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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 秋 戰 國 時 代
齊(제)나라
太公望 呂尙(태공망 여상)은 東海(동해) 부근 사람이다. 선조는 일찍이 四嶽(사악)이 된 후
하나라 우왕이 물과 땅을 정리하는 것을 돕는 대공을 세웠다. 이들은 舜(순)임금과 하나라
우왕 시대에 呂(여) 또는 申(신) 땅에 봉해졌다. 성은 姜氏(강씨)였다. 하나라와 은나라 때
는 방계의 후손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기도 했고, 또 서민이 되기도 했다. 尙(상)은 그 후
예다. 본래의 강씨였으나 이후 봉지를 성으로 삼은 까닭에 여상으로 불린 것이다.
齊 王 朝 世 家
전국시대 齊(제) BC. 11세기∼BC. 379 위치 山東(산동) 성: 姜(강) 작위 후작
田齊(전제). BC. 386∼BC. 221 성: 嬀(규)
| 대수 | 재위기간 | 위 | 휘 | 관계 | 수도 | 현재지명 |
| 제1대 | 太公(태공) | 商(상) | 臨淄(임치) | 山東省 臨淄 | ||
| 제2대 | 丁公(정공) | 伋(급) | 태공의 아들 | 산동성 임치 | ||
| 제3대 | 乙公(을공) | 得(득) | 정공의 아들 | |||
| 제4대 | 癸公(계공) | 慈母(자모) | 을공의 아들 | |||
| 제5대 | 哀公(애공) | 不辰(불신) | 계공의 아들 | |||
| 제6대 | BC. 862∼BC. 860 | 胡公(호공) | 靜(정) | 애공의 아우 | ||
| 제7대 | BC. 859∼BC. 851 | 獻公(헌공) | 山(산) | 호공의 아우 | ||
| 제8대 | BC. 850∼BC. 825 | 武公(무공) | 壽(수) | 호공의 동생 | ||
| 제9대 | BC. 824∼BC. 816 | 厲公(여공) | 無忌(무기) | 무공의 아들 | ||
| 제10대 | BC. 815∼BC. 804 | 文公(문공) | 赤(적) | 여공의 아들 | ||
| 제11대 | BC. 803∼BC. 795 | 成公(성공) | 脫(탈) | 문공의 아들 | ||
| 제12대 | BC. 794∼BC. 731 | 莊公(장공) | 購(구) | 성공의 아들 | ||
| 제13대 | BC. 730∼BC. 698 | 釐公(희공) | 祿甫(녹보) | 장공의 아들 | ||
| 제14대 | BC. 697∼BC. 686 | 襄公(양공) | 諸兒(제아) | 희공의 장자 | ||
| 제15대 | BC. 686 | 공손무지 | 희공의 조카 | |||
| 제16대 | BC. 685∼BC. 643 | 桓公(환공) | 小白(소백) | 양공의 동생 | ||
| 제17대 | BC. 643∼BC. 642 | 無詭(무궤) | 환공의 아들 | |||
| 제18대 | BC. 642∼BC. 633 | 孝公(효공) | 昭(소) | 무궤의 동생 | ||
| 제19대 | BC. 632∼BC. 613 | 昭公(소공) | 潘(반) | 효공의 동생 | ||
| 제20대 | BC. 612∼ | 舍(사) | 소공의 아들 | |||
| 제21대 | BC. 612∼BC. 609 | 懿公(의공) | 商人(상인) | 소공의 아우 | ||
| 제22대 | BC. 608∼BC. 599 | 惠公(혜공) | 元(원) | 의공의 형 | ||
| 제23대 | BC. 598∼BC. 582 | 頃公(경공) | 無野(무야) | 혜공의 아들 | ||
| 제24대 | BC. 581∼BC. 554 | 靈公(영공) | 環(환) | 경공의 아들 | ||
| 제25대 | BC. 553∼BC. 548 | 莊公(장공) | 光(광) | 영공의 아들 | ||
| 제26대 | BC. 547∼BC. 490 | 景公(경공) | 杵臼(저구) | 장공의 아들 | ||
| 제27대 | BC. 489 | 安孺子 | 荼(도) | 경공의 아들 | ||
| 제28대 | BC. 489∼BC. 485 | 悼公(도공) | 陽生(양생) | 안유자의 형 | ||
| 제29대 | BC. 484∼BC. 481 | 簡公(간공) | 壬(임) | 도공의 아들 | ||
| 제30대 | BC. 480∼BC. 456 | 平公(평공) | 驁(오) | 간공의 동생 | ||
| 제31대 | BC. 455∼BC. 405 | 宣公(선공) | 積(적) | 평공의 아들 | ||
| 제32대 | BC. 404∼BC. 379 | 康公(강공) | 貸(대) | 선공의 아들 |
중국의 서주 시대부터 존재하던 제후국으로 지금의 산동 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
던 춘추오패의 하나다. 크게 춘추시대의 姜齊(강제)와 전국시대의 田齊(전제)로 나눤다.
수도는 임치로 지금의 산동성 쯔보시(淄博, 치박)이다.
주나라의 개국공신 太公望 呂尙(여상)의 봉국인 제나라의 역사는 여상이 제후로 봉해
지는 주 무왕 12년부터 제 강공 26년 까지 모두 660년의 역사다
제1대 여상(BC, ?〜BC, ?)
태공망 여상은 동해 사람이다. 일찍이 여상은 곤궁하고 연로했다. 서백이 사냥을 나갔다
가 渭水(위수)가에서 여상을 만났다. “우리 선대인 태공이 이르기를 장차 성인이 주나라
에 올것이고 주나라는 그로 인해 일어날 것이라 했소 선생이 실로 그분이 아니오? 우리
태공이 선생을 기다린지 오래되었소“ 여상을 태공망이라 부르게 된 이유다. 강상은 공
부를 대단히 좋아했던 모양으로 70세 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한다. 부
인은 계속 뒷바라지하다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였고 식량이 떨어진 그는 위수가에서 낚
시를 했다. 주 문왕과 무왕의 스승이 되었다.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한 뒤 천하의 주인
이 되자 왕사인 상보를 제 땅의 營丘(영구)에 봉했다. 태공이 대략 100여 세에 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아들인 級, 伋(급)이 뒤를 이어니 그가 제 정공이다.
태공망이란“ 창의 아버지 太公(태공)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望, 망)사람이란 뜻이다.“
제2대 정공(BC, ?〜BC, ?) 강태공의 아들이며, 을공의 아버지다.
그는 강태공의 사후 뒤를 이어 제나라의 군주가 되어 周 武王(주무왕)의 아들인 成王(성
왕)을 보좌하였다. 이때 같이 활약한 인물이 衛 康伯(위 강백). 진 후섭. 魯公 伯禽(노공
백금)이다. 그가 죽고 아들인 득이 뒤를 이으니 그가 을공이다.
제3대 을공(BC, ?〜BC, ?) 제 정공의 아들이며, 제 계공의 아버지다.
그는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풍속과 예의를 간단히 했으며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그는
차남이었는데 장남인 계자가 그에게 양보해 그 대가로 최읍(최씨의 조상이다)을 내렸다
고 한다. 그가 죽고 아들인 자모가 뒤를 이으니 그가 제 계공이다.
제4대 계공(BC, ?〜BC, ?) 제 을공의 아들이며, 제 애공의 아버지다.
그가 죽고 불신이 즉위했다. 그가 제 애공이다.
제5대 애공(BC. ?∼BC. 863) 제 계공의 아들이며, 제 호공의 형이다.
제 애공 말년(BC. 863년), 紀(기)나라 군주는 그를 周 夷王(주 이왕)에게 모함해 주 이왕
은 제 애공을 소환해 삶아 죽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제나라와 기나라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 나라의 꾸준한 공격으로 기나라는 약소국으로 전락했고 제 양공의
공격으로 멸망해 버렸다. 동생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제 호공이다.
제6대 호공(BC. ?∼BC. 860) 제 계공의 아들이며 애공의 형이다.
주 이왕이 紀侯(기후)의 참소를 듣고 제 애공을 팽형에 처하고 애공의 이복동생 호공 정
을 새 제후로 세웠다. 호공은 수도를 營丘(영구)에서 薄姑(박고)로 옮겼다. 당시 周 夷王
(주 이왕)의 치세였다. 애공의 동복동생인 姜山(강산)이 제 호공을 원망했다. 자신를 따르
는 무리와 함께 영구의 사람들을 이끌고 호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뒤를 이었다. 그가 제
헌공이다.
제7대 헌공(BC. ?∼BC. 851) 제 계공의 아들이며, 제 애공, 제 호공의 동생이다.
그는 영구의 귀족들과 뜻을 함께 해서 형인 제 호공을 시해하고 즉위했다. 제 헌공은 즉
위한 해에 제 호공의 자식들을 모두 쫓아내고 도성을 박고에서 다시 영구로 옮기고 그곳
을 臨淄(임치)로 고쳤다. 제 헌공 9년 제 헌공이 죽고 아들 수가 즉위했다. 그가 제 무공
이다.
제8대 무공(BC. ?∼BC. 825) 제 헌공의 아들이며, 제 여공의 아버지다.
제 무공 9년(기원전 842년), 周 厲王(주 여왕)이 달아나 彘(체)땅에 머물렀다.
제 무공 10년(기원전 841년), 폭군 厲王(여왕)이 폐위되어 공화시대가 열렸다. 제 무공
23년(기원전 828년), 공화시대가 끝나고 여왕의 아들인 周 宣王(주 선왕)이 즉위했다. 그
리고 주나라의 중흥이 시작되었다. 제 무공 25년(기원전 826년), 그는 딸을 주 선왕에게
시집 보냈다. 제 무공 26년(기원전 825년), 제 무공이 죽자 아들 무기가 뒤를 이으니 그
가 제여공이다. 그 아들 제 여공은 폭정을 해 시해되었다고 한다.
제9대 여공(BC. ?∼BC. 816) 제 무공의 아들이며, 제 문공의 아버지다.
그는 폭정을 자행해 제나라의 국인들이 죽은 제 호공의 아들을 데려와 그를 죽였으나 그
호공의 아들 또한 난전 중에 전사해 제 여공의 아들인 강적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
문공이다.
제10대 문공(BC. ?∼BC. 804) 제 여공의 아들이며, 제 성공의 아버지
제 문공 원년(기원전 815년), 제 문공은 아버지 제 여공을 시해한 자들 70명을 사형에
처했다. 제 문공 8년(기원전 808년), 진 나라의 晉 穆侯(진 목후)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
보냈다. 제 문공 12년(기원전 804년), 그가 죽고 아들 탈이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제
성공이다.
제11대 성공(BC. ?∼BC. 795) 제 문공의 아들이며, 제 장공의 아버지다.
제 성공은 9년 동안 제나라의 군주를 하다가 죽고 그 아들 구가 뒤를 이으니 그가 제
장공이다.
제12대 장공(BC. ?∼BC. 731) 제 희공의 아버지
장공은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게 해 국력을 키웠다. 제 장공 24년, 犬戎(견융)이 周 幽
王(주 유왕)을 죽이자 주나라 왕실이 동쪽 雒邑(낙읍)으로 천도했다. 秦(진)나라가 처음으
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제 장공 64년(기원전 731년), 그가 노환으로 죽어 그 아들 녹
보가 뒤를 이었다. 그가 제 희공이다.
제13대 희공(BC. ?∼BC. 698) 제 장공의 아들이며, 제 양공, 제 환공의 아버지다.
제 희공 9년(BC. 722년), 魯 隱公(노 은공)이 즉위했다. 제 희공 11년(기원전 720년), 희
공은 정 장공과 회맹해 정나라의 입지는 더욱 막강해졌다. 제 희공 15년(기원전 716년),
제 희공은 동복동생 夷仲年(이중년)을 보내 노나라와 우호를 다졌다. 제 희공 22년(기원전
709년), 노 환공이 제 희공과 회맹하다가 노 환공이 혼인 하겠다는 말을 들은 제 희공은
자신의 딸인 문강을 노 환공에게 시집보냈다. 제 희공 32년(기원전 699년), 제 희공은 송
나라. 위나라와 연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쳤다. 그 결과 노나라는 패배했다. 같은 해 동생
이중년이 죽었다. 이에 그 아들인 公孫 無知(공손 무지)에게 태자인 강 제아와 같은 대우
를 해주었다. 제 희공 33년, 제 희공은 송나라. 위나라. 채나라 조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같은 해 제 희공이 죽으니 그 아들 강 제아가 뒤를 이었다. 그가 바로 제 양공이다.
제14대 양공(BC. ?∼BC. 686) 제 희공의 맏아들이다.
희공의 둘째 아들은 糾(규)로 관이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고, 셋째 아들이 바로 나중
에 패자가 되는 환공 소백으로 포숙아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었다. 희공에게는 또한 이중
년이라는 동생과 첩 사이에서 얻은 文姜(문강)이라는 딸이 있었다. 희공은 동생인 이중년
을 몹시 아꼈는데, 이중년이 죽자 희공은 슬퍼하며 그의 아들 公孫無知(공손무지)를 제아
와 동등하게 대우했고, 제아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희공이 죽자 제아는 뒤를 이어 양공
이 되었고, 즉위 후 제 양공은 무지를 쫓아냈는데, 무지가 이에 복수를 결심한다. 그런
데 이 양공은 간통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이복 여동생 문강이었다. 기
원전 709년, 문강은 魯(노)나라 환공에게 시집을 갔는데, 15년 후인 기원전 694년, 魯 桓
公(노 환공)이 부인인 문강과 함께 제나라로 오게 되자 오빠와 여동생은 오랫동안 쌓인게
많아서 침실에서 사랑을 했다. 근데 이걸 노 환공에게 들키고 화가 난 노 환공은 근친상
간을 한 짐승같은 양공과 문강을 처치하기 위해 노나라로 돌아가서 군사를 끌고 와서 박
살을 낼려고 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양공은 노 환공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역사인 공자
彭生(팽생)을 시켜서 그를 부축하는 척하며 갈비뼈를 부러뜨려 죽여버렸다. 그러자 노 환
공과 문강의 아들인 노 장공이 아버지의 죽음을 양공에게 따졌고, 양공은 자기가 시킨게
아니라 팽생이 멋대로 그런거라며 하며 팽생을 죽여 노나라에 사죄했다.
제 환공 8년 紀(기)나라를 쳤다. 이에 강계는 항복해 기나라를 바쳤다. 여름 기후는 기나
라에서 달아났다. 제 양공 11년(기원전 687년), 제 양공은 대부 連稱(연칭)과 管至父(관
지보)를 국경지대인 葵丘(규구)에 파견했다. 당시 복무 기간은 1년이었는데, 양공이 1년
이 지나도 교체를 안 시켜주자 연칭과 관자보가 대로한 나머지 무지와 손을 잡고 반란
을 일으켰다. 우여곡절 끝에 무지가 양공을 죽이고 즉위했다.
제15대 공손무지(BC. ?∼BC. 685) 이중년의 아들이며, 제 양공의 사촌아우.
그가 제 양공을 죽이는데 참여한 이유가 있다. 제 희공은 동생 이중년을 아꼈는데, 그가
죽자 그 아들 공손무지를 제 양공과 같은 대우를 하게 했다. 그런데 제 양공은 그의 특
권을 빼앗았다. 이에 공손무지는 그것에 한을 품었다, 한편 연칭과 관자보 또한 계구 땅
을 지키는데 교대기간이 지나도 교대하는 사람을 보내주지 않자 결국 그들과 짜고 제 양
공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나라 군주 공손무지가 옹림
으로 놀러갔다. 雍林(옹림)출신 가운데 일찍이 공손무지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었다.
그가 놀러온 것을 틈타 습격해 죽여버렸다. 그리하여 군주자리가 비자 管仲(관중)은 공
자 糾(규)와 함께 노나라에서, 포숙은 공자 소백과 함께 莒(거)나라에서 출발했다. 이때
관중이 공자 소백을 활로 쏘아 맞힌 뒤 공자 소백을 죽인 줄 알았으나 소백은 사실은
죽지 않았고, 귀국하여 군위자리에 올랐다. 이에 공자 규는 노나라로 돌아갔다. 이에 노
나라와 乾時(건시)에서 싸워 노군이 포위되었다. 그러자 제 환공이 협상해 공자 규를 죽
이라고 해서 공자 규는 노나라에서 자결했고, 관중은 제나라로 끌려왔다. 끌려온 관중은
포숙의 도움으로 제 환공을 섬겨서 상국이 되었다.
제16대 환공(BC. ?∼BC. 643) 제 희공의 셋째 아들이다.
형 糾(규)를 죽이고 管仲(관중)과 鮑叔芽(포숙아)의 도움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패
자가 되어 전국오패중 최초로 패자가 되었다. 제 환공 2년(기원전 684), 겨울 제 환공은
담나라로 달아난 적이 있었는데, 담나라에서 무례하게 굴었으므로, 제 환공은 그것을 잊
지 않고 郯(담)나라를 쳐서 멸했다. 담나라 군주는 莒(거)나라로 달아났다. 제 환공 3년(
기원전 683년), 주나라의 왕녀가 제 환공에게 시집왔다. 제 환공 7년(기원전 679년), 송
나라의 甄(견) 땅에서 衛(위)나라, 정나라, 송나라와 회맹했다. 제 환공이 처음으로 패권
을 잡는 계가가 되었다. 제 환공 8년(기원전 678년), 제 나라는 다시 노나라, 송나라, 陳
(진)나라, 위나라, 정나라, 허나라, 활나라, 滕(등)나라와 유 땅에서 회맹했다. 당연히 여
기서도 제 환공이 맹주가 되어 명실상부한 패자가 되었다. 제 환공 14년(기원전 672년).
陳(진)나라 선공이 태자 어구를 죽이니 陳 厲公 躍(진 여공 약)의 아들로 諡號(시호)가
敬仲(경중)인 陳完(진완)이 제나라로 망명해왔다. 그가 전국시대 초기 제나라를 찬탈한
田成子(전성자)의 전상의 시조다. 제 환공 16년(기원전 670년), 노 장공이 제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했다. 제 환공 22년(기원전 664년), 제나라가 鄣(장)나라를 쳐서 굴복시켰다.
제 환공 27년(기원전659년) 봄 제나라, 송나라, 曹(조)나라, 3개국은 병력을 거느리고 형
나라를 구하려 했으나 이미 북적에게 멸망당한 뒤였다. 북적은 곧 위나라로 쳐들어가 위
나라도 멸망시켜 보렸다. 이에 제 환공은 형나라와 위나라를 재건시켰다.
제 환공 38년(기원전 648년), 주나라 왕자 대가 왕이 될려고 융족을 끌여들여 주나라를
쳤다가 패하자 주 양왕이 왕자 대를 추방하니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에 제 환공이 관중
을 주 양왕과 왕자 대를 중재했다. 제 환공 41년(기원전 645년), 관중이 중병이 들자 제
환공이 그를 문병하면서 물었다. 이에 관중이 인물평을 하였다. 易牙(역아)와 開方(개방),
豎刁(수조) 세 사람은 친애하기 어렵습니다. 관중이 죽자 처음에는 관중의 유언대로 습봉
에게 뒤를 잇게 했으나 그 습봉이 금방 죽고 포숙아가 뒤를 이었다. 제 환공은 얼마 동
안은 관중과의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나 삼인방이 없으니 너무 심심해 간신. 豎貂(수초).
易牙(역아). 開方(개방). 모두를 다시 불러 중용했다. 포숙아가 제 환공에게 간언하나 무
시하자 포숙아는 홧병이 나서 죽는다. 제 환공 43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병이 들
어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5명의 공자가 다투었다. 겨울 10월 7일 제 환공이 죽자 5
명의 공자가 다투어 제나라가 혼란에 빠졌고, 제 환공의 시신이 67일간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제 환공의 시신에 구더기가 들끓었다. 12월 14일 공자 무휴가 제 환공의 장례
를 치렀다. 최초의 패자로써 실로 비참한 최후였다. 환공은 王姬(왕희), 徐姬(서희), 채희
등 세 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모두 아들이 없었다. 또 부인과 같은 예우를 받는 자가 여
섯명이나 있었다. 長衛姬(장위희)는 공자 무궤. 少衛姬(소위희)는 혜공원. 鄭嬉(정희)는 효
공 소. 葛嬴(갈영)은 소공 반. 蜜姬(밀희)는 의공 상인. 宋華子(송화자)는 공자 雍(옹)을
낳았다.
재17대 무휴(BC. ?∼BC. 642) 제 환공의 서장자며, 제 효공, 제 소공, 제 의공의 이복형
어머니는 장위후다. 달리 공자 무궤라고도 한다. 제 환공이 중병이 들자 역아. 수초. 개
방이 반역을 저질러 제 환공을 유폐하니 제 환공은 굶어 죽었다. 그 후 역아와 수초는
무궤를 추대했다. 그런데 공자 소가 송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제 환공의 부탁도 있고 또
패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있던 宋 襄公(송 양공)은 그 일에 개입한다. 공자 무휴 2년(기
원전 642년), 曹(조)나라. 衛(위)나라. 邾(주)나라와 함께 공자 소를 데리고 쳐들어와 수초
는 물론 공자 무휴마저 제거하고 소를 왕위에 세웠다. 공자 소가 제나라의 군주가 되니
그가 제 효공이다.
제18대 효공(BC. ?∼BC. 633) 제 환공의 아들이며, 공자무휴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鄭姬(정희)이다. 그를 제 환공이 宋 襄公(송 양공)에게 맡겼다. 역아와 수초가
무휴를 군주로 올리고 전횡하자 송 양공이 曹(조)나라, 衛(위)나라, 邾(주)나라와 함께 강
소를 데리고 수초와 무휴까지 죽이고 그를 세웠다. 그가 제 효공이다. 제 효공 6년(기원
전 637년), 제 효공은 송나라를 쳐서 민읍을 포위했다. 여름에 晉(진)나라의 공자 희중이
는 호모와 제강의 계략으로 제나라를 떠났다. 이때 송 양공이 1년전 홍수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터져 죽었다. 제 효공 10년(기원전 633년), 제 효공이 여름에 죽었다. 그러자 아
우 강반이 開方(개방)과 함께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뒤를 이으니 그가 제 소공이다.
제19대 소공(BC. ?∼BC. 613) 제 환공의 아들이며, 공자 무휴, 제 효공의 이복 동생이다.
어머니는 葛嬴(갈영)이다. 제 소공 원년(BC. 632년), 그는 晉 文公(진 문공)과 함께 성복
전투에 참여해 초나라를 물리치고 천토에서 제후들과 회맹해 주나라에 입조하니 주 양왕
은 진 문공을 패자로 인정했다. 제 소공 6년(기원전 627년), 적족이 제나라를 침략했다.
제 소공 20년(기원전 613년), 제 소공이 죽자 아들인 강사가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제
소공의 아우인 강상인이 그를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제 의공이다.
제20대 사(BC, 612〜BC, ?) 제 환공의 손자이며, 제 소공의 아들이고 제 의공의 조카
제 소공이 죽자 아들 사가 즉위했다. 제 소공의 아우 강상인은 제 환공 사후 보위를 다
투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해 10월 상인이 무리와 함께 제 소공의 사당으로 가 군
주인 사를 죽인 뒤 대신 즉위했다. 재위 기간은 고작 5개월로 짧았고, 살해당하기까지
해 시호도 받지 못했다.
제21대 의공(BC. ?∼BC. 609) 제 환공의 아들이며, 공자무휴, 제 효공의 이복 동생
어머니는 蜜姬(밀희)이다. 제 의공 4년(기원전 609년), 제 의공이 공자였을 때. 丙戎(병융)
의 아버지 병원과 사냥을 갔다가 사냥감을 가지고 다투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래서 거
기에 한을 품고 군주가 되자 그 복수로 병원에게 그의 발을 자르고 아들 병융을 노비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庸職(용직)의 아내가 아름다워 그녀를 빼앗았다. 병융과 용직이 서로
제 의공을 죽일 뜻을 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 의공이 교만하고 포악했으므로 그를 죽여
대나무 숲에 버렸다. 그리고 위나라에 있던 공자 원 즉 강원이 즉위하니 그가 제 혜공이
다.
제22대 혜공(BC. ?∼BC. 599) 제 환공의 아들이며, 제 경공의 아버지
모친은 위공의 딸로 小衛姬(소위희)다. 혜공은 용직과 丙戎(병융)이 제 의공을 살해 하고
그를 추대해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제 혜공 2년(기원전 607년), 長翟(장적)이 침입했
다. 그것을 왕자 成父(성보)가 쳐서 그 추장을 죽이고 머리를 북문에 매달았다. 제 혜공
7년(기원전 602년), 제나라가 萊(내)나라를 쳤다. 제 혜공 10년(기원전 599), 제 혜공이
죽자 앞서 대부 崔杵(최저)는 혜공의 총애를 입었다. 국씨와 고씨는 최저를 몰아내어 최
저는 衛(위)나라로 갔다. 그리고 아들 강무야가 즉위하니 그가 제 경공이다.
제23대 경공(BC. ?∼BC. 582) 제 혜공의 아들이며, 제 영공의 아버지
제 경공 6년(BC. 593년), 晉 景公(진 경공)이 대부 郤克(극극)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
는데 제 경공의 어머니인 蕭(소) 태부인(선군인 혜공의 부인)이 곱사등이인 극극을 보고
는 비웃었다. 이에 극극은 대로하였고 진나라로 돌아가 임금에게 제나라를 쳐줄 것을 청
하였지만 시기가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한다. 제 경공 8년(기원전 591년), 晉(진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는 패배하여 공자 强(강)을 볼모로 보내 진나라는 물러났
다. 제 경공 17년(기원전 582년), 제 경공이 죽고 그 아들인 환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
가 제 영공이다.
제24대 영공(BC. ?∼BC. 554) 제 경공의 아들이며, 제 장공의 아버지
제 영공 4년(기원전 578년), 진 여공은 秦(진)나라를 쳤다. 제 영공 9년(기원전 573년),
진나라 대부 난서(난서)가 진 여공을 시해하고 공손 주를 올리니 그가 바로 진 도공이다.
이때 제 영공은 崔杼(최저)와 함께 허정 땅에서 회맹했다. 제 영공 10년(기원전 572년),
晉 悼公(진 도공)이 송나라의 팽성을 칠 때 제나라가 오지 않자 진 도공이 제나라를 치
니 제 영공은 태자 광을 진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제 영공 24년(기원전 558년,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쳐다. 영공 27년(기원전 555년), 진나라가 荀林父(순림보)의 손자인 中行獻子
荀偃(중행헌자 순언)을 시켜 제나라를 쳤다. 제나라 군사가 무너지자 제 영공이 臨菑(임
치)로 달아났다. 제 장공 28년(기원전 554년), 노나라의 공여를 아내로 맞아 낳은 아들
광을 태자로 삼았다. 이후 제 영공은 仲姬(중희)와 戎姬(융희)를 곁에 두었다. 특히 융희
가 제 영공의 총애를 입었다. 중희가 공자 아를 낳자 그를 융희에게 맡긴 이유다. 융희
가 아를 태자로 삼기를 청하였다. 중희가 반대했다. 태자 광을 동쪽 변경으로 보내고 高
厚(고후)를 태자 아의 사부로 삼았다. 제 영공의 병이 위중해지자 崔杼(최저)가 원래의
태자 광을 맞이해 옹립했다. 그가 제 장공이다. 제 장공이 융희를 죽였다.
제25대 장공(BC. ?∼BC. 548) 제 영공의 아들이며, 제 경공의 형
장공 2년(기원전 552년), 중희의 아들 아를 句竇(구두)의 언덕에서 붙잡아 죽였다. 제 장
공 3년(기원전 551년), 晉(진) 대부 난씨 가문의 당주 欒盈(란영)이 제나라로 망명했다.
그러자 대신 앙영과 전문자가 거절하라 했으나 듣지 않았다. 제 장공 4년(기원전 550년),
장공은 난영을 진(진)나라의 곡옥에 잠입시켜 내응하게 했다. 그리고 대군을 거느리고
太行山(태항산)을 넘어 맹문관에 이르렀으나 난영은 패했고, 제군은 돌아가다가 晉(진)나
라의 朝歌(조가)를 먹었다. 제 장공 6년(기원전 548년), 옛날에 제나라 대부 棠公(당공)이
죽자 그 아내인 동곽강이 아름다워 최저가 차지했다. 그런데 제 장공이 최저의 아내가
된 그녀와 사통했는데, 이때 환관 가거에게 채찍질을 한 일이 있었다. 최저와 경봉은 그
를 이용해 제 장공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이해 5월 제 장공이 거나라의 군주인 莒子(거
자)가 제나라에 입조하자 제 장공은 잔치를 열었다. 최저는 병을 핑계 삼아 직무를 돌보
지 않았다. 이에 제 장공이 최저의 집에 갔으나 가거가 부하를 거느리고 그를 포위했다.
그래서 제 장공이 달아나다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담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리고
최저가 제 장공의 이복 동생인 강저구에게 뒤를 잇도록 하니 그가 제 경공이다.
제26대 경공(BC. ?∼BC. 490) 제 영공의 아들이며, 제 장공의 동생이다.
경공 원년(기원전 547년), 경공이 최저를 우상. 경봉을 좌상에 임명했다. 이때 경봉은
안영이 차후에 걸림돌이 될것이라 여겨 최저에게 안영을 죽이자고 했으나 안영의 명망
을 두려워 한 최저는 감히 실행하지 못한다. 대신 최저는 자신이 제 장공을 시해한 일을
기록한 太史(태사) 즉 사관을 죽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태사의 동생이 형과 마찬가지
로 사실을 기록하자 그도 죽여 버렸다. 그런데 자리를 물러 받은 작은 동생이 또 같은
행동을 반복하니 결국 이들 형제의 의지에 질린 최저는 그를 그냥 내버려 둔다. 최저는
후처인 동곽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최명을 낳았는데, 이미 전처에게서 최저는 아들 崔成
(최성), 崔疆(최강)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따운 동곽녀에게 마음이 끌린데
다 적장자 최성에게 장애가 있었기에 그를 빌미로 최명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이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챈 최성이 스스로 崔邑(최읍)을 떼어 주신다면 자리에서 물러나 그
곳에서 조용히 남은 세월을 보내겠노라 청한다. 하지만 동곽녀의 오빠인 동곽언과 최명
의 형 당무지가 최읍은 최씨의 宗邑(종읍, 조상의 사당이 있는 고을)이니 응당 종주가
될 자가 물려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반대해 결국 후계자 자리만 뺏긴 채 아무 것도 얻
지 못한다. 당연히 최성과 최강은 분개했고 아버지의 동료이자 세력가인 경봉을 만나 조
언을 구한다. 경봉은 최성, 최강을 부추켜 형제는 무리를 이끌고 본가로 쳐들어가 단무
지(최명의 형)전 남편의 아들 棠無咎(당무구)와 그녀의 동생 東郭偃(동곽언)을 최저의 가
신이 되게했다. 최성이 죄를 범하자 가신은 그 죄를 묻고, 최명을 嗣子(사자)로 세웠다.
이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챈 최성이 스스로 崔邑(최읍)을 떼어주신다면 자리에서 물러
나 그곳에서 살겠다고 청한다. 그렇게는 되지 못했다. 당연히 최성과 최강은 분노했고,
아버지의 동료이자 세력가인 경봉에게 조언을 구한다. 경봉은 최성. 최강을 부추켜 형제
는 무리를 이끌고 본가로 쳐들어가 단무지(최명의 형)와 동곽언(동곽녀의 오빠)을 살해한
다. 인심을 잃은 최저에게 아무도 따르지 않자 경봉에게 도움을 청한다. 경봉은 측근인
盧蒲嫳(노포별)을 시켜 최저의 집을 쳐 최성. 최강은 물론 최씨 일족이 모조리 도륙을
당한다. 최저의 부인은 자진했다. 경봉에게 대접을 받다가 뒤늦게 집에 도착해 그 참상
을 본 최저는 경봉에게 속았음을 깨닫고 비통과 분노,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다. 그리하여 경봉이 권력을 독점한다. 하지만 경봉도 권력을 오래 유지 하지 못했다.
제 경공 2년(기원전 546년), 경봉이 사냥을 나갈 때 공손만이 陳無宇(진무우)와 함께 경
봉의 일가를 살해하려 하였다. 이때 경봉의 아들 慶舍(경사)가 전권을 잡은 틈을 타 진무
우가 경사를 죽여 버렸다. 이에 경봉은 위기에 빠졌다. 바로 이 때를 노리고 鮑氏(포씨).
高氏(고씨). 欒氏(란씨) 등이 가세하니 경봉은 결국 노나라로 달아났다. 그러나 제나라의
실권자들이 노나라를 압박하니 노나라가 경봉을 축출했다. 그리하여 오나라로 달아났다.
거기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초 영왕이 아우인 웅기질을 보내 경봉을 살해했다. 그리고
안영이 경봉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제 경공 9년(기원전 539년), 제 경공은 晏嬰(안
영)을 晉(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안영이 叔向(숙향)에게 실권이 전씨에게 넘어갈
것이라 했다. 제 경공 16년(기원전 532년), 전무후는 포견과 함께 난시와 고강을 치니 그
들은 달아났고, 전씨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제 경공 55년(기원전 493년), 범씨와 중항씨
가 반란을 일으키자 전무우의 아들 전걸(田乞)이 이를 구하라고 해 제 경공이 이들을 도
왔으나 이기지 못했다. 제 경공 58년(기원전 490년), 제 경공의 부인인 燕姬(연희) 소생
의 적자가 죽었다. 제 경공의 애첩 芮姬(예희)의 아들 도를 세우려 했으나 말하지 않았
다가 병이 들어 國惠子(국혜자)와 高昭子(고소자)에게 말해 도를 태자로 세웠다. 9월 제
경공은 죽었고 그해 태자 도의 이복형들이 위나라와 노나라로 달아났다. 그리고 태자 도
가 그 뒤를 이어 안유자가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전걸과 鮑牧(포목)이 정변을 일으켜 국
혜자와 고소자를 죽여 권력투쟁에 승리하여 안유자를 폐위 시키고, 공자 양생이 즉위하
니 그가 제 도공이다.
제27대 안유자(BC. ?∼BC. 489) 제 경공의 아들이며, 제 도공의 이복 동생 예희의 아들
제 경공의 유언으로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진걸과 鮑牧(포목)이 정변을 일으
켜 국혜자와 고소자를 죽여 정권을 잡고 안유자의 아머니인 예희를 쫓아냈으며 안유자
를 폐위시켜 駘(태)라는 곳으로 옮기게 했으나 가는 도중에 암살당했다.
제28대 도공(BC. ?∼BC. 485) 제 경공의 아들이며, 제 간공의 아버지이다.
그는 전걸과 포목 그리고 그를 따르는 대부들에 의해 즉위해 권력이 불안했고 결국 목
숨마저 잃었다. 제 도공 4년(BC. 485년), 오나라와 노나라가 제나라 남쪽을 공격했다.
그리고 같은해 평소에 제 도공과 사이가 나쁜 제나라의 대부 鮑牧(포목)이 제 도공을 죽
여 버렸다. 전걸의 아들 田常(전상)이 제도공의 아들 강임에게 뒤를 잇게 하였다. 그가
제 간공이다.
제29대 간공(BC. ?∼BC. 481) 제 도공의 아들이며, 제 평공의 형
제 도공이 포목에게 죽은 뒤 그 뒤를 이었다. 이 때 전상과 闞止(감지)가 실권을 쥐었다.
이때 어자 田鞅(전앙)이 둘 중 하나만 기용하라 했는데 듣지 않았다. 제 간공 4년(기원전
481년), 감지가 전씨 일가의 전역을 죽이자 그 사실이 전상에게 알려졌다. 같은 해 5월
에 전씨가 선수를 치니 감지가 그것을 막으려 했으나 패배하여 달아나다가 전씨에게 죽
음을 당했다. 제 간공은 徐州(서주)로 달아났고, 거기서 전상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제
간공이 탄식했다. “과인이 진작 전앙의 말을 쫓았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
다” 제 강공의 동생 오를 옹립했다. 그가 제 평공이다.
제30대 평공(BC. ?∼BC. 456) 제 도공의 아들이며, 간공의 동생이고 제 선공의 아버지다.
田常(전상)이 그를 제나라의 군주로 추대했고, 감지 또한 죽었으므로 제나라의 실권은 그
가 쥐게 되었다. 제 평공은 전상을 상국으로 봉했다. 이때 전상은 제후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노나라와 衛(위)나라에게 땅을 돌려주고, 晉(진)나라의 3경인 魏氏(위씨), 韓氏(한씨),
趙氏(조씨)와 친하게 지내며 오나라와 월나라하고도 화친했다. 그리고 安平(안평) 땅을 식
읍으로 삼아 그 위세가 제 평공을 눌렀다. 제 평공 25년(기원전 456년), 제 평공이 죽으
니 그 뒤는 아들인 강적이 이었다. 그가 제 선공이다.
제31대 선공(BC. ?∼BC. 405) 제 평공의 아들이며, 제 강공의 아버지다.
이 때쯤 전씨가 전권을 완전히 장악해 제나라 군주는 명맥만 유지하는 단계로 떨어진다.
이때 전상의 뒤를 이어 전화가 뒤를 잇는다. 만약 제 선공 대에 업적이 있다면 전화가
한일이다. 제 선공 3년(기원전 453년), 晉(진)나라의 조씨, 한씨, 위씨는 지백의 일족을
족을 멸해 진나라를 사실상 3개로 나누었다. 제 선공 15년(기원전 441년) 전상이 죽고
田和(전화)가 뒤를 이었다. 제 선공 43년(BC. 413년), 晉(진)나라를 쳐서 황성을 차지하
고 양호를 포위했다. 제 선공 48년(기원전 408년), 노나라의 郕邑(성읍)을 차지했다. 제
선공 51년(BC. 405년), 제 선공이 죽고 그 아들 강대가 뒤를 이으니 제 강공이다.
제32대 강공(BC. ?∼BC. 379) 강성 제나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제 선공의 아들
강공 원년(기원전 404년), 삼진이 제나라의 장성을 쳤다. 제나라의 장성은 서쪽에는 방문
(현재의 산동성 비성),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그 장성은 산맥을 따라 지어졌다. 전
화가 그를 즉위시키고 폐위했다. 그는 쫓겨난 뒤 식읍을 통해서 연명했지만 결국은 늙어
서 자식도 없이 죽어 강상의 제나라는 멸망하고 만다. 제 강공 2년(기원전 403년) 韓氏
(한씨), 趙氏(조씨), 魏氏(위씨)가 周 威烈王(주 위열왕)의 명령으로 제후가 되어서 진나
라는 曲沃(곡옥)과 絳(강)만 남았고 결국은 작은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이때 제 강공이
그것을 지켜 보았다. 제 강공 19년(BC. 391년), 제 강공은 전화에 의해 축출당해서 섬에
유배되고 식읍은 1개 성이었다. 그리고 전화가 제나라의 군주를 칭하니 그가 제 태공이
다. 제 강공 26년(기원전 379년), 그는 晉(진)나라 군주와는 달리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姜齊(강제)는 망했다.
수도 변천
太公望(태공망) 呂尙(여상) 營丘(영구) 山西省 淄博 臨淄(산서성 치박 임치)
胡公(호공) 靜(정) 博姑(박고) 山西省 博興縣(산서성 박흥현)
獻公(헌공) 山(산) 영구(臨淄, 임치로 고쳤다.) 山東省 臨淄(산동성 임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