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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6 천복궁교회 대성전에서 일본 ASAI YOSHISUMI교수님을 초빈하여 현대사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참석 못했지만, 다행히 녹화가 사이버카페에 올려있어서 수강을 했습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으로 얼음이 녹듯이 모든 의문이 해결되었습니다.
너무나 감명을 받아 꼭 남편을 비롯한 한국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한국어 동시통역 판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대학강의라 시간이 너무 길어서 남편은 중간에서 좌절했습니다. 그래서 문서로 만들면 단시간으로 읽을 수 있겠다 싶어서 일어로 강의하신 것을 한글로 받아쓰기 했습니다. 자신의 공부도 겸해서 했으니 너무나 부족함이 많겠지만, 괜찮으시면 읽어보세요.( 강화교역 와까즈끼에이꼬)
한국의 남북통일 정책과 북한의 노선전환
1945년 해방부터 1985년의 40년, 그리고 85년부터 92년까지의 7년을 모르면 지금의 북미관계를 이해 못한다. 7년간 이루어진 한국의 북방정책이 북한에게 준 영향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아야 한다.
조국통일에 대한 한국의 북방정책은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나는 65년 한일국교정상화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6.25동란후에 남북은 분단되었다. 그런데, 민족의 비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배후에 있는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의 4대 강국을 무시해서 통일을 말할 수 없다. 4대강국의 각각의 이해(利害)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남한은 4대강국과 어떤 외교를 해왔는가? 지금까지 북한에게 영향을 준 정권은 뭔가. 우선 박정희 정권이 실행한 선 건설 후 통일정책(1963~1979)이다. 다음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 때 실행한 북방정책(1985~1992)이 북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박정희 정권(61~79)은 우선 나라 경제를 회복한 후에 통일을 실행한다는 주장으로 외자(外資)를 도입하여 경제력과 기술력을 성장시켜서 통일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외자 대상국으로 당시 미국에서 2억달라를 지원받았지만, 그것만으로 급성장을 할 수가 없다고 보고 일본에서 자본을 가져올 것을 결단했다. 다만, 당시 역사적 배경으로 한일간의 국교가 없었다. 그래서 수뇌간의 합의로 국교정상화를 타개했다.
내막은 이랬다. 당시 일본 수상은 기시 노부스게(岸信介)였다. 그는 아시아를 중시(重視)하는 시각으로 일관했던 인물이다. 특히 아시아의 핵심국가가 한국이라 인식하여 국교정상화를 중요시 하고 있었다. 우연히 기시도 박정희도 전쟁 전에 만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는 공동 점도 있었다. 그래서 먼저 기시가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 “나의 선배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초대 조선총독부 통감. 안중근 의사가 암살한 인물. 기시(岸)와 이토(伊藤)는 같은 야마구치현 출신)가 한국에 큰 피해를 줬으니 사죄(謝罪)한다”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박정희는 호의적인 답 편지를 보내며, 상호이해 기반이 구축되었다. 외무부끼리 몇 차래 섭외가 있어서도 합의가 못되었지만, 두 수뇌간의 교섭으로 문제가 해결하여 국교정상화가 실행되었다. 기시는 아베 현 수상의 외할아버지다. 당시 한국 장관들도 “기시가 없었으면 한일국교 정상화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65년6월 체결한 한일국교정상화로 총8억달라의 일본자본이 한국에 돌아와, 한국은 경제력, 기술력이 성장되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이렇게 설명하면, 꼭 한국인 유학생에게 질문과 지적을 받는다. 같은 시기에 월남전이 있으므로 한강의 기적은 일본자본만 아닌 월남전에서 받은 미국자본도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이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일본도 한국도 자원이 없는 국가다. 돈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력으로 물건을 만들어 무역으로 해외에 판매해야 자립할 수 있다. 그 기술력이 국교정상화로 한국에 도입했으니 경제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중공업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 포함 총합제철소 건설이었다. 제철소가 건설되므로 조선, 자동차의 제조가 가능하게 되어 경제가 발전되었던 것이다. 그 포함제철소 건설자금은 대일청구권자금5억달라의 23%인 1억1948달라가 사용되었고, 기술은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과 일본강관(현 JFE스팀)에서 지원되었다. 지금 대법원에서 강제노동 문제로 배상명령을 받게 된 회사다.
포함 제철소(박물관)에 가면 탄생의 비화가 명시되어 있다. 원래 1차 5년계획으로 제철소 건설을 모색했으나 팽대한 예산 앞에 좌절했다. 2차로 美, 英, 佛, 伊, 獨의 5개국 기업이 연계해서 지원 협상을 체결했지만, 세계은행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박태준 사장이 대일청구권자본을 활용하자는 의견을 정부에 제시하여 건설이 가능하게 되었다.
박 사장의 회고록에 이렇게 써 있다. “신일본제철 이나야마(稲山嘉寛)회장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철건국의 집념(執念)과 이나야마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함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고생 끝, 73.6.9 1고로에서 용해철이 넘쳤다. 대한민국이 공업국가로 첫 걸음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이것은 한국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이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남북통일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 라는 시각으로 봐야 한다. 70년대 당시 한국의 무역 상대국은 일본(37%)과 미국(34.8%)이 거이 70%이상을 자지하고 있었다. 즉 한, 미, 일의 연계로 한국경제는 발전되었던 것이다. 65년의 30억달라였던 한국의 GDP(국내총생산)는 70년에 81억, 79년에 640억으로 급성장 하였다.
80년대 초에 한국과 북한의 경제는 이제 결정적인 차이가 생겼다. 즉 한국 경제의 우위성이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남북통일문제를 논할 때, 한국이 압도적인 우위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한일국교정상화로 남북관계에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일본이 잊지 말라야 할 것은 (2차대전) 전후(戰後) 폐허화된 일본 경제를 부활시켰던 원인이 6.25 한국동란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구성된 유엔군의 병참기지가 일본이었다. 미국은 아시아 전략의 큰 영향을 미친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생산활동의 재개를 일본에 허가했다. 항만시설 복구, 선박의 생산, 전투기 및 선박의 수리 등. 패전국인 일본에서 배상금을 받을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은 좋다, 싫다라는 감정을 떠나서 운명공동체로서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때 발전하는 경제기반 위에 다음 단계로 전두환, 노태우 때 북방정책(1985~1992)이 전개된다. 여기서 북방정책이란 뭐냐.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선언에 있듯이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한국은 중, 소(러시아)를 비롯한 사회국가와 관계를 개선하여, 북한이 미국, 일본과 관계를 개선할 때, 협조한다”는 주장이다. 서로의 동맹국과 관계를 교차하여 승인한다는 것이며, 남북통일의 국제적 환경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소련과 중국하고 국교를 수립, 북한을 국제적으로 포위하여 (경제 만 아닌)외교적으로도 한국이 (북한보다) 우위적 입장을 확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련과 국교를 수립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동유럽에 주목하여 헝가리와 국교를 수립하였다. 다음 단계로 소련과 교섭하여 북한의 노선을 전환시키려고 했다. 이 계획은 전두환 때 입안하여, 노태우 때 완성시켰다. 노태우 대통령의 비서관인 박철연을 비밀리에 동유럽에 파견하여 교섭을 시도했다. 당시 긴박한 상황을 일본NHK가 수집한 기록영상을 통하여 확인한다.
서울 올림픽을 앞둔 한국은 북한과 긴장완화가 시급했다. 그러나 아무리 한국이 긴장완화를 원해도 북한이 원하지 않은 이상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북한의 배후를 움직여서 북한의 입장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이 북방정책이었다. 노태우의 특명을 받은 박철연은 헝가리에 입국하여 북한 인사를 피하기 위해 한국계 미국인으로 위장하면서, 헝가리 실무자들과 교섭, 드디어 헝가리 노동당 서기장과 밀담하여, 국교를 수립할 수 있었다.
헝가리가 동맹국 북한을 배신해서라도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 배경에는 심각한 경제난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경제난이라 하지만, 주변의 대국에서 지원을 받으면, 그 대국에 종속할 기능성이 있어 위험했다. 그러나 한국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이므로 그런 걱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헝가리가 한국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인정했기 때문에 국교수립이 가능했다. 당연히 북한은 헝가리를 비판 했지만, 헝가리에 이어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도 1년내에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것을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위성국가들이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자, 박철연은 노태우의 친서를 가지고 소련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소련 고관은 신중한 입장을 보여줬다. 그러다 미국을 방문중인 고르바초프와 노태우가 1990. 6 샌프란시스코에서 수뇌회담을 한다는 전격(電擊)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아시아 외교의 브레인 와시레프는 “한국과 국교수립으로 초래되는 이익을 생각했다”고 회고한다. 무론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는 길도 있었지만, 일본의 자본을 도입하면, 꼭 영토문제(北方領土)가 발생하니 한국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소련이 경제난 타개가 시급했었고, 한국이 소련이 신뢰할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0. 9 소련 외무상이 평양을 방문하여 한국과 국교를 수립한다고 북한에게 통보했다. 북한은 비판적인 입장을 표했지만, 1990.9.30에 한국과 소련의 국교는 수립되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들이 (한국에) 속속 함락되어 북한에게 믿을 수 있는 나라가 중국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80년대 후반에서 한국기업이 진출하고 있었다. 무역량이 많아지자 1990.10 협의해서 1991년1월에 통상대표부가 서울, 평양에 설치되었다. 그런 배경으로 한국은 중국에게 국교수립과 남북동시 유엔가입의 인정을 요구하였다. 1991. 5 중국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여, 한중 국교수립을 통보하여 유엔동시가입에 동참할 것을 표했다. 역시 중국도 한국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우위에 선 한국이 외교적으로도 북한을 포위하였다는 사실이 북한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 모른다. 이대로 가면 북한은 자멸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 일본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소련과 국교를 수립했으니, 북한주도로 남북통일하기 위하여는 외교적 포위망을 타파하여 경제를 재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한국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미국,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는 길이었다. 이제 북한의 생명선은 일본과 미국이었다. 이것은 일관한다.
90년9월에 한국과 소련의 국교수립, 90년10월에 한국과 중국의 통상대표부가 동의하자 북한은 바로 움직였다. 91년1월 평양에서 일본과 1차 교섭을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본과의 교섭을 수차래 진행했다. 일본은 납치문제가 해결하기 전에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납치문제를 인정하면, 제제를 받을 수도 있고, 미국과의 간계가 악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 납치문제를 부정하자 교섭은 결렬했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상대하지도 않았다.
북한이 다시 일본과 교섭을 재개하였다. 이번에는 납치문제를 인정하여 사죄하고 피해자를 일부 귀환시켰다. 그러나 일본은 피해자 전원의 귀환을 통한 완벽한 해결을 요구하자 교섭은 결렬했다. 일본과 수교가 어렵다고 보자 북한은 다시 93년3월에 미국에 접근, 미국을 자극하기 위해 핵개발을 선언했다. 만약, 북한이 핵 개발하면, 서울, 도교가 사정거리에 돌아가니 미국은 북한과 협상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북한에게 핵 개발을 중지하면 협상하기로 했으나, 실행하지 않았다. 미국의 애매한 태도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북한이 핵개발이 중지하지 않았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다시 2000년4월에 일본과 교섭을 시동했다.
일본 대학생들은 “북한은 뭐 하는지 모르는 무서운 나라다”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북한만큼 알기 쉬운 나라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북한은 미국, 일본과의 관계에 일관하고, 반대세력이 없어 수뇌부의 뜻대로 움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일본간의 교섭으로 2002년 당시 고이즈미(小泉純一郎)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여 일부 납치피해자를 귀환시켰다. 원래 일본이 원하는 해결이 아니었지만, 70년대부터 (북한과 교섭도 못하여) 미해결이었던 사건을 해결할 길이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이것은 일본 외무부의 힘이 아니다. 바로 한국의 북방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북방정책으로 북한 스스로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다. 한국은 일본에게 큰소리 해도 되는 입장인데, 아무도 “한국 덕에 납치문제가 일부 해결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한국이 북방정책이 성공시켰던 원인이 65년 한일수교였다. (일본이 한국에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이 6.25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일은 상호가 밀접한 관계로 역사가 움직여 왔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북방정책에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일본의 나가소네(中曾根康弘)와 소련의 고르바초프다. 나가소네는 역대일본총리로 유일하게 취임 후 한국을 방문한 인물이다. 총리가 되기 전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수뇌회담의 만찬회 때,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원래 미국의 입장으로 보면, 일본총리가 미국보다 한국을 우선으로 방분한다는 것이 기분이 안 좋은 것인데, 나가소네는 미국에서 대환영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한일간에 갈등이 있으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큰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나가소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가소네에게 전두환은 북방외교를 수뇌회담으로 해결할 수 있게 협조를 부탁했다. 나가소네는 중국 후야오방(胡耀邦)수석과 가정간 교류, 신뢰가 있었다. 그는 84년3월에 수뇌회담 때, 후야오방에게 “북한이 미국에 접근하여 한국은 중국과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85년5월 독일 본에서 개최된 서밋에서 미국 레이건에게 “한국과 중국 소련, 북한과 미국 일본으로 교차 승인하여 38선을 없애버리자”고 주장을 하였다. 레이건은 국무장관, 국방장관과 별도 의논하여 승낙했다. 이상은 2011년 야마자끼 (山崎拓) 전 부 관방장관의 인터뷰로 알 수 있다.
고르바초프의 역할은 노태우와 정상회담을 하여 국교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나는 오랜 동안 의문이 있었다. 왜 갑자기 고르바초프가 노태우를 만났던가 라는 의문이다. 노태우의 회고록에서 확인바, 한국과 소련의 정상회담은 소련 측이 제안했다는 것이다. 동유럽에서 국교를 수립하는 토대로 박철연이 노태우의 친서를 가지고 모스크바에 입성했지만, 접근 못하였다. 더구나 국교가 없는 나라의 정상회담이 짧은 기간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뜻밖에도 “지금 미국에 오면 정상회담을 한다”고 연락해왔기 때문에 노태우가 급하게 미국으로 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던 것이다. 그 정답이 문선명 총재님의 자서전에 있었다.
나의 사촌이 자서전을 읽으라 권유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종교적)책은 읽지 않다고 거절했었다. 그러자 사촌은 우편으로 자서전을 보내왔기 때문에 세세한 갓은 신경 쓰지 않고 전체를 홅듯이 쓱 봤더니, 문 총재님 내외분과 고르바초프가 만났던 사진을 보았다. 거기에 1990년4월 세계언론인회의 때, 모스크바에 입성하신 내용이 써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제대로 자서전을 읽게 되어 샌프란시스코 회담의 배경에 문선명 총재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문 총재님은 고르바초프과 만나 한국과 소련의 국교수립을 제안하여, 그것이 소련에게 어떤 이익이 된지 자세하게 설명하여 꼭 노태우를 만나라 지시를 하셨다. 고르바초프는 그 제안을 승인했고 문 총재님과의 약속을 지켰던 것이다.
또한 천안문 사건으로 외자가 퇴출하는 가운데, 문 총재가 중국에 자동차공장을 만들어 투자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해서 오오타 회장에게 기시 전 수상을 문 총재님이 어떻게 평가했던가를 문의 했다. 당시 오오타 회장님의 부인이 승공활동을 통해 기시를 섭외했고, 기시와 문 총재가 만났던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듣기로는 문 총재님은 기시를 수상으로 만들기 위해 10년간 기도하셨다 한다. 원수국가간 수교를 성공시킨 사람은 기시 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 때부터 문 총재님의 설계도에 일본을 세워서 남북통일을 이루겠다고 계획하셨던 것이다. 10년 전이라면, 남북분단이 확정된 시기다.
그러다 나는 왜 문 총재가 북한에 국빈대우로 가실 수 있었던지 이해가 되었다. 즉 문 총재님은 북한이 미국, 일본과의 관계 수복할 때 필요한 내용을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워싱턴 타임스, 중국 판다 자동차, 일본 승공연합 의원이다. 문 총재님을 잡으면 일본, 미국 대통령까지 연계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문 총재는 한 그룹의 대표 레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위대한 인물이자 앞으로 많은 역사가가 그분을 연구할 것이다.
박보희 회장과 북한 박종근 사장의 회담을 자서전을 통해 본다. 문 총재님의 방북에 앞서 회담했던 내용이다. 박 사장은 통일운동의 자료와 문 총재님의 업적에 대한 자료를 요구했다. 문 총재님의 방문보다 문 총재의 백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문 총재님의 백을 이용하면, 일본과 미국으로 관계 개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원래 문 총재님의 계획에는 부시(아버지 부시) 가 북방정책의 완성자가 될 예정이었을 것이다. 생애노정에 따르면, 김일성과 회담할 때, 총재님은 “네 (김일성)정권을 나에게 넘겨라”고 말했다고 한다. 총재님을 수석으로 김일성이 부 수석으로 남북통일의 계획을 의논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김일성은 승인하였다고 한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한일국교가 수립하여 북방정책이 성공하므로 북이 스스로 방향을 움직여서 총재님의 북한방문이 이루어졌다. 최종적으로 총재님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의 형의 입장이 되어 남북통일하자고 하셨던 것이 아닌가? 남북이 분단 될 때부터 이런 설계도가 총재님의 머리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남북통일에 일본은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지만, 이것도 총재님이 계획하셨던 것이 아닌가? 이런 내용을 한일간에서 많이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종적으로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개성해야 한다. 한학자 총재님도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라 들었다. 그것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필수조건이 있다. 바로 한국, 미국, 일본이 굳게 연계하는 토대로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개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최악의 한일관계고 그것을 위해 미국이 노골적으로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이 상황으로 북한과 미국이 관계를 개성하면, 북한을 주도로 남북통일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한국은 중국과 무역량이 많아지고 중국에 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미국은 더욱 불쾌함을 나타낸다.
원래 30년전에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북한과 미국은 관계를 개성해야 했었지만, 못했다. 지금 트럼프 때, 처음 미국과 북한이 대화를 시작하였다. 절호(絶好)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반복하지만, 남북통일을 위해서 한국과 일본의 양호한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문책: 와까즈끼에이꼬)
사진제공 오시마가즈애 강화부인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