시 여느 여염집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만경대 생가를 방문한 후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환영연회에서 우리 탁자에 함께 했던 최성준 선생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최성준 선생은 답사기간 내내 가장 많은 수고를 하셨다. 전체 인원을 항상 확인하고 인솔했던 분이다. 꼼꼼하면서도 재치가 넘쳐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함께 했다. 다들 과하게 먹지 않았나 싶다. 다음날 일정을 위해서 절제하자고 말만 무성했지만, 어디 그렇게 되던가 더구나 평양에서의 첫날밤인데 말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평양의 밤거리는 참 조용했다. 가로등은 절전을 위해서 꺼져 있고, 살림집(아파트) 이곳저곳의 불빛으로 평양 거리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평양의 밤은 간난아기방에 매달려있는 모빌처럼 별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보였다. 다들 첫날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둘째날 23일
김일성 주석이 세계 여러 나라 각계 인사들에게 받은 진귀한 선물들을 보관하여 놓은 곳이 바로 국제친선관람관이다.
정말 우스운 선물을 발견했다. 항일무장투쟁 중에 하나였던 보천보 전투 기사를 그대로 떠서 금박해 제작한 동아일보 사장의 선물 이었다. 이것을 보면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일컬어지는 국가보안법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고 조,중,동으로 알려져있는 동아일보가 그런 선물을 하다니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관람관 마지막에 마주친 곳은 김일성 주석 살아 생전의 모습 그대로를 본 뜬 밀랍상이었다.
방북교육 때 절대로 같이 절하지 말라는 곳이었다. 깊숙이 머리 숙여 절을 하는 북측 선생들의 모습을 보며 자기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살아있는 듯 하였다. 우리들도 그렇게 느끼는데, 북측 선생들이 눈물지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3대헌장 기념탑을 봐야만 했다.
조국통일을 위해 남과 북의 뜻과 마음을 합치자는 이 곳을 관람하지 못하도록 한 남쪽정부의 처사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국통일의 열망을 마음에 담아 세운 이 기념탑은 높이 30m, 너비 61.5m, 무게 7000톤이다. 너비는 6.15공동선언을 의미하고, 7000톤이란 무게는 바로 조국통일을 하고자 하는 7천만 겨레의 염원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3대 헌장 기념탑 건립을 위해 북만이 아니라 이남과 해외의 우리 민족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정성을 쏟았다. 남에서도 180 여 개의 돌을 보내 기념탑 건립을 함께 했다.
3대헌장 기념탑은 평양개성고속도로에 세워져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정확히 북으로 쭉 가면 백두산이 나오고, 남으로 쭉 가면 한라산이 나온다고 한다. 통일이 되면 백두와 한라를 잇는 정 가운데에 3대헌장 기념탑이 놓이는 것이다.
셋째날 24일
민족의 영산에 오르는 날이다. 바쁜 일정으로 5시에 일어났다. 조금 일찍 일어난 만큼 조원들을 모두 깨우고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4년전 중국을 통해 올라본 백두산이지만 백두대간의 시작을 알리는 산! 조국 해방을 위한 항일전사들의 피와 눈물이 서려있는 산!
첫날 이북땅 처음 밟았던 순안공항에 다시 도착하여 삼지연행 고려항공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북 비행기를 타 본적이 없어 비행기 내부가 몹시 궁금했다. 약간 비좁고, 낡아 보이기는 했지만, 비행에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이북비행기를 탈 때는 다른 비행기와 이것이 다르다. 스튜어디스가 처음에 음료수를 내오지만, 이북에서는 껌을 내온다. 처음에는 조금 우습기도 했지만, 비행기를 타면서, 기압차 때문에 귀가 멍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껌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보는 개마고원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끝없이 뻗어 있는 산맥이 장엄하기까지 하다. 우리를 처음으로 맞이해 준 것은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라는 글귀였다.
백두산은 일기 변화가 심해 아무한테나 자신의 자태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남측의 통일일꾼들의 방문이라서 그런지 백두산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듯 하였다. 4년전 천지 앞에서 자욱한 구름만 열심히 보고 돌아오는 발걸음 때 다음에는 중국이 아니라, 남쪽에서 우리 땅을 밟고 올라 가야지라고 마음 먹었었는데, 불과 4년만에 현실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그 때에 보지 못했던 해맑은 천지도 실껏 보았다. 가슴이 벅차온다. 이 기억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이다.
넷째날 25일
벌써 북녘역사유적답사가 4일째가 되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북녘 청년학생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마음에 아쉬움이 더해갔고, 하나라도 더 느끼고 배우고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일기도 했다.
처음 답사지는 평양시 강동군에 있는 단군릉이었다. 1993년에 발굴을 하여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현존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유적지인 것이다. 물론 남쪽 역사학계에서는 단군릉의 진위여부에 의해서 논란이 일고 있기는 하지만 북녘 역사학계에서는 여러 번의 과학적 검증을 통해서 실존한 인물임을 주장하고 있다.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단군릉이 연변에 있는 고구려의 장군총과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내원 선생에게 물으니, 어떻게 아느냐가 되물었다. 몇 해전에 직접 가보았다고 하였다. 놀라는 눈치였는데, 이내 정색을 하고, 개건과 복원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다. 복원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을 말하지만, 개건은 역사적 자료가 많지 않아 많은 부분 추측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것이다. 단군릉은 복원한 것이 아니라, 개건한 것이라고 답했다. 솔직한 답변으로 의문이 가셨다. 그렇지만, 단군릉의 웅장함은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북 동포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다음으로 방문했던 곳은 평양의 젖줄 대동강이었다. 서울 거리를 거닐듯 우리는 대동강변을 거닐며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역사적인 남북 청년학생들의 상봉모임이 있었다. 우리들은 행사장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힘찬 노래를 부르며 남측 청년학생들의 통일에 대한 열정과 기세를 보여주었고 행사장으로 들어서는 우리들을 북녘 청년학생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맞이해 주었다.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난데없이 북쪽의 여학생이 나의 손을 잡고 함께 입장을 해주었고 지정된 자리에 앉아 축하공연을 관람하였다. 처음 만났는데, 어색함이 어디 없으랴 생각했지만 기우였다. 나는 공연은 뒷전이었다. 북쪽 여학생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손을 꼭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학교와 이름을 물어 보았는데 김일성종합대학 생명과학부에 다니는 오은주라고 소개했다. 나이는 스물한살이고 4학년인데 북에서는 만으로 나이를 세기 때문에 남쪽나이로는 한두 살 많은 것이다. 남쪽은 대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12학년제로 이루어져있는 반면에 북쪽은 10학년제여서 남쪽보다 이년 일찍 대학에 들어가는 셈이다. 금새 친해져 오빠와 동생으로 불렀다. 축하공연이 모두 끝나고 남북 청년학생 모두는 함께 손에 손을 잡고 군무를 추었다. 남쪽에서 해본 적이 없는 군! 무인지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반복동작이 많아 쉽게 따라할 수가 있었다. 은주는 나를 배려하며 발을 맞추어 주며 ‘오빠는 춤도 잘 추시내요!’ 라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사실 나는 몸치인데...
이렇게 즐거웠던 순간이 지나자 느닷없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채 한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은주와 헤어질 때가 되었다. 나는 너무나 아쉬워서 “통일되어서 꼭 다시 만나자”라고 다짐을 하였고, 은주는 눈물로 대답을 하였다. 정말 짧은 시간이어서 너무나 아쉽기만 했다. 한 민족 한 형제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은주와 사진을 찍고 헤어지면서 우리는 차에 올랐고 북녘의 청년학생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환송을 해주었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로는 손을 흔들고 그렇게 헤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애달플 수가 있는가?
마지막날 26일
전날 우리측에서 준비했던 답례연회에서 남아있는 시간들이 얼마남지 않아 아쉬운 나머지 너무나 무리하는 바람에 다음날 조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새벽에 의사선생과 간호원선생을 찾는 일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이북의 들쭉술은 역시 너무 세더이다. 그 바람에 이쁜 간호원 선생 얼굴 한 번 더 보게 되고, 마사지도 받게 되었다. 부러울 사람 많이 있을 줄 안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경험해 보려면, 통일이 빨리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 일정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조원들이 함께 준비한 선물들을 안내원 선생들에 드리고, 선생님들과의 헤어짐 속에서 이제는 정말 평양을 떠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순안공항에 도착하여 또다시 헤어짐의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곳저곳에서 훌쩍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나 또한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어 안내원 선생들과 밤마다 아프다고 괴롭혔던 의사 선생과 간호원선생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북바로알기 말로만, 글로만으로 부족한 듯 하다. 그들의 신념, 생활이 부러웠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도 무릎꿇지 않는 그들의 자주적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일정 내내 궁금하도록 만들었다. 신앙인인 나의 눈으로도 신기하더이다.
우리 기독청년들에게도 그러한 심지굳은 신념, 신앙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북사회의 이념을 따르자는 말은 아닌 것 다 알 줄 안다.
물론, 일정 중에 이북의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대화도 나눴습니다.
그들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나누고, 그들의 일상생활이야기도 나누면서, 깊은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그 말이 절실히 느껴졌다.
"반갑습네다. 어서 통일되어, 꼭 다시 만납시다!"
눈물 흘리며 손 흔드는 젊은 청춘들을 뒤로하고, 비행기 창을 통해 멀어져 가는 평양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시 서울로 내려왔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평양에서의 경험은 오래토록 마음속에 자리할 것이다.
그립습니다!
첫댓글 신청문의 02/720/1761 김반석
강 총무님 사진이 멋지네요~~ 가보고 싶어 꿈이라도 좋아라는 노래말이 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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