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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 내 것 그래봤자, 세상에 내 것은 없는 거야” / 오현 스님
[최보식기자 직격인터뷰] 설악산의 ‘落僧’ 오현스님
“조계사 앞에 가보면 깨달았다는 중들 많아 다들 점검 해봐야 해
시인은 알아준다길래 가짜 詩를 몇편 썼지 내 詩는 버리는 詩야”
소문으로는 늘 술에 취해 산다는 선승(禪僧)을 만나러 갔더니,
맑은 피부의 칠순 노인이 종종걸음으로 나왔다.
결 고운 삼베 적삼과 하얀 모시 바지 차림이었다.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가 설악산 백담사 회주인 오현(五鉉·75) 스님이었다.
그는 “얼른 들어오소”라며 내실로 안내한 뒤
손수 찻잔을 들고 와 차를 따라주었다.
그의 다섯 가닥 패인 이마 주름을 쳐다보고 또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불쑥 “피모대각(披毛戴角)이라고 하셨지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바로 얼마 전 ‘정지용 문학상’을 받은 그가 수상식 자리에서
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 피모대각이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사람이,
부처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도 다 내다 버려야 할 놈이,
이 나이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상(賞) 받고 신문에도 나오니,
몸에 털 나고 머리에 뿔 돋은 짐승이 된 것 같은 거지.
몇 십 년 전에는, 나도 신문 같은 데 나오고 싶어서,
기자들에게 밥 사주고 술 사줬지요.
내 기사를 크게 쓰라고 그랬던 시절도 있었는데,
환갑 지나고 칠십 지나고 나니까, 전부 다 부끄러운 짓거리라.
자꾸 보니까 필요 없는 짓거리야. 산에서 중노릇이면 됐지.
이번에 수상시집이 나오니 문학 담당기자가 전화가 왔어.
내가 ‘싣기만 실으면 대갈통을 깨놓겠다’고 했는데.
그걸 크게 실어달라고 착각을 한 것인지,
신문마다 내가 나왔어. 쯧쯧, 그렇다고 대갈통을 깨놓을 수는 없고.”
―그런 이치를 아시는 분이 시는 왜 씁니까?
“시를 많이 쓰지는 않았고, 지금까지 한 100편….
한때 그런 걸 하고 싶던 시절이 있었지.
시를 쓰게 된 것은 1970년대 신흥사 주지(住持)를 할 때야.
내가 국민학교도 안 나왔으니까 주지가 돼도 아무도 안 알아줘.
천주교로 따지면 교구장 급인데. 그때만 해도 누가 좀 알아주기를 바랐지.
당시 행정대학원 학위는 돈 주면 준다고 하대.
그걸 하나 만들었고. 또 세상에는 시인이라면 알아준다고 하대.
그래서 가짜 시를 100편쯤 썼던 거지.
시집을 낼 때 이근배(시인)에게 ‘지금 누가 제일 시를 잘 쓰냐’고 물으니,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이 일등’이래.
그러면 ‘미당보다 내가 더 잘 쓴다고 발문(跋文)을 써다오’라고 했고,
내가 그 발문을 교정 보면서 ‘미당은 가꾸는 시,
오현은 버리는 시’라고 했어. 푸하하하.”
▲삼베 적삼과 하얀 모시 바지 차림의 오현 스님은
“귀가 어두운가?”라고 통박을 주면서 2시간이 넘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를 만나본 이들은 그에게 매료됐고 그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숱한 문인·정치인·고위관료·언론인들이 그에게는 꼼짝 못하는 것 같았다.
천하를 눈 아래로 보았던 기행(奇行)의 걸레 스님 중광(2002년 입적)도
그 앞에서는 존경을 표시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는 일부 소수에 국한 된 것이다.
세간에서는 그에 대해 안 적이 없었다. 그는 언론과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힘이 세어지는 이치와 같았다.
막상 내가 “한번 찾아 뵙겠다”고 전화했을 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 오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 체류 중이었다. 나는 그에 대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틀 뒤에 방문하게 됐다.
―초등학교도 안 나왔는데 어떻게 신흥사라는 큰 절의 주지가 되셨지요?
“절에 들어가면, 옛날에는 글을 안 가르쳐 줬다.
알았제? 말과 글을 버리는 곳이 절이다. 지식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일반, 하나는 종교의 길이란 말이야. 가는 길이 다르다.
여러분이 가는 세속의 길은 해가 뜨는 길이다.”
내가 “해가 어떻다고요?”라고 되물으니,
그는 “귀가 어두운가?”라고 통박을 줬고,
나는 “스님 발음도 썩 좋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그렇지”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는 길이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볼펜 두 개를 들고 와 그 끝을 반대쪽으로 향하게 했다.
“속세 길은 학교도 다녀야 하고, 돈도 벌고, 명예도 있어야 하고,
또 할 일이 많다고. 아들 노릇해야지, 아버지 노릇해야지,
친구 노릇, 제자 노릇, 스승 노릇 해야지. 많잖아.
그러니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부지런히 일해야 알아줘.
가만히 있으면 사람 노릇을 못하니까.
하지만 종교의 길은 해가 지는 쪽으로 간다.
부모 형제부터 버리잖아. 육신도 버려야지.
그런 마당에 돈·명예도 다 버려야 하잖아.
돈 많은 종교인은 아무리 똑똑해도 욕 얻어먹잖아.
법정(法頂) 스님을 봐라. 돈 있나?
‘비워라 비워라’는 무소유 소리만 하지.
성철(性澈) 스님도 마찬가지다. 비가 와서 집이 떠내려가도 손도 안 댄다.
그저 신발만 방 안으로 들여놓을 뿐. 그래도 존경 받잖아.
이는 세속의 이치와 반대니까 그래.
지식도 버리고 깨달음도 버리고 부처도 버려야 한다고.
부처에 집착해도 안 되거든. 불교가 최고라는 생각도 버려야지.
거기에 빠져있어도 안 돼. 그건 물이 흘러가다가 얼어붙는 것과 같아.
그러나 세속 길과 종교 길은 방향이 다를 뿐 나중에 만나는 것은 똑같아.”
―스님께서는 배운 것도 없고 지식도 버리는데, 시는 어떻게 배웠습니까?
“글이란 모르면 ‘이게 무슨 자(字)냐, 무슨 뜻이냐’라고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그걸 배울 게 뭐 있어.
또 절간에 불경 같은 것들이 많이 있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나는 누구한테 정식으로 글 배우고 그런 거 없었다.
글을 배워놓으면, 문자에 지식에 빠지고, 아는 척하고 다녀.
그런 거는 아무 필요 없어, 중(僧) 공부라는 것은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읽어내도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야.
문자 속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암만 읽어봐라,
그저 빠져 죽을 뿐이지.”
―그걸 아시는 분이 왜 글로써 시를 썼지요?
질문은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내 말을 못 알아듣게 돼.
그 시는 여러분들이 모르는 글자지(세속의 글과 다르다는 뜻).
글에 빠지는 것과 안 빠지는 것은 경계가 굉장히 다르다.”
그는 이 답답한 중생을 위해 일어나서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한 시집을 들고 왔다.
그 첫 장에 실린 ‘아득한 성자’를 펴서 “자, 봐라”며 읽어 내려갔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 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그런 뒤
“어떤 놈은 죽을 때까지 못 알아듣고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못 알아들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야”라고 덧붙였다.
▲오현 스님은“글에 빠지는 것과 안 빠지는 것은 경계가 굉장히 다르다”며
자신의 시집을 꺼내 보여줬다.
―늘 술과 함께 산다고 들었습니다.
“술이야 둘째 가라면 서럽지. 술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난 좋아.
나는 식당이나 주점에서는 술을 먹는 일이 없다.
내 방안에서만 먹는다. 한때는 사람들과 어울려 먹은 적도 있지만
술 안 취했을 때는 괜찮았던 놈이 취해서는 ‘중놈도 술 마신다’고 시부렁거리며 욕하데.
그 뒤로 다른 사람과는 같이 안 먹는다.
작년에는 고은(高銀) 선생이 내가 혼자 술 마시는 걸 보고
한잔 달라고 했지만 술은 안 줬다.
대신 돈 주면서 ‘다른 데 가서 마시라’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 태워서 한잔 하고, 점심 공양 때 마시고,
그러다가 잠이 오면 자고, 깨어나서 또 마시고.
안주는 별로 먹지 않는다. 그래도 오장육부가 다 괜찮아.
최근에는 열흘간 안 마셨다. 안 마시면 금방 피부가 좋아지지.”
―스님이 술 잘 마시는 걸 자랑합니까?
“나는 중이 아니야. 내 책에도 썼지만 ‘낙승’(落僧)이다.
중에서 떨어졌다는 뜻이다. 나는 열심히 중노릇을 못했으니,
술이나 마시고, 거짓말이나 한다. 진짜 중은 힘들어.
거짓말도 안 해야 하고 술도 안 먹어야 하고
욕도 안 해야 하고 돈도 안 모아야 한다.
남들이 도저히 못하는 일을 하니, 진짜 중은 존경을 받는 거다.
그런데 (기자를 응시하며) 꼭 나를 취재하려는 것 같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양이 TV에서 본 ‘수사반장’ 같아.”
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노승은 틈만 나면 “녹음하지는 않겠지?”
“기사를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전부 나를 정치꾼이라고 욕한다”라며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나는 침묵으로 응대했다.
“또 술이란 원래 있는 게 아니다. 나라는 존재도 없는 데,
술이 어디 있나. 술은 곡식으로 만들잖아. 곡식으로는 밥도 만들지.
술과 밥의 본체, 재료는 똑같다.
밥 잘 먹고 시비하고 사람을 때려죽이면 그게 술 취한 놈이야.
그런데 술 마시고 기분 좋게 잘 살면 그것은 밥이지.”
―10년 전쯤 백담사에 기거하던 중광 스님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지요.
그 중광도 한술을 했지요.
“중광은 내 상좌(上佐)지. 죽을 때가 돼서 나를 찾아 왔어.
우리 둘 다 낙승(落僧)이지만 그래도 ‘승’(僧) 자는 붙었잖아.
그는 대단한 사람이야.
자기가 깨달았는데 언어 문자로 표현할 길이 없었어.
그래서 미친 그림을 그렸는데 세상이 못 알아들어.
닭과 섹스를 했다고 해도 못 알아들어.
여하튼 백담사에 왔을 때는 이미 병이 깊었어.
내가 ‘농암(聾庵: 귀머거리 암자)’이란 호를 지어주고, 처소를 마련해줬지.
건강을 위해 백담사에서 마을입구인 용대리까지 날마다 걸어 다니라고 했어.
그러다가 죽었어.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즐겁고 기쁜 날이 죽는 날이다.”
―정말입니까?
“그럼.”
―그걸 어떻게 압니까?
“시골 노인들이 죽으면 ‘편안하게 주무셨다’고 그러잖아.
죽음은 슬프지 않아. 우리 중들은 사람이 죽으면 염불하는데,
‘다비문’이라는 염불책이 있어.
그 끝 구절이 ‘쾌활(快活), 쾌활’이야. 좋다 좋다는 거지.
모든 근심 번뇌에서 다 벗어났으니 얼마나 기쁘냐.
그래서 절에서는 죽는다는 소리를 안 하고,
‘귀’(歸: 돌아가다)나 ‘입적’(入寂: 적막으로 들어가다)이라는 말을 쓰지.
원래 자리로 돌아갔으니 편안하지. 중(僧) 공부라는 것은 사실 죽는 공부지.”
―죽는 공부라고 했나요?
“그럼 죽는 공부다. 참선(參禪)하는 것도 다 그렇지.”
―생물이란 때 되면 죽고 어차피 죽음을 맞게 되는데,
죽는 공부를 평생 붙잡고 삶을 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나요?
“사람이 죽는 공부 말고 할 게 뭐 있나.
여러분들은 욕망이 꽉 차있으니까, 안 보이는 거야.
욕망 때문에. 돈 벌고 일하고 집 짓고 여자를 만나는 그런 걸 추구하니,
내가 아무리 늙어 죽는 이야기를 해도 못 알아들어.
하기야 그런 사람들도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
전부 다 중질을 하면 안 된다. 세상에는 잘난 놈만 있어도 안 되고.
못난 놈도 있어야 한다. 중도 목사도, 온갖 게 다 있어야 한다.
그런 것들이 어울려야 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다.”
―그런데 깨달았다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먹고 살고 죽는, 삶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없어졌다
그거지. 의심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지.”
# 모든 것에 회의 없어지는 것이 깨달음
―그런 깨달음은 일종의 자기 현혹, 자기 착각이 아닐까요?
“서울 조계사 앞에도 깨달았다는 중들이 많아.
그래서 바로 깨달았는지 잘못 깨달았는지 점검을 받아야 한다.
절에 가면 조실(祖室: 큰 어른)이 있어 그걸 맡지.
선문답이 거기서 나오고 이심전심으로 알게 돼.
애들을 키워보면 아이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부모는 알잖아.
어미가 부엌에 있어도, 제 자식이 오줌을 싸서 우는지
배가 고파 우는지 똥칠을 해 놓고 우는지,
우는 소리만 들어도 다 안다.”
―깨닫고 보면 삶은 의미가 없게 됩니까?
“삶의 무상(無常)이라는 것은 무의미와 달라.
세상의 모든 것이 머물지 않고 변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불교를 몰라. 처음 절에 오니 밥도 먹을 수 있었고,
또 중질이 돈벌이인 줄 알고 열심히 살았지.
불전함(函)을 두면 신도들이 시주를 바치잖아.
돈벌이를 위해 열심히 염불도 했지. 장례식에서 염불하면 돈 벌잖아.
그래서 밤새도록 할 때도 있었고.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나니,
중이 돈벌이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그러니 할 일이 없어졌어.
그래서 술 마시지. 세상을 살다 보면 돈 버는 일이 제일 재미있거든.”
―사는 재미가 있으려면 내 것을 꼭 해야 할 것 같군요.
“그런데 그게 문제인 거야.
내 것이라고 자꾸 그래도, 내 것은 사실 하나도 없는 거야.
한번은 검사가 백담사에 들러,
당시 뇌물을 먹고 수감된 K씨를 나쁜 놈이라고 욕해.
내가 ‘봐라, 니도 먹었잖아’라고 하니, 펄쩍 뛰어.
그래서 ‘니도 많이 먹었다’는 것을 설명해줬어.
K씨가 그 돈을 땅에 묻어 놓았겠나.
은행에 맡겼으면 은행 직원들이 먹고 살았을 것이고,
그 중에서 100만원을 빼내 신라호텔에서 식사를 했다면
호텔 직원들을 먹여 살렸고, 호텔 음식 재료를 공급하는
농사꾼들도 같이 먹은 것이 되고, 이를 싣고 올라온 운전사도 먹었고…,
천지만물이 한 몸이라. 그렇게 다 연결되어 있는 거다.
본체로 보면 내 것 네 것이 없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데,
실제 산 속에 들어가면 산은 없어. 나무와 계곡들이 있지.
다만 있는 대로 보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이지.”
# 중이 돈벌이 하면 안되는 거 나중에야 알아
―일각에서는 스님께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교분을 중시하고
이른바 ‘유발상좌(有髮:머리 기른 세속의 제자)로 두고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그건 내가 심심하니까 하는 거지. 유발상좌라는 말도 내가 지은 것이고.
요즘 내가 거짓말해도 사람들이 알아주잖아.
내가 이들에게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나한테 찾아오는 거지.
이 모든 게 나와는 관계없는 일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왔다 가면,
내게 품위 유지할 돈도 내놓고 술도 놓고 가지.
어떤 이는 나를 중이 술만 먹고 있더라고 욕하고 가고,
또 어떤 이는 나를 도둑놈으로 보고 가고,
자기 그릇대로 보고 그러는 것뿐이지. 나하고는 관계가 없어.”
―중생들은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뼈빠지게 일해서
세금 내고 시주도 바치는데, 스님은 큰 소리 뻥뻥치면서 품위 유지도 하시니.
“누가 돈 달라고 했나. 불전함에 누가 돈 넣으라고 강제했나.
중놈 보고 시주를 하나. 시주 놓고 절하고 가면 자기 마음이 편하니까.
마음의 즐거움을 얻어 가면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부처님한테 올린 것을 부처님이 드시고 난 뒤 우리 중들이 나눠먹는 것이지.”
1999년부터 매년 여름 백담사 아래에서 열리는
‘만해(萬海)축전’은 그가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이수성 국무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절간의 한 중일 따름인데,
국무총리는 만해 한용운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만해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만해축전을 열 것이니 20억 원을 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스컴이 접근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앞세우고 뒷전으로 피했다.
―같은 승려시인으로서 만해(萬海)와 일치감을 느끼고 있습니까?
# 부처는 死後를 말한 적 없지만 윤회 믿어
“아니야, 만해는 나서는 분이었고 나는 드러나는 걸 못해.
백담사는 만해가 거주했던 곳이기에,
나는 ‘부처 장사’하는 것보다 ‘만해 장사’가 났다고 생각했지.
조계종에서는 만해를 안 알아준다.
만해는 ‘불교유신론’이라는 글로 승려도 결혼하자고 주장했거든.
하지만 사회에서는 좌우 이념을 떠나 만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조선일보와도 관계가 깊어.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方應謨) 선생은 만해의 재정적 후원자였지.
그래서 만해축전에 조선일보를 끌어들였는데,
민족작가협회 등에서 따지며 참여하지 않겠다고 반발이 있었다.
세상 이치를 모르는 것이야. 정 그러면 오지 말라고 내가 그랬지.
결국 모두 함께 참여했어.”
자리를 옮겨 점심을 먹으면서,
이 노승에게 “윤회(輪廻)를 확신합니까?”라고 물었다.
“죽음 뒤는 잘 몰라. 부처도 사후를 말씀한 적은 없어.
그러나 윤회는 믿어. 우리가 살면서 해온 행위가 옮겨가고
돌아온다는 윤회를 말하는 것이지.
오늘 내가 점심을 대접하면 이것이 옮겨가서
언젠가 내게 아름다운 소문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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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오현(曺五鉉) 스님은…
자신을 ‘설악산 산감(山監: 산지기)’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신흥사·백담사 회주(會主:절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조실이라고도 함)다. 그는 여섯 살 때 절간에서
소를 키우는 머슴으로 입산했다. 절집에서 삶을 시작했으니,
승려가 될 수밖에 없었다. 1959년 조계종 승려로 등재됐다.
법명은 무산(霧山), 호는 설악(雪嶽)이다.
그는 수행자이면서도 뛰어난 문인이다.
불교신문 주필을 맡은 적도 있다.
이번에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그의 시에 대해,
고은(高銀)은
“안개 자욱한 내설악/안개 걷히운 외설악을 아우르고 있다”며
절찬했다.
그는 ‘만해축전’을 개최해,
현재 만해사상 실천선양회 이사장, 백담사 만해마을 이사장도 맡고 있다.
2007. 6. 15.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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