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비다운 비가 좀 왔다. 봄비치고는 제법 많은 양이었다. 국지적으로 살짝 뿌린 비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내린 비였다. 최근 강원남부는 식수마저 고갈된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근래 이태동안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태풍이 한 차례도 없었다. 큰비가 내리지 않다보니 여러 곳에 있는 다목적댐 저수량이 바닥이라 농사용은 물론이고 상수원을 걱정할 처지였다.
나는 일요일이면 창원근교 산에 자주 오른다. 산에 오르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단풍이 곱게 물든 숲은 어느새 낙엽이 졌다. 가랑잎 쌓인 길을 걷다보면 눈길이었다. 응달 잔설이 녹으면 노루귀 꽃이나 생강나무 꽃이 피고 움이 터 나왔다. 혹심한 겨울가뭄에도 나무뿌리는 봄을 위한 펌프질을 계속하였다. 오리가 가만있지 싶어도 수면 아래 물갈퀴는 계속 꼼지락거린 원리다.
사월 첫 일요일 천주산을 갔더랬다. 외감에서 양미재 고개를 거쳐 구고사에 먼저 들렀다. 거기서 농바위를 지나 올랐던 천주산이었다. 농바위까지는 인적이 뜸했는데 진달래 축제로 산을 찾은 사람들로 복작댔다. 산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먼 곳에서 관광버스로 꽃 구경나온 사람들도 많았다. 평소 적막했던 산마루와 골짜기에 한계인원을 초과한 사람들이 붐벼 시끌벅적했다.
천주산에 올랐을 때 사람 소음보다 더 힘든 것이 등산길 흙먼지였다. 오르막내리막 지나는 사람들로 먼지가 자욱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지났기도 했지만 오랜 가뭄으로 흙바닥에 물기가 없었다. 아름다운 진달래꽃을 완상하기보다 폴폴 이는 흙먼지를 먼저 피해야 했다. 그때 산을 내려오면서 비가 흡족하게 내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 여가활용에도 비가 와야 했다.
시골 농사만 와야 하는 비가 아니었다. 도시민 식수로도 필요한 비였다. 자연생태계 순환 질서를 회복하는데도 비는 내려야했다. 산자락 숲도 비가 적다보니 생육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가지마다 꽃과 잎이 고르게 피고 돋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비는 대기의 그을음도 씻어간다. 다행이 올봄엔 황사는 덜했다만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공중 미세먼지는 많이 떠돌고 있었지 싶다.
비나 눈이 넘치거나 모자라면 자연재해가 된다. 우리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이용하려 들지 말고 좀 더 낮은 자세로 자연이 주는 혜택에 고마워해야 한다. 장엄한 자연 앞에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다. 우리의 생활은 기후변화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 화석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배출시킨 탄소문제는 이제 인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오염된 환경으로 지구 종말시계를 우리가 앞당기고 있다.
바쁜 일상에 쫓겨 살다 보니 창밖을 제대로 볼 여가가 없다. 그래도 아침에 출근하면 학년실 창문을 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간밤 좁다란 밀폐 공간 공기를 상쾌한 아침 바깥 공기로 바꾸어주었다. 그렇게 하려면 창문에 드리운 햇볕가리개를 걷어 올려야 했다. 자연히 창밖 운동장과 하늘은 잠시라도 바라보게 된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상쾌하게 출발하는 하루였다.
해마다 이맘때면 황사 아니라도 송홧가루가 날아와 희뿌연 공중이었다. 그러데 며칠 전 내린 비로 대기가 한층 맑고 깨끗했다. 창원 거리에는 느티나무 잎이 생기를 되찾아 싱그러웠다. 창원터널을 앞둔 출근길 차창 밖 풍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구릉에서 산록을 지나 정상부로 올라가는 연두색이 하루하루 달랐다. 마음 같아서는 어느 산마루에라도 오르고 싶다만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 내가 언젠가 남겼던 시를 한 수 떠올렸다. “그대나 내가 아침저녁마다 / 부지런히 넘나든 청원터널은 / 생업의 무거운 짐을 실었든 / 행락의 가벼운 꿈을 담았든 / 어두침침한 동굴로 빨려들면 / 시커먼 콘크리트 터널이었다. // 어둠이 무서워 불을 밝혔고 / 매연이 갑갑해 창을 닫았다. / 그렇게 잠시 침묵 흐른 후 / 빠져나온 곡우 지난 산기슭 / 가지마다 연초록 눈 부신다. / 나뭇잎을 보게나, 저 이파리들. // 몸 뒤척여 서로 부비면서 / 생의 환희를 누리고 있구나. / 이 계절 끝날 때까지 찬란히.” 09.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