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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과 함께 옛 신라의 나라로!
과거의 연(緣)에서 비롯됨이 오늘을 이루고 지금을 쌓은 연(緣)은 미래가 된다. 미래의 그날인 오늘의 지금은 과거로 흘러간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위한 값진 삶이 될 수 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 하는 일을 하면 뜻이 깊고 마음이 흐뭇하다. 그래서 여행 떠나 유적 등을 찾아보며 과거를 살아보고 지금의 모든 것 보면서 지금을 살고 미래를 위한 일 하다보면 미래를 산다. 삶의 영속성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생활의 한 부문이다. 삶을 이루는 원형질이다. 고교 동기생들과 즐겁게 하루 여행을 하고 여행 후 기행문도 써보는 시간은 행복한 삶이다. 비록 하루였지만 삶의 영역은 조선시대부터 팔도강산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니 하루 산행이 무척 길게 남는구나! 반세기나 전에 고교 교문을 나서서 개인의 역사를 각각 이뤄놓고 다시 모여 등산가는 기분은 그 때의 고교를 다니는 듯 싱그럽다. 참 좋지 않은가! 5월의 깊은 봄날 버스를 타고 옛 신라의 서울 경주를 지나 울산을 향해 내려갔다. 삼천리금수강산인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더라도 산과 들 내(川)와 마을이 비슷하다. 나는 가보지 않는 낯 선 곳에 가면 주위 환경을 곧 장 눈여겨보곤 한다. 내 습관이다. 행여나 저 마을이 내 고향과 비슷하거나 방랑시인 김삿갓이 들렀다가 사연을 남긴 그런 마을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이 있어서다. 그러나 민속촌 말고는 아직까지 사람이 살고 있는 초가집은 구경하지 못했다. 낯선 곳 지나면 초가집은 없어도 내 고향과 같은 마을은 무수히 많아서 어딜 가나 향수에 젖어든다. 산 아래 백천白川 옆 30여 호 내 고향 마을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전형적인 농가였다. 5~60년대 어린 시절에는 농사일하고 소 풀 먹이고 물고기도 잡고 지게지고 나무하며 일하면서 보냈었다. 찬란했던 밤하늘별도 보면서 기상천외한 개구리소리에 넋을 잃고 황홀한 세상으로 빠져들던 고향마을이었다. 추억은 피곤하고 지친 지금의 고달픔을 풀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이 있고 향수에 젖게 하는 옛날 같은 마을이 없다. 그저 옛 추억을 애써 불러일으키면서 지나간 모든 것을 사랑하려 할 뿐.…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는데 버스는 경주를 지나가고 있다. 경주지역은 천년의 긴 역사와 함께 남긴 흔적이 많고 나 또한 몇 년간 생활했던 곳이다. 여기서도 향수에 젖는다. 기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지형이나 사람이나 풍습이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삼천리강산이 다 내 고향이라 정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경주를 벗어나 울산으로 가는 도중 전YCG회장이 울산에 대한 내력과 함께 소개를 해 준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고향이 울산출신이라고 하면서 그 당시 3만 울산이 지금은 백만이 넘는 도시가 되어 지자체 도시가 되었다. 오늘의 울산은 이후락과 정주영의 배경이며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그네기라는 유행가도 바로 울산의 여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것. 이후락 김형욱 두정보부장간 사건의 이야기 등 40여 년 전 흥미로운 이야기로 기분 좋게 산행을 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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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 오랜 기간 전쟁과 기아 속의 후유증에 허덕이며 가난하게 살아 왔다. 마지막 조선 패망이 남긴 가난과 전쟁 그 후유증이 남긴 힘들었던 시대에 공교롭게도 우리들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기서 벗어나 단기간에 부자강국이 된 이면에는 10년을 차이로 세상에 태어난 지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들 세대들은 다 알고 있다. 그 지도자들은 젊은 시절 일본에서 배우고 신문 통해 지식 쌓고 희망과 용기로 개척정신을 공유한 6인(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최종현 박태준)들이라 일컫는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박정희 대통령이 국보로 불렀던 오원철 전 경제수석도 있었다.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전문 관료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수십만 제대군인을 강조해서 중동에 파견해 세계로부터 한국민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중화학공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달러가 국내로 쏟아져 들어왔다. 물론 그 이외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알고 보면 우리들도 월남 참전 등 주역들이라 생각한다. 아마 50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단기간에 세계 12위 경제대국이 된 그런 이면의 역사를 선뜻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정주영의 해봤어? 의 도전정신.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는 모험 정신. 박태준의 분투의 가치투쟁 등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정신문화를 형성했던 박정희 시대였다. 사람도 나라도 발전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흘러간 역사에서 잠시 찾아보면참 새로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때 그 시절 어떻게 살았는지를 그리고 나라가 발전하게 된 그 역사적 과정을 생각해보면 오늘을 살아가는데 힘이 된다. 진정 우리들이 겪은 無에서 有를 창조한 정신적 역사적 가치정신을 후세들에 물려줘야 하는데 기성 세대가 남긴 금전적 물질적 부문만 바라보는 후세들을 보면 군대정신이라는 그 모진 체험담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덧 간절곶에 도착한 후 40회에 대한 발전과 건강을 염원하는 사진을 찍고 바닷가를 산책했다. 바다는 넓고 깊고 산은 높아서 넓은 아량 깊은 이해와 높은 기상을 배우게 된다. 그런 마음을 자연에서 찾는 것은 어릴 때부터 배워왔다. 집에 가면 마음이 좁아지고 기상이 천장만큼 되지 않는다. 좀 걸어서인지 모두 피곤하고 배도 고파 소나무 그날아래 잔디밭에 둘러 앉아 쉬기로 했다. 배가 고플수록 막걸리 한잔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산행의 묘미를 만끽하게 한다. 5월의 푸른 하늘아래 태평양 푸른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을 펼친다. 옆에는 친구들이 있고 바다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해변의 길이다. 종종 나는 옛 선비들이 남긴 한시를 떠올리며 그들의 삶과 접목해볼 때가 많다. 내 삶이 얼키설키 엉켜 있을 때는 옛 시 연상해서 읊조려보는데 맺힌 응어리도 풀리고 기운도 솟아난다. 약간의 술은 몇 자(字)를 잊게 하고 취하면 몇 자를 더 잊게 하지만 그래도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라서 뜻은 잊지 않는다. 몇 자의 한시 속엔 한 평생의 삶이 깃들어있다. 위대한 옛 사람들이 남긴 글에서 그들이 살아간 삶을 연상하며 내 인생의 지표(指標)를 세워보기도 한다. 새로운 힘이 솟아오른다. 오늘은 산행길이라 방랑시인 김삿갓이 남긴 시가 생각이 나서 김삿갓과 동행하니 산행이 더욱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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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김병익)은 1807년(순조7년) 안동김씨 24세손으로 조부가 김익순이고 부친은 김안근이다. 김삿갓 조부는 1811년 평안도 용강에서 홍경래난이 일어났을 때 선천 방어사였다. 이 때 김삿갓은 다섯 살이었다. 홍경래에게 투항한 조부 김익순은 난이 진압되자 사형을 받았다. 삼족을 멸할 죄목이었으나 안동김씨 배경으로 폐가 처분만으로 끝이 났다. 김삿갓과 형 병하는 곡산에 숨어살며 공부를 했다. 23세 때 과거를 보았다. 김삿갓은 장원급제를 했다. 시제에 대한 답의 글이 조부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닿음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할머니로부터 그가 바로 조부임을 알게 된 김삿갓은 그 후 삿갓을 쓰고 수중에 지팡이 하나로 집을 떠나 방랑길에 올랐다. 40여 년 동안 8도 강산을 방랑하며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조선의 최상급 과시를 남겼다. 기구한 역사적 인물, 위대한 평민 시인, 눈에 띄는 것과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시의 소재로 삼아 시로 엮는 초인적인 시인이다. 해학과 풍자 비탄과 정념(情念)에 사로잡혀 깊은 의미를 담아 시를 엮었다. 게다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기상천외 한 행적, 조선 땅 곳곳을 누비며 남긴 일화, 빌어먹으면서도 초지일관 선비의 지개(志槪)를 굽히지 않으면서 모든 인간사, 세속사를 흔쾌히 내던진 초월자였다. 세상의 쓴맛 매운맛 등등을 다 맛보면서 이를 너털웃음 속에 속 시원히 털어버리는 조선왕조의 걸물이었다. 그는 사후에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고 있다. 운명론자인 김삿갓은 40평생을 전국 방방곡곡 떠돌아다니면서 그렇게 시를 남겼다. 삿갓과 지팡이에 의지하며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방랑길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보통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고 실행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일을 한 평생 방랑자가 되어서 살아갔다. 산천을 누비면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세태를 풍자하며 민초 들을 다스린 성군이었다. 조선나라 삼천리를 구석구석 다니면서 후세들에게 행복을 안겨준 성군이었다. 아직까지 목마른 식자(識者)들인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김삿갓은 1863년(철종14년)3월29일 객사했으며 강원도 영월에 무덤이 있다. # # #
고려 말 이색도 자고로 빼어난 詩는 떠돌이에 있다고 하면서 좋은 시구 찾아 일부러 떠돌이 생활을 몸소 겪으면서 시를 남겼다. 이색은 시를 찾아 떠돌이 생활을 했고, 김삿갓은 시 능력의 무기가 있어 어떤 고난에도 자신감이 있어 세상을 방랑했다. 방랑하며 그때그때 부딪혀서 겪은 일을 한시로 남긴 것 중 3수를 소개한다.
✿1. 해체시: 김삿갓
僧首團團汗馬閬: 둥글둥글 중 머리통은 땀난 말 불알 같고
儒頭尖尖坐狗腎: 뾰족한 선비 대가리는 앉은 개좃 같구나.
聲令銅鈴零銅鼎: 목소리는 구리방울 구리 솥을 치는 듯
目若黑楸落白粥: 눈깔은 흰 죽에 떨어진 검은 후추 같다.
*김삿갓은 어느 날 중과 선비가 있는 곳을 지나갔다. 둘이 합세해서 김삿갓을 놀리고 있다. 이에 김삿갓은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둘 한테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이글을 써서 속을 풀었다. 당대 조선시대가 처했던 사회적 환경의 변모가 안받침 되어 멸시를 받은 김삿갓은 시 한수로 통쾌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2.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의34구 중 4절)
身窮每遇俗眼白: 궁한 신세 속인들의 백안시(멸시)를 받았고
歲去偏傷鬚髮蒼: 세월가며 터럭시듦(머리 수염)시들어지니 마음 상하누나.
歸兮亦難佇亦難: 돌아가기 어렵고 머물기도 어려워
幾日彷徨中路傍: 며칠이나 길가에서 방황하며 헤맸던고.
김삿갓은 훗날 자신의 한평생을 뒤돌아보며 34구의 난고평생시蘭皐平生詩를 남겼다. 40여년의 해를 오직 산천을 누비며 속인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고 배고픔을 견디면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자신의 한을 오로지 작시(作詩)로 이겨내며 살아갔다. 조선 땅 전체가 고향이었다. 그의 제자(김삿갓을 좋아하는 사람들)들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김삿갓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는지 또 언제까지 이어질지 계속해서 번져가고 있다. 나 역시 그들 중 한명일 뿐이다.
차 안에서 이 2편의 한시를 읊조리고 나니 나중에 HWY 전 회장이 옛 성인의 글 漢語로 인용하며 깊은 의미를 담아 加味해주니 무척 감사하다. 부인은 “자기도 저 회장처럼 좀 정제된 언어로 간결하게 이야기하는 법 배워라”는 주문을 한다. 평소 공감하고 있었던 생각이다. 나는 지금도 아이들 한테서도 배운다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가지고있다. 사실 다음 3의 이 竹을 좀 읊으면서 소개하려했는데 약간의 주기도 있고(순간 잊을 때가있다) 엉겁 거래 마이크를 받아 넘기려다보니 잊어버렸다. 여기서 소개한다.
✿3. 죽(竹)
此竹彼竹化去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風打之竹浪打竹: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는 대로
飯飯粥粥生此粥: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是是非非付彼粥: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부치는 저대로
賓客接待家勢粥: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市井賣買歲月粥: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萬事不如吾心竹: 온갖 일 내 마음대로 함만 못하니
然然然世過然粥: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내세.
*해체시라고 한다. 해체시는 무질서한 세상을 파편화된 세계를 그대로 수용한다. 세상일에 집착하지 않는 일종의 허무주의다. 해체시에는 온갖 비속어나 욕설이 그대로 난무한다. 세계를 가변적이고 일상적이며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한다. 1800년대부터의 조선 후기는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서당이 많아 글을 아는 선비는 많고 과거 자리 숫자는 변함이 없어 나라를 원망하는 지식인이 늘어났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와 대원군 쇄국정치에다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급기야 홍경래 난 서양인 진출 동학 난 등 국가나 사회가 매우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지식인들은 세상을 원망하고 비웃으며 김삿갓처럼 허무주의를 해체시로 응수하며 은연중 항거했다. 따라서 김삿갓의 시가 모두 김삿갓이 지은 시는 아니라고 한다. 역설적으로 김삿갓이 지은 시 또한 사랑방이나 장롱에 묻혀있어 발견하지 못한 시가 수없이 많다한다. 입에서 입으로만 구전되는 시의 내용이 김삿갓 시와 비슷하면 그것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엮었다. 1939년 김삿갓이 세상을 뜬지 70년 뒤 이응수가 처음으로 그 시집을 간행했다. 이곳저곳에서 구전되던 김삿갓의 시 183수를 모아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1987년 박영국선생에겐 전국에 690수의 김삿갓 시가 제보되었다. 글을 몰랐던 조선사람이나 알아도 한시에 관심 없던 사람들의 장롱 속 집 어느 구석에는 김삿갓의 수많은 시가 잠들고 있을 테다. 그래서 두보처럼 김삿갓도 세월이 흐른 먼 훗날이 되어서야 유명해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더라도 산과 물이 좋아서 산행을 즐기기가 참 좋은 나라다. ⌜…날나다 산을 봐도 언제나 보고 싶고(日日看山看不足) 수시로 듣는 물소리도 싫증이 나질 않는다(時時聽水聽無厭). 그러나 백여 년 전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신광한은 …行途水窮山盡處 가는 곳마다 물과 산이 다해서 任情歌哭亦難爲 노래하고 우는 정을 맡길 곳이 없구나.⌟ 라고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서 달랬다. 조선 선조 때 유명한 송익필은 ⌜君子如何長自足 군자는 어이하여 늘 스스로 만족하고 小人如何長不足 소인은 어이하여 늘 스스로 부족한가 不足與足皆在已 부족하고 족함이 모두 내게 달렸으니 外物焉爲足不足 외물이 어이해서 족함과 부족함 되리오….⌟라고 했으니 세상살이는 내 마음속세계에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오늘 산행도 똑 같이 하루를 살아왔지만 마음은 제각각 다를 터. 하지만 산행한 동기들 모두가 한 결 같이 즐겁고 행복했던 산행으로 나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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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동기회 행사로는 연 중 큰 행사의 하나인 올해산행은 5월25일 울산으로 가게 되었다. 산악회가 있지만 동기회 산악회는 대구 경북이 다 모여서 버스 2대로 인원이 좀 많아 더 활발하다. 전통 깊은 우리고교 동기친구들은 이번에도 80여명이 이심전심 다 같이 어우러져 이해하고 협동하며 일사불란하게 산행에 참여했다. 회장을 비롯한 주최 측 임원들이 모두 배테랑 들이라 준비에 소홀함이 없다. NSC회장을 비롯해서 언제나 수고하는 LWH국장과 카페지기 SDH회장이 수시로 알려주니 어릴 때 소풍처럼 한 달 전부터 마음이 즐겁다. 어떤 경우라도 시원시원하게 일을 잘 처리하는 KGP산악회장과 뒤에서 밀어주는 GGT山박사 그리고 CYS국장 행사도중 카메라에 담아서 감동의 여운을 남겨주는 카메라맨 KBD. 또한 전직 회장들이 직접 인원점호를 하는 등 일을 거들면서 행사를 주관한다. 모두가 동기회를 위한다는 봉사정신이 몸에 굳게 배어있다. 역시 명문교 엘리트출신은 세월이 흘러도 엘리트다. 행사를 위해 정성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자니 미안할 때가 있다. 언젠가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회장! 뭐 내가 도울게 없나? ”하니까 “없다. 없다. 앞으로 빠지지 말고 열심히 나오면 된다.”라고 하던 그 말이다. 역시 리더 자가 갖출 덕목은 하루 이틀에 이뤄지는 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교를 졸업한 후 반세기가 지났는데 여전히 동기회가 튼튼하기에 심신을 단련하며 건강과 행복을 안겨주고 있으니 역시 좋은 학교는 나오고 볼 일이다. 심신의 건강유지와 증진을 위하는데 큰 도움이 되게 한 오늘 산행은 먼 과거의 김삿갓과 함께하기도 했으니 보람된 산행이다. 열심히 준비한 임원님들 그리고 동행한 동기생 많은 여러분들이 있어 감사한 마음 언제나 가지고 있어요. 산행은 비록 하루에 그쳤지만 마음속 여행은 며칠이나 계속되고 있다. 아직 가야할 이 강산 산천이 많이 남아있으니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면서 김삿갓처럼 방방곡곡 다니면서 조국을 사랑합시다. 대구상고40회동기회여! 영원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첫댓글 이렇게 무게있는 글을 읽고 그냥 지나간다면, 감정 미약 진단이 나올것 같았습니다.
정말 지금 살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나타난 글이며, 모교 대상에대한 애정이 전신에 녹아난 글이며, 우리나라 시 역사를 탐구하지 않으면
알지 할 전문가의 글 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미안님은 진정한 실력가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