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시각장애 딛고 중국 역사서 출간한 강용봉 씨
- “7년 동안 중국 역사서 수십 권을 점자로 바꿔 손으로 읽었습니다”
역사소설이란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에 작가의 의도나 상상이 가미된 허구의 문학이다. 시각장애인 강용봉 씨는 중국 명나라 소설가 풍몽룡이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쓴 ‘동주 열국지’를 읽으면서 사실 여부를 검증하고 싶었다. 그 시간이 무려 7년.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 중국 역사 원서 수십 권을 점자로 바꿔 읽어가며 ‘열국지’와 비교했고, 그 결과 지난 4월 말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를 펴냈다.
Q.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감사합니다. ‘다른 눈으로 본 열국지’는 중국 명나라의 작가 풍몽룡이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 ‘동주 열국지’를 여러 역사서와 비교하면서 사실 여부를 검증한 책입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다이내믹한 시대를 그리는 데다 재미와 교양이 있어 동양 고전의 정수로도 꼽힙니다. 이 책을 출간한 것은 오래도록 열국지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지요. 저는 부산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 회원으로 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한국정보화진흥원 웹 접근성 품질마크 인증위원, 재단법인 2015 세계시각장애인경기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차장 등 그간 사회복지 행정가로 일해 왔습니다.
Q. 어떻게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나요.
A. 예전부터 중국 문학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동주 열국지’는 20여 번 넘게 읽었을 만큼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어요.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 안에는 허구적인 부분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논어 등 다른 책을 읽으면서 열국지와의 차이점을 발견했고, 처음에는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간략하게 메모를 해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쌓아둔 메모를 보관만 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간적 여유가 있어 ‘동주 열국지’ 속에서 사실만 분류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와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 수십 권의 중국 역사 원서도 읽었지요.
Q. 중국어나 중국 문학을 전공하진 않으셨다고요.
A.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전공했기에 평소 독서와 글쓰기를 가까이했지요. 이후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행정도 익혔습니다. 저는 선천성 시각장애인이기에 많은 배려를 받고 자랐지만 신체적 한계에서 오는 답답함은 해결하기 어려웠지요. 부산맹학교에 입학하면서 저와 같은 시각장애 친구들을 만났고, 그 안에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고전을 가까이 하고 사회복지 행정을 배운 것도 그때의 경험에서 온 것입니다. 더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사회와 정책을 구상하고 싶었거든요. 지금도 부산시각장애인복지연합회와 협력하는 복지재단이나 센터와 미팅을 갖는 등 시각장애인 재활 및 인식개선에 힘쓰고 있습니다.
Q. 이번 책 출간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얻으신 것 같습니다.
A.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장애인 인식개선의 일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작은 한 개인의 소소한 취미에 불과했지만, 자료를 찾고 조사하고 집필하는 과정 자체가 엄청난 도전이었거든요. 중국 문학과 역사를 좋아하던 한 시각장애인이 이렇게 책을 출간했다는 것…. 어떠한 분야에서도 노력하면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희망으로 남길 바랍니다.
Q.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가장 힘들었던 건 제가 읽을 수 있는 형태의 중국 역사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었어요. 서점에 가면 맹자, 한비자, 장자 등 각종 참고할 만한 콘텐츠를 번역별로, 출판사별로 고려하면서 찾아볼 수 있지만,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형태’라는 전제가 붙으니 자료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더군요. 필요로 하는 도서가 전문 서적이다 보니 점자책이나 음성도서를 구하는 일이 힘들었어요. 책을 쓰면서도 시각 자료가 아닌 촉독 가능한 도서로의 제작, 점자 단말기로 출력되지 않는 한자 해독 문제의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특히 자원봉사자들께서 2년간 텍스트를 타이핑해 제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번안해주셨어요. 교열 작업도 거들어주셨고요. 이 자리를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Q. 고전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A. ‘동주 열국지’를 포함한 중국의 고전은 권선징악적 스토리가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 뜻을 펼치고자 한 군상들을 다루고 있죠.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는 인물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여러 인간상을 조망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을 때만큼은 드넓은 땅을 누비며 말을 달리는 듯한 호쾌함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어요. 난세에 순응하기보다 자신만의 뜻을 세우고 나아가는 서사 구조가 매력 포인트지요.
Q. 대장정이 완료되었는데, 추후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요.
A. 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워낙 작업이 고되었던지라 당분간은 쉴 생각입니다. 하지만 책을 집필하는 것, 까마득한 과거의 사료 속에서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사실을 분류하는 작업은 큰 만족감과 성취감을 주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협력해 큰 결실을 이루어냈다는 점 또한 기쁩니다. 향후에도 장애·비장애인이 협업하는 일이 많이 생기면 좋겠어요. 이 책을 중국어로도 번역해 출판할 계획인데요, 만일 중국 독자들과 만난다면 제게 또 다른 도전이자 새로운 활력이 될 것 같아요. 책을 출간한 것만으로도 많은 시각장애인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장애가 있다고 해서 결코 삶이 어두워지는 게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자 노력할 겁니다.
김수정·신혜령 기자
* <손끝으로 읽는 국정> 제176호에서 발췌