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9개월 리모델링 공사… 건축비 성남의 16분의 1 탁트인 민원실·옥상공원… 새 건물이라 착각할 정도건물 외벽을 두른 은빛 알루미늄 패널이 햇빛에 반짝거렸다. 소나무 여섯 그루가 뿌리 내린 앞뜰에는 화사한 크리스마스트리가 섰다. 1층 회전문을 밀고 실내에 들어서자, 탁 트인 로비 양쪽에 깔끔한 카운터가 설치돼 있었다. 테이블야자, 팔손이나무, 줄사철나무 같은 공기정화 식물들이 통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이 산뜻하고 세련된 건물은 일반 상업빌딩이 아니라 갓 준공된 서울 녹번동 은평구청 청사다. 최근 '호화 청사' 논란을 빚은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처럼 은평구도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새집 장만'을 한 걸까? 은평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결과만 보면 최근 준공된 다른 지자체 신청사들에 뒤지지 않지만, 실제로 들어간 돈은 은평구 예산 56억원과 서울시 지원분 142억원을 합친 198억원에 그쳤다는 것이다. '혈세 낭비'라는 비판이 쏟아진 성남시청 신청사 건축비(3222억원)의 16분의 1 수준이다.
▲ 최근 1년9개월간의 리모델링을 마친 은평구청 청사 외부 모습./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은평구청 1층 로비 양쪽에 설치된 카운터는 교통·차량 등록을 하는 민원창구와 주민등록·여권 담당 민원창구다. 로비 중앙에는 주요 사무실 위치를 알려주는 터치스크린 안내판이 서 있다. 은평구의 역사와 문화재를 소개하는 홍보관(32.55㎡·9.8평), 은평구 자매도시에서 생산된 향토특산물을 전시한 판매장(43.39㎡·13평)도 마련됐다. 충남 서천(소곡주)·전북 진안(복분자주)·충북 단양(황토마늘)·강원 영월(더덕주)·경기 가평(잣 막걸리) 등이다.
▲ 은평구청 청사가 새롭게 탈바꿈하는 데 든 비용은 198억원으로 최근‘초호화 청사’로 논란을 빚은 성남시청 청사(3222억원)의 16분의 1에 불과하다. 14일 오후 은평구청을 찾은 주민들이 최근 리모델링을 마친 구청 로비에서 각종 민원을 처리하고 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교통·방범·쓰레기 무단 투기 감시용 CCTV 300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통합관제센터, 은평구 관내 16개 주민센터 동장들과 화상회의를 할 수 있는 영상회의실,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될 은평홀(600㎡·181평) 등도 들어섰다. 휑한 콘크리트 바닥이던 옥상에는 인조 대리석과 목재 데크를 깔고 두메부추·흰꽃세덤·벌개미취 등 들풀을 심었다.
은평구가 싼값에 이처럼 번듯한 청사를 마련한 비결은 옛 청사를 헐고 새 건물을 올리는 대신, 28년 묵은 옛 청사의 뼈대를 살리면서 리모델링한 덕분이다.
은평구는 1979년 서대문구에서 갈라져 나왔다. 1981년 지금 자리에 지하 1층·지상 5층짜리 청사를 짓고 1991년 7층으로 증축했다. 이 건물은 2000년대 들어 준공 20년을 넘기면서 시설이 낡아 여러 번 문제가 불거졌다. 건물 외벽에 바른 타일 조각이 뚝 떨어져 민원인이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은평구는 새 건물을 짓는 방안을 궁리했다. 마침 금천·마포·성북·도봉·성동구 등 다른 서울 시내 구청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번듯한 새 청사를 짓던 참이었다. 그러나 은평구는 신축을 포기했다. 은평구 관계자는 "솔직히 돈이 없었다"고 했다.
은평구 인구는 47만명, 2009년 예산은 성남시청 건축비보다 적은 3083억원이다. 이에 비해 성남시 인구는 96만명, 2009년 예산은 2조2900억원이다. 은평구와 성남시를 견주면 인구는 절반(48%), 예산은 7분의 1(13%) 수준이다.
은평구는 "청사를 신축하려면 새로 땅을 사지 않고 그 자리에 짓는다 해도 공사비뿐만 아니라 공사 기간 동안 임시로 사용할 공간까지 마련해야 한다"며 "신축비용에 임차료까지 합치면 아무리 아껴도 234억원이 든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했다.
은평구는 값싸고 디자인 좋은 친환경·재활용 소재를 적극 활용해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옥상에 태양열 집열기도 설치했다. 구일완 은평구청 청사증개축팀장은 "해가 쨍쨍 나는 날은 태양열 에너지로 청사 난방비를 최대 10% 아낄 수 있다"고 했다.
7층짜리 건물을 리모델링하는 데 작년 3월부터 1년9개월이 걸렸다. 구청 직원 1200여명은 2층부터 7층까지 순차적으로 리모델링이 진행되는 동안 책상과 집기·컴퓨터 등을 들고 번갈아가며 총 70여 차례 이사를 다녀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구청 직원과 민원인들이 석면 등 유해물질에 노출됐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리모델링 공사를 마친 뒤 은평구청 공무원들은 입이 벌어졌다. 2000년 이후 청사를 신축한 서울의 다른 구청들과 비교해 봐도 훨씬 적은 돈을 들여 엇비슷한 효과를 냈다. 구청과 의회·문화회관·보건소 등이 복합된 건물을 지은 금천구(1178억원)·성동구(888억7800만원)·마포구(854억200만원)는 물론, 은평구와 마찬가지로 단독 청사를 올린 성북구(531억원)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은평구는 공식적인 준공식 대신, 16일 구청 식구들끼리 간단한 집들이를 하기로 했다. 노재동 구청장이 사무실을 돌며 공사 기간 번거로움을 참고 수시로 이사를 다닌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하는 게 집들이 행사 내용 전부다. 3선 구청장인 그는 이번이 마지막 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